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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야경을 비추며 지상을 향하던 카메라가 즐비한 고층빌딩을 훑고 당도하는 곳은 어느 아파트의 거실이다. 실내에는 나신으로 소파에 기대어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아무렇게나 노래를 불러대는 여성이 있다. 중국인 이민 2세대나 3세대쯤으로 보이는 에밀리다. 요양원에 입원한 할머니의 아파트에 살면서 콜센터에서 일하는 에밀리는, 얼마 전 룸메이트가 된 까미유와 함께 살고 있다. 파리정치대학을 다녔지만 전공과 무관한 콜센터에서 불만에 가득찬 채 일한다. 떨어져 사는 엄마의 전화에 스트레스받고 자신을 '관계 장애'라고 진단하는 의사 언니에게 때때로 전화해 시시콜콜한 하소연을 한다. 까칠하고 제멋대로이면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에밀리는 룸메이트가 된 까미유가 마음에 들지만 대화는 대개 시비조다. 권태롭고 불안한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인 듯 섹스한 다음 날의 에밀리는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는다. 쿨한 척하지만 까미유와의 섹스에 집착하는 에밀리는, 정말로 쿨하기만 한 까미유의 태도에 상처받는다.
까미유는 에밀리의 집 근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룸메이트를 찾는 에밀리의 집 앞에서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할 뻔했지만 대화를 통해 호감을 얻었다. 휴직하고 박사 과정을 준비할 계획이고, 일 스트레스를 격렬한 섹스로 풀지만 섹스와 사랑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에밀리와 나눈 몇 번의 섹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언의 요구를 거부한 후 에밀리의 태도가 싸해졌다. 반 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빠와 여동생이 사는 집에 가끔 방문한다. 학생인 여동생은 말을 더듬지만 좋아하는 스탠딩 코미디를 할 때면 달라지고, 아빠의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꽤 열심이다. 스마트한 엘리트인 까미유와 가족들은 별로 닮지 않았고 그리 친밀해보이지도 않는다.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고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는 일은 각자의 몫으로 보이기도 한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빠는 까미유에게 접히지 않는 휠체어의 처분을 당부한다.
까미유는 휴직 후 대체교사로 일할 스테파니와 만나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암묵적으로 계속되던 섹스를 거부한 뒤 토라진 에밀리에게, 까미유는 친구들과의 파티를 위해 집을 비워달라고 부탁한다. 착잡한 마음으로 밤거리로 나선 에밀리는 소원하게 지내던 친구들의 파티에서 누군가 권하는 대로 엑스터시를 하고, 퍼붓는 비에 흠뻑 젖은 채 간절하게 까미유를 떠올리며 귀가했다가 나체인 스테파니와 마주친다. 엑스터시에 취해 욕조에 웅크린 에밀리는 까미유의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속에서 언니에게 전화해 정신 없는 넋두리를 늘어놓지만 돌아오는 건 잠을 깨웠다는 타박이다. 다음 날 까미유가 나간 뒤 집에 남아 있던 스테파니를 마주친 에밀리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으며 집세를 운운하고, 그간 쌓인 불편함이 폭발한 까미유는 짐을 싸서 나간다.
룸메이트로 만나 잠시 섹스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제법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였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의 결은 많이 달랐다. 호감에서 급발진한 짝사랑의 마음을 숨기며 까미유를 지켜보고 의지했던 에밀리와 달리, 까미유는 마음의 경계가 분명했고 얼마 후 스테파니와 사랑에 빠졌다. 부적절한 응대로 콜센터에서 해고된 후 망연자실 침대와 한몸으로 늘어져 있는 에밀리를 살피며 룸메이트로서의 의리를 잃지 않았던 까미유에게는, 발랄하고 솔직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에밀리가 발산하는 불편함을 견딜 이유가 없었다. 에밀리는 엄마의 당부대로 요양원의 할머니를 찾아가고, 식당에서 일하며 또다른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데이트앱으로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하며 잠시나마 생기를 장전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받은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자기 대신 정기적으로 요양원에 가는 것을 조건으로 새 룸메이트를 들인다. 까미유의 안부 연락에 괴팍하고 차갑게 반응하는 에밀리의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다.
노라는 늦깎이 법학도로 학교에 복귀했다. 강의실의 학생들은 노라보다 한참 어리고 어울리기 쉽지 않아 보인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생활을 시작한 노라는 학교의 봄방학 파티에 노란 가발과 진한 화장으로 꾸미고 참석했다가, 자신을 누군가와 혼동한 남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사진 요청에 응한다. 착각의 대상이 된 누군가는 성인전용앱의 셀럽인 앰버 스위트, 멋모른 채 찍은 사진은 학생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고 노라와 앰버 스위트는 동일인으로 오인된다. 교수의 물음에 답하는 노라를 둘러싼 강의실은 학생들의 웅성거림으로 채워지고, 노라의 휴대폰에는 낯선 이들의 무례한 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사실을 알게 된 노라는 경악하고 움츠러든다. 그리고 자신과 닮았다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으로 앱에 접속해 앰버 스위트를 대면한다. 평소처럼 야한 속옷 차림으로 화면에 등장한 앰버 스위트에게 노라는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화에 편안함을 느낀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학생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 노라는 학교를 떠나 일을 시작했다. 보르도에서 십년 동안 삼촌과 부동산 임대업을 했던 노라가 찾은 사무실에는, 박사 과정 준비를 위해 휴직했다가 잠시 지인의 사무실 운영을 맡은 까미유가 있다. 앰버 스위트와의 대화에서 조각조각 드러나는 노라의 지난 시절에는 짙은 그늘이 있다. 학창시절 핸드볼 선수였던 노라는 짧은 대학 생활을 거쳐 삼촌과 오래 일했다. 파리에 당도한 노라가 "자기야" 부르는 상대에게 "그렇게 부르지 마" 단호하게 답했던 통화의 주인공은 삼촌일 테다. 일에 그치지 않고 잠자리까지 부적절하게 고착된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노라는 파리행과 학교 복귀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성적 관계로부터 독립한 파리에서 노라는 또다른 난관을 만났고 상처받았다. 눈길을 끄는 탁월한 아름다움과 성인전용앱의 아이디를 본명으로 할 만큼의 순진함은 노라의 인생을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요철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동료가 된 두 사람은 서먹하다. 까미유는 노라의 수려한 외모에 눈길이 가고 노라는 예민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다. 까미유는 그 사이 스테파니와 헤어졌고 이따금 에밀리와 연락을 주고 받는다. 노라는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마도 소문을 퍼뜨리는 데에 적극적이었을 동기에게 시원하게 주먹을 날렸고, 앰버 스위트의 가면을 벗은 루이즈와 스케이프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랜다. 일에 있어 문외한과 베테랑인 까미유와 노라의 파트너십은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 유지되는 중이다. 서로에 대해 묻지 않고 건조하게 동행하며 일하던 어느 날, 임대를 의뢰한 집의 공사 현장에서 까미유는 제자였던 졸업생을 만난다.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제자의 반색과 까미유의 거리낌없이 친근한 모습을 목도한 노라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고,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며 둘은 금세 가까워진다. 하지만 까미유와 사랑을 나누던 노라의 몸은 굳어버리고, 까미유는 그런 노라를 이해하며 물러선다.
연인이 되었지만 까미유와 노라의 관계에서는 어딘가 빈틈이 느껴진다. 까미유에게 노라는 매력적이지만 온전히 교감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고, 노라는 자신의 멈칫거림을 이해해주는 까미유가 고맙지만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까미유와 노라의 사무실에 고객과의 중국어 통역을 위해 에밀리가 방문하고, 지난 시간과 감정의 잔여물이 뒤섞인 세 사람 사이에는 긴장이 흐른다. 노라는 댄디하고 젠틀한 까미유를 좋아하지만, 감정이 더 깊이 흐르고 있는 대상은 루이즈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엄마를 떠나보냈지만 상실의 아픔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던 까미유는 노라와의 짧은 연애가 끝난 후, 잘 펴지지 않는 엄마의 휠체어를 중고로 처분하며 복받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애증의 대상으로 여겼던 까미유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에밀리는 외롭게 방황하던 중 할머니의 부고를 뒤늦게 접하고 오열한다.
공허하고 외롭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몸도 마음도 뜻대로 되지 않은 세 사람에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한적한 공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노라의 얼굴은 어딘가 경직되어 보인다. 멀리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의 루이즈, 서로를 향해 다가가던 노라는 순간 비틀거리며 실신하고 만다. 처음으로 오롯이 마음을 나누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사랑을 대면하는 찰라, 오랫동안 방황하던 노라의 심신은 극도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맥을 놓아버린 듯하다. 할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에밀리가 마음을 털어놓는 상대는 다시 까미유다. 에밀리는 할머니의 장례식 동행을 까미유에게 마지막으로 배팅하고, 집을 나서기 전 아래 도착한 까미유와 인터폰으로 소통한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섹스와 일방적인 이별과 번지를 잘못 찾은 질투와 애증이 뒤섞인 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은, 돌고돌아 마침내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노에미 메랑/멜랑/메를랑 중 어떤 표기가 맞는 건지 아직도 모르지만, 암튼 내가 영화를 기대한 가장 큰 이유는 자크 오디아드도 셀린 시아마도 아닌 바로 그였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큐리오사]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어 굿 맨]이었다. [파리, 13구]라는 제목과 흑백영화라는 사실도 기대를 더했는데 한참 전 배낭여행의 마지막 도시로 며칠 머물렀던 파리는 기억도 가물하지만 아무려나, 파리는 가봤든 아니든 잘 알든 아니든 뭔가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기대를 품게 만드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파리의 20개 구 중 13구인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예전에 불렸던 지명이라는 원제 "Les Olympiades"가 더 강조되는 것 같았지만), 인트로의 부감부터 흔히 떠올리는 낮은 건물들과 방사형 도로의 파리는 아니었다. 찾아보니 13구는 차이나타운이 위치하고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자, 국립도서관이 자리한 곳이며 신도시 개발로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많이 들어서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파리 도심과는 다른 풍경을 가진 곳이라고 한다.
인물들이 활보하는 공간은, 파리를 상상할 때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오래된 골목과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다. 이주민 후세대인 에밀리와 까미유, 보르도 출신인 노라는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이 고층건물이 즐비한 익명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할머니의 집과 전화로만 소통하는 가족, 어머니가 돌아가신 집과 약하게 연결된 가족, 혼자인 집과 부재하는 가족. 세 사람에게 집과 가족은 안온한 공간이나 정서적 지지망 같은 전통적인 기능이나 역할과 거리가 멀다. 당돌하고 직선적인 에밀리도,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까미유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라도 겉보기에는 멀끔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일도 학업도 순탄하지 않고 사랑도 우정도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갈등과 방황을 거쳐 서로를 마주한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라기보다 연속되는 삶의 한 마디처럼 보였고, 감각적인 흑백 화면에 담겨 있다는 것이 다를 뿐 도시에서 분투하며 부유하는 우리 시대 누구나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에밀리와 까미유의 이야기가 일단락된 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까미유와 노라가 같은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슬로우로 잡힌다.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앰버 스위트가 모니터 화면 속에 등장했다 사라지고, 이어 노라가 북적이는 강의실로 들어선다. 얼핏 개연성 없어 보이는 인물과 사건을 무심히 잇는 방식이 파편적으로 산개되어 있지만 뜻밖에 드라마틱하게 엮이기도 하는 현실의 어떤 순간을 재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루이즈를 대면하는 노라의 실신 장면은 영화가 유지하던 톤에서 너무 튀는 것 같으면서도 무척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명석한 엘리트답게, 까미유가 에밀리와 노라에게 각각 했던 한 마디 말이 촌철살인으로 들렸는데 문장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게 불만이고 자기 멋대로인 에밀리에게 한 말에 괜히 찔리면서도 무척 공감이 됐고, "이렇게 생기면 살기 힘들겠다" 비슷한 노라에게 한 말 역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언 토미네라는 작가의 그래픽노블 세 편([킬링 앤 다잉Killing and Dying], [앰버 스위트Amber Sweet], [하와이안 겟어웨이Hawaiian Getawa])을 원작으로 각색한 작품이고 까미유는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라고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원작을 볼 일은 없을 테고. 짧은 대화나 개성을 극대화한 씬으로 인물의 전사를 암시하고 캐릭터를 전제하는 방식, 극적인 감정과 사건의 절정을 중화하는 무채색의 화면,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된 서사의 적당한 밀도, 멜로디가 거의 없이 단속적인 음향처럼 느껴졌던 음악, 그 모든 걸 아우른 세련되고 군더더기 없는 편집 같은 것들이 조화롭고 편안하고 매력적인 영화였다. 영화가 좋으면 다음 날 오전에 한 번 더 보겠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했는데, 덕분에 정말 편안하게 빠져서만 보았더니 기억이 애매한 부분이 많다. 다음 날 오전은 실패했고, 언젠가 다시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5/12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