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2. 2. 16. 09:55

 


많이 묽어졌지만 2007년 이후로 십 년 넘게 2월 11을 맞는 마음은 여느 날과 달랐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2007년 2월 11일 새벽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에서 불이 났고 수용된 열 사람이 목숨을 잃고 스무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다.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사흘 뒤 '북핵 타결'이라는 어마어마한 뉴스에 묻혀버렸고, 엑스포 실사단의 방문을 앞둔 4월 초에 장례가 치러졌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한족과 중국동포였고 사망자 중에는 임금체불로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우즈베키스탄인도 한 분 계셨다. 이주단체에서 일한 지 석 달쯤이던 당시 여수에서 한 달 반 정도를 지내며 난생처음 어떤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고, 장례가 끝난 뒤 무력감과 회의감에 젖어 일상으로 돌아왔다.

 

담담하게 회고하기에는 이후의 크고작은 일들과 마음속 부침이 간단치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몇 년 후 이주단체를 떠났으니 말할 계제가 못된다. '여수'와 관련된 여러 기억은 2월 11일 즈음이 되면 복잡한 부채감과 함께 다시 떠오르곤 했지만 5년 전 10주기에 오랜만에 내려가는 것으로 얄팍하게 상쇄하며 마음으로 안녕-을 고했었다.

 

2007년 봄 여수에는 중국와 우즈베키스탄에서 날아온 유족들, 병원에 입원한 한족과 중국동포 부상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이 함께였다. 비교적 친해졌던 유족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담당처럼 챙겼던 부상자가 치료를 위해 출국 후 다시 입국해 연락을 해왔을 때 만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여수공대위의 경험은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진 대신, 부산과 일산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이 인연으로 남았다. 15주기라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2월 11일 세 사람이 여수에서 만났다.

 

 

 

통영에서 여수는 고속버스가 자주 없어 진주에서 부산 지인 A의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덕분에 잠깐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는 것으로 처음 진주에 발을 디뎠다. 버스 타고 1시간 내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 여럿 있는데 영화 보러 cgv거제에 몇 번 간 것 외에는 진주가 처음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로 흐르는 남강 풍경을 잠시 구경하고 여수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도심의 널찍한 도로와 높은 건물들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통영과 비교하는 걸 의식하고 좀 웃겼다.

 

일산 지인 B는 새벽 비행기로 여수에 내려가 오전에 지역 분들과 추모제를 치르고 한 카페에 대기 중이었다. 5년 만에 가본 여수출입국 주변은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의 카페에는 가득히 내리쬐는 햇살이 그리 높지 않은 여수출입국 건물 덕에 완전히 차단되어 주변이 온통 음지처럼 느껴지는 건 그대로였다.

 

 

 

민망하지만 아주 짧게 묵상을 드리고 주변을 잠시 걸었다. B에게서, 적극적인 시의원이 있어 어쩌면 내년쯤 출입국 앞 시 부지에 작은 추모비가 세워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공대위 활동 이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몇 년에 한 번 여수에서 만나며 희생자들을 잊지 않을 수 있게 작은 돌 하나라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잊고 살았지만 끈질기게 기억하고 활동한 이들 덕분이다.

 

물리적 기념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권력과 성공을 상징하는 관제 조형물이 아니라면, 더구나 타지에서 억울하게 죽고 다치고 금세 잊혀진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아예 잊혀지지는 않을 수 있도록 작은 기념비 정도는 세워졌으면 좋겠다. B는 언젠가 돌아가신 분들의 자식이 한 번은 여기에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돌아가신 분 대부분은 중국동포와 한족이고, 그들에게 한국은 마음만 먹으면 찾아올 수 있는 나라니까.

 

 

여수에서 만난 감회가 남다르기는 했는데 B가 15년 전 한 달 반쯤 지내며 오가던 여수 시내 곳곳을 무척 상세히 기억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몇 년 후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를 들어봤냐며 연락을 해온 것도 B였다. 계속 이주 단체에서 일하며 백서를 내고 보호소 감시 활동을 해온 그의 15년에 '여수'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잠시나마 여수에 함께할 수 있게 된 것도 실은 그의 덕분이다.

 

공사 중인 진남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바닷가를 걸었다. 여수와 통영은 이순신 장군과 진남관, 세병관 때문에 뭔가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아기자기한 통영과 달리 너르고 탁 트인 바닷가 광장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역시 내게는 매력적인 스케일은 아니었다.

 

우리 셋은 십 년 동안 길게는 한 달 넘게 짧게는 1박 2일 정도로 너댓 번 여수에 함께였는데, 그리 오래 전도 아니건만 무슨 이야기가 나오면 그게 언제였는지 각자 분분하고도 불분명한 기억이 허다해 좀 웃겼다. 아무려나, B가 언젠가 모두 함께였다가 자전거를 타고 어떤 터널을 지나 혼자 갔었다는 만성리 해수욕장을 마지막으로, 짧은 여수행을 마치고 통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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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