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44


본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잠시 나오는데, 어렸을 적에는 누구나 은연 중에 이분법적 사고에 휘말리는 모양이다. 꿈많은 여고 시절, 나 역시 내 주변의 많은 것들을 둘로 나누어 한 편을 무시하고 한 편에 열광하며 스스로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인 양 착각 속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하여 일회성에 목숨을 걸고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심지어 가난을 일삼는 연극은 진정성이 물결치는 진짜배기 예술이 되어 가난한 여고생의 대학로행을 부채질하고, 한 번 찍어 수십 수백 벌의 프린트로 돌리고 또 돌리는 성의 없는 영화는 가짜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쌓았던 강고한 이분의 벽은, EBS '씨네마 천국'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즈음 뒤늦게 영화에 맛을 들여 손대기 시작했던 책들이 이제하니 하재봉이니 하니 작가들이 써낸 영화이야기다. 누군가의 검증을 거친 반쯤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을 뒤늦게 홀로 보고 행복해하며 목차에 나열된 제목을 하나씩 지우고 나만의 영화일기를 적어가던 그때를 시작으로 나는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누군가 적어놓은 영화이야기를 보는 일는 그의 과거와 나의 현재가 교차하는 매력적인 경험이 되었다.

단지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입문서가 아닌 영화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반가운 책이다. 게다가 김영하와 이우일이라니. 영화를 보는 일이 공부가 아닌 다음에야 평론이 아닌 영화이야기는, 같은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기분 좋은 공감을 끌어내준다.

<굴비낚시>가 그러했듯, 개인적인 추억담과 소소한 에피소드들까지도 주저없이 전면으로 끌어들이는 김영하의 글쓰기는 나와 그와 영화라는 무관한 삼자를 잠시나마 밀접하게 관계 지워주는 고마운 매개다. 더구나 영화와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듯 짐짓 딴소리를 늘어놓다가도 결국엔 접점을 찾아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그의 재주(?)는, 평범한 나의 한계를 확인하는 비감과 함께 신선한 놀라움을 안겨준다.

게다가 상당히 자유롭게 함께 가는 이우일의 만화는 때로는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고 때로는 일종의 소격효과까지 선사하며 정말이지 쿨한 시너지를 더해준다. 너무나 칭찬 일변도여서 민망하지만, 영화 잡지를 매번 구해 읽을 처지가 안되니 이렇게라도 묶어서 책으로 내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 책을 덮을 때의 나의 심정이, 표지를 장식한 화살 맞은 장만옥의 그것이었다고 하면 너무 심한 상찬일까. 아무쪼록,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가 시리즈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3-04-26 07:13, 알라딘



김영하이우일의영화이야기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김영하 (마음산책,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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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