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4.12.27 좋은 밤
  2. 2024.12.26 라스트, 드라이브 마이 카
  3. 2024.12.21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산책일기2024. 12. 27. 23:23

 

 

통영에서의 마지막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주말엔 집에 마지막 손님이 왔고, 오늘은 아마도 마지막 지인 만남. 뚜벅이가 된 터라 약속 장소인 강구안까지 오랜만에 걸었다. 차가운 공기 속을 걸으면서 너드커넥션의 “좋은 밤 좋은 꿈” “우린 노래가 될까”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를 리핏하며 들었다. 그러고 싶고 인적도 없어 운하를 따라 걸으며 적당히 따라 불렀는데 물론 기분이겠지만 겹쳐 들리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고향 음식 좋아하는 통영산 지인 H와 저녁 식사를 하고 카페 대신 노래방에 가자고 했는데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강구안 인근 항남동의 노래방은 다 유흥주점이어서 코인노래방을 검색했는데 주변에는 없었다. 몇 년 전 G랑 임윤찬과 광주시향 공연을 본 후 벅찬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범음악적 코스로 노래방에 갔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배도 부른 김에 밤길을 걸었다. 호기롭게 너드커넥션의 노래를 선택해 부르며 서영주의 위대함을 실감했고, “알아요 나도 수없이 해봤어요 노력이라는 걸 말예요” 부분을 제외하고 가사에 무척 공감했던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는 차마 부를 수 없어 말았다. 공간이 좁고 반주가 열악한 코인노래방을 탓하기엔, 오랫동안 수련을 중단한 나의 노래가 너무 형편없었지만 밤 10시가 다가오자 신분증 확인 후 보너스로 주는 20분까지 알뜰하게 챙기며 노래를 불렀다.

 

H는 마지막으로 일한 단체의 대표였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지인이다. 스스럼없는 성격 덕분에 처음부터 편하게 친해졌는데, 그 역시 영화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여행으로 오가며 이주를 마음먹을 즈음 그의 고향이 통영임을 알게 됐고, 내가 여행으로 그가 고향 방문차 통영에 머물던 언젠가는 차를 빌려 곳곳을 안내해주기도 했다. 이사하고 지쳐있던 저녁 마침 통영에 와서 햄버거를 사다주고 엇갈리게 끼워진 베란다 창호를 제대로 정리해줬었는데, 마지막 만남도 H가 됐다. 이번 통영행은 홀로 계신 노모를 수도권으로 모셔가기 위한 길이었다. 통영에서 지내는 동안 몇 달에 한 번은 어머니를 뵈러 고향을 방문하는 그와 만났다. 용건 없는 연락은 하지 않는 나와 달리, 옛날 사람 특유의 정 같은 것인지 때로 안부 전화를 하는 덕에 계속 이어진 인연이었다. 너무 크지 않은 스케일로 바다와 삶이 어우러진 듯한 통영의 풍경은 여전히 좋지만, 이곳에서 지낸 시간들은 결과적으로 밤 같았다. 자초했지만 밤은 어둡고 차갑고 뭐 그렇다. 좋은 밤들이 더러 있었는데, 오늘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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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4. 12. 26. 23:45

 

 

통영에 산 덕분에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운전을 했다. 여행으로 오갈 때는 띄엄띄엄하나마 정확했던 버스도착 정보시스템이 팬데믹 이후 망가지고 복구되지 않았다. 긴 배차 간격은 기본값이지만 버스로 목적지를 향할 때 도착 시간을 예측할 수 없는 게 너무 불편했고, 아무것도 없다가 버스터미널 안내판에 갑자기 나타나는 ‘잠시 후 도착’은 반갑기보다 농락당하는 기분을 안겨줬다. 격주로 답사가 있는 도서관 강의를 들으며 반복되는 상황에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외출할 때마다 일상의 무기력을 배가시키는 멍청한 기다림의 스트레스가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던 수십 년 장농면허자의 소심함을 이겼다.

 

지인의 도움으로 부산의 중고차 시장에서 경차를 구매한 게 2022년 6월, 탁송으로 받은 차로 10시간 연수를 받았다. 면허를 취득할 때도, 이후 딱 한 번 운전대를 잡았다가 도랑에 차를 박아 견인해야 했을 때도 절감했던 ‘운전과 맞지 않는 나’는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긴장되는 심신을 이완하기 위해 오랜만에 풍경 아저씨의 노래를 리플레이하며 다닌 통영 시내는 시간이 가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운전 연습 겸 쿠폰도 쓸 겸 영화를 보러 cgv거제로 향하는 길은 끝내 편안해지지 않았다. 통영 끝에서 신거제대교를 거쳐 거제 시내로 향하는 10km가량의 무신호 구간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찼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안도감이 자신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운전하면서 알게 된 나는 속도 내는 걸 많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횡단보도 신호등을 반가워했던 초반의 마음은 지금껏 달라지지 않았고, 거제를 오갈 때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70km 속도제한 팻말이었다. 내가 가입한 캐롯자동차보험은 운전을 마치고 나면 정속률을 중심으로 점수와 포인트 적립 안내 알람이 울리는데, “당신의 운전 습관을 따라할래요” “당신의 운전으로 도로가 더 안전해졌어요” 등 호들갑 칭찬 일색이었다. 보험료 할인이 된대서 뒤늦게 사용하기 시작한 티맵의 안전운전 점수는 100점이었는데, 지인에게 들은 바 흔한 일은 아닌 듯했지만 이 역시 운전에 대한 자신감이나 호감을 증진시키지는 못했다. 

 

그나마 좋았던 건 차 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과 이따금 지인들이 왔을 때 이동이 용이한 점이었다. 물귀신 체질인지 혼자보다는 누군가 함께일 때 그나마 마음이 편했고, 덕분에 내 기준 장거리인 여수와 부산도 가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운전할 만하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외출하지 않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일주일쯤 운행하지 않으면 방전이 되기도 하는 차는 점점 계륵이 되어 갔다. 차를 사고 몇 달 뒤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온 후 처음 방전을 경험하고 지인의 조언대로 주차할 때는 블랙박스를 꺼놓으면서 나름 신경을 썼지만, 며칠씩 집에만 있다가 방전을 걱정하며 용건 없이 차를 끌고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방전 방지용의 하릴없는 운행이지만 통영 운전이 조금 익숙해진 후 날씨가 좋을 때는 통영대교를 건너 옆으로 바다가 펼쳐지는 평인일주로를 달리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을 때 몇 번은 연수 첫날 마음의 준비 없이 들어섰다가 식겁했던 산양일주로를 달리며, 경사와 굴곡에 어느 정도 적응한 스스로를 기특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탈한 완주가 다행스러울 뿐 나는 드라이브를 온전히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긴 일주로가 부담스러울 때는 이순신 공원 초입의 동호항 방파제와 통영국제음악당을 주로 찾았고, 음악당 건물 앞 음표 조형물은 ‘나의 반환점’ 삼아 자주 갔다. 

 

이사할 집의 대중교통 요건이 좋지는 않지만 부산에서의 운전은 내게 불필요하고도 역부족인 일이어서 차를 팔기로 했다. 다행히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가 내일 오기로 했다. 끝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아쉬워서 오후에 마지막 운전을 했다. 혹시 사고라도 나면 골치 아픈 일이어서 가까운 통영운하 바닷길과 봉평동을 거쳐 통영국제음악당 ‘나의 반환점’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 비지엠은 너드커넥션이었다. 2년 6개월에 약 7,000km라는 미미한 주행기록을 끝으로 뚜벅이로 돌아간다. 초보운전자에게 안정감과 충만감을 선사해준 여러 뮤지션들 그리고 명정동 충렬카센타에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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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12. 21. 15:51

 


외계 행성 뉴타이티에서 선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잔혹한 지배자로 군림하는 지휘관 데이비드슨, 선주민과의 소통으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며 경험한 특별한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류보프 박사, 데이비드슨의 강간으로 아내를 잃고 류보프의 동료로 통역사 역할을 하며 후에 저항의 선두에 서는 애스시인 셀버. 그리고 더 많은 지구인들과 행성의 선주민들이 등장하는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다 .

황폐해진 지구로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외계 행성을 정복해 황무지로 만들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마구 짓밟는 지구인의 행태는, 과거의 역사를 우주로 확장해 그대로 반복하는 모양새. 일차원적인 폭력에서 다변화된 방식으로 지배의 양식을 변화한 제국주의는 지속되고 있고 지구인에게 반성은 없다. 월등한 기술과 물리력을 내세워 외계 행성들을 정벌하고 비틀린 욕망을 채우는 지구인들에게, 인류가 발전하며 체득하고 정립한 공존을 위한 중요한 가치들은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세계와 숲이 동의어이고, 신을 번역자로 꿈을 뿌리로 여기며 살아가던 애스시인들은 다툼을 모르는 평화로운 종족으로 여겨졌다. 지구인들의 수탈과 억압으로 무참히 파괴된 삶과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스시인들은 반격에 나서고 마침내 성공하지만, 침공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살육과 폐허로 그들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유일한 친구였던 류보프의 허망한 죽음과 공멸에 가까운 참상, 사태를 최악으로 만든 데이비드슨은 마지막까지 모두가 만류하는 보복을 감행하며 지구인의 어리석음을 웅변한다.

추천자의 개인 사정으로 모임은 하지 못한 12월의 모임 책이었다. 한때 김초엽의 소설들을 몇 권 읽으며 잠깐 SF 장르를 접했었고, 이전에 책 모임에서 [잔류 인구]로 르귄의 작품을 처음 읽었었다. 어떤 스토리든 감상은 대체로 비슷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 낯선 개념과 논리와 존재와 현상 들을 다른 감각을 동원해 상상하고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고, 그리하여 감흥이 없었다. 작품 속 지구인의 몰이해와 오만함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책 읽기의 즐거움은 소중한 것이므로 성향과 취향의 문제라는 데에 한 표를 행사하기로.   


어슐러 K. 르귄•최준영 옮김
2012.10.8.1판1쇄찍음 10.15.1판1쇄펴냄,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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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