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이었다, '나마스테'라는 연극이 있었다. 조선일보에서 우연히 기사를 봤는데 극단 한강의 장소익씨가 연출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며, 극의 실제 주인공인 나바라즈(당시 강제추방인가, 암튼 불안한 위치였다고 했다)라는 노동자가 직접 출연을 할 가능성도 있어 썰렁한 객석을 수사관들 몇이 채우고 있다나 뭐 그런... 며칠 후 나는 조선일보에 대한 재수없음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얕은 관심과 장소익씨에 대한 믿음과 연극을 보고 싶은 마음, 등등을 담아 극장으로 향했다. 예술극장 한마당이었나, 대학로 대다수 극장들과 다소 동떨어져 찾기도 쉽지 않았던 그곳은, 안타깝게도 신문 기사 그대로 썰렁한 객석의 냉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드문드문 자리를 채운 열 명도 채 안되는 관객들 앞에 펼쳐지는 무대 위의 이야기는, 원초적인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그야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만들었고 공연의 감동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마스테'는 우리말로 치면 '안녕하세요'쯤 되는 네팔의 인사말이라고 했다.
1995년 지자체 선거 때였다. 선거운동에 결합해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던 어느 날, 뭐가 거슬렸는지 경찰들이 떠서 하루를 공치는 거 비슷하게 보낸 적이 있다.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단체티를 맞춰입은 터라 눈에 띄어 어디 딴 데로 갈 수도 없고 해서 성남시청 뒤편에 위치한 주민교회 지하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외국인노동자들과 중국동포의 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교회에는, 그때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쫓겨온 우리들 수십 명은 본의 아니게 한가한 일요일 낮 시간의 여유를 즐기던 외국인 노동자분들에게 방해꾼이 되어 민망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디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마스테'를 본 이후로 나름 생각한 건 있어서, 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마주치게 되면 따뜻한 표정과 눈인사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던 나였지만 미처 준비도 없이 마주치자 영 어색하고 불편을 끼치는 입장이라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누군가로부터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노동자분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십 분 쯤 지났을까. 나갔던 한 분이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사와서 쑥스러운 듯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동에 눈물이 다 날 뻔 했다. 그리고 그 날, 선거운동을 공 친 우리는 오후 내내 교회 뒷마당에서 그분들과 배드민턴도 치고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반나절의 짧은 시간,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위의 두 사건으로 나는 외국인 노동자분들에 대해 나름대로는 조금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류애와 솔직히 말하면 단지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 조국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정말이지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해서 마음만이라도 각별하게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차에 내가 상당히 열광했던 <느낌표>의 '아시아 아시아'가 시작됐다. 첫 주에 나왔던 삐뿌씨가 불렀던 '서울로 가는 길'의 그 처연함과 남양주 이정호 신부님의 여유로움과 인간미에 반해, 한참 노느라 바쁘다가도 토요일 밤 11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매주 눈물을 질질 짜대며 열심히도 봤다. 남들 다 하면 좋아라 하던 것들도 딱 그만 두고는 하는 이상한 성격이지만, '아시아 아시아' 신드롬의 냄비현상이라고 한대도 언제건 기회가 되면 자원봉사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리고 2003년 5월말에 이사를 와서 내가 처음 한 안양 나들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있는 전진상 복지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조금 서운한 이유로 자원봉사를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외국인 노동자분들에게 적잖은 마음의 빚을 가지고 살고 있고 언젠가는 꼭 그분들을 위해 자원활동이라도 할 생각이다. 이 책도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만났다. 외국인 노동자분들의 입국이 이미 십여 년을 넘긴 지금에는 2세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가 작게나마 이슈가 되고 있어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방 활동을 정리하면 이후에는 가능하면 이쪽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다.
잡설이 너무 길었는데... 책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딱 표지만큼 인간적이고 따스하다.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일곱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인공들은... 이틀 후면 낯선 모국으로 돌아가는 여섯 살짜리 코시안 띠안, 부모의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인해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코시안의 사연을 접한 이후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자원교사, 머나먼 타국땅 안산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친구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타 쉼터를 7년째 지키고 있는 아저씨, 코시안으로는 처음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몽골 소년, 그럭저럭 살만한 형편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삼아 한국행을 선택했다가 몸 상하고 맘 상한 조선족 부부, 월드컵 때는 오로지 신나게 즐기기 위해 사직서를 내고 제주도까지 경기를 보러갔었다는 미래의 영화감독 방글라데시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인식된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가족의 대표선수격이다. '때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제일 먼저 배우고, 하루의 반 이상을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월급을 떼이거나 강제추방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 - 하지만 그들은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가 아니며 당연히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저 다른 국적, 다른 생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 역시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르다는 것은 그저 차이일 뿐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 말로는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우리는 나와 다른 상대에게서 느끼는 근원적인 몰이해와 몰지각의 벽을 생각만큼 쉽게 헐어버릴 줄 모르는 게 아닐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국경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례 위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과 고단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지만, 대상 선정에 있어 남녀노소의 비를 고루 고려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게 조명하고 있어 마치 우리 이웃의 살아가는 이야기인 양 읽으며 웃음 짓고 한숨 짓게 만든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시선 역시 억압받는 피해자 일색이거나 동적적이지 않아, 오히려 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 그들을 취재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이 글을 집필한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그들을 각각의 국적을 가진 개인으로 - 개인이 가진 각각의 이름으로 소통하며 '외국인 노동자'라는 뭉뚱그린 정의를 거두어낸 후에 오히려 그들을 진정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각별히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들과 가까이 만나볼 기회를 가지지는 못한 내게는, 책 속에 소개 된 그들이 저자의 소개로 건너건너 알게 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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