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2:45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어버린 예전에,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날 저녁이었다. 오빠 친구가 이사를 가며 줬다는 새끼고양이. 새끼고양이라는 것이 준다고 넙죽 받아올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4학년인 오빠도 알고 있었는지, 저녁을 먹고 있는 밥상 위에서 조심조심 이야기를 꺼냈고 반신반의하는 할머니와 엄마 앞으로 주섬주섬 내민 오빠의 손에는 정말 새끼고양이가 있었다. 우리만큼이나 어린 그 고양이는 홀로 감당해야 하는 낯선 환경이 당황스러웠는지 내내 밥상 밑을 파고들며 냐옹거렸고, 동물이라고는 가까이해 본 적 없는 나는 혹여나 그 고양이가 내 발치에 올까 싶어 동동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상 앞에서 불안해했었다. 하지만 고양이가 차지한 거실을 지나 화장실에 가는 일조차도 막막하기만 했던 그 첫날 밤 이후로, '나비'라 이름 붙여진 그 새끼고양이는 나의 고양이가 되었고 나의 동생이 되었다. 1년 쯤 나와 같이 살았던 그 고양이를 오빠와 나는 서툰 손길로나마 정말 사랑했다. 안고 업고 토닥이는 우리의 손길에 대한 나비의 화답은 주로 할큄과 상처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 인생에 유일했던 애완동물인 나비 덕분에 나는 개보다는 고양이 쪽에 손을 드는 부류가 되었다. 
 

책을 펼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시인과촌장의 노래 '고양이'(물론 한편에서는 대상이 고양이가 아니라 다른 어떤 부류라는 설도 있지만)였다. 그대는 정말 아름답군 고양이 빛나는 두 눈이며 새하얗게 세운 수염도~ 그대는 정말 보드랍군 고양이 창틀 위로 오르내릴 때도 아무런 소릴 내지 않는~ 의인화를 넘어 저자에 의해 인간 이상으로 거듭난 고양이 나옹, 대상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의지의 깊이를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제일 좋은 것도 사람이지만 때로 제일 무서운 것도 사람인 세상에서, 사람 이상의 그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위로이고 감사다. 예전에 내가 택했던 것은 노래와 책, 그리고 사람이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마음 속에 또는 곁에 있으면서도 변치 않고 기복이 심한 나를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대상들. 관계에 지치고 사람이 부담스러웠던 그 시절에는, 적어도 '변치 않는'다는 사실에 내 마음 모두를 안심하고 맡긴 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내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림이 남겨준 여백은 예전 생각들로 채우며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녀가 부러워졌다. 숨 붙은 대상을 향한 그녀의 하염없는 사랑과 그를 향해 해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식이 아니고서야, 사람인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간곡한 마음을 바칠 수 있을까. 무방비상태인 채로 그녀의 사랑을 받고 그녀로 하여금 일하고 살아가고 꿈꾸게 만드는 나옹과, 극진히 정성을 다해 사랑할 줄 아는 그녀의 마음과 그만큼 표현할 줄 아는 재주가 참 부럽다. 


2005-08-26 03:22, 알라딘



TOCATS(고양이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 테마에세이 > 포토에세이
지은이 권윤주 (바다출판사, 2005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0) 2011.05.15
부담없는 만남, 마르크스의 재림  (0) 2011.05.15
조금은 피곤한 여행.  (0) 2011.05.15
좋아 좋아  (0) 2011.05.15
마이너리티 카리스마에 박수를  (0) 2011.05.15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