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8월이구나 실감나는 땡볕 속에 짧은 휴가를 보내며, 투명인간처럼 집안에만 들어앉아 읽어낸 소설이 성석제의 투명인간이다. 욕심껏 사모으고 그중에서 골라읽기가 취미이던 시절을 거쳐, 욕심나는 몇 권을 사들이고 아예 안 읽기가 되어버린 나의 독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지만, 사는 게 바빠서는 아니고. 극도의 현혹에 스스로를 맡긴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을 다스리지 못하는 마음의 혼돈이 시작된 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좀 심심하고 외롭기는 하지만 노래며 책이며 벗하다보면 그런대로 즐길 만 했던 고요한 일상은, 제 욕심을 못 이겨 풀어헤친 심적 동요를 따라 요동치기 시작했고 미친 듯이 그러한 날들이 몇 달 그리고 잠잠하게나마 산란스럽게 해를 두 번쯤 넘기자 그대로 생활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이 방 저 방 빽빽한 책장이 무색하게, 독서란 굳게 마음을 다잡아야만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독중감을 잃을 새라 밑줄을 긋고 따로 메모장을 열어놓고 책 읽던 버릇이 무색하게, 이제는 뭘 읽어도 이삼일이면 제목도 가물한 지경이 되어버린 것은 변화된 일상의 부록이라고나 할까.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게 내가 벌인 일이기 때문이고, 담담하고 고요한 일상이 깨져버렸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도 미련스런 미련놀이에 더 많이 마음을 팔아버린 나의 소치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여, 아무려나, 투명인간. 며칠이 지나면 읽었다는 사실조차 가물해질 터이니 잡상이나마 기록을 해두자면- 등장인물 거의 모두 돌아가며 화자가 되는 구성이 처음엔 적응 안 됐는데, 각자의 이유와 진심이 존중되는 서술방식 덕분에 이의 입장도 되어보고 저의 입장도 그의 입장도 되어보고 하다보니, 결국 사는 건 이렇게 누구에게나 자기중심적인 삶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관계의 그물망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등장인물의 연대기로 치자면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사회경제적 배경의 변화는 상전벽해 수준이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인생에 닥치는 희비극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덕분에, 누구나 자기 몫의 인생을 빛나는 시절에는 빛나는 대로 비루한 날들에는 비루한 대로, 감당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뿐이구나 하는 느낌. 어찌되었든 감각한다는 것이 지복이고 특권이라면, 묵묵히 감내하기에 버거운 고통의 바닥에 이른 이들에게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투명인간. 그 모순의 존재형태는 오히려 위로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한편, 젊은 날 사회에 대한 책임감으로 혹은 소소한 양심과 혈기로 싸움에 뛰어들고 인생을 걸었던 몇몇 인물들의 유려한 변절을 보면서, 여전히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된 한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압축적 서술에 기인하는 것이거나 포커싱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소위 신념은 산다는 것의 당위에 그토록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싶은 아연함과 허무함은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누굴 봐도 어딜 봐도, 살아가는 일을 축복이라 여길 수 없는 세상이 도래했고 혹은 세상은 원래 그러한 것이었고. 그것이 결국은 인간이 만든 지옥이라는 것을, 개인의 발버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소설이 혹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위무가 바로 투명인간화가 아닐까 하는 시덥잖은 생각. 사소한 다짐조차 불러낼 수 없는 기진한 마음으로, 양심으로 끌어낼 수 있는 동력의 크기는 얼마만큼일까를 생각하며. 고작, 그래도 9월에는 또 쉴 수 있는 날이 남아있다는 것, 며칠이나마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9월을 맞는다. 꽤나 맙소사스러운 날들이다.
비밀같은바람2014. 9. 1.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