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이 배경인 영화들로부터 시작된 관심이 서양사의 큰 흐름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의 역사 관련 독서로 확인한 것은, 어릴 적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당연히 까맣게 잊혀졌고 교과서에서 강조됐던 커다란 사건은 그 전말도 인과관계도 오리무중인 채 키워드로만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서양사에 대한 대략적인 교양이 바탕이 되어야 소설이든 영화든 더 잘 이해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럼에도 역사 서가의 두껍고 방대한 책들을 당장 소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조금은 편법처럼 선택한 책이다. ‘편력'이라는 제목을 보고 일단 쉽게 한 번 훑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빌렸는데, 목차를 주마간산으로 본 탓인지 생각처럼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주제를 쉽게 풀어낸 덕에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는 서설 '서양사로 세계의 문을 열다'로부터 저자가 선정한 94가지 장면에 대한 글이 시대순으로 담겨 있고, 1권 마지막에 저자의 특별한 연구 주제라는 존 밀턴에 관한 글 5편이 실려 있다. 꼭지마다 다양한 사건과 인물과 현상 등을 주제로 구성된 글들은 짧지만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칼럼처럼 느껴졌는데, 선정된 장면에 대한 간명하고 친절한 설명에 그로부터 비교하거나 참조할 수 있는 한국의 상황 혹은 저자의 사유와 주관이 첨언되는 형식이었다. 오랫동안 서양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며 관련 번역 작업을 해 온 노학자가 후세대들에게 지난 역사를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책 전반에 걸쳐 세심하게 담겨 있다. 어느 정도는 출판사를 믿고 빌려왔기에 관점에 대한 우려는 별로 하지 않았고, 다행히 저자의 글에서는 국수주의적인 시각이 느껴지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짧은 글들의 묶음이어서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얻기는 어려웠지만, 유사한 주제로 이어지는 몇 편의 글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해당 부분에 대한 맥락을 잡기에는 좋았던 것 같다. 도판과 사진이 풍부하게 삽입되어 있고, 주제로 다루는 인물이나 사건 등과 관련된 소설이나 특히 영화에 대한 소개가 무척 많았는데 실제 역사와 형상화한 작품의 차이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짚어준다. 저자는 서설에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세계사 과목이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교육 현장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는데, 그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보려는 노력처럼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독자의 관심을 배가시켜주는 것 같았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는 영화들이 대체로 블록버스터인 까닭에 나로서는 제목만 들어본 작품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그냥 지나쳤던 영화들이 새삼 궁금해졌고 중고 dvd로라도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대로 올수록 각종 사료들이 많아지기 때문인지, 고대와 중세를 다루는 부분은 다른 역사 관련 책들에서도 마주친 내용들이 적지 않았는데 근대와 현대에서는 저자의 관심과 관점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승리한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역사 기록의 특성과 한계는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근현대 부분의 몇 꼭지에서 글 쓰는 여성과 여성 참정권 운동의 주역들을 다룬 부분은 반가웠고 헬렌 켈러가 식민지 조선에 방문했던 이야기와 당시의 사진은 나만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고 신선했다. 1권에 비해 2권에서는 좀 더 지엽적이고 미시사적인 주제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는 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시대적 상황이나 연관성 때문인지, 읽는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국가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나오는 건 개인적으로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얇지 않은 두 권의 책 전반에 저자의 사적 견해가 꽤 꼼꼼히 배어 있는 것에 비해, 의아하거나 거슬리는 부분이 단 두 군데(1권의 흑사병 부분에서 '작은 선물'이라는 표현, 2권의 아리안족 인구 정책 부분에서 '출산장려정책 하나만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에 불과했다는 건 은근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책 모임에서 정한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를 읽으며 수시로 부대꼈던 걸 떠올리며, 이 저자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찾아 보니 저자는 예전에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의 역자이기도 했고, '스탠다드한'(그런 게 있다면) 서양사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바람에 부합할 것만 같은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의 역자이기도 했다. 무척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구 분야에 진심이고 관점에도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 '박상익'이라는 저자를 알게 된 게 큰 수확인 책이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읽으며 수십 개의 포스트잇을 붙여뒀지만 따로 메모나 정리를 하지는 못한 아쉬움에 목차를 옮겨둔다.
1권
제1부 고대
1 인류는 모두 하나
2 크로마뇽인의 공감주술
3 람세스, 모세, 그리고 프로이트
4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시민 정신
5 어린 시절 꿈으로 트로이를 발굴해낸 하인리히 슐리만
6 패자도 동화시킨 로마인의 정치적 지혜
7 한니발의 계산착오
8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9 ‘반달리즘’과 피맛골
제2부 중세
10 문맹의 샤를마뉴, ‘유럽 통합의 씨앗’을 뿌리다
11 중세 대학의 탄생
12 중세 유럽의 대학 생활
13 12세기는 번역의 시대
14 중세 전성기의 종교·문학·건축
15 중세 베네치아의 ‘날개 달린 사자’ 브랜드 마케팅
16 와트 타일러의 난과 지배 계층의 ‘꼼수’
17 안경 제조법, 중세 유럽에선 ‘1급 비밀’
18 중세의 삶과 죽음
19 화약, 중세 유럽의 ‘비대칭 전력’
20 줄무늬의 이중성
21 우물 안 개구리 중세 유럽인이 꿈꾼 ‘외계’
22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
23 간발의 차로 뒤바뀐 잉글랜드의 운명
24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
제3부 근대 Ⅰ
25 대담한 오류 덕분에 항로를 찾아내다
26 천연두로 몰락한 아스텍 문명
27 목숨보다 신용을 중요시한 바렌츠 선장
28 루터의 만인사제주의와 근대
29 ‘정신의 귀족’ 자부한 세계시민 에라스뮈스
30 유럽 부흥의 계기 마련한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
31 세르반테스, 에스파냐의 번영과 몰락을 문학에 담다
32 분열의 시대에 더욱 빛난 지성 몽테뉴
33 바로크적 지성, 파스칼
34 미혼 여성이라는 약점을 장점으로 활용한 엘리자베스 1세
35 영국 여왕의 ‘007 스파이’
36 가이 포크스 데이, 극심한 갈등도 세월 흐르면 ‘축제’로
37 세 분야에서 천재성 보인 뉴턴
38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근대’
39 루이 14세의 절대권력, ‘시간’이 심판하다
40 표트르 대제 개혁의 한계
41 18세기의 그랜드 투어, 해외 관광여행의 효시
42 18세기 유럽의 위조 미술품 거래
43 정통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
44 영국의 천재 공학자 브루넬
제4부 밀턴
45 종교가 권력이 될 때 얼마나 무섭게 변질되는가
46 권력 앞에 당당한 영혼
47 생각을 숨기고 정직한 표정을 지으면
48 존 밀턴, 한국 지식인에게 ‘영혼’을 묻다
49 언론 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
2권
제5부 근대 Ⅱ
50 ‘원숭이’로 조롱받았던 다윈, 승패의 관건은 도덕성
51 다윈과 글래드스턴,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
52 선진기술 과시한 런던 박람회
53 17세기, 어린이가 어른으로부터 독립하다
54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
55 100년 전 프랑스 “목욕할 때도 몸 보지 마”
56 ‘철혈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 도입
57 괴테의 모국어 자랑, 관건은 ‘풍부한 콘텐츠’
58 산업혁명 선두주자 영국이 독일에 뒤처진 이유
59 옥스퍼드 영어사전, 초판 간행까지 71년 걸려
60 나폴레옹 시대 신병의 72퍼센트는 키 150센티미터 이하
61 페달 없이 발차기에 의존한 최초의 자전거
62 리스본 대지진 참사를 현명하게 수습한 폼발 총리
63 후세가 잘못 이해한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
64 “머리 위에는 별, 마음속에는 도덕” , 철학자 칸트
65 카를 마르크스의 다양한 모습
66 인문학 천재 존 스튜어트 밀
67 페미니즘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68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 쓰레기통 정치를 바꾸다
제6부 현대
69 영국 자유당의 사회개혁, 중산층 외면으로 ‘흔들’
70 여성 참정권에 바친 일생, 에멀린 팽크허스트
71 여성 참정권 부르짖으며 죽음 택한 에밀리 데이비슨
72 전쟁 계기로 일터 나간 영국 여성, 보답으로 참정권 획득
73 무능한 국방장관 수홈리노프, 러시아 왕조 멸망 불러
74 사상 최악의 참호전 벌어진 1차 세계대전
75 극한의 전쟁터에서 꽃핀 ‘크리스마스 평화’
76 빨간 마후라의 원조가 된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
77 전승국들이 강요한 베르사유조약, 더 큰 재앙의 씨앗 되다
78 레닌 사망, 신학생 출신 스탈린이 우상화 작업 주도
79 스탈린이 키운 ‘붉은 전문 인력’, 소련의 새 특권층 형성
80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퇴출, 나치의 독일 장악 신호탄
81 독일과 한국의 문맹률과 독서율
82 식민지 조선을 찾은 헬렌 켈러, 온몸으로 ‘장애 극복’ 외치다
83 영화사상 최초의 섹스 심벌, 루돌프 발렌티노
84 ‘신데렐라 복서’ 제임스 브래독, 대공황기 미국 서민의 영웅
85 반세기 전 한 방에 여덟 식구, ‘파리의 지붕 밑’ 심각한 주택난
86 ‘비스마르크 신화’ 이용해 이미지 조작에 성공한 히틀러
87 아이 낳으면 수당·면세·융자, ‘아리안족 늘리기’ 열 올린 나치
88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개시, ‘지상 최대의 작전’
89 히틀러, 신무기 ‘V1’ 발사 개시, 전쟁 이길 것으로 착각
90 히틀러의 최후
91 미군 덕분에 자유 찾은 프랑스, 온 사회에 ‘미국 신드롬’ 번져
92 ‘반인륜 범죄’ 단죄한 뉘른베르크 법정
93 “독일군과 관계했으니 배신자”, 프랑스의 성차별적 여성 삭발
94 언론인과 문인에게 더 큰 책임 물은 프랑스 사법부
95 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과 몽고메리
96 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97 오바마 부친과 화해한 미 백인, 동족끼리도 ‘소통’ 안 되는 한국
98 프랑스 고령사회
99 스위스 시계산업의 흥망
박상익
2014.12.22초판1쇄인쇄 12.23발행, 도서출판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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