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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에 기반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자막과 함께 군사작전처럼 도로를 줄지어 달리는 차량들이 보인다. 차량이 지나는 도로 위에 떨어진 꿩 한 마리가 연달아 지나가는 바퀴들 사이에서 치이는 위태한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또 다른 길을 달리는 오픈카에서 내린 다이애나가 어느 식당에 들어가 "여기가 어디죠?" 묻는다. 도로 위에서 죽어가는 꿩과 길을 잃은 다이애나, 영화는 인트로에서부터 주인공의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장면들을 부각시키며 결혼 10년차쯤의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크리스마스 다음 날까지의 사흘의 이야기를 다룬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국 왕실 일가들이 모이는 곳은 다이애나가 자란 집과 아주 가까운 샌드링엄궁이다. 며칠간의 만찬을 위해 수많은 차량들이 식재료를 싣고 왔고, 길을 헤매던 다이애나는 셰프 대런을 마주치고서야 그곳을 알아본다. 이미 늦었음에도 멀리 서 있는 허수아비가 걸치고 있는 아버지의 겉옷을 발견하고 챙기는 다이애나는 불안하고 초조해보인다. 여왕을 비롯해 모두가 도착해 있는 궁에 뒤늦게 당도한 다이애나는 고압적인 태도로 입구를 지키는 그레고리 소령을 마주해 체중 체크를 강권당한다. 재미로 시작되어 전통으로 자리잡은 이상한 관습들은 왕실에 즐비하고, 아무 의미 없이 강요되는 많은 것들에 다이애나는 기가 질린다.
침실에는 보란듯이 [앤 불린]에 대한 책이 놓여 있다. 헨리 8세가 이혼을 불사하며 결혼해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지만 부정하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한 그 앤 불린이다. 찰스 왕세자와 별거 중인 다이애나는 왕실의 무시와 감시에 숨이 막히고, 앤 불린은 자신의 처지를 환기시킨다. 대놓고 불륜을 지속하는 찰스와의 불화와 다이애나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반응은 이상한 소문이 되어 떠돌고 있고, 그나마 대화를 나눌 만한 수행원 매기를 만나 반색했지만 찰스의 명령으로 곧 떠나버렸다. 경직된 만찬에서 곤욕스럽게 밀어넣은 음식은 몸이 거부해 토하기 일쑤고, 한밤 중 허기를 달래려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는 현장에는 그레고리가 떡하니 나타나 불쾌한 경고를 날린다. 지옥 같은 사흘을 각오하고 궁에 합류한 다이애나의 침실에 놓인 앤 불린은, 망령처럼 수호성인처럼 뇌리를 맴돌며 때때로 환영으로 나타난다.
스트레스에 잠식된, 냉소적이고 우울한 다이애나의 구원은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다. 왕실의 기만과 위선에 질린 다이애나는 두 아들이 건강하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발산하고, 소박하고 평범한 기쁨을 누리며 자라기를 바란다. 다이애나는 두 아들에게만은 다정한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그들로부터 안간힘을 얻는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진행되는 만찬과 행사들, 의사와 무관하게 때마다 꼭두각시처럼 갈아 입어야 하는 의상들, 파파라치로부터의 보호를 명분으로 가해지는 감시와 제재, 자신의 모든 언행이 일일이 보고되고 경고로 되돌아오는 상황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돌기 직전인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따지기도 하고 자해를 하기도 하며 맞서보지만 역부족이다.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이 숨막히는 궁의 공기에 짓눌리면서 버티던 다이애나는 성탄절 미사에서 찰스의 불륜 상대를 목격하고 경악한다. 다이애나에게 그는 앤 불린의 사형 후 11일 만에 헨리 8세와 결혼했다고 알려진 제인 시모어의 환생이다. 강박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다이애나는 수행원들의 방임을 틈타 자신이 자란 집으로 들어간다. 폐가처럼 방치된 어두운 실내지만 공간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소환하고, 환한 얼굴로 웃고 뛰고 발레하는 소녀의 모습은 지금과 달리 생기와 활력이 가득하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과거의 환상과 고통스러운 현재가 뒤범벅된 혼란 속에서 계단으로 쏟아져 내리려는 다이애나를 구하는 것은 앤 불린의 환영이다.
불안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다이애나에게 매기가 돌아온다. 찰스의 미심쩍은 언질이 있었지만 유일한 말 상대이자 진심어린 조언자인 매기와 다이애나는 둘만의 드라이브와 해안가 산책으로 잠시 자유로운 공기를 만끽하며 진심을 나눈다. 다이애나를 사랑한다는 매기의 고백은 아무래도 중의적이거나 지지의 의도를 담은 것으로 느껴졌지만, 아무려나 다행이었다. 궁으로 돌아온 다이애나는 아빠의 허수아비옷을 입고 왕실의 사냥 현장에 난입해 무고한 생명을 재미로 죽이는 폭력으로부터, 그러한 폭력을 오락거리로 즐기는 왕실로부터 두 아들을 구해낸다. 어른들의 눈치를 한참 보다가 찰스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윌리엄과 해리는 다이애나에게 가지만, 마침내 궁에서 빠져나온 세 사람의 표정에서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맛있는 걸 먹자며 그들이 들른 곳은 KFC 드라이브쓰루, 주문자 이름을 묻자 다이애나는 “스펜서”라고 답한다.
어릴 적 뉴스에서 가끔 다이애나비의 소식을 접한 기억이 있고 그의 죽음에 잠시 안타까운 마음이 되었던 것도 같지만, 각별한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3월에 부산에서 예고편을 몇 차례 보게 됐는데 "Perfect Day"가 흐르는 화면 속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그늘진 얼굴과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표정,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그렁그렁한 눈이 마음에 남았다. 덕분에 나직하고 쓸쓸한 루 리드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찾아 들으며 기꺼이 거제까지 보러 갔다. 영화에서는 "Perfect Day"를 듣지 못한 것 같지만 짧은 예고편에서 느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임팩트는 변함없었고, 그의 연기로 되살아난 다이애나의 한 시절을 통해 이제는 사라진 하나의 우주를 알게 된 느낌이다.
영화는 '실화에 기반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되지만 특정 배경과 실존인물, 그럴싸한 사건과 상황이 주는 박진감 덕분에 보는 입장에서는 '꾸며낸 이야기'보다 '실화에 기반해'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편 꼭 영국 왕실과 다이애나가 아니더라도, 억압적이고 형식적인 권위와 기만이 난무하는 시공간에 떨어진 힘없는 개인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감각과 일상을 상실한 채 겪는 고난의 분투기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특히 부조리한 전통 혹은 수구적인 가치의 수호자로서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맹목적이고 일관된 행태를 보이는 그레고리는, 실제 인물인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존재감과 현실감이 상당해서 그가 등장할 때마다 막막한 느낌이 배가되었던 것 같다.
불안하고 위태하고 강박적으로 보이는 다이애나, 그를 그렇게 만들고 몰아간 이들의 침착함과 평화로움의 대비가 극명한 영화였다. 왕실 일가의 오락을 위한 사냥감으로 키워져 총에 맞거나 길가에 떨어져 차에 치여 죽거나 할, 순간의 쾌감에 복무하거나 무의미한 죽음을 위해 존재하는 꿩의 운명은 그 자체로도 부당하고 부조리할 뿐 아니라 앤 불린만큼이나 다이애나가 자신을 이입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던 것 같다. 마음 둘 곳 없이 피폐해진, 만찬에 억지로 참석하기 위해 용을 쓰다가 포기하는 다이애나에게 “엄마, 잠시만 마음을 꺼줘요”라고 애원하던 어린 윌리엄의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당신의 무기는 당신 자신이예요.”라고 말해줬던 매기가 전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예요.”라는 쪽지는 정말 힘이 되었을까. 강박과 분노로 사그라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해방감과 자연스러운 일상임을 실감케하는, 수심에 찬 다이애나의 깊은 눈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3/25 cgv거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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