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콘텐츠와 소비 문화가 대다수의 관심사를 지배하는 현실,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콘텐츠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에서 시간을 아끼고 또래와의 소통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한 선택이자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게 된 '빨리 감기'에 대한 꼼꼼하고 다각적인 분석이 담긴 책이다.
'들어가며'와 '마치며' 사이 5장의 본문(제1장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제2장 대사로 전부 설명해주길 바라는 사람들', '제3장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제4장 좋아하는 것을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제5장 무관심한 고객들')으로 구성된 책은 빨리 감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배려한(?) 듯, 평균 한두 쪽의 절 제목까지 빽빽하게 명기해 목차만으로도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본문에 사용한 그린 컬러와 편집디자인이 약간 조야한 느낌은 들었지만 절 제목과 함께 빨리 감기 표시(⏩), 하단의 쪽수 표기와 나란히 영상 플레잉 스크롤바와 조작 버튼(▶️⏩⏯) 및 현재 장의 재생지점을 달리 표시한 이미지는 참신하게 느껴졌다. 전반적인 내용은 비판적인 톤이면서도 이러한 트렌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인정하는 느낌이랄까.
이전보다 한층 빨라진 일상의 호흡 속에서 수용자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작품이 아닌 콘텐츠로 받아들이고, 감상하기보다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소비는 감성적 영역이기보다 정보 수집의 역할을 하는 측면이 강하고, 이러한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개인이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기기와 기술의 발전에 근거한다. 시간 가성비가 중요한 이들일수록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러한 추세는 영상 제작 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빨리 감고 건너뛰어도 전체적인 내용 이해에는 큰 지장이 없는 콘텐츠들이 활성화된다.
저자가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한 표(218쪽)에는 영화의 발명으로부터 다섯 번의 변곡점을 거친 영상 시청 행태의 변화가 드러난다. 영화관에서만 영상을 볼 수 있었던 19세기 말, 가정의 tv를 통해 '장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1950년대, 비디오와 dvd를 통해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1980년대, 영상 배급을 통해 '물리적, 금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2000년대 후반 그리고 2010년대 후반부터 빨리 감기 시청과 건너뛰기 기능 추가를 통해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거듭 해방'. 제약으로부터 수차례 해방되며 이른 오늘날의 시청 행태가 진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본문의 말미에서 저자는 라이브 연주가 음악의 본령이었던 시대에 등장한 레코드가 '통조림 음악'이라 폄훼되었던, pc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컴퓨터를 통한 글 읽기가 우려의 대상이 되었던 사례를 거론한다. 내용의 온전성 훼손이 불가피한 빨리 감기와 건너 뛰기가 이와 같은 선상에서 다뤄질 현상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대세의 역행은 어려워 보인다. 필자는 불가역성을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에서의 전망을 상상하고 제안하면서도 “마치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맺는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빨리 감기를 새로운 현상으로 짚으며 논의를 풀어나가는 초반부에서 저자는, 돌이켜보니 자신 역시 '일'을 해야 할 때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는 영상 시청의 목적에 따른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편의와 효율을 추구하며 급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전면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라는 현상이 가능해진 직접적인 원인은 기술적인 부분이겠지만 그 기저에는 긴 호흡과 여백, 느림의 미학과 성찰의 여유 같은 것이 용인되지 않는 세계의 현실이 있다. 분석은 흥미로웠고 대안 같은 것은 없다.
이나다 도요시 지음•황미숙 옮김
2022.11.10.1판1쇄 11.29.1판2쇄발행, (주)현대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