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2. 10. 10. 22:55



과자실이어도 객실은 쾌적했다. 몇 년 전 멤버십 가입할 때보다 물가도 많이 올랐지만 숙박비도 20%는 올랐기 때문에 알뜰하게 조식을 챙겨 먹으려고 일찍 일어났다. 주말부터의 연휴여선지 벽에는 만실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고 객실이 있는 12층에서 2층 식당까지 엘리베이터를 두 번은 보낸 후에야 탈 수 있었다. 식당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급할 게 없으니 기다릴 만했고 식사를 하고 10시 전에 체크아웃하고 거리로 나섰다. 

 

첫 영화까지 여유가 있어 오랜만에 남포동에 갔다. 부산도 영화제도 처음이었던 1997년 가을, 남포역에 내려 공기 중에 섞인 바다 냄새를 느끼며 잔뜩 들떠 걸었던 일도 대로변에서 극장가 골목으로 방향을 틀자 길을 가득 메운 인파와 그 모퉁이의 간이무대에서 진행 중이던 [초록물고기] GV 행사 광경도 참 오래 전 일인데 여전히 잊히지 않았다. 영화 보느라 부지런히 골목을 오가고 이따금 나만 아는 누군가를 거리나 부스 앞에서 발견하고 남몰래 반색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기억이 무색할 만큼 남포동도 비프광장도 많이 달라진지 오래다. 그래도 청명한 하늘과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입간판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설렜고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기분은 한껏 올라갔다.

 

온라인으로 알고 궁금했던 모퉁이극장이 근처여서 가보았는데, 문은 열려 있었지만 공휴일이어서 휴관이라고 청소 노동자분이 알려주셨다. 용건을 물으셔서 그냥 구경하러 왔다고 하니 둘러보고 가라셔서 염치불구 층마다 다니며 주마간산, 와중에 [마티아스와 막심]과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포스터가 반가워 사진도 찍었다. 이제 이런 곳을 보고 통영에도 있다면 좋겠다는 비현실적인 바람을 갖지 않는데, 그걸 바라느니 내가 부산시민이 되는 게 빠를 것이다. G가 가끔 모퉁이극장에서 영화 봤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부러웠는데, 언젠가는 나도 할 수 있는 경험이면 좋겠다. 근처에서 G와 만나 차를 얻어타고 센텀시티역으로 갔는데, 날씨와 하늘이 받쳐주는 덕분에 기분이 더욱 들떴고 차로 지나친 영화의 전당은 오래 그리워한 대상처럼 반가웠다.

 

잔뜩 기대했던 첫 영화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몇 년 만에 재개된 현장 GV가 영화제에 왔다는 실감을 증폭시켰다. 나머지 두 영화는 큰 기대가 없었기에 아쉬움도 크지 않았는데, 오늘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의 전당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안내문이었다. 요약하자면 자원봉사자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지 말라는 내용인데,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니 굳이 붙여놓은 게 아닐까 싶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상이 영화제에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낭만화가 내게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고 카운터에서 혼자 애쓰는 노동자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는데, 내용물이 잘 안 보이는 상태로 손을 내미니 거의 반사적으로 "버려드릴까요?" 해서 많이 놀라고 좀 슬펐다. 매장 안에 쓰레기통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중고책을 찾기 위해 출력한 종이라고 해도 손님이 쓰레기를 대신 버려달라고 내미는 일이 많은 걸까 싶고, 폭언이나 폭행과는 다른 차원 같기도 하지만 그 일이 떠올랐다.

 

오늘의 마지막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횡당보도를 건너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영화의 전당을 바라보니 괜히 마음이 일렁거렸다. 다년간 영화제를 경험하면서 영화의 전당에서의 관람이 백화점 상영관과는 다른 영화 외적 감흥을 선사하고 영화를 느끼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느꼈어서 가급적 하루 한 편은 영화의 전당 상영작을 예매하려고 신경을 썼다. 영화를 보고 느끼는 과정은 영화 자체의 절대적 완결성에 대한 수동적 감응이라기보다 영화를 보기 전, 보는 동안, 본 후의 내 컨디션과의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제 때는 상영관이 어디인지와 그 분위기도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이 기대했던 첫 영화가 백화점 상영관이 아니었다면 달랐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만의 잠깐 남포동도 참 좋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왔다는 사실 자체로 기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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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