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3. 1. 1. 00:18


한때나마 윤동주를 사랑하지 않은 소녀가 몇이나 있을까. 해사하고 맑은 얼굴에 학사모를 쓴 흑백사진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서시'의 시인 윤동주. 동시대를 호흡하지 않은 시인의 시가 교과서를 지나 읽히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특히나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자화상' 같은 일련의 대표시들은 시인의 시심을 미처 가슴으로 느낄 사이도 없이 행과 연마다 헤집어진 채로 우리와 처음 만난다.

 잔뜩 밑줄 그어지고 주석 달린 채 참회니 속죄니 조국이니 하는 말들을 공식처럼 주워섬기며 우리는 윤동주를 익혔던 것이다. 와중에도 그의 시에(혹은 이미지에) 사로잡힌 우리 중 몇몇은 생애 첫 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직했고, '초 한 대'니 '무서운 시간'이니 '또다른 고향'이니 '태초의 아침'이니 하는 교과서 밖의 시들을 큰 비밀이나 되는 듯이 잠 못 이루는 밤 책상머리에서 들춰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때였다.

 시와 윤동주를 사랑했던 소녀들은 또다른 시들에 매료되었고 이미지의 윤동주를 사랑했던 소녀들은 쉽게 그를 잊어갔다. 그리고 그는 광복절 즈음이 되면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의혹에 싸인 죽음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종종 복제되곤 했다.

 이 책은, 윤동주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실존하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작가가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매우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윤동주와 일생을 기묘한 인연으로 함께 한 고종사촌 송몽규의 근친이며 소설가인 작가는, 대상에 대한 절도있는 애정과 문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시인의 일생을 훌륭하게 책 속에 되살려 놓았다. 사망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의 시대를 함께 보낸 사람들로부터 얻어낸 생생한 증언들은 흑백사진 속의 창백한 시인이었던 윤동주를 생동하는 인간으로 부활시켰다.

 몇몇 대표시와 글로써 저항하는 순교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박제가 된 시인은, 상급학교 진학 실패라는 좌절을 맛보는 평범한 소년기를 거쳐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유학할 수 없었던 식민 조국의 현실에 몸서리치던 피 뜨거운 청년기의 갈등 속에 번민하는 살아있는 젊은이였던 것이다. 또한 윤동주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의 배경인 북간도와 당시 세계 정세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세계사와 역사에 무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같은 민족임에도 우리의 의식 속에 비존재로 남아있던 간도와, 부끄러운 친일의 근대사를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는 기개와 자존의 삶을 실천했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뿌듯함마저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움이었다. 한편 개정판에서 추가되었다는,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나오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강처중과 관련된 일화 역시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버릴 뻔한 소중한 언급이라고 생각된다.

 윤동주에 빠졌던 어린 시절, '어두운 시대의 시인의 길'이라는 중학교 1학년생이 감당하기엔 무척 버거웠던 책이 한 권 있었다. 아끼고 아끼며 공들여 읽어낸 책장을 덮을 때,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아려오고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었다. 10여년이 훨씬 더 지나 문득 떠오른 그 책의 행방이 묘연해 아쉬움으로 대신하게 된 이 책은, 어쩌면 여중고생용으로 어쩌면 전국민용으로 팬시처럼 취급되곤 하는..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진짜로 알지 못하는 시인 윤동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성인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2001-09-16 11:52, 알라딘



윤동주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송우혜 (세계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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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16


사실 윤광준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젠가 기사에서 봤던 윤대녕님과의 관련 때문이었고,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 윤대녕님의 추천사가 첫번째 이유였다. 그러니까 출발은 순전히 노란 관심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손 쉽고 친근한 취미인 음악 감상과 독서는 내 삶에서도 예외 없이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음악 없이 못산다고는 못해도 정말 없다면 사는 게 꽤 힘들거라고는 생각하는 측이고, 일찌기 변함없이 곁에 있으며 필요할 때 위안을 아끼지 않는 노래와 책을 사람보다 낫다고 감히 결론 내렸던 스무 살 이후 꽤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귀는 벗이니.. '친구'라고 해도 되려나.

오타쿠니 마니아니 하는 무언가 하나에 미친 사람들이 이제는 그리 유별나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세월을 두고 하나의 대상에 깊이를 더해가며 주변도 함께 돌아볼 줄 아는 참된(?) 애호가들보다는 뿌옇게 거품을 일으키며 한 시기의 열정에 휘둘리는 소란스러운 집단이라는 편견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건 누구건 초심은 그렇듯 가볍기가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차분하고 조근조근하게 얘기를 들려줄 고수들이 더욱 소중한 것이려니.

문외한인 독자의 입장에서도 일명 '오디오 파일'이 되기까지 자신의 경험을 하나하나 펼쳐보이는 필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가 얼마나 '미쳐'있는지를, 그 미침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풍부한 자양과 윤활유가 되어주었는지를 느낄 수가 있다. 또 글에 등장하는 더불어 미쳐 있는 여러 사람들의 오디오를 관통하는 일화들은 하나의 대상에 천착하는 혜안과 심미안을 가진 그들의 모습에 고운 시선을 보태주는 아름다움이었다.

오디오파일 되기란, 돈 많은 사람들만이 만끽할 수 있는 호사스런 취미만은 아니겠지만그렇다고 필자가 언급한 김갑수님처럼 생활고를 무릎쓰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만만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비꼬인 이죽거림이나 천박한 질투의 마음이 한 치도 일지 않았던 까닭은, 대상을 향한 필자의 순수하고 정치한 사랑이 과연 하나의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소리의 황홀'에 전율하며 노래를 듣고 싶다라는 욕구와는 별개로 말이다.


2001-09-16 00:58, 알라딘



소리의황홀(윤광준의오디오이야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음악 > 대중음악 > 대중음악비평/감상
지은이 윤광준 (효형출판,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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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15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로'의 난장 벌이듯 거칠고 진진한 목소리.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어눌하고 소란스러운 말투. 자칫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갈기 머리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 내게 한대수는 몇 곡의 노래와 이름 석 자만이 기억 속에 선연히 살아있는 뚜렷하지만 이미 화석화 되어버린 뮤지션일 뿐이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편견이지만 전문 필자가 아닌 이들이 이름을 걸고 내는 책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터라 원전인 <물 좀 주소, 목 마르요>는 잠시 망설이는 사이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었다.

꽤 꼼꼼하게 연대기순으로 기록된 그의 인생에는, 과연 그가 풍겨내는 분위기만큼이나 평범치 않은 과거와 비일상적인 체험들이 가득하다. 혼란기의 출생과 성장기의 혼돈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 몸소 감행한 일탈과 파격의 기록들은 편견에 함몰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혼혈의 정체성을 유전자처럼 보유한 바람같은 인간 한대수의 존재에 고개를 끄덕이게 해준다.

또 시대의 중심에서 60년대 말, 70년대 초엽의 문화 현장을 겪어낸 그의 회고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청바지와 통키타, 생맥주로만 대변되던 낭만과 향수의 포크 시대에 대한귀중한 후일담이기도 하다. 

너무나 독특한 그의 인생을 넘겨보며 범인으로서 느끼는 거리감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비범한 인생 속에서 그가 구현해내는 인간에의 사랑과 삶에의 열정은 감동스러울만치 아름답게 느껴진다. 여전히 대중 앞에서 노래하고자 하는 이 젊은 뮤지션에게 응원군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한 귀를 내어주고 싶을 만큼.


2001-09-15 23:57, 알라딘



한대수사는것도제기랄죽는것도제기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음악 > 대중음악 > 연예인이야기
지은이 한대수 (아침이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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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13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 속 인물과 작가를 동시에 떠올리며 무슨 비밀이라도 캐는 양 골몰할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은 작가의 경험일까? 이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일까? 

특히나 세상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아 책날개에 붙어있는 간단한 약력과 한 장의 사진, 책 말미 작가의 말 정도가 그에 대해 가늠할 수 있는 정보일 경우.. 사람에 대해 사사로운 관심이 많은 나는, 이미 마음을 사로잡고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작가에 대해 꽤 많은 것들이 궁금해진다. 산문집이 반가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서술자와 화자의 일치는 글을 읽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글을 읽으면서 묘한 관음의 쾌감과 함께 작가와의 심적 거리가 좁혀지는 듯한 친근감에 기분이 유쾌해진다. 물론 이번 윤대녕의 산문은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윤대녕은 나에게 있어, 독자가 바라는 우아함을 가진 작가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의 이름이 쉽게 회자되고, 그의 글쓰기가 트렌드가 되더라도 혹은 그의 글쓰기가 트렌드에 편승한다해도.. 달리 보이지는 않을,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을 그의 글은 내게 남겨줬다.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을 차곡차곡 담아낸 이 여행 산문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소설적인 글쓰기다. 이전에 그의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윤대녕다움'은 장르의 전이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한 이유로 산문집을 읽을 때의 즐거움이 조금 반감되는 느낌도 있지만, 답답하지 않을 만큼만 레이스 커튼을 하나쯤 사이에 두고 독자에게 다가서는 그의 조심성과 예민함이 나는 무척이나 고맙다. 앞으로 그에게서 읽어낼 많은 글들에 대한 기대를 북돋아 준다고나 할까.

지난 겨울 일주일 남짓의 제주 여행에서 돌아온 직 후, <달의 지평선>을 마음에 담아 갔던 여행에서 돌아와보니 그는 또 내게 제주 얘기를 들려준다. 내가 밟았던 길과 내가 보았던 바다는, 덕분에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만 같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새벽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침대 맡에 올려둔 책을 펼쳐들고 그가 이끄는 대로 곳곳을 다녔다. 그를 따르는 여행은 현실적이고 또 몽환적이다. 산문집을 읽으며 기대하게 되는 자잘하고 소소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진다. 그냥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가 간 곳을 내가 다 가지 못할 것이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상상한 그 곳들은 다분히 윤대녕적인 공간으로 마음에 남아 나를 꿈꾸게 하고 동경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가 고맙다.


2001-07-08 03:04, 알라딘


그녀에게얘기해주고싶은것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윤대녕 (문학동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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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