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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2.20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3. 2022.02.09 [중세 이야기]
  4. 2022.01.26 [기묘한 미술관]
  5. 2022.01.11 [행성표류기]
  6. 2022.01.09 [통영]
  7. 2021.12.19 [짐을 끄는 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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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같은바람2022. 2. 22. 15:11

 

 

중세 유럽이 배경인 영화들로부터 시작된 관심이 서양사의 큰 흐름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의 역사 관련 독서로 확인한 것은, 어릴 적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당연히 까맣게 잊혀졌고 교과서에서 강조됐던 커다란 사건은 그 전말도 인과관계도 오리무중인 채 키워드로만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서양사에 대한 대략적인 교양이 바탕이 되어야 소설이든 영화든 더 잘 이해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럼에도 역사 서가의 두껍고 방대한 책들을 당장 소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조금은 편법처럼 선택한 책이다. ‘편력'이라는 제목을 보고 일단 쉽게 한 번 훑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빌렸는데, 목차를 주마간산으로 본 탓인지 생각처럼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주제를 쉽게 풀어낸 덕에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는 서설 '서양사로 세계의 문을 열다'로부터 저자가 선정한 94가지 장면에 대한 글이 시대순으로 담겨 있고, 1권 마지막에 저자의 특별한 연구 주제라는 존 밀턴에 관한 글 5편이 실려 있다. 꼭지마다 다양한 사건과 인물과 현상 등을 주제로 구성된 글들은 짧지만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칼럼처럼 느껴졌는데, 선정된 장면에 대한 간명하고 친절한 설명에 그로부터 비교하거나 참조할 수 있는 한국의 상황 혹은 저자의 사유와 주관이 첨언되는 형식이었다. 오랫동안 서양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며 관련 번역 작업을 해 온 노학자가 후세대들에게 지난 역사를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책 전반에 걸쳐 세심하게 담겨 있다. 어느 정도는 출판사를 믿고 빌려왔기에 관점에 대한 우려는 별로 하지 않았고, 다행히 저자의 글에서는 국수주의적인 시각이 느껴지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짧은 글들의 묶음이어서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얻기는 어려웠지만, 유사한 주제로 이어지는 몇 편의 글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해당 부분에 대한 맥락을 잡기에는 좋았던 것 같다. 도판과 사진이 풍부하게 삽입되어 있고, 주제로 다루는 인물이나 사건 등과 관련된 소설이나 특히 영화에 대한 소개가 무척 많았는데 실제 역사와 형상화한 작품의 차이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짚어준다. 저자는 서설에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세계사 과목이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교육 현장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는데, 그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보려는 노력처럼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독자의 관심을 배가시켜주는 것 같았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는 영화들이 대체로 블록버스터인 까닭에 나로서는 제목만 들어본 작품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그냥 지나쳤던 영화들이 새삼 궁금해졌고 중고 dvd로라도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대로 올수록 각종 사료들이 많아지기 때문인지, 고대와 중세를 다루는 부분은 다른 역사 관련 책들에서도 마주친 내용들이 적지 않았는데 근대와 현대에서는 저자의 관심과 관점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승리한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역사 기록의 특성과 한계는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근현대 부분의 몇 꼭지에서 글 쓰는 여성과 여성 참정권 운동의 주역들을 다룬 부분은 반가웠고 헬렌 켈러가 식민지 조선에 방문했던 이야기와 당시의 사진은 나만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고 신선했다. 1권에 비해 2권에서는 좀 더 지엽적이고 미시사적인 주제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는 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시대적 상황이나 연관성 때문인지, 읽는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국가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나오는 건 개인적으로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얇지 않은 두 권의 책 전반에 저자의 사적 견해가 꽤 꼼꼼히 배어 있는 것에 비해, 의아하거나 거슬리는 부분이 단 두 군데(1권의 흑사병 부분에서 '작은 선물'이라는 표현, 2권의 아리안족 인구 정책 부분에서 '출산장려정책 하나만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에 불과했다는 건 은근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책 모임에서 정한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를 읽으며 수시로 부대꼈던 걸 떠올리며, 이 저자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찾아 보니 저자는 예전에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의 역자이기도 했고, '스탠다드한'(그런 게 있다면) 서양사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바람에 부합할 것만 같은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의 역자이기도 했다. 무척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구 분야에 진심이고 관점에도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 '박상익'이라는 저자를 알게 된 게 큰 수확인 책이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읽으며 수십 개의 포스트잇을 붙여뒀지만 따로 메모나 정리를 하지는 못한 아쉬움에 목차를 옮겨둔다.  


1권

제1부 고대
1 인류는 모두 하나
2 크로마뇽인의 공감주술
3 람세스, 모세, 그리고 프로이트
4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시민 정신
5 어린 시절 꿈으로 트로이를 발굴해낸 하인리히 슐리만
6 패자도 동화시킨 로마인의 정치적 지혜
7 한니발의 계산착오
8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9 ‘반달리즘’과 피맛골

제2부 중세
10 문맹의 샤를마뉴, ‘유럽 통합의 씨앗’을 뿌리다
11 중세 대학의 탄생
12 중세 유럽의 대학 생활
13 12세기는 번역의 시대
14 중세 전성기의 종교·문학·건축
15 중세 베네치아의 ‘날개 달린 사자’ 브랜드 마케팅
16 와트 타일러의 난과 지배 계층의 ‘꼼수’
17 안경 제조법, 중세 유럽에선 ‘1급 비밀’
18 중세의 삶과 죽음
19 화약, 중세 유럽의 ‘비대칭 전력’
20 줄무늬의 이중성
21 우물 안 개구리 중세 유럽인이 꿈꾼 ‘외계’
22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
23 간발의 차로 뒤바뀐 잉글랜드의 운명
24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

제3부 근대 Ⅰ
25 대담한 오류 덕분에 항로를 찾아내다
26 천연두로 몰락한 아스텍 문명
27 목숨보다 신용을 중요시한 바렌츠 선장
28 루터의 만인사제주의와 근대
29 ‘정신의 귀족’ 자부한 세계시민 에라스뮈스
30 유럽 부흥의 계기 마련한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
31 세르반테스, 에스파냐의 번영과 몰락을 문학에 담다
32 분열의 시대에 더욱 빛난 지성 몽테뉴
33 바로크적 지성, 파스칼
34 미혼 여성이라는 약점을 장점으로 활용한 엘리자베스 1세
35 영국 여왕의 ‘007 스파이’
36 가이 포크스 데이, 극심한 갈등도 세월 흐르면 ‘축제’로
37 세 분야에서 천재성 보인 뉴턴
38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근대’
39 루이 14세의 절대권력, ‘시간’이 심판하다
40 표트르 대제 개혁의 한계
41 18세기의 그랜드 투어, 해외 관광여행의 효시
42 18세기 유럽의 위조 미술품 거래
43 정통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
44 영국의 천재 공학자 브루넬

제4부 밀턴
45 종교가 권력이 될 때 얼마나 무섭게 변질되는가
46 권력 앞에 당당한 영혼
47 생각을 숨기고 정직한 표정을 지으면
48 존 밀턴, 한국 지식인에게 ‘영혼’을 묻다
49 언론 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

 


2권

제5부 근대 Ⅱ
50 ‘원숭이’로 조롱받았던 다윈, 승패의 관건은 도덕성
51 다윈과 글래드스턴,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
52 선진기술 과시한 런던 박람회
53 17세기, 어린이가 어른으로부터 독립하다
54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
55 100년 전 프랑스 “목욕할 때도 몸 보지 마”
56 ‘철혈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 도입
57 괴테의 모국어 자랑, 관건은 ‘풍부한 콘텐츠’
58 산업혁명 선두주자 영국이 독일에 뒤처진 이유
59 옥스퍼드 영어사전, 초판 간행까지 71년 걸려
60 나폴레옹 시대 신병의 72퍼센트는 키 150센티미터 이하
61 페달 없이 발차기에 의존한 최초의 자전거
62 리스본 대지진 참사를 현명하게 수습한 폼발 총리
63 후세가 잘못 이해한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
64 “머리 위에는 별, 마음속에는 도덕” , 철학자 칸트
65 카를 마르크스의 다양한 모습
66 인문학 천재 존 스튜어트 밀
67 페미니즘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68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 쓰레기통 정치를 바꾸다

제6부 현대
69 영국 자유당의 사회개혁, 중산층 외면으로 ‘흔들’
70 여성 참정권에 바친 일생, 에멀린 팽크허스트
71 여성 참정권 부르짖으며 죽음 택한 에밀리 데이비슨
72 전쟁 계기로 일터 나간 영국 여성, 보답으로 참정권 획득
73 무능한 국방장관 수홈리노프, 러시아 왕조 멸망 불러
74 사상 최악의 참호전 벌어진 1차 세계대전
75 극한의 전쟁터에서 꽃핀 ‘크리스마스 평화’
76 빨간 마후라의 원조가 된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
77 전승국들이 강요한 베르사유조약, 더 큰 재앙의 씨앗 되다
78 레닌 사망, 신학생 출신 스탈린이 우상화 작업 주도
79 스탈린이 키운 ‘붉은 전문 인력’, 소련의 새 특권층 형성
80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퇴출, 나치의 독일 장악 신호탄
81 독일과 한국의 문맹률과 독서율
82 식민지 조선을 찾은 헬렌 켈러, 온몸으로 ‘장애 극복’ 외치다
83 영화사상 최초의 섹스 심벌, 루돌프 발렌티노
84 ‘신데렐라 복서’ 제임스 브래독, 대공황기 미국 서민의 영웅
85 반세기 전 한 방에 여덟 식구, ‘파리의 지붕 밑’ 심각한 주택난
86 ‘비스마르크 신화’ 이용해 이미지 조작에 성공한 히틀러
87 아이 낳으면 수당·면세·융자, ‘아리안족 늘리기’ 열 올린 나치
88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개시, ‘지상 최대의 작전’
89 히틀러, 신무기 ‘V1’ 발사 개시, 전쟁 이길 것으로 착각
90 히틀러의 최후
91 미군 덕분에 자유 찾은 프랑스, 온 사회에 ‘미국 신드롬’ 번져
92 ‘반인륜 범죄’ 단죄한 뉘른베르크 법정
93 “독일군과 관계했으니 배신자”, 프랑스의 성차별적 여성 삭발
94 언론인과 문인에게 더 큰 책임 물은 프랑스 사법부
95 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과 몽고메리
96 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97 오바마 부친과 화해한 미 백인, 동족끼리도 ‘소통’ 안 되는 한국
98 프랑스 고령사회
99 스위스 시계산업의 흥망


박상익
2014.12.22초판1쇄인쇄 12.23발행, 도서출판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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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2. 20. 12:22

 

 

그의 시를 탐독했거나 새기고 곱씹는 시구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트위터의 ‘최승자봇’ 계정을 일찌감치 팔로우해 어느 밤 마주친 짧은 문장들에 애잔하게 공감할 때가 있었다. 마음이 유난히 그러한 때에는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정작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최승자라는 이름 세 글자에 무겁고 어둡고 세상의 어느 경계에 없는 듯이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러나 가끔은 기댈 만한 그늘로서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더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산문집 발간 소식을 듣고 궁금해 사두었는데, 2월 모임의 책으로 정해져 반색하며 읽었다.

'배고픔과 꿈', '헤매는 꿈',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라는 제목의 4부로 구성된 책은 1976년부터 1989년까지 쓰여진 글들로 1989년에 출간됐던 판본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쓰여진 부분을 추가한 산문집이다. 그의 글들을 오래 품고 살았던 펴낸 이가 병상의 그를 찾아가 발간을 청했고 몇 년이 지난 후 그러마고 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추가된 부분 역시 십 년은 전에 쓰여진 것이고, 이 책을 만들 때 시인은 글을 다시 검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도 들었다. 일찍 죽을 것이고 자살을 할 것 같다는 확고한 예감으로 젊은 날을 보낸 그가 일흔 살이 되어 지난 산문집을 펴내며 남긴 2021년 11월 11일의 '시인의 말'은 짧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인생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어느 정도는 초월한 듯한 시인의 '말'에서는 어떤 쾌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젊은 날 그가 쓴 산문들에서는 타고난 비관과 겨우 부여잡은 낙관이 교차하고, 운명처럼 따라붙는 회의와 우울을 떨치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읽힌다.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기억에서는 순박한 시골 정서와 조화로운 자연이 선사하는 평온함이 느껴지지만, "나의 유신론자 시절"이나 "유년기의 고독 연습"에서는 어떤 양가적 욕망의 근원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첫 글의 첫 문장은 이렇다.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세계의 폭력성과 괴로움의 운명을 토로한 시인은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싶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이라고 쓰지만 곧, "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말이다. 

젊은 날 그가 쓴 글에서는 일찌감치 행복을 단념한 자의 비애와 삶에 대한 적극성과 결기가 함께 드러난다. 분열적이라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는 자의 내면이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의외로 꿈과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해마다 마주하는 달력의 마지막 장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성찰이 반복된다. 글에서 느껴지는 성인이 된 후 그의 일상은 가위눌림과 공포,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무대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와 달리 어머니의 죽음 이외에는 구체적인 사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양철북 유감"을 읽으며 시의 영혼을 깊이 품고 사회와 얽혀들어 싸우고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그의 20대를 함부로 상상했는데, 그냥 상상이므로 오로지 상상일 뿐이지만 자기연민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글로 마음대로 짐작한 그라는 사람이 괜히 애틋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복작한 서울을 떠나 충무(!)며 경주며 마침내 제주도까지 건너가는 꿈을 꾸며 비현실적이라고 자가용은 삭제했던 그가 십년 후 "일중이 아저씨 생각"을 마무리하며 교외를 드라이브하는 부분에서는, '그런' 시를 쓰지만 구체적 일상도 꼼꼼히 채워나갔나 보다 싶어 과거의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20대에 읽었다면 반복해 읽으며 밑줄을 긋고 옮겨적기도 했을 많은 문장들을 심상히 넘기며 읽어나갔지만 행간의 어휘를 너머 아예 글의 주제로 삼아 죽음에 대하여 쓴 부분에서는 자주 멈칫했다.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그래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되찾은 것 같다."라는 문장은 어머니의 죽음을 빼면 거의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은 특별하지 않은 통과의례에 불과하지만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의 침잠은, 앓고 있는 당시의 당사자에게는 어떤 말이나 생각으로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일 수밖에 없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욕심이거나 치기의 발로였다고 생각하지만, 자살의 용기는 없으나 사는 일을 습관처럼 회의하며 늘 죽은 이들로 향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는 등단 40년이 넘은 시인치고 적은 수의 시집을 냈다.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물 위에 씌어진] [빈 배처럼 텅 비어], 이 중 두어 권은 사서 읽기도 했었으나 내게 시는 한 번 읽는 것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어서 쭈르륵 이어진 시들을 대략 살펴보고 말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짐 줄이기에 혈안이 된 시기에 중고서점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그의 시들은 우리집을 떠났다. 고요한 새벽 트위터 타임라인에 떠오르는 짧은 시구들이 오히려 내게는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지만, 굳어진 마음을 쪼개며 새겨질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여전히 그의 어떤 문장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오래 병원 생활을 했다는 걸, 언젠가 기사로 읽었는데 잊은 채로 마지막 부분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었다. 처음 목차를 살펴보며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는 문장에 마음이 멎었는데, 흔히 생명수라 여기는 오아시스마저 죽음과 결부시키는 시인의 인식과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가 본문을 읽으며 그것이 수피즘 신비체계 이야기의 인용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깊은 고정관념에 헛웃음이 나왔다. 최승자는 내게 그런 존재로 여겨진 것 같다. 세계의 비의와 비참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고독한 자,라는 이제는 폐기된 이미지를 체현하는 마지막 시인. 많이 읽히고 회자되면 매끈한 세상의 한 봉우리에 오르는 문인들이 즐비한 시대에 그가 다시 소환된 의미는 무엇일까. 한 사람의 곡진한 마음 덕분에 내게까지 와닿은 글들에 약간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한다.  


최승자
2021.11.30초판1쇄 2022.1.5초판6쇄발행,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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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2. 9. 15:33



[베네데타]와 [그린 나이트]를 보며 중세가 궁금해졌는데, 모임 책 빌리러 갔다가 눈에 띄었다. 학창 시절 배운 세계사 지식은 당연히 휘발되었고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명, 지명 같은 것들은 맥락 없는 편린으로만 기억되고 있는 터라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답답할 때가 많다. 본격적인 역사 공부를 생각한 건 아니니 가벼운 마음으로 데려왔는데, 초반부터 휴대폰 메모장에 옮겨 적느라 엄청 느린 독서가 되었다. 이건 기억해야겠군 싶어 내용을 요약해 입력하다 보니 전체 필사가 될 판이어서 그만뒀는데, 포기한 덕에 기억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중간부터는 정말 '이야기'로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세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476년부터 에스파냐가 영토를 회복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1492년까지다. 학자에 따라 다른 주장도 있다지만 '중세 천 년'이라고 할 때의 일반적인 구분인 것 같고, 그렇다면 중세는 그냥 '중세'라고 단일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긴 시간과 너른 공간을 무대로 하는 시대다. 저자는 "'중세 암흑시대'라는 말로는 절대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매우 역동적으로 발전하던 시대"라고 지적하며, 유럽 대륙 전체가 역사의 무대로 펼쳐진 "진정한 유럽 역사의 시작", 이교 신들과의 싸움, 기독교 내분, 교황과 황제, 교황과 교황의 싸움이 벌어진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적 전설과 기적, 기사들의 모험을 둘러싼 "환상의 시대", 인간 중심, 이성 중심 사유로 돌아오는 합리화 과정 "르네상스", 지중해 중심 사유에서 벗어나 대서양을 토대로 세계로 나아간 중세의 끝 "제국주의의 출발 지점" 등 다섯 가지 키워드를 특별히 뒤표지에서 강조하고 있다.

 

거의 모든 부분이 새로웠고 이렇게나 서양사에 무지했나 싶어 당황스러웠는데, 400쪽 가까운 본문에 빼곡히 담긴 무수한 이름들과 이야기들을 제대로 기억하기는 어렵겠지만, 중세 시대 역사의 대략적인 흐름에 대한 이해에는 크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저자는 문화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을 몇 차례 언급하는데, 그는 인류의 삶에서 토대이자 틀을 이루어온 역사의 세 잠재력으로 고정된 힘인 국가와 종교, 움직이는 힘인 문화를 꼽는다. 국가가 사라지면 종교의 힘이 우세해지고, 국가와 종교가 서로 견제하며 우위를 다투고 혼란을 겪게 되면 문화가 강력히 부상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문화는 국가와 종교에 대한 비판이며, 국가와 종교에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다."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그리고 중세 말기 르네상스의 등장을 설명하는 인상적인 한 문장이었다.

 

책은 중세 초기와 중기, 말기의 중요한 사건들과 영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국가나 왕조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에 익숙한 세대로서 가끔 헷갈리기는 했지만, 관련 지도와 그림 자료가 풍부하고 쉽게 설명이 되어 있어 다 읽은 후에는 총체적인 이해에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책을 선택한 이유가 된 영화가 수녀원과 기사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어서 그 부분이 궁금했는데 중세의 기사들과 관련해서는 기원과 역할, 십자군 전쟁과 이후 상황까지 유기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막연했던 느낌이 많이 해소되었다. 종족과 문화와 종교와 언어가 계속 뒤섞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언어의 역할도 흥미로웠는데 중남미가 라틴어에서 파생한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라고 불린다는 점, 중세 유럽 지식인 계층의 공용어였던 라틴어 대신 토스카나 지방 사투리로 쓰인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이 14세기 초 이탈리아 국어가 시작된 지점이며 이것이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의 큰 동력이었다는 점, 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탈리아어로 쓴 글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기 위해 라틴어로 번역되어야 했다는 점 등은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서양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 상태에서 읽었다면 더 좋았을 책이었는데, 순서는 바뀌었지만 이 책 덕분에 찬찬히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와 사람들인 것 같아도 기록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서 드러나는 지금과 다르지 않은 인간사와 욕망 같은 것들이 느껴져서 그런 것도 같다. 어지간한 공부로는 그 방대한 역사를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겠지만, 과한 욕심 대신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 천천히 읽어가면 어떨까 싶다. 역사가 재미있는 건, 과거의 기록으로 남은 절대다수가 지배계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리고 중반부 이후 갈수록 편안한 입담이 느껴지는 저자의 필력도, 이 책과 역사에 대해 흥미를 느낀 큰 요소였다.  

 


안인희
2021.3.20초판1쇄발행, 지식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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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 26. 19:13

 


책 모임의 올해 첫 번째 책, 덕분에 오랜만에 미술 관련 책을 읽었다. 저자는 파리에 거주하는 프랑스 공인 문화해설사, 코로나19로 이전과 같은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은 하나의 가상 미술관처럼 취향, 지식, 아름다움, 죽음, 비밀의 방이라는 다섯 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고, 저자가 선별한 화가와 대표작 그리고 관련된 작가와 작품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책이 정해지고 목차를 살펴봤을 때 반 이상이 모르는 화가여서 지레 거리감을 느꼈는데, 재미있게 잘 읽히는 책이어서 금세 다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라지만 그림에 대한 도상학적 해석이나 화풍, 특징 등의 기본적인 내용은 문외한의 입장에서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었다. 그림을 자세히 읽어주는 부분에서 의아한 경우가 두어 번 있었고, 각 절의 첫 번째 그림 중에 너무 어두워 저자의 구체적인 지시와 설명을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는 점은 아쉬웠다. 그런 경우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인쇄상의 문제인지 뭔지 모르겠다. 각 절의 마지막에 간헐적으로 덧붙여진 '깊이 읽는 그림'이라는 꼭지는 본문에 잘 녹여내도 좋았을 것 같은데, 큰 임팩트가 없음에도 독립적으로 다룬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부분은 화가와 작품만이 아니라 그가 활동한 시대와 사회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쉬운 설명이었다. 여기에는 분명 저자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점도 녹아있을 텐데, 읽으며 부대끼는 지점이 전혀 없어서 편안했다.

그림에 문외한이다 보니 정말 유명한 작품 말고는 초면인 경우가 많았는데, 렘브란트의 <갈릴리 호수의 폭풍>를 보고 영화 [아네트]의 포스터가 바로 떠올랐다. 전혀 무관한 그림들인지 모르겠지만, 폭풍우 치는 바다와 하늘의 색감이 너무 유사했고 위태하게 떠있는 배와 휘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닐까 싶은 혼자만의 추측으로 괜히 즐거웠다. 고흐의 이야기 부분에서는 정말 예전이 되어버린 배낭여행, 오베르쉬르우아즈를 들렀던 때가 떠올랐다. 가셰 박사의 집이며 까마귀 나는 밀밭, 고흐가 숨을 거둔 여인숙의 방, 테오와 나란히 묻힌 묘지를 둘러보며 괜히 애틋한 마음이 되었던 게 까마득하다. 얼마 전 양장본으로 재출간된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세트를 욕심내 사둔 게 잘한 일처럼 느껴졌다.

읽고 나면 이야기의 편린들이 서로 뒤엉키기도 하고 깊이 있게 집중하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길지 않은 글들이 옴니버스로 엮인 책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이 책은 그럴 수밖에 없는 구성이었고 각각의 이야기에 충분한 내구성이 느껴졌지만 역시나 산만한 독후감이 남기는 했다. 옛날 사람이라 연대기적 구성에 익숙한 탓도 있는데, 문화사와 사회사에 대한 설명이 많은 만큼 비슷한 시대의 다른 면모들이 부각될 수 있도록 엮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한 방 안에서 수백 년의 시대를 오가는 일은 다이내믹하지만, 지적 탄력성이 떨어진 독자 입장에서는 좀 아쉬웠다.

모임에서 이야기 나눌 책이기도 하고,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꽤 재미있기도 해서 저자의 유튜브 채널에서 출간 기념 라이브를 찾아서 봤다. 무슨 이유인지 책이 저자에게 도착하지 않아 책의 내용보다는 집필 과정이나 관련 이야기를 주로 들을 수 있었는데,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저자 부부에게 우선 목표는 10만 부 판매였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출간 보름 만에 나온 6쇄였는데, 지금은 어디까지 갔을까. 프랑스 여행에서 직접 해설을 들었거나 유튜브를 통해 소통하는 이들의 소소한(?) 팬덤도 느껴졌는데, 나는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이 바람대로 책 많이 팔고 이후에도 재미있는 책을 내주면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그때는 조금 더 긴 호흡의 글들이면 좋을 것 같다. 


진병관
2021.9.15초판1쇄 9.30초판6쇄 발행, 빅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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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 11. 22:42

 

 

제목은 은유가 아니었다.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는 건축가 블랙스미스의 수첩을 의지해 여러 행성을 떠돌고 있다. 수첩에는 행성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인상이 적혀 있다. 행성의 이름은 별자리, 주인공은 수첩에 쓰인 내용들을 참조해 별을 살피고 기록하며 다음 행성으로 나아간다. 어려서부터 '천계도감'을 끼고 산 나에게는 경계없이 흐르는 외계의 많은 것들이 낯설지 않다. 어린 왕자가 떠돌던 때보다 행성의 특징과 자연 환경에 대한 지식도, 각종 우주 생명체들에 대한 지식도 많이 쌓였다.

나에게 행성 표류는 생을 건 모험이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 같기도 하다. 표류하면서 만나는 갖은 존재와 현상은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재난도 이어진다. 하지만 왼쪽 골반에 빼곡한 점들을 은하수라 불러준 엄마, 운명론을 맹신하는 집에서 태어나 ‘몸에 은하가 흐르고 유전자에 외계가 섞여’ 있다고 믿어온 내게는 낯설고 두렵기보다 흥미진진한 일이다. 나에게는 행성의 생명체뿐 아니라 행성 자체가, 별자리나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들 역시 모성母星을 떠나 만난, 나를 비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길동무다.

낯선 단어와 감각으로 인식을 교란하고 전복하는 표류기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견고하게 구축된 세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유려하고 자연스러웠다. 나가 표류하는 행성들에서 종이비가 내리고, 각진 바람이 불고, 구름의 뼈가 만져지고,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고, 알에서 나무가 태어나는 일은 놀랍지 않다. 오네이로이상제나비나 호리병해파리 같은 이름의 생명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싶어 검색해 보았는데 결과는 책과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작가는 오랫동안 우주와 외계를 마음에 담고 상상하고 그려보고 쓰는 데에 시간을 들여온 사람일 것 같다. 

나가 행성들을 떠돈 지는 이미 수백 일이 지났다. 날짜는 알 수 없지만 Dday를 기준으로 얼마가 지났는지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시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D+∞ 표기 아래 교차한다.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와 37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살고 떠났다는 오빠의 존재, 어렸을 적 잠시 키웠던 병아리의 작은 무덤을 마음에 담고 지냈던 일, 동아리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마시고 취하던 시절의 기억 같은 것들. 동시대와 알 수 없는 시대를 떠도는 두 겹의 나가 만나는 지점은, 알 수 없는 세상을 표류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심연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제목은 삶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지난해 봄 처음으로 RCE세자트라숲을 찾아갔을 때, 묘석처럼 누워 있는 시비를 마주쳤다. 예기치 못한 부재의 징표에 조금 숙연한 마음이 되어 "태몽집"이라는 시를 읽고 시비 곳곳에 새겨진 활자들을 유심히 읽었었다. 알 듯 모를 듯한 생사의 비의를 담은 것 같은 무거운 시 옆에 “여긴 여름이야, 거긴 어때?” 새겨진 문구가 가볍고 상쾌했는데,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빨대가 꽂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어 괜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숲에서는 애잔한 마음이 되었지만 잊고 지냈었는데, 이 책 덕분에 시인을 다시 만났다. 유고 산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기나긴 시 같은 느낌이었고, 그는 짧은 현생을 오롯이 시인으로 살다간 사람이 아닐까 싶다. 세계와 우주를 경계없이 사유하며 끝없이 여행하는 영혼, 표류하며 단련된 자유로운 감각과 인식으로 여행은 경이롭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여정이 되지 않을까. 지구별에서의 생을 마감했을 뿐 시인은 어디에선가 다른 존재로 유영하며 기록되지 않은 표류를 이어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무리는 분명히 있어, 엄마.” 언젠가 그 길의 끝에 섰을 때 시인이 다시 한 번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희준
2021.7.15.초판1쇄인쇄 7.24.발행,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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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 9. 15:41

 

 

올해의 첫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사두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내겐 큰 의미로 다가오는 제목 때문에 궁금했지만 작가 소개 첫 줄의 신춘문예 당선 신문사가 마음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새해를 함께 시작한 지인들이 돌아간 후 예정됐던 알바를 마치고, 선입견과 편협함을 조금은 줄이는 올해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집어들었다. 

통영에서 나고 자라며 철든 후부터는 고향을 뜨는 것만이 꿈이었다는 작가는, 1998년에 캐나다 밴쿠버로 떠나며 꿈을 이뤘다. 이민 1년 차에 둘째를 낳고 모든 걸 쏟아부어 남편과 차린 식당은 아이들과 길바닥에 나앉는 걱정을 할 만큼 어려웠고,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계산대 지키는 고역을 반복하다 더는 '기다리지 않기 위해' 한국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민을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이주한 자들이다. 

2005년부터 2020년 사이에 발표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많이 읽지 않지만 그나마도 어느 정도 '검증된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주로 읽었던 탓인지 '어른의 세계와 시간을 담은' 이야기들이 편안하고 흥미로웠다. 수록된 작품이 고루 좋았는데 특히 주인공이 중년 여성인 경우, 자신이 놓인 상황이나 주변인들에 대해 느끼는 섬세한 감정 묘사에 동세대로서 조금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오랜 열망으로부터 도망다녔던' 명희의 이야기가 담긴 <나이프 박스>의 몇 구절들에는 오래 눈이 갔고, 본인이 인지하는 사실과 사로잡힌 망상을 오가는 <혜선의 집> 주인공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는 영화 [더 파더]를 보며 느꼈던 두려움과 혼란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든 익숙한 곳을 떠나온 이들의 삶은 외롭고 지난하다. 다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흐른 시간의 끝에는 늙고 아픈 몸이, 낯설게 멀어져버린 자식이, 선뜻 용기낼 수 없는 꿈이 아스라하다. 적은 수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 짧은 소설들이지만, 두세 차원의 이야기가 연결되고 그들의 현재와 연관된 경험과 사건이 유기적으로 교차되는 짜임새 덕분에 느껴지는 깊이와 여운이 좋았다. 작가가 뚝 떼어내 생기를 불어넣은 일상의 단면,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마음의 파동, 삶의 시간과 함께 쌓여 흐르거나 남겨진 마음과 인연, 다양한 시공간에서 얽히고설킨 모든 것들의 결과로 닿은 지금. 떠밀리듯 선택한 삶을 이어가는 인물들의 일상은 대부분 서글프고 침울하게 느껴졌지만, 와중에도 끝내 놓지 않은 무언가는 끈이 되어 생을 잇는다.

많이 궁금해서 제일 먼저 읽을까 하다가 순서대로 만난 <통영>은 자신만 몰랐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 계속 살아갈 수 없어 떠났다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잠시 돌아온 현택의 고향이었다. 기대했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마음과 시간을 더하며 잔뜩 부풀렸던 '나의 통영'이 여느 작은 소도시처럼 낡고 오래된 사람들이 갖은 사연들로 엮여 살아가고 있는 곳이라는 일종의 현실감을 일깨워준 느낌이었다. 지긋지긋해하며 떠났다가 수십 년 잊었던 고향의 얼굴들을 마주하는 현택의 거리감이나 안온함은, 그곳이 어디든 떠나고 돌아온 자의 마음에 새겨지는 비슷한 자국일 것이다. 마음속에서나 그러할 뿐 세상 어디도 마냥 천국이거나 지옥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그러나 '고향'이어서 유일한 것이 되는 양가감정과 흔적. '누군가들의 통영'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나이프 박스>를 읽으며 마음이 가장 일렁거렸다. 오래 기다리고 바랐던 순간을 맞았지만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노트북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몇 시간 동안 지나치게 정성을 들여 곰국을 끓이는 주인공에 내 모습이 겹치기도 했던 것 같다. “실습 내내 이토록 완벽한 고립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전 생애가 그랬던 것도 같았다. 명희는 왜 스스로 이곳으로 걸어 들어와 머리를 땅속에 처박고 이런 색다른 고립을 자처했는지 생각했다. 진짜 실패를 피하려고 의도적인 좌절을 선택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을 안전한 실패라고 여긴지도.”(91쪽) 이런 부분에서는 대책없이 홀로 이주한 후 마음이 바닥을 칠 때의 나를 타인의 활자를 통해 만나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과 달리 명쾌하고 가벼운 마무리에, '가짜 욕망'을 애써 완수하고 흔쾌히 처분하는 주인공의 선택에 나를 이입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초반에 잠깐 등장한 삼손 덕분에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나라 에리트레아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도 궁금해졌는데 그뿐이었던 건 조금 아쉬웠다.

 

<사슴이 숲으로>와 <국경의 숲>을 읽으면서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나 영화에서 보았던, 가본 적 없는 이국의 풍경을 내멋대로 상상했는데 그 안에 그런 사연들과 사람들이 존재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좀 먹먹해졌다. 시간이 더 지나 아득한 숲으로 이어지는 외진 길이나 쨍한 햇빛이 내리쬐는 길게 이어진 해변 같은 장면을 마주치면 영화였나 책이었나 하며 소설에서 읽은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과 기록에 집착하는 고질로부터 비롯되는 삐걱거림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아, 다른 수록작들에 대해서는 그저 읽으며 들었던 느낌과 생각을 흘려보내려고 한다.

 

작가는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통영에 대해 이렇게도 썼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나는 매일매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진작에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그렇게 떠나고 싶었다는 그곳을 갈망했고 이제는 살아가는 나는, 어디에서든 살아간다면 조금 더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한다. 표지 제목 글자에 박으로 입혀진 동그라미 안의 작은 반짝임들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나는 몇년이나 마음속에서 윤슬처럼 반짝이던 곳, 통영에 살고 있다.


반수연
2021.6.15초판1쇄 7.20초판2쇄발행, (주)도서출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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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2. 19. 11:29

 


책 모임의 2021년 마지막 책이었다. 나 말고는 다들 바쁜 단체 활동가들이라 한 달에 책 한 권 읽는 것도 어렵다며 시작한 모임이어서 너무 두껍거나 부담스러운 책은 피하는 편이었다. 참여자들이 돌아가며 추천하는데 2019년 8월 [장애학의 도전]이 시작이었고, 몇 달 전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었다. 모임원 대부분 운동단체 활동가이고 장애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연대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장애학의 도전]은 다들 무리없이 읽고 이야기를 나눴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와 과학기술을 연결하면서 조망하는 너른 스펙트럼과 깊은 문제의식이 새로웠지만 아주 잘 소화하기는 좀 어려웠다는 독후감이 대체적이었던 것 같다. 그 책으로 나는 '신경전형성' 혹은 '신경전형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는데,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이 책은 모임 성원 일곱 명 중 세 명이 각자의 집에서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하나는 책을 얼마 읽지 못했지만 끝까지 읽어보겠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과 나는 다 읽었지만, 이야기는 명쾌하기보다 각종 의문과 질문과 혼란스러움 같은 분위기에 가깝게 흘렀다. 사실 나는 책의 시작부터 ‘이 책에 쏟아진 찬사’를 마주하며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출간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이미 꽤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고, 추천사와 역자 후기에 쓰인 대로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된 계기와 과정에 노들야학이라는 현장이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나 역시 노들야학의 활동을 응원하는 사람 중 하나이고, 고병권이나 홍은전의 책을 읽으며 깨닫고 돌아보고 생각하고 마음에 담고는 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책을 한껏 열린 마음으로 잘 읽어보고 싶었으나, (예전에 가끔은 그 이유로 선택하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한 권의 책에 범람하는 '찬사'와 '추천'의 거품에 멀미가 일기 시작했고 읽기도 전에 무언가 강권하는 느낌이어서 못나게도 여릿한 저항감과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의 '찬사들'과 '추천사'는 마지막으로 읽겠다고 미뤄두었지만 제목도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이라는 부제도 가벼운 것은 아니어서, 나를 흔드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나 인식의 충격을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조금은 다스려야 했다. 뭉툭하게 예상한 대로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문제의식이 많이 담긴 질문의 책이었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동물권 관련해서는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담론의 입문을 건너뛰고 준비 없이 심화 과정을 접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에세이와 학술서를 결합한 성격의 글이어서 읽는 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선천성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 당사자인 저자의 경험이 부드럽게 서술되고 그 위에 여러 가지 논증과 사유와 성찰이 더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장애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동물 같다는 놀림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 자신을 동물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동물과 자연에 친화적인 유년 시절은 그런 느낌을 부정적 인식으로만 이끌지 않았고, 동물과 인간의 차이나 인간이 어떤 동물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먹고 죽이는 현실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성장하며 동물권 운동과 장애 권리 운동을 접하면서 저자의 의구심은 서로 연결되고, 인간이 동물을 대상화하고 죽이고 먹고 그러한 일이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잡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서술한다. 동물과 장애인에 대한 억압의 기저를 탐구하며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가르고 그 기준점을 이성의 유무에 두는 서구 철학의 전통이다. 시간이 흐르며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에 따른 구분도 생겨나지만 아무튼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성이 결여된 존재라는 것, 즉 현대 거의 모든 문명화된 국가와 지역에서 당연한 인식인 인간중심적 가치관 자체다.

 

기존 세계의 문제와 당연하다는 인식 뒤에 자리한 무의식 수준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그렇게 시작되어 비장애중심주의적이고 신경전형적이고 종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인류의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관념이 토대가 되어 귀결되는 지점의 자명한 잔혹함과 폭력성이 동물은 물론 장애인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었다는 논리적 결과에 대해, 머리로는 인정이 되면서도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뭉뚱그려진 가해의 편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작용하기도 했던 것 같고,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동물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어서 그런 점도 있다. 하지만 뭐랄까. 쾌고감수능력이든 이성이든 인간의 잣대에 의한 판단이고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일방적인 단정일 뿐이라는 점에 수긍이 되면서도,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해방된 세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에 생각이 미치자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혔다.

 

저자는 이성중심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 신경전형주의, 종차별주의 등을 하나의 원류로부터 비롯된 동일 선상의 관념으로 놓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런 논리적 귀결이 합당한 것일 수 있지만 이것이 어떤 사고 실험이나 단지 사유의 해방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너무 광범위하고 거친 전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류가 발전시키고 유지시켜온 세계의 방향에 모순과 부조리가 팽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의 일상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이성을 근간으로 한 인식과 실천으로 매개되고 체계화되어 있는데, 이성중심적이고 신경전형적인 세계의 원리를 반전시킬 때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세계의 모습은 어떨 것일지가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 중에는 나 역시 궁금한 부분들이 겹쳐지기도 했는데, 그에 대해 답할 수 없다거나 차라리 답하지 않겠다거나 하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경우들이 있었다. 역사 이래의 관련 철학과 사례와 운동 등을 면밀히 논증하며 도저한 윤리적 차원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해결되어야 할 현실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하거나 반문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이것이 예술가의 글쓰기 방식인가 싶으면서도 당혹스러운 마음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유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그로부터 얻은 단초를 통해 현실에 대한 전복적 문제의식을 확산하고자 하는 전략일까 싶기도 했지만,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너무 임의적인 서술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아쉬웠다.

 

[사이보그가 되다]에 어느 일본인 활동가가 만약 장애를 완치할 수 있는 약이 개발된다 해도 자신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책에서도 장애 프라이드라 할 만한 유사한 맥락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피터 싱어와의 대담과 그를 회상하며 덧붙이는 부분들에서 저자는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238p)라고 쓴다. 장애 여부가 한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압도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는 것이라면, 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자부심과 해방감은 경험과 시간의 결과일 수 있고 그렇다면 비장애인이 그를 공감하거나 ‘먼저’ 인식하고 발화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극소수의 장애 연구자와 활동가 들이 절대다수가 신봉하는 장애에 대한 병리적이고 치료적인 접근에 대항해 분투하는 현실에서 취하는 방어적 태도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 선천적 장애를 가진 우리는 장애가 모든 것을 구축하는 존재일 거예요.”(244p)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장애인이듯, 비장애인으로서 가능한 것은 한계적이라고 느낀다.

 

역사적으로 장애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돌봄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 대신 권리와 서비스, 나아가 장애인들의 참여와 기여를 제한하지 않는 접근성이 확보된 사회를 원한다고 선언해왔다.

지난 수년간 페미니스트 장애학 연구자들과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다리를 놓고, 돌봄 대상자와 돌봄 제공자 모두의 가치 및 억압적인 역사를 인식하는 돌봄 이론을 정립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작업에서 고려된 측면 중 하나는 돌봄받을 필요가 있다고 역사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즉 “의존적인 자들” 내지는 “짐burdens”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이 맺는 관계, 사회 그리고 더 넓은 세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물복지 논쟁에서 가장 많이 드러났듯, 돌봄 이론과 상호의존 이론은 동물 옹호와 관련된 논의들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축화된 동물이 인간에게 생존을 의존한다는 식의 수사는 동물을 돌봐야 할 우리의 책무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들을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행위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빈번히 사용되었다.

...
이와 대조적으로 동물에 대한 페미니즘적 돌봄 윤리는 동물과 인간이 상호의존의 관계 안에서 서로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종종 취약하고 의존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345-346p)

후반부에서 저자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돌봄 개념의 재전유에 대해 쓴다. 여러 연구자들을 인용하며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 혹은 대안적 실천으로 언급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는 연약하고 자의적인 방식의 제안이어서 좀 김이 빠지기는 했다. 저자는 긴 이야기의 마지막을 자신의 보조견 베일리와의 관계와 일상을 통해 마무리한다. 보조견으로서 왔지만 돌봄의 대상이 된, 그러나 상호 돌봄과 의존으로 함께하는 관계가 된 베일리. 베일리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의료적 처치를 고민하는 자신을 자각하면서도 불구화된 존재로서 서로에게 배우며 서툴고 불완전하게 서로를 돌보는 존재의 동거다. 저자가 쓴 대로 이 관계는 비효율적이지만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고 나 역시 느꼈다. 그러나 사회와 역사를 종횡으로 탐색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례와 운동, 철학을 언급하고 동물 해방과 장애 해방의 당위성을 논증한 책 전체의 무게와 문제의식을 생각하면,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의 소박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책이 한국 사회 장애운동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노들야학에서 읽히고 출판의 동기로 작용한 이유가, 돌봄과 의존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장애운동이 가진 한계와 새로운 활로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물론 그 한계는 장애인이나 장애운동의 책임이 아니지만, 생산성과 효율성 담론이 지배적이고 그러한 가치를 내면화한 사회 체제에서 장애인의 자립을 외쳐온 운동이 당면한 장벽과 제약은 높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장애운동 역시 실질적으로는 돌봄과 의존의 매커니즘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감당해야 했던 경직성과 버거움이 있지 않았을까. 명료하고 적확한 대안이 제시된다고 한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좀 더 유연하게 더 많은 존재의 해방을 품으며 나아가기 위한 고민의 단초를 책에서 발견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제 넘었다면 죄송하고.

 

저자의 어조가 공격적이지 않음에도 내 속의 방어기제가 자꾸만 고개를 들었고, ‘공감은 한정된 자원이 아니다.’(250p)라는 말에 뜨끔하면서도 자꾸만 딴지스러운 마음이 일어나는 걸 돌아봐야 했다. 사실 기능적으로 느껴지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다. 저자의 글이 원래 글로써 정리된 게 아니라 강연을 녹취한 게 아닐까 싶게 장황하고 동어반복적이었고, 모국어가 아닌 두 언어의 번역에 대해 역자도 난점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번역에 대해 모르는 독자로서 읽기에도 뭔가 매끄럽지 않은 직역이 너무 많아 가독성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고 찬사를 보내고 짧지 않은 추천사를 쓴 이들이 차원이 다른 고도의 윤리의식을 겸비한 이들이 아니라면, 도발적이고 문제적이고 충격적인 독서였지만 나 역시 고민해야 할 주제를 접하는 계기이기는 했다.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이마즈 유리 옮김
2020.11.20.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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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2. 14. 15:33

 

 

영화 [베네데타]가 남긴 궁금증이 며칠 동안 이어졌고, 마침 통영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한 12월 모임 책이 어떻게 될지 몰라 상호대차를 알아보다가 함께 빌렸다. 흥미로운 제목처럼 술술 읽히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며 느꼈던 의아함이나 궁금증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었다.

책날개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 주디스 브라운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사회사 및 문화사, 근대 초 유럽의 젠더 역사를 주된 연구 분야'로 하는 학자다. 이 책은 피렌체 국립문서보관소 자료 목록에서 "신비주의자로 가장했지만 결국은 부정한 여인으로 판명된 페샤의 테아티노회 수녀원장, 벨라노 출신의 베네데타 까를리니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문서"라는 제목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집필되었다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베네데타 까를리니가 살았던 17세기 초반은 여성 동성애에 대한 명명이나 정의는 물론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라고 저자는 밝힌다. 약 400년 전의 '불완전한' 자료를 중심에 두고 저자는 역사 이래 여성 섹슈얼리티에 침묵한 유럽 사회 의식의 흔적, 중세 종교 세계 내에서의 성과 관련한 문제들, 베네데타 시대 종교와 세속 생활의 관습과 인식, 조사 결과와 기록으로 남은 베네데타의 일생, '사건'과 연루된 다양한 층위의 이해관계 등을 조명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17세기 초 성장한 여성의 선택지는 결혼 혹은 수녀원이었고, 이는 대체로 자기결정의 영역이 아니었다. 충만한 종교적 소명의식으로 스스로 선택한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부모의 결정으로 어린 나이에 입회하거나 성장한 자녀를 둔 과부들이 입회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결혼 지참금보다 수녀원의 입회비가 적었기 때문에 딸이 많은 문벌가에서 선호하는 경향도 있었고, 수녀원 내에도 외부 및 상위의 권력기관과 결부된 위계가 엄연히 존재했다고.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수도회나 수녀원은 엄격한 도덕률과 종교적 열망의 공간이라기보다 중산층이나 귀족 집안에서 버림받은 여성들의 수용 시설로 기능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제와 수녀간의 성적인 문제도 빈번하게 발생했고, 지속된 개혁 운동도 부패한 관습에 젖은 교회 질서 내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공인된 수녀원에는 지원자가 몰렸고, 종교와 세속 세계의 매개공간으로 설립된 많은 공동체들이 여성들의 종교적 열정과 사회적 요구를 분출하는 통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공동체들은 '복종, 청빈, 순결'을 서원해야 하고 입회비도 고액이었던 정식 수도회에 비해 권위도 문턱도 낮았다. 공동체가 나름의 운영과 재정적 고려를 통해 유지되고 살아남으면, 교회의 인가를 받아 정식 수녀원으로 안정화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베네데타가 입회한 테아티노회 역시 그러한 과정을 밟아왔고, 베네데타가 각종 영적 체험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교회의 인정까지 받으면서 수녀원 역시 위상을 제고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원전이 된 자료는 1619년에서 1623년 사이에 진행된 100쪽가량의 심문 기록이고, 저자는 그를 바탕으로 관련된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사실과 자료들을 종횡으로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를 기록했다. 읽으며 자주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책에 담긴 내용만이 팩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적잖은 사건과 인물들이 픽션이라는 점이 새삼스럽기는 했다. 예를 들면 바르톨로메아가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 계기, 베네데타를 동성애로 이끈 팜므파탈로서의 바르톨로메아의 면모, 수녀원장 펠리시타와 그의 딸 크리스티나의 죽음, 펠리시타의 고발과 교황 대사의 방문 조사, 베네데타의 화형 선고와 페샤인들의 반란(?) 같은 영화의 극적인 부분들 말이다. 영화는 실존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중 합치되는 것은 베네데타가 경험한 무아경과 환상의 내용들과 바르톨로메아와의 동성애 그리고 당대의 문제적 인물로서의 베네데타의 존재 정도였던 것 같다. 의아했던 것은 영화에서 매우 결정적인 소품으로 등장하는 성모상 자위 도구가 실제 조사 결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나 베네데타에 대한 화형 선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저자의 서술에서 자위도구의 사용이 큰 죄로 여겨졌다거나 성적 금기가 적발된 여성에 대한 화형과 같은 역사적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니 아주 무리한 설정은 아닐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한편 영화에서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지만 책을 읽으며 알게 된 부분들이 새롭기는 했다. 산악 지방과 도시 지역 출신에 대한 당대인들의 강고한 편견이 페샤가 아닌 산 마을 벨라노 출신인 베네데타의 심판에 미친 영향, 평소 의지하고 어쩌면 연합했던 고해신부 리코르다티의 죽음 이후 교회와 지역 내에 베네데타에게 정치적 지지세력이나 후원자가 없었다는 점, 베네데타가 입회한 후 수녀원장이 되기까지 약 20년 간 테아티노 수녀원의 교회와 지역 내에서의 위계와 위상 변화 등. 그리고 베네데타가 경험한 다양한 환영들의 의미와 특히 바르톨로메아와의 관계와 동성애 관련해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천사 스플렌디텔로의 존재 같은 것은 영화를 보면서 전혀 변별할 수 없었던 점이었다. 책에 따르면 2차 조사의 최종 보고서는 베네데타를 악마의 희생자로 규정하고 판결과 처벌은 교황 대사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판결의 내용은 알 수 없고, "베네데타 까를리니가 18일 동안 앓고난 후 고열과 복통으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감옥에서 35년을 보낸 후 참회하면서 죽었다"는 한 수녀의 1661년 8월 7일 일기를 통해 이후와 죽음이 확인된다. 1년 전쯤인 1660년 9월 18일 한 수녀의 일기에는 바르톨로메아의 죽음과 함께 그에 대해서 베네데타가 사기 행각을 벌였을 때의 파트너였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속세의 일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영적인 일에서도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신성한 기도에 완전히 전념했다."라고 쓴 기록이 남겨져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는 책이기는 했고 문외한인 분야의 학술서이다 보니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낯선 시대의 이야기가 현재적으로 재현될 때 느끼는 감정과 이해의 거리가 얼마나 거대할 수 있는지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베네데타]는 전기 영화가 아니고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세계에 실존 인물을 끌어와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과 해석을 덧붙인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배경이 되는 시대와 사건과 인물이 놓인 대략적인 맥락에 대한 이해 유무는 감상적으로든 지적으로든 그 수용에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렇게 골몰(?)할 만큼 인상적이거나 감흥이 깊은 작품은 전혀 아니었는데, 많은 시간과 적잖은 결벽증이 만들어낸 이상한 콜라보 독서가 되었다.
  

주디스 브라운 지음•임병철 옮김
2011.9.1초판1쇄 2012.4.16초판2쇄 발행, 도서출판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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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2. 8. 21:34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을 이 책으로 처음 접했다. 누가 어떻게 살아가든 그것은 그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어선지, 낯설었지만, 그런 관계와 삶도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성정체성도 누군가의 삶이나 사랑의 방식도 제3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가 몸에 배인 편이다.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애쓰지만 다수로부터 공격받는 상태라면 무심한 인정이 아니라 적극적인 옹호와 지지를 보내는 게 맞겠다 싶기도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자로서 대상화의 경계를 정확히 감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게으른 방관자가 되기를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폴리아모리를 살게 된 이후에야 온전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고, 폴리아모리가 함축하는 독립성이란 오독되기 쉬운 허약한 성질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무엇보다 1인 가구로 아주 오래 살았고 1인 가구가 아닌 생활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최적화된 상태이다 보니, 내 입장에서는 거의 필사적이라고 느껴지는 과정의 노력과 성찰, 관계와 삶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놀랍기는 했다. 


홍승은
2020.7.13.처음 찍음, 도서출판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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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2. 7. 18:11

 

 

어릴 적 접하며 빠져든 것에는 소위 ‘계보’가 있었다. 그 속에서 몰랐던 세계를 하나씩 만나는 느낌은 뭔가 차근차근 쌓여가는 정돈된 안정감을 선사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성인이 된 후 ‘포스트모던’의 폭발과 함께 음악도 책도 따라갈 계보를 잃고 좀은 멍한 상태가 되어 뒤늦게 깨달은 바였다. 계보가 꼭 필요했는지 묻는다면, 게으르고 주체적이지 못한 탐색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궤도를 벗어난 낯선 선택으로 인한 실패의 가능성을 피하고 싶었고 어떤 권위 속에서 지성과 취향의 안전한 오두막을 짓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떤 흐름을 따라가며 만난 세계가 나의 감성에 아주 잘 맞는다는 걸 거듭 확인한 경험 때문이었다. 


일찍이 하덕규 님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했지만, 저마다 제 속에 지닌 너무 많은 나들이 존재하는 채로 언젠가부터 너무 많은 ‘나’들의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다고 느꼈다. 개별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서의 ‘나’를 누구나 보유하고 있고 그 나들은 또 수많은 나들의 집합이니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나들이 있는 것인가. 당연한 사실임에도 나는 어지럽다고 느꼈던 것 같다. 수많은 나들이 모두 궁금하지는 않았고 어떤 정제된 상태, 그러니까 꼭 계보는 아니더라도 내가 반색하며 수용할 만한 나들이 어디엔가 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가당치도 않은 바람을 가졌던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목소리를 내는(이라는 말 뒤에 존재하는 이들 역시 있겠으나) 세상이 도래하고 등장한 수많은 글들이 나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누구나 가진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욕망은 당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 텐데, 나는 그런 세태 자체를 부담스럽고 소란하다고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 왜였을까? 이 책은 마음의 문을 꾹 닫고 편협한 나만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욕망과 그럼에도 마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미련 사이에서 매일 서성이는 스스로를, 나는 왜 아무도 찾지 않는 블로그를 놓지 못하고 '나만을 위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무언가를 적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질문하게 만들었다. 

‘자격’으로 시작해서 ‘자격’으로 끝나는, 그러나 자격 없음에 대하여, 아니 자격이라는 단어의 관습과 무게를 휘발시키고 쓰는, 그리고 하는 내가 된 과정과 방법에 대해 기록하고 손 내미는 책이었다. 난생처음 알게 된 한 사람이 지나온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너무 많이' 자신을 내보이면서도 먼저 웃거나 울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적당한 거리감이 인상적이었다. 나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은 없는데, 그럼에도 왜 나는 무언가를 쓴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새삼 생각해본다. 오래 전, 일과 관련된 참혹한 현장에서 허우적거리다 돌아와 한 권의 책을 읽고 놀랍게 환기되었던 마음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표지 그림의 조명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를 보며 책을 읽은 후 내 마음 같다고 느꼈다.  
 


홍승은
2020.1.30.초판1쇄 2020.6.15.초판4쇄 발행, 어크로스출판그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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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