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32


윤대녕의 신작 소식을 접한 반가움은, '맛 산문집'이라는 부제로 인해 확 반감되었다. 성석제도 아니고 어인?(그러나 필자에 '윤대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새참'도 함께 주문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시위하는 마음이 되어 한 동안 구입을 미루다가, 뒤늦게 초판 '2쇄'를 확인하고 또 괜히 심드렁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한참 빠져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윤대녕은 내게 차마 '2쇄' 본을 소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사람인데. 그러나 그가 나의 소아적 로망을 배반하는 '맛' 산문집을 냄으로써, 나는 '2쇄'본 소장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다(미쳤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암튼, 잠깐은 그 마음이 간단치가 않았다. 한 동안 침대맡에 두고 밀쳐두다가, 며칠 전 잠자리에서 책장을 펼쳤다. 뭐, 따지고보면 그의 전작들에서 '음식'이 아주 찬밥신세를 받는 오브제는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맥주와 일식집이 등장했고, 주인공은 늘 성마르고 입 짧아 보이는 사내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마시고 먹었던 것 같기는 하다.
 

'어머니의 수저'라는 안전하고 서정적인 제목과 클리셰에 가까운 정갈하게 놓인 오랜 놋수저의 흑백사진 표지, 아 이건 좀... 하며, 나는 비아냥 없이 진심으로 육아의 고달픔 혹은 밥벌이의 고육지책일까 잠시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물론 늘 존재를 아파하고 시원으로의 회귀를 골몰했던 그 역시, 무언가 먹어가며 아파도 하고 골몰도 했을 터. 그가 '맛' 산문집을 냈다는 것 자체를 안스러워하거나 현실의 불가피한 요구로 넘겨짚을 하등의 이유는 없다. 게다가 그가 썼으니 그 다운 글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너무나 '윤대녕스러운' 서문, 스무 살에 어머니를 떠난 뒤로 나는 온갖 곳을 떠돌았고, 남의 낯선 음식을 얻어먹으며 가까스로 연명했다. 그것은 차라리 살기 위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흐린 날 타지의 허름한 식당에 앉아 혼자 배고품을 달랠 양이면 어쩔 수 없이 눈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 탁발의 시대에 나는 왜 어머니에게 돌아가 밥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한번 떠나오면 돌아가지 못하는 법인가?
 

그러나 수저, 동침하는 부부 장아찌, 독 속에 은둔하는 자들 조기, 살구꽃 필 때 울면서 북상하다 봄밤에 찾아간 곳들, 청진동 낙원동 장충동과 같은 '정말 그 다운'(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른다.) 아우라를 팍팍 풍기는 꼭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생활'의 증명으로써의 '맛'에 관한 이야기들을 꽤 질펀하게 또 구체적으로 때론 집요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나로서는 살짝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누군들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인간이 아니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읽은 윤대녕'의 매혹과 한없이 현혹됐던 내 시절에의 향수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책은 '나의 윤대녕'이라는 아전인수격 기대를 빼면, 읽을 만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이따금 음식의 어원이나 유래 혹은 요리법 등 관련된 정보를 집요하게 설명하거나 심지어 잘못 쓰이는 단어나 잘못 알려진 속설들에 대해 지적하고 캠페인성 발언을 덧붙이기도 해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만, 그를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반응이라고 치고. 본문 어딘가에서 마침내 '아저씨'가 된 것일까? 고백하듯 자문하는, 무시로 아내와의 일화를 삽입한 그를 이제는 '어엿한 생활인'으로 인정하는 '성숙한' 독자가 되어버려야 할 것 같다.


2006-12-18 01:40, 알라딘



어머니의수저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윤대녕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샘터표 그리움  (0) 2011.05.18
안 먹고 말지  (0) 2011.05.18
그 삶을 '소비'하지 않으려면  (0) 2011.05.18
'인생에서 만난 모든 것을 주머니에 넣고'  (0) 2011.05.18
'그런' 삶을 생각한다  (0) 2011.05.18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