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무리하지만 며칠간의 여행에 이어 부산영화여행을 결정한 이유는 [듄]의 아이맥스 재상영 때문이었다. 통영과 부산에서 한 번씩 보면서 나도 SF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그러나 SF고 뭐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는 티모시 샬라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듄]을 아이맥스로 볼 수 있다니. 그러나 얼마 후 무려 비틀즈의 마지막 루프탑 라이브 다큐가 단 3일만 아이맥스로 상영된다는 낭보를 접했다. 지난해 북펀딩 소식에 반색하고 몇 달을 기다려 얼마 전 당도한 [비틀즈: 겟 백] 책을 이따금 넘겨보던 중이었고, 수많은 마니아에 비하면 소소하기 그지없지만 나 역시 그들을 많이 좋아하므로 참으로 아름다운 콜라보 일정이 되었다. "Don't let me down" 라이브를 유튜브로 몇 번씩 돌려보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야말로 기뻤다.
일요일 4시에는 IBK기업은행알토스와 현대건설의 배구 경기가 있으므로, 비틀즈 다큐를 본 후 숙소에서 배구를 보고 나와 [온 세상이 하얗다]와 [원 세컨드]를 보고, 다음 날의 메인은 [듄]이지만 오후 3시대이므로 그 앞에는 시간 맞는 영화를 무료쿠폰으로 보는 것으로 적당한 일정이 짜여졌다. 하지만 코로나19로 V리그 여자부 경기가 중단되었고, 몇 시간을 숙소에서 때우는 게 아깝기도 해서 일반관 무료쿠폰으로 [나의 촛불]을 추가로 예매했다. 오전에 집을 떠나 거가대교를 통해 도착한 부산은 드라이브 코스로 참 좋았다. 함께한 여행의 여운을 나누며 부산에 당도해 A와 B와 차례로 헤어져 서면에 도착, 날은 많이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여수와 통영의 바닷가와 섬에서 느꼈던 해방감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도심은 또 그 나름대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영화관이 있기 때문이다.
첫 영화 [비틀즈 겟 백: 루프탑 콘서트]를 객석에 앉아 기다릴 때는 그야말로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아주 어릴 때 63빌딩 어딘가에서 아이맥스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영화였는지 그냥 어떤 영상이었는지도 가물하고 뭔가 압도하는 자연이 내게 쏟아질 것 같았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이후 수십 년간 아이맥스를 경험한 적이 없는데, 그 처음이 비틀즈의 마지막 라이브라니 감읍할 일이다. 노래 한 곡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는데, 영화가 끝나자 마찬가지였는지 박수를 치는 이들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소리를 보태며 괜히 막 벅찼다. 기대했던 만큼의 엄청난 박진감이나 웅장한 사운드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반 세기 전의 비디오와 사운드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만방자한 감상일 테고, 다양한 화면 분할 편집이 반복되어서 작은 화면에서 봤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기는 했다. 길게 선 줄에 합류해 A3 포스터와 아이맥스 스탬프까지 찍으며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고 영화관을 나왔다.
숙소에 들러 잠시 숨을 돌리고 세 편의 영화가 줄줄이 기다리는 영화관으로, 2박 3일의 여행 끝이어서 약간 불안은 했지만 적당한 러닝타임의 영화들이었고 보면서 피곤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혀 예정에 없었던 [나의 촛불]은 쏘쏘했고, 강길우 배우의 출연 말고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던 [온 세상이 하얗다]는 의외로 흥미롭고 인상적이어서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원 세컨드]는 설을 맞아 올라갔을 때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두 영화는 art2관이어서 쾌적하고 편안했고 꽤 늦은 시각 프런트 불빛이 꺼진 고요한 영화관을 나서는 것도, 걸어서 5분이 채 안 되는 숙소까지 가는 길도 모처럼의 흔쾌한 도심 체감이었다(고 썼지만 불과 열흘 남짓 만이다).
부산영화여행의 숙소에서는 주로 지난 <방구석 1열> 방송을 보는데, 얼마 전 새로운 시즌의 공동진행자로 새로 영입된 인물에 대한 기사를 보고 몹시 낭패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실제로는 일면식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언행과 이미지로 판단하고 싫어하는 일이 부당하거나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tv를 연결하지 않고 지내는 이유 중 큰 부분이 무심코 틀어놨다가 무방비상태로 '싫은 연예인들'을 목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난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고 흐린 눈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버스럽거나 요란하거나 저열하거나 등등의 매우 싫어하는 특징을 보유한 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궁금해도 아예 안 보게 된 지 오래다. 한 달에 한 번 두어 편이 전부였지만 이제 <방구석 1열>마저 끊어야 하나 싶어 괜히 억울하고(?), 그래서 일요일 밤과 월요일 오전 몇 편을 몰아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 날 첫 영화는 봐도 안 봐도 그만이었지만 체크아웃하고 3시까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선택했고, [신과 함께] 시리즈의 첫 편을 보았지만 큰 감흥이 없었던 데다 대만판은 대놓고 이십대 이하를 겨냥한 듯한 구성과 연출이었기 때문에 정말 킬링타임 영화가 되었다. 대망의 [듄] 아이맥스 체험은 나오기만 해도 재미있는 티모시 샬라메의 존재감과 스케일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정체감이 묘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모양새였고, 덕분에 뭔가 0에 수렴하는 쏘쏘의 결과에 이르고 말았다. 기존 아이맥스 개봉 때 간접적으로 접한 반응들을 생각하면, 서면 아이맥스관의 좌석 단차는 의외로 낮아 앞 사람의 머리가 화면을 가리기도 했기 때문에 용산과 서면의 물리적 차이인가 싶기도 했지만, 용산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비교할 방법이 없다.
그러하였으나, 이번 부산은 [비틀즈 겟 백: 루프탑 콘서트]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온 세상이 하얗다]가 좋았기 때문에 의외로 무감했던 아이맥스 [듄]에는 연연하지 않으며 통영으로 돌아왔다. 집을 비울 때 늘 그렇듯이 각종 쓰레기들은 정리했지만 오전에 함께 나서느라 두 손님이 개어둔 침구류는 방에 그대로여서, 이제 치울 일만 남았구나 싶어 마음이 귀찮으면서도 시원해졌다. 누군가 와도 좋지만 가도 참 좋은, 나만이 아니라 혼자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느끼는 심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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