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드 뫼르는 수많은 기자들의 취재원이 되는 독보적인 셀럽 기자다. 움직일 때마다 적잖은 카메라가 따라 붙고 그를 알아보는 시민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함께 사진 찍기를 요청한다. 일거수일투족에 늘 함께하는 매니저 루는 대스타를 보좌하듯 끊임없이 그를 북돋우며 미친 케미를 자랑한다. 엘리제궁에서 열린 대통령 기자 간담회에서도 프랑스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프랑스 사회의 '반란적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져 이목을 집중시킨 후, 기자석 앞줄 중앙에 앉은 그와 가장자리에 선 루가 한 건 했다는 듯 주고받는 경박하고 산만한 몸짓은 영화의 분위기를 대놓고 암시하는 도입부다. 계속 지켜보고 있자면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은 조증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디어의 주목과 스타성을 떠받쳐줄 이미지일 뿐이다.
프랑스는 자신의 사회적 위상 그리고 대중과 언론의 기대를 잘 알고 있다. 생방송 토크쇼에서는 지적이면서도 감수성 풍부한 진행자로, 현장 취재에서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기자 정신의 언론인으로, 일상에서는 값비싼 명품을 걸친 세련되고 화려한 엔터테이너로 기능한다. 관계의 밀도는 애매해 보이지만 어울리는 직업을 가진 작가 남편 프레드, 세상의 과한 환호로부터 균형감을 선사하는 시큰둥한 아들 조조와 함께 살아가는 그는 '안정적인 정상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랑스는 불안하고 위태해보인다. 그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과 사회 못지않게 스스로 내면화한 거품과 인기에 대한 강박과 갈망에 끊임없이 휘둘린다.
프랑스는 그림 만들기와 보여주기에 혈안이 된 언론에 딱 맞는 생산자이자 전달자다.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바로 그 순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재감에 도취된 그에게 현장의 실상과 사회의 진실을 전하는 것은 뒷전이다. 내전을 치르는 반군 지도부를 인터뷰하면서도, 총알이 날아드는 위험한 전장에서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카메라에 어떻게 비춰지는가다. 영화를 찍듯이 카메라의 구도와 연출을 지시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공감과 분노, 연민과 슬픔 따위의 감정을 연기하며 마이크를 잡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자신이 진행하는 생방송 뉴스쇼의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세계로 송출되며 다시 한 번 그의 인기와 위상을 높인다.
그를 최고의 위치에 올린 미디어의 속성은 예외없이 작동한다. 어느 날 아들을 내려주고 오토바이와 충돌한 교통사고가 대서특필되며 프랑스는 가십과 비난의 중심에 놓인다. 피해자 밥티스트는 늙은 부모와 살아가며 생계를 책임지는 청년, 이민자 가족인 그들에게 사고는 큰 곤경이다. 숭배하듯 자신을 소비하던 언론은 금세 공격적으로 변모하고, 부정적인 여론과 사고에 대한 가책으로 괴로운 프랑스는 생방송 진행을 중단한다. 밥티스트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고 퇴원한 그의 집에 방문해 거액의 보상금과 함께 위로를 전한다. 어쩌면 프랑스는 카메라를 통해서만 만나며 대상화했던 가난과 실업, 인종 차별의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을 처음으로 대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진심을 담은 행동으로도 보인다.
자연인으로서의 행보에서도 불특정다수의 접근과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알프스 산맥의 휴양지로 요양을 떠난다. 잠시도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던 도시와 달리, 대자연 속에서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탑클래스를 위한 피난처다. 이따금 알아보고 말을 건네는 이들은 번거로움보다 안도감을 선사하는 듯하고, 적당한 익명성 속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는 프랑스는 평화로워 보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라틴어 교수 샤를 카스트로와 가까워진 프랑스는 미디어와 sns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그에게서 신선한 해방감과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 들끓는 현실과 무관한 대화와 느릿한 산책을 함께하던 둘의 친밀함은 침대로까지 이어지지만, 샤를 카스트로가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기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프랑스는 분노와 절망의 현타를 맛본다.
해방은 잠시, 구원은 멀다는 것을 체감한 프랑스는 복귀를 택한다. 돌아온 그에게는 바닥을 경험하고 일어선 감동의 드라마가 추가되고 대중은 다시 환호한다. 무엇이든 소비하고 누구든 소비되는 미디어의 생리에서 자유로울 수도, 애초에 잃어버린 진정성을 끌어올릴 수도 없는 프랑스는 한층 더 강력해진 상태로 이전의 루틴을 반복한다. 화려한 파리와 위험천만한 현장을 오가는 뉴스의 중심에서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들을 취재하며 연출과 조작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심각하고 위태로운 쇼비즈니스를 부추기며 '위기를 기회로'라는 말의 섬뜩함을 새삼 일깨우던 소울 메이트 루에 의해 다시 비상한 프랑스는 추락한다.
중심없이 흔들리며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프랑스에게 가족의 자리가 커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편의 신간 홍보를 위해 내키지 않는 토크쇼에 출연하고 아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잊지 않는 모습에서, 그에게 가족은 계산없이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집밖에서 치르는 자신만의 전쟁은 돌아갈 수 있는 집, 제자리에 있는 가족 덕분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다. 둘만의 휴가를 떠나는 듯 드라이브하던 남편과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프랑스의 삶을 떠받치던 두 세계가 일거에 무너졌다.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집안에 홀로 있는 프랑스의 모습은 애처럽고 공허해보인다.
그러나 살아가야 한다. 깊은 상처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프랑스는 다시 취재에 나섰다. 취재원은 어느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성폭행살인범의 아내 다니엘, 프랑스가 아니었다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을 거라는 그의 말은 조금 힘이 될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도 성범죄 전과가 있었지만 한 번 나쁜 짓을 했다고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다니엘은 그와 긴 세월을 함께 살았다. 아내의 믿음을 배반한 남편은 동네의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인했고, 다니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동네 어귀에는 피해자를 애도하는 메모와 꽃다발 등이 놓여 있다. 발길을 멈추고 추모하던 여인이 프랑스를 알아보고 아이를 통해 사진 찍기를 청하지만 그는 조용히 거부한다.
거리의 벤치에 앉아 복귀 결심을 나누는 프랑스와 루 앞에 나타나 생뚱맞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날렸던 샤를 카스트로가 집으로 찾아온다. 현관 앞에 선 그와 대면한 프랑스의 반응은 생각보다 침착하다. 생을 떠받치던 가족과 일의 세계가 부서져버린 허무와 무의미함 때문일까, 거듭되는 샤를 카스트로의 마음이 조금은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일까. 알 수 없지만 둘은 함께 산책에 나선다. 대화도 표정도 없이 나란히 걷는 둘을 뒤에서부터 빠르게 지나쳐간 한 남자가 펜스 옆에 세워진 자전거를 거칠게 부수며 난동을 벌인다. 놀라서 그를 쳐다보는 둘을 향해 분노를 표하는 남자, 샤를과 함께인 프랑스의 얼굴은 눈물과 옅은 웃음으로 얼룩진다.
셀럽 기자 프랑스를 통해 미디어 세계의 이면을 주로 조망하지만, 관심과 명성에 목숨 거는 세태 속에 상시적 조울 상태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잘 담겨 있는 영화였다. 프랑스의 삶으로 집약된 알멩이 없는 질주와 극단화된 가식과 위선, 더 큰 화제성과 환호를 위해 선을 넘고 가짜 만들기에도 주저하지 않는 윤리적 빈사 상태, 그에 따라붙는 과열된 분노와 찬사, 금세 잊혀지고 다시 들끓는 반복의 끊임없는 악순환.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한국 사회의 어느 지점을 떠올려도 너무나 맞아떨어지는 현실이었고, 무한반복의 지옥도가 징그럽게 생생해서 때로 멀미와 현기증이 이는 느낌이었다.
많은 인터뷰 장면이 나오지만 남편의 신간 홍보를 조건으로 출연한 토크쇼 진행자가 던진, 뉴스에서 왜 항상 프랑스가 중심이냐는 질문만이 적절하게 느껴졌다. 영화 시작 부분 대통령 기자 간담회에 등장한 마크롱의 싱크로율에 깜짝 놀라서, 프랑스는 현직 대통령이 카메오도 하나 했는데 기존 영상을 활용한 이미지 합성(전문 용어로는 아카이브 푸티지라고 하는 듯)이었다고 한다. 그 기자 간담회에서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주고 받는 프랑스와 루의 끊임없는 오버 제스처들이 너무 거슬려서 영화의 온도가 예고된 느낌이었고, 그것이 인물의 캐릭터만이 아니라 영화가 조망하는 조증 걸린 현대 사회의 초상 같아서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너무 끔찍한 느낌이었다. 둘 다 연기를 어지간히들 잘해서, 진심 거슬렸다.
개인적으로 많이 기대한 작품이었고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느꼈지만, 웃어도 웃는 게 아니고 울어도 우는 게 아닌 듯한 프랑스와 영화를 보는 기분이 비슷했던 것 같다. 텔레비전이 없으니 일상적인 미디어 노이즈로부터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검색을 위해 다음 메인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괴리감과 이물감이 있는데 좀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한 인물에 응축해 집중시킨 느낌이었다. 프랑스만의 고유한 상징도 있었을 테고 내전과 난민 이슈나 휴양지에서 언급되고 멀리 비추는 메르켈 총리를 생각하면 유럽의 오늘에 대한 총체적 조망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온라인을 통해 이미 포화상태로 연결된 세계 어디에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지 싶다. 마지막 자전거를 부수는 남자를 보며 영화 [노트르담]에서 횡행하던 거리의 따귀가 떠올랐고, 프랑스의 얼굴에 어린 눈물과 미소가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거울처럼 어지럽게 느껴졌다.
멀리 드문한 사람들의 실루엣과 해 질 녘 해변의 풍경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DJ의 멘트, 3년만에 귀향한 피아니스트 탄웨이칭의 연주회 소식을 듣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린자리가 보인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지만 탄웨이칭은 연주회를 마친 후 바로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피아노 조율 상태 체크와 기자간담회 등으로 빠듯한 일정, 생각에 잠긴 듯한 탄웨이칭의 표정은 밝지 않다. 호텔로 전달된 메모에 잠시 갈등하던 탄웨이칭은 기자간담회를 취소하고 린자리를 만나러 간다.
린자리는 탄웨이칭의 연인이었던 자썬의 동생, 둘은 친밀하게 우정을 나눴던 사이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나 시간을 보냈고 함께 방문한 고향집에서 더욱 가까워졌다. 고향집은 정갈하고 흐트러짐 없는 공간, 처마에 매달린 새장 속 새들도 소리없이 고요하다. 시골 마을 의사인 아버지는 엄격하게 자식을 통제하는 보수적인 가부장이고 어머니의 존재감은 깔끔하게 정돈된 살림에서만 드러나는 것 같다. 도시에서 럭비를 즐기는 활기찬 청년이었던 자썬은 엄한 아버지 앞에서는 경직된 의대생이 된다. 거스를 수 없는 권위로 압도하는 아버지는 정략 결혼을 밀어붙이고, 자썬은 이를 받아들인다.
린자리는 자썬과 헤어진 탄웨이칭의 집을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한 채 편지만을 전하고 돌아온다. 아무 연락 없이 유학을 떠났던 탄웨이칭은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왔고 둘은 13년만에 마주앉았다.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환하게 웃던 탄웨이칭도, 조금 숙맥 같지만 귀엽고 해사하던 린자리도 세련된 삼십 대 여성이 되었다. 영화는 마주앉은 두 사람의 대화와 과거를 오가며, "이렇게 말할게"라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린자리의 지난날을 상세히 전한다.
대학생이 된 린자리는 활달하고 이성 교제에 적극적인 절친 신신을 통해 더웨이를 만났다. 더웨이는 신신의 남자친구 아차이와 오랜 친구로, 반듯하지만 소심하고 얌전해보인다. 호감을 나누던 더웨이와 교제하며 졸업이 다가오고 아버지는 다시 정략 결혼을 준비한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린자리는 고향집에서 야반도주해 더웨이에게 간다. 가진 것 없이 결혼한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아차이의 사업에 함께하며 생활은 윤택해졌지만 밀려드는 일과 접대에 치이면서 더웨이는 변해간다. 더웨이만 바라보는 린자리에게 다정한 대화가 사라지고 결혼기념일 식사 약속이 어긋나는 일상은 외롭고 서럽다. 나름 노력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불신과 오해는 커져가고, 가정도 일도 버겁게 느껴지는 더웨이의 권태와 불만도 쌓여간다.
어느 날 장을 보던 중 린자리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신신과 우연히 마주친다. 아차이와는 일찌감치 헤어지고 함께 수업을 들었던 강사와도 잠시 사겼던 신신은 이후 만난 사업가와 낳은 아이를 키우며 어머니와 살고 있다. 화려한 연애를 즐기던 시절은 가고 생계와 양육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고 있는 신신, 하지만 어느새 한참 연하의 사진가와 교제하며 린자리에게도 의도치 않게 새로운 만남을 선사한다. 신신이 일하는 스튜디오의 휴게실에서 잠시 마주하게 된 청년은 세계를 여행하며 책을 내는 낭만적인 방랑자, 여전히 외롭고 바쁜 더웨이 덕에 자유로운 린자리는 잠시 그에게 흔들리지만 마음의 선 앞에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외박한다는 더웨이의 현장에 린자리가 찾아간 일로 두 사람은 더욱 멀어졌다. 즈음 사업을 돕겠다며 사무실을 드나들던 류샤오후이가 던지는 추파를 무시하던 더웨이의 마음도 달라진다. 공허하고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견디기 위해 린자리는 꽃꽂이며 쇼핑이며 전에 없던 화려한 헤어스타일까지 시도하며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꽃꽂이 클래스에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만큼 스트레스와 신경 쇠약이 극도로 달한 린자리는, 그래도 병실에 찾아온 더웨이를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둘 사이에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신신과의 수다로 밤을 새운 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3년 전 어느 아침, 린자리는 더웨이의 실종 소식을 접한다. 실종 장소로 찾아간 린자리는 멍하고 아연하다.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한참 앉아 있던 낯선 도시 남자를 목격했고, 파도에 휩쓸려온 약병에는 더웨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시신을 수색하며 조사를 진행하는 경찰은, 남편을 본 지 며칠이 지났고 그가 병원에 다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린자리를 의아해한다. 린자리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아차이는 샤오후이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더웨이의 횡령 의혹과 잠적 가능성을 거론한다. 아차이가 떠난 후 멀리 시신을 수색하던 배가 해변으로 다가온다. 린자리는 시신을 확인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
주체적인 삶을 위한 선택이 언제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온 린자리는 홀로 남겨졌다. 언제나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던 어머니는 야반도주하는 린자리의 기척을 알아챘지만 모른 체했고, 혼란한 심정의 린자리에게 조용히 미소를 보낼 뿐이다. 린자리의 기억 속 아버지는 근엄하게 모두에게 군림하면서 간호사를 성추행했고, 아마도 임신한 간호사를 단속하며 떠나보내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새장의 지배자처럼 가족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가족들의 삶은 각자의 몫이다. 어느 날 류샤오후이가 찾아와 더웨이가 보낸 수신자가 바뀐 편지를 내민다. 린자리와도 샤오후이와도 행복할 수 없었던 더웨이가 선택한 진실은 짐작할 수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나눈 린자리와 탄웨이칭이 호텔 커피숍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것은 자썬의 안부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했고 병원을 이어받아 의사로 일했다.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 무색하게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지만, 가지 않은 길에 덤덤해보였고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던 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운명이듯 살아가던 자썬은 암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탄웨이칭이 린자리를 만나기로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었을 자썬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것이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으므로 그저 사실이 된다. 13년간의 길고 긴 이야기를 유장하게 풀어헤치고 뒤돌아가는 린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탄웨이칭의 시선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는 [타이페이 스토리]를 보았을 뿐인데, 과문한 탓이겠지만 소개에 따라붙는 찬사와 호평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었다. 1983년 개봉한 데뷔작이라는 이 영화에서도 기대만큼의 큰 울림을 느끼지는 못했다. 남매와 그의 연인들을 축으로 십여 년의 세월을 따라가는 영화에는 40년 전 대만 사회의 풍경이 잘 반영되어 있고, 그 모습은 급속한 경제 발전과 도시화를 경험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공유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가부장적 전통과 현대적 변화가 혼재하는 가운데 시골과 도시의 문화적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세대가 겪는 갈등과 모순은 증폭된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향한 욕망은 강렬하지만 그를 이루기 위한 물리적 심리적 기반은 허약하고, 그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청춘은 기성 세대가 된다.
영화 속 누구도 행복해보이지 않고 꿈을 위한 용기의 결과는 공허하지만, 어쩌면 누구의 인생이나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언제나 행복한 인간이 존재할 리 없고 꿈은 꿈일 때만 완전할 수 있으니까. 적지 않은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결과로서의 현재가 아니라 그렇게 흘러온 과정과 의미라고 느꼈다. 더웨이의 증발 이후 린자리의 삶은 생략되었지만 오빠와는 다른 선택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보다 그로 인한 성장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과거보다는 단단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어떤 믿음을 실어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40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의 입장에서 인물과 사건의 전형성이나 너무 설명적인 전개에 지루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3년만에 귀향해 연주회를 앞둔 피아니스트에게 이렇게 폭격하듯 지난날을 다 전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 탄웨이칭이 마음의 동요 없이 연주회를 잘할 수 있을까 오지랖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더웨이도 나쁜 놈이지만 린자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아 말리고 싶기도 했고, 린자리의 말과 함께 과거 장면이 오버랩되는 경우가 많아서 후반부에는 나도 모르게 대사로만 끝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놀랍게도 양조위와 나훈아를 상하로 반반 섞은 얼굴인 아차이가 등장할 때는 그나마 기계적 활기가 느껴졌지만, 마지막 류사오후이와의 사무실 장면까지 굳이 재현되어야 했을까 싶기는 했다.
어쩌면 전날 세 편의 영화를 본 후여서 긴 러닝타임을 견디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지만, 흐른 세월을 감안해도 나에게 매력적인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감독과 작품에 따라붙는 찬사에 공감할 수 없는 마음이 아쉽기는 한데, 후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하나 그리고 둘]을 극장에서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할 것 같다. 관객은 가장 뒷줄에 앉은 나 포함 네 명이었고, 몇 줄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 무릎담요를 단정히 접어 챙기는 아저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계단을 내려갈 때 여성분이 뒤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며 말을 건넸다. "네" 하며 웃고 말았는데, '우리가 이 영화를 함께 보았군요' 라는 흐릿한 연대감이 발화된 순간인 것 같아서 약간 다정한 마음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궁정에 들이닥친 녹색 기사는 용기 있는 자 자신의 목을 베고 1년 후 녹색 예배당에 찾아와 되갚음을 받으라며 '크리스마스 게임'을 제안한다. 갑작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가웨인이 응한다. 아서왕의 외조카인 그는 왕의 혈족이지만 엄마는 마녀, 평민인 에셀과 사랑을 나누는 자유분방한 청년이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녹색 기사의 목을 벤 가웨인, 목이 떨어져나간 녹색 기사는 자신의 할 말을 다하고 목을 챙겨 사라진다. 가웨인의 도전과 용기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고 거리의 인형극으로 공연되는 등 큰 화제가 된다.
1년은 금방이다. 녹색 기사의 목을 벰으로써 핵인싸가 된 가웨인의 결정을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믿음직하고 용맹스러운 기사보다는 빈틈 많고 허술한 청년에 가까운 가웨인이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엄마가 준 허리띠와 에셀의 징표, 자신의 애마와 함께 가웨인은 미지의 길을 떠난다. 성밖은 낯설고 위험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는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즐비하고, 친절을 베푸는 척 길을 알려주던 청년은 삼인조 강도가 되어 가웨인을 습격한다. 천신만고 끝에 몸을 추스렸지만 뚜벅이 신세가 된 가웨인은 녹색 예배당을 향해 하염없이 걷는다.
빈집을 발견하고 녹초가 되어 침대에 뻗은 가웨인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침대의 주인인 그는 집 앞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고 청한다. 머리도 얼굴도 붙어 있지만 간곡하게 계속되는 요구에 물에 뛰어든 가웨인이 잘린 머리를 찾아 건네주자 정령으로 변신한다. 다시 길을 나서 불 켜진 성에 당도한 가웨인은 큰 환대를 받는다. 성주는 녹색 기사를 찾아가는 가웨인의 사정을 이미 알고 융숭히 대접한 뒤 사냥을 떠나고, 성주의 아내는 야릇한 언행으로 그를 유혹하며 허리띠를 선물한다. 그들과 함께인 백발의 눈 가린 여인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듯 유령처럼 존재한다.
가웨인의 여정에는 인간이나 정령만이 아니라 여러 동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등장한다. 산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동물이 길을 안내하듯 신호를 보내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 반투명한 실루엣의 거대한 군상들이 능선을 오른다. 환영과 현실이 뒤섞인 신비 체험을 거듭하며 녹색 예배당을 향하는 그의 앞에 삼인조 도적이 훔쳐갔던 애마가 나타난다. 난관과 위험을 헤치고 유혹과 환상을 경험하며 가웨인은 목적지에 닿는다. 그를 기다리던 녹색 기사와 다시 만났지만 아직 목을 내어줄 준비는 되지 않았다. “용기를 기를 시간은 1년이나 있었다”며 목을 치려는 녹색 기사 앞에서 가웨인은 몇 번이고 몸을 빼며 극적인 순간을 지연시킨다.
미션을 완수하고 돌아온 가웨인은 어엿한 기사가 되었다. 지위에 걸맞는 권위와 무게감을 갖추게 된 그는 정략 결혼을 하고 왕위에 오른다. 목숨을 건 모험에 사랑과 행운의 징표를 건넸던 에셀은,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빼앗기고 배신당했다. 빛처럼 흐르는 시간 속 가웨인의 모습은 늠름하고 확신에 찬듯 보이지만, 이전의 인간미와 활기는 찾아볼 수 없다. 녹색 기사 앞에 목을 뺀 그의 머릿속에 흐른 미래의 주마등이다. 자신을 기사라 칭하는 이들에게 아직은 아니라고 부정하던 가웨인은 미숙하지만 제 속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약속한 길의 끝에 선 청년이었다. 뇌리를 스쳐간 파노라마 속 훗날의 모습은 바라던 바가 아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가웨인은 목을 내민다.
난해하다는 후기가 많아 건너뛰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특별 장기상영 중이다. 원탁의 기사도, 중세의 사회상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어 망설였는데, 옛 전설이 담긴 책을 펼치듯 챕터마다 붙은 제목과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몰입이 됐고 재미있었다. 시대상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없기도 하지만, 중세를 비롯해 전기가 보편화되기 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어둠을 많이 답답하게 느끼는 편인데 이 작품은 좀 덜했던 것 같다. 무겁겠지 마음의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부담없는 주연 캐릭터 덕도 있는 것 같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갖은 상징을 편하게 스킵하며 봤기 때문인 것도 같다.
작자 미상의 서사시를 재해석한 톨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데, 아무튼 내용도 흥미롭게 느껴져서 책도 조금 궁금해졌다. 영화적 각색과 현대적 해석이 당연히 더해졌겠지만, 신화와 전설 같은 옛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이 무색하게 재미있게 봤다. 개인적으로 그냥 흙괴물처럼 보였던 녹색 기사 같은 비주얼 안 좋아하고 비과학적이거나 초현실적인 현상에도 흥미가 없는 편인데, 수백 년 전 사람들의 세계를 구성했던 감각과 믿음과 인식이 반영되고 구체화되어 전승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기는 하다. 가웨인의 도전에 댈 바 아니지만 내게도 나름 도전이었는데, 보이는 것만 보고 느끼기로 한 결과 매우 성공적이었다.
네 살 아들 마이클을 홀로 키우는 존은 창문 청소부다. 세제를 뿌리고 깨끗이 닦아낸 창문 안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유복한 부모와 행복한 아이의 모습이 보일 때면 잠시 눈길이 머물기도 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존은 베이비시터와 시간을 보내던 마이클을 다정히 돌본다. 깨끗이 씻겨 머리의 이를 잡아내는 것도 일과다.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아침, 엄마의 손을 잡고 등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마이클은 칭얼대지 않는다. 음식을 앞에 둔 식탁에서 곧잘 딴짓을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얌전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다. 둘 다 별로 말이 없지만 조용히 주고받는 눈빛은 따뜻하다.
존은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마이클과 놀아주는 일도 창문 닦는 일도 힘에 부친다. 잠들기 전 원하는 책을 읽어주고 쉬는 날이면 공원이나 거리를 산책하며 마이클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는 일상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일 역시 마찬가지, 존을 믿고 창문 청소를 맡기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는 단골 손님도 있지만 쓸데없이 까다롭게 굴면서 대놓고 무시하는 진상도 있다. 몰래 창문에 계란을 던지며 분한 마음을 달래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언젠가부터 높이 달린 창문을 닦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일도 버거워지고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떠난 후 마이클을 키워줄 위탁가정을 찾는 것이다. 존과 마이클은 사회복지사와 함께 입양을 원하는 여러 가정을 방문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넓은 정원이 딸린 교외에서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아이를 키우고 싶은 부부, 불임으로 이미 한 아이를 입양한 과하게 사이가 좋은 부부, 어릴 적 원치 않았던 낙태수술의 상처가 깊지만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는 싱글 여성, 완벽한 준비를 갖췄다고 확신하지만 아이를 위한 품은 인색해보이는 부부 등이다. 관객이 보기에도 미덥지 않지만, 제도는 마이클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픈 존의 마음과 사정을 세심히 헤아려줄 수 없다.
마이클은 죽음의 의미도 아빠가 머지 않아 죽게 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산책길에 마주친 죽은 딱정벌레에 집중하는 마이클에게 존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먹지도 놀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몸만 남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슬픈 것이냐는 반문에 그냥 없는 것이라고 답하지만, 아이스크림 트럭 소리에 반색하는 마이클은 천진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느 날 샤워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머리를 살피던 존이 이제 이가 없다고 말하자 마이클은 죽었다고 답한다. 단골 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망자가 공기 속에 존재한다는 감각에 대해 생각하게 된 존은, 마이클에게 죽음 이후를 다시 설명한다. 하지만 고작 네 살인 마이클에게 아빠의 부재가, 죽음의 의미가 어떻게 각인되고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영문을 모른 채 여러 집을 전전하며 낯선 어른들을 만나던 마이클도 반복되는 긴장감과 어색한 공기를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어른들의 대화를 기억하고 입양이 무슨 뜻인지 묻는 마이클에게 존은,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식으로 답한다. 위탁가정에서 성장한 존에게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남다른 로망이 있었을지 모른다. 고향인 러시아로 떠나버린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며 아이에게 결핍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존은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결심과 노력을 환기하듯 존이 사용하는 컵에는 'NO.1 Daddy'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자신의 팔에 존의 문신을 따라 그리고 세차하는 곁에서 장난감 트럭을 씻으며 노는, 소파에서 엎드려 잠든 존의 등을 살포시 안으며 함께 눕는 마이클의 모습은 애잔하다. 하지만 둘에게 닥친 미래는 불가항력이다.
존의 병세는 점차 깊어지고 더는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한 존은 사다리와 청소 도구들을 실은 차를 양도하고, 애초 거부했던 사회복지사의 조언대로 마이클이 성인이 되었을 때 열어볼 수 있도록 기억 상자를 채운다. 여느 때와 달리 말 안 듣고 심술을 부리는 마이클의 모습에 조용히 웃음 짓는 얼굴이 수척하고 슬퍼 보인다. 존과 마이클의 마지막 동행은 그들이 선택한 위탁가정을 찾아가는 길이다. 존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않는 마이클, 크고 작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걷거나 횡단보도 앞에 서거나 육교에서 거리를 바라보는 장면이 영화에는 많았다. 보통의 외출처럼 함께 나선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마주한 현관, 문을 열고 나오는 여성의 얼굴에 환대의 빛이 가득하다.
다행이다. 간절히 아이를 원했지만 불가능했던 여성은 어렵게 입양 자격을 갖추고 마이클과 존을 맞았었다. 집은 어지러져 있고 대화는 조금 산만했지만 그는 위탁가정 후보들 중 유일하게 마이클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질문하던 사람이다. 마이클이 행복하게 성장하기 위한 조건을 고심했을 존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조건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다. 사랑과 관심으로 아이와 함께할 것이라 믿으며 선택했겠지만, 아빠를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창문 청소부라고 덤덤하게 답했던 게 떠올라 잠시 안도의 마음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떠난 후 마이클이 바라보는 창밖에 공기처럼 존재하고 싶은 바람일까 싶다가도 마이클이 자신마저 잊고 '행복한 가정'에서 새출발하기를 바라는 거라면 너무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존의 자리가 조금은 남겨지는 기분이었다.
다가오는 죽음만도 두렵고 힘겨울 텐데, 어린 마이클의 미래를 위해 위탁가정을 찾고 죽음에 대해 설명하며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존의 상황과 심정이 상상도 안 됐다. 그가 자란 위탁가정이 어떤 환경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 속에서 존은 오롯이 혼자다. 어쩌면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누른 채 살아가는 데에 익숙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운명처럼 닥쳐온 불운과 불행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거나 폭발하는 일 한 번 없이 묵묵한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럽다. 속내를 나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죽어가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마이클을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며 애써 웃음 짓는 모습은 참 아프다.
영화도 인물도 시종일관 담담하다. 감정의 극대화나 극적인 효과 대신 감독은 조용한 관조와 공감의 여백을 선택한 것 같았다.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예의인 것 같기도 했고, 지금쯤 아빠는 하늘나라에 아이는 위탁가정에서 살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하기도 했다. 점점 쇠잔해지면서도 깊은 눈빛과 엷은 웃음으로 마이클을 바라보고 마주하던 존의 모습, 제임스 노튼의 가만한 연기가 좋았다. 이미 병을 앓고 있지만 그가 건장하고 젊은 블루 컬러 노동자였다는 사실이 어딘가에서는 느껴졌던 것 같고, 그건 연기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어떤 구도와 표정에서는 제임스 딘이 떠오르기도 했고 알고 보니 인상 깊었던 [미스터 존스]의 주인공이기도 했는데, 이건 그냥 내가 늙었기 때문이다. 과잉 없이 정제된 영화가 고맙고, 우베르토 파졸리니라는 감독의 성과 나이에도 놀랐다. 미덕이 많은 영화다.
2014년 시리아의 도시 세카, 폐허가 된 땅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숨죽인 채 살아간다. 공개처형과 포화가 일상이 된 삶, 허물어진 건물 지하에 둥지를 튼 이들은 암담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전쟁 전의 일과와 꿈과 인내를 붙들고 산다. 그중 피아니스트 카림이 있다. 음악을 금지한 이슬람 극단주의 과격파의 눈과 귀를 피해, 카림은 비밀스레 피아노를 연주하곤 한다. 연주는 위험한 일이지만, 가족과 터전을 잃은 채 아지트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유산인 피아노는 카림의 꿈을 지탱하는 희망이다. 빈으로 건너갈 결심을 굳힌 카림은 13일 뒤에 떠나는 배에 오르기 위해 피아노를 팔아야 한다.
어느 날 반군의 행적을 좇던 과격파 무장단체가 아지트를 습격한다. 노인과 어린 아이를 비롯해 무고한 주민들의 삶터를 헤집으며 위협을 가하던 이들은 카림의 피아노를 발견하고 총을 쏴 망가뜨린다. 과격파 무장단체의 우두머리는 카림의 친구였던 압둘라,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고 죽은 카림의 엄마와도 잘 아는 사이다. 반군에 가담해 싸웠지만 부모를 잃은 뒤 '무의미한' 전선에서 물러난 카림을, 압둘라는 눈엣가시로 여기며 괴롭힌다. 아지트에서 조마조마하게 살아가는 주민들처럼,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과격파 그리고 반군들 역시 전쟁 전에는 친구이거나 이웃이었던 이들이다.
카림이 일하는 아부 무사의 가게는 무너진 건물 잔해가 즐비한 도시에서도 아직 무사하다. 아부 무사는 전쟁 전과 다름없이 매일 가게를 지키고 손보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들은 위험한 도시의 곳곳을 쏘다니며 무너지거나 버려진 집에서 쓸만한 물건 찾기에 열심이다. 무참한 시간들이 흐르는 중에도 누군가는 큰 이문을 남기며 물건을 사들이고, 간절하게 떠나고자 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브로커는 단호하게 밀항 비용을 높여 부른다. 카림은 압둘라의 총질로 망가진 피아노를 고치기 위해 애쓰지만 훼손된 부품을 구할 수 없다. 잔심부름으로 부품 조달을 돕던, 아버지를 잃은 아지트의 소년 지아드가 내민 사진 한 장이 구원의 빛을 선사한다. 사진 속에는 카림의 것과 같은 브랜드의 피아노가 있다.
카림은 사진과 주소만을 단서 삼아, 피아노 부품을 구하기 위해 격전지인 람사로 떠난다. 버스 이동은 잠시, 인적도 차량도 드문 길을 하염없이 걷고 노숙하며 어렵사리 성공한 히치하이킹으로 검문을 통과해 낯선 도시에 닿는다. 세카보다 더 황폐하고 텅빈 것처럼 느껴지는 람사,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피아노 부품을 찾아야 하는 카림의 일거수일투족에 극도의 긴장이 인다. 우연히 조우한 여성과격파 멤버는 매일 지도가 바뀌는 도시의 길잡이 역할로 도움을 주고 절체절명의 순간 카림의 목숨을 구해준다.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는 남자는 아이들에게 친절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들을 재워준 뒤 목숨을 잃는다. 삶과 죽음이 맞닿은 현장에서 원하던 부품을 찾아 여성과격파 멤버와 함께 람사를 빠져나온 카림은 기적처럼 세카로 돌아와 피아노를 고친다.
그사이 지아드는 과격파 무장단체원의 눈에 띄어 학교에 입학했다. 맹목적인 전사 양성을 위한 학교, 교실에서는 책이 불태워지고 학생들에게는 왜곡된 극단주의와 적개심이 주입된다.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혹은 아버지를 데려간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작은 몸에 복수심을 가득 담고 있던 지아드는 그곳에서 폭탄을 훔쳐나온다. 곧잘 어울리던 카림과 지아드는 과격파 무장단체의 표적이 되고, 만물상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아부 무사 덕에 위기를 면한다. 하지만 아지트를 급습한 압둘라는 본보기를 보이듯 아부 무사를 총으로 쏘고 만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낙관과 희망을 체현하던 아부 무사의 죽음 역시 한순간이다. 조직으로 돌아오라는 반군 동지들의 설득에도 어머니의 유산을 팔아 홀로 떠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카림에게, 아부 무사의 죽음은 충격과 회심을 안긴다.
지아드의 폭탄과 카림의 피아노는 과격파 무장단체가 다시 한 번 도시를 지옥으로 몰고갈 명분이 된다. 밀항 날짜가 정해진 후 13일 동안 카림은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이는 고향을 떠나지 못한 모든 이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잃고 형처럼 따르던 카림에게도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지아드 역시 마찬가지다. 카림은 밀항자들을 태운 트럭에 올라타는 대신 지아드를 태워보내며 훗날을 약속한다. 반군 동지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리고 거리 한복판에 피아노를 내린다. 도발하는 음악 소리에 출동한 과격파 무장단체원들은 주변 건물 곳곳에 잠복한 반군들의 사격에 하나둘 쓰러진다. 지하의 아지트에서 가녀린 빛에 의지해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며 탈출을 꿈꾸던 카림은, 사방의 총성을 맨몸으로 견디며 격렬하게 "발트슈타인"을 연주한다.
격전의 현장이 카림의 마지막 무대가 아니었으면 싶어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들었는데,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궁금하다. IS 발흥 이후의 아랍 국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몇 편은 봤지만, 제대로 아는 게 없는 탓에 늘 막막하고 먹먹한 마음이 된다. 카림의 선택과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라기보다 너무 무겁고 양가감정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결정일지 모르지만, 목숨을 건 그의 연주가 반군이든 적군이든 서로 죽이고 죽는 현장의 유인책이자 배경음악이라는 게 무척이나 착잡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선택을 양비론적으로 느끼는 것 자체가 멀고도 안전한 곳에 살고 있는 관객의 안이한 감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카림의 연주와 함께 펼쳐지는 복수전과 쓰러지는 이들을 보는 것이 괴로운 일이기는 했다.
영화에서는 카림과 지아드만이 아니라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존재감이 고루 부각된다. 손에 잡히지 않는 토익 공부로 미국 유학을 꿈꾸는 카림의 사촌 누나,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대신 매일에 충실하며 주변 사람들을 감싸는 어른 아부 무사, 여전히 피아노를 집안 깊숙이 숨긴 채 카림을 환대하던 압둘라의 엄마, 인색한 흥정으로 절박한 이들의 돈을 끌어모으지만 카림과 지아드에게 닥친 위기를 귀띔해주는 만물상, 밀항 비용을 높이며 목숨을 거래하지만 자기 대신 지아드를 보내는 카림 앞에 멈칫하던 브로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애쓰던 남자,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맞서 총을 든 여자, 그리고 너무 멀리 가버렸지만 괴물이 된 스스로에 대한 내적 갈등과 자괴감을 잔혹함으로 무마하는 압둘라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IS와 이슬람 극단주의, 난민과 죽음, 전쟁과 폭력 같은 커다란 단어들로 얼룩지고 가려졌던 한 세계를,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복원해낸 것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느꼈다. 고통과 비극이 오래 이어지고 있지만, 그속에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선의와 연대와 희생이 존재하고 그를 통해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아지트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촌 누나와 서로 의지하면서도 홀홀단신으로 떠날 계획을 주저하지 않던 카림이 마지막에 보여주는 극적인 변화 역시 아부 무사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모든 이들의 관계와 영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졌다. 모르는 세계를 함부로 낭만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주 큰 악과 크고 작은 선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죽이고 죽지 않으면, 죽이고 죽여도 얻을 수 없는 평화가 현실이라면, 그 참담한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야하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걸까. 그러한 삶에 붙박혀 살아가던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다른 땅에 닿으면 난민으로 백안시되는 현실이 새삼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상상할 수 없는 불안과 혼돈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시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불의의 죽음이 도사리는 공간, 나고 자란 곳의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속에서 기적을 믿고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남용되는 희망이란 단어가 빛을 발하는 슬픈 땅,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진행형일 누군가들의 현실이려니 생각하면 좋은 영화를 본 것과 별개로 마음이 편치 않다.
* 크레딧에 등장하는 무수한 이름 중 유일하게 구면은 음악을 맡은 Gabriel Yared 가브리엘 야레였다. 카림의 인상적인 클래식 연주에 가려 어떤 음악이 나왔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ost cd도 가지고 있는 [베티 블루]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음악을 작업한 거장의 이름을 예상치 못한 데서 마주쳐 반가웠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는 1949년 레바논 베이루트 출생이라고 프로필에 나온다, 그렇구나.
한 여고생이 자신이 좋아하는 소년의 집에 몰래 들어간다. 학교가 끝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모범생인 소녀는 별 의심을 받지 않고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유니폼이 걸려 있는 소년의 방을 살펴보곤 하던 소녀는 갈수록 대담해져 탐폰을 책상 서랍에 넣어두기도 한다. 딱히 소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소년의 일상에 자신의 징표를 남기고 싶은 것이다.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가후쿠와 오토가 섹스를 나눌 때도, 함께한 차 안에서도 이어진다. 드라마 작가인 오토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에,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가 생각을 보태는 것이다.
가후쿠와 오토는 다정하고 조용한 부부다.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게 꾸며진 집의 인테리어처럼, 그들의 일상도 단정하고 우아해보인다. 그들이 긴 대화를 나누는 건 주로 섹스를 할 때이거나 차 안인 것 같고,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각자 소파나 책상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부부는 같은 계통에서 일하는 서로에 대한 응원을 잊지 않는다. 오토는 무리하지 말라는 가후쿠의 말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그가 출연한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보러간다. 두 사람을 흠모하는 신인배우 다카츠키가 동행했고, 굳이 분장을 지우는 대기실에 방문해 가후쿠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후쿠는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어 블라디보스톡 출장을 떠난다. 공항에 닿자마자 현지 기상 악화로 인한 비행기 결항 메시지가 도착하고 그 길로 차를 돌려 집으로 간 가후쿠는, 낯선 남자와 섹스하고 있는 오토를 목격한다. 자신의 기척을 듣지 못한 채 열중하는 두 사람, 가후쿠는 조용히 집을 나온다. 주최 측의 안내대로 공항 호텔에 투숙한 그에게 오토의 전화가 걸려오고, 가후쿠는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척 영상 통화에 응한다. 출장에서 돌아온 가후쿠도 오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가후쿠의 마음에는 거센 폭풍이 일고 있고, 저녁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 바로 그날 돌아온 집에는 오토가 쓰러져 있다. 오토가 죽었다, 사인은 지주막하출혈.
2년이 흘렀다. 한참 진행된 영화 화면에 이제 시작인 듯 주연 배우들과 주요 스태프들의 타이틀롤 자막이 떠오른다. 가후쿠는 두 달 간의 연극 워크숍 연출가로 초청되어 히로시마에 가는 중이다. 오토가 떠난 후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가후쿠는 여전히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희곡 테이프를 틀어놓고 운전을 한다. 자신의 부분만을 비워둔 오토의 녹음에 맞춰 대사 연습을 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다. 녹음된 작품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오토가 떠난 후 공연하던 중 밀려드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트라우마를 겪었던 작품이며 히로시마에서 그가 연출할 작품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의 담당자들은 친절히 환대하지만, 미처 알리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가후쿠는 운전하며 녹음 테이프를 듣는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 숙소를 워크숍 장소와 떨어진 곳으로 당부했는데, 과거의 사고 이후 초청 게스트의 차는 반드시 주최측이 채용한 기사가 운전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긴 것이다. 가후쿠는 난색을 표하지만 일단 숙소까지 시험 운전을 해보자는 말까지 거부할 수는 없다. 주차장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무심한 표정을 한 미사키가 대기하고 있다. 별 수 없이 운전대를 맡기고 숙소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고, 미사키는 운전 이외의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바냐 아저씨] 워크숍은 배우들의 다양한 모국어를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실험적인 방식, 오디션과 캐스팅 및 연습과 공연까지 두 달 동안 마쳐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한국 수어를 구사하는 배우들이 캐스팅되고, 그중에는 과거 가후쿠의 공연을 보러왔고 오토의 장례식에도 다녀갔던 다카츠키가 있다. 잘생긴 외모로 인기를 얻던 그는 얼마 전 미성년자와의 섹스로 물의를 빚었고,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워크숍에 도전했다. 가후쿠는 대본 읽기 훈련에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 자신의 대사를 마친 배우가 책상을 한 번 치면 다음 배우가 대사를 이어받아 진행되는 연습에서는 수어를 포함한 다국어가 나란히 발화된다. 매 시간 함께하는 담당자 공윤수는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워크숍을 돕는다.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 안에는 언제나 오토의 녹음 테이프가 플레이되고 가후쿠는 자동반응처럼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받아친다. 표정없이 최소한의 기능적인 대화만으로 소통하는 미사키는, 오토의 목소리와 추억이 담긴 가후쿠의 개인적인 공간에 부재하듯 존재한다. 워크숍은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어느 날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술 한 잔을 제안한다. 가후쿠는 자신이 목격한 섹스 상대가 그였다는 것을 알지만 티내지 않는다. 오토를 마음에 담고 가후쿠에게 질투를 느꼈던 다카츠키에게 그는 여전히 넘어서거나 흔들 수 없는 상대다. 다카츠키에게 [바냐 아저씨] 워크숍은 바닥을 친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기와 스캔들의 중심에 섰던 그는 여전히 대중의 관심 속에 있고, 젊고 혈기 넘치는 그는 동의 없이 자신을 촬영하는 누군가를 참지 못한다.
워크숍의 배우 중에는 들을 수 있지만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이유나가 있다. 그의 대사는 한국 수어로 표현되고, 배역의 비중은 크지 않지만 카메라가 그를 비출 때의 고요한 흡인력은 주변 공기를 바꾸는 것처럼 강렬하다. 어느 날 공윤수가 사과할 일이 있다며 가후쿠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의 집에는 이유나가 기다리고 있고, 공윤수와 부부라는 것을 가후쿠가 알게 되면 캐스팅에 부담을 느낄 것 같아 알리지 않은 사정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차에서 대기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미사키도, 부부가 느낄 불편함을 앞세운 가후쿠의 강권을 물리치지 못하고 식탁에 함께 앉았다. 공윤수와 이유나의 집은 소박하지만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따뜻한 분위기다.
일본어와 한국 수어와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뒤섞인 테이블의 대화로 부부의 사연과 워크숍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힘든 점은 없냐는 가후쿠의 질문에 이유나는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는 걸 왜 자기에게는 묻느냐고 답한다. 가후쿠의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히 혹은 배려라고 생각해 내뱉는, 차별의 말이다. 자신의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일상적인 경험이라고 답하는 이유나는 담담하다. 식탁을 둘러싼 부드러운 공기는 변함없고 대화를 이어가던 가후쿠는 미사키의 운전에 대해 그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찬사를 전한다. 여전히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권하는 음식들을 먹던 미사키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잠시 비치고, 쑥스러웠는지 의자에서 내려가 식탁 아래의 반려견을 쓰다듬는다.
돌아오는 길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고맙다고 먼저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워크숍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가 곧 아니라며 주워담는다. 일정하지 않은 일과 종료까지 추운 야외에서 대기하는 미사키에게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가후쿠가 말했을 때도, 미사키의 대답은 괜찮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불편함을 강조하며 담배만 밖에서 피워달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주 추울 때만 그렇게 하겠다고 기계적으로 답하던 미사키에게 찾아온 큰 변화다. 미사키가 운전대를 잡은 후 당연한 듯 고수되던 가후쿠의 고정석도 조금씩 달라져간다.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테이프 속 대사에만 반응하던 가후쿠는,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대각선 자리를 거쳐 조수석에도 앉기 시작한다.
숙소와 워크숍 장소만을 오가던 둘은 처음으로 다른 곳을 향한다.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곳이나 좋아하는 곳에 데려다달라는 가후쿠의 부탁에 미사키는 폐기물 처리장으로 차를 몰았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히로시마의 역사와 아픔을 기억하는 열린 구조의 건축물이자 폐기물의 처리 과정을 거대한 설치미술처럼 볼 수 있는, 해변에 면한 장소다. 두 사람은 폐기물 처리장과 해변을 함께 걷고 라이터를 건네며 담배를 피운다. 나란히 걸으며 서로의 심상치 않은 사연을 마음의 동요 없이 차분하게 말하고 듣는다.
가후쿠는 테이프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아내이며, 자신이 죽였다고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어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은 그날, 가후쿠는 그럼에도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 일이 없었지만 집을 나서 하릴없는 드라이브로 시간을 보내다 늦게 귀가했고, 쓰러져 있던 오토를 살릴 수 없었다. 가후쿠와 오토는 어린 딸이 폐렴으로 죽으면서 행복도 함께 잃었고,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외도를 알은 체하는 순간 오토도, 겨우 유지되던 일상도 사라질까봐 가후쿠는 두려웠을 것이다. 미사키는 홋카이도 시골 마을에서 일찍부터 운전을, 그것도 아주 잘해야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한다.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가 눈사태로 무너진 집에 갇히고, 장례를 치른 후 남은 유일한 것은 자신이 몰던 차였다. 홀로 남겨진 미사키는 무작정 서쪽으로 달렸고, 고장 나 멈춰버린 차와 함께 히로시마에 머물게 되었다.
불필요한 말은 물론 필요하지만 어색해질 수 있는 말도 입 밖에 내지 않던 두 사람은 심연에 침잠한 아픔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 커다란 상실과 지울 수 없는 부채감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두 사람은 닮았고, 폐렴으로 죽은 딸이 살아있다면 미사키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워크숍은 오랜 대사 연습을 거쳐 움직임과 감정 표현까지 나아갔다. 야외 워크숍을 위해 배우들과 공원으로 나온 가후쿠는 부러 미사키가 앉아 있는 스탠드 쪽으로 이동한다. 가후쿠와 배우들, 한 구석에 앉은 미사키까지 무대의 연기에 집중한다. 목소리 없이 모두의 주의를 잡아끄는 이유나의 말과 연기, 상대 배우와 나누는 감정은 가후쿠가 원했던 지점에 닿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어떤 교감의 찰나다.
중국인 상대 배우가 함께 타고 있던 차의 접촉사고로 연습에 늦었던 다카츠키는, 다시 가후쿠에게 술 한 잔을 제안하며 그들의 차에 오른다. 가후쿠를 대하는 다카츠키의 태도에는 도전적인 경계심과 권위에 대한 체념, 오토에 대한 마음이 남긴 질투심 같은 감정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듯 보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추락을 경험했지만 젊고 잘생긴 청년에게서는 여전히 경솔함과 자신만만함이 느껴진다. 겉도는 이야기들을 나누던 술집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촬영하는 누군가에 욱한 다카츠키를 가후쿠가 진정시키지만, 먼저 나간 그는 촬영자를 쫓아 사라졌다가 차로 돌아온다. 그리고 차에서는 가후쿠와 오토에 대한 다카츠키의 말들이 장광설처럼 쏟아진다. 징표를 남긴 소녀와 칠성장어, 가후쿠가 몰랐던 오토의 상상 속 이야기의 다른 결말, 신랄하게 그들 사이의 간극과 오해를 증언하는 다카츠키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리고 내게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장광설 같은 것이었을까 싶으면서도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물감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워크숍은 무대 리허설까지 왔다. 좌충우돌하면서도 다카츠키는 바냐 아저씨 역할 소화에 애써왔고 무대에 올랐다. 연습 중인 공연장에 경찰들이 찾아오고, 며칠 전 폭행한 남성에 대한 상해치사 혐의로 다카츠키가 체포된다. 워크숍 담당자들이 연행된 다카츠키를 면회하고 그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있음을 전한다. 워크숍을 중단하거나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를 연기하거나 두 가지 가능성만 남았다. 가후쿠는 오토가 떠난 후 [바냐 아저씨] 공연에서 공황장애를 경험했다. 후에도 그의 차에는 오토와 자신이 주고받는 [바냐 아저씨]가 흘렀고, 선택인지 운명인지 모르게 다시 [바냐 아저씨]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담당자들은 그의 결정에 이틀의 말미를 준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그 길로 홋카이도를 향한다. 가후쿠의 자리는 당연히 조수석이고, 장거리 운전에 교대를 제안하지만 미사키는 자신의 일이라며 운전대를 놓지 않는다. 준비 없는 갑작스런 여행은 두 사람을 더욱 비슷하게 만든다. 둘은 휴게소에서 파는 비슷한 판초를 입고 쌓인 눈을 견디기 위해 홋카이도 어디쯤에서 샀을 비슷한 장화를 신었다. 멀리 달려 페리를 타고 건너간 홋카이도, 미사키가 살던 동네는 설국이다. 차가 갈 수 있는 끝까지 가서, 미사키는 기억을 더듬으며 무너진 집을 찾아낸다. 아주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두텁게 쌓인 눈 사이로 잔해가 보이고, 미사키는 가후쿠가 건넨 꽃을 흩뿌린다.
미사키는 엄마의 다른 자아였던 '사치'에 대해 말한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던 엄마가 어린 아이로 변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때의 사치는 자신이 돌보거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눈사태로 집이 무너졌을 때 미사키는 혼자 그 집에서 빠져나왔고, 엄마도 사치도 구하지 않았다. 어쩌면 불가항력이었겠지만 어린 미사키는 자신이 미워하고 사랑했던 엄마와 사치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후쿠는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내 딸이라면 네가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너는 엄마를 죽였고 나는 아내를 죽였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절반쯤은 위악인 그의 말에 담긴 진실은 아프고, 그들의 기억과 아픔과 삶은 그러나 계속될 것이다.
집이 지옥이 된 남자와 집이 무너져버린 여자, 그 속에서 유일한 곁을 버린 혹은 잃은 두 사람이 차로 인해 만났다. 집과 차는 현대의 인간이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시간을 보내는 두 장소다. 무수한 감정과 경험과 인연이 교차하고 축적되는 곳, 그러나 쉽게 버리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집만큼이나 인간과 전방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차원을 가로지를 수 있고 다른 환경으로 이동해 배경을 달리할 수 있는 '차라는 세계'에 대해 새삼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두 사람 못지 않게 주인공인 빨간색 SAAB는 영화 곳곳에서 누누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도로를 달리던 두 개의 바퀴가 카세트테이프의 두 구멍으로 오버랩 되는 장면, 가후쿠와 미사키가 함께 담배를 물고 있을 때 정면에서 바라본 차가 네 개의 빛을 발하던 장면, 담배를 든 두 사람의 손이 촛불처럼 선루프창을 통과해 밤하늘로 올라오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다카츠키가 환기하고 가후쿠가 외면한 대로, 어떤 일이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치부되고 어떤 이유든 자신이 남긴 징표가 무시되는 상황은 잔인하다. 그 속에서 당사자가 느끼는 공허함과 무력감은, 타인이 들이대는 도덕의 잣대나 사건의 원인 제공 여부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진실을 가리고 있다면 온전히 소통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벽은 언젠가 넘어져 세계를 부수고 만다.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해 가후쿠와 미사키가 느끼는 극도의 부채감과 죄책감은, 한편 즉각적이고 반사적이고 상대적인 관계가 일상인 세상을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위악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도저한 윤리적 차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 속 인물들이어서 가능한 감성과 감정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지만, 실제 현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의 각축장이라는 생각이 내게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관계와 소통, 언어와 침묵, 진실과 상실의 의미를 낯설게 환기하는 매력적인 작품이었고, 이런 한국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내가 주의 깊게 챙기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의 소위 '거장'들이 연출하는 작품에서는 이렇게 고요하게 깊이 개인의 내면에 천착하는 영화들을 만난 기억이 별로 없다. 민족성이라든가 어떤 국가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정서라는 게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언제나 너무 많은 연결 속에서 들끓는 한국 사회의 반영으로서의 한국 영화가 지금의 범죄와 스릴러 액션 일색의 장르적 지배라면, 어느 정도는 내밀하게 감추고 격식와 예의를 차리며 속으로 침잠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일본 영화가 놓치지 않은 어떤 경향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궤변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영화를 가끔 만나고 싶고 모국어와 익숙한 문화적 배경이라면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언어와 소통과 침묵에 대해서도 인상적인 화두를 던진다. 이유나가 수어로 대화를 할 때 스크린은 물론 극장 전체가 숨죽이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리는 I08, 맨 뒷줄 오른 쪽이었고 시선보다 조금 낮은 스크린과 함께 조금 고개를 내리면 객석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세 시간 동안 이어진 집단 몰입이 주는 경험 역시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이 한 순간 한 공간에 나란히 앉아 하나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익명의 일시적 공동체로서의 극장 체험은 거의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고,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누구도 일어서지 않는 상태에서 공간을 채우는 여운의 공기는 거의 감동적이어서 함께 영화를 본 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통영에서 영화를 볼 때 예외없이 몇 번은 느껴야만 했던 불쾌감이 어느 정도 치유되는 느낌이었달까. 단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는데, 정말 잘한 일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과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잊지 않고 읽어보고 싶다.
cgv서면 임권택관
1월에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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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이 오래 남아 책을 빌려 읽었다. 통영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오는 40분 남짓 "드라이브 마이 카" 낭독 팟캐스트를 들었었다. 영화의 분위기와 많이 달라 의아했었는데, 낭독자들이 여성이고 다소 산만한 분위기여서 그랬을까 싶었었다. 원문 그대로의 낭독이었으니 당연히 소설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소설과 영화가 주는 분위기의 간극이 너무 커서 '하루키의 세계 위에 쌓아올린' 어쩌고 하는 영화 홍보 문구가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이름과 직업은 같지만 배경은 도쿄다. 아내는 유방암으로 죽고 아이는 사흘을 살다갔으며, 외도의 마지막 상대는 동년배의 동료 배우다. "바냐 아저씨"가 거론되는 건 차 안에서 잠시이고, 오래 침묵을 지키던 미사키는 한 번 질문을 시작한 뒤 영화에서보다 많은 말을 한다. 소설을 각색했다기보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해 완전히 새롭게 창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음... 그것이 각색인가. 실망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인물들이 다양한 언어로 많은 말을 하지만 무엇보다 정서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영화와 달리 소설은 어쩐지 사무적이고 건조하게만 느껴졌다. 어렸을 적 접한 [상실의 시대]가 그저 그랬고 이후 대담집을 읽은 게 하루키 독서의 전부이다보니 내가 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빌린 김에 다른 단편들도 읽어보겠다는 마음이 첫 번째 수록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읽고 사라졌다. 원작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영화인지 모르지만, 그를 바탕으로(?) 영화가 구현한 세계는 훨씬 광대하고 깊고 부드럽고 아름다웠다는 점을 굳이 확인한 기분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2014.8.28.1판1쇄 9.18.1판4쇄, (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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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교수인 알렉산드르 블라지미로비치 세레브랴꼬프와 그의 젊은 아내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세레브랴꼬프가 첫 번째 부인과 낳은 딸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냐, 그의 외할머니 마리야 바실리예브나 보이니쯔까야, 소냐의 외삼촌 이반 뻬뜨로비치 보이니쯔끼, 영지에 함께 사는 듯한 몰락 지주 일리야 일리이치 쩰레긴, 늙은 유모 마리나, 의사 미하일 리보비치 아스뜨로프 등 열 명이 안 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기억할 수 있을 리는 없으므로 부러 희곡 서두에 기록된 등장인물의 풀네임을 다 써보았다. 도시에 살던 세레브랴꼬프 부부가 퇴직 후 영지의 저택에 머물면서, 원래 이곳에 살던 이들의 일상은 흐뜨러진다. 바냐와 소냐는 쉼없이 일하며 영지를 관리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세레브랴꼬프에게 보내왔다. 특히 바냐는 지금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지만, 과거 25년간 세레브랴꼬프의 저작 활동을 돕기도 하고 그가 낸 모든 책을 읽고 이해하며 존경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퇴직 후 저택에 온 세레브랴꼬프는 그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고, 자신의 생활리듬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에 불편을 주고 있으며, 통풍을 앓으며 모든 이들을 신경질적으로 대한다. 세레브랴꼬프의 치료를 위해 달려온 의사 아스뜨로프는 인간의 욕심으로 나날이 파괴되는 숲을 보호하는 데에 열심이다. 본업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삶에 대한 회의가 깊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자주 방문하면서도 세레브랴꼬프의 고집과 무시로 진찰 대신 저택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잦은데, 사람이나 사랑에 대해서는 일체의 희망이 없는 듯이 굴지만 안드레예브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탓에 그 상황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바냐 역시 안드레예브나를 사랑하고, 소냐는 아스뜨로프를 사랑한다. 안드레예브나는 세레브랴꼬프의 지적 권위와 유명세를 동경한 나머지 큰 나이차를 감수하고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않다.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하는 일은 없고, 저택에 온 후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일손을 놓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바냐의 호감을 거부하면서도 답답한 현실에 대해 함께 토로하고, 서먹하던 의붓딸 소냐와 화해한 뒤 그의 짝사랑를 돕기 위해 아스뜨로프의 마음을 대신 확인하지만 오히려 어색한 상황을 맞는다. 와중에 세레브랴꼬프는 모두를 모아 실은 자신에게 소유권이 있지도 않은 영지와 저택 처분에 대한 의견을 내고, 바냐는 반발하며 그간 쌓였던 감정을 대폭발시킨다. 결국 세레브랴꼬프 부부도, 아스뜨로프도 떠난다. 그들이 오기 전 매일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들은, 믿음에 대한 배신과 사랑의 상처 같은 것들을 안은 채 그대로 남아 다시 시작될 일상을 맞이한다. 영화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띄엄띄엄 보여지는 탓에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는데, 기억에 남은 대사들이 나올 때만 무지 반가운 마음이 되었다. "바냐 아저씨" 혹은 "바냐 외삼촌"이라는 제목에서 바냐와 소냐가 중심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세레브랴꼬프와 안드레예브나, 아스뜨로프의 영향력 역시 만만치 않고 오히려 주요 사건과 감정의 흐름을 책임진다. 며칠 사이의 개인적인 상황 때문인지 부부의 큰 나이차와 늙음과 젊음에 대해 말하는 부분들이 크게 느껴졌고, 1년 넘게 놀고 있는 탓인지 여러 인물들이 강조하는 '일'의 의미, 하찮게 느껴지더라도 꾸준히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진정한 생활이 없을 때 환상으로 산다는 말이, 민망하게도 크게 공감됐다.
1860년에 태어나 1904년에 사망한 안톤 체호프의 1897년 작품이라고 한다.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연되고 살아남은 이유가 있겠지만,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만큼의 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독서의 목적이 [드라이브 마이 카]를 경유한 것이다보니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 탓도 있을 것 같고, 희곡을 읽는 것만으로 극적인 생명력이나 입체성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럼에도 영화의 여운과 겹쳐지며 눈에 들어오는 대사들은 마음에 남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의 울림은 강렬하다. 설 연휴에 서울에서 영화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2막 . 아스뜨로프: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서만이 여자가 남자의 친구가 되는 거야. 처음에는 아는 사람, 그 다음에는 애인, 그런 후에야 드디어 친구가 되는 거지. . 보이니쯔끼: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진정한 생활이 없을 때는 환상으로 사는 거야. 어떻든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3막 .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그럼, 물론이지. 내 생각에 진실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걸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덜 두려울 거야. 내게 맡겨 두렴, 얘야.
4막 . 소냐: 어떻게 해요, 그래도 살아가야지요!
- 사이
바냐 외삼촌, 우리 함께 살아요. 길고 긴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을 끈기 있게 참으며 살자구요. 지금이나 나이를 먹은 후나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가, 우리들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고 무덤에서 우리가 괴로워했고, 우리가 슬퍼했으며, 우리에게 고통스러웠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고, 나와 외삼촌은, 외삼촌, 사랑스런 외삼촌, 우리는 밝고 아름답고 멋진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들은 기쁨에 넘쳐서 지금 우리의 불행에 대해 감동과 미소로 회상하면서, 편안히 쉬게 될 거예요. 나는 믿어요, 외삼촌, 뜨겁게, 열정적으로 믿고 있어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댄 채, 지친 목소리로) 우리들은 쉬게 될 거예요!
- 쩰레긴이 조용히 기타를 친다.
우리들은 쉬게 될 거예요!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이 온통 금강석으로 된 것을 보며, 지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전 세계의 충만한 자비 속에 잠겨버리는 것을 볼 것이고, 우리 인생은 애무처럼 고요하고 부드럽고 달콤하게 되는 걸 볼 거예요. 저는 믿어요, 믿어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준다) 불쌍하고, 가엾은 바냐 외삼촌, 울고 계시군요...... (눈물을 글썽이며) 외삼촌은 평생 기쁨을 모르고 사셨지요. 그렇지만 조금만 기다려요, 바냐 외삼촌, 기다려요...... 우리들은 쉬게 될 거예요...... (그를 포옹한다) 우리들은 쉬게 될 거예요!
- 야경꾼이 딱딱이를 두드린다. 쩰레긴은 조용히 기타를 연주한다. 마리야 바실리예브나는 팸플릿의 여백에 쓰고 있다. 마리나는 양말을 뜨고 있다.
출생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도입부 성장 과정의 단면들이, 다소 기이하고 엉뚱한 아멜리의 관심과 일상을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군의관이었던 아빠가 자신을 청진하는 것이 설레고 기뻐서 심장이 콩닥댔던 어린 아멜리,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아빠의 심장병 진단, 그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홈스쿨링하며 친구를 사귀지 못한 소녀. 하나뿐인 딸을 당연히 사랑하였겠지만 무뚝뚝한 아빠와 엄격했던 엄마 사이에서 어린 아멜리는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아빠, 성인이 된 후 아멜리는 고요의 성채 같은 집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다.
아멜리는 오래된 건물의 5층에 살면서 두 개의 풍차 카페에서 일한다. 뼈가 약해 집에서만 지내며 그림을 그리는 유리인간 할아버지, 느리지만 과일에 진심인 착한 점원을 무시하고 구박하는 못된 과일가게 주인, 사랑으로 결혼했지만 바람을 피우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잊지 못하는 아주머니 등이 이웃에 살고 있다. 오랫동안 서커스단에서 일했던 사장, 서빙하는 지나와 담배 코너의 조제뜨가 함께 일하는 카페의 손님 중에는 이제는 친구가 되어 가끔 고양이를 돌봐주기도 하는 스튜어디스도 있고, 늘 쓰고 있지만 등단하지 못하는 무명의 소설가와 하릴없이 앉아 지나를 스토킹하며 시비 거는 사내 등의 단골들도 있다.
영화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종횡으로 엮여 있다. 욕실의 타일로 막혀 있던 구멍에서 작은 보물상자를 발견한 아멜리가 결국 '브레토도'를 찾아내 40년 만에 주인을 찾아주는 것을 시작으로, 아멜리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작전을 통해 '타인의 일상에 개입'(일방적인 대상화로부터 시작되는 일들이어서 행복을 찾아주는 일이라고 쓸 수는 없다.)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집안에만 틀어박힌 아빠가 엄마의 무덤을 장식한 인형을 빼돌려 단골 스튜어디스를 통해 세상 곳곳을 여행시키며 그 사진을 집으로 보내고,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다른 일에 골몰하느라 서로를 의식하지 못했던 사내와 조제뜨 사이에 다리를 놓아 연인 관계로 발전시키고, 착한 점원을 구박하고 무시하는 과일가게 주인의 집에 무시로 드나들면서 소소하지만 지독한 복수극을 꾸미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활기로 아멜리의 일상에 흐릿한 배경이 되어주던 이웃들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영화의 전면에 돌아가며 등장한다. 초반부 '브레도토'를 찾던 아멜리에게 그의 이름은 '브레토도'라는 유력한 단서를 제공한 유리인간 할아버지와는 각자의 집 창문을 통해 때로 서로를 관찰하며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인물은 아멜리가 아빠의 집을 오가며 지나는 기차역 증명사진 부스 앞에서 처음 마주치고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의문의 사나이 니노다. 얼떨결에 입수한 그의 앨범에는 찢어진 증명사진들이 퍼즐조각처럼 맞추어져 있고, 그중에는 꾸준히 반복되는 한 얼굴이 있어 아멜리의 궁금증과 상상력을 더한다. 사진 앨범이 너무나 중요했던 니노가 기차역 곳곳에 전단을 붙인 덕에 아멜리는 그의 일터와 이름을 알게 되고, 그를 돌려주는 과정 역시 엉뚱한 작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우여곡절을 거쳐 아멜리와 니노는 해피엔딩.
이십 년 전의 영화니까 감안해야겠지만 지금으로 보면 범죄 투성이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터라 솔직히 탐탁지 않았다. 딱히 그렇게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결핍을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탐색, 선 넘는 시도로 채우면서 결국 사랑을 찾아간다는 설정도 그 여정도 별로 공감이 되거나 유쾌하지 않았다. 타인을 대상화하며 부리는 수도 없는 오지랖, 자신의 욕망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와 망설임으로 일관하며 주변을 복작스럽게 만드는 캐릭터가 부담스러웠다. 반복적으로 증명사진을 찍은 주인공의 정체가 발견되는 순간의 반전만은 마음에 들었는데, 내게는 영화에서 줄기차게 시도하는 '의미와 작전'의 의미 없음을 시원하게 까발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게 된 영화여서 더 불퉁한 마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 내가 왜 놓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십 년 전의 센세이션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포스터 이미지 찾느라 포털에 검색했다가 평점란에서 몇 년 전 누군가 남긴 "영화 보신분들. 정말 재미있으셨어요?" 라는 문장을 보았는데, 공감이 됐다. 물론 그저 나랑 안 맞는 영화이기 때문에 느낀 공감이지만 말이다. 카페 단골인 무명 소설가를 연기한 배우는 어쩐지 카뮈를 닮은 것도 같아서 마음에 남았는데, 찾아보니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유리인간 할아버지도 브레토도 아저씨도 2019년에 고인이 되었다고, 그렇구나. 이름도 사인도 알 수 없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만, [아멜리에]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탁하고 흐린 대기에 둘러싸인 파리의 전경 위로, 심각한 실업률과 못지 않은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를 전하는 뉴스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쉽게 호전될 수 없는 상황으로 도시는 생기를 잃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마주치는 사람의 따귀를 때리거나 맞거나 이를 목도한다. 스트레스와 우울이 가득한 시민들의 무거운 일상에는 반전이 필요하다. 시에서는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을 시행해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을 정비하기로 한다.
모드 크레용은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애인과 불화가 생길 때마다 집으로 찾아와 삐대는 뻔뻔한 전 남편을 침대에 들이는 스스로가 어이 없지만 냉정하게 선을 긋지도 못하는 편이다. 아이들 챙기느라 지각한 회사의 사장은 선 넘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동료들의 관심은 노트르담 공모전에 쏠려 있다. 사무실 코앞 공사의 진동으로 망가진 놀이터 모형의 마감을 맞추기 위해 늦은 밤까지 작업을 했지만, 완성 후 연락한 사장의 무심한 대답은 오더가 이미 다른 업체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부산하고 정신없이 쫓기는 일상이 버거운 모드와 달리, 조명을 켠 놀이터 모형에서는 따뜻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헛일이 되어버렸지만 작품에 사인을 새겨넣고 모드는 거센 비바람을 견디는 맞은 편 거리의 천막들을 바라본다. 바로 그때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을 타고 모드의 놀이터 모형이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목적지가 있는 마법의 양탄자처럼 파리 도심의 하늘을 가로질러 모형이 안착한 곳은 노트르담 공모전 출품작들이 보관된 장소다.
서류 접수도 하지 않았지만 모형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한 파리시장 덕분에 모드가 공모전에 당선됐다. 얼떨떨한 상태로 시장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기자 신분으로 출현한 옛 애인 바퀴스를 조우한 모드는 졸도를 하고 만다. 그리고 기절할 만큼 놀라운 일들이 모드의 일상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갑질을 일삼던 사장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고, 별 볼 일 없던 건축가였던 모드의 위상은 수직상승한다. 하지만 전문가들과 타협하며 손본 광장과 산책로의 최종 디자인은 신성한 노트르담 앞에 남근 상징물을 세우는 꼴이 됐고 고조되는 비난 여론에 공사는 중단된다.
그런 중에도 전 남편은 수시로 집을 들락거리며 신경을 긁고 와중에 뱃속에는 셋째 아이가 들어섰다. 일로 만난 옛 애인과 다시 설렘을 느끼지만 로맨틱한 연애를 즐기기에는 변수들이 너무 많다. 중단된 공사와 풀리지 않는 작업은 결국 소송으로 이어지고,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는 법정에서 황당하게 사망한다. 점프컷처럼 벌어지는 많은 일들 중에는 의사인 언니와 사무실 동료의 썸, 곤궁함을 타개하기 위해 갑자기 벌인 에어비앤비와 각국 여행자들의 콜라보, 변호사보다 더 열심히 재판을 준비하다가 변호사 사칭으로 현장 체포되는 바퀴스, 화학사고로 오인된 비상 상황으로 재판정이 발이 묶인 이들의 막간 뮤지컬 등도 빠질 수 없다.
개인적으로 느낀 영화의 미덕 한 가지는 모드가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 바퀴스와의 러브라인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독특한 캐릭터들의 특징인지 감독의 생각인지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인지 그 모두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점만은 상쾌했다. 그러나 도입부의 내레이션으로 전달한 실업률과 기후위기,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는 거론되지 않지만 천막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같은 사회적 이슈를 왜 굳이 깔았을까 싶었고, 느닷없는 거리의 따귀들은 뭔가 조악한 설정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실과 환상을 분방하게 오가는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한 것이라고 이해하기엔, 균형감각이나 센스가 많이 부족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딱히 당기지는 않지만 제목이랑 엣나인 수입 믿고 보기로 한 건데, 극장에 앉은 내내 영화를 보는 자아와 당황하는 자아를 오가느라 힘들었다. 영화를 본 후 sns의 홍보 게시물에서 "실패라는 건 사춘기나 탈모 같은 거에요. 중요한 건 극복하는 거에요."라는 대사가 발췌된 걸 봤는데, (일단 '거에요'는 '거예요'로 바꿔주면 좋겠고) 영화를 보면서 '사춘기나 탈모가 극복의 대상인가' 싶었던 당황자아의 반문이 떠올랐다. 나 엣나인이랑 잘 맞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의기소침. 이렇게 헐렁하면서 방만하고 패기만 쩌는 의미부여형 영화일 줄은 몰랐다.
아름답기로 유명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하늘을 유영하는 연인이 있다. 서로를 의지한 채 구름처럼 떠다니는 그들 아래, 땅 위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은 각자의 고뇌와 문제를 안은 채 살아가고 죽어간다. 익명의 삶과 죽음, 그 끊임없는 연쇄는 사회와 역사가 된다. 시대의 운명 속에 교차하는 개인의 일상, 일희일비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세계의 단면을 이어 하나의 흐름으로 조망하는 유장한 호흡의 영화였다.
"한 남자를 보았다.", "한 여자를 보았다", "믿음을 잃은 한 남자가 있다.", "구두가 망가진 여자가 있다.", ... 반복되는 내레이션들과 함께 장소와 시간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어떤 상황에 놓인 이들이 등장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침묵하다가 사라진다. 거리는 대체로 잿빛이고 사람들의 얼굴은 대체로 무표정하다.
누군가는 아내를 위한 저녁을 준비하려 장을 보고 집으로 가던 중 거리에서 마주친 옛 친구를 기억한다. 아내와 마주앉은 저녁 식탁에서도 옛 친구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는 질투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아내의 말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든다. 믿음을 잃은 신부는 십자가를 짊어진 채 다중의 폭력 속에 무방비 상태로 고행하는 악몽을 꾼다. 생계 수단이자 복음을 전하는 직업을 가진 그는, 신도들 몰래 포도주를 들이키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성찬식을 주관한다. 믿음을 잃은 고통에 대해서도 신에게 호소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 상담을 위해 찾아간 병원의 의사는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약속되지 않은 시간에 찾아가자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며 그를 밀쳐낸다.
누군가는 인적 드문 거리 가게 앞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누군가는 물을 주고 들어가는 여성이 떠난 자리를 바라본다. 누군가는 자신이 누일 관을 옆에 두고 포박을 당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고 흐느낀다. 누군가는 빈 자리가 없는 전차에 앉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그 눈물에 퉁명스레 시비를 하고 누군가는 그를 이해해준다. 누군가는 기차에서 내려 가족들과 다정히 재회하고 누군가는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플랫폼을 떠나지 못하지만 멀리서 누군가 다가와 함께 걷는다. 누군가는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의 창 밖으로 내리는 성탄절의 눈에 황홀해하고, 누군가들은 휘몰아치는 눈길을 기약없이 행군한다. 누군가는 마주앉은 소녀와 모든 것이 에너지이며 다른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열역학 제1법칙을 읊조리고 또 누군가는 ...
마지막 장면은 평원의 차도 위에 멈춰선 고장난 차와 그 차에서 내린 남자의 모습이었다. 가운데의 좁은 차도 양쪽으로 펼쳐진 허허벌판과 저 멀리의 소실점, [아이다호]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 그리고 길에 쓰러진 마이크가 떠올랐다. 하늘의 연인처럼 시공간을 유영하며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관조하다 보니, 그중 또렷이 각인된 열역할 제1법칙의 대사들이 더올랐고 어느덧 떠난 지 30년이 된 리버 피닉스는 지금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싶어졌다. 사색적이고 우울하고 어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면서도 거시적인 스케일이었는데 새롭기는 했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고, 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의아하기도 했다.
고베에 살고 있는 37살 동갑내기 친구 아카리, 사쿠라코, 후미, 준의 나들이로 영화는 시작된다. 직업도 상황도 다른 네 친구 중 사쿠라코와 준은 중학교 동창, 준을 통해 서른이 넘어 만난 아카리와 후미도 절친이 되었다. 모처럼의 당일치기 소풍으로 산 정상을 찾았지만 비와 안개로 기대했던 경치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네 사람은 각자 싸온 음식들을 나누며 즐겁게 수다를 떤다. 내친 김에 1박 2일 온천 여행을 계획하고, 후미가 준비하는 얼마 후의 워크숍에도 참여하기로 한다.
아카리는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한다. 맡은 일에 똑부러지고 후배 간호사가 어려워하는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베테랑이다. 사쿠라코는 전업주부다. 만사가 시큰둥한 중학생 아들과 일에 바빠 집안 사정은 뒷전인 남편, 그리고 지금은 함께 살던 시누이와 싸운 시어머니가 집으로 와서 지내고 있다. 아트센터의 기획자로 일하는 후미는 출판 편집자 남편과 산다. 남편은 후미를 픽업해 함께 귀가하고 일찍 퇴근할 때면 알아서 저녁을 준비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거실에서 잠든 남편에게 덮어준 담요나 잊고 나간 차 열쇠를 챙겨주는 것 같은 작은 일에도 고마움의 표현을 잊지 않는 두 사람은, 격의 없는 부부라기보다 예의를 갖추고 함께 살아가는 동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미가 일하는 아트센터는 항구의 옛 건물을 개조한 '포르투'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 사람들이 들고나던 교차점에 위치한 건물은 원래의 용도 대신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후미와 후배 직원은 쓰나미가 닥쳤던 해변에 밀려온 쓰레기와 각종 잔해들을 세우는 작업 등을 통해 주목받은 예술가 우카이를 초청해 "중심"과 관련한 워크숍을 준비 중이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주제에 별다른 설명이 없는 워크숍 안내문으로 참여자를 모으기는 쉽지 않고, 세 사람은 각자 주변에도 홍보를 하기로 한다.
워크숍 당일, 아카리와 사쿠라코와 준을 포함해 열 명 정도의 참여자가 모였다. 정확한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는 경직된 분위기가 흐르고, 우카이는 "중심에 귀기울이기"라는 화두를 던지며 의자 세우기, 서로를 의지해 한 번에 일어나기, 상대의 중심인 단전의 소리 듣기, 이마를 맞대고 상대를 바라보기 등의 신체 워크숍을 진행한다. 어딘가 어설프고 억지스럽게도 보이지만 함께 몸을 움직이고 호흡하는 과정은 공간에 가득했던 긴장을 서서히 휘발시킨다. 정신 없는 일상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고요하게 집중할 겨를이 없었던 이들에게는 신선한 경험이기도 하다.
워크숍이 끝난 후 모두가 함께한 뒤풀이에서는 서먹함도 잠시, 참여자들은 의외로 편하게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워크숍 직후 음료자판기 앞에서 사쿠라코에게 서툴게 작업을 걸던 카자마는 자신의 결혼과 이혼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고, 상대의 외도로 이혼한 후 싱글로 살고 있는 아카리는 그의 옆으로 자리까지 옮겨가며 호응한다. 솔직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준은 사쿠라코에게만 언질했던 자신의 외도와 이혼 소송 이야기를 꺼내고, 외도와 비밀에 대한 배신감에 흥분한 아카리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리를 뜬다.
담담히 마음의 이야기를 꺼냈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분위기를 망치고 갈등을 야기한 셈이 된 준, 사쿠라코는 의기소침한 준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사쿠라코의 아들과 인사를 나눈 준은 출근하는 사쿠라코 남편의 차를 얻어타고 집을 나선다. 준과 사쿠라코와 남편은 중학교 동창, 준은 호감을 가진 둘을 연결시켜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쿠라코를 통해 준의 사연을 알고 있는 남편은 당분간 사쿠라코를 불러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입시를 앞둔 아들 핑계를 대지만, 얼핏 문제 없어 보이는 자신의 가정과 사쿠라코에게 미칠지 모르는 좋지 않은 영향을 염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준의 남편 코헤이는 과학자로, 모든 것을 논리와 인과관계의 정합성에 의거해 사고하는 유형이다. 짧지 않은 결혼 생활 동안 준은 노력했고 외로웠고 변화했고 용기를 냈다.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애쓰던 몇 년 동안 준은 서서히 지쳐갔고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코헤이에게 정서적으로 학대당했다고 느꼈다. 온기가 담긴 대화와 교감을 원했던 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코헤이에게 그들의 결혼 생활은 문제 없는 것이었고, 이혼 요청은 '준을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준의 재판을 방청한 친구들은 준이 그동안 홀로 감내했던 깊은 외로움에 공감하며 위로를 보낸다. 공감과 위로는 어쩌면 모른 체하며 덮어두었던 자신에게도 향하는 것인지 모른다.
친구들은 약속했던 온천 여행을 떠난다. 후미의 남편 타쿠야가 담당하는 신인작가 노세가 마침 온천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하며 그들의 여행지에 머물고 있다. 타쿠야는 기사를 자청해 네 친구를 내려주고 노세에게 간다. 마을의 천변을 산책하던 네 친구는 건너 편에서 나란히 걷는 타쿠야와 노세를 목격한다. 후미와 함께일 때보다 편하고 자연스러워보이는 모습이다. 폭포 앞에 닿은 네 친구는 즐겁고, 활기에 찬 준은 한 여행자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한다. 적극적으로 포즈를 주문하며 성의를 다해준 그의 덕분에 네 친구의 한 순간이 멋지게 박제됐다. 숙소로 돌아와 유카타를 입고 둘러앉은 친구들의 수다가 이어진다. 여러 일들을 겪으며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몰랐던 속사정과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네 친구는, 반쯤은 장난을 섞어 마치 처음 만난 사이처럼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한다.
온천 여행에서 친구들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후미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썼다. 타인에게 맞춰주고 배려하는 데에 익숙한 후미는, 그게 원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속에 이는 감정들을 스스로 눌러왔는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포르투에서는 노세의 낭독회가 열릴 예정이다. 일과 사생활을 분리해온 후미와 무관하게 타쿠야의 기획이 선정되었고 담당자는 후배이지만, 후미도 엮여들 수밖에 없다. 타쿠야는 아직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한 신인작가 노세의 작품세계와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집에서도 자주 입에 올린다. 크게 봐서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둘에게 작가에 대한 언급은 익숙한 일이지만, 타쿠야가 노세에게 느끼는 감정적 친밀감은 후미보다 가까워보인다.
온천 여행에서 모두가 떠나고 홀로 여행하던 준은 폭포에서 사진을 찍어준 여행자와 버스에서 마주쳤었다. 수다스럽게 자신의 사정을 늘어놓던 그는 준이 이혼 소송 중이라는 말에 당황한 듯 보였고 마침 목적지에 닿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급히 내렸다.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과 지난한 이혼 소송을 겪으며 준은 무엇보다 다정함과 솔직함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지 모른다. 용기 낸 준에게는 오해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단과 내면의 힘이 느껴진다. 버거운 육체노동도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오르는 가파른 계단도, 준에게는 둘이어서 더 외롭고 괴로웠던 결혼 생활보다 견딜 만한 일상이다. 하지만 요지부동으로 재결합을 원하는 코헤이는 준의 집으로 찾아오고, 집요한 의지를 재확인한 준은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춘다.
당차게만 보이는 아카리에게도 사정은 있다. 관록과 완벽주의로 정평이 난 수간호사이지만 병원일은 혼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마음과 달리 거리감을 느끼며 편하게 의지하지 못하는 후배 간호사 유즈키는 실수를 거듭하고, 환자에게 위험할지 모를 상황이 발생한다. 나름대로 다스려오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아카리는 계단에서 구르고 목발 신세가 됐다. 평소 여릿하게 호감을 표하던 의사는 아카리를 챙겨준답시고 집까지 바래다주고 추근댄다. 보람과 사명감만으로 버티기에 병원일에는 다양한 어려움이 존재하고, 홀가분한 싱글로 살고 있지만 아카리에게 마음과 일상을 나눌 누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사쿠라코의 일상도 그 사이 크게 출렁거렸다. 손자가 여자친구를 데려왔더라는 시어머니의 조심스런 전언 이후 여자친구가 임신했으니 낙태할 돈을 달라는 아들의 고백과 요구가 이어졌다. 가족회의가 열리고 여자친구의 집으로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금일봉을 전하며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바쁜 일을 핑계대며 난감한 자리를 피하는 남편, 시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뒤통수를 갈긴 뒤 사쿠라코와 동행한다. 예를 갖춰 용서를 구하고 돌아오는 길, 시어머니는 딸과 화해했으며 돌아가겠다고 말하며 사쿠라코를 위로해준다. 당황스런 고백에 따귀를 날렸던 사쿠라코는 아들에게 사과하며 '네가 아주 아이는 아닌 것처럼 어른도 미숙한 부분이 많다고'(의미는 이랬고 대사가 좋았는데, 까먹었다.), 그러나 앞으로 너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만다.
자취를 감춘 준을 수소문하던 코헤이는 친구들을 만나 당부한다. 난감함과 적대감이 뒤섞인 테이블, 한때 친구의 남편이었지만 그는 이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찾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준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직선적인 말도 통하지 않는다. 코헤이는 준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고 있고, 여전히 준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마음이 떠났고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준이 온 존재를 통해 말하고 있지만 그는 듣지 못한다. 준은 배를 타고 오사카로 떠났다. 도주를 계획했지만 여자친구가 나타나지 않아 실패한 사쿠라코의 아들이 우연히 배웅자가 되었고, 둘만의 비밀로 삼았다. 준의 채근을 못 이기고 둥근 배에 귀를 대어본 사쿠라코의 아들은, 준 덕분에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며 고맙다고 말한다.
포르투에서 노세의 낭독회가 열린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관객 중에는 사쿠라코와 코헤이도 있다. 그들은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건조하게 소설 [수증기]를 낭독하는 노세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작가의 필터를 통해 작품이 된, 네 친구들도 함께했던 온천은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새로운 장소와 의미로 거듭났다. 목발을 짚고 포르투에 온 아카리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카이가 반갑다. 우카이는 낭독회 대담자로 섭외되었고 포르투의 상주작가 제안도 받은 터였지만, 건물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둘은 발길을 돌려 자리를 뜬다. 행사 전 후미에게도 던졌지만 무시된 우카이의 한 마디에 짐짓 기대에 찬 아카리, 그러나 그들이 닿은 곳은 시끄러운 클럽이다.
선뜻 함께 나섰지만 우카이의 속내를 알 수 없다. 무신경한 우카이와 섣부르게 행동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지만 불편한 목발과 구겨진 자존심 만큼이나 우카이의 완력도 강력하다. 우카이에 의해 자꾸만 무대로 떠밀리고 춤추는 이들에 의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 아카리는 어딘가 안쓰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클럽에는 알고 보니 우카이의 동생인 워크숍 참여자가 일하고 있고, 그는 그럴 듯한 수사와 의미 부여로 예술가 노릇을 하는 오빠를 무책임하고 텅빈 존재로 여기면서도 친구처럼 지낸다. 우카이의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키스까지 하게 된 아카리, 사라졌다 나타난 우카이와 함께 클럽을 나간다. 규범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공고한 자아의 소유자인 아카리에게 이 시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행사 중 펑크낸 우카이 때문에 다급해진 타쿠야는 후미에게 대담 진행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인터뷰이로 노세와 만난 적 있는 코헤이가 현장 섭외에 응해 대담에 나서고, 의외로 깊은 이해와 자신만의 시선으로 작품에 대해 풍부한 이야기를 나눈다. 노세, 사쿠라코, 코헤이, 타쿠야, 후미가 둘러앉은 조촐한 뒤풀이 자리에는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노세와 타쿠야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호감을 감추지 않고, 거취를 알 수 없는 준과 엮인 세 사람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격식을 차리면서도 코헤이는 준을 찾아 그의 말을 직접 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조용히 듣던 노세도 당사자를 대신하는 타자의 말이 갖는 아이러니에 대해 의견을 보태며 분위기는 더욱 난감해진다. 노세를 데려야주어야 한다는 타쿠야의 고집으로 뒤풀이는 파장한다.
집으로 향하는 사쿠라코와 후미는 심란하다. 네 친구 모두 일상의 표피에 가려져 있던 균열과 혼란에 직면했다. 사쿠라코는 워크숍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카자마를 전철역에서 우연히 조우하고, 내렸던 플랫폼에서 다시 전철에 탑승한다. 아내로 엄마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오는 동안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자아의 비명이, 뒤늦게 사쿠라코에게 들려왔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귀가한 사쿠라코는 출근을 준비하는 남편에게 자신이 바람을 피웠으며 이혼하자고 담담히 말한다. 언제나 그의 몫이었던 겹겹의 빨래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일상을 지탱하는 풍경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돌아온 사쿠라코의 표정은 담담하지만 결연해보인다.
밤새 먼 길을 걸어 집에 도착한 후미, 집은 텅 비어 있다. 얼마 후 돌아온 타쿠야는 밤새 노세와 함께 있었다고,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노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두 사람이 가장 솔직하게 서로를 마주한 순간이지만,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평온한 일상을 지켜왔던 후미에게도 결단의 순간이 왔다. 마지막이라고 직감한 순간 후미는 자신이 그간 느껴왔던 마음을 내보이고 헤어지자고 말한다. 늘 조금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던 타쿠야는 순순히 현관문을 나선다. 그들이 다시 만난 건 얼마 후 병원에서다. 목발을 짚은 아카리와 만난 후미는 입원한 타쿠야의 곁에 있어보기로 한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나 관계와 마음과 사건의 수많은 연쇄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시간이 있다. 요란하게 모든 것을 흩어버리기도 하고 때로 폭풍의 눈처럼 고요히 지나가기도 한다. 아무도 모른 채 혼자만의 안간힘으로 버티게 되는 일도, 어떤 계기로든 알려져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다. 영화는 네 친구가 통과하는 균열의 시간을 주의 깊게 포착하며, 그들의 세계에 틈입한 우카이를 매개로 삶의 중심과 균형에 대해 환기한다. 그를 시덥잖게 여기는 동생의 평가처럼 우카이는 실제보다 거품과 포장이 많은 알맹이 없는 인물로 보이지만, 탐정을 고용한 코헤이가 준의 쉼터를 연결해준 이로 추정한 사람이 그였다는 점을 수상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했다 .
영화의 주인공은 네 친구지만, 그 외의 인물들도 주변 캐릭터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워크숍 참여자 모두의 이름이 불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도 이야기가 발화되며 짧게라도 서사가 부여된다. 타쿠야와 코헤이, 우카이, 노세는 물론이고 사쿠라코의 가족들과 우카이의 동생, 후배 간호사 유즈키와 의사, 폭포에서 사진을 찍어준 여성 역시 출연 비중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포커스를 조금 옮긴다면 네 친구들처럼 그들을 알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에서 누군가의 의미가 더 크게 부여될 뿐,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친구가 되고 누군가 잊혀지는 것은 모두가 경험하는 상대성이다. 누구에게나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고뇌와 사연이 있고,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 영화가 지극히 현실의 단면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것 같은 삶의 당위에 생각이 미쳤다.
네 명의 친구들이 고베에서의 워크숍을 통해 캐스팅된 비전문 배우라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이 영화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워크숍 마니아인가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나만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기하기도 했고 정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가 곧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공동의 목적으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함께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공간 중 하나가 워크숍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무방비상태의 자유로움 속에서 불특정다수의 타인을 접할 때 느끼는 거리감이나 불안 같은 것을, 일정한 형식적 제약이 동반하는 안정감으로 상쇄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시공간이기도 하다. 워크숍이나 프로그램이라는 틀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영화 덕분에 조금 다른 측면을 느끼게 된 것 같다.
러닝타임이 길기도 하지만 정말 많은 대화가 오갔고 공감되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이 많은 영화였지만, 늘 그렇듯 순간의 감응은 뇌리에 새겨지지 않는다. 말이 곧 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지 않은 화자들에게 고루 말과 기회를 준 덕분에 누군가를 안다는 것 혹은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완벽한 선택으로 완전한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에게 사랑인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증오의 대상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실은 조금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우카이와 코헤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영화 인생 충격 원탑이었던 [티탄]을 보고 정확히 11분 후에 이 영화가 시작되었는데, 다른 가능성이 없었으니 보았다는 것에 만족해야겠지만 아쉬운 환경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