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에 해당되는 글 477건

  1. 2022.02.18 [온 세상이 하얗다]
  2. 2022.02.18 [나의 촛불]
  3. 2022.02.18 [비틀즈 겟 백: 루프탑 콘서트]
  4. 2022.02.04 [인어가 잠든 집]
  5. 2022.02.04 [어나더 라운드]
  6. 2022.02.04 [킹메이커]
  7. 2022.01.27 [페인티드 버드]
  8. 2022.01.26 [리버풀]
  9. 2022.01.26 [내가 속한 나라]
  10. 2022.01.16 [비올레타]
빛의걸음걸이2022. 2. 18. 12:2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은 남자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소주병, 방에는 가구가 거의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향한 싱크대 위에는 빈 소주병이 엄청 늘어서 있고, 수납장 안에는 똬리를 튼 밧줄들이 놓여 있다. 집을 나선 남자는 철물점에서 밧줄을 사고 주인은 익숙한 듯 또 오지 말고 하나 더 사가라고 핀잔하듯 말한다. 수퍼 앞 파라솔에 앉은 그를 아는 체하며 챙기는 누군가 지나가고, 한 여자가 검은 봉지를 들고 수퍼를 나선다.

여자와 남자는 거리를 두고 나란히 골목을 걷는다. 자신을 좇는 듯한 기척을 느낀 여자는 남자를 치한 취급하지만 남자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주차된 차 아래 떨어진 돈을 주운 남자는 여자에게 식사를 청하고, 두 사람은 함께 간 식당에서 외상값을 갚지 않은 남자를 기억하는 주인에게 좇겨난다. 남자는 집에 고기가 있다며 여자와 함께 집으로 가지만 고기는 없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진 동네 친구처럼 밥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는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지 매번 죽을 결심을 하지만 기억은 곧 사라지고 집에는 밧줄들이 쌓여간다. 남자는 매일 소주를 마시고 무연한 얼굴로 낙담하고 오늘도 죽지 못했음을 절망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남자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라보이지 않고, 자신을 치한 취급한 여자에게 단호하고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요구할 줄도 아는 이성적인 면모를 지녔다.

여자 역시 익명의 세상에 섞여 있을 때는 단아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다. 어떤 '정신의 세계'를 탐닉하는 듯 관련 서적들을 잔뜩 펼쳐놓은 채 명상하던 중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밥 대신 소주를 마시는 무기력과 우울은 혼자일 때만 드러난다. 생의 의지를 놓은 듯한 여자가 홀로 머무는 집에는 이따금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두려운 존재가 있다. 여자는 자신의 그늘을 드러내지 않고 이름도 하는 일도 거짓말로 둘러대며 남자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먹고 마시고 잠을 잔다.

감정도 동기도 없이 당연한 듯 남자의 집에 며칠째 기거하던 여자는, 남자를 찾아온 사촌과의 현관 밖 다툼 소리를 집안에서 듣는다. 엄마의 죽음 이후 남자에게는 무언가 큰 일이 있었고 그것은 두려움과 분노와 억울함 등을 동반하지만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잠을 잘 때나 어둠 속에서 나타나곤 하던 누군가의 환영이 이제는 낮에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찌됐든 유산으로 남은 태백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사촌의 전언은, 정말로 잊지 않고 죽어야 한다는 남자의 결심을 굳히게 만든다.

갑자기 눌러앉은 여자를 예사롭게 받아주던 남자는 죽을 결심 후 여자를 내보낸다. 기억도 공격성도 생의 의지도 없는 남자를 우연한 안전망처럼 여겼던 여자가 집으로 돌아오자, 현관 앞에는 무시로 찾아오던 전 남친이 버티고 있다. 거부감과 두려움을 무관심과 무대응으로 표하는 여자를 구스르던 전 남친은 금세 폭력성을 드러내고, 무방비 상태로 누운 그를 차마 해하지 못한 여자는 다시 남자의 집으로 향한다. 이미 많은 것을 알아챈 여자는, 남자가 망각한 약속처럼 죽음을 향한 여행에 동반한다.

남자가 향하는 곳은 태백의 까마귀숲, 광산촌에서는 사고가 잦았고 남편을 잃은 아내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숲에서 목을 매는 일이 많았다. 까마귀가 많던 마을의 숲은 그렇게 죽어간 이들로 인해 마귀숲이라고도 불렸고, 남자는 그곳을 생의 마지막 장소로 삼았다. 우연히 만나 별다른 설명 없이도 서로의 깊은 우물을 알아본 두 사람의 여행에서는 미련이나 침울함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잊지 않기 위해 마지막 기록을 남기는 남자와 남은 돈을 모두 찾아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고 그 돈을 노리는 이들을 응징하는 여자에게서는, 남은 생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이 닿은 집은 고즈넉하고 호젓한 데다 따뜻한 삶의 온기로 둘러싸여 있다. 집을 떠난 주인의 지인은 살뜰한 손길로 식물들들 돌보고 있고, 이웃은 떠돌며 깃드는 동물을 위해 밥과 물을 챙기고 있다. 사정을 터놓을 수 없는 남자와 여자는 신혼부부처럼 숲 속 작은 집에 머물게 된다. 여자는 이따금 감상에 젖지만 남자는 담담하고 흔들림이 없다. 고독하고 황폐한 도시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던 두 사람의 기묘한 만남은 아이러니하지만 운명적이었다. 여자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유화림이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하고, 남자는 “혼자였다면 계속 살아갔을 거예요.”라며 고마움을 전한다.

적막한 까마귀숲에 당도한 두 사람은 침착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홀로 자살을 시도한 남성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그를 구하고만 둘은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생의 종착지에서 돌발 상황을 맞은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서로를 탓하며 다툰다. 죽음을 앞에 두고 별 것 아닌 말다툼에 열중하는 두 사람에게서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들에서 볼 수 없었던 감정과 에너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들은 죽을 수 있을까.


몇 줄로 설명된 줄거리와 모호하고 피상적인 제목이 애매했지만, 시간이 맞기도 했고 강길우 배우가 출연하기에 보게 되었다. [정말 먼 곳]과 [더스트맨]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소화한 그의 연기를 신뢰하게 됐고,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캐릭터의 반전 중심을 잡는 것 같은 딕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가영 배우는 초면이었는데 어떤 역할도 자기만의 분위기와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묘하고 우연한 만남과 관계 속에 전개되는 이야기에 별 이물감 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비중이 큰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었다.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부유하며 살아가는 모인과 화림의 일상은 절망적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너무 당연해보여서 당황스러웠는데, 어딘가에 그렇게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좀 막막해졌다. 한편 이유 없이 혹은 이유를 기억할 수 없이 매순간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술과 거짓말과 죽음에의 다짐으로 버텨내야 하는 인물들의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와 겉보기에는 '멀쩡한' 그들의 모습이 정상성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궁금하기도 의아하기도 했던 점은 영화의 배경을 2023년으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통일이 되었다고 설정한 것과 간접적인 방식으로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반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한 주인공들의 내밀한 여정에 집중하는 영화에서 직접적인 관련성을 느낄 수 없는 거시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설정을 삽입한 이유가 있을 텐데, 나로서는 짐작이 어려웠고 대통령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실 뜨악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 비하면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고 이따금 튄다고 느껴지는 대사와 상황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감독의 개성인가 싶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굳이 들어갔어야 했나 싶은 부분이었다.


2/13 cgv서면 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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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2. 18. 12:20

 

 

오후 4시에 IBK기업은행알토스와 현대건설의 경기가 잡혀 있어 비워 놓은 시간이었는데, 코로나19로 V리그 여자부 경기가 중단됐다. 선수들의 건강과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 리그 중단은 다행이지만,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의 결과로 전혀 염두에 없던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cgv서면삼정타워와 cgv서면상상마당 시간표까지 훑어보았지만, 도대체 그 좁은 섹터에 그렇게나 같은 영화들을 중복 상영할 거면서 cgv가 왜 세 개나 있는지 과문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만기가 가까워지면 계륵이 되곤 하는 vip 일반관 무료쿠폰 소진에도 절반쯤의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하는 건 없지만 열심히 활동하는 모든 이들을 선호할 수는 없는 일, 나름 하는 거 있을 때도 전혀 호감은 없었던 이들이 감독이어서, 영화관 입장하면서는 작품의 온도가 제발 '적당한'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일을 하며 어떤 현장에 있을 때에도 현실정치에 대한 냉소가 적지 않았고 은둔에 가까운 일상을 보내는 지금은 아예 무관심자가 되어버린 터라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화면에 첫 번째로 등장한 인터뷰이는 손석희였고 이후 줄줄이 등장하는 그렇고 그런 정치인들의 러시에 비하면 부드러운 시작이었다. 애초 마음을 비우고 보기로 했으므로 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잊고 쿨하게 영화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도 예상 외로 담담하고 차분한 전개와 편집이어서 관람이 힘들지는 않았다. 

영화는 불과 5-6년 전이지만 벌써 아득해진 사회적 역동의 기억을 소환해주었고, 그러나 촛불이 바꾼 건 정권일 뿐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 내내 맴도는 생각이었다. 구색 맞추기만은 아니었을 시민들의 인터뷰도 자주 등장했지만, 실제 국면에서 민심을 좇아 움직였을 뿐인 정치인들의 인터뷰에 큰 비중을 둔 구성이 작품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대의민주주의의 질곡이겠지만, '나의 촛불'이라는 제하의 영화에서 굳이 현실정치인들의 사후적 증언들이 이렇게 중요하게 다뤄질 일일까 싶었다. 기계적인 균형감각을 무척 염두에 둔 인터뷰이 구성이라고도 느꼈는데, 고인이 된 이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인 인터뷰 시점이 몇 년 전으로 추측되기는 했지만, 개봉 시점을 생각한다면 ‘촛불의 한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은 무척 의아했다. 몇 개인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 전반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며 이후 사회의 방향을 전망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서인지 당시의 입체적 기록에만 충실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13 cgv서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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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2. 18. 12:12



비틀즈의 시작부터 1968년까지의 푸티지로 시작된 영화는 1969년 1월 런던 애플 스튜디오에 닿아 작업 중인 멤버들을 비춘다. 흑백 사진 속 멤버 각자의 소년 시절과 함부르크 합주, 리버풀 귀환 후 카번클럽에서의 연주,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눈에 띈 후 멀끔한 청년 밴드로의 환골탈태, 영국 소녀들의 열광과 환호, 미국 진출과 월드스타로의 도약, 구설수에 오른 멤버들의 언행과 언론의 마타도어와 대중의 이반······. 이 모든 파도를 성장통처럼 겪으며 역사 이래 최고의 팝밴드가 된 비틀즈의 마지막 라이브가 해프닝처럼 펼쳐진다.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완전히 빠져서 유튜브 클립을 엄청 돌려보았던 “Don’t let me down” 루프탑 라이브의 전후 사정을 지켜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고 행복했다. 투어를 중단하고 스튜디어 작업에만 열중하던 비틀즈가 마지막 라이브에 대한 구상을 막 던지며 대화하다가 결국 펼쳐진 것이 애플 스튜디어 옥상에서의 즉흥(?) 공연이었고, 그들은 이 무대를 위해 옥상과 거리와 건물 1층의 로비에 숨겨둔 것까지 10대의 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한다. 연주가 시작되자 거리와 주변 건물의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하고, 소음 민원 신고를 받은 경찰도 등장한다.

 

옥상을 비추는 다섯 대의 카메라는 무대에 선 비틀즈는 물론 관계자와 주변 건물 옥상에서 공연을 즐기는 이들을 두루 비추고, 거리의 카메라는 애플 스튜디어 건물 주변을 지나거나 모여든 사람들을 비추기도 하고 그들 중 여럿과의 인터뷰를 담기도 한다. 1층 로비에 숨겨둔 카메라에는 주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두 명의 경찰이 잡히는데, 영문 모르고 소환된 그들의 경직되고 당황스러운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는 했다. 소리만으로 비틀즈임을 알아차리고 공연을 즐기는 거리의 사람들도 시끄러운 소음에 불평하는 사람도,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는 경찰도, 모두 '1969년의 라이브'라는 생각이 들자 새삼 흐른 세월과 기록의 위대함이 느껴졌고 실은 그들이 매우 부럽기도 했다.

 

10대의 카메라로 찍은 영상의 다양한 화면 분할과 편집은 라이브 공연의 박진감은 물론 각각의 공간(거리 곳곳, 애플 스튜디오의 지하 녹음실과 1층 로비와 루프탑 무대와 주변의 건물 옥상 등)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상황의 유기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무척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피터 잭슨이라는 걸출한 감독과 제작진의 노고가 엄청났겠지만, 당시의 해프닝이 반 세기 후의 아이맥스 상영을 예견한 걸까 싶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느꼈다. 사실 기대했던 것만큼 벅찬 사운드는 아니어서 처음엔 어?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1969년의 비디오와 사운드라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아쉬운 점은 짧은 러닝타임과 다소 빠르다고 느껴졌던 편집이었는데, 여럿으로 분할된 화면을 하나씩 제대로 보고 싶은 욕심에 괜히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던 것 같고 그렇게 큰 화면에 몰입하다 보니 정말이지 시간이 순삭되는 느낌이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 치고 싶은 걸 겨우 억누르며 그나마 거리두기 좌석이었던 덕분에 옆 사람에게 진동이 가지 않게 살짝 발박자를 맞추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터져나온 박수소리에 반색하며 함께 박수를 칠 수 있어 진심 기뻤다.

 

지난해 알라딘에서 북펀딩한 [비틀즈 : 겟 백]을 띄엄띄엄 넘겨보며 다큐를 언젠가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나중에 dvd로 나올지 모르겠는데 작은 화면으로 보는 건 영 기분이 안 날 것 같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아이맥스 상영해주면 좋겠다. 아무려나, 수많은 비틀즈마니아들의 가장 말석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라이브도 이렇게나 힙하고 멋지다니, 비틀즈 최고.



2/13 cgv서면 I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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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2. 4. 14:1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즈호는 동생 이쿠토, 사촌 와카바와 함께 간 수영장에서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 부모는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의사의 권유에, 평소 착한 마음씨를 지녔던 미즈호를 떠올리며 장기 기증을 결정한다. 의식이 없는 채로 침대에 누운 미즈호와의 작별 의식에서 엄마는 딸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고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기 시작한다. 이혼을 전제로 별거하며 미즈호와 이쿠토를 키우던 엄마는 미즈호 돌보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IT기업을 운영하는 남편은 개발회의에서 인공 뇌파로 신체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호시노의 연구에 힌트를 얻어 미즈호의 신체 활동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호시노의 가설은 현실이 되어 미즈호는 인공 뇌파를 통해 조절하는 대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미즈호를 온전히 살아있는 상태로 상정하고 보살핌에 사력을 다하는 엄마에게는 기적과 같은 희망이 된다.

아이들을 수영장에 데리고 갔던 외할머니는 커다란 죄책감에 짓눌린 채 잠자는 듯 누운 손녀와 그에 집착하는 딸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엄마는 미즈호와의 모든 순간이 애틋하고 특히 사고 전 미즈호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가 찾아냈다던 마지막 대화가 사무친다. 호시노의 방문이 거듭될수록 미즈호의 움직임은 그럴듯해지고, 엄마는 그것이 마치 미즈노의 의식이 해낸 것인 양 감격한다. 비가 오면 비 오는 바깥을 보여주고 생일이면 어여쁜 옷을 입혀주고, 어느 순간부터는 휠체어에 태워 함께 산책을 나가던 엄마는 이쿠토의 입학식에도 미즈호와 동행한다. 하지만 미즈호는 의식도 의지도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 온전한 소생을 갈망하는 엄마의 세계에서만 생동할 뿐이다. 동네에 퍼진 '죽은 누나'와 엄마에 대한 소문는 학교에 입학한 이쿠토에게도 전해진다.

이쿠토의 생일, 엄마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 미즈호를 주인공처럼 꾸민 생일잔치를 준비했지만 이쿠토의 친구들은 오지 않는다.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엄마를 더 이상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엄마의 눈과 귀를 피해 나누곤 했던 '진실'이 거론되고, 모두에게 자신의 열망을 부정당하고 절망한 엄마는 '미즈호가 죽은 거라면, 죽여도 살인이 아닌 것'이라며 스스로 경찰에 연락하고 칼을 든다. 아비규환의 현장에 당도한 경찰은 엄마를 진정시키려 노력할 뿐,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호흡하지만 의식이 없는, 법과 제도가 만들어낸 뇌사는 일종의 죽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생명이다. '뇌사'를 판정하고 뇌사자의 장기 기증을 설득하는 의학은 과학에 의한 소생 불가능성을 전제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가족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가고 침대에 누운 미즈호 곁에서 깜빡 잠이 든 엄마는 꿈에서 살아 움직이는 딸과 만난다. 의식 없이 누운 자신에게 삶의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힘겨운 싸움으로 지켜준 엄마의 꿈에 방문한 미즈호의 작별 인사, 마침내 엄마는 외롭고 지난했던 희망을 내려놓기로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며 끝까지 가봤으므로 엄마도 이제는 보낼 수 있다. 인생의 모든 시간을 살았던 정원이 있는 예쁜 집에서 미즈호는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하고, 작은 몸의 장기들은 다른 몸으로 옮겨져 생명이 된다. 영화의 인트로는 친구들과 동네 골목에서 뛰놀다가 우연히 미즈호의 집 정원으로 들어온 한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잠든 것인지 의식이 없는 것인지 모를 상태로 눕혀진 미즈호를 목격했던 소년의 삶에, 이제 미즈호의 한 부분이 살아 숨쉰다.

영화 소개나 홍보 내용을 통해서는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느낌이 좋았던 니지시마 히데토시의 다른 모습이 궁금했고 [빛의 아버지]에서 봤던 사카구치 켄타로도 괜찮았어서, 무엇보다 일반관 쿠폰과 딱 맞아 떨어진 시간 때문에 선택했다. 아이의 뇌사라는 사건을 통해 고도화된 기술과 생명 연장의 한계, 인간의 욕망과 죽음의 의미 등을 환기하는 영화였고, 유기적으로 짜여진 촘촘한 이야기 구조와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이 정도면 잠재 관객들이 조금 더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홍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좀 의아했다. 영화 포스터 역시  마음에 안 들어서 오리지널을 찾아 보았는데, 개인적으로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이것은 마치 활동할 때 내가 만든 조야한 웹자보 같은 느낌이었달까. 좀 신기해서 함께 올려둔다.

 


1/30 cgv압구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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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2. 4. 14:0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혈중알콜농도 0.05% 실험이라는 서사의 줄기는 신선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구태의연하고 헐렁했다. 알콜 섭취로 활기를 찾은 교사의 변화에 확연히 달라지는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기계적이면서도 오글거려서 보기에 몹시 민망했다. 물론 배우들의 잘못은 아니고 다 큰 학생들을 거의 단세포로 상정하고 연출한 감독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중반 넘어가면서는 혹시 금주 캠페인 영화인가 싶기도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개연성 없는 톰뮈의 죽음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네 사람의 케미가 끌어가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의 서사는 부여되었지만 그렇게 허망하게 '처리'하듯 게다가 너무나 안이하게 한 인물을 날리는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뭐가 남았을라나 했는데 학생들의 졸업 행렬을 마주한 교사들의 급발진이라니, 감동의 명장면으로 홍보되는 듯한데 내게는 무성의한 클리셰처럼 느껴져서 그 엔딩의 텐션에 공감할 수 없었다. 예고편을 여러 번 봐서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국의 배경과 배우들의 연기만 볼 만한 작품이었다. [노트르담]에 이어 이번에도 대실망, 자비에 돌란 때문에 좋아하는데 엣나인이랑 별로 안 맞는 것 같아서 약간 울적해졌다.

 


1/30 cgv압구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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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2. 4. 14:03



대의명분과 현실 정치의 괴리와 이면, 인간의 욕망과 '저마다의 정의'가 구축한 굴절된 역사를 사실적인 서사와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그냥 전환되는 장면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연결에 신경쓴 편집과 맨들맨들하고 유연한 만듦새가 작위적으로도 또 세련되게도 느껴졌는데,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너무 틈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전혀 닮은 바 없다고 생각했던 설경구 배우의 연기에서 의외로 실존인물과의 높은 싱크로율이 느껴져서 신기했는데, 그래서 대배우라고 하나 싶고. 한연기하는 많은 배우들이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줬는데, 개인적으로는 조우진 배우의 말투 딕션과 톤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말을 앞세우든 권력의지를 동력으로 삼는 정치인의 존재와 표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판의 혼탁함은 다르지 않을 테지만, 다양한 온라인 미디어와 유저 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각자의 이해관계로 더욱 복잡하게 얽힌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시절은 아직 인간에게 어떤 순정과 야성이 용납되고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정치판에 순정 따위 그냥 영화가 주는 착시효과인지 모르고 기술도 미디어도 불가역적인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피로감의 반대급부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려나, 얼마 남지 않은 대선으로 포털사이트 접속이 꺼려질 만큼 이상하고 시끄러운 때여서 더욱 그렇기도 하고, 주요 인물과 사건의 얼개는 실제에 기반하기 때문인 것도 같은, 씁쓸하지만 볼 만한 영화였다.



1/28 cgv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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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 27. 11:5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아지를 안고 헐떡이며 숲길을 달려가는 소년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전력질주에도 좇아오던 소년들에게 잡히고만 소년은 강아지를 빼앗기고 얻어맞는다. 소년들은 강아지를 내던져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다. 쓰러진 소년은 팔짝거리며 죽어가는 강아지를 무력하게 바라본다. 시작과 함께 들이닥치듯 벌어진 잔인한 사건에 몸이 잔뜩 움츠려졌다. 블랙아웃 후 '마르타'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얻어맞고 돌아온 소년에게 돌봐주는 할머니는 네 잘못이라며 혼자 나다니지 말라고, 신발이 깨끗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슬픔과 억울함에 공감도 위로도 받지 못한 소년은 땅을 파고 불타 죽은 강아지를 묻는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시골에 맡겨진 소년의 생활은 낯설고 단조롭다. 할머니를 돕거나 피아노를 쳐보거나 엄마아빠의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래지만 무료하고 외롭다. "나 좀 데리러 와"라고 쓴 그림 편지로 만든 작은 돛단배를 개울에 띄워보내지만, 구조 신호가 전해질 리 없다.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곧 집에 갈 거라고 말했던 할머니는, 매일 족욕하던 모습 그대로 대야에 발을 담근 채 숨을 거뒀다. 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는 할머니를 살피던 소년은 놀라 등불을 떨어뜨리고, 불은 그대로 번져 집을 태운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마귀의 자식, 악마의 씨라고 욕하며 린치하고 주술사 올가에게 데려가 감별을 의뢰한다. 가난한 시골 마을이지만, 2차 대전 시기 동유럽이라는 배경이 무색하게 현대와는 거리가 먼 삶의 모습이다. 악마가 씌었다며 소년을 사들인 주술사는 아프고 병든 이들의 집을 방문해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고, 소년을 이를 보조한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년에게도 증상이 나타나자 주술사는 소년을 땅에 묻어 새들의 공격으로 피흘리게 한다. 온몸이 땅에 묻힌 채 머리만 내민 모습, 달겨드는 까마귀떼의 모습이 옴짝달짝할 수 없는 소년의 운명과 그를 괴롭히는 세상처럼 참혹하다. 소년은 그렇게 고비를 넘기지만, 적의와 혐오를 거두지 않은 누군가의 공격으로 강물에 빠지고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소년을 구해준 이는 물레방앗간의 인부다. 주인은 개놈의 종자를 데려왔다며 욕하지만 내쫓지는 않는다. 소년은 그곳에 얹혀 살며 일을 돕는다. 주인은 고양이를 사랑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지만, 난폭하고 잔혹한 늙은 사내다. 젊은 아내와 인부의 관계를 의심하며 매일이다시피 폭력을 휘두르고, 모두 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한다. 위태롭게 기생하는 소년에게 젊은 아내는 죽은 아들의 것이라며 몰래 모자와 옷을 챙겨준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던 주인은 고양이들이 교미하는 모습에 폭발해 인부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아내에게 폭력을 가한다. 극도의 공포에 집을 떠난 소년은 숲에서 괴로워하는 인부를 목격하고 챙겨온 눈알을 전해준다. 두 눈알을 양손에 쥔 채 절규하는 인부를 뒤로 하고 소년은 걷는다.

숲속 외딴 집을 발견한 소년, 집시냐 묻고 성호를 그을 줄 아는지 확인한 주인은 소년을 받아준다. 새장과 새들이 가득한 집에 혼자 사는 노인은 새들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으며 즐기는 사내다. 페인트를 칠한 어린 새를 하늘의 새떼 속에 날려보내며 웃지만 힘없는 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져 죽는다.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작고 연약한 새의 낙인과 강제적인 방사 그리고 죽음은 소년에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잡일을 도우며 기거하던 소년은 어느 날 숲에서 벌거벗인 여인과 주인이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숲에서 소년들을 유혹해 섹스를 즐기던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은 성난 마을의 여성들에게 성폭력과 폭행을 당하고, 이를 말리던 주인도 두들겨 맞는다. 여인을 집으로 데려온 주인은 침통하고, 주술사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약을 발라주려던 소년을 내보낸다. 얼마 후 들리는 신음소리, 목을 맨 주인을 발견한 소년이 구해보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소년은 차라리 덜 고통스럽게 보내주려는 듯 주인의 몸에 매달린다.

다시 길을 떠난 소년은 상처 입은 채 숲에 방치된 말을 만난다. 물가로 데려가 목을 축이게 한 뒤 말을 끌고 마을로 가지만, 말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마침 독일군이 마을에 들이닥치고 밤새 음주가무를 즐기던 군인들은 소년에게 억지로 술을 먹인다. 다음 날 민가의 물건들을 약탈한 군인들과 함께, 쓰러진 소년은 포로처럼 부대로 보내진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제물 삼아 마을의 무사를 도모하고, 부대에 나타난 '유대인' 소년은 즉결 처분의 대상이 된다. 자원한 군인과 소년은 철길을 한참 걸어 처형대에 이르고, 담배를 피우던 군인은 소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도망치라는 고갯짓을 반복한다. 공포와 두려움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경직된 소년이 걷기 시작하자 군인은 허공에 두 발의 총을 발사한다.

유대인을 실어나르는 기차는 북새통이다. 바닥을 부수고 구멍을 낸 사람들이 줄줄이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기차의 군인들은 연신 조준사격을 가하고, 탈출한 사람들 대부분이 허무하게 쓰러진다. 총격을 피한 사람들은 널부러진 이들의 옷가지를 벗기고 짐에서 쓸만한 것들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얼마 후 출동한 군인들은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을 가차없이 죽인다. 지옥 같은 순간이 지나고,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소년이 들판으로 내려선다. 열려진 트렁크에 들어있던 빵을 베어물고 엄마아빠와 닮은 사진을 바라보던 소년은, 방금 숨을 거둔 또래 소년의 신발을 벗겨 신는다. 이어 주변의 기척에 다가간 곳에는 중년 남성이 신음하며 쓰러져 있고, 순간 그들을 발견한 군인의 타격으로 화면은 블랙아웃된다.

소년은 중년 남성과 함께 죄수가 되어 도시로 끌려 왔다. 어딘가에서 잡힌 유대인이 도착할 때마다 시민들은 몰려들어 저주를 퍼붓고, 군인들은 재량껏 사살하거나 살려준다. 죽음을 직감하고 군인에게 욕을 내뱉은 중년 남성이 총격에 그대로 쓰러지자, 소년은 다급히 군화를 닦으며 동정심을 얻어 목숨을 부지한다. 소년은 노신부에게 인계되지만 평온의 시간은 짧다. 산에서 홀로 살아가는 남신도에 인계된 소년은 낮에는 심부름꾼, 밤에는 성노예로 학대당한다. 성당에 뜸한 남자를 찾아온 신부가 소년의 불안을 알아채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집 근처에서 주운 칼을 들킨 소년에게 형벌을 가하고 밧줄에 묶어 주변을 탐색하던 남자는, 인과응보처럼 소년이 미리 봐둔 쥐소굴에 빠져 죽는다. 소년은 성당으로 돌아왔지만 노신부의 장례미사에서 실수를 범하고, 분노한 신도들은 그를 흙탕물 웅덩이에 던져넣는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소년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얼음판을 걷다가 구멍에 빠지고 만다. 겨우 빠져나와 필사적으로 기어가지만 몸은 점점 얼어붙고 정신을 잃는다. 그를 살려준 이는 근처 외딴 집의 젊은 여인이다. 몸져누운 노인에게 음식을 떠먹이며 돌보던 여인은 밤이 되자 그를 덮치고 복상사라도 한듯 노인은 숨을 거뒀다. 흔쾌히 동거를 허락한 여인이 원하는 것은 성욕의 충족이었지만 어린 소년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소년을 무시하던 여인은 보란듯이 동물과 수음하고, 실망과 분노에 휩싸인 소년은 그 동물의 목을 잘라 창문에 집어던지고는 집을 떠난다. 생존본능 말고는 감정이나 욕구를 내보이지 않았던 소년이 처음 발산하는, 절망적인 반전이다. 소년은 숲에 잠복했다가 홀로 지나가는 노인을 쓰러뜨려 그의 소지품들로 채비를 갖춘 뒤 다시 길을 떠난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기마병들은 마을을 습격해 눈에 띄는 대로 죽이고 짓밟고 불지르고, 뒤이어 당도한 소련군에 의해 소탕된다. 소년을 전쟁고아로 여긴 소련군은 부대로 데려와 막사에 머물게 한다. 부모와 떨어진 후 갖은 폭력과 학대를 견디며 질기게 살아남은 소년에게 군부대는 또 새로운 세상이다. 눈치껏 조용히 존재하며 주변을 주시하던 소년은, 외출한 군인을 린치한 인근 마을에 보복사격을 하는 현장에 함께하게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명심하라던 그는 주둔지를 떠나며 헤어지게 된 소년에게 한 자루의 총을 선물한다. 스탈린의 가르침을 강조하던 다른 군인은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만, 소년의 마음이 기우는 곳은 단연 총이다.

소년은 소련 관할의 시설로 보내졌다. 전쟁통에 고아가 됐거나 부모를 잃은 소년들이 모인 그곳은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소년은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이름조차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누구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집에 돌아가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시장통에 나갔다가 물건을 잠시 집어들었다는 이유로 상인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소년은 미행 끝에 그를 사살한다. 아무런 동요도 가책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시설에 돌아온 그를,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정말 안전할 줄 알고 보낸 거라며 미안해하지만, 소년은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하다 폭발한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에 아버지와 소년이 나란히 앉았다. 꾸벅꾸벅 조는 아버지의 팔뚝에 새겨진 137847이라는 숫자가 선명히 보인다. 그제서야 소년은 버스창에 자신의 이름 JOSKA, 손가락 글씨를 쓴다.   


영화관의 큰 스크린으로 봤다면 끝까지 견딜 수 있었을까 싶게 충격적이고 무거운 영화였다. 개봉했을 때 시간이 안 맞아 놓쳤는데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마르타, 올가, 밀러, 레크와 루드밀라, 한스, 신부와 가르보스, 라비나, 미트카. 피카레스크식으로 구성된 영화는 소년이 부모와 헤어진 후 만난 주요 인물의 이름으로 이어진다. 일부 호의나 친절을 베푸는 이들이 있지만 절대다수가 인간을 회의하게 만드는 인물들이다. 신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에는 폭력과 혐오가 난무한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고 대수롭지 않은 듯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근거 없는 낙인과 광기는 집단을 결속하는 힘이 되고, 외떨어져 살아가는 이들은 왜곡된 욕망으로 약자에게 군림한다. 

오디세이아 같기도 하고 끔찍한 스무 고개 같기도 한 여정, 고비마다 불사조처럼 살아나 질곡의 현실을 헤쳐가는 소년은 트라우마가 쌓일 새도 없이 매순간 시련에 내던져진다. 끝없이 학대당하며 소년의 세계는 부서지고, 다시 살아난 소년은 세상의 부조리를 내면화하며 성장한다. 전쟁의 참화가 구축한 악화라고 믿고 싶은 인간의 지옥도는, 사적 폭력이 횡행하는 시골이나 제도화된 통치가 자리잡은 도시나 다르지 않다. 나약하고 힘없는 소년의 잔혹한 성장담은, 문명과 야만이 역사의 '발전'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 같다. 유대인들이 겪은 비극적인 역사처럼, 소년의 불행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 그리고 불행을 딛고 생존한 소년은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의 정수를 응집한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화면은 쓸쓸하고 운치 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움직임을 멈춘 시골 마을 인물의 클로즈업은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동함과 동시에 영화는 인간의 잔학성과 야만으로 가득찬다. "2차 세계 대전 동유럽. 유대인 소년이 전쟁을 피해 맡겨진다. 돌봐주던 아주머니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자 소년의 시련은 시작된다."라는 간명한 소개로는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영화였다. 개연성 없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이 시종일관 등장해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면 너무나 고약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대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자전적인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페인트로 얼룩진 새]로 출간됐다가 [잃어버린 나]로 제목을 바꿔 재출간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궁금은 하지만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년도 대다수 주요 인물들도 낯선 배우들이어서 현실감이 극대화된 느낌이었는데, '신부와 가르보스'에 등장한 하비 키이텔과 줄리안 샌즈 덕분에 약간의 거리두기가 가능했고 그들의 출연을 모르고 있던 터라 문득 반갑기도 했다. 영화가 담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 같았는데, 현실에서 겪을 리 만무한 여러 상황에서 동요 없이 덤덤한 무표정을 유지하는 소년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아버지와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야 그가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성년임을 고려한 연출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소년을 연기한 배우는 괜찮았는지 모르겠다. 


1/26, 2021 온라인 국제다양성 영화음악제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List.do?bbsCd=1165&q_ctgCd=1002&sso=ok&s=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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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 26. 14:52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패럴은 선원이다. 배는 며칠 후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에 닿을 예정이다. 그곳은 패럴의 고향, 어머니와 가족들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그는 며칠간 하선해 고향집을 방문하기로 한다. 패럴은 작업복 대신 평상복을 갈아 입고 선실의 물건들을 챙겨 배에서 내린다. 어둠이 내린 항구에는 바람이 거세고, 땅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다. 도시는 적막하고 이방인처럼 홀로 걷는 패럴의 모습에서는 고독이 묻어난다. 패럴은 한 골목에 멈춰, 챙겨온 리버풀 구단 엠블럼이 박힌 백으로 가방을 바꿔 멘다. 키치스럽게 꾸며진 환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스트립쇼가 열리는 바에도 들르지만, 버려진 버스 안에서 눈을 뜬 패럴의 꿈처럼도 보인다.

고향집에 가기 위해 패럴은 동네 제재소로 가는 트럭에 오른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인 듯, 한적하고 고요한 마을은 눈에 파묻혀 있다. 마을을 조용히 돌아보는 패럴을 멀리서 누군가 주의 깊게 살피지만 그뿐이다. 수레를 끌고가는 이에게 식사할 곳을 물어 들어간 구내식당에는 손님이 없다. 인적 없는 동네의 나타난 낯선 사람을 주인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처와 연결된 무선 통신 소리가 지나간 후, 식당에는 식사를 하거나 음식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누구도 패럴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뜬 패럴은 음식을 받아간 젊은 여성 아날리아가 보이는 집안을 창밖에서 염탐한다.

패럴은 마을의 어느 구석에 몸을 구겨넣고 밤을 보냈다. 추위에 그대로 굳어 ㄴ자가 된 패럴을 식당 주인과 주민이 발견해 옮긴다. 전날 그를 주의 깊게 살피고 식당에서 외면했던 노인이, 간이침대에 눕혀진 패럴에게 말한다. 네가 떠난 뒤 아날리아가 태어났다, 여기에 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머니는 아프고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게 짐만 맡겨두고 이제 와서 뭘 찾길 바라는 거냐는 등의 말을 아무런 감정 없이 전하는 그는 아버지다. 이어, 듣고 있는 거 다 안다며 따뜻한 차를 남겨둔 채 자리를 뜬다. 몸을 추스린 패럴은 식당 주인에게 갓 구운 빵을 사고 감사의 인사와 돈을 건넨 후, 전날 기웃대던 집으로 들어간다.

외출에서 돌아온 듯 패럴은 일상적인 인사와 빵을 건네고, 책상에 앉아 뭔가 그리던 아날리아도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 별 반응이 없다. 무얼 그리냐는 질문에 하트라고 답하고는 어색한 침묵을 깬 아날리아가 반복하는 말은 돈 줄거냐는 것이다. 대꾸없이 방으로 들어간 패럴의 앞에는 침대에 누운 어머니가 있다.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도 온전치 않은 듯한 어머니는, 몇 번이나 패럴이라고 말해도 아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돈 줄 거냐고 거듭 묻는 아날리아에게 패럴은 돈을 쥐여주고 네 거니까 잘 가지고 있으라고 당부한다. 돈을 챙겨 밖으로 나간 아날리아를 좇아간 패럴은 줄 게 있다며 가방에서 뭔가 꺼내 전한다.

"그럼 간다" 답 없는 짧은 인사를 남김 채 패럴은 떠났다. 눈길에 저 멀리 사라지는 패럴의 뒷모습이 소실점이 될 때까지 그를 지켜보던 카메라는 마을에 남았다. 제재소와 식당을 빼면 마을은 조용하다. 밥을 먹여주며 "패럴이 떠나서 다행이야" 읊조리는 아버지의 말은 어머니에게 가닿지 못한다. 아버지를 따라 짐승의 덫을 살피고 어머니의 식사를 챙기는 아날리아는 이따금 멍하니 동작을 정지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카메라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에는, 패럴에게 받은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 살펴보는 아날리아가 있다. "LIVERPOOL"이 새겨진 빨간 열쇠고리다.


검은 배경에 빨간 글자들이 줄을 잇는 엔딩 타이틀처럼 긴 자막에 이어 어두운 선실에서 온라인 축구 게임을 하는 선원들의 모습이 첫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단위당 대사량이 많은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개글을 오독해 주인공의 고향을 리버풀로 착각하고 비틀즈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담겼을까 했던 기대는 영화 초반 '우수아이아'가 언급되며 내려놓았으니 다행일까 싶다. 조용하고 지루한 영화도 잘 견디는 편인데, 서사를 짐작케 하는 주요 인물들의 대사를 다 모아도 A4 1장이 넘지 않을 것 같은 수준이어서 답답은 했다. 배에서 내려 고향 마을에 닿기까지의 어느 부분은 거의 1인극처럼 느껴졌는데 그는 이따금 담배를 피우고 가방에 챙긴 술을 꺼내마실 뿐 독백이나 방백 따위 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누군가 등장해도 짧고 기능적인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배에서 패럴과 선원들의 공간은 비좁고 어둡다. 초반 패럴의 움직임을 따라 갑판 아래 곳곳을 훑는 카메라가 언제쯤 배 위로 올라갈까 기대될 정도였는데, 비상구 너머 밝은 하늘이 보인 건 잠시 배경이 된 날씨는 내내 흐렸다. 배의 내부와 우수아이아 거리는 주로 어둠과 눈으로 무채색이었지만, 패럴의 작업복과 그가 칠하는 페인트, 패럴이 들고 다니는 리버풀 구단백까지 빨강은 영화 내내 말이 별로 없는 주인공의 존재감을 대신하는 컬러였다. 배와 항구의 컨테이너며 거리에서는 이따금 노랑과 파랑까지 동시에 잡히는 화면도 있었는데, 축 가라앉은 배경에 튀어오른 선명한 삼원색의 대비가 이채롭기는 했지만 무얼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패럴에게 리버풀은 갑갑한 시골 마을에서 꿈꿨던 삶의 탈출구였을까, '갈색 웅덩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경험한 씁쓸한 신기루일까. 그가 탄 배는 언젠가 리버풀에 닿았고 그는 하선해 곳곳을 돌아봤을 것이다. 아니면 리버풀에서 몇 년쯤 살며 고향을 떠나도 꿈꾸던 곳에 닿아도 별 것 없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20년 만의 방문에는 감격도 반색도 환대도 없다. 어머니의 생사는 확인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향에서의 패럴은 눈 위의 발자국처럼 다시 눈이 내리면 흔적없이 사라질 존재처럼 보인다. 떠나기 전 아날리아에게 건넨 "LIVERPOOL" 열쇠고리는 어떤 징표가 될까. 아날리아도 그처럼 고향을 떠나게 될까, 그는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될까. 

 

너무 많은 것들이 열려 있어서 보고난 후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기게 되는 영화였다. 딱히 공통점이 없고 옛날에 봐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니 [네이키드] 같은 영화들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배회와 이어지는 침묵, 작정한 듯한 쓸쓸함과 황망함 같은 것들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였기 때문인 것 같다. 비틀즈에 과몰입하며 갖은 목록에서 '리버풀'을 검색하던 시절 알게 되어 궁금했던 영화였는데, 어쨌든 덕분에 보고 말았다.



1/25, 2021 온라인 국제다양성 영화음악제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List.do?bbsCd=1165&q_ctgCd=1002&sso=ok&s=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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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 26. 13:49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해변, 바다가 보이는 바에서 주크박스의 노래를 선곡하고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앳된 소녀가 있다. 열다섯 살 잔이다. 청년이 다가와 담배 한 대를 청하고 한 테이블에 앉는다. 자신을 하인리히라 소개하며 말을 붙이지만 신경이 딴 데 있는 듯 잔은 별 반응이 없다. 멀리 지나가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급히 자리를 뜬 잔, 아빠에게서 씨디를 건네받고 이어 나타난 엄마와 함께 가족은 모래사장에 앉았다. 남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부부가 나누는 대화에는 비밀스러운 근심이 묻어나고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잔의 표정은 권태롭다. 연락책과 뭔가 어긋난 부부는 불안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에어컨 속에 현금과 여권 등을 숨기고, 다시 떠날 날을 가늠하는 부모에게 잔은 불만의 기색을 비친다.

 

가족은 좇기고 있다. 추적을 피해 떠돌며 은둔 생활을 하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잔은 친구도 없다.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엄마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외국어와 번역 등 잔의 공부를 챙긴다. 해변 바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던 잔에게 독일어 메뉴판의 잘못된 점을 봐달라며 사장이 다가온다. 별 의심없이 메뉴판을 살펴보고 고쳐주던 잔은 아빠의 부름에 자리를 뜬다. 그들은 늘 주변을 살피고 작은 기척에 황급히 반응한다. 약속을 어긴 연락책을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 사이 집에는 도둑이 들어 숨겨둔 돈을 잃었다. 역 보관함에서 찾기로 한 현금은, 잔에게 접근했던 사장 일당이 털어갔다. 그들과 뒤엉키며 제압당한 아빠를 구하려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잔은 정신을 잃는다. 하지만 병원에 갈 수도 없다. 한동안 머물던 포르투갈에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가족은 독일로 떠난다.

 

며칠 사이 잔은 하인리히와 각별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늦은 밤 섹스에 열중하는 부모 몰래 집을 나와 해변에서 하인리히와 시간을 보내며 그가 살던 함부르크의 빌라, 수영장에서 엄마가 자살한 뒤 아빠와 그곳을 떠났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인리히는 서핑하기 좋은 해변을 따라 여행하는 서퍼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키스하고 날이 새도록 함께했지만, 잔이 자신에 대해 말한 진실은 이름뿐이다. 학생이냐는 물음에 영국의 기숙학교에 다닌다고 답했던 잔은, 자신의 상처를 심상하게 고백하는 하인리히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무일푼인 가족은 독일로 간다. 겉옷조차 챙기지 못한 잔은 아빠가 상점에서 산 노란색 상의를 마지 못해 입었다. 남은 돈을 끌어모아 호텔에 투숙하고 거리의 컨테이너를 털어 구한 옷을 덧입은 잔의 입성은 초라하다. 부부는 옛 동료의 집을 찾아가지만 언쟁에 주먹질까지 벌이며 허탕을 친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사이 계단에 앉아 있던 잔은 음악소리를 따라 위층의 방으로 올라간다. 노래를 틀어놓고 담배를 피우던 동료의 딸인 또래 소녀는 잔을 보자 그 옷 토나온다는 말을 뱉는다. 담배를 나눠피며 잠시 함께하는 사이 굳은 얼굴의 엄마가 잔을 찾아오고 가족은 다시 떠난다. 소녀의 방을 자꾸만 뒤돌아보는 잔의 표정은 착잡하다.

 

부부는 하는 수 없이 클라우스를 찾아간다. 그는 엄마는 믿지만 아빠는 경계하고 불신하는 중장년의 남성이다. 위험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는 그와의 만남은 [모비딕] 책을 든 잔의 접선으로 성사된다. 그는 가족이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해주겠다며 3주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다시 막막해진 상황에서 잔은 하인리히가 말했던 빌라를 떠올린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가족은 빌라로 가 숨어든다. 방치됐지만 하인리히의 말대로 수영장이 있고 바닥 난방이 되는 집이다. 가족들은 교대로 보초를 서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생활하며 이후를 계획하고 준비한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부부 대신 장보기를 담당하는 건 잔이다.

 

무표정한 얼굴에 초라한 옷차림으로 잔은 시내를 오간다. 아빠가 적어준 리스트대로 쇼핑하고 레코드샵에 들어가 음악을 듣다가 씨디 몇 장을 훔치기도 하고, 대학가 광장에서 담배를 나눠피운 학생을 따라 수업에 들어가 영화를 보기도 한다.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과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잔은 조용히 몸부림치고 있다.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 빌라 근처에서 거짓말처럼 하인리히를 목격한 잔의 혼란은 더욱 커진다. 함부르크의 버려진 빌라를 떠올린 것은, 하인리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이뤄질 리 없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둘은 포르투갈 관광지 해변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조우한다. 보고 싶지만 마주칠까 두려워 몸을 피한 잔을 따라온 하인리히, 두 사람이 재회한 곳은 건물의 공용 화장실이다. 머물 곳을 허락받지 못한 잔과 부모도 집도 없이 유랑하는 하인리히의 처지와 닮았다. 하인리히의 고백은 거짓이었다. 그는 가족이 숨어든 빌라 근처 안네프랑크라 이름 붙은 청소년 시설에 기숙하며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 돈을 모아 멋진 빌라를 산 아빠도, 그곳 수영장에서 자살한 엄마도 없다. 부모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지만, 짧은 시간 잔과 나눈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는 잔에게 왜 변장을 하고 다니냐고 묻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다시 만났다는 것이, 다시 만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노란 티셔츠에 과감하고 촌스러운 패턴의 점퍼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체념한 듯 부모를 따르던 잔에게는 내색할 수 없는 비밀이 추가됐다. 씨디를 훔쳤던 잔은 옷가지들과 신발까지 훔친다. 부모에게 잔의 변화는 당황스럽다. 아빠는 남자친구와 도둑질, 두 가지만은 참아달라고 부탁하고 잔은 알겠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다른 길을 간다. 훔친 옷을 갈아입고 무난한 차림이 된 잔, 커다란 레터링으로 'Diego Maradona'가 새겨진 티셔츠는 이층의 소녀가 입고 있던 것이다. 잔이 갈구하는 것은 또래들과 다름없는 그저 평범한 인생인지 모른다. 부모가 섹스하는 사이 잔은 하인리히의 방으로 찾아간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만 지금의 잔에게는 유일한 안식처, 하지만 섹스와 대화를 나누던 하인리히가 음료자판기에 간 사이 잔은 창문을 통해 그곳을 빠져나온다.

 

윗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맨발로 숲길을 뛰어가는 잔의 앞에 엄마가 나타난다. 답답함과 불만, 반항의 기색을 숨기지 않는 잔에게 손찌검을 하는 엄마, 제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도 없는 잔은 괴롭다. 3주 후 돈을 마련해주겠다던 클라우스는 약속 장소에서 체포됐다. 클라우스에게 신세지지 않고 제3국으로 떠나기 위해 은행털기를 결심했던 아빠의 계획만이 가능한 선택지로 남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고 cctv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잔의 꼼꼼한 답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 잔은 부부에게 불안하고 안쓰러운 존재다. 부부는 잔을 지인에게 맡기기로 한다. 또래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귈 수도 있는 삶을 늦게나마 '누릴' 수 있게 하자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이다. 불만과 반항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짧은 인생 동안 잔은 늘 그렇게 살아왔다. 15년간의 불안과 불안정 역시 늘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겠지만, 언제나 부모와 함께하며 잔은 성장했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다. 잔은 하인리히와 만나지 않겠다고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엄마아빠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차를 돌린 가족에게 남은 마지막 미션은 은행털기다.

 

디데이, 은행에 들어간 부모를 기다리며 주차된 차에 앉은 잔을 하인리히가 발견한다. 잔은 마음에 없는 말로 하인리히에게 이별을 고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에게 모욕을 주다 얻어맞는다. 얼마 뒤 돌아온 아빠는 총상을 입었고, 엄마는 잔이 답사로 확인했던 문이 닫혀 있었다고 말한다. 열린 문을 분명히 확인했다는 잔의 말은 사실일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문이 닫혀 있어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올 수 없었던 부부는 총격전을 벌였다. 아빠는 총을 맞았고 엄마는 총을 쏴 누군가를 죽였다. 그 밤, 잔은 다시 하인리히의 방으로 간다. 낮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 울먹이면서 가족이 숨어 살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잔의 말과 돌변한 태도를 불신하며 경계하는 하인리히는 가족이 은행을 털었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잔, 나와 함께 있겠냐고 묻는 하인리히의 진짜 마음은 알 수 없다. 음료를 가져온다며 돌아오면 있을 거냐고 확인한 뒤 방을 나간 하인리히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차단레버를 내린다. 비어 있는 침대와 열린 창문,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시골길을 내달리는 가족의 차다. 뒷자리에는 총상에 신음하는 아빠, 조수석에 앉은 잔은 담담히 하인리히와 만났다는 걸 말하고는 운전하는 엄마의 무릎에 기댄다. 성공한다면 마지막이 될 도주, 그렇다면 가족은 거짓과 혼란으로 점철된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샌가 나타난 검은 차들이 가족의 차를 에워싼 채 반복적으로 공격하고, 차는 전복되어 길 밖으로 구른다. 차에서 떨어져 바닥에 쓰러졌던,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잔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뒤집힌 채 연기를 뿜고 있는 차다.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잔의 눈빛은 두려운 꿈을 꾸는 것 같다. 

 

 

과거의 후과로 15년째 좇기고 있는 부부는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은둔과 추적, 도주가 반복되는 일상이 지속되는 동안 명분과 신념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오로지 안전한 은거와 생존이다. 부부는 불안정한 생활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잃지 않았고 잔과 함께 오랜 세월을 버텼다. 부모의 불안한 삶은 잔이 경험하는 세계의 전부이자 허약하고 유일한 뿌리가 됐다.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흡수한 잔은 늘 긴장 속에 주변을 경계하며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부모의 그늘 아래 외롭고 혼란스럽다. 어긋난 약속으로 자꾸만 궁지로 몰리는 가족의 운명은 잔에게 반발심을 안기지만 다른 선택을 꿈꿀 수 없다. 당연한 듯 고립을 감내하던 잔에게 찾아온 사랑 앞에서도 거짓이나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불가항력이다.

 

"부모로 인해 15년간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잔느는 다른 십대소녀들처럼 유행하는 옷도 입지 못하고 남자 친구도 사귀지 못한다. 호텔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잃게 되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독일로 돌아가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제41회 데살로니카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간략한 소개글이 아니었다면 가족이 무엇 때문에 좇기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영화는 많은 것을 생략하고 비밀에 부친다. 관객으로서 느끼는 답답함은 자신의 삶과 부모를 향한 잔의 내면이자 시선이기도 하다. 한스와 닮지 않았다고 말한 클라우스가 자신의 아빠냐고 클라라에게 묻는 잔은, 관객의 의구심을 대신 발화한다.

 

클라라와 한스가 15년 전 벌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남은 '동지'는 거의 없다. 변절하거나 배반한, 혹은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그들에게 느껴지는 것은 내적 갈등과 오랜 아집이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감수하며 부모와 함께 좇기고 시키는 대로 크고 작은 일을 수행하는 잔은, 다른 삶에의 바람을 다른 사람을 따라하고 흉내내는 것으로 무마한다. 부모로 인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차단당한 채 성장했지만 막상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부모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또래의 평범한 삶을 갈망하지만 자신이 익숙하게 속한 세상과의 단절을 택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잔은 운명의 노예처럼 부모의 길에 함께했지만 그들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클라라와 한스는 한때 꿈꾸는 미래를 위해 생을 건 신념의 활동가였을지언정, 자식에게 과오의 무게를 그대로 전가하고 '정상적인' 삶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앗아간 부모다. 노력했지만 무책임했고, 이는 파국적인 최후 앞에서도 부정될 수 없다. 부모의 자장이 세계의 전부였던 잔에게 거짓말과 도둑질은 들킬까봐 두려운 것일 뿐 가책을 동반하는 일이 아니었고, 부부에게 은행털기 역시 마찬가지다. 의도치 않은 살인은 충격을 안기지만 계획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거듭하던 부부는 결국 반사회적이고 반인도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어쩌면 도주에 성공해 신분을 세탁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바람이 애초에 망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홀로 남겨진 잔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1/24, 2021 온라인 국제다양성 영화음악제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List.do?bbsCd=1165&q_ctgCd=1002&sso=ok&s=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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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 16. 13:5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올레타는 증조 할머니와 산다. 화려하지만 천박한 차림으로 가끔 집에 들르는 엄마 한나는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진작가다. 분주하고 산만하게 잠시 머무는 중에도 할머니와의 언쟁을 잊지 않고, 와중에 문밖에는 낯선 남자가 기다린다.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그리울 테지만 비올레타에게는 그런 생활이 익숙해보인다.

어느 날 한나는 비올레타를 데리고 잠겨 있던 위층의 창고로 올라간다. 오래 방치된 듯한 공간에는 평범한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상들과 소품들이 가득하다. 소녀보다는 어린이에 가까운 나이지만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비올레타는 한나의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피사체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한 비올레타는 한나가 요구하는 대로 여러 포즈를 취하며 모델이 되어준다.

 

한나는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사진작가로서의 입지 다지기에 열심이다. 낡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에른스트는 동료이자 거래처이자 애인, 비올레타의 사진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예감한 한나는 들뜬 마음으로 에른스트에게 딸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한나는 에른스트를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과의 친분 쌓기에 열중하며, 비올레타의 사진들을 선보인다. 앳된 얼굴로 도도하고 시크한 표정을 연출하는 비올레타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진에 대한 반응에 고무된 한나의 요구는 점점 도를 넘어선다.

 

미성년자인 비올레타에게, 엄마의 요구가 어떻게 이해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엄마와의 작업을 거듭하며 평소 옷차림은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달라지고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올레타는 백안시되기 시작한다. 엄마의 북돋움과 세뇌에 자신의 끼를 발산하면서 남들보다 튀는 개성과 존재감에 비올레타도 조금씩 경도된다. 하지만 한나가 연출하는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를 표현해내는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가졌을지언정, 비올레타는 고작 열 살 즈음의 어린 아이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취하는 포즈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을 리 없고, 자신의 욕구를 예술로 포장한 채 돈과 유명세에만 매달리는 엄마의 집요함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비올레타는 그대로 한나의 제물이 된다.

 

아동 학대의 결과인 사진에 예술성을 부여하며 주목하는 사회의 상업성도, 그에 편승해 선을 넘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 한나도 비올레타의 세계를 갉아먹는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다. 유명 뮤지션과 협업하게 된 한나는 비올레타를 데리고 출장 촬영을 나가 성폭력의 가능성이 농후한 현장에 밀어넣기까지 한다. 과정은 매우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비올레타를 향한 한나의 반응은 위협에 가깝다. 이후에도 모녀의 갈등은 지속된다. 더 이상 촬영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비올레타의 의지는 무시되고, 사진이 알려지며 법원의 조사가 이어지지만 한나는 거침이 없다.

 

비올레타는 조사관과 만난 자리에서 엄마가 더 이상 자신의 사진을 쓸 수 없도록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한다. 하지만 딸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는 한나에게는, 딸을 모델로 한 아동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 작업의 정당성 역시 확고하다. 한나의 분열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비올레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자신의 사진이 표지에 실린 새로운 잡지의 포스터를 마주하고 찢어버리는 비올레타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대략의 내용을 알고 영화를 봤는데도 생각보다 큰 감정 노동이 필요했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순화되고 현재적으로 화해에 이른 상태일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짐작했었던 것 같다. 딸에 대한 사랑과 부적절한 '예술적 대상화'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사실상 범죄 행각인 한나의 작업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비올레타를 연기한 배우가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찾아보니 성인이 된 후에도 배우로 활동하고 있어서 괜히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공감하기 어려울 법한 이야기였지만 [해탄적일천]과 [프랑스]를 이어 보고 다소 진이 빠진 상태여서 마음이 더 녹초가 된 기분이기도 했다.

 

실제 감독의 엄마인 이리나 이오네스코는 에바 이오네스코가 어릴 때부터 10년간 찍은 누드 작품 '거울의 신전'이 대표작으로 알려진 사진작가라고 한다. 선정성과 퇴폐성이 농후한 데다 어린 딸을 모델로 했다는 점 등이 당대에도 논란이 되었던 모양인데, 에바가 11살에 찍은 사진은 "플레이보이" 역사상 최연소 누드 사진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니 예술이니 뭐니 하는 포장의 위선이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과거가 된 후일담에 따르면 에바 이오네스코는 십대 초반 영화 배우로 데뷔한 후 위탁가정에서 성장했고, 이리나는 친권을 잃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에바를 모델로 한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의 인권 기준으로 과거의 모든 일을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감독의 사례는 과거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연하다. 영화 제작 직후 감독은 이리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를 일부 인정해 소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지만 어린 시절 누드 사진으로 이리나가 얻는 수익에 대해서는 제재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법의 판단 여부를 떠나 수십 년이 지나도 오롯한 누군가의 상처를, 지난 세기의 예술로 인정하고 전시하는 행태가 의아하다. 후일담을 모르고 영화를 본 직후에는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감독에게 영화가 어떤 치유의 과정이 되었을까 생각했는데 불가항력의 과거에 대한 고발이자 저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13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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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