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2. 6. 02:42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 대본이 궁금했다. 전체적으로 대사를 위한 감정 상태나 상황 설명 등은 디테일하게 제시되어 있는 데 반해 말투나 사투리 여부 등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신기했다. 영화 초반 피씨방 알바노동자의 사투리가, 물론 부산이 배경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꽤 튀게 느껴졌는데 그 부분에 대한 지시사항이 각본에는 없었다. 영화를 볼 때 서래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잠복하며 관찰하던 해준이 어느 순간 서래의 거실에 들어가 투명인간처럼 곁에 있는 장면,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각본에는 별다른 부연이 없었다. 감독의 머릿속에 각본-촬영-편집까지 계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걸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에서 느꼈던 것보다 서래와 해준의 감정이 각본에서는 굉장히 진하게 전면적으로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서도 용의자와 담당형사 간의 긴장 그리고 연인으로서의 사랑의 감정이 어느 시점 이후에는 확 증폭되면서 고조되지만, 각본상으로는 두 사람이 첫 만남에서부터 거의 운명의 상대임을 직감한 사랑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야말로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한 사랑의 이야기로 질주하지만, 개인적으로 초반부 두 사람의 역동에서는 경계와 의심이 더 큰 비중으로 다가왔었는데 말이다.

 

서래가 거실에서 보던 사극 드라마가 <흰 꽃>이라고 나오는데 실제 있었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볼 때는 뭔가 애절한 느낌의 화면만 눈에 들어왔는데 ‘류선생/서래’ - “사랑은…… 그 외 다른 모든 것의 포기니라.” 같은 직접적인 대사의 복선도 새삼 눈에 띄었다. 각본과 상영된 영화 사이에 달라진 부분이 얼마나 있는지는 감지할 수 없었지만, 박찬욱 감독 영화의 에센스를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견 때문이었는지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두 버전의 온도차가 꽤 크게 느껴져서 신기했다. 폭력 장면을 견디는 게 많이 힘든 편이어서 [올드 보이] 이후 오랜만에 본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나름 멜로여서 반가웠는데, 내가 받은 느낌보다 더 극한의 멜로 영화였음을 각본을 보고서야 알았다. 

 

 

정서경 박찬욱
2022.8.5초판1쇄 8.22초판7쇄, (주)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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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