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는 수업 관련해서,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내 사고 영역의 단 1%도 차지한 적이 없었던 '군대'에 관한 이슈들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 그저 '군대'라고 했을 때는 남자들이 가는, 고로 나는 해당 없는. 정도에서 생각이 그쳤었는데, 혹여나 그와 직접 관련된 일들이 있었나... 고민하다보니 의외로 초등학교 시절 때가 되면 날렸던 위문편지에서부터, 고등학교 시절 자매부대 방문과 2박 3일간의 내무반 생활 및 군사훈련(?, 그래도 로프도 타고 총도 쐈다), 대학시절 거리에서 자주 마주치고 한 번은 혹독하게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던 전의경들까지, 나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지난 학기에 군사주의와 한국사회 수업을 들을 때는 한 학기가 인분사건으로 시작해 김일병 총기 난사사건으로 마무리됐었고, 한 학기 내내 군대와 군사주의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를 찾아읽다보니 새삼 일상에 착 달라붙어있는 군사주의와 은연중에 내면화된 내 속의 군사문화에 대해서도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우리 아이들이 주로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은 온통 무기류였고, 지난 한 때 온국민이 열광했던 월드컵 대표선수들은 태극'전사'였었네. 그러다보니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있었던 어느 날에는, 매스컴 구석구석 만연해있는 군사용어의 일상화가 놀랍도록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에도 그것이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이고도 개별적인 군사주의의 침투는 참으로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것이구나 싶었다. 아무리 전국민동원을 통해 진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한 남북한 대치 국면의 국민개병제 사회라지만, 어느 연구자의 말마따나 생활 속에 혈관처럼 자리잡고 있는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어찌 이리도 없었을까 신기할 지경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낯선 것인지, 새삼 문제로 삼기에는 낯선 생각이 들만큼 이미 익숙해버린 건지, 혹은 둘 다 아니건 맞건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이미 그 속에 잠식되어버린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선택'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 가끔씩 언론이나 자료를 통해서 접했던 권인숙씨의 새 책이 대답을 주는 느낌이었다. 일상에 스며들어있는 군사주의와 남성성에 대해 여성학적 시각의 분석을 해놓은 이 책의 이야기들은, 정신 없는 지하철 독서에도 이해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만큼 쉽다. 논의의 수준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이나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와 남성주의가 만연해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책의 내용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를 조망하고 분석한 국가주의적 평화와 군사화(1장)과 징병제와 젠더(4장) 부분은 이런 저런 자료에서 산발적으로 접하면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우리 현대사의 한 측면이 일관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군사화와 성별화(2장), 한 여성 활동가 이야기(3장) 부분은 저자의 직접 경험과 동세대의 현재적 증언(?)이 생동감 있게 살아있어 특히 흥미 있었는데, 인터뷰에 등장하는 그 시절 여성들이 가졌던 군사주의와 남성성(혹은 성별화 혹은 가부장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 나의 인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발견이 새로웠다. 특별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가서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 가득한 그러한 사고들은 자연스럽고도 당위적인 분위기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과 남성성이라는 주제를 다뤘는데, 정말 미안하지만... 읽으면서 내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미지는, 두꺼운 뿔테 안경의 창백한 얼굴과 푸른 수의를 걸친 십수 년 전의 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피해자였던 저자가, 물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인 남성들과 대면하며 인터뷰를 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경이로울 만큼의 용기와 자기극복으로 여겨졌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공론화되었지만 한 개인에게 남았을 내밀한 상처의 크기는 가히 짐작할 수 없는 터, 아무리 연구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상처와 직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용서보다 더 힘든 일은 똑바로 마주하고 분석하는 일이 아닐까.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녀의 연구에 진심의 박수를 보낸다.
2005-10-06 00:49,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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