뉴스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무척이나 개인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편인 내가, 과연 이 세상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이 될 만큼이나 절망적인 일들 투성이다. 도대체 우리만 그런 건지 내가 모르는 다른 나라들도 다 그런 건지, 초등학생처럼 순진한 궁금증이 일기도 했었다. 지난 여름 장님 코끼리 만지듯 세계체제론 강의를 들으며 조금은 위안을 받기는 했다. 내 삶이 온전히 얹혀진 이 체제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당위적인 모순의 정점에 와있구나. 그렇다면 과연, 이 체제는 얼마나 탄탄하고도 무서운 것인가. 이 정도면 망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너무 깊숙하게 세계는 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되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좀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도대체 뭐지? 쉽게 지치고 무기력에 빠지는 나는, 없다. 라고 단언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교조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뒤에는 이미 두 세기 전의 사람이 되어버린 덥수룩한 수염의 할아버지, 마르크스가 있었다.
사실 나는 마르크스를 모른다. 제목으로만 너무나 친숙한 '자본론'은 책장 한 번 들춰본 일이 없고, 그나마 두께가 얄팍하다는 '공산당 선언'도 읽은 일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좋은 사람 같은 느낌. '잠들지 못하는 희망'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트리어의 마르크스 생가를 찾은 저자는 이 할아버지가 누구냐는 물음에,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세상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던 위인"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는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을 차용해 "아들아, 마르크스를 알 때까지 자라라."라고 중얼거린다. 그에게 있어 마르크스와 사랑은 동의어라며.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 전에 어렴풋하게 마음 속에 있었던 마르크스는 나에게도 일종의 '사랑'이 되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세계이긴 하지만 끝내 버릴 수는 없는 양심이라는 게 내 가슴 한 구석에서 반짝이고 있는 한, 앞으로도 마르크스는 내게 사랑 비슷한 것의 동의어로 자리잡고 있을 것 같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처럼. 희망이 늘 가능성과 함께 걷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저 마음 속의 작은 불이 잠들지 않을 정도로만 깜빡여준다면 살 만한 거라는 생각과 함께. 몇 년이 지나 나도 트리어의 그 곳에 갔었다. 그리고 마치 아는 사람인 양 반가운 마음으로 나는 그 집의 곳곳을 어슬렁거렸다. 내가 조금 큰(?)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착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역사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쩌면 당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조금 고맙고 송구했던 것 같다.
하워드 진은 단 한 권의 책으로 참 좋아져버린 할아버지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말을 자신의 삶에 당당히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책을 읽고 난 반해버렸었다. 이런 사람이 있구나, 멋지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적지 않은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마르크스에게 정신을 빚지고 있는 것 같다. 하워드 진이 뉴욕의 소호로 불러들인 마르크스, 정말 쉽고 짧지만 정말 지당하고 온당하고 마땅한 이야기들 투성이다. 나같은 독자를 위해 작가는 마르크스를 친근하게 소개하고 싶었나보다. 두껍고 어렵고 불만투성이인 책을 써댔던, 박제가 되어버린 옛 사람이 아니라고. 그가 분석한 상황들은 단지 현상만 조금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모든 예측이 온전히 다 맞아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가 신이 아닌 이상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심지어, 마르크스를 대신해 고백을 한다. '자본주의가 옹케 살아남는 재간이 있다는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한 사람에게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모두 맡길 수는 없는 법. 이만한 분석틀을 남겨줬으면 좀더 살 만하게 다듬고 고쳐가는 일은 후대의 몫인 게 분명할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껍데기만 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돈이라는 허상을 좇아 그 껍데기마저 지키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마르크스의 입을 빌어 저자는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대체 왜 안 되는 걸까.
길거리 독서의 나쁜 점은, 메모하거나 밑줄 그을 수 없다는 거다. 메모하거나 밑줄 긋지 않고도 행간의 느낌이나 감흥을 기억할 만큼 명석하지도 못한 나에게는 더욱 불리하다. 뭔가 책을 날리는 것 같은 느낌. 행간 곳곳에 예리한 유머가 번득거려 자주 킥킥대며 읽기는 했지만, 정말정말~ 하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전부 그저 흘러버리는 것도 같아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은, 이 책의 가격. 이 작고 얇은 책이 9,800원이라는 거금의 액면가를 붙이고 나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망자의 불시착을 위한 왕복 노자라고 생각하려해도 영 마땅치 않다. 인터넷 서점의 난립(?)으로 책값의 거품이 이미 상당히 붙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좀 너무 했다 싶다. 재림한 마르크스도 그를 불러들인 하워드 진도, 물신화된 자본주의의 제왕을 따라잡기에는 내공이 좀 모자라는 모양이다. 우리더러 좀 더 분발하라는 걸까.
2005-09-21 01:14,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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