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에 해당되는 글 477건

  1. 2022.05.13 [파리, 13구]
  2. 2022.04.18 [엄마와 나]
  3. 2022.04.18 [태어나길 잘했어]
  4. 2022.04.18 [복지 식당]
  5. 2022.04.18 [고스팅 글로리아]
  6. 2022.04.18 [사랑 후의 두 여자]
  7. 2022.04.18 [루이스 웨인-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8. 2022.04.18 [패러렐 마더스]
  9. 2022.03.29 [킹 리차드]
  10. 2022.03.29 [벨파스트]
빛의걸음걸이2022. 5. 13. 21:3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심의 야경을 비추며 지상을 향하던 카메라가 즐비한 고층빌딩을 훑고 당도하는 곳은 어느 아파트의 거실이다. 실내에는 나신으로 소파에 기대어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아무렇게나 노래를 불러대는 여성이 있다. 중국인 이민 2세대나 3세대쯤으로 보이는 에밀리다. 요양원에 입원한 할머니의 아파트에 살면서 콜센터에서 일하는 에밀리는, 얼마 전 룸메이트가 된 까미유와 함께 살고 있다. 파리정치대학을 다녔지만 전공과 무관한 콜센터에서 불만에 가득찬 채 일한다. 떨어져 사는 엄마의 전화에 스트레스받고 자신을 '관계 장애'라고 진단하는 의사 언니에게 때때로 전화해 시시콜콜한 하소연을 한다. 까칠하고 제멋대로이면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에밀리는 룸메이트가 된 까미유가 마음에 들지만 대화는 대개 시비조다. 권태롭고 불안한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인 듯 섹스한 다음 날의 에밀리는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는다. 쿨한 척하지만 까미유와의 섹스에 집착하는 에밀리는, 정말로 쿨하기만 한 까미유의 태도에 상처받는다.

 

까미유는 에밀리의 집 근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룸메이트를 찾는 에밀리의 집 앞에서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할 뻔했지만 대화를 통해 호감을 얻었다. 휴직하고 박사 과정을 준비할 계획이고, 일 스트레스를 격렬한 섹스로 풀지만 섹스와 사랑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에밀리와 나눈 몇 번의 섹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언의 요구를 거부한 후 에밀리의 태도가 싸해졌다. 반 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빠와 여동생이 사는 집에 가끔 방문한다. 학생인 여동생은 말을 더듬지만 좋아하는 스탠딩 코미디를 할 때면 달라지고, 아빠의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꽤 열심이다. 스마트한 엘리트인 까미유와 가족들은 별로 닮지 않았고 그리 친밀해보이지도 않는다.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고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는 일은 각자의 몫으로 보이기도 한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빠는 까미유에게 접히지 않는 휠체어의 처분을 당부한다.

 

까미유는 휴직 후 대체교사로 일할 스테파니와 만나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암묵적으로 계속되던 섹스를 거부한 뒤 토라진 에밀리에게, 까미유는 친구들과의 파티를 위해 집을 비워달라고 부탁한다. 착잡한 마음으로 밤거리로 나선 에밀리는 소원하게 지내던 친구들의 파티에서 누군가 권하는 대로 엑스터시를 하고, 퍼붓는 비에 흠뻑 젖은 채 간절하게 까미유를 떠올리며 귀가했다가 나체인 스테파니와 마주친다. 엑스터시에 취해 욕조에 웅크린 에밀리는 까미유의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속에서 언니에게 전화해 정신 없는 넋두리를 늘어놓지만 돌아오는 건 잠을 깨웠다는 타박이다. 다음 날 까미유가 나간 뒤 집에 남아 있던 스테파니를 마주친 에밀리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으며 집세를 운운하고, 그간 쌓인 불편함이 폭발한 까미유는 짐을 싸서 나간다.

 

룸메이트로 만나 잠시 섹스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제법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였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의 결은 많이 달랐다. 호감에서 급발진한 짝사랑의 마음을 숨기며 까미유를 지켜보고 의지했던 에밀리와 달리, 까미유는 마음의 경계가 분명했고 얼마 후 스테파니와 사랑에 빠졌다. 부적절한 응대로 콜센터에서 해고된 후 망연자실 침대와 한몸으로 늘어져 있는 에밀리를 살피며 룸메이트로서의 의리를 잃지 않았던 까미유에게는, 발랄하고 솔직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에밀리가 발산하는 불편함을 견딜 이유가 없었다. 에밀리는 엄마의 당부대로 요양원의 할머니를 찾아가고, 식당에서 일하며 또다른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데이트앱으로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하며 잠시나마 생기를 장전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받은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자기 대신 정기적으로 요양원에 가는 것을 조건으로 새 룸메이트를 들인다. 까미유의 안부 연락에 괴팍하고 차갑게 반응하는 에밀리의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다.

 

노라는 늦깎이 법학도로 학교에 복귀했다. 강의실의 학생들은 노라보다 한참 어리고 어울리기 쉽지 않아 보인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생활을 시작한 노라는 학교의 봄방학 파티에 노란 가발과 진한 화장으로 꾸미고 참석했다가, 자신을 누군가와 혼동한 남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사진 요청에 응한다. 착각의 대상이 된 누군가는 성인전용앱의 셀럽인 앰버 스위트, 멋모른 채 찍은 사진은 학생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고 노라와 앰버 스위트는 동일인으로 오인된다. 교수의 물음에 답하는 노라를 둘러싼 강의실은 학생들의 웅성거림으로 채워지고, 노라의 휴대폰에는 낯선 이들의 무례한 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사실을 알게 된 노라는 경악하고 움츠러든다. 그리고 자신과 닮았다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으로 앱에 접속해 앰버 스위트를 대면한다. 평소처럼 야한 속옷 차림으로 화면에 등장한 앰버 스위트에게 노라는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화에 편안함을 느낀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학생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 노라는 학교를 떠나 일을 시작했다. 보르도에서 십년 동안 삼촌과 부동산 임대업을 했던 노라가 찾은 사무실에는, 박사 과정 준비를 위해 휴직했다가 잠시 지인의 사무실 운영을 맡은 까미유가 있다. 앰버 스위트와의 대화에서 조각조각 드러나는 노라의 지난 시절에는 짙은 그늘이 있다. 학창시절 핸드볼 선수였던 노라는 짧은 대학 생활을 거쳐 삼촌과 오래 일했다. 파리에 당도한 노라가 "자기야" 부르는 상대에게 "그렇게 부르지 마" 단호하게 답했던 통화의 주인공은 삼촌일 테다. 일에 그치지 않고 잠자리까지 부적절하게 고착된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노라는 파리행과 학교 복귀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성적 관계로부터 독립한 파리에서 노라는 또다른 난관을 만났고 상처받았다. 눈길을 끄는 탁월한 아름다움과 성인전용앱의 아이디를 본명으로 할 만큼의 순진함은 노라의 인생을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요철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동료가 된 두 사람은 서먹하다. 까미유는 노라의 수려한 외모에 눈길이 가고 노라는 예민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다. 까미유는 그 사이 스테파니와 헤어졌고 이따금 에밀리와 연락을 주고 받는다. 노라는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마도 소문을 퍼뜨리는 데에 적극적이었을 동기에게 시원하게 주먹을 날렸고, 앰버 스위트의 가면을 벗은 루이즈와 스케이프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랜다. 일에 있어 문외한과 베테랑인 까미유와 노라의 파트너십은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 유지되는 중이다. 서로에 대해 묻지 않고 건조하게 동행하며 일하던 어느 날, 임대를 의뢰한 집의 공사 현장에서 까미유는 제자였던 졸업생을 만난다.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제자의 반색과 까미유의 거리낌없이 친근한 모습을 목도한 노라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고,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며 둘은 금세 가까워진다. 하지만 까미유와 사랑을 나누던 노라의 몸은 굳어버리고, 까미유는 그런 노라를 이해하며 물러선다.

 

연인이 되었지만 까미유와 노라의 관계에서는 어딘가 빈틈이 느껴진다. 까미유에게 노라는 매력적이지만 온전히 교감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고, 노라는 자신의 멈칫거림을 이해해주는 까미유가 고맙지만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까미유와 노라의 사무실에 고객과의 중국어 통역을 위해 에밀리가 방문하고, 지난 시간과 감정의 잔여물이 뒤섞인 세 사람 사이에는 긴장이 흐른다. 노라는 댄디하고 젠틀한 까미유를 좋아하지만, 감정이 더 깊이 흐르고 있는 대상은 루이즈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엄마를 떠나보냈지만 상실의 아픔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던 까미유는 노라와의 짧은 연애가 끝난 후, 잘 펴지지 않는 엄마의 휠체어를 중고로 처분하며 복받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애증의 대상으로 여겼던 까미유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에밀리는 외롭게 방황하던 중 할머니의 부고를 뒤늦게 접하고 오열한다.

 

공허하고 외롭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몸도 마음도 뜻대로 되지 않은 세 사람에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한적한 공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노라의 얼굴은 어딘가 경직되어 보인다. 멀리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의 루이즈, 서로를 향해 다가가던 노라는 순간 비틀거리며 실신하고 만다. 처음으로 오롯이 마음을 나누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사랑을 대면하는 찰라, 오랫동안 방황하던 노라의 심신은 극도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맥을 놓아버린 듯하다. 할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에밀리가 마음을 털어놓는 상대는 다시 까미유다. 에밀리는 할머니의 장례식 동행을 까미유에게 마지막으로 배팅하고, 집을 나서기 전 아래 도착한 까미유와 인터폰으로 소통한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섹스와 일방적인 이별과 번지를 잘못 찾은 질투와 애증이 뒤섞인 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은, 돌고돌아 마침내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노에미 메랑/멜랑/메를랑 중 어떤 표기가 맞는 건지 아직도 모르지만, 암튼 내가 영화를 기대한 가장 큰 이유는 자크 오디아드도 셀린 시아마도 아닌 바로 그였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큐리오사]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어 굿 맨]이었다. [파리, 13구]라는 제목과 흑백영화라는 사실도 기대를 더했는데 한참 전 배낭여행의 마지막 도시로 며칠 머물렀던 파리는 기억도 가물하지만 아무려나, 파리는 가봤든 아니든 잘 알든 아니든 뭔가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기대를 품게 만드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파리의 20개 구 중 13구인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예전에 불렸던 지명이라는 원제 "Les Olympiades"가 더 강조되는 것 같았지만), 인트로의 부감부터 흔히 떠올리는 낮은 건물들과 방사형 도로의 파리는 아니었다. 찾아보니 13구는 차이나타운이 위치하고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자, 국립도서관이 자리한 곳이며 신도시 개발로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많이 들어서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파리 도심과는 다른 풍경을 가진 곳이라고 한다.

 

인물들이 활보하는 공간은, 파리를 상상할 때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오래된 골목과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다. 이주민 후세대인 에밀리와 까미유, 보르도 출신인 노라는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이 고층건물이 즐비한 익명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할머니의 집과 전화로만 소통하는 가족, 어머니가 돌아가신 집과 약하게 연결된 가족, 혼자인 집과 부재하는 가족. 세 사람에게 집과 가족은 안온한 공간이나 정서적 지지망 같은 전통적인 기능이나 역할과 거리가 멀다. 당돌하고 직선적인 에밀리도,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까미유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라도 겉보기에는 멀끔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일도 학업도 순탄하지 않고 사랑도 우정도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갈등과 방황을 거쳐 서로를 마주한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라기보다 연속되는 삶의 한 마디처럼 보였고, 감각적인 흑백 화면에 담겨 있다는 것이 다를 뿐 도시에서 분투하며 부유하는 우리 시대 누구나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에밀리와 까미유의 이야기가 일단락된 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까미유와 노라가 같은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슬로우로 잡힌다.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앰버 스위트가 모니터 화면 속에 등장했다 사라지고, 이어 노라가 북적이는 강의실로 들어선다. 얼핏 개연성 없어 보이는 인물과 사건을 무심히 잇는 방식이 파편적으로 산개되어 있지만 뜻밖에 드라마틱하게 엮이기도 하는 현실의 어떤 순간을 재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루이즈를 대면하는 노라의 실신 장면은 영화가 유지하던 톤에서 너무 튀는 것 같으면서도 무척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명석한 엘리트답게, 까미유가 에밀리와 노라에게 각각 했던 한 마디 말이 촌철살인으로 들렸는데 문장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게 불만이고 자기 멋대로인 에밀리에게 한 말에 괜히 찔리면서도 무척 공감이 됐고, "이렇게 생기면 살기 힘들겠다" 비슷한 노라에게 한 말 역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언 토미네라는 작가의 그래픽노블 세 편([킬링 앤 다잉Killing and Dying], [앰버 스위트Amber Sweet], [하와이안 겟어웨이Hawaiian Getawa])을 원작으로 각색한 작품이고 까미유는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라고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원작을 볼 일은 없을 테고. 짧은 대화나 개성을 극대화한 씬으로 인물의 전사를 암시하고 캐릭터를 전제하는 방식, 극적인 감정과 사건의 절정을 중화하는 무채색의 화면,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된 서사의 적당한 밀도, 멜로디가 거의 없이 단속적인 음향처럼 느껴졌던 음악, 그 모든 걸 아우른 세련되고 군더더기 없는 편집 같은 것들이 조화롭고 편안하고 매력적인 영화였다. 영화가 좋으면 다음 날 오전에 한 번 더 보겠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했는데, 덕분에 정말 편안하게 빠져서만 보았더니 기억이 애매한 부분이 많다. 다음 날 오전은 실패했고, 언젠가 다시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5/12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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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5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1970년대 초반 지어진 동작구 상도동 강남상가아파트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같은 나이의 한 사람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1971년에 태어나 한국 나이 세 살에 미국으로 입양된 레인 포스터볼드이자 김일환, 그는 40여년 만에 만난 친엄마 김숙연과 함께 강남상가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다. 입양 가족의 이야기들 중에는 자녀의 원망과 부모의 회한 같은 어렵고 묵은 감정들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이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그대로 두고 현재에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눈물과 아픔의 시간을 통과했기에 가능한 걸까, 눈만 마주쳐도 똑닮은 웃음을 나누는 두 사람이 놀라웠다. 


영화의 시간은 레인이 엄마와 함께 산 지 1년 반가량 된 시점부터다. 레인은 멀리까지 한국어를 배우러 다니지만 엄마와의 원활한 의사 소통은 쉽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모자는 눈치와 몇 마디의 단어들과 바디랭귀지로 서로를 읽고 자신의 뜻을 전한다. 말보다 빠른 것은 표정과 운동과 음식 그리고 어린 형제들처럼 몸을 부대끼는 애정 표현이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한국으로 날아온 아들은 엄마에게 기쁨이고 웃음이고 자랑이다. 어릴 적에 미국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잘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고, 엄마는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들에게서는 서운함이나 원망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의 부모님께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고, 이제라도 친엄마 품에서 아기처럼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걸 행복하게 여기는 것 같다. 똑닮은 엄마와 아들은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일 없이 해맑고 큰 웃음을 나누며 짧은 말들과 함께 살아간다.

 

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즈음, 갈등의 불씨가 되는 것은 레인의 담배다. 집안에서 피우지는 않지만 좁은 집에 함께 사는 유방암 환자인 엄마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정말 담배만이 이유였을까 싶지만, 레인은 엄마의 집을 떠난다. 반평생 이상 홀로 살았을 엄마와 다 큰 아들의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동거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화와 결별 같은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붙어 있었기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핏줄 연결의 엄연함보다 낳고 기르고 의존하는 상호 관계로 점철된 이십 년 가까운 체험이 부모와 자식을 뗄 수 없는 가족으로 연결하는 요체라고 말해도 된다면, 그런 경험이 결여된 채로 다시 만난 모자의 초밀착 상태는 실은 좀 무리한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원룸을 얻어 독립한 레인의 일상은 별로 나오지 않는데, 비슷한 한국어 실력의 지인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하모니카 연주를 듣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외국에서 가출한 청소년들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아저씨의 말을 흘리면서도 애수를 띤 하모니카 연주에 마음을 얹는 모습은 처음으로 크게 보이는 쓸쓸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즈음 레인은 친아버지를 찾는 중이었다.

 

엄마와 레인이 제대로 주고받아야 하는 이야기가 있을 때는 전화 통역이 등장한다. 엄마는 레인의 아버지 찾기가 달갑지 않고, 별로 고집스러워 보이지 않는 레인은 그래도 궁금하다. 어쩌면 말란다고 말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 모르고, 멀고 낯선 땅까지 엄마를 찾아온 레인이 아빠를 찾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레인의 생일상을 차려준 곳은, 입주 간병인으로 돌보는 할아버지의 집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오랜만에 먹으며 레인은 그 사이 딴 운전면허증을 내보이고, 얼마 후 모자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엄마는 레인의 부모를 만나 꼭 감사를 전하고 싶고, 회복 중이고 일도 하고 있지만 몸이 견딜 수 있을지 비행을 테스트해보는 목적도 있다. 비좁은 아파트를 벗어나 탁 트인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엄마와 아들의 표정은 환하고 환하다.

 

친아버지를 찾던 레인에게, 미국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영화에는 레인이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하는 단란한 모습을 담은 홈비디오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젊은 서양인 부부와 어린이 그리고 작고 마른 동양인 아이가 담긴 화면은, 레인이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난 홈비디오와 나란히 보여지는 인물들의 현재 모습은, 다큐를 통해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선연한 세월과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고픈 열망 같은 것들로 생각을 데려갔다. 양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레인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친엄마가 미국에 온다. 얼마 전 제주도행으로 처음 비행기를 타봤던 엄마는 씩씩하게 홀로 미국에 도착했다. 생활력도 친화력도 남다르고 참 밝은 엄마의 언행은 미국에서도 변함없지만, 레인을 한국으로 보내던 즈음에 대해 묻는 미국 엄마의 말에 답하며 복받치는 심정은 어쩔 수가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 아이의 엄마로 마주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판타지처럼 다정하고 평화롭다.

 

한국으로 돌아온 레인은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친아빠를 확인하고, 동생뻘이 되는 남성과도 만난다. 엄마와 함께 그들이 사는 곳에 가고 친아빠의 산소에 인사도 드린다. 세상에 없는 친아빠를 통해 연결된 가족과도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을지도 모르지만 함께 담배를 피우는 '동생'과 레인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친아빠를 찾으며 레인이 바랐던 것이 그저 자신을 있게 한 뿌리를 알고 싶은 갈망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세상에 없는 두 아빠와 각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두 엄마를 둔 레인의 삶과 운명은, 픽션이었더라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양 경험을 (다큐에 드러난 만큼) 레인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도 같지만, 입양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간헐적으로 접하며 굳어진 피상적인 생각들이 꽤 일률적인 편견이었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생일날이었으므로 [태어나길 잘했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보내준 음식들로 제대로 된 밥을 먹을까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부산에 온 김에 시간 맞는 영화를 더 보고 가자 싶어 선택한 거였다. 소개로 대략의 내용을 짐작하고 별다른 기대나 감흥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엄마아빠가 살고 계시고 나도 잘 아는 동네가 배경이라서 영화가 더 가까이 와닿는 느낌이었다. 엔딩 크레딧 출연진 중 세 번째로 등장하는 상도동 ‘강남상가아파트’에는 내가 가봤던 식당도 있고 좋아했던 빵집도 있다. 맞은 편 대로변에서 그 건물을 잡을 때면 엄마아빠가 살고 계시는 아파트 동이 보이기도 했고, 촬영이 한창이던 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서 밥도 먹고 먹을 것도 싸들고 오고 했던 터라 각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엄마가 사는 바로 근처에 살고 있는 레인과 엄마를 보며, 무례한 가정이겠지만 어느 순간은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익명의 도시의 수많은 집들 속에는 한 겹만 들어가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 구석 한 순간이라도 내 삶과 겹쳐지면 그건 조금 다른 빛깔로 다가오는 것 같다. 


4/18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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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4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8년 2월,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외삼촌네로 딸려온 중학생 춘희는 누우면 꽉 차는 좁은 다락방에 얹혀 산다. 외삼촌 부부는 갑자기 떠맡게 된 조카를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못된 사촌 유라는 마주칠 때마다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조용히 감싸주곤 하는 외할머니와 술에 취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떠들어대는 사촌오빠가 없다 있다 하지만, 춘희는 몇 안 되는 가족들 사이에 내던져진 구박 덩어리에 가깝다. 무용실에서 폴카댄스를 연습하던 춘희가 손의 땀을 걱정하며 혼자 해도 되는지 묻자 잠시 함께 춤을 춰주던 교사는, 축축해진 손이 불쾌해졌는지 금세 태도를 바꿔 교복 치마 안에 입은 체육복 바지를 지적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외로운 춘희는, 누군가에게 속내를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삼키고 감수하는 것에 익숙해 보인다.

 

어른이 된 춘희는 여전히 이부자리만 한 다락방에서 눈을 뜬다. 엄마아빠와 함께한 어릴 적 사진과 아기자기한 온기로 채워진 다락방에서 춘희는 다정한 호스트처럼 벽에 붙은 낯선 존재를 관심하는 어른이다. 모두가 떠난 집에 혼자인 춘희는 어렸을 때처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다한증 수술비를 모으기 위해 열심히 마늘을 깐다. 전용 고글을 착용하고 핸드메이드로 깐마늘을 담은 파란 비닐봉지를 둘러메고 춘희가 향하는 곳은 사촌오빠 원석의 식당 "광야에서"다. 명문대에 입학했지만 데모에 빠져 집안의 풍파를 전담했던 원석은, 한참만에 돌아와 사랑과 혁명의 실패를 한탄하는 술에 취한 청춘이었다. 한산한 "광야에서" <한겨레>를 읽으며 깐마늘 값 3만 원에 더해 당협위원회에서 춘희의 사이즈에 맞춰 받은 마사이신발을 건네는 그는, 여전히 현실에 안착하지 못한 부유의 느낌을 풍긴다.

 

마사이신발과 육개장사발면 번들을 들고 돌아오던 춘희는 굴다리 아래에서 한 여성 노숙인을 발견한다. 추운 날씨에 얼어죽을까 걱정스레 다가간 기척에 일어난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춘희에게 요구해 받은 사발면을 생으로 씹는다. 어정쩡한 인사를 남기고 갈 길을 가던 춘희는 그의 맨발이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돌아와 마사이신발을 곁에 두고 도망치듯 사라진다. 그리고 어느날 굴다리를 지나다 벼락을 맞고 정신을 잃은 춘희를, 마사이신발을 신은 그가 챙겨준다. 의식이 돌아온 춘희에게 그는 신발을 가리키며 고마움과 만족감을 담아 엄지를 척 들어 보인다.

 

춘희의 일상은 마늘까기 외에 별다른 게 없어 보이고 동선은 마늘을 전달하는 집에서 광야까지의 반복이다. 오가는 길에서 우연히 '고려인 책 보내기 운동본부'를 발견한 춘희는 집에 남겨진 오래된 책들을 챙겨 기증하러 갔다가 같은 건물에서 진행되는 마음 수련 워크숍을 엿보게 된다. 이끌리듯 함께한 그곳에서 시시콜콜한 고민을 터놓는 사람들 틈에 끼어, 말 더듬는 콤플렉스를 고백하는 주황에게 말을 잘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둘을 이어준다. 내세울 게 별로 없는 처지의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또래의 연인들처럼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며 전에 없던 감정에 설레기 시작한다.

 

즈음, 아마도 벼락을 맞은 이후 춘희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는데 '가족'들이 떠난 집에 과거 십대 시절의 춘희가 나타난 것이다. 어린 춘희는, 어쩌면 자기만의 다락에 묻어두었던 상처와 억울함의 기억들을 소환해 직면시킨다. 말없는 춘희가 마음을 담아 만든 예쁜 수수깡집이 외삼촌 가족들로 인해 부서지고 길가에 버려진 일, 수학여행에 가지 못한 춘희에게 유라가 버리다시피 한 김밥을 갖고 학교 대신 혼자 놀이공원과 노래방에 갔던 일, 노래방에서 혼자 방방 뛰며 노래 부르다 상처 입은 머리에 외할머니가 반창고를 붙여줬던 일, 담배 피우는 걸 걸린 유라의 고자질 의심과 자신에게까지 날아온 외삼촌 부부의 불똥. 그것은 재바르게 닦아내지 않아 거실에 자국을 남기고 '가족'들의 신경을 긁었던 발바닥 땀처럼, 눈치 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홀대받았던 춘희의 지난날을 상기시키는 먹먹한 기억들이다.

 

어느날 갑자기 고아가 된 중학생 춘희에게 외삼촌네는 달리 갈 데가 없어 머물 수밖에 없는 곳이었고, 춘희는 그들이 분노나 불화를 표출할 때만 가시화되는 존재였다. 시인을 꿈꾸는 공무원이었던 외삼촌은 아름다운 시어 대신 불쾌한 언어들을 내뱉었고, 무심한 외숙모가 춘희를 동류로 인정하는 때는 외삼촌과 싸운 뒤 감정을 삭이며 담배를 피워 물 때였다. 동갑내기 사촌으로 친구가 될 법도 했을 유라는 시종일관 춘희를 무시하고 적대하며 몰아부쳤고, 그나마 속상한 마음을 내비칠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태어난 외갓집을 차지한 외삼촌네에게 춘희는 감정의 쓰레기통 비슷한 것이었고, 그런 그들에게 제대로 대꾸하거나 항변하지 못한 채 춘희의 마음은 집처럼 낡아갔을 것이다.

 

막바지에 이른 워크숍은 해당 분야의 거장이 독일에서 내한하는 이후의 프로그램을 예고하며 마무리되었다. 춘희의 참가 여부에 따르기로 한 주황과 함께 거액의 참가비를 납부했지만, 이는 사기로 밝혀진다. 둘에게 큰 돈이지만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두 사람은 제법 연인 같은 분위기가 되어 함께 '춘희의 집'으로 향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 아파트로 이사한 외삼촌네 가족은 춘희에게 집을 맡겼지만 소유권은 별개의 일이었다. 사발면을 놓고 주황과 마주앉은 집에 원석이 찾아오고, 얼마 후 외숙모는 춘희에게 집의 처분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한다. 깐마늘을 전하러 간 식당에서 원석은 숨겨왔던 속마음처럼 춘희가 마음대로 바꾼 현관문 열쇠를 언급하며, 투룸 정도 얻을 수 있는 돈을 건넨다.

 

줄곧 라면을 먹던 춘희는 식당에 들어가 혼자 갈비를 시켜 먹는다. 외삼촌네가 자기들끼리 외식을 하던 메뉴였고, 거추장스러운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듯 돈봉투를 건넨 원석에게 오래 묵혀둔 설움과 원망을 속시원히 토로한 다음이었다. 워크숍 사기를 논하며 도움을 주려던 주황에게는 이미 결별을 고했고, 엄마가 태어난 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은둔하던 춘희는 마침내 세상에 홀로 나서야 하는 시점을 맞은 듯하다. 고맙게도, 심란하지만 꿋꿋하게 만찬에 임하는 춘희의 뒷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서비스라며 콜라를 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소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나 역시 그러하지만, 어떤 순간 조용히 건네는 무언가가 생각보다 큰 의미이거나 위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대 시절 춘희와의 마지막 만남은, 무용실에서 나온 중학생 춘희가 어느 건물 뒤편 드럼통에 피워진 불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다. 이유도 잘못도 없이 모두에게 배제되던 십대의 춘희는 다한증이 사라진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버려진 듯 세상에 혼자 남겨진 춘희는 입밖에 내지 못한 절규를 손바닥에 새겼다. 운명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듯 손금보다 두텁게 도드라진 상처가 인장처럼 남았지만, 어른이 된 춘희의 삶은 마음을 닫은 만큼 위축되고 쪼그라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떠밀린 곳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공간처럼도 보였던 다락방은, 안온하지만 깨고 나가야만 하는 모든 것이 집약된 알이었는지도. 어찌할 줄 몰랐던 어린 날의 자신을 보듬어 주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화해하며, 홀가분하게 다락방을 떠나온 춘희는 생각한다. "태어나길 잘했어."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영화는 말한다. "모두들, 태어나길 잘했어.”

 

잔잔한 전개였지만 캐릭터도 상황도 꽤 극단적이어서, 구체적이고 소소하게 사실감을 높이는 요소와 장치 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라기보다 (춘희에게 세라와 같은 행운이 당도하지는 않지만) 소공녀 모티브를 21세기 한국으로 가져온 우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보잘 것 없고 작은 것들에 관심하며 은은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다가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생을 긍정하며 환히 웃는 모습에, 개연성 같은 걸 거론하기는 민망한 일이니 맑고 착한 영화였다고 말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린피그의 황미영 배우가 반가웠지만 외모의 개성이 전형적으로 소비되는 느낌에, 노숙인 설정 자체가 클리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아쉬웠다. 주황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태평소 연주는 웃기기보다 좀 아연했는데, 너무 익숙한 어눌하고 어정쩡한 캐릭터에 억지스럽게 부여한 에피소드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과잉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석의 사랑과 혁명과 ‘당협위원회’와 <한겨레>, 폭력적인 외삼촌의 ‘대문자 시’ 같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세계의 실패와 춘희의 세계가 대비되는 점이 차라리 인상적이었고, 버스 기사님들끼리 인사하는 거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던가 했던 대사가 나 역시 자주 그랬던 터라 기억에 남았다. 다한증은 없지만 춘희 만큼이나 폐쇄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작년부터 약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생일에 맞춤한 영화라고 생각해 선택했는데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내가 너무 늙었구나 생각했다. 엔딩 크레딧 소도구 협찬에 뜬 부안마늘(부안시청)이 눈에 들어왔고. 뭐랄까, 매료되는 것과 응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임을 확인한 영화였다.


4/18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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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3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재기는 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 중이다. 함께 살던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중학생 아들을 홀로 키우는 사촌 누나 은주가 틈날 때마다 병원에 방문해 재기를 챙기고 필요한 일들을 돕는다. 퇴원을 앞두고 장애등급을 받기 위해 검사에 성심껏 응한 결과 경증인 5급을 받았다. 2미터 정도 혼자 걸을 수 있고 통증을 참으며 겨우 팔을 들어올릴 수 있는 재기는 누가 봐도 중증장애인이지만, 등급 판정 결과는 보수적이고 임의적이다. 6인실 맞은 편 침상의 봉수는, 재기의 소변통을 비워주고 커튼을 쳐줄 만큼 사지의 움직임이 자유롭지만 문병 온 병호의 조언을 이행해 2급을 받았다. 순진하고 정직한 재기와 은주에게 장애인의 삶은 온통 부딪치며 깨우쳐야 하는 신세계다. 비장애인으로 살 때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던 그 세계의 벽은 높고 지원 정책은 미로와 요철로 이루어져 있다.

 

건장한 체격의 재기가 앉은 휠체어를 밀어주는 은주는 가녀리고, 힘겨워 보인다. 전동휠체어를 구하기 위해 방문한 공단에서, 장애인을 구인하는 회사에서 재기는 5급이어서, 중증이어서 가로막힌다. '중증'과 '5급'은 장애인이 된 재기가 갇혀버린 견고한 스펙트럼이다. 단체를 통해 전동휠체어를 구할 수 있게 된 재기는 '달리는 2급' 봉수 덕분에 무사히 전동휠체어를 인계받고, 면접을 보러 간 회사에서 마주친 병호 덕분에 장애등급 재판정을 위한 소송과 장애인 운동선수로 등록할 수 있는 론볼을 시작한다. 장애인 지원 정책에 문외한인 재기는 병호의 접근을 단비 같은 호의로 받아들이며 그를 따른다.

 

병호는 각종 장애인 지원 사업과 관련 행정에 빠삭한 브로커이자 사기꾼이며 장애인 당사자다. 장애인 고용으로 지원을 받는 회사에도, 활동보조인을 중계하는 센터에도, 론볼 선수들의 훈련장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입성과 표정을 바꾸며 재기와 같은 중도 장애인들을 돕는 척,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한다. 장애등급 재판정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사무실과 뒷돈을 거래하고, 봉수를 비롯한 적잖은 장애인들에게 친근하지만 권위적으로 군림하며 장애인 지원 생태계의 포식자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 민낯을 알 리 없는 재기는 병호를 마냥 고맙게 여기고 의지하면서, 은행 대출을 받아 소송을 시작하고 5급은 이용할 수 없는 장콜을 타는 대가로 택시비를 내고 그의 밥과 술을 책임진다.

 

새로운 등급과 삶을 꿈꾸는 재기에게 병호는 유일한 정보제공자이자 믿을 구석이며, 막막한 장애인으로서 만난 '든든한 형'이었다. '5급의 장벽'을 넘는 것이 급선무였던 재기에게는 다가온 구원의 손길을 의심하거나 달리 볼 여유라는 게 없었을 것이고, 장애인 지원 사업판에서 닳고 닳은 병호의 복마전은 그런 절실함을 자양분 삼아 지속되었을 테다. 엄마가 남겨준 집 때문에 수급권자가 될 수 없는 재기의 사정도, 장애인이 된 재기가 살 수 없는 상가주택에서 아들과 살고 있는 은주의 사정도 갈수록 나빠진다. 가진 것 없고 영악하지도 못한 사촌 남매는 할 수 있는 한 서로를 도우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다. 밀린 월세를 내라며 은주가 전한 돈봉투마저 울며겨자먹기로 병호에게 '빌려준' 재기는 설상가상으로 대출이 잘못되었다며 즉시 상환을 요구하는 은행의 연락을 받는다.

 

와중에 병호는 재기네를 생각하는 척 은주에게 관심을 보이며 활동보조인 자리를 알선한다. 면접이랍시고 단골식당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은주와 마주앉은 병호는, 병원에서 보았던 낡은 가방을 언급하며 선물을 건넨다. 거리를 두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던 은주가 술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정신을 차리는 사이, 병호는 어두운 복도에 유령처럼 나타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밤거리로 뛰쳐나와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연락을 외면하지 못하고 나간 식당에서 아무렇지 않게 삼계탕을 먹는 병호와 갈등 끝에 수저를 드는 은주의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밀고 속이 터지는 장면이었다. 자신에게 지워진 생계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하는 은주에게는, 없었던 셈 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는 곤혹과 수치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활동보조인으로서 병호의 집을 치우던 은주는 쓰레기통에서 자신이 재기에게 건넸던 빈 돈봉투를 발견한다.

 

재기가 기각 결과를 전달받은 곳은 그들의 단골식당, 병호가 제맘대로 재기가 쏜다며 소집한 론볼 선수들의 회식 자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명확해지는 병호의 의도를 감지하면서도 차마 따지거나 저항할 수 없었던 재기는, 제 속에 쌓이는 울분을 술로 풀거나 지팡이를 지원 받으러 간 보건소에서 폭발시키며 겨우 버텨왔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하지만 패소를 병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걸 아는 재기는 그에게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은행을 거친 것도 차용증을 써준 것도 아닌, 갈취하다시피 봉투째 받아간 돈은 없던 일이 된다. 지갑 사이에서, 안주머니에서 병호가 들고 현금을 꺼내쓰던 재기의 돈봉투는 영화에서 수차례 보여졌지만, 적반하장으로 욕설을 퍼붓던 그는 재기에게 만 원짜리들을 던지고는 무리를 이끌고 나간다. 억울하고 어안이 벙벙한 재기는 식당 주인에게 청해 바닥에 떨어진 만 원 짜리들을 챙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중증장애인 등급이 필요하다고, 법원에 출석해 진술하는 재기의 모습과 목소리가 영화의 인트로와 엔딩에서 반복된다. 애초에 제대로 된 등급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면, 등급이나 판정 따위 없이 장애인에게 필요한 지원이 적절히 이루어지는 세상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많은 일들이 그 사이에 놓여 있다. 사고 전 엄마와 재기가 살았던 상가주택의 가파르고 높은 계단 위에서 건물 입구에 있는 재기를 내려다보는 시점샷이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 같다. 중증장애인이 되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오르내렸을, 엄마의 유산이자 사촌 누나 은주가 살아가는 그 집은 휠체어를 탄 재기에게 접근 불가능한 곳이 되었다. 영화는 재기의 등급판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대신, 엔딩 크레딧의 끝줄에 "모든 재기의 자립을 꿈꾸며"라는 바람을 새겨놓았다. 마음이 먹먹해졌지만, 카메라 밖 재기의 삶이 그 험난함에서 쉽게 탈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익숙했던 세상을 완전히 새로 배워야 하는 중도 장애인의 막막함을 영화는 정면으로 보여준다. 초반엔 헛웃음이 나오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재기를 조여오는 상황들과 고병호의 빌런 캐릭터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중반부터는 내내 소름이 끼치고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은주에게 접근하는 그의 모습은 전혀 자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음에도 공포감을 동반하는 것이었고, “달리는 2급”을 창조하고 “모든 재기의 자립”을 먹이 삼는 빌런의 현현이 섬뜩했다. 병호의 전사는 나오지 않지만 어디서든 유려하게 휠체어를 굴리는 모습이, 까다롭고 복잡한 정책의 빈틈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의 구력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여 심란해지기도 했다.

 

왜인지 나는 예매할 때 다큐라고 생각했고, 재판정에 선 재기를 담은 첫 화면의 드라마틱함에 약간 당황했다. 배우들이 모두 초면이어서 병실 장면에서도 내심 의아했고 재기를 연기하는 배우는 장애인일까 비장애인일까 혼자 혼란스러웠다. 잠시 갸웃하다 알아챘지만,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었는데 다큐라고 생각했던 건 '이런' 소재로 극영화가 만들어질 리 없다는 무의식의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별의별 소재와 주제의 영화들이 다 만들어지는데 대략의 소개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나의 비장애중심주의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머쓱하지만 이렇게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깨우치게 됐다는 걸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것 같다.

 

영화는 제도의 허점과 그 빈틈을 무대로 먹이사슬처럼 엮인 장애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책은 느닷없이 닥친 삶의 격변에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지원을 선별하고 차등화한다. 중도장애인이 된 재기가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계기마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엄정한 탁상행정과 지독한 현실의 괴리다. 그 사이를 메우는 썩은 동아줄과 편법의 희망고문을 발신하는 것은 병호의 얼굴을 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디테일과 설득력으로 무장한 영화의 박진감이 놀라웠는데, 찾아 보니 두 명의 감독 중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비장애인인 다른 감독과 함께 균형을 잡으며 연출한 작품이라고 한다. 어눌하고 어수룩한 재기와 팔색조처럼 능수능란한 병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좋았고, 직접적인 주장 대신 개인의 일상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현실의 모순을 부각시키는 점도 좋았다.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향한 곳곳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하나의 힘으로 모아져 변화가 앞당겨질 수 있다면 좋겠다. 


4/18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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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2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요란한 기상 알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하는 남자의 아침은 쌩난리다.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의 온수기는 최고 온도로 돌아가 맨몸을 데일 뻔하고, 다림질을 하던 셔츠는 과열된 다리미에 까맣게 눌어 붙고, 집안 곳곳의 모든 것이 엉망으로 삐걱댄다. 분주한 준비 과정마다 수시로 무언가 어그러지는 탓에 무시로 고성을 질러대던 남자는 현관문을 나서려던 순간 바닥에 쓰러진다. 경쾌하고 빠른 리듬으로 남자의 동선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갑자기 쓰러져 미동도 없는 남자를 그대로 남겨둔 채 오프닝을 마치고, 시내의 한 서점으로 들어선다.

 

글로리아는 부분적이거나 엉뚱한 정보로 책을 찾는 이들을 성심껏 돕는 유능한 서점원이자 책에 진심인 싱글 여성이다. 꽤 너른 이층 규모의 서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러 신기할 만큼 다양한 요구를 하고, 연애를 쉬는 법 없는 친한 동료 샌드라는 글로리아 곁을 맴돌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서점의 매니저로 사내 연애를 불허하는 원칙주의자 '왕재수'는 감시 카메라처럼 그들 주변을 서성이며 일거수일투족에 꼬투리를 잡아 경고를 날린다. 가득 들어찬 책들과 적당한 활기로 채워진 서점은 글로리아에게 맞춤한 일터지만 그는 어딘가 권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다정하게 서점문을 나서는 커플에게 다가서는 복고풍 사진가와 촬영에 응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글로리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글로리아는 하루도 빠짐없이 위층에서 들려오는 새벽의 교성에 잠을 설치느라 창백한 안색으로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도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멈추지 않는 그들을 찾아가 정중하게 층간소음을 호소하지만, 천장의 조명이 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새벽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글로리아는 이사를 결심하고, 멋진 뷰를 가진 아파트는 세를 놓자마자 바로 계약이 된다. 샌드라로부터 만나는 남자의 사촌이 얼마 전 돌연사했고 유서 처리 문제로 계약서 없이 입주할 믿을 만한 세입자를 구한다는 정보를 접한 글로리아는 꺼림직함을 뒤로 하고 이사를 감행한다. 

 

이사를 도운 샌드라와 함께 간 파티에서 어줍잖게 접근하는 이성에게 심드렁함을 느끼고 따분한 시간을 보낸 뒤 귀가한 글로리아는 새 집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얼마 전까지 살았던 누군가 세상을 떠난 집은 스산한 두려움을 선사하고, 글로리아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주인이었을 또래 남성의 사진 액자를 서랍에 잘 넣어두고 새로운 환경과 숙면에 대한 기대로 잠자리에 든다. 고요한 와중에 꺼져 있던 텔레비전이 갑자기 켜지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침실에 감도는 듯하더니 이불 속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감각에 경악한 글로리아는, 얼마 후 난생처음 지극한 오르가슴을 느낀다. 그날부터 시작된 비가시적인 존재와의 동거는 글로리아의 굳은 얼굴을 환히 밝히고 권태롭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퇴근 후 돌아간 집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유령이 있고 그의 기운 덕인지 전선을 연결하지 않아도 전자제품들이 작동한다. 유쾌하게 잔을 부딪히고 단짝처럼 온갖 이야기들을 나누고 집안 곳곳에서 궁극의 섹스를 나누는 둘은 세상에 다시 없을 파트너다. 밤마다 내지르는 교성에 깨어난 이웃 노부부가 살피러 내려올 정도로 엄청난 경험을 반복하며, 글로리아는 황홀경에 젖는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은 서점에 놓인 환상과 관련한 키워드의 책들로 시선을 잡아끌지만, 글로리아는 전에 없던 행복감으로 충만하다. 불가해하고도 벅찬 감정을 부채질하듯 스트린버그의 신간을 찾으며 전화번호를 청하는 고객 앙헬의 접근에 설레고, 이를 그냥 넘길 리 없는 '왕재수'의 경고는 가볍게 무시된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상대의 존재를 확신하는 글로리아는 심령술사를 찾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털어놓고, 그가 안내하는 대로 상대를 기다린다. 글로리아의 간절함은 상대의 응답을 불러내고, 그는 거짓말처럼 어느 아침 죽음을 맞고 아직 집안을 맴도는 단테였다. 즈음 스트린버그의 신간이 입고되어 연락한 앙헬과 데이트 끝에 함께 집으로 온 글로리아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거울에 금이 가고 창문이 덜컹거리는 단테의 질투를 알아채고 앙헬을 돌려보낸다. 현실보다 환상의 사랑을 택할 만큼 단테와의 이상적인 관계에 매혹된 글로리아, 그러나 얼마 후 탁자 위 가루에 남겨진 "때가 됐어요, 당신의 영원한 단테로부터"라는 메시지를 접한다. 글로리아가 확인하자 글씨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단테의 영혼은 자취를 감춘다.

 

단테가 떠나자 글로리아는 사랑을 몰랐던 때보다 더 깊은 절망과 허무에 빠진다. 서점을 결근하고, 불면증에 시달릴 때도 먹지 않았던 수면제로 자살을 기도한다. 의식 불명 상태의 글로리아는 구름 위 낯선 세계에 당도해 다른 세계의 광경을 목격한다. 죽은 이들이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플랫폼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오가며 차례를 기다리고, 좋은 조건의 부모를 알선하는 브로커도 존재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조우한 단테는, 글로리아가 유령으로서 만났던 완벽한 소울메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매우 현실적이고 주도면밀한 캐릭터다. 이웃 노인들이 발견한 덕에 간신히 살아난 글로리아는 영혼을 뒤흔들었던 사랑과 환상의 롤러코스터에서 맥없이 하차한다. 

 

어느 날 글로리아는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단테를 발견하고 그를 좇는다. 바뀐 신호를 못 보고 차에 치일 뻔한 그를 구해준 이는 구스타보, 글로리아와 샌드라의 대화 속 '왕재수'다. 처음으로 서점 밖에서 마주한 둘, 상대에 대한 무감정 덕분에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늘어놓는 글로리아와 그에 호응하는 구스타보의 대화는 문학과 책에 대한 관심과 교양의 공감대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내용이다. 어릴 적부터 책에서 이상형을 찾아온 글로리아의 사랑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늘 곁을 맴돌며 글로리아를 주시했던 구스타보는 사내 연애 금지 원칙으로 억누르던 자신의 마음을 이제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래 어긋났던 눈길을 마주하며 커플이 되었고, 원칙을 존중하듯 글로리아는 서점 가까이에 자신만의 작은 책방 주인이 되어 책을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주인공이 서점원이라는 점과 쉽게 접할 수 없는 우루과이 영화라는 점에 끌려 선택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는데 예상 외로 즐겁게 보고 나왔다. 정신없는 헛소동의 아침으로 시작되어 농담처럼 죽음을 맞은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오프닝이 이채로웠는데, 인물과 이야기를 연결하는 솜씨와 황당무계하지만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가득한 영화였다. 과하지 않게 센스 넘치는 대사들과 폭발하는 음악과 음향이 어우러진 리드미컬한 편집이 조화로웠고, 간간이 보이는 우루과이 시내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모태솔로' 글로리아의 사랑 찾기가 몸과 마음, 이상과 현실 등의 이분법적인 분리와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으로 그려진 덕에 오르가슴을 느끼는 장면이나 노골적으로 성애에 집착하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했는데, 불편하기보다는 헛웃음이 났고 성에 개방적인 사회의 반영이겠다 싶었다.

 

지적이고 침착한 면모와 과장된 표정과 모션을 천연덕스럽게 오가는 글로리아와 시트콤의 감초 역할 같은 생활연기가 찰떡이었던 샌드라를 비롯해 이글이글한 눈에 느끼함을 장착한 앙헬, 독보적인 존재감의 레즈비언 여인과 심령술사 등 짧은 등장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모든 배우가 낯설었지만 분명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한 덕에 금세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고, 후반부 구스타보의 등장부터는 매우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르지만 억지스럽다기보다 편안한 전개로 다가왔다. 복고풍 사진가와 저 세계 브로커의 관계를 환기하는 깨알 디테일이 재미있었고, 잠시 등장했던 인물까지 망라한 모든 배우들의 장면과 이름에 간혹 엔지 장면의 웃음까지 담아낸 다정한 엔딩 타이틀에서는 따뜻한 배려와 성의가 느껴졌다. 로라 브래니건의 "글로리아"는 경쾌하고 유쾌한 영화의 화룡점정이었다. 낯선 나라의 작품이어서 배가되는 호감도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매력도 엄청났다. 다양한 나라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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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1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슬람 음악이 흐르는 서구식 가정집의 실내, 주방에서 차를 타는 아내와 방 안에서 띄엄띄엄 대화를 나누던 남편이 잠시 후 돌연사한다. 무슬림 전통 복장을 한 아내와 조문객들의 장례가 끝나고, 홀로 남아 유품을 살피던 아내는 남편의 지갑에서 나온 낯선 여인의 신분증을 발견한다. 영국의 무슬림인 파히마이자 메리, 아내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온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혼란에 휩싸인다. 남편의 지갑 속에서 존재를 드러낸 여인이 몰고온 불안감과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메리는 남편의 전화기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를 확인하고, 신분증 속 프랑스 주소지를 향해 떠난다. 

남편 아메드는 항해사였다. 오후 4시, 해협을 건너며 곧 만나게 될 아내에게 다정하고 유쾌하게 인사를 전하는 전화기 속 남편의 음성을 메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반복해 듣는다. 메리와 아메드의 집은 도버 해협 건너 영국에 있다.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 칼레 즈음에 신분증 속 그녀, 즈느비에브의 집이 있다. 죽은 남편의 숨겨둔 연인을 찾아 나선 길은 황망하고, 육중한 몸집에 히잡을 두른 메리는 지치고 힘겨워 보인다. 염탐하듯 집 앞을 서성이다 마주친 메리를, 즈느비에브는 청소업체가 보낸 노동자로 착각해 집에 들인다. 상실의 아픔을 추스릴 새 없이 낯선 곳에 당도한 메리는, 얼떨결에 이사를 앞둔 즈느비에브의 집 정리를 도우며 아메드가 숨겼던 다른 세상을 엿보기 시작한다.


즈느비에브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교사다. 메리는 맡겨진 일을 하면서 곁눈질로 즈느비에브를 관찰하고 아메드의 흔적을 유심히 살핀다. 아메드와 즈느비에브의 관계를 직접 확인하고 배신감으로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는 메리 앞에 그들의 아들 솔로몬이 등장한다. 아찔한 충격을 삭이며 일을 마친 메리는 망연자실한 채 해변에 누워 파도에 몸을 맡긴다. 해협의 양안을 오가며 감쪽같이 두 세계를 살았던 아메드의 진실을 직면하고 메리는 무너져내렸다. 십수 년을 모른 채 살았던 배신에 찢어진 메리의 마음이 눈물로 폭발한다.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메리는 청소노동자로 즈느비에브의 집을 드나든다. 묵은 짐들을 처분하며 모자는 예전의 홈비디오를 틀어보기도 하고 그속에는 바닷가에서 단란한 가장의 모습을 한 아메드와 그들이 있다. 십대인 솔로몬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고, 가끔씩 집에 오는 아빠를 그리워한다. 메리의 일 솜씨가 마음에 든 즈느비에브는 집 열쇠를 맡기고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기 시작한다. 유부남인 걸 알았지만 사랑했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즈느비에브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며 살고 있다. 아메드의 아내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단속하며 살았지만, 아빠의 부재 속에 성장한 아들의 외로움과 혼혈로서 겪는 배제는 어쩔 수 없다. 즈느비에브와 솔로몬은 며칠간의 이사 준비가 마무리되는 대로 아메드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몰래 들어간 메리는 즈느비에브의 방에서 화장대를 살피고 그들의 침대에 누워본다. 친구와 함께 들어온 솔로몬의 기척에 놀란 메리는 조심스레 집을 나오지만, 자신의 방에서 친구와 키스하며 뒹굴다 문소리에 뒤따라나온 솔로몬에게 발각된다. 엄마가 열쇠를 줬고 놓고 간 가방을 가지러 왔다고 둘러대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돌아선 메리와 솔로몬 사이에 어색한 비밀이 생겼다. 메리의 일은 계속되고, 비밀을 나누게 된 솔로몬은 무심한 듯 자신의 어릴 적 사랑과 파키스탄 이야기를 꺼내는 메리에게서 존중감과 여릿한 친밀감을 느낀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과 자신에게도 들려온 연애 소문으로 엄마에 대한 반감과 불만에 가득했던 솔로몬은 잠시나마 착하고 쓸쓸한 소년의 얼굴이 된다.

즈음 아메드의 전화기에 이어지는 발신자 'G' 즈느비에브의 부재중 전화를 그저 바라보던 메리는, 연민과 안쓰러움에 아메드인 척 솔로몬과 문자를 주고받는다. 이삿짐 정리가 끝나고 새 집의 정리도 부탁한 즈느비에브가 외출한 뒤 솔로몬이 돌아오자, 메리는 싸놓은 짐 상자를 풀어 파키스탄 음식을 만들고 손으로 먹는 법을 알려주며 함께 식사를 한다. 엄마가 밉고 집이 싫은 솔로몬에게 아빠는 가본 적 없는 고향처럼 멀고도 그리운 존재다. 아빠를 찾으려다 도버에서 길을 잃었던, 아빠와 살고 싶어하는 솔로몬과 메리의 대화는 즈느비에브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분위기는 어색해진다. 금세 시작된 모자의 언쟁이 격화되고 분노를 참지 못한 솔로몬이 즈느비에브의 얼굴에 침을 뱉고, 깜짝 놀란 메리는 솔로몬의 뺨을 때린다. 솔로몬은 자리를 뛰쳐나가고 흥분한 즈느비에브는 메리를 몰아붙인다.

다음 날, 아메드 없이 새 집으로 이사한 즈느비에브의 집에 메리가 찾아간다. 전날의 불쾌함이 가시지 않은 즈느비에브와 솔로몬은 메리를 백안시하지만,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는 메리는 그들에게 아메드는 죽었고 자신이 파히마라고 사실을 이야기한다. 청천벽력 같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자는 메리를 내치고 문을 걸어잠근다. 메리는 혼자인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즈느비에브와 솔로몬이 영국으로 건너와 아메드의 무덤을 확인하고 메리의 집에 방문한다. 세 사람은 말없이 자신들을 이어준 아메드의 부재를 살핀다. 솔로몬이 찾아 플레이한 옛 카세트테이프에서 아메드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메리는 그의 유품인 파키스탄 전통 모자를 솔로몬에게 건넨다. 메리가 아메드를 기다리던 해협의 언덕에 나란히 선 세 사람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평온한 풍경 속에 묻힐 때까지 카메라가 줌 아웃되며 영화는 끝난다.


메리와 즈느비에브의 섬세한 감정선과 도버해협 양안의 풍경, 전반적인 분위기와 톤은 마음에 들었지만 영화에 바쳐진 무구한 찬사들에 마냥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영화는 마치 '아메드는 생각지 마시고 두 여인의 애틋한 감정과 화해(?)에 주목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태의 원인제공자인 아메드가 휘발됨으로써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남은 이들에게만 갈등과 고통이 전가되는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부재함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존재하는 아메드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가해자 그룹인 아메드와 즈느비에브 그리고 피해자인 메리의 관계는 역전된다. 

어릴 적 사랑에 빠져 카세트테이프에 마음을 녹음한 아메드의 목소리를 듣고 영국과 파키스탄에서 같은 달을 바라보았던 메리는, 결혼과 함께 종교를 바꾸고 그의 고향인 파키스탄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익히면서 자신의 삶을 바꿨다. 태어난 아이는 아주 일찍 죽었고 부부는 상실을 견디며 함께 살아왔지만, 메리는 아주 오랫동안 기만을 당한 셈이다. 매순간 가슴 졸이며 즈느비에브를 탐색하고 솔로몬을 연민하는 메리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두 사람 몫의 차를 타고 아메드가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 즈느비에브가 버린 아메드의 셔츠들을 챙겨와 자신이 아메드를 더 잘 안다는 무의미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전화기 속 그의 메시지가 영구삭제되자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른다. 답답하고 부당하게 느껴졌다.

배신감과 원망, 그리움과 슬픔, 질투가 뒤범벅된 마음을 홀로 감당하는 메리를 지켜보는 일은 공감보다는 안타까움을 불러왔고, 방황하는 솔로몬의 모습은 어른들의 '사랑'에 희생된 존재로 보였다. 물론 어딘가에는 이보다 더한 사연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마음을 따라가는 우아한 영화의 모든 것을 촉발한 아메드의 죽음과 침묵이 너무 무책임하고 안이한 방식으로 드라마틱했다고 느껴졌다. 영화를 본 후에야 갓난 아기일 때 죽은 누이에 대한 애도와, 종교를 바꾸면서까지 결혼한 부모, 무슬림 동성애자인 감독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고 아메드와 즈느비에브의 관계는 픽션이라는 걸 알았다. 허구의 서사를 문제 삼는 게 민망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제 위에 세워진 견고하고 깊은 감정의 집 같은 영화였고, 어줍잖게도 어떤 '윤리'에 대해서도 생각이 오래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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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01



다섯 명의 여동생들이 북적이는 가난한 집에서, 무시로 떠오르는 갖가지 영감들을 시도로 옮기는 데에 열중하면서도 신사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20대 루이스 웨인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황소를 자세히 그리려다 공격을 받은 엔도버 농업박람회에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엉망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기차 안에서도 동물 데생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윌리엄경의 <일러스트레이티드 오브 런던> 삽화 의뢰는 거절하고, 자신만의 오페라를 완성해 음악가에게 선보였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듯 보이는 걸음걸이와 경직된 표정은 그를 뭔가에 미쳐있는 예술가처럼 느껴지게 만들지만, 복싱에도 열심인 의외의 모습도 비춰진다.

분주하게 내면의 열정과 에너지를 좇던 그는, 여동생들의 교육을 위해 들인 가정교사를 반대하지만 곧 포기하고 어딘가 통하는 면이 있는 가정교사 에밀리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미천한 계급 출신에 10살 연상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사랑을 키운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구순열을 가리기 위해 길렀던 수염을 면도하고 에밀리 앞에 서고, 두 사람은 가족의 우려와 주변의 수근거림 속에 결혼해 집을 떠난다. 하지만 에밀리와의 행복한 삶은 3년에 불과했고, 유방암으로 떠난 아내의 빈 자리는 어느 비 오는 날 집 근처에서 구조해 가족이 된 고양이 피터가 대신했다. 결혼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프리랜서 화가로 일하며 원가족을 부양했던 그에게 어머니와 다섯 동생은, 그가 시련과 절망을 극복하는 데에 별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 원가족은 심리적 안정감이나 정서적 유대감을 기대할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굴레였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고향이었던 것 같다.

루이스 웨인은 영화의 원제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처럼 당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전기에 관심이 많았고, 전기를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여겨 실제 발명에 몰두하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엉뚱하고 편집증적인 괴짜였다는 그의 남다른 언행은 영화에서 일관되게 재현되는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환영을 보거나 공황 장애 같은 증상에 시달렸던 경험 역시 섬세하게 그려진다. 물이 차오른 실내에서 고립되어 무기력해진 모습이나 어지럽게 흔들리거나 사납게 시야를 스치는 사물 등의 표현은 그가 보고 느끼는 감각적 공포를 그대로 전하면서도, 그의 불안한 정신 세계와 말년에 앓았다는 조현병을 암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에밀리와 피터를 통해 그리게 된 고양이 그림의 성공으로 대중적 열광을 받기도 하고,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한 동물이었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큰 각광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그는 위태로워 보였다.

어린 시절 내면의 괴로움을 자신만의 일기로 남기며 삭였던 그를 이해했던 에밀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가 물려준 숄의 한 조각을 찢어 그 일기장에 꽂아두었다. 피터와 함께 에밀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그림을 그렸던 루이스 웨인은 세월이 흘러 피터마저 떠나자 다시 한 번 무너진다. 그럼에도 그는 에밀리가 남긴 “기억해. 세상은 아름다워, 당신이 있어서 그걸 알게 됐어. 사람들에게 전해야 해.”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데, 삶과 예술의 괴리를 홀로 감당하며 그의 영혼은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 영화가 전기적 사실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했던 가족들 외에는 그의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삶이 괴로울수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감동받아 지면을 내어주고 오랫동안 조용히 지지했던 윌리엄경과 빈곤자 병동에 머물던 말년의 그를 안락한 병원으로 옮겨준 댄 라이더라도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루이스 웨인이라는 존재도 신기했지만, 그를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더 인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직업 배우가 캐릭터에 맞는 새로운 연기를 선보이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이전에 봤던 [차일드 인 타임], [모리타니안], [파워 오브 도그] 같은 영화들을 생각하면 사진과 기록으로만 남은 특별한 실존 인물 그 자체로 거듭난 모습이 신기하고 좀 감동적이기도 했다. 루이스 웨인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지만 프레임 속 그를 둘러싼 주변의 반응을 통해 시대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루이스 웨인이 경험하는 불가해한 감각의 일부라도 관객에게 함께 전달함으로써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이해시키고자 노력하는 감독의 마음이 영화에 담겼던 것 같다. 영화 이전에 루이스 웨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거나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선물처럼 느껴지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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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4. 18. 22:5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진작가 야니스는 화보 촬영을 진행한 법의학 인류학자 아르투로에게 고향의 유해 발굴과 관련한 도움을 청한다. 할머니 손에 자란 야니스는 어려서부터 스페인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증조부와 고향 마을의 상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후대로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증조부는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과 희생자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일일이 기록했으나 자신도 같은 운명에 처했고, 할머니는 그 증거를 손녀에게 전하고 세상을 떠났다. 야니스의 집에서 옛 자료들을 확인한 아르투로는 유해 발굴 신청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도움을 약속하고, 이를 계기로 친밀해진 둘은 연인이 된다.

얼마 후 야니스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적지 않은 나이에 찾아온 생명에 기쁨을 느낀 야니스와 달리, 아내가 암투병 중인 아르투로는 난처함을 표한다. 아르투로에게 결별을 고한 야니스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듯 싱글맘으로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로 결심한다. 출산을 위해 입원한 2인실 옆 침대에는 앳된 아나가 있다. 야니스에게는 사업을 하는 오랜 친구 안젤라가, 야나에게는 배우로 활동 중인 엄마가 이따금 찾아와 살피지만 출산을 앞둔 두 사람에게는 같은 처지로서 나누는 대화와 북돋움이 큰 위로다. 둘은 같은 날 딸을 낳았고 아기들은 건강 문제로 며칠간 신생아 관찰실에 머문다. 입원 기간 동안 가까워진 야니스와 아나는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한 뒤 퇴원한다.

야니스와 아나는 각각 세실리아와 아니타의 엄마로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한다. 갓난아기가 선사하는 경이로움과 행복감에 충만한 날들이지만 야니스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육아를 위해 채용한 어린 보모는 미덥지 않고, 집으로 찾아와 아기를 본 아르투로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내뱉는다. 아나는 부모가 이혼한 뒤 아빠의 집에서 살다가 강간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됐고, 출산과 함께 공연으로 바쁜 엄마의 집에 얹혀 살면서 아니타를 키우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니타에게 전념하며 엄마의 삶에 익숙해지는 중이지만, 데면데면했던 엄마와의 관계도 딸과 손녀보다 커리어를 중요시하는 엄마에 대한 마음의 벽도 여전하다.

세실리아는 야니스와 아르투로와는 달리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졌다. 아르투로의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야니스는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고 자신이 친모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확인한다. 병원에서 아기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아나를 떠올리지만 섣불리 입 밖에 낼 수 없고, 괴로운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누르지만 아르투로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후에 걸려온 그의 전화에도 잘못 걸었다고 둘러대고 만 야니스는 혼자만의 비밀을 고통스럽게 감내하며,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스러운 세실리아와 함께한다.

즈음 무성의한 보모를 내보내고 아이를 베이비시터의 집에 맡기며 일하던 야니스는 카페에서 우연히 아나를 조우한다. 병원에서와 달리 짧은 염색 머리를 한 아나는 야니스의 집에서 그간 일어난 일들을 털어 놓는다. 아무런 전조 증상 없던 아니타가 얼마 전 죽었고, 희박한 확률의 유아 돌연사였다. 아이를 잃고 우울증에 빠진 자신을 두고 엄마는 다른 지방으로 공연을 떠났고, 아나는 집을 나와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야니스는 함께 지내면서 세실리아를 돌봐달라고 제안하고 아나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세실리아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 야니스는 아나에게도 검체를 체취해 검사를 의뢰하고, 아나가 세실리아의 친모라는 결과를 확인한다.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외롭게 자란 아나는, 어린 나이에 험한 일을 겪고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데다 아이를 잃기까지 했지만 가족으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이나 정서적 위안을 받지 못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지독한 일들을 연쇄적으로 경험하며 불안하게 방황하는 아나에게,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며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야니스는 고맙고 소중한 존재로 다가온다. 출산 경험을 공유했던 두 사람은 병원에서와는 다른 차원으로 가까워지며 성애를 나누는 사이가 되지만, 아나를 기만하고 있다는 무거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야니스가 사실을 고백하자 아나는 세실리아를 데리고 떠난다.

고향 마을의 유해 발굴 작업과 관련해 야니스는 책임자인 아르투로와 재회한다. 그 사이 아르투로는 아내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이혼했고 야니스는 혼자가 되었다. 유해 발굴 전 조사를 위해 찾은 고향 마을 사람들은 야니스를 다정히 환대하며 학살당한 가족의 사연을 들려주고, 둘은 야니스의 고향 집에서 다시 연인이 된다. 오랜만에 찾은 그곳은 할머니와 엄마가 태어나고 자신이 자란 집이며, 처형당할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는 대신 가족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로 결심한 증조부가 끌려간 곳이다. 사회와 가족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오랜 집에서, 타인의 품에서 너무 이르게 세상을 떠난 아니타의 동생이 잉태된다.

잡초가 무성한 너른 들판의 한 구역에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유골들이 수습되고, 마을 사람들이 언급했던 희생자들의 결혼반지와 딸랑이, 하나의 의안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땅 속에서 마구잡이로 엉켜 수십 년이 지난 백골들이 대략이나마 사람의 형상으로 눕혀지고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내리쬐는 햇살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온다. 처형 당한 조상들의 영정을 필두로 행진하는 이들 중에는 멋모르는 세실리아와 얼마 전까지도 역사의 진실에 무지했던 아나도 있다. 잊지 않고 되살려낸 역사의 현장에 당도한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는 먹먹한 울림이 감돈다. 영화는 라틴 아메리카의 진보적 작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침묵의 역사란 없다"라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화보 촬영으로 시작된 영화는 곧 야니스의 언급을 통해 흑백 사진으로 남은 근선조대의 역사와 연결되고 유해 발굴, 학살, 팔랑헤당 같은 단어들을 발화한다. 제목과 주요 정보가 두 엄마와 두 아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영화를 감싸고 또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의 등장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베드신에 이어 임신한 야니스의 병원까지 속도감 넘치는 카메라를 따라가는 초반부는, 인식 차원의 구분과 달리 경계없이 뭉뚱그려져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와 현재, 공과 사, 역사와 현실 등의 불가분한 혼재를 상징하듯 압축적이다. 몰아치는 인트로를 넘어 야니스와 아나가 한 병실에 입원한 병원에서부터, 차분하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거리감과 세월의 흐름으로 무화되지 않는 과거의 선연함이 배어 있다.

영화에는 여럿의 엄마가 등장한다. 학살당한 아버지의 기억을 품고 요절한 딸의 딸을 키웠던 야니스의 할머니, 히피처럼 살다가 얻은 딸에게 좋아하는 뮤지션의 이름을 붙이고 재니스 조플린처럼 27살에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야니스의 엄마, 가계의 결핍을 모계의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여기고 싱글맘의 운명을 자처한 야니스, 배우로서의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고 그만큼의 그늘을 딸에게 물려준 테레사, 재앙처럼 찾아온 임신을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모성과 사랑을 느끼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하고 거짓말처럼 진짜 아이를 되찾은 아나. 그 모든 엄마와 딸은 다르지만 닮았고, 원했든 원치 않았든 자신에게 온 생명을 키워냈으며, 그렇게 성장한 개인의 삶이 겹쳐지고 쌓이며 역사가 된다.       

역사의 진실과 여성의 연대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영화에서 야니스는 총체적인 이상성을 부여받은 캐릭터로 느껴졌다.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와 비극적인 가족사는 그를 짓누르기보다 주체적 성장의 기반이 되었고, 가족을 넘어 고향 마을과 과거로 연결된 책임감은 세계에 대한 균형감각과 실천적 역사의식의 원천이 되었다. 레시피 없이 이런저런 요리를 뚝딱 해내는 솜씨나 오래 전 떠난 마을 사람들과 금세 어우러지는 모습은 야니스의 생활력과 안정감의 뿌리였던 할머니와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혼자 살아가는 야니스에게 부재하는 가족은 내면적 성숙과 지혜로움의 본령으로, 멀리 있는 고향은 그를 키워낸 하나의 마을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야니스는 변화한 세상에서 자신의 시점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사진작가이며, 증조부가 남긴 사진을 통해 과거의 진실을 좇는 후손이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진실'은 오래 천착해온 과거에 대한 태도와 다른 모습을 끌어내기도 한다. 애지중지 키우며 구체적인 친밀감의 세계를 경험하고 구축 중인, 사적 삶의 유일한 동반자에 대한 마음은 증조부와 선대를 향한 양심이나 책임감으로 충만한 야니스를 갈등과 모순으로 이끈다. 번민과 혼란 속에 끝내 진실을 고백하고 다시 혼자가 되는 모습은 냉정한 운명의 무게로 작용하지만, 야니스의 삶은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아르투로와의 재회, 오랜 숙원의 해결과 함께 찾아온 것이 새로운 생명이라는 점은 전형적인 전개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는 걸 생각하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야니스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중층적으로 겹쳐지며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영화는, 생각을 다양한 갈래로 이끈다. 핏줄로 이어진 뿌리에 대한 성심이 가닿는 사회와 역사의 진실, 학살과 강간에도 가계와 역사를 잇는 여성의 존재감, ‘가부장적 정상가족’과 별개로 존재하는 삶의 온전성, 살아남은 이들의 연대로 구성되는 대문자 가족 같은 큰 이야기부터, 혼란한 운명의 당사자에서 동거인과 연인으로 경계를 오가는 두 사람의 유연한 관계까지 말이다. 엉뚱하게 튄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적 삶과 공적 삶, 개인과 역사,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여성의 존재는 눈부셨고 주체적인 생존자들이 복원해 낸 역사의 진실, 발굴 현장을 향하는 무리의 모습은 찡하고 감동적이었다. [페인 앤 글로리]로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다시 한 번 푹 빠졌고, 놓친 그의 전작들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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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3. 29. 23: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차드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녀를 테니스 챔피언으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테니스 경기 우승자가 거액의 상금을 받는 것을 본 후 구체적인 육성 계획을 작성했고 아내와 함께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운동을 했던 자신과 아내의 유전자를 받은 아이의 성공이, 위험과 폭력이 난무하는 빈민가에서 가족을 구할 잠재력이라는 굳건한 믿음에 꾸준한 노력을 보태고 중이다. 가난과 흑인에 대한 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자신을 지켜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상처는 그를 치밀한 플랜맨으로, 자녀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초인적인 아빠로 만들었다.

가족이 살아가는 캘리포니아의 컴튼은 마약과 총질이 흔한 흑인 게토다. 빈민가의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부모는 미성년자인 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최고로 키워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낮에는 두 딸의 훈련과 코치 찾기로 바쁘고 밤에는 경비일을 하는 아빠는 지치지도 않는다. 간호사인 엄마 오라신도 한마음인 이들의 삶은, 두 딸의 테니스 챔피언만이 아니라 모든 딸들을 훌륭한 인성과 높은 지적 성취를 겸비한 성인으로 만들기 위한 가족 프로젝트다. 큰딸에게 집적대는 불량배에게 얻어맞는 아빠, 질시하는 이웃과 선을 긋는 엄마에게서는 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10대 초반인 비너스와 세레나는 공식적인 검증은 받은 바 없지만 코치와 트레이너를 도맡은 아빠의 헌신에 힘입어 실력을 갖춘 테니스 선수로 성장하는 중이다. 하지만 카트에 가득 담긴 공으로 동네 테니스장에서 하는 훈련과 비디오 테이프와 자료만을 바탕으로 한 아빠의 레슨은 한계가 명백하다. 두 딸의 실력과 가능성을 확신하는 아빠는 유명 테니스 코치들을 수소문해 지도를 의뢰하려 하지만 그의 저돌적인 접근은 허풍으로 여겨지고, 백인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인 종목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 없는 아이들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무작정 딸들을 데리고 찾아간 테니스 클럽에서 코치 폴 코헨에게 운 좋게 실력을 선보인 덕에 지도를 받을 수 있게 된 비너스는 주니어 대회에 참가해 큰 주목을 받는다. 언니에게 밀려 클럽 대신 엄마와 훈련하게 된 세레나는 승승장구하는 언니를 따라다니던 대회에서 가족 모르게 참가 신청을 해 좋은 성적을 거둔다. 자매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코치는 에이전시를 소개하지만, 승부와 성적만을 목표로 혹사당하는 어린 선수들을 지켜본 아빠는 비너스와 세레나의 대회 참가를 중단시키고 코치와도 결별한다. 찾아온 다음 기회는 플로리다행, 릭 매시의 테니스 클럽으로 가족이 이주하는 대대적인 변화다.

릭 매시의 클럽으로 이주하고 나서야 아빠는 딸들을 대회에 출전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을 전한다. 당황스럽지만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는 릭은 두 딸을 지도하기 시작하고 비너스와 세레나는 훈련뿐만 아니라 제 나이에 맞는 공부와 경험을 쌓으며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테니스계가 주목하는 두 딸의 경기 대신 아빠의 미디어 노출이 더 화제가 되곤 하면서, 릭의 인내심도 바닥에 닿는다. 폴 코헨의 클럽 훈련과 대회 출전 중단을 결정할 때 아빠는 어린 딸들의 의사도 아내와의 상의도 없이 독단적이었다. 두 딸과 가족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라는 굳건한 확신은 끊임없는 헌신과 기이할 만큼 독보적인 열정에 기인한 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딸들은 자랐고 아내의 불만도 쌓이다 못해 폭발한다.

마침내 비너스의 의사에 따라 프로 데뷔전 출장이 결정되고, 자신만이 아니라 '흑인 소녀들의 꿈'을 짊어진 비너스에게는 테니스계의 주목은 물론 미래의 스타를 잡으려는 스포츠 기업의 스폰서 러브콜도 이어진다. 아내의 충고에 폭주의 속도를 한껏 늦춘 아빠도 이제는 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묵묵한 응원을 보낸다. 예선에서 랭킹 1위인 비카리오와 맞붙은 비너스는 긴장과 심리전의 열세 속에서도 대등한 경기를 펼치지만 패배한다. 낙담과 실망으로 대기실에 홀로 있던 비너스를 위로하며 경기장문을 나선 가족들 앞에는, 경기가 끝난 후에도 비너스를 응원하고 기다린 팬들의 환호가 가득하다.


테니스를 전혀 모르다 보니 이런 선수들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마지막 경기와 함께 끝난 영화는 이어 자막으로 또 실제 윌리엄스 가족들의 푸티지로 이들의 성공과 이후 행보들을 보여준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무색할 만큼 빠져서 보았는데, 고비가 되는 사건들은 분명 있지만 그보다 킹 리차드의 캐릭터가 큰 힘이었던 것 같다. 생존해 있는 인물의 넌픽션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극강의 열정과 투지와 확신, 에피소드에서 느껴지는 특출난 개성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미처 몰랐던 동시대 영웅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이자 헐리우드 영화의 소재로 최적인 아메리칸 드림이기도 했다.

내게는 보지도 않은 그 옛날 [맨 인 블랙]으로만 기억되는 윌 스미스의 연기는, 리차드 윌리엄스를 전혀 모름에도 엄청난 싱크로율이 아닐까 싶어지는 수준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물의로 워낙 화제가 된 터라 그가 얻어맞는 장면에서는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시상자의 '공개적인 조롱'(이것이 가벼운 농담이나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이 더 문제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후폭풍이 거센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폭력의 정도에 따른 양해가 바람직한 것일까 싶으면서도, 과도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무척 재미있게 보았고, 성공지향성이 전혀 없는 관객으로서 감동적이라기보다는 리차드 윌리암스의 존재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인생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 삶이라니 그 자체의 억압성만으로도 거부감이 드는데, 거의 진공 상태에 가까운 보호와 훈육으로 결국 자매를 테니스 챔피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적 같기도 하다. 영화를 통해 추론해보자면 테니스에 대한 동기 부여와 10대 중반 이후의 선택은 윌리엄스 자매의 몫이었을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건강한 챔피언으로 커리어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이전에는 놓친 건지 모르겠는데, 엔드타이틀에서 처음으로 "COVID compliance Dr"라는 문구를 보았고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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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3. 29. 22:4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 8월 15일 벨파스트의 한 주택가 골목, 일군의 폭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곳은 집 앞에 나와 담소를 나누거나 저녁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어른들과 이리저리 뒤엉켜 뛰노는 아이들로 붐비는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고 종교와 무관하게 이웃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는 동네였고,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소리를 흘리며 용을 무찌르기에 바쁜 9살 버디도 그 속에 있었다. 하지만 폭도들의 난동으로 골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난무하는 폭력 속에 집 안에서 숨죽였던 이들은 가톨릭 신자인 이웃집들이 불타고 파괴된 참상을 목격했다. 

폭도들이 물러나자 주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힘을 모아 골목 끝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방관하는 경찰 대신 자경단을 자처한 이웃은 골목 어귀에서 경계를 서기 시작한다. 흑백텔레비전 뉴스 속의 벨파스트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품은 공간이지만 그곳이 터전인 이들의 삶은 지속된다. 먼 도시에서 일하는 아빠의 부재 속에 두 아들을 지켜낸 엄마는 긴장과 불안을 감추고 의연하게 일상을 꾸리고, 2주마다 집에 돌아오는 아빠와 함께하는 극장 나들이도 계속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서는 미래에 대한 근심 대신 유머러스하고 푸근한 대화가 이어지고, 각자의 놀이와 작은 고민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무구한 웃음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폭력으로 인한 균열은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버디에게도, 오래 알고 지내던 이들이 폭도로 둔갑해 위협을 가해오는 상황에 처한 아빠에게도 삶의 한 부분을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어느덧 골목 풍경에 자연스럽게 자리한 바리게이드처럼 아이들의 세계에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에 대한 의문이 자리하고, 멋모르는 아이들을 포섭하려는 비밀 서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계속되는 대치 상황과 태풍의 눈 같은 평온함 속에 골목을 떠나는 이웃도 생겨난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도 쪼들리는 가계와 앞날에 대한 불안, 벨파스트를 떠나는 문제로 말다툼과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버디의 고민은 따로 있다. 수학 점수에 따라 등수별로 배치되는 자리에서 좋아하는 캐서린과 짝꿍이 되고 싶은 것이다. 1등 자리를 차지한 캐서린과 짝꿍이 되어 친해지고 싶은 버디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시험에서 애매한 글씨체로 숫자를 쓴 덕분에 목표했던 2등이 됐다. 하지만 숫자를 정확히 써야 한다는 선생님의 충고가 아랑곳없는 기쁨은 잠시, 캐서린이 3등을 한 덕에 꿈은 물건너간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조언을 이행하며 틈틈이 보낸 눈길과 마음이 통했는지 버디는 캐서린과 과제를 함께하기로 하는 감격적인 약속에 성공한다.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시간이 흐르고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이들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온다. 짝사랑에 골몰하는 버디의 지혜로운 상담자였던, 병석에 누워 가족들에게 "달나라로 가거라" 말했던 할아버지가 생을 마감했다. 나고자란 고향을 떠나는 것을 상상한 적 없었던 엄마는, 비밀 서클에 휩쓸려 동네 수퍼마켓을 터는 데에 가담한 버디에 충격받아 떠나기를 마음먹는다. 집에 올 때마다 아빠는 버디에게 곧잘 "착하게 굴어라", "아니면 들키지 마라" 당부했었다. 모이라 누나를 따라다니며 비밀 서클에 휩쓸린 버디는 결국 착하게 굴지도 못했고 들켜버렸다. 언젠가부터 근심에 찬 엄마를 위한 버디의 마음은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한 '효소 세제'로 이어졌지만, 아이로서는 불가해하고 아이러니한 선택이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장례, 동네 수퍼 습격과 과격파들과의 대치를 경험한 가족들은 이제 수순처럼 떠난다. 버디의 마음을 헤아린 아빠 덕분에 캐서린의 집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오른 가족들, 벨파스트가 아닌 세상은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나 가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던 할머니만이 남는다. 가슴 설레이는 첫사랑, 친구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추억, 소란스럽지만 정겨운 골목과 이웃, 불가항력처럼 휩쓸린 갈등과 소동의 기억을 뒤로 하고, 담담한 표정에 물기 어린 눈으로 배웅하는 할머니를 뒤로 한 채 9살 버디와 가족들은 벨파스트를 떠난다. 그들이 떠난 후 영화는 "남은 이들과 떠난 이들 그리고 행방불명된 이들을 위하여"라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버디의 경험과 시선에 의거한 영화가 내전의 한복판에 있는 벨파스트의 상황에 대해 제공하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하지만 빠듯한 생활에도 유쾌하게 정을 나누는 이들을 가르고 고향과 추억을 파괴하는 폭력의 결과를 통해 그저 살아가고 싶은 이들을 내모는 전란의 맹목성은 명징하게 드러난다. 분쟁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휘말리고 싶지 않아도 설 자리가 없고 이전과 같은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을 갈라치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빌리와 버디 가족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해지는 뉴스나 몇 년새 한국에도 대거 이입되고 있는 난민의 존재를 통해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인물들을 통해 생생히 재현되는 이야기는 역시 추상적인 인지를 넘어서는 울림을 남기는 것 같다.  

현재 벨파스트의 모습을 다양한 시점에서 조망하는 부감샷(타이타닉 호텔 간판이 궁금했는데, 타이타닉호가 건조되고 진수된 곳이 벨파스트였다고 한다.)과 곳곳의 푸티지로 시작되는 영화는 어느 골목의 담장 너머, 1969년 벨파스트의 소박한 주택가 골목으로 이어지며 흑백의 세계로 연결된다. 시간의 벽 앞에서 과거의 세계를 지켜보다가 진입하듯 시작되는 인트로가 인상적이었고 컬러와 흑백의 대비가 회고담에 향수의 기운을 덧입히는 느낌이었다. 9살의 눈높이를 따라가는 영화는 세계의 혼란과 무관하게 정겹고 여유로운 추억과 공포와 불안의 순간을 교차시키지만, 담담하고 차분한 온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무언가 설득하거나 주장하지 않지만 공동의 세계를 부수고 분리하는 전쟁, 그럼에도 자신의 세계를 보듬고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화로웠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아는 바는 거의 없었던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는 영국 식민지 시절 대량 이주한 개신교도와 원주민인 아일랜드 가톨릭교도 사이의 종교 갈등이 수백 년간 이어진 곳이라고 한다. 1969년부터 30년간 양측의 유혈 충돌로 3,7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1998년 4월에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이 타결되었고 2005년 IRA(아일랜드공화국군)가 공식적으로 무장을 해제했으며 2007년 공동 자치 정부가 출범했다고. 예전에 [크라잉 게임]을 통해 얼핏 접하기는 했지만 기억에 남은 바가 없었는데 아일랜드의 역사가 다시 궁금해지기도 해서 관련 책을 한 권 주문했다. 영화를 통해 선사받는 여러 가지 중 얄팍하나마 지적 자극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영화는 각본과 감독을 맡은 케네스 브레너의 자전적인 내용이라고 한다.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것 같지만 어렸을 때 본 몇 편의 영화로 기억 속에 멈춰 있는 그는, 주로 셰익스피어 원작 작품에 출연하는 기품과 안정감을 겸비한 배우라는 느낌이었다. 그가 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이라는 것은 이 영화로 알게 되었는데, 이미 적지 않은 작품의 각본과 감독으로 성공한 영화인의 반 세기 전 경험과 기억을 담은 작업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좀은 감동적인 느낌이다.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음악들도 참 좋았는데, 음악을 담당한 밴 모리슨 역시 벨파스트 출신이라고 한다. 마지막에 "존 세션, 훌륭한 배우이자 OO였던 그를 추모하며"라는 자막이 나왔는데 궁금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멀리 간다 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홍보 문구가 참으로 알맞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3/29 cgv거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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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