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은 남자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소주병, 방에는 가구가 거의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향한 싱크대 위에는 빈 소주병이 엄청 늘어서 있고, 수납장 안에는 똬리를 튼 밧줄들이 놓여 있다. 집을 나선 남자는 철물점에서 밧줄을 사고 주인은 익숙한 듯 또 오지 말고 하나 더 사가라고 핀잔하듯 말한다. 수퍼 앞 파라솔에 앉은 그를 아는 체하며 챙기는 누군가 지나가고, 한 여자가 검은 봉지를 들고 수퍼를 나선다.
여자와 남자는 거리를 두고 나란히 골목을 걷는다. 자신을 좇는 듯한 기척을 느낀 여자는 남자를 치한 취급하지만 남자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주차된 차 아래 떨어진 돈을 주운 남자는 여자에게 식사를 청하고, 두 사람은 함께 간 식당에서 외상값을 갚지 않은 남자를 기억하는 주인에게 좇겨난다. 남자는 집에 고기가 있다며 여자와 함께 집으로 가지만 고기는 없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진 동네 친구처럼 밥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는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지 매번 죽을 결심을 하지만 기억은 곧 사라지고 집에는 밧줄들이 쌓여간다. 남자는 매일 소주를 마시고 무연한 얼굴로 낙담하고 오늘도 죽지 못했음을 절망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남자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라보이지 않고, 자신을 치한 취급한 여자에게 단호하고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요구할 줄도 아는 이성적인 면모를 지녔다.
여자 역시 익명의 세상에 섞여 있을 때는 단아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다. 어떤 '정신의 세계'를 탐닉하는 듯 관련 서적들을 잔뜩 펼쳐놓은 채 명상하던 중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밥 대신 소주를 마시는 무기력과 우울은 혼자일 때만 드러난다. 생의 의지를 놓은 듯한 여자가 홀로 머무는 집에는 이따금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두려운 존재가 있다. 여자는 자신의 그늘을 드러내지 않고 이름도 하는 일도 거짓말로 둘러대며 남자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먹고 마시고 잠을 잔다.
감정도 동기도 없이 당연한 듯 남자의 집에 며칠째 기거하던 여자는, 남자를 찾아온 사촌과의 현관 밖 다툼 소리를 집안에서 듣는다. 엄마의 죽음 이후 남자에게는 무언가 큰 일이 있었고 그것은 두려움과 분노와 억울함 등을 동반하지만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잠을 잘 때나 어둠 속에서 나타나곤 하던 누군가의 환영이 이제는 낮에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찌됐든 유산으로 남은 태백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사촌의 전언은, 정말로 잊지 않고 죽어야 한다는 남자의 결심을 굳히게 만든다.
갑자기 눌러앉은 여자를 예사롭게 받아주던 남자는 죽을 결심 후 여자를 내보낸다. 기억도 공격성도 생의 의지도 없는 남자를 우연한 안전망처럼 여겼던 여자가 집으로 돌아오자, 현관 앞에는 무시로 찾아오던 전 남친이 버티고 있다. 거부감과 두려움을 무관심과 무대응으로 표하는 여자를 구스르던 전 남친은 금세 폭력성을 드러내고, 무방비 상태로 누운 그를 차마 해하지 못한 여자는 다시 남자의 집으로 향한다. 이미 많은 것을 알아챈 여자는, 남자가 망각한 약속처럼 죽음을 향한 여행에 동반한다.
남자가 향하는 곳은 태백의 까마귀숲, 광산촌에서는 사고가 잦았고 남편을 잃은 아내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숲에서 목을 매는 일이 많았다. 까마귀가 많던 마을의 숲은 그렇게 죽어간 이들로 인해 마귀숲이라고도 불렸고, 남자는 그곳을 생의 마지막 장소로 삼았다. 우연히 만나 별다른 설명 없이도 서로의 깊은 우물을 알아본 두 사람의 여행에서는 미련이나 침울함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잊지 않기 위해 마지막 기록을 남기는 남자와 남은 돈을 모두 찾아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고 그 돈을 노리는 이들을 응징하는 여자에게서는, 남은 생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이 닿은 집은 고즈넉하고 호젓한 데다 따뜻한 삶의 온기로 둘러싸여 있다. 집을 떠난 주인의 지인은 살뜰한 손길로 식물들들 돌보고 있고, 이웃은 떠돌며 깃드는 동물을 위해 밥과 물을 챙기고 있다. 사정을 터놓을 수 없는 남자와 여자는 신혼부부처럼 숲 속 작은 집에 머물게 된다. 여자는 이따금 감상에 젖지만 남자는 담담하고 흔들림이 없다. 고독하고 황폐한 도시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던 두 사람의 기묘한 만남은 아이러니하지만 운명적이었다. 여자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유화림이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하고, 남자는 “혼자였다면 계속 살아갔을 거예요.”라며 고마움을 전한다.
적막한 까마귀숲에 당도한 두 사람은 침착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홀로 자살을 시도한 남성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그를 구하고만 둘은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생의 종착지에서 돌발 상황을 맞은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서로를 탓하며 다툰다. 죽음을 앞에 두고 별 것 아닌 말다툼에 열중하는 두 사람에게서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들에서 볼 수 없었던 감정과 에너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들은 죽을 수 있을까.
몇 줄로 설명된 줄거리와 모호하고 피상적인 제목이 애매했지만, 시간이 맞기도 했고 강길우 배우가 출연하기에 보게 되었다. [정말 먼 곳]과 [더스트맨]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소화한 그의 연기를 신뢰하게 됐고,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캐릭터의 반전 중심을 잡는 것 같은 딕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가영 배우는 초면이었는데 어떤 역할도 자기만의 분위기와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묘하고 우연한 만남과 관계 속에 전개되는 이야기에 별 이물감 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비중이 큰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었다.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부유하며 살아가는 모인과 화림의 일상은 절망적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너무 당연해보여서 당황스러웠는데, 어딘가에 그렇게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좀 막막해졌다. 한편 이유 없이 혹은 이유를 기억할 수 없이 매순간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술과 거짓말과 죽음에의 다짐으로 버텨내야 하는 인물들의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와 겉보기에는 '멀쩡한' 그들의 모습이 정상성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궁금하기도 의아하기도 했던 점은 영화의 배경을 2023년으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통일이 되었다고 설정한 것과 간접적인 방식으로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반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한 주인공들의 내밀한 여정에 집중하는 영화에서 직접적인 관련성을 느낄 수 없는 거시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설정을 삽입한 이유가 있을 텐데, 나로서는 짐작이 어려웠고 대통령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실 뜨악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 비하면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고 이따금 튄다고 느껴지는 대사와 상황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감독의 개성인가 싶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굳이 들어갔어야 했나 싶은 부분이었다.
2/13 cgv서면 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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