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에 해당되는 글 403건

  1. 2022.05.29 [도시를 걷는 여자들]
  2. 2022.05.11 [모드의 계절]
  3. 2022.05.10 [아내의 시간]
  4. 2022.05.10 [행성어 서점]
  5. 2022.05.09 [일기]
  6. 2022.05.07 [방금 떠나온 세계]
  7. 2022.05.04 [통영과 이중섭]
  8. 2022.04.28 [이중섭 평전]
  9. 2022.04.24 [안녕 주정뱅이]
  10. 2022.04.24 [마침내 런던]
비밀같은바람2022. 5. 29. 22:22



황정은 작가의 [일기]를 읽고 알게 된 책, 언급된 여러 작가와 책 중에 가장 흥미롭게 느껴졌고 궁금했는데 마침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다. 책 날개의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1930년대 영국의 여성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뉴욕 출신의 작가이자 비평가로, 2004년 파리로 이주했고 파리와 리버풀을 오가며 살고 있다고 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목차는 저자의 출신지와 살며 걸었던 몇몇 대도시의 이름과 간략한 부제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이 충분히 명확하다고 느낀 탓인지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라는 부제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독서를 시작했는데, 덕분에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 한 명씩 등장하는 여성 예술가를 기대하며 관련된 이야기들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꼽는다면 앞표지 사진에도 금박으로 박혀 있는 단어인 플라뇌즈(flâneuse, flâneur 산보자를 뜻하는 남성 명사를 바꾼 말)가 될 테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플라뇌즈(flâneuse)에 대해 "명사, 프랑스어에서 온 말, 보통 도시에서 발견되는 한량, 빈둥거리는 구경꾼을 가리키는 단어 플라뇌즈의 여성형"(23쪽)이라고 가상의 정의를 내린다. 미국 교외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딜 가든 차를 이용하는 성장기를 보냈지만, 출신지를 벗어나 공부하고 일하면서는 도시를 걸어다니며 감각하고 탐구해왔다. 여러 도시의 무수히 많은 골목와 길을 걸으며 저자는 '걷기'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를 사유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길을 걸었던 여성 예술가들을 소환하고 상상한다. 1990년대 이후 저자가 걸은 거리에는 백 년 이상의 시간을 공유하며 먼저 걸은 여성들이 있었다. 저자는 당대에는 도전이거나 불온한 행위로 여겨졌던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에 내재된 전위성을 발견하고 공명하면서, 시대의 한계 속에서 도시를 걷고 기록을 남긴 여성들의 흔적을 따라가고 호흡한다. 

 

목차에 등장한 여러 도시 중 며칠이라도 내가 머물며 걸었던 곳은 파리와 베네치아 뿐이고 저자가 설명하는 거리와 동네 들은 낯설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여러 번 등장하는 도시도 있지만 한 챕터마다 한 사람의 주요 인물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름만 알았거나 영화나 책을 보았거나 아예 초면이거나 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상당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발산하는 매력에 더해 저자(와 역자)의 글 자체가 가진 힘이라고 느껴졌는데 저자는 과거와 현재,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조화롭게 엮어 기술하는 일에 대단히 재능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중층적인 시간이 겹쳐진 도시라는 공통의 무대를 배경으로 과거의 여성 예술가와 현재의 저자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우연 혹은 주관적인 영감으로부터 감추어졌던 역사로 이어지는 새로운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긴 프롤로그에 이어 처음 등장하는 도시는 "롱아일랜드 · 뉴욕"이다. 저자의 고향인 롱아일랜드는 뉴욕의 교외로 "아메리칸 드림의 교외 버전이 탄생한 곳"(49쪽)이며 ""교외의 역사는 분화의 역사다."라고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배제의 역사이기도 하다."(50쪽)고 저자는 덧붙인다. 미국에 가본 적도 없고 미국 배경의 영화를 볼 때에도 교외라는 공간에 유념한 적이 없어 새로웠는데, 2차 대전 이후 건설되기 시작해 1970년대에 1,300만 명의 중산층 인구가 도시에서 이동한 새로운 삶터가 교외라는 점을 처음 알았다. 세련되고 효율적이지만 인공적이고 고립된 교외의 삶에 대한 기술은 저자가 언급한 영화 중 [아메리칸 뷰티]와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떠올리며 확 와닿았다. 아름답게 정돈된 동네에 자리잡은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던 젊은 부부, 자유로운 공기를 꿈꾸는 에이프릴과 성공과 명예에 열중하던 프랑크가 맞이하는 파국은 교외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공감이 되는 비극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파리 · 그들이 가던 카페"에서는 진 리스라는 작가가 등장한다. 진 리스는 1890년 서인도제도에서 웨일스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과 크리올 형통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919년 파리로 갔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문명 세계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은 사회적 기준에 따라 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곤란한 지경에 종종 빠졌다."(76쪽) 다혈질의 무국적자인 남편과 결혼했고 임신한 몸으로 여권도 없이 파리에 도착했고 얼마 후 아이를 잃었다. 불안정하고 좌충우돌인 생활 중에 글을 발표할 기회를 얻었고 당시 명망 높은 편집자이자 작가였던 포드 매덕스 포드의 영향 아래 성장하며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키웠다. "진 리스로부터 나는 스스로를 낭만화하지 않는 고통의 미학을 배웠다."(71쪽)는 저자는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될 대로 되라고 하는 사샤(소설 [한밤이여, 안녕]의 주인공) 같은 인물을 보며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도 많다. 나는 그게 수동성이라기보다는, 너무 쉽게 애착을 느끼는 싱글 여성이 어떤 일을 겪더라도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 일도 겪지 않으려면 어떤 것에도 애착을 주지 않아야 할 텐데, 하지만 애착이 없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75쪽) 되묻는다. 그리고 파리에서 만난 롱아일랜드 출신 남자와의 '굴욕적인' 연애를 떠올리고, 자신의 [한밤이여, 안녕]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전이된 '리스의 인물들의 혼란'을 기록한다. 진 리스의 작품을 언젠가 읽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곤경과 모순과 절망의 시간이 잦았던 그의 소설이 실연 후 런던에서 산 공책 몇 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저자의 파리와 만나 어느 정도는 재해석되었을 이야기들이 새로웠다. 

 

이런 식으로 "런던 · 블룸즈버리"에서는 버지니아 울프가 등장한다. 파리로 건너가기 전 진 리스도 살았던 블룸즈버리는 "정치 개혁의 온상이기도 했고 여성참정권 운동과도 연관이 깊었다."(124쪽) "바버라 그린은 "버지니아 울프가 거리를 대범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먼저 행진을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124쪽) 자신을 매혹시키는 도시를 걸으며 느끼는 정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의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은 채 단어와 글로 표현하려 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걷기와 쓰기 역시, 이전에 걸었던 여성들에게 일정 부분 빚지고 있었던 셈이다. 

 

"파리 · 혁명의 아이들"과 "파리 · 저항"의 주요 인물은 조르주 상드다. 혁명의 도시 파리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은 19세기 후반 나폴레옹 3세 시기, 오스만 남작의 도시 정비 이후라고 한다. 저자는 공사 중인 파리의 도로 아래에 덮여진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등 거대한 봉기의 흔적들을 생각하고, 20세기 저항과 진압의 현장을 표시한 동판들을 보며 걷는다. 그리고 1804년 아망딘 루실 오로르 뒤팽으로 태어나 조르주 상드로 기억되는 삶, 남장을 하고 자유롭게 거리를 걸으며 일상과 소설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킨 일화들, 그러나 혁명이 비껴간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1832년에 이런 평등한 결혼을 꿈꾸었다는 것만도 매우 대담한 일이었다. 당시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상드에게 입회를 권유하였으나 상드는 자신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162쪽) 저자는 남성 작가의 책으로 오인된 첫 소설 [앵디아나]가 표방한 이상, 시대의 억압을 개인적 전략으로 우회한 상드의 선택, 이후의 경험과 행보 등 여러 면모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쇼팽의 연인'이라는 대표적인 수사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자로서 할애된 꽤 긴 분량에서 쇼팽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그가 쓴 글을 한 편도 읽지 않은 나의 무지와 더불어 여성이 축소되는 한국적 맥락도 기능한 탓이 아닐까 싶어졌다. "저항"에서는 1848년과 1968년, 2015년 파리 동시다발 테러 등 현대의 시간까지 포괄하며 행진과 바리케이드, 연대와 기념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대문자 혁명과 별개로 목도되고 의미화되는 저항의 여러 면모들이 기술된다. 바라보고 궁리하고 함께 걷기도 하며 글로 재현한 혁명의 시간들은 결국 쓰는 이의 입장과 주관성의 세계 속에서 재구성된다.

 

(음... 이렇게 쓰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다.)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흥미가 조금 반감됐던 부분은 나의 감수성으로는 온전한 수용이 버거웠던 특이한 예술가 소피 칼이 등장하는 "베네치아 · 복종"과 뒷부분에 약간 반전이 있지만 저자의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던 "도쿄 · 안에서"였다.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은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중심으로 아녜스 바르다의 이야기가 가득한 "파리 · 동네" 그리고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더욱 놀랍고 인상적이었던 마사 겔혼의 이야기가 담긴 "모든 곳 · 땅에서 보는 광경"이었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텍스트로 옮긴 수준으로 느껴지는 글은 흥미로웠고, 알고 보니 변화에 취약하고 불안도가 높은 내게 "그렇지만 나는 바르다의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어떤 것도, 어떤 상황도 제자리에 멈추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늘 바뀐다. 바르다의 세계에서 아름다움, 의미는 예기치 않은 것에 있다. 흐름으로부터 나온다."(356쪽)는 말이 마음에 들어왔다. 지금의 내가 새기고 즐기고자 조금씩 애써야 할 방향이다. 종군 기자이자 소설가였던 마사 겔혼에 대한 저자의 기술 중에도 기억하고 싶은 두 부분이 있었다. "겔혼은 저널리즘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소설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보기 위해서는 사실과 허구 둘 다 반드시 필요했다."(364쪽) 그리고 "겔혼은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공감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 겔혼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뛰어들어, 뚜렷이 선을 그어야 할 곳에서 허구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382쪽) 타격감은 크지 않지만 은은하게 충격적인 어떤 끝을 최근에 경험했고,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소설을 써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한 달 넘게 하던 차에 만난 확인의 문장이다. 소설이라, 쉽게 할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챕터인 "뉴욕 · 귀환"에서는 시작부터 존 디디온이 나와 반가웠는데 "디디온은 젊음이 사라짐에 따라 가능성이 좁아지는 듯한 압박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서쪽 캘리포니아로 돌아간다."(396쪽)는 문장에서, 지명과 무관하게 엄청난 공감을 느꼈다. 뉴욕이 저자의 최종적 귀환지는 아니었고 '유대-이탈리아-아일랜드 혈통'이 뒤섞인 미국인이자 파리 시민권자인 저자는 "정체성과 소속감의 기이한 조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저항감이나 후회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디에서 방향을 돌릴까, 어떤 길을 따라갈까. 어떤 길을 따라간다면 다른 길로는 가지 않게 된다. 어떤 것에 대해 쓴다면 잘 읽히게 하기 위해 배제해야만 했던 다른 많은 것들을 저버리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교차로다."(408쪽) 라고 쓴다. 그리고 "뿌리를 경계하라. 순수함을 경계하라. 고정성을 경계하라.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경계하라. 유동성, 비순수성, 혼합을 받아들이라."(409쪽)고 호미 바바를 인용하는 저자의 말이, 잠시 주술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기억하고 싶거나 흥미로운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책을 읽다 보니 엄청 많은 페이지에 표시가 남았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나는 잔재, 질감, 우연, 만남, 뜻밖의 틈새를 찾으려 했다."(18쪽)고 적었는데 그러한 비공식적이고 비정형적인 부분의 관찰은 물론,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주요 인물의 삶, 당시의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 관련한 후대 연구자들의 의견과 평가 등도 자주 인용하며 소재와 주제에 매우 깊이 천착한다. 비평가이자 연구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학술적인 부분을 포함해 방대한 내용이 된 것 같고, 작가로서 체험한 그 도시에서의 내밀한 경험과 사유까지 더해져 더욱 풍부한 텍스트가 되었다고 느꼈다. 모든 부분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작은 이야기들을 무수히 엮어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미욱하게도, 그러나 덕분에 어느 시기 이후 범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여성’ 서사가 실은 ‘여성 서사’라고 말해지는 한 충분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 할 수 있었다. 이미 전형적 이미지를 가진 대도시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그러나 설득력 있게 재이미지화하면서, 기존의 남성 서사와 남성들을 대척점에 세우지 않으면서도(헤밍웨이는 좀 세운 것 같다.) 몇 세대에 걸친 여성의 역사를 통해 독자를 '고무하는 책'이라고도 느껴졌다. 이렇게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싶어 사야겠다고 생각했고, 누군가들과 함께 찬찬히 이야기 나누면서 읽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지한 덕에 즐거운 독서였는데,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로런 엘킨 지음•홍한별 옮김
2020.7.31.1판1쇄 2020.8.28 2쇄펴냄,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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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5. 11. 16:30



모드 루이스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항구 도시 야머스에서 1903년에 태어났다. 1970년까지 살았고, 그의 그림들은 사후에 유명해지고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책은 그가 주로 그렸던 고향의 사계절을 담은 그림과 사진과 해설 그리고 그의 편지와 인터뷰 및 추억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5년 2월 토론토의 언론매체인 <스타 위클리>지의 '포토 스토리' 의뢰로 모드와 에버릿의 작은 오두막을 찾아갔던 사진작가 밥 브룩스의 포토 에세이가 처음에 실려 있다. 1964년 12월 캐나다 공영 방송사 CBC가 "노바스코샤 딕비에 있는 마셜타운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체구의 쾌활한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다룬 덕분에 기획되었고, 7월에 "예쁜 그림을 그리는 작은 할머니"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포토에세이는 그가 오두막집을 방문해 모드와 에버릿과 보낸 하루를 사진과 함께 기록한 것으로 카메라 가방 하나를 밖에 두어야 할 만큼 작고 어둡고 어지러진 집, 모드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과 말없이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 집과 밖을 분주히 오가며 집의 온기를 유지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에버릿의 모습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글을 쓴 랜스 울러버는 '들어가는 말'을 1997년 6월, 노바스코샤의 야머스에서 시작한다. 62년 전 묘비도 없이 묻힌 모드 루이스의 어머니의 비석을 세우는 현장이다.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좋아하고 수집했던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보고 오두막집을 드나들며 자란 랜스 울러버는 모드 루이스에 관한 여러 저작들과 희곡 <모드 루이스-그림자 없는 세상>을 썼다고 한다. 공연의 초연 수익을 모드의 오무막집 복원 비용으로 기부하고 책의 인세는 노바스코샤 예술대학의 모드 루이스 장학금으로 사용되어 모드 루이스가 생활했던 야머스와 딕비 출신 젊은이들이 지원을 받기도 했다고 '맺는 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름없이 묻힌 모드 루이스의 어머니와 아기일 때 세상을 떠난 두 오빠의 이름을 새겨 비석을 세운 것은, 생전에 기대할 수 없었던 엄청난 관심을 받는 모드 루이스가 살아 있다면 무엇을 원할까 생각한 결과였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관심과 사랑이 모드 루이스와 그의 어머니와 오빠들의 영혼의 안식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애틋함은 랜스 울러버의 글 곳곳에서 느껴진다.

어린 시절 가계를 돕기 위해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곤 했던 모드 루이스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1937년부터는 딕비에서 이모와 함께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선 장수이자 근처 농장에서 경비일을 하던 에버릿 루이스와 결혼했고, 마셜타운 대로변에 있는 가로 3미터, 세로 3.7미터의 작은 오두막에서 죽을 때까지 남편과 살았다. 결혼 후 모드 루이스는 편지에 '루이스 부인Mrs. Lewis'라고 서명하곤 했다는데, 남편의 가족들과 함께 묻힌 노스 레인지 공동묘지의 묘비에는 결혼 전 이름인 '모드 다울리'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에버릿이 왜 모드 루이스 대신 모드 다울리라고 적기로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27쪽)고 랜스 울러버는 쓰고 있다. 유달리 궁금해하는 것이 망자가 된 인물들의 관계와 진실에 쓸데없이 드라마틱한 상상을 얹는 결례 같기도 한데, 영화 [내 사랑]의 어떤 인상들과 결부되어 약간 마음에 남기는 한다.

이 책을 읽고 찾아 보니 영화 [내 사랑]을 2017년 여름에 보았고, 책 [내사랑 모드]를 2019년 봄에 읽었다. 영화를 본 건 모드 루이스에 대한 관심이 아닌 에단 호크 때문이었다. 그와 내가 모두 청춘이던 시절 [비포 선라이즈]의 분위기와 제시에 빠졌던 나는, 웃기지만 그를 멀리 멀리의 동년배라고 함께 늙어가는 동시대의 페르소나라고 오래 생각했다.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빨리 늙는다는 통설 때문인지 나 늙는 건 알아채지 못하는 습성 때문인지, 이후 드문드문 영화를 통해 조우하는 그는 늘 나보다 빨리 늙어가는 느낌이었고 [내 사랑]에서의 에버릿은 그 성마름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영화도 책도 대강의 기억만 남아 있고, 모드 루이스의 선명하고 쨍한 그림들은 인상적이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떠오를 만큼의 특별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가 평생 살면서 풍경과 생활을 그렸던 캐나다의 마을과 삶이 주는 거리감도 작용한 것 같고, 노래나 영화나 책과 달리 그림에 크게 감응하지 못하는 성향 때문이기도 할 테다. 하여, 지난해 남해의봄날 정기구독의 마지막 책이었던 [모드의 계절]을 이제 읽었다.

주와 부를 굳이 나눌 필요는 없겠지만 개정판의 판형은 그림에 맞춘 것인 듯하고, 각 챕터 서두의 해설을 제외하면 완결된 글이 아니라 부분적인 인용이어서 약간 그림에 따라붙는 해설처럼 읽게 됐던 것 같다. 에버릿의 T형 포드를 타고 세상을 구경했던 모드 루이스가 에버릿이 차를 처분한 뒤로는 집에 머물며 기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부분이나 야외 풍경에 실제와 달리 다양한 색을 쓰며 그가 했다는 말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여러 가지 색이 있으면 더 예쁘니까."(100쪽), 랜스 울러버의 해설 중 "진정한 예술가의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끊임없이 그 예술가의 눈으로 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60쪽)는 그림이 주는 직관적인 느낌을 넘어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야기들이었다. 모드 루이스가 다음 사람을 위해 한 사람에게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다는 여럿의 증언과 가까이 지냈다는 민속예술가 스티븐 아웃하우스의 인터뷰 속 그는 감동이었다. "모드는 자신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딕비라는 시골 마을에 사는 모드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그랬었죠.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녀는 가능한 한 자신의 주변을 단순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밝게 만들었습니다."(124쪽)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랬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평생 그릴 수 있었나 보다. 


글 랜스 울러버•사진 밥 브룩스•그림 모드 루이스•번역 박상현
2018.12.25초판1쇄 2022.1.20.2판1쇄,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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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5. 10. 21:35



"13년의 별거를 졸업하고 은퇴한 아내의 집에서 다시 동거를 시작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빨간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제목, 젊고 아름다운 얼굴과 흐른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이 타원형 액자 속 사진처럼 대각으로 놓인 앞표지의 느낌은 강렬하면서도 차분하다. 저자는 헤이리에서 모티프원(Motif#1)이라는 북스테이를 짓고 운영하며 서울에서 일하는 아내와 떨어져 살았고, 은퇴한 아내의 섬 여행에 동행했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의 작은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40년 이상 보관했던 필름들을 꺼냈고, 오랜 사진들과 이야기들을 ‘부부의 시간’ ‘가족의 시간’ ‘아내의 시간’으로 기록했다.

 

부부의 동거는 은퇴 이후의 해외 장기체류 계획이 불가능해진 아내와 연극하던 딸에게 자신의 자리를 맡길 수 있었던 남편의 사정 덕분에 가능했고, 이는 팬데믹의 수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은퇴한 아내는 북한산이 가까이 보이는 작은 월세집에서 가족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는 동안 미뤄두었던 여러 활동과 여행, 명상을 하며 살고 있었다.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이 고수하는 원칙은 ‘간섭하지 않는다’와 ‘단순하게 산다’는 두 가지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의 군 복무와 40대 중반의 유학, 장기 출장과 이후 모티프원에 이르기까지 부부는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다. 돈 버는 재주가 없는 남편의 빈자리를 아내는 간호사로 일하며 대신했고 어려서 시골의 시부모님께 맡기기도 했던 아이들의 주양육도, 노령의 시부모와 치매를 앓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돌보는 일도 아내의 몫이었다고 한다. 13년만의 동거는 아내가 온전히 홀로 살기 시작한 지 5년만의 일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먹는 것에 관해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의 생각과 실천을 따르기로 한 부부의 이야기가 이들이 지향하는 삶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식탁 앞에서 아직도 간혹 '맛있다'는 소리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어떤 약속을 잊었는지 서로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생명이니 생명을 두고 '맛있다, 맛없다'는 표현은 하지 않기로 했음을 말입니다."(24쪽) 인상적이었고, 이 책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 부분이었다. 너무 명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겠다 싶었다. 부부는 재료의 조리 과정을 줄이고 하루에 두 번, 1식 2찬의 식사를 하고 외식도 가급적 삼가면서, 간소한 식탁에 마주앉아 다양한 주제의 긴 대화를 나눈다. 살면서 느끼는 공허와 무의미함을 말초적인 감각과 순간의 포만감으로 대신하며 '맛'과 '먹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일상과 그를 부추기는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삶은 더 자유롭고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가볍게 먹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부의 식탁에 비하면 나는 늘 진수성찬이라는 것도 살짝 마음에 걸렸다.

 

한 세대를 넘어선 부부, 가족, 아내의 시간과 과거의 사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지만 회고담이라는 느낌보다 저자의 관점과 내면을 통과한 현재적 기록으로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만 쉽지 않은 가치지향적이고 단순하고 정갈한 삶을 살아가는 부부의 일상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편안했는데, 그들의 이력이 아주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결심'과 '노력' 사이에 놓인 수십 년의 하루하루가 쌓인 결과인 현재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큰따옴표로 옮긴 대화들이 상당히 많은데, 서로 경어를 사용한다지만 꽤 문어체적이어서 정말 이렇게 대화를 할까 신기하기도 했는데 서로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옮긴 부분도 다르지 않았다. 수행자처럼 말하고 살아가는 부부 역시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하고 어긋나는 때가 있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는데 후에는 어김없이, 그 사이의 성찰과 진심을 담은 한결 지극한 대화가 오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소하든 무겁든 상처와 자극을 주고받는 일은 피할 수 없고 그를 다루고 나아가는 태도에서 관건은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걸, 당연하지만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젊은 날 뜨겁게 사랑했고 자신이 꿈을 좇을 때 가족과 생계를 책임졌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잃지 않으며 은퇴 이후 자신의 시간에 충실한 아내를, 남편의 시각과 입장에서 바라보고 기록한 내용에는 강인하고 성숙하고 지혜로운 아내의 면모가 많이 드러난다. 따로 또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빚졌던 남편의 마음과 그러한 과정을 희생이 아닌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도 후회도 없는 아내가 행간에 나란히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욕망과 즐겁고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관심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살아가는 아내의 일상은 이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중년의 아내는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며 출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도 했었다는데, 그들의 삶이 운 좋게 보통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두 피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면 공부와 참선으로 매일 자신을 단련한 오랜 날들이 모여 가능한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가족의 시간'이 시작되는 첫 번째 글은 서울과 파주와 영국에 머무는 가족들이 각기 하늘을 찍어 메신저 대화방에 올린 사진 이야기와 함께 "이 하늘 사진 한 장씩은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도 가족이 떠오르더라는 말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97쪽)로 마무리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체로서의 거리감과 믿음과 애정으로 연결된 안정감을 유지하는 가족의 한 장면으로 다가왔는데, 뒤의 한 에피소드에 따라붙는 "지금 딸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겪을 판단과 선택을 홀로 하는 독립을 훈련 중이고 아내와 나는 간섭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인내를 연습 중입니다."(172쪽) 라는 문장으로 이러한 관계와 삶이 그저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축보다 경험에 교육, 문화생활, 유학, 여행 등 개인의 성장에 충실하자고 약속한 결혼 초의 원칙대로 살아온 가족은 부와 성공이라는 사회의 잣대와는 다른 길을 걸었고, 각자의 충만함과 가족으로서의 행복을 놓치지 않은 모습이어서 부럽게도 느껴졌다. 저자가 가족들에게 때로 강요하기도 했다는 한 가지는 글쓰기,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스스로를 스승으로 모시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159쪽)이며 "글쓰기의 최종 목표는 내 삶이 좋은 삶이 되도록 하는 것"(160쪽)이라는 말은, 약간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는 멋지고 닮고 싶은 점들이 많이 발견했다. 동네와 이웃들에 관심하고 살피는 모습, 본능처럼 골목 끝까지 눈을 치우는 모습, 사용감 때문에 교체한 모티프원의 수건과 시트를 동네에 가져다 이웃들에 나누는 모습, 필요한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을 중고 거래로 마련하고 처분하는 모습, 한 모임의 남미 자전거 여행을 마음 가는 대로 자원하고 장기 휴가를 내고 40년 넘게 타보지 않은 자전거를 장만해 연습하고 여러 준비를 거쳐 해낸 모습 등.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 조금 더 어려운 것은 그 생각을 시작하는 것, 제일 어려운 것이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다."(88쪽), "나는 말 중에 가장 좋은 말은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191쪽), "우리도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어요. 어제도 두부 한 모에 배추 한 포기, 부추 한 단, 오징어 한 마리까지, 이렇게 무절제하게 장을 봐서야 되냐고요."(201쪽), "신념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사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 더불어 화를 내지 않고 사는 것이다."(207쪽), "왜 두렵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두려움은 바라보고 있으면 커지고 직면하면 사라지지요."(250쪽) 라는 말 앞에서도 잠시 멈추어 나를 생각했다. 맥락없이 뚝 떼어놓으니 이상하지만, 금세 잊고 싶지 않아 적어둔다.

 

작년에 남해의봄날 정기구독으로 받은 책이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묵혀두다가 읽었다. 부부와 아내는 나와 무관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나나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해서 괜히 시큰둥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막상 책을 펼치고서는 쉽게 단정했던 편견이 민망해졌고, 타인의 삶과 이야기에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며 읽었다. 쉽게 변할 리는 없겠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오롯한 혼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삶은 결국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말미의 서지 정보에는 '글과 사진 이안수' 그리고 '고마운 분 강민지'라고 부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저자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인 에필로그(262쪽)는,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게 두어야 합니다. 당신과 나에게 속한 것들, 그리고 당신과 나까지도…."라는 아내의 말을 인용하고 "하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바다'가 됩시다. 당신이 이미 나의 바다였듯이."라고 끝난다. 서로에게 바다가 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아름답지만 내 몫이 아니라고, 대신 책 덕분에 알게 된 어떤 삶의 태도를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



이안수
2021.11.30초판1쇄,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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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5. 10. 14:54

 

 

열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들이 연속된 책이어서 책장을 열기 전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했는데, 이야기들이 시작되기 전 가벼운 ‘작가의 말’이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고 이야기들은 다행히 두 챕터로 나뉘어져 묶여 있어서 약간의 변별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첫 번째 파트인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의 작품들은 각기 다양한 소재와 주제와 메시지로 나아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접촉 증후군을 앓는 개체들이 깨닫게 된 사랑의 다른 얼굴, 사고 이후 장착하게 된 기계 눈의 양가성,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동일한 존재의 삶, 제한된 감각영역의 매개와 전환의 의미, 이국적 경험의 타겟으로 축소된 소멸 위기의 행성어와 전뇌 통역 모듈 부적응자에게서 존재 의의를 발하는 행성어 책들, 예언이나 전망과 별개로 도래하는 미래의 실체, 발라드의 주기적 유행 속에 공유되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 우주를 넘나드는 최첨단의 장비로도 포착할 수 없는 풍경과 그를 마주하는 여러 가지 방식과 어떤 마음. 납작하게 기록하게 되어 민망하지만, 이야기 자체를 즐기고 여운을 찬찬히 곱씹기에 작가의 상상과 기발한 설정은 여전히 내게 낯설었다. 감각와 사유를 전복하는 대다수 이야기의 기저에 '인간적인 감수성'과 인류의 삶으로부터 은유한 상황들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지구와 현재라는 시공간의 제한을 거두절미하고 넘나드는 배경은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나마 "행성어 서점"과 "포착되지 않는 풍경" 정도에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파트인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에 속한 작품들 중 몇은 [지구 끝의 온실]을 떠올리게 했고, 그의 짧은 외전들처럼 느껴졌다. 균류나 식물처럼 느리고 질기게 멀리 퍼져나가는 것들에 대해 관심하던 아영이 작가의 얼굴과 겹쳐 떠올랐고, “늪지의 소년”의 가설을 원전처럼 인용한 “오염 구역”과 두 작품의 후일담인 “가장자리 너머”는 완전히 유기적인 작품들이어서 짧은 이야기들의 연결로 만들어낸 '김초엽 유니버스'의 일면을 징검다리 건너듯 경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구체적인 배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대체로 기이하고 낯선 감각, 개체성을 넘어선 지각 체계의 연결 혹은 확장, 외계종의 침투와 그에 대한 주류적이거나 비주류적인 반응, 섣불리 유해성을 낙인찍은 이종의 숨겨진 가치와 그들과 공존하는 미래 등 이전 작품들의 주요 요소들이 재등장하거나 업데이트된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가 천착하는 대상들에 대한 몰두, 개체-집단간 선의에 기반한 호혜적 관계와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계를 향하는 이야기들의 다양한 변주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얼마 전 단편 모음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읽은 탓인지 어떤 지점에서는 변주를 넘어 복제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아마도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없는 과학 지식과 일천한 SF 독서력 덕분에 작가가 창조한 다른 세계의 디테일과 이야기들에 온전히 빠져들거나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낯선 감각과 상상을 통해 그려낸 작품들이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그 속에 다른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때로 망설이고 주저하면서도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것이 도전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그러나 예측했던 대로 내가 어떤 이야기에 매료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으므로, 명망과 마케팅에 현혹되어 굳이 '젊은' 소설가의 책을 구입하는 일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절감했다.

 


김초엽
2021.11.1초판1쇄 11.5.2쇄 발행,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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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5. 9. 13:41

 

 

오래 전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책을 읽었고 이후 적지 않은 책을 냈음에도 내게 작가의 이름은 그와 함께만 기억되고 있었다. 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소중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게는 어둡고 답답한 분위기와 뭔가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갇혀버린 어린이들의 이미지가 무겁게 남았다. 그래서인지 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산문집으로 작가를 다시 마주했다. 2019년 11월 파주로 이사한 몇 달 후부터 쓰여진 글은 연재를 엮은 것이었는데, 발간 시점에 긴 인터뷰를 찾아 읽으며 새롭게 받은 인상들이 이 책에서 조금 더 진한 빛깔을 띄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글은 "건강하시기를."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작가는 이 말에 대해 마지막 인사로 오랫동안 써왔지만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고도 쓴다. 나 역시 많이 써온 말이지만 그 속에 작가가 표현한 여러 의미들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작가와 산문집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가 첫 장에서부터 각인되었다. "하루 작업의 질은 대체로 원고 앞에서 버티는 시간의 양에 달렸다."는 작가는 십여 년 전 크게 아픈 후로 꾸준히 하게 된 운동과 가장 잘 맞는 걷기, 산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즈음부터 일어난 일상의 변화들과 새롭게 생겨난 현상들에 대해서도 섬세히 기록한다.

 

팬데믹 초기부터 작년 중반까지도 우리는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확진자들의 동선을 뉴스를 통해 전해듣고 살고 있는 지역의 누군가들의 동선과 어떤 점들을 불가항의 문자로 전달받고는 했다. "노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한 사람의 생활과 식사, 그런 걸 보면 그런 걸 보고 있다는 것이 민망하고 미안했다."고 쓴 걸 보면서, 방역을 위한 암묵적 동의를 전제로 진행되었던 그리고 윤리적 고려가 아닌 행정력의 부족으로 중단된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들을 떠올리며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고 새삼 느꼈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래를 잘 모르겠고 "몰라서 자꾸만 생각한다."고도 쓰는데, 몰라서 생각 밖으로 밀쳐버리거나 없는 셈치는 일이 많은 사람으로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었다.

 

작가가 이사한 파주의 집 앞에는 얼마 후 메워져 다른 집들이 들어선 '반달터'가 있었고, 수십 년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었을 맹꽁이들은 집들이 들어서며 땅에 묻히거나 서식지를 잃고 어딘가로 떠밀렸으며, 그런 땅에 지은 집들은 5cm쯤 가라앉는다고 한다. 맹꽁이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다 호흡 곤란을 느끼기도 했다는 작가는, 반달터의 공사가 시작되고 흙이 덮인 부분에서 맹꽁이 소리가 사라졌다는 걸 지각하며 "맹꽁이 학살, 하고 생각했다가 주제넘고 비위 상해 관뒀다. 이렇게 편하게 선 채로 학살, 하고 즉시 생각하다니."라고 적었다. 얇은 산문집 한 권으로 누군가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 역시 주제넘고 비위 상하는 일이지만, 글의 곳곳에서 이런 태도를 느낄 수 있었고 작가가 어느 정도는 이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일상의 경험과 사유를 기록한 글들의 묶음이어서 구체적인 생활상이 많이 드러나지만, 어떤 말이나 순간에 집중하며 그로부터 확장되거나 단속되는 흐름이 반복되었고 그래서인지 작가가 주인공인 짧은 연작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만약 소설이라면 파주와 서울 도심과 목포와 태안과 제주의 바다 등을, 현재로부터 40년 전 즈음까지를 오가는 배경에 동거인과 동생과 조카들이 이따금 등장하고 부모와 친척 몇이 기억으로 소환되는 작품일 수 있겠다. 주인공은 "내가 부디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소원을 품고" 자랐고 동생들과 함께 "어른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견딘 밤"이 있었으며 "여전히 불행하고 불운"한 부모와 친밀하지 않은 관계로 살고 있다. "일곱살에 겪은 일은 마흔이 넘어서도 잊지 못한다"고 기록한 사건이 있었고 그 무게와 '흔'의 깊이를 당연히 짐작할 수 없지만, "그러나 지금 내 삶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다." 라는 말이 지금의 주인공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느꼈다.

 

면밀하게 따져가며 읽은 것은 아니지만 사적인 기록치고는 신기할 만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성장 과정에서 경험했던 상처에 대한 서술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담담한 거리가 느껴졌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정의 반영일 수도 있고 극복이나 객관화라는 말은 조심스럽지만, 덕분에 과거의 그늘에서 스스로를 해방한 한 사람의 글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산책하고 장을 보고 글을 쓰는 일상과 나란해 보이는 사회와 구조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나 고통받는 이들의 현장에 다가가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가의 모습은 미더웠고, 그러면서도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거나 '가물치 사건'에 대해 동거인과 대화를 나눈 후 "조금만 경계심이 풀려도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무심한 듯 쓸 수 있는 균형감각 같은 것이 나를 돌아보게 했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절반쯤은 제목으로 내용을 바로 짐작할 수 없는 글이었고, 약간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작가의 사유를 따라가며 여기도 들렀다가 저기도 들렀던 글이 마지막에 이르면 이런 이유로 붙은 제목일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의적인 느낌일 수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을 강조하고 앞세우며 누구에게나 들리고 전해지기를 욕심내기보다 성심껏 읽고 살필 마음이 있는 이들에게 잘 전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느낌은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라고 서두를 여는 '작가의 말'에서 거듭 확인하는 반가움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얇지만 묵직한 책이었는데, 산문집 덕분에 올해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백의 그림자]를 읽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수년간 작가가 걸음한 여러 현장에 함께했던, 나는 견디지 못해 빠져나왔지만 성인이 된 후 오랜 시간을 늘 그렇게 살고 있었던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건네받은 책이다. 어쩌면 세상보다 더한 생계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그의 요즘을 나는 모르지만, 이 책 덕분에 오랜만에 떠올렸다. "문학의 존멸은 내 싸움이 아니다. 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뭔가를 썼는지, 쓸 수 있었는지가 나는 궁금할 뿐이다."라는 작가는 오늘도 무언가를 썼을 테지 싶고, 그런 삶들의 언저리에서 여전히 게으른 나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친다. 우선은 작가의 언급으로 알게 된 흥미로운 책 몇 권을 염두에 두고, 찬찬히 읽어볼까 싶다.


황정은
2021.10.18초판1쇄 11.3.2쇄발행,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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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5. 7. 22:16

 

 

멸망으로 폐허가 된 거주구 행성들을 탐색해 정보를 수집하는 '태생적인 회수인' 로몬, 불멸인의 행성 3420ED의 시스템 관리자 셀, 행성이 소멸에 이르자 버려지는 기계혁명을 도운 결함을 가진 복제 라이오니(<최후의 라이오니>).
시지각 이상증으로 폐쇄 공동체에 격리된 채 살아가는 모그들과 그들의 감각의 도구이자 연결망인 플루이드(<마리의 춤>).
몸의 위치와 동작을 감지하는 고유수용 감각의 불일치로 몸 정체성이 분열되어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로라>).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후각 수용체를 통한 호흡으로 공기 중 분자가 실어나르는 의미를 읽고 소통하는 지하 세계의 행성과 수백 년 전 출발한 동면 캐빈에서 깨어난 원형 인류(<숨그림자>).
침략자를 받아준 오브와의 오랜 협약을 '신앙의 필요'로 치환해 행성을 유지하는 벨라타, 대기 중 분포하는 신경독성 물질로 인해 마지막 다섯 해의 비극적 망각 폭력 '몰입'을 경험하며 짧은 삶을 마감하는 운명의 벨라타인들(<오래된 협약>).
유기체 뇌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동 지식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생성된 거대 인지 공간의 압도적 권위와 그 그늘 아래 망각되고 사라지는 가치와 기억들(<인지 공간>).
'국지적 시간 거품'을 연구하던 언니의 사고로 완전히 다른 감각과 시간, 지각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매(<캐빈 방정식>).

얼마 전 [지구 끝의 온실]을 읽었지만 SF 면역이 생긴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생경한 이야기들에 대한 내 식의 정리가 필요했다. 각 작품의 구체적인 배경과 사건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지구와 인류와 감각의 ‘표준’을 벗어난 개체가 등장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서사로 전개되지만 구조나 관계,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을 떼어서 보면 지금의 세계에서도 발생하고 존재하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이야기가 담지하고 있는 메시지들에 공감이 되는 지점이 많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득하고 애틋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모든 이야기를 현실의 유비나 은유적인 차원의 메시지로 손쉽게 전환해 받아들이는 것은 SF 장르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도 독자도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은 이곳 지구이니 크게 실례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지구의 시공간성을 벗어난 곳에서도 존재하는, 결함이나 결핍을 지녔거나 소수자의 정체성을 보유한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드러내고 그 관계를 역전시키면서 당연하게 여겨져온 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점을 환기하는 이야기들이라고 느꼈다. 결함 있는 존재들에게 닥치는 난관이나 제한은 지금의 사회가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대하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 당사자들은 화자인 주인공이 놓쳤던 것을 깨닫게 만들고 인식과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것이 기계적인 도치나 전복으로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이야기의 기저에 깔린 작가의 다정하고 섬세한 바람이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일곱 편의 작품은 대부분 멀리까지 나아간 이야기들이지만, 다른 감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를 상상하는 일의 도저함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가득한 괴리와 어긋남을 직시하고 누구든 자기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는 낯설기만 한 세계의 향연이어서 실은 하나의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약간의 긴장이 동반되었고, 상상도 못한 개체나 행성의 이름이나 환경을 접할 때면 조금은 막막한 심정이 반복되기도 했다. SF 문학에 대한 낯섦이 직접적인 이유일 테지만, 근원에 자리한 스스로의 보수성을 새삼 직면하며 견디듯 읽어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무언가를 읽고 받아들이는 일은 늘 나를 비추는 일이고 특히 그 순간 나 자신의 상태와 긴밀하게 연계된 일이다 보니, 지금 나 하나도 벅찬데 이런 버거운 이야기들을 계속 읽어야 할까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꾸역꾸역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힘들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으로만 쪼그라들고 침잠하며 자신 밖의 존재와 현상에 무관심하고 냉소하게 되는 현실의 축소판을 체현하는 독서 중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멸망을 넘어 연결된 셀과 라이오니, 모그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싶었던 마리, 세 번째 팔을 갈망한 로라와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진, 부당하게 살려진 세계에서 다시 나아간 조안, 침략자들에게 행성의 시간을 나눠주고 오랜 잠에 빠져든 오브, 사적이고 ‘쓸모 없는’ 기억을 소중히 했던 이브, 어긋남을 통해 다른 감각과 차원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매까지.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해함을 넘어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어차피 외로울 수밖에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의 분투는 눈물겨웠다. '작가의 말'을 빌어오자면 "완전히 포개어질 수도 공유될 수도 없는,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을 영원토록 홀로 떠돌지만, ...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되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살아가게 하는 교차점들, 그 짧은 접촉의 순간들을 그려내는 일"이 뜨겁게 새겨진 작품들이었다.

 

작품 속 타인의 죽음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과 경쟁과 효율을 내면화한 채 누군가 배제하고 통제하며 지속되는 행성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거울처럼 비춘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함이나 지체를 동반하는 신체 일부의 결함이나 요소적 결핍을 넘어 신경전형주의에 대한 의문,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감각과 인지의 세계를 뒤집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정적이고 차분하게 회고하듯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상상을 통해 무척 도전적이고 전위적인 인식의 전환을 향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낯설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마냥 빠져들기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었던 걸 보면, 자극보다 오랜 취향이 더욱 공고하다는 걸 실감했지만 말이다. [행성어 서점]도 사두었고 곧 읽을 테지만, 김초엽의 소설은 당분간 거기까지가 될 것 같다. 과학에 기반한 서정과 아름답고 아득한 세계의 매력이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어느 날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 



김초엽
2021.10.15초판1쇄인쇄 10.20발행, (주)한겨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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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같은바람2022. 5. 4. 23:18



제목 그대로 이중섭이 통영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포커스를 맞춘 책으로, '이중섭의 통영을 찾아서', '이중섭과 통영의 예술인들', '명사들이 증언하는 이중섭', '통영시절의 작품', '이중섭 이야기' 등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0년대 중반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 당시 교류한 서양화가 김용주,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등 고인이 된 통영 예술인들과의 인연과 일화 및 이중섭 관련 문학 작품들이 실려 있고, 생전의 이중섭과 통영에서 교류했던 화가 전혁림, 옻칠예술가 김성수, 김용주의 제자였던 화가 박종석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들이 주요하게 담겨 있다.

"통영시절은 천재 화가 이중섭의 르네상스였다"는 앞표지의 문장이 책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한 마디다. 저자는 통영에서 나고자란 공무원으로서 고향과 이중섭에 대한 애정으로 통영에서의 이중섭에 대한 누락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바로잡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특히 이중섭 관련 저서의 연보에서 1953년 10~11월 경부터 다음 해 5월까지 반 년 남짓으로 기록되어 있는 통영 체류 기간이 사실은 1952년 늦은 봄이나 여름부터 2년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 주력하고, 통영에서 이중섭이 풍경화 작품을 많이 그렸고 그것은 전쟁의 포화에서 비껴 있었던 통영의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가를 존중한 당시 유력 인사들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통영에 온 시기에 대한 부분은 주로 당시 그를 만났던 이들의 인터뷰 내용,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 작품들 속 계절감("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통영 충렬사 풍경", "까치가 있는 풍경",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 "통영 앞바다" 등에 드러난 겨울 및 "복사꽃이 핀 마을", "통영 수원지", "푸른 언덕" 등에서 표현된 봄과 초여름 정경) 그리고 이 작품들이 1953년 12월경 통영 중앙동 성림다방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규명한다. 대다수 기록대로 이중섭이 1953년 10~11월에 통영에 왔다면 풍경화에 담긴 통영의 봄, 여름, 겨울과 약 40점의 작업을 한두 달 만에 완성했어야 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돌베개에서 출간된 <이중섭 평전> 속 통영 체류 관련 내용("이중섭은 1953년 11월부터 1954년 5월까지 통영에 머물렀다. 이 시절 이중섭의 거처는 문화동 세병관 앞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양성소와 중앙동 우체국 부근에 있는 동원여관이었다.") 관련해,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양성소의 소재가 1951년 8월부터 1952년 12월까지 문화동이었다가 현재 남아 있는 항남동으로 이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통영 도착 시기에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 책의 초판이 2010년이었으니 이후의 책 집필에서 참고할 법도 한데 이 부분이 왜 정정되지 않았는지 약간 의아하기는 하다. 읽지는 못했지만 서점에서 본 기억으로 돌베개판 평전은 무척 두꺼운 벽돌책이었고 당시까지의 이중섭 기록을 집대성하는 의미의 작업이었을 것도 같은데, '전문가'에 의한 입증이 아니라고 여겼다 해도 하나의 설이나 주장으로 부기될 법은 하지 않았을까.

모든 내용에 수긍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중섭의 통영 체류 시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주장은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설득력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정정이 필요한 부분이고, 저자가 인터뷰와 확인 작업 등으로 밝혀내고 정리한 통영 시절의 일화들이 이중섭의 역사에 온전히 편입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축소되고 비가시화된 이중섭의 통영 시절이 제대로 다루어지는 것은 미술사의 거장으로서든 한 사람의 생애라는 측면에서든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책의 관점과 접근은 부담스럽고 아쉬웠다.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지방 소도시에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인물이나 흔적이 얼마나 소중한 '자원'인지 알지만, 책에는 독자가 판단하고 수용할 여지나 여백 없이 ‘통영과 이중섭’의 관계의 중요성, ‘통영 시절이 이중섭의 르네상스’였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지나친 강조가 빈약한 도구화로 느껴지거나 오히려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책을 읽은 계기 역시 도서관 강의였다. 예전에 여행 왔을 때 지금은 폐업한 걸로 보이는 강구안의 한 가게에서 이 책을 보았지만 뚜벅이 여행자로서 짐이 부담스러워 망설이다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읽지는 않았지만 저자가 발간한 두 권의 통영 관련 책을 가지고 있고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의 보유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의로 그를 접하고 처음으로 책도 읽게 된 셈인데, 책 역시 강의와 무척 비슷한 느낌이어서 약간 음성 지원이 되는 것 같았다. 성정이나 성향의 다름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나 화자가 먼저 경탄하고 연민하고 흥분할 때 독자나 청자의 공감은 반감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부족한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엄청나게 노력했겠구나 싶은 책이었는데, 깨달음과 찬탄을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감춰졌거나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담담하게 기술했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김순철
2010.6.4초판 2018.9.6개정판, 도서출판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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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4. 28. 17:09

 

 

고독과 쓸쓸함이 덧입혀진 인물에게 끌리는 성향은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여서,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을 테고 소 그림에 별 감흥이 없었음에도 이중섭을 그냥 좋아했던 것 같다.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의 공연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중학생도 혼자 입장할 수 있는지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통영과 서귀포를 여행하며 곳곳에서 흔적들을 만나고 그가 가족들과 살았다는 퇴락한 미니어처 같은 거주지와 미술관과 거리를 둘러보고 걸으면서, 어떤 삶을 상상하며 마음이 그늘졌다가 환해졌다가 했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에 친구랑 함께 갔었고, 그때 산 "나무 위의 노란 새" 마그네틱이 현관에 붙어 있다. 예전에 그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지만 많은 걸 잊었는데, 지난주 통영과 이중섭 관련 강의를 듣고 토요일 답사를 생각하며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을 꺼내 읽었다.

 

또렷하게 사진이 남은 인물은 그 생생함 때문에 생몰년도와 무관하게 시대를 초월한 존재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중섭도 내게는 그런 경우다. 그는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출생지는 평안남도 평원군이었고 대지주와 민족자본가 집안의 터울 큰 막내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관심과 소질을 보였고 운 좋게 학창 시절부터 여러 미술가들의 영향과 지도로 성장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평양 외가에서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때는 집을 드나들며 친하게 지낸 친구 김병기의 아버지인 일본 유학파 유화가 김찬영이 있었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부부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이 교사로 부임해 도화 과목을 가르치며 이중섭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향후 프랑스 유학을 염두에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데이고쿠미술대학에 입학한다. 일본 역사가 시험 과목에 포함된 관립 도쿄미술학교를 피한 선택이었지만, 학교의 분위기나 교육 수준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연말에 스케이트를 타다가 다쳐 요양과 휴학에 들어갔다. 1936년에 복학 대신 자유롭고 개성을 존중하는 학풍의 분카가쿠잉 서양화과에 입학했는데, 분카의 교장 니시무라 이사쿠라는 미국에서 유학한 개방적 사고의 소유자로 딸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당시의 다른 교육기관들과 달리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했다고 한다. 분카에서 이중섭은 기성복을 직접 수선해 만든 작업복을 입고 다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잠을 자고 밤부터 새벽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생활을 했다.

 

20대의 이중섭은 도쿄의 분카와 경성, 원산 등지를 오가며 때로 요양하고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운명의 사랑과도 만났다. 1938년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창립한 지유비주쓰카교카이의 두 번째 지유텐 공모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는다. 병으로 인해 휴학하고 원산에서 요양한 뒤 돌아와 복학한 1940년에는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해 졸업 후 연구생이 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이 결성한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창립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1943년에는 지유텐에 출품한 작품 "망월"로 거금의 상금과 팔레트가 부상으로 주어지는 태양상을 수상한다. 이 시기에 출품한 원작 대부분이 망실되고 도판으로만 남았지만, 1940년대 초중반 4년간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생활한 그가 마사코에게 그려 보낸 100통이 넘는 엽서 그림은 남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작품에 한글로 사인을 했던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파티에서도 조선말 노래를 곧잘 불렀다고 한다.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소재와 표현의 작품과 자모의 조형적 예술성을 부각한 한글 서명은 그의 민족주의 성향과 상통하는 것이었고, 일제의 군국주의 팽창 정책이 나날이 격화되는 시기 일본 여인과의 사랑은 번민과 양가 모두의 반대 속에 지속되었다. 1944년 중반부터 심화된 미국의 일본 공습에 이중섭은 마사코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마사코는 폭격을 피해 피난을 준비하던 가족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도착한다. 그들은 1945년 5월 혼례를 치르고, 창씨개명 정책이 강행되는 중임에도 마사코는 이남덕으로 개명한다.

 

해방 후 이중섭은 첫 아들을 얻었으나 곧 사망했고, 고아원의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했다고 한다. 원산과 경성을 오가며 최재덕과 함께 미도파백화점의 실내 벽화 작업을 했고, 1946년 2월에는 조선예술동맹 산하 미술동맹의 원산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당시 북한은 1946년 3월 실시한 토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사라지고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1947년 3월 당중앙위원회가 채택한 '북조선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에 관하여'라는 결정문을 통한 문예운동 규제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조국과 인민에 복무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문화예술 창작 활동으로 자리매김하던 이 시기 이중섭은, 구상 등이 참여한 원산문학가동맹의 시집 [응향]의 표지와 후일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오장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을 그렸다. 1947년 평양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가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또 다른 작품전에서는 천재라는 인정과 함께 '인민의 적'이라는 소련 평론가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불안한 정세와 시대의 격동 속에 이중섭은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에 집중했고, 1947년과 1949년에 두 아들이 태어나고 원산 시외의 송도원으로 이사한 후에는 연필 소묘 작업과 소 관찰 등에 골몰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이 행방불명되고 북한에 무차별 폭격이 이어지자 몰살을 염려한 어머니의 강권으로 이중섭은 부인과 두 아들, 조카 이영진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1950년 12월 원산항에서 후퇴하는 국군의 화물선을 타고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피난민 수용소에 머문다. 부산에서 만난 김병기의 주선으로 문총구국대 경남지부 회원이 되어 신분을 보장받았지만 생활은 형편 없었고, 이따금 하던 부두 하역일은 껌팔이 소년을 때리는 헌병을 제지하다 곤봉에 맞아 크게 다친 후 그만두게 된다. 다음 해 이중섭 가족은 급증한 인구로 포화 상태에 이른 부산을 떠나 피난민 분산의 대안이었던 제주도로 이주한다.

 

1951년 봄 제주에 도착해 여러 날을 걸어 도착한 서귀포에서 이중섭 가족은 12월까지 머물렀다. '이중섭 거주지'로 남은 1.3평짜리 방에서 생활하며,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답례로 주거나 가족을 잃은 이들이 부탁한 초상화를 비롯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 북에 있을 때부터 꿈꿨다는 벽화 작업을 위해 조개껍데기를 모아두기도 했다고 한다.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같은 그림에서는 전쟁 중인 현실을 초월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고, 훗날 일본의 가족들에게 보낸 "그리운 제주도 풍경"의 환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는 서귀포에서의 생활이 가족을 지극히 사랑했던 이중섭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오히려 애틋한 느낌을 준다.

 

1951년 부산으로 돌아온 다음 해 2월에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가입했고,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생활고는 여전했고 아이들과 아내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데다 일본의 장인까지 돌아가시자, 일본인 수용소에서 지내던 가족들은 1952년 여름 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지인의 소개로 남포동 어딘가에서 노래극 <콩쥐와 팥쥐>의 무대장치와 소도구 등을 만들기도 하고, 월남 미술가들이 꾸린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으며, 나빠진 건강에도 그림을 꾸준히 그렸다. 이중섭은 아내와 주고받는 편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처참한 생활을 견뎠고, 아내는 일본 서적을 한국에 보내는 사업으로 그의 생활비와 제작비를 보태고자 했지만 큰 사기를 당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중섭이 남쪽에서 겪은 어려움은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부산에 당도해 신원조사에서부터 곤란을 겪었던 그는, 1953년 6월 3회 신사실파전에 출품한 "굴뚝"으로 조사를 받고 작품이 철거당했다. 분단 이후 고향인 북에 머물다가 월남한 이중섭의 신변은 불안했고, 전쟁과 체제 경쟁으로 과민한 당국은 북에서 내려온 이들을 수상히 여겼으며 그 역시 예외가 되지 못했다. 가족들을 그리워하던 이중섭은 그해 7월 어렵사리 일본에 건너가 일주일 정도 지내다 돌아오는데,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에서 일하던 유강렬의 권유로 넘어간 통영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대표작인 "달과 까마귀", "부부", "황소", "흰 소" 등의 많은 그림을 그렸고,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통영 수원지", "통영 풍경", "충렬사 풍경" 등 풍경화를 여러 점 남겼다.

 

이후 진주와 대구를 거쳐 1954년 7월 서울로 올라간 이중섭은 1955년에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에 출품한 은지화 세 작품은 당시 책임자 맥타카트에 의해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되기도 했지만, 전시회를 통해 재기해 빚을 갚고 가족들과도 다시 함께하는 꿈은 물거품이 됐고 이중섭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왜관의 구상 시인 집에서 그린 "구상네 가족" 속 자신의 모습이나, 대구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해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렸다는 "자화상"에는 당시 그의 불안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이후 돌아온 서울에서 그는 지인의 집을 전전하거나 신경쇠약과 영양실조 등으로 여러 병원의 입퇴원을 반복했고, 미쳤다는 소문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극심한 간염으로 음식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고 1956년 한 달여 입원했던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9월 6일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사망한 지 사흘 만에 알려져 친구들이 장례를 치렀고, 화장한 유해가 망우리 공동묘지와 일본의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다음 해 후배 조각가 차근호가 작업한 묘비가 망우리 묘소에 세워졌고 1965년 어린 시절 친구였던 김병기가 그에 대한 약전을 발표했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고 쓸쓸히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신화로서 부활'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저자는 이 책이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한 최초의 편년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목록이 6쪽에 걸쳐 빽빽하고 3쪽에 이르는 저자 후기에는 5년 동안 집필하며 도움을 받은 많은 이름들이 등장한다. 엄청난 조사와 취재를 통해 쓰여졌을 책에는 이중섭의 삶과 예술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과 더불어 당시의 사회상과 미술계의 상황, 이중섭에게 영향을 미쳤던 다양한 요소와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가득하다. 문외한인 탓에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활동과 자취가 새롭고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상징처럼 이미지화된 이중섭 역시, 시대와 현실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 평범한 인간이자 비범한 미술가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독서였다. 이후에도 이중섭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왔으니 새로 밝혀졌거나 수정된 내용들도 있겠지만, 20년이 넘는 시차에도 내게는 꽤 유익했다.  


최석태
2000.7.5초판1쇄발행,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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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4. 24. 17:32

 

 

 

술이 몸에 맞지 않아 마시지 않는다. 이십 대 초반에는 시절의 분위기에 휩쓸려 마셔대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인정해야 했다.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팔다리 관절이 쑤시고 저리고 끊어질 듯 아파 잠자리에 들 때마다 엄청 고생을 했고, 그런 고통을 감수하며 마실 이유가 없었다. 서른 즈음부터는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가더라도 그저 잔을 들었다 놓는 게 당연해졌고, 마흔 즈음부터는 술자리 자체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드물게 극소량을 섭취하면 몸은 귀신같이 알아챘고, 관절만이 아니라 온몸이 두드려맞은 듯 아파서 잠들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마신 게 지난해 이른 봄 사촌이 집에 놀러오며 가져온 화이트와인 한두 모금이었는데, 스산한 날씨에 돌아다니며 스며든 몸살기 탓인지 며칠을 고생했다.

 

[안녕 주정뱅이]의 인물들은 모두 술을 마신다. 생을 집어삼킬 만큼 많이 마시기도 하고, 일요일 저녁에만 상을 주듯 마시기도 하고, 매일 식후의 커피처럼 마시기도 하고, 안주와 주종의 조화 따위 무시하며 되는 대로 마시기도 한다. 그 어떤 음주도 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일곱 단편에 등장하는 이들의 인생은 일상이 된 음주와 드라마틱함의 정도를 양해한다면 나와 아주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허구의 인물이라도 그의 고통을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들은 삶의 무게와 번뇌의 깊이에 비례하는 만큼 술에 의지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작가 역시 오래 술을 마셔온 주당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술은 이 책과 연루된 모두에게 밥이나 물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생존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봄밤'은 한때 즐겨봤던 드라마 제목이기도 했다. 밝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레이첼 야마가타의 숨결이 느껴지는 음악들에 낭만과 애수가 드리운 분위기가 ‘봄밤’의 이미지로 남았다. 첫 번째 수록작 <봄밤>은 사뭇 달랐다. 각자의 이유로 삶이 무너진 수환과 영경이 지인의 결혼 뒤풀이에서 만나 당연한 듯 단단한 연인이 된다. 류마티스 관절염 합병증이 깊어가지만 신용불량자인 수환은 병을 적시에 치료할 수 없었고, 그가 요양원에 입원하자 영경의 알콜릭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중증이 되어 같은 요양원에 입원한다. 감당할 수 없이 술을 마시는 것이 나쁜 습관이 아니라 영경의 고질병이라는 걸 이해하는 건 수환뿐이었다. 영경이 음주를 위한 외출을 감행한 밤 수환은 세상을 떠나고, 의식불명으로 돌아온 영경은 알콜성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는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39쪽) 타인들이 알아준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마지막 성찬을 위해 술을 사들고 모텔에 입성하던 영경이 낭송하는 김수영의 "봄밤"은 아이를 빼앗겼던 그가 사랑하는 수환마저 떠나보내는 잔인한 밤의 송가였다.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소박한 다정함과 피할 수 없는 비극이 강렬하고 처연해 심장이 툭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런 삶이라니, 이런 죽음이라니. 대단한 판타지였지만 온전히 사랑한 두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소설이어서, 이야기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삼인행>의 인물들은 1박 2일 속초로 떠난다. 별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 주란과 규의 대화는 서로를 향하지 않을 때도 뾰족하고, 그나마 평화롭게 만나는 지점은 식탐과 완전한 남의 일에 말을 얹을 때다. 어디선가 숙박권이 생기지 않았다면 떠나지 않았을, 매사 피곤하게 티격태격하는 자신들을 잘 아는 둘 사이의 완충지대로 훈이 동행한 여행은 시종일관 삐걱댄다. "자연이든 관계든 오래 지속되어온 것이 파괴되는 데는 번갯불의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 부부나 케이블카 커플이나 파괴된 논밭에 서 있던 크고 작은 크레인들처럼 가엾고 기괴한 잔여물에 불과하다고 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하나의 크레인처럼 여윈 어깨를 으쓱."(62쪽)할 만큼 부부에게서 거리를 두던 훈도, 규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며 나누는 별 것 아닌 대화를 통해 위태로운 소용돌이 속으로 순식간에 휩쓸린다. 주란과 규가 갈등하는 닮은 꼴인 것은 그들이 부부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누구랄 것 없이 내면에 자리한 강박과 불안이, 긴밀하지만 반복적으로 어긋나는 관계의 자극으로 발현되고 단절이 아니라면 끝낼 수 없는 불화를 만들고 마는 것인지도.

 

<이모> 윤경호 씨는 일찍이 가장 역할을 떠맡아 가족 부양은 물론 남동생의 빚까지 갚아주곤 하다가 나이 오십에야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5년 동안 돈을 모아 독립하며 가족과 결별했지만 2년 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결혼할 때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시이모님의 병문안을 간 '나'는, 피붙이가 아니고 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수녀처럼' 살고 있는 그의 집의 첫 번째 초대자가 되고 이후 규칙적으로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원가족 누구도 듣지 못한 윤경호의 살아온 이야기와 현재를 알게 된다.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89-90쪽) 네 개비의 담배와 휴관일을 제외하고 반복하는 두 번의 도서관행, 집중해 준비하는 소량의 요리로 보내는 하루, 낭비도 사치도 없이 65만 원으로 살아가는 한 달, 자신만의 정확한 루틴으로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생활을 지속하는 윤경호의 젊은 날은 무겁고 쓸쓸했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을 추적하고 사라진 뒤에도 끊어내지 못하는 긴 시간이 있었고, 더 오랜 과거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기억도 있었다. 그는 먼훗날 비밀스럽고 공평한 '참회'를 스스로에게 돌려주었다. 우물 같은 과거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난 떨리는데 넌 심드렁하잖니?"(81쪽) 쉽게 나올 리 없는 말이었겠지만, 솔직하고 담백하게 마음을 열 줄 알았던 윤경호는 말년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끝까지 혼자서만 간직했다면 그건 정말 쓸쓸한 삶이었을 것 같고 말이다.

 

우연은 가책과 후회 속에서 때로 필연이 된다. 관희를 통해 문정에게 전달된 관주의 <카메라>가 그렇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136쪽)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도 술 한 잔을 청한 관희가 정말 '김문기'를 곧이곧대로 믿었거나, 관주와 문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이 급속도로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불법체류자'에 대한 부당한 망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자랑스러운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가져온 트라우마일 테지만, "비록 거짓이지만, 문정에게 한뼘이라도 허구의 간격을 만들어주려는"(134쪽) '빤한 연극'을 하는 딱 그만큼은 온전하지 않았을까. 누구의 책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우발적인 상황으로 어떤 우주는 끝이 나고 어떤 세계는 파괴되고, 그럼에도 카메라는 최초의 발설자에게 돌아가고야 마는 이상한 필연은 정말 소설적으로 느껴졌다. 악의적인 선입견을 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을 거라고 이해하면서도 굳이 '불법체류자'였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은 짙게 남았다.

 

"그들은 전체적으로는 견딜 수 없이 고집 세고 지루한 인물들의 진열장이었지만 개별적으로는 각자 고귀해 보였다. 그 고귀함은 시간을 감내하는 고독의 능력으로 빛이 났다. 그러니 그녀도 그렇게 고독하게 견뎌야만 했다"(143쪽) 예술인 레지덴스에 처음 입주한 등단 2년차 소설가, 그녀는 괴롭고 두렵고 혼란스럽다. 적당히 어울려 공동 생활을 하면서 식사 후에는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고, 무시로 동료 예술가들을 관찰하고 품평하는 것이 그녀의 일처럼 보인다. 새로 입주한 여배우 달과 작가 위현은 그녀의 주의를 온통 집중시킨다. 번역가였던 위현은 시력을 잃어가는 중에 소설가로 데뷔했고, 개인적인 시련을 티내지 않으며 레지덴스의 예술가들과 활달하게 어울린다. 미처 몰랐던 존재의 운명적 '비극'은 그를 주시하는 그녀에게 와서 한껏 증폭되고 타자화된다. 그녀는 위현에 대한 다른 이들의 '무례한' 언사에 '무력한 다짐'을 보태고, 보지 못하는 위현을 의식하며 외모를 단장하고, 전과 달리 산책하는 무리에 합류해 위현을 지켜본다. 날아든 새로 소란한 식당에서 위현을 챙기고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된 그녀는, 문어체로 문학적인 대화를 구사하는 위현에 보조를 맞추며 자신이 타인을 평가하던 기준에 어긋나지 않도록 말을 고른다. 주변을 오가는 달의 참견에도 술자리의 대화는 이어지고, 도취된 듯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던 위현의 환심은 무례의 경계를 향한다. 위현을 둘러싼/향한 탁월한 심리 묘사에 흠뻑 빠져 읽었고 조금 애매했지만 설마했는데,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해설에 약간 맥이 빠졌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제 막 소설가가 된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무신경한 존재들에 대한 순수한 혐오감을 작가적 자산으로 키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무심한 사람들이 연약한 타인에게 함부로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이 세계 안에서 자신만이 그 연약한 타인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온전히 배려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윤리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야 할까."(255쪽) 라는 언급과 함께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에 나오는 '카타르시스 스토커'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해당 각주에는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면서 자기애를 강화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라는 설명도 등장하는데,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생략하는 게 좋겠다. <역광>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았는데, "역광을 이용하면 피사체의 윤곽은 또렷해지되 그 경계선의 내부는 어둡게 가려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이 사진이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는 까닭을 심리학적으로 말해보자면 그 피사체에 내 환상을 마음껏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255쪽) 라는 해설에 수긍이 됐다.

 

<실내화 한켤레>는 고등학교 시절 교실에 기괴한 공포를 몰고온 수학교사의 숙제 때문에 잠시 가깝게 지냈던 세 사람이 14년 만에 만나 어울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시인 혜련이 멀리 미용실 텔레비전 화면에 잡힌 경안을 알아보고,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 선미와 함께 원룸에 들이닥친다. 특출나게 예쁘고 돈을 잘 쓰고 잘 놀았던 혜련과 단짝처럼 함께지만 어딘가 비밀스러웠던 선미, 여전히 아름다운 둘은 빈한한 원룸에서 뚝딱뚝딱 안주를 준비하고 술자리를 마련하는 능숙함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주종을 바꿔가며 옛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경안의 기억 속에서는 두 사람과 관련된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불쑥 시작된 회합은 나이트클럽과 선미의 지인이 운영하는 방배동 카페로 이어지고, 카페 주인의 애인까지 합류해 잔뜩 흥이 오른 술자리는 경안의 원룸에서 마무리된다. 다음 날 가물한 기억으로 깨어난 세 사람의 화제에 오른 이는 카페 주인의 애인, 원룸까지 왔었던 그는 어느새 사라졌고 선미는 그의 지독한 성병으로 카페 주인이 자궁을 들어냈다는 사실을 전한다. 홀린 듯한 숙취가 싹 달아나고 신경이 곤두선 경안이 욕실로 달려가 청소하는 사이, 해장 운운하던 혜련은 말없이 떠났다. 갑작스런 만남에 들떠 자주 보자 했던 혜련은 이후 소식이 없고, 거듭 연락하는 선미의 집에 경안이 잠시 방문하는 것으로 이들의 인연은 그친다. 순진하고 솔직한 혜련과 그 곁에 안개처럼 붙어 있던, 14년 전 경안이 두 사람의 뒷모습과 실내화 한켤레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선미는 그렇게 다시 한 번 기억 속의 사람들이 되었다. 선미의 집에서 나오며 경안은 "선미를 휘감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비밀스러운 안개라기보다 치명적인 가스에 가깝다"(209쪽) 생각했고, 해설은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드는데, 농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병들지만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아서 늘 배달만 하려 드는 사람도 그 자체로 환자"(252쪽)라고 선미를 진단한다. 어렸을 때 오빠 둘이 한꺼번에 죽었고, 이제는 '병실처럼 청결한 집'에서 매일 새것처럼 쌍둥이의 축구화를 닦는 선미의 남모르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어떤 여지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5년간의 영업 종료를 앞둔 인태초밥과 신도시와 구도시를 잇는 국도변의 장어집, 과거의 헬스클럽과 일식집과 신도시의 아파트를 오가는 <층>의 인물들은 12년의 시간 안에서 서로 매혹되고 오해하고 실망하고 어긋나며, 타인의 기억과 모르는 우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그의 삶이 궁금했다. 그의 삶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219쪽)와 "한때 그녀는 그가 발라준 남미 대륙 모양의 굴비를 먹으며 그와 함께 남미를 여행하면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어리석고 어리석었다. 아무려나, 그녀는 더이상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았다. 거칠고 팍팍했을 것이 분명한 그의 삶이 무섭게 느껴졌다."(237쪽) 사이에 예연에게 일어난 일은, 인태의 탓이 아니었지만 인태의 탓이기도 한 거친 욕설로 가득한 통화를 엿들은 것이었다. '초추의 양광'과 '꼬추의 발광'의 낙차만큼이나 다른 세계에 속했던 두 사람을 가른 것이, 그 순간만 넘기면 그만이었을 운명의 장난이나 찰나의 불운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덜컥 임신한 인희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삶에 따라붙는 그림자들은 어느 순간 예연에게 인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잘잘못의 문제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상대에게 투사하며 빠져든 이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떤 벽이 아니었을까. 그 벽을 넘어서는 것은 나의 영역이자 의지이고, 상대는 잘못이나 책임이 없는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의 의미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층(層) 겹치다, 계급, 수준 / 물체가 거듭 포개져 생긴 켜, 나이나 재산이나 사물 따위가 서로 같지 아니하거나 수평을 이루지 못하여 나는 차이, 위로 높이 포개어 짓는 건물에서 같은 높이를 이루는 부분" 등의 뜻풀이가 나왔다.

 

책 모임의 이번 달 책이었고, 오늘 오전에 줌으로 모임을 했다. 제목과 작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모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책이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한 <봄밤>의 인물들이 마음에 인장처럼 남아 울렁거렸고, 간만에 느껴보는 아득함에 매료되면서도 나머지 작품들이 다 이런 식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작품마다 전해지는 밀도는 조금 달랐고, 술처럼 도수가 있다면 뒤로 갈수록 약해지는 느낌이어서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이미 유명한 작가를 이제야 접하고 할 말은 아니지만, 말 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놀랐고 이 양반 소설 장인이구나 싶었다. 인물들이 나누는 촌철살인의 대화에 헛웃음을 짓다가도, 구체적인 불운이나 고통 속의 인물들에 새겨진 보편성의 조각들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느끼는 공감과 시무룩함과 안도감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완전체로서의 인물들은 대체로 실제 주변에 있다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연과 상황과 성격이라고 느끼며 민망해졌고, 어딘가 망가지고 부서진 그들에게 잠시나마 곁을 붙여주고 괜찮은/행복한 순간을 선사하고 그들의 오늘에 이유를 만들어주는 작가의 마음씨와 솜씨에 고마웠다. 각자 믿고 있는 것들의 거리, 해소되지 않고 남겨지는 오해와 어긋남, 찰나에 느끼고 잊(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쌓이고마는 관계의 삐걱거림을 섬세하게 포착한 진한 소설들, 어렸을 적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얼마 전 '젊은' 소설가의 작품을 읽으며 세대감성에 대해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내용과 별개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소설을 읽은 느낌이기도 하다.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e)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제목이 붙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도 좋았다. 인상적이었던 구절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반가웠고, "유사성과 인접성,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일까요?(166쪽)나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172쪽) 같은 문장들이 로만 야콥슨과 발터 벤야민의 인용이라는 걸 알려주는 친절함도 고마웠다. ‘호모 파티엔스’라는 말은 처음 접했는데 빅터 프랭클이 "인간은 이성으로 사유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고통받는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더 중요한 측면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면서"(259쪽) 제안한 명칭이라고 한다. 나아가 <봄밤>과 <이모>를 예로 인간은 고통에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하며, "환자(patient)는 견디는(patient) 사람이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259쪽) 하므로 '고통하다', '고통-하는 인간'이라고 옮겨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고 쓴 부분에서는 뭔가 극진한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의 기존 논고를 바탕으로 '사랑은 결여의 교환'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아름답지만 도저하게 느껴졌고,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268쪽)는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고통의 양상을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므로, 지금의 내게 가장 크게 와닿은 두 개의 문장은 266쪽에 모여 있었다.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이모>) 그리고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페소아, [불안의 책]) 

 

 

권여선
2016.5.16초판1쇄 2017.1.19초판9쇄발행,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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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4. 24. 01:38

 

 

마크스 서점의 프랭크 도엘이 세상을 떠난 뒤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묶어낸 저자는 판권을 산 런던 도이치 출판사의 출간 계획에 맞춰 런던을 방문한다. 20년간 나눈 편지에서 몇 번이나 거론됐지만 지연됐던 여행은 그들의 편지를 엮은 [채링크로스 84번가]로 인해 현실이 됐고, 1971년 6월 17일부터 7월 26일까지 저자의 런던 체류기가 [마침내 런던]으로 묶였다. 수술을 받고 퇴원한 직후의 혼자 여행을 앞두고 저자는 전작에서의 까칠하고 대찬 모습과 달리 온갖 버전의 불상사를 상상하며 도착 첫날 묵을 호텔을 이중으로 예약하는 등 갖은 걱정과 대비를 하지만, 마크스 서점의 인연들과 지인의 지인들과 [채링크로스 84번가]의 독자들은 공항에서부터 에스코트와 가이드를 자처하며 40일을 꽉 채워준다.

 

런던에 도착한 저자는 출판계에서 퇴직하고 런던공항에서 일하는 대령, 프랭크의 아내인 노라와 딸 실라의 마중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숙소인 케닐워스 호텔에 도착해 실내를 둘러보며 실라와 저자가 나눈 대화, "너무 좋아요, 헬렌(Helen)." "내 이름은 헬레인(Helene)이잖아요." ... "나는 당신을 20년 동안 '헬렌'이라고 불러 왔거든요." 전작과 노라의 실례를 이 책은 바로잡아 저자의 이름을 '헬레인' 한프로 명기하고 있다. 헬레인의 여행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기간으로 나뉜 다섯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출판사의 공식 일정 몇 가지를 제외하면 온통 [채링크로스 84번가]를 통해 인연이 닿은 이들의 호의에 기댄 여정이다.

 

뉴욕의 헬레인은 흰색 현관 계단의 좁은 벽돌집들이 단아하게 늘어선, 이전 세기의 규격화된 주택 단지의 런던 풍경을 보고 싶어 영국 영화를 보러 가곤 했었다. 눈이 닿는 런던의 모든 것에 설레는 헬레인이 무엇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방문한 곳은 마크스 서점이다. 문을 닫아 서점이었던 흔적만 남은 그곳은 방들이 뜯기고 서가가 철거되고 창문에 붙였던 간판 글자도 일부의 흔적만 남았지만, 헬레인은 프랭크가 오갔을 난간에 속삭이듯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런던 생활의 대부분은 스스로 '공작부인'이라고 칭할 만큼 수많은 이들의 환대와 뉴욕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꿈만 같은 다채로운 경험으로, 화양연화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다양한 경로로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가이드하며 다양한 곳으로 이끈다. 드물게 넘치는 정과 의욕의 수위 조절에 실패해 "우리는 언제 내가 보고 싶은 걸 보러 가게 될까요?"라는 말을 끌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문학적 관심사와 교양을 갖춘 이들이 선사하는 풍성한 여행이다. 전작에서 헬레인이 찾던 책들의 저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관련 현장에 방문할 때 감회는 배가된다. 특히 존 던, 존 헨리 뉴먼, 아서 퀼러-카우치(Q)처럼 헬레인이 사랑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흥미를 끈다. 수십 곳의 장소가 나오고, 헬레인이 혼자 멀리까지 움직인 경우는 없으니 함께한 이들도 적지 않다. 런던에 가본 적이 없어 공간적 상상이 불가능하고 그들과의 대화나 일화가 자세히 기록된 덕분에, 여행지의 풍광과 문화적인 발견 못지 않게 동행한 이들의 개성과 매력도 크게 다가왔다.

 

라는 확고한 주관과 솔직하고 너른 인간미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저녁 식사를 위해 헬레인과 집으로 가던 중 카를 마르크스의 묘역에 차를 세웠던 그는 딸기 디저트를 먹으며 다시 결혼할 수 있을지 점을 치고 '절대로 못 해'가 나오자 비통한 얼굴로 딸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프랭크가 살아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서적상 부부의 파티 차림에 러시아 스파이처럼 보인다고 농담을 했는데, 몇 달 후 그들이 정말 러시아 스파이로 밝혀졌다는 이야기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프랭크 부부의 품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부는 특종을 잡기 위해 돈다발을 들고 몰려온 기자들을 물리치고 "좋은 사람들인" 그들을 면회하고 재판을 참관하면서 과거를 속인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후 풀려나 폴란드에 살고 있는 그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다. 헬레인의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프랭크가 기뻐하며 집으로 가져와 낭독했고 그럴 때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는 노라는, 헬레인에게 마크스 서점과 프랭크의 사진 그리고 마지막 남은 정원의 장미들을 선물로 전한다.

 

"거두절미하고"로 편지를 시작하는 팻 버클리는, 지인이 부탁한 헬레인과의 첫 만남을 앞두고 일행이 있냐는 질문에 만찬회가 아니라고 답해 당황시키지만 처음의 인상과 달리 점차 마음을 사로잡는다. 성마르고 군더더기 없는 언행에 박식한 교양인인 그는 디킨스와 셰익스피어의 흔적이 남은 곳들, 너무 늦어 닫혀 있었던 런던타워, 윈저성과 자신이 졸업한 이튼 칼리지, 사이언 하우스와 오스털리 파크, 로즐리 하우스 등을 몇 차례에 걸쳐 안내한다. 셰익스피어가 드나들던 펍 '조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짜증스러워 하는 헬레인의 말에 "천만에요.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라고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특별하게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고유성을 확신하며 저지르는 실수에 간명하게 현실을 환기하는 댄디함이 매력적이었다. 윈저성에 함께 갔던 헬레인은 "나는 그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20세기 초반 영국의 빛나던 시기인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의 끝손질이 따른다."고 쓰고,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는 빨강과 하양의 런던시 문장과 표어("주여 우리를 인도하소서")가 새겨진 금 십자가 장식핀을 선물한다. 동경하는 런던에서 취향과 호감을 나눈 우정의 표식은 뉴욕의 헬레인에게 오랫동안 감동으로 남았을 것 같다.  

 

도이치 출판사로 도착한 편지를 통해 만난 마크스 서점 사장의 아들 레오 마크스와 엘레나 부부는 영화감독과 초상화가다. 첫 만남에서 소울메이트라고 느낀 헬레인은 다정하고 세심한 그들에게 감기에 좋은 음식들을 선물받고 화려한 해물식당에서 식사를 대접받고 집에도 방문해 레오의 자부심이 담긴 음료와 함께 즐거운 담소를 나눈다. 그리고 러셀 스퀘어에서 그릴 것과 완성된 작품을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난생처음 초상화 모델이 되기도 한다. 몸집보다 훨씬 큰 이젤과 화구들에 모델인 헬레인이 심심할까봐 커다란 휴대용 라디오까지 준비한 엘레나와의 초상화 작업은 즐겁게 진행되고, 함께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 방문해 문학 작품을 통해 익숙했던 인물들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도 갖는다. 관광할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을까봐 염려하며 사려 깊게 작업을 이어갔던 엘레나는 헬레인의 귀국을 아쉬워하며 진주 두 알이 박힌 반지를 선물하고 런던을 떠나는 날 대령과 함께 비행기까지 배웅한다.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출판사에,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연락처를 아무 조건 없이 공개하라고 전했던 헬레인은 유명인사부터 무명의 독자까지 많은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여행의 시작과 끝을 에스코트하고 런던 근교 여행용 가방을 선물하고 여러 시골과 옥스퍼드를 안내해 헬레인이 "이 짓을 한 달 이상 계속한다면 내 도덕의식이 크게 손상될 것 같다"고 염려하게 만든 대령, 매진이라 구하기 힘든 피터 브룩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 초대하고 떠나기 전 만찬을 마련한 조이스 그렌펠 부부, 당시 유행인 마구간 겸 마차 헛간을 개조한 뮤즈에 초대한 독자 부부, 팻 버클리를 소개한 뉴욕의 진 일리 부부, 지배인 오토를 비롯해 40일간 묵은 케닐워스 호텔에서 오가며 마주친 사람들, 조지 버나드 쇼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좋아하게 된 배우 엘런 테리의 재를 보기 위해 코번트 가든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친 실직한 배우, 노라가 보낸 택시가 무소식이자 호텔에서 불러준 미니캡의 운전사이자 캐나다 출신의 병원 인턴인 배리 등은 런던을 무대로 한 단편 소설의 인물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생동감 넘치고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인물은 역시 작가 자신이다. 출국 직전 고도로 불안해하고 여행 초반에는 "아무도 나를 아는 이가 없는 외국에 오자 나는 고국에서는 결코 쓰지 않던 굴레란 굴레는 모두 쓰게 되었다."며 긴장을 놓지 않던 헬레인은 어느새 누구보다 개방적인 마인드로 여행을 즐기며 자신에 대해서도 기록한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많은 것이 새겨진 땅에서, 꿈꾸던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이 된 여행에 감격하고 감회에 젖는 모습이 덩달아 기쁘다. 열일곱 살에 공공 도서관에서 찾은 아서 퀼러-카우치의 글쓰기 책을 읽으며 "3쪽에 이르러 난관에 봉착"하는 수없는 반복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일주일에 평균 세 차례씩은 "여기서 잠깐만."을 외치는 바람에 내가 Q의 강의록 다섯 권을 독파하는 데는 11년이 걸렸다."는 헬레인이, 그에 대한 책 [Q's Legacy]을 내기도 했다는 부분은 감동적이었다. 타인의 독서량에 부끄러워하면서 한 권을 50번 읽어 거의 암송할 정도가 되면 몇 년간 책을 치워 둔다는 그가, 마크스 서점을 통해 구해 읽은 영문학 책들을 어떻게 탐독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동경하며 런던행을 오래 꿈꿔온 헬레인은 베일리라는 영국 퀘이커교도 가문을 포함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어느 공원에서, 1807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버지니아에서 세상을 떠난 메리 베일리와 몇 세대를 건너 전해진 그의 자수 견본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후손으로서 자신이 마침내 '고국'에 왔다고 쓴다. 오랫동안 읽고 사랑해온 영문학 작품들과 그 배경이 된 런던에 대한 호기심과 흠모의 기저에는, 그렇게 얼굴도 삶도 모르는 핏줄 속 먼 선조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와 개인의 상황 탓이 컸지만, 전작에서 참으로 멀게 느껴졌던 런던까지의 거리는 비행기로 5시간이었다.

 

가깝고도 먼 런던, 기나긴 황홀경 같은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가 이륙하자 헬레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실재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조차 실제의 인물이 아니었다. 모든 일은 상상이었고 그들은 유령이었다."고 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찬 순간이 끝날 때, 현실감도 함께 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록은 "편히 잠드소서, 메리 베일리."로 끝을 맺는다. 그가 이후 다시 런던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아껴두었던 런던타워의 내부를 끝내 보지 못한 건가 싶어 아쉽다. 일상을 벗어나 꿈처럼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 특히 나이가 많았던 팻 버클리와 뉴욕에서라도 다시 만났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50년 전의 기록이니 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세상을 떠났겠구나 싶어 괜히 쓸쓸한 기분도 들었다. 생기와 온기를 담은 책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헬레인 한프•심혜경 옮김
2021.10.22.1판1쇄, 에이치비*프레스(도서출판 어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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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