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다. 저자의 책 두 권을 다 가지고는 있는데, 가끔 매체에서 접하는 글만 봤고 책은 처음 봤다. 저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책날개에 소개된 정도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많이 놀란(?) 부분은, 그가 상당히 믿음 좋은 골수(!) 기독교인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며 특히나 인간의 무기력을 조롱하는 듯 지구 곳곳을 뒤흔드는 대자연의 재앙을 보면서, 여전히 잠재적 기독교인이라고 뻔뻔히 믿고 있는 나로서는 슬슬 좋은 교회 찾아 나서야 하나하는 생각도 했던 터라 정말 제대로 된 기독교인을 만난 듯한 반가움이 상당히 컸다.
언젠가 연말 텔레비전의 시상식을 보며, 우리나라에 정말 많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있음에 새삼 놀란 일이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화려한 연예인들이 눈가에 물기를 머금고 울먹이며 최고의 감사를 돌리는 대상이 태반은 하나님이라니. 어렸을 적 주워들었던 성경 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이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데도 세상은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걸까 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너무나 단순한 결론이지만, 부시와 이명박을 필두(?)로 너무나 많은 이상한 기독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사실 당연하다. 세상에는 문익환 목사님이나 홍근수 목사님 같은 분만 있는게 아니라 참으로 목사라 이름 붙이기 뭣한 사람들도 버젓이 교회를 지키고 앉아 세금도 안내는 각종의 헌금을 거둬들이고 있으니까.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이단 종교의 문제(여호와의 증인과 일부 안식교의 문제)로 치부되어 오랫동안 관심받지 못하다가, 2001년 오태양씨의 선언 이후 비종교적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청년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그 역시 큰 관심은 받지 못한 채 조용히 감옥행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군사주의와 한국사회를 다뤘던 지난 학기 한홍구 샘의 수업 덕분에, 나와 별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군대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많이 극복되기도 했고, 실제로 같이 수업을 들었던 교육학과 샘 중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준비(?)하는 분도 계셔서 이 책의 이야기들이 많이 마음에 와닿았다. 아직 종교적 양심을 근거로 하는 병역거부조차 인정되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비종교적인 이유의 병역 거부까지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지만, 사회의 평균적인 인식 정도에 비해 소수인 개인의 양심과 진보는 놀랍고 감동적이다.
책의 부제에 충실하게, 저자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의 문제를 주로 거론하고 있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재 방황하는 영혼에 속하는 나로서는 오랜만에 접하는 교회와 성경의 이야기가 꽤나 신선하게 와닿았다. 보수 기독교 신앙을 신실하게 지켜왔음을 자부하는 저자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가 평화주의와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매우 간곡히 전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세속화된 기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정당한 전쟁이니 거룩한 전쟁이니 하는 이름으로 자행해 온 역사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와 희생으로 기독교 평화주의를 실천해 온 소수 종파들에 대해 조용히 역설한다. 중세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유일하게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했던 재세례파, 그리고 그의 후예들인 퀘이커와 메노나이트, 아미쉬 등의 종파들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기독교 평화주의를 지켜오고 그들의 삶 속에 평화를 내면화해 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명맥을 유지하며 살 수 있기까지 겪었던 박해와 함께 양심과 국가의 문제를 극단적 선택의 문제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합리적 사회의 일면 등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이단 종교에 대한 특혜로 치부하고 그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대해 씁쓸한 안타까움과 실망을 표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본인의 전공 영역은 아니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고는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참으로 적합한 문제제기자이자 필자라는 생각이 든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99% 이상이 종교적 이유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른바 정통 기독교를 표방하는 주류 기독교의 그에 대한 입장 비판이 무신론자의 싸잡은 교회 비판으로 오해될 수 있을 터이니 저자의 신실한 신앙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을 사전에 제거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단지 양심의 진지성만으로 해결될 리 없는 이 문제에 대해, 논증 책임의 문제나 '만약 누가 네 가족을 죽이려 한다면'으로 시작되는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질문의 부적절성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법학자이자 변호사인 저자의 전문성이 빛나는 부분이다. 또한 이 책의 장점은 매우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동화책을 제외하고는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존대말로 된 책이었는데, 마치 강연을 듣는 것처럼 친절하고 겸손한 문체로 씌어진 이야기들이어서 결코 자신의 입장만을 강변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것 같다.
나날이 느끼지만 군대라는 집단은, 우리 나라를 지키는 특수집단으로만 보기에는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나 다양하고 심대하다. 군대와 굳이 결부지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급속한 근대화를 거치며 국가에 의한 국민 동원의 일상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에 군사주의를 신경망처럼 깔아놓았다. 그 위에 군사주의를 내면화한 집단들이, 교회는 교회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양심과 가치를 말살하고 국가와 결탁된 자신의 논리를 주입한 신도를 찍어내고 학생을 찍어내고 근로자를 찍어내며, 오늘 날에 이르렀다는 무서운 생각.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힘이 센 국가안보와 체제수호라는 곶감은 때가 되면 출몰해 정말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에너자이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같은 시나리오로 지겹도록 반복되는 그런 광경들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런 세상에서 사문화된 양심이 부활할 틈새가 있기는 한 걸까 싶어 절망스럽기도 하다.
강정구 교수의 컬럼으로부터 시작되어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과 검찰청장의 사퇴로 논란이 뜨거운 요즘. 특히나 이번 주는 방송 삼사의 토론 프로그램이 모두 그와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우연히 그 토론 프로그램들을 다 지켜보며... 과연 그토록 명백하게 헌법에 천명된 양심의 실질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애석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녀사냥을 일삼는 수구꼴통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 역시 관용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양심이라는 것을 폐기처분한 듯 보이는 자들의 뻔뻔함을 보며 한없이 가슴이 갑갑해짐을 느낀다. 수구들이 말하는 사회 일반(그 일반이라는 것도 의심스럽지만)의 의식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을 가진 이들의 양심의 자유는 발설되지 않고 표출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주장은, 뒤집어 보면 그들이 말하는 안보와 사회 통합에 저해가 되거나 위험할 소지가 있다면 다 잡아넣어도 무방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관용의 이름으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 대체복무 입법 추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데, 이미 공익근무니 산업체 특례니 하는 등의 대체복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하나 추가하는 것이 반대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엄청난 국가안보의 구멍인지 국민적 해이를 가져올 일인지 나는 의아스럽기 그지 없다. 그리고 한없이 폭력적인 그들의 주장에 맞설 대안이 오로지(?) '관용'이라는 것이 많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양심으로부터 뿌리내린 관용이 인해전술을 시작한다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화는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 정도로 희망을 갖기로 했다. 기독교인이 적어도 천만명은 될 우리 사회에서, 적어도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일독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진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유쾌한 자각으로부터 우리 사회에 변화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2005-10-15 19:12, 알라딘
|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말,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0) | 2011.05.15 |
---|---|
작지만 강한 책 (0) | 2011.05.15 |
한 번이면 족할 듯. (0) | 2011.05.15 |
일상에 착 달라붙어있는 군사주의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 (0) | 2011.05.15 |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0) | 2011.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