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정상회담 뉴스는 꽤 신선했다. 시위대를 비추는 화면에 등장한 게바라, 세계혁명을 꿈꿨던 고향 남미에서 부활한 그가 깃발로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팬시가 되어버린 그를 일상의 도처에서 조우한다. 각종 시위의 포스터와 컴퓨터 바탕화면이나 공책에서, 심지어 한 때는 스타우트 흑맥주와 함께 동네 슈퍼에서도 그를 만났다. 이제는 내 휴대폰 고리에도 달랑달랑 그의 얼굴이 붙어있는 마당에, 더 이상 무어라 불평할 것도 없다. 실천문학사의 평전 출간 이후로, 게바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어떤 가치 지향도 동반하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흔해져도, 처음 만났던 녹록치 않은 감동의 파장은 어찌할 수가 없어 나는 '체 게바라' 라는 이름이 붙은 그 어떤 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 책도 단지 그런 의미로 내게 왔다. 이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심드렁한 마음도 기억이 난다. 살짝 신선한 기획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조합이기는 하지만... 대략 성의없어 보이는 표지 디자인하며, 중요하지만 참으로 관습적인 관용구를 갖다붙인 제목하며, 굳이 나오지 않았어도 될 책이 아닐까. 하지만 이미 물욕으로 화해버린 나의 책탐은 이 책을 책꽂이로 직진시켰다.
97년 서거 30주년을 기념해 조용히 출간된 몇 권의 책들은 다소 허접했지만, 그저 이미지와 단편의 정보로만 흠모하고 있던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여서 정말이지 페이지 넘기기를 안타까워하며 숙연히 읽었었다. 그리고 먼저 감동한 저자의 감흥이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실천문학사의 평전으로 나는 평범한 독자로서 그에 대해 알 만한 것은 다 알아버린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평전 이후 동어반복의 극치를 보여주며 다양한 기획으로 출간된 많은 책들을 접하는 심정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 나오는 족족 사들이며 책장에 꽂아놓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나는 체 게바라와 관련된 대부분의 국내 출간서적를 '소장만 하고 있는' 이상한 전작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이동 시간은 길고 가방은 무거웠던 며칠 전, 작고 가볍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뽑아들었다. 별 기대없이, 그저 너무 진부하지만 말아달라 속으로 주문을 하며 펼쳐든 책의 서장은 '혁명과 유토피아'로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과 유토피아를 향한 저자의 기대와 전망이 요동치고 있었다. 시큰둥한 시작에 비해 작은 판형에 깨알같이 들어찬 이야기들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바라와 마오쩌둥의 인생을 혁명 키워드에 맞춰 재구성한 내용은, 아주 새롭지는 않았지만 군더더기 없이 충실하고 성의 있었다. 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해 들어간 설명들은 적절했고, 관련된 명언(?)들을 사이사이 골라넣은 것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을 것 같다. 분량의 명백한 한계로 담보하지 못한 깊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다소 남발된 간지는 나름 편집의 취향이라고 해두자. 게바라의 일생을 다룬 몇 권의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실은 몇 년 전의 독서였기 때문에 많이 잊혀져있었고, 솔직히 이름 외에는 별달리 아는 것이 없는 마오쩌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중국공산당 혁명에 대한 관심이 새삼 일어났다. 표지 디자인과 제목만으로, 그저 상품으로 시장에 내던져지는 게바라표 기획으로 의심했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작지만 알찬 내용으로 가득했다. 15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그 속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을 성공적으로 담아낸 책이라고 생각이 든다.
아마도 저자는 게바라와 마오쩌둥에 대한 각별한 애정, 혁명과 유토피아에 대한 버릴 수 없는 희망을 동시에 간직한 사람이 아닐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주변의 누군가에게 성의껏 들려주며, 함께 꿈꾸고픈 내심을 비치는 저자의 의도가 느껴져 읽는 내내 마음이 열려있었던 것 같다. 한 시대를 살았고 이미 수많은 책으로 그 인생이 알려진 이들이기에 새삼스럽게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적어도 이 책은 무책임한 재생산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말마따나 더 이상 목숨 거는 일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어버린 혁명. 어쩌면 가벼워진 무게만큼이나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린 그것은 결국 유토피아의 꿈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현실의 반영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울한 혐의를 무릅 쓴 이런 시도가, 일상의 아이콘처럼 가벼운 것이 되어버린 혁명과 유토피아에의 꿈을 잠시나마 일깨워주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섣부른 의심에 대한 미안함과 사는 일에 파묻혀 짐짓 외면했던 벅찬 가슴 뜀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이런 요동은 물론 광활한 인생을 살다 간 두 주인공에게 빚지는 것이지만, 이런 책을 만들어준 저자와 출판사에도 충분히 감사를 보내야 할 것 같다. 책날개에 소개된 몇 권의 vs 시리즈를 검색으로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니, 내 리뷰가 처음인 걸 보니, 아마도 이 책은 그저 묻혀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모르는 어린 친구들에게는 입문서로, 그들을 이미 섭렵(?)한 독자들에게는 오랜만에 다시 만나 꿈꾸게 해주는 다이제스트로, 손색이 없는 책인데.. 아쉽다.
2005-11-07 04:5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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