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을 '기념'하는 소소한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은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싶어 부산국제영화제 내려가는 길에 챙겨넣었지만 10%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한참이 지났다. 공중캠프 알콜토크의 참고도서에도 오르지 못했기에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를 먼저 읽고,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정독해보고 싶어 숙제하듯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R.W.데이비스의 긴 해제에 따르면 이 책은 E.H.카가 1944년부터 1977년까지 14권으로 펴낸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를 압축해 1979년에 대중서로 펴낸 책이라고 한다. 역자 유강은에 따르면 1980년대에 한국에서 출간된 적이 있지만 '감정과 교조를 배제하면서도 공감하는 방식으로 혁명의 성과와 오류를 기록'한 탓인지 당시엔, 1969년 소련 사회과학원에서 쳐냈던 [소련공산당사](한국어판은 [러시아혁명사]에 비해 별 반향이 없었다고 한다.
책은 '1917년에서 시작해서 1929년으로 끝나는 서술은 혁명의 발발부터 전쟁과 내전,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 5개년 계획, 농업 집단화, 독재의 시작 등으로 이어지는 혁명 직후 10여 년의 기간'에 대한 기록이다. 혁명에서 중핵적 역할을 담당했던 통치세력의 정책 결정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장기간의 복합적인 상황이 한 권으로 압축되다보니 사실 러시아혁명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로서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박노자의 책을 얼마 전에 읽은 덕인지, 서술의 관점과 접근은 매우 다르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이해를 돕는 측면이 있었다.
러시아혁명- 이라고 할 때, 제대로 읽거나 아는 바는 없으나 뭔가 마냥 뜨겁고 열정적이되 폭력적인 광풍같은 느낌이 지배적이었는데..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대중의 요구 그리고 변혁의 전망을 리더십으로 체현한 지도자들이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권력을 손에 넣고, 건설한 하나의 '국가 경영'과 '체제 방어'를 위해 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행정으로 집행하는 과정들. 그러니까 심하게 단순화하자면 혁명의 과정 역시 '일상'의 연속이자 재조직 과정이었다는 새삼스러운 확인을 했다.
E.H.카의 서술은 '개인'이나 신념과 이념 같은 부분에는 거의 초점을 두지 않지만, 러시아혁명이라는 인류세계의 충격파를 만들어낸 근본적인 힘은 아마도 이러한 것들로부터 나왔을 터.. 이따금 투쟁과 원칙과 타협과 현실과.. 나에게 아무런 결정의 압력이 없는 사안에서도 고민하게 되는 문제들, 투쟁과 관계 혹은 저항과 권력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곱씹어보는 독서이기도 했다.
대체로 긴 문장들이었음에도 명료하게 잘 읽히는 문체였고 긴 해제 이후에 단정하게 덧붙여진 '옮긴이의 말'이 참 좋았는데, 책날개 말미에 붙은 역서들의 목록을 보며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좀 미안해졌다.
[E.H.카 러시아혁명 1917-1929] 유강은 옮김
2017.7.15 초판1쇄 발행, 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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