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 기다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신간 소식이 들리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유쾌한 이야기꾼 이기호의 새 장편소설이다. 제국주의 세계질서부터 조폭들의 당구장 관리까지 적용 가능한 종속이론, '서울의 봄'을 거쳐 '광주 학살'과 이후의 독재정권에 이르는 현대사의 실소유주인 큰 형님 미국의 노골적인 권력질과 그에 기생하는 못난 막둥이 한국. 형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부미방' 사건과 주범들의 자수 전까지 은닉 공간이 된 원주 그리고 비극적인 역사의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로 자랐고 죄라면 쓸 줄 아는 글자가 '통닭' '생닭' '영계' '오뚜기 튀김유' '호프' '경향신문' '매일경제' '안전택시' 정도로 갈음되는 유사 문맹 '나복만'에게 날아든 우연과 필연의 나비효과. '차남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도처에서 기획되고 복제된 '나복만의 운명들', 기획자도 피해자도 의식하든 안 하든 실은, 굴종과 생존을 위한 질곡 속에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세계가 뒤범벅된, '차남'들의 의식과 행태가 빚어낸 현대사와 개인사를 '누아르' 화법에 의거해 거시와 미시를 아우르며 전개되는 희비극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소설 속 구절대로 "카인과 아벨,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 차남들로 이루어진 세상.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의 소설 버전이기도 하다. 역시나 소설은 소설인지라, 수많은 지질한 차남들 중 유일하게 직접 알을 깨고 운명을 거스른 이는 우리의 주인공 나복만이다. 그러나 주요한 등장인물 대다수가 사연 없는 악역일 수 없는, 삶의 결락과 모순이 빚어낸 다양한 곡절의 인생을 살아나가는 인물일 뿐이기도 하다. 더불어 원죄의 굴레를 벗고 쓰게 된 그의 정기적인 편지, 그러나 수취인불명의 편지는 다소 뜬금없는 하지만 운명처럼 누군가 버릇처럼 수신하게 되고 그렇게 모아진 편지들이 훗날 소설가가 된 그의 아들을 통해... 그리하여 블랙코미디라기엔 너무 많은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희생이 따랐던 독재의 현대사 그 이면이 '나복만'의 삶으로 재구성되었고,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갈 때마다 작가는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뾰족한 마음으로, 헤르만 헤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품고, 마침내 굿바이, 연인과 해어지는 심정으로 들어 보아라'고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실없고 썰렁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최고의 방법은 소설쓰기가 아닐까 싶은, 여전히 능청스러운 이기호의 유머에 헛헛한 실소로 반응하다보면, 마음 구비구비가 싸해지고 그야말로 웃픈 심정이 된다. 그리고, 한편, 쓰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되 읽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보니, 미안하게도... 작가 입장에서 별로 힘주지 않은 대목일 것이 분명한, 다음의 구절이 외롭고 웃긴 독자에게는 옮겨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는 갑작스럽거나 느닷없이 찾아온 일이 아니었다고, 오히려 너무 천천히 다가온 응답들이었다는 말, 그녀가 처음 횡성에 왔던 날 오랫동안 잠 못 들고 뒤척여야만 했던 일들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모두 다 털어놓았다."(p169) 유장한 세월을 관통하는 거창한 세계의 어느 구석에선가 짠하게 빛나는 비루한 진심이랄까. 사과 못지않게 감동과 이입도 잘 하는 독자에게 인상적인 장면이란 대개 이런 것이다.
비밀같은바람2014. 9. 10.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