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딜쿠샤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뉴스를 접하고서 찾아보니 이미 번역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우연히 본, 비밀을 간직한 채 퇴락한 낡은 건물과 그 속에 깃들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가 딜쿠샤의 1인칭 시점으로 펼쳐지는 다큐에 깊은 여운이 남아 기억하고 있었다. ‘DILKUSHA 1923'이라는 암호 같은 표지석으로 인해 더욱 내막을 알 수 없는 오래 되고 거대한 벽돌집,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싶으면서도… 낭만적이고 비감 어린 사연들을 묵묵히 간직하고 있을, 기적처럼 남아있다는 그 집이 보고 싶었다.
9월이 되면 책을 읽고 조용히 가봐야지, 생각하며 검색으로 접한 이야기들은 사실 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읽는 내내 양가감정이 오갔다. 개화기 최초의 금광업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서 성장했고 금광개발업으로 40년 이상을 보내며 ‘조선’을 사랑했던, 일제에 의해 추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숨을 거둔 후에도 유언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묻혔다는 윌리엄 테일러.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와 그로 인한 금광개발사업에 뛰어들어 수탈에 가담한 주인공 일가의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다. 책의 빨간 띠지에 쓰여진 대로 <'미스터리의 집, 딜쿠샤'의 영화 같은 이야기>라는 숨겨진 역사와 극적으로 드러난 지난 사실들을 밝혀준 성실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흥미롭지만… 저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의 상징처럼 여기며 아꼈던 “호박 목걸이”를 제목으로 붙인 데서 볼 수 있듯이, 무척이나 개인적인 기록이다.
3.1운동을 알린 외신기자라는 카피가 메인으로 붙었지만 윌리엄 테일러의 본업은 광산개발업자였고 그의 아버지는 조선 최초로 개발사업권을 따낸 외국인이었다. 당시 체류하던 엘리트 외국인 사회의 주요 멤버였던 덕에 통신원 자격을 얻게 되었을 앨버트 테일러를,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최초로 알린 외신기자로만 부각시키는 선택적 수식어 역시 마뜩치 않기는 마찬가지. 물론 책을 집필한 메리 린리 테일러의 삶은 한 사람의 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놀랍도록 진취적인 행보였지만 '대영제국' 부잣집 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할 테다. 그들이 이 땅에서 부부로 살았던 1917년부터 1941년은 일본령 조선이었고, 그들의 삶의 기반도 그들이 누린 부와 사치 역시 제국주의 지배세력의 수탈에 숟가락을 얹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점령자의 일부로 부와 사치를 누리며 군림하는 자들의 낭만과 연민과 굽어보는 휴머니즘 같은 것들이 가득한 책이기도 했다.
아무려나 그들은 강제점령기 일본 제국주의가 열어젖힌 수탈의 행렬 맨 앞에 선 이들이었고, 그들의 사랑하는 친구들 대부분은 (그런 게 있다면) ‘인간의 얼굴을 한’ 제국주의자였고, 그러한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질서에 편승한 지배세력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식민지의 주민들을 하인으로 부리고, 연일 이어지는 파티를 위해 본국에서 사치품을 공수하고, 여름철이면 원산의 갈마해변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금강산 여행에도 가마꾼을 동원할 수 있는 일상을 누렸던. 감성적으로는 나라 잃은 이웃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부유하고 친절한 이방인으로 식민지 조선을 사랑했다 한들, 자신들의 현재를 있게 한 부정의한 힘과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제국주의 시대의 코스모폴리탄이자 특권계급이었던 그들에 대한 심드렁함까지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아무려나 권율 장군의 집터였던 수백 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는 언덕, 당시 조선에서는 가장 조망이 좋은 그곳에 지은 집은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쟁과 난개발을 피해 살아남았고, 수십 년 동안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지만 머지않아 역사 속의 위상을 회복해 ‘문화재’로 재탄생할 예정이라고 한다. ‘딜쿠샤’라는 이국적인 이름과 비밀스럽게 가려졌던 이야기에 혹해 읽은 책의 행간에서 내내 느껴지는 감상이 달갑지 않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한편으로는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지키며 적잖은 이들의 삶을 보듬어온 딜쿠샤의 문화재로의 이행이, 가난한 이들의 삶에도 순조롭기를 바란다.
메리 린리 테일러
책과함께, 2014.3.5. 1판1쇄
http://futureheritage.seoul.go.kr/web/participate/ExploreView.do?exploreId=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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