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좋아해서 여전히 가끔씩 떠올리며 살아가는데 책의 존재를 얼마 전에야 알게 됐다. 저자가 ‘거스 반 세인트’로 되어 있으니 그에게도 외래어 표기 기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스 반 산트로 굳어진 이름과 동명 같지 않기도 하고 검색으로 찾기도 어려웠을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오래 전 책이라 아무런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가운데 무려 도서관 보존서고에 묻힌 책를 상호대차로 대출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서 모티프를 따고 또 어디선가에서 영감을 얻은 약간 옴니버스 같은 기획이었다고(아닐지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서 내심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독의 의도와 각본에 대한 이야기, 제작노트 기록 같은 걸 기대했는데 몹시 번지수가 다른 책이었다. 그런 장르가 있다면 영화소설 혹은 영상소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물의 대사와 감정, 서사와 이미지를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쓴 듯한 책이었다.
단, 영화에서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나오지 않았던 전지적 시점의 설명이 꽤 많이 덧붙여져 있는데, 원작에도 있는 것인지 모두 역자의 재량 서술인지 궁금하다. 인물들의 내면이 어떤 부분에서는 과하게 느껴질 만큼 상세하게 묘사되어 때로 거슬리기도 했지만 덕분에 오롯한 존재감의 마이크와 스코트만이 아니라 거리의 부랑 청소년들과 그들의 문화 전반이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1992년에 출간된 책이다 보니, 영화의 톤과 별개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고스란히 텍스트에도 반영되어 있는 점은 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말이다.
이십 여 년 동안 영화를 예닐곱 번은 본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활자의 묘사와 함께 머릿속에 영화의 장면들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게 신기했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강력하게 기억되기 때문인지, 영화 내용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읽으며 새롭게 느껴졌던 것 역시 신기한 경험. 스스로를 줄거리전제감상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미지나 소회보다 서사의 기억이 쉽게 휘발되는 경험이 누적되면서 무의식적 강박이 생겨난 걸까 싶어지기도 했다.
영화 포스터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마이크와 스코트의 오토바이 장면이다 보니 그들이 이복형의 집으로, 패밀리 트리 인 호텔로 엄마를 찾으러 떠날 때 타는 오토바이가 모두 훔친 것이었다는 것이 미처 몰랐던 중요한 사실로 느껴졌다. 전혀 염두에 없었는데 밥과 부랑아들이 몹시도 일자리와 안정된 일상을 원한다는 점도 새로웠다. 마이크의 엄마를 찾아간 로마에서,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나 스코트의 사랑을 차지한 카르멜라의 존재와 극적 배치도 의미심장하고 인상적이었다. 그 새로운 사랑은 마이크에게 엄마와 스코트, 이중의 상실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이어서 더욱.
전체적으로는 과연 이 책을 구스 반 산트가 쓴 그대로 번역가가 옮긴 것일까 하는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고, 본문 외에는 역자의 말이라든가 부가 설명이 전혀 없어 알 수 없었지만 대체로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디테일의 측면에서 새롭게 느껴졌던 부분들이 많았기에, 대조할 역량이나 필요는 없지만 책의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누렇게 바랜 책장과 아날로그 시절의 도서 관리 흔적들도 한 몫을 한 여러 모로 진한 향수의 독서였다.
어렸을 적만큼은 아니지만 갖은 결핍으로 외롭고 외로운 마이크를 읽으며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려서, 역시 나의 인생 영화는 [My Own Private Idaho]이며 성도 모르는 Mike는 인생 캐릭터라는 걸 확인했다. 또한 그가 미카엘이라는 것도 새삼. 마이크도 미카엘도 모두 리버 피닉스였기에 그 이른 죽음이 남긴 전복성과 충격 때문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이지만, 그의 시절과 나의 시절이 교차한 그 시기로부터 오래 이어지는 마음이 나는 고맙다. 그 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다호에 한 번은 가보고 싶다.
19세기 초중반을 살다간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세 자매의 글을 발췌해 담은 작은 책이다. 읽은 건 어릴 때 으스스하게 매료됐던 [폭풍의 언덕]뿐이니 이들에게 별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벨기에 에세이]라는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본문은 “앤 브론테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샬럿의 짧은 시를 시작으로 6편의 일기와 11편의 편지를 묶은 “바람 부는 하워스에서” 그리고 12편의 산문이 담긴 “벨기에 에세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글들이 아닌데 서문처럼 읽힌 첫 번째 글을 동생의 죽음에 부치는 시로 넣은 점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망자의 고통이나 남은 자의 비감을 토로하기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담담히 수용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내용도 이채로웠는데, 아버지가 목사였고 종교의 무게가 지금과는 다른 세계였을 테니 그렇겠지만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시작부터 죽음을 마주하며 그들의 삶이 궁금해 살펴보니 책 말미에 짤막하게 실린 생몰년도는 샬럿 1816~1855, 에밀리 1818~1848, 앤 1820~1849. 세 자매가 모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시대를 감안해도 너무 짧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와 앤이 함께 썼다는 일기 부분에는 자매들이 자란 하워스 목사관에서의 소소한 일상, 가족과 주변인의 소식 등이 담겨 있고 일기의 원본과 배경이 된 공간의 사진 몇 장이 실려 있다. 자매들은 오랫동안 함께 구축한 상상의 세계에서 ‘곤달 연대기’ 등의 서사를 진전시키며 글쓰기를 이어갔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곳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훗날 함께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과 포부를 키워나갔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과거에 함께 쓴 일기를 열어보고 지나온 날들과 몇 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자매들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일기는 1845년 7월 30일, 에밀리의 생일 다음 날의 기록이다. 어릴 적부터 공유한 상상의 세계와 미래의 꿈을 여전히 기억하면서 1848년 7월 30일의 삶을 궁금해 하며 자신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편지 부분에 실린 11편 중 7편의 수신인이 샬럿과 평생 5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친구 앨런 너시, 3편이 에밀리, 1편이 아버지다. 현재 세 편만 확인된다는 설명과 함께 실린 에밀리의 편지들은 모두 샬럿의 여행 일정과 귀가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안부를 담아 앨런에게 쓴 것이다. 샬럿이 아빠와 에밀리 그리고 앨런에게 쓴 편지들에는 비교적 세부적인 사실들이 담겨 있는데 그 수가 적은 데다 작성일이 뒤죽박죽이어서 맥락적 이해는 어려웠다. 1841년 4월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에서 원하는 직장을 얻을 방법이 없어 뉴질랜드 북부의 섬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한 지인 메리의 이야기를 하며, 그에 대해 ‘이성적인 기획력인지 절대적인 광기’인지 염려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1848년의 마지막 두 편지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에밀리와 죽음의 소식이 담겨 있다. 일기에서도 느껴졌던 자매들의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데, 생에 대한 적극성의 원동력이 신앙심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벨기에 에세이” 부분에 실린 글은 에밀리와 샬럿이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1842년에 9개월간 벨기에 브뤼셀의 에제 기숙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프랑스어로 쓴 과제 형식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샬럿은 과제를 봐주던 에제 선생을 짝사랑했고 이후 소설 [빌레트]에 그 경험이 담겼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제목만으로 19세기 여성들의 벨기에 여행기 같은 걸 기대했던 터라 살짝 당황했지만, 전반부의 일기와 편지가 구성이나 내용의 완결성보다 사료로서의 가치와 무게를 갖는 글처럼 느껴져 아쉬웠던 점을 상쇄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첫 번째 글 “한 인도인 과부의 희생”은 죽은 남편을 따라 불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는 아내와 그 의식을 목격한 기록이었다. 샬럿이 인도에 갔다는 정보는 없으니 이주한 인도인들의 현장을 벨기에에서 목격한 것 같은데, 내용 자체의 충격파에 어지럽게 혼재된 세계와 인식의 이질성이 크게 다가오는 글이었다. 의아했던 한 가지는, 과부는 스물 셋, 넷 정도로 보인다고 하고서 그 옆에 ‘열 여섯 살’ 난 딸이라고 쓴 부분이었는데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차여서 몰입해서 읽다가 의구심이 증폭했다. 원문의 오기라면 달렸을 주석이 없어 편집 과정의 오타인가 보다 싶은데, 이런 부분은 많이 아쉽다.
이후 에밀리의 “고양이”, “해럴드의 초상, 헤이스팅스 전투 전날”, “어머니에게”, “자식의 사랑”, “형제가 형제에게”, “나비”, “죽음의 궁전” 그리고 샬럿의 “앤 에스큐-샤토브리앙의 「순교자들」”, “애벌레”, “죽음의 궁전”, “가난한 화가가 고귀한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뒤섞여 실려 있다. 대체로 두 사람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 인간에 대한 양가적 인식, 독실한 신앙을 전제로 한 세계에의 사유가 녹아 있는 글들이다. “나비”, “애벌레”와 두 편의 “죽음의 궁전”은 같은 글감으로 각각 쓴 글이었는데 신과 자연의 위대함과 유한한 인간의 타락과 비극에 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죽음의 궁전”은 감정과 현상을 의인화하고 인간 세계의 질서로 구조화한 상상력과 묘사가 감탄스러웠고, 모티프가 되었을 원전이 궁금해졌다. 화가 초년생 조지 하워드가 밀로드 남작에게 후원을 요청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래의 성취를 소망하는 마지막 글에서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나 흥미로웠고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샬럿의 간절한 바람이 투사된 느낌이었다.
책 전반에 걸친 세심한 주석과 설명, 많지는 않지만 적절히 들어간 자료와 사진들,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자의 ‘옮긴이의 말’에 출판사의 ‘편집 후기’까지 모두가 무척 애써서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문한 독자로서 원작 언어에 따른 번역 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고, 구성과 편집에 들인 출판사의 노고를 책 말미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브론테 자매와 그들의 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독자라면 무척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초심자로서는 여성의 입지와 활동에 대한 제약이 당연하던 시대의 한계를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경계 없는 사유와 일상적인 글쓰기와 꾸준한 배움의 길을 걸었던 브론테 자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좋았다. 너무 짧은 생애로 다 펼치지 못한 탁월한 재능과 진취적인 미래 계획은 안타깝지만, 남겨진 흔적은 충분히 소중한 것 같다.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책에서 다루는 ‘더티 워크’는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더럽다고 여겨지는 일 혹은 임금노동 그리고 물리적 측면보다는 도덕 또는 윤리의 위반을 뜻한다.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사회로부터 더럽다고 여겨지는 개인, ‘더티 워커’다. 저자는 교도소 노동자, 드론 영상 분석가, 도살장 노동자, 시추선 노동자 등을 심층 취재하고 이러한 노동이 현대 미국 사회에서 더티 워크가 된 맥락과 현황 등을 여러 관련 이론과 연결해 서술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더티 워크’ 개념을 처음 사용한 시카고대학교 사회학자 에버렛 휴스를 소환한다. 그는 ‘인간 생태’ 연구에서 직접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시카고 사회학파의 공동 창립자 로버트 파크의 제자로 1948년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면서 여러 단상과 지식인들과의 교류 등에 대한 일기를 남겼고, 특히 유대인 ‘문제’에 대한 대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2년 몬트리올 맥길대학교 강연을 바탕으로 학술지 <소셜 프라블럼스>에 기고한 “선량한 사람들과 더러운 일”에서 그는, 유대인 학살이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것이며 자신이 나치의 ‘최종 해결책’에 주목하는 것이 ‘우리 가운데 언제나 숨어 있는 위험들에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라고 썼다고 한다.
과거 에버렛 휴스가 제기한 질문들을 현대 미국 사회로 가져온 저자는 팬데믹을 통과하며 명명된 ‘필수노동’ 가운데, 주로 여성과 소수 인종에게 할당된 열악한 저임금 노동들 중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하게 숨어든 더티 워크의 실상과 더티 워커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밝힌다. 특히 ‘불쾌한 행위가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의 뒤편으로 옮겨졌다’고 쓴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을 인용하며 혐오스러운 것을 격리하는 문명화를 더티 워크의 비가시성과 사회적 은폐와 연결하고, 계급 분석의 초점을 노동자가 겪는 ‘도덕적 부담과 감정적인 어려움에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리차드 세넷의 <계급의 숨겨진 상처>를 참조해 노동과 도덕적 외상의 관계를 주목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특징을 갖는다. 1) 다른 인간 또는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이따금 폭력을 행사하는 노동 2)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 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인 노동 3) 타인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찍혔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는 노동 4)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만약의 경우 책임 회피 가능한, 그러나 누군가 매일 고역을 치르리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위임하는 노동
보통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용인한 일종의 제도적 폭력인 더티 워크는 대체로 가난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이들에게 할당되고, 사회의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문제가 될 경우 노동자 개인에게 비난의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더티 워크를 지속시키는 권력의 움직임과 복잡한 공모 관계를 감추는 데에 유용하고, 더티 워커를 결정하는 사회의 구조적 차별을 은폐하는 기제가 된다. 저자는 서양에서 백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계약’을 통해 보장된다고 지적한 철학자 찰스 밀스를 인용해 더티 워크 역시 보이지 않는 계약의 산물이라고 쓴다.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기 더욱 쉽고 책임을 전가하거나 원인을 거대한 외부의 힘으로 돌리기에도 용이한 계약이다.
PART 1. ‘교도소 담장 안에서’에서 저자는 2012년 플로리다주 데이드 교도소의 정신과 치료시설인 ‘전환치료병동’에서 벌어진 재소자 대런 레이니의 ‘샤워기 치료’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교도소와 더티 워크를 둘러싼 인권 상황과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탐색한다. 1970년대 정신질환자 ‘탈시설화’ 운동이 1980년대 긴축재정 및 징벌적 형사처벌 정책과 만나면서 주 정부의 정신병원들이 대거 폐쇄되자 미국 사회의 정신질환자들은 교도소에 과밀 수용되었고, 적절한 치료 대신 부적절한 감금과 학대 상황에 놓였다.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수감자가 1,000퍼센트 이상 증가한 플로리다주에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지역 경제가 파탄난 상황에서도 교도소 일자리가 많았다.
1장 ‘학대로 얼룩진 시설로 들어가다’의 주요 인터뷰이인 정신건강 상담사 해리엇은 이 시기 정신보건 서비스 사설공급업체 코라이즌을 통해 데이드 교도소에서 일하기 시작해, 교도관의 재소자 인권 침해를 수시로 목격하고 그에 묵인할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런 레이니의 죽음에 침묵한다. 두려움과 일자리의 필요로 내부 고발을 하지 못한 죄책감은 신체적 이상 징후로 이어지고 결국 퇴사 후 플로리다주를 떠난다. 그는 이후 심리치료를 받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고, 저자와 만났을 때 교도소에서 일하며 고통스럽게 써내려간 ‘트라우마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교도소의 잔인한 상황을 전한다. 일을 시작한 초기에 불합리한 관행을 상사에게 공유하자 돌아온 교도관들의 압박에 자신의 한계를 실감한 뒤, “사다리의 맨 아래층에 속한 채” 무관심과 방임의 동조자로서 느낀 괴로움과 혼란에서는 교도소를 벗어난 후에도 벗어날 수 없었다.
2장 ‘어떤 시스템이 교도관을 잔혹하게 만드는가’에서 저자는 폭력적인 범죄자를 수용하는 엄중 감금 시설로 지정된 플로리다주의 샬럿 교도소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 커티스 등 교도관들 그리고 교도관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심리치료사 스피나리스를 인터뷰한다. 교도관 생활을 “끝없는 불안” 상태로 설명한 빌은 교도소 내에 팽배한 ‘우리 대 저들’이라는 적대적 사고방식과 잔혹한 습성의 ‘연쇄 공갈꾼’ 동료들 그리고 자신 역시 행사했던 폭력 등에 대해 증언하면서, 각종 교정 사업의 민영화와 인력 감축 및 재정 긴축 정책을 주요인으로 지적한다. 주립 정신보건 시설의 급감 및 ‘삼진아웃법’ 등 엄벌 정책의 유행으로 더욱 악화된 교도소 환경은 너그러운 교도관마저 물리력에 의존하게 만들었는데, 때로 발생하는 동료의 죽음과 자살은 자기 보호를 위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1970년대 이후 교도소는 시골성, 인종, 지역, 빈곤이라는 사중의 낙인을 짊어진 지역에 세워졌고, 교도관 생활로 내적 갈등과 도덕적 혼란을 느끼면서도 침체되고 척박한 시골에서 드문 일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1960년대의 정치적 격변과 1971년 아티카 폭동 등의 여파로 1970년대부터 증가된 흑인 교도관들은 만연한 인종차별과 직업 규율 사이에서 가중된 갈등을 경험했고, 전과가 있으면 교도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빈곤율과 범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흑인과 라틴계 여성이 교도관으로 일할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플로리다시티의 데이드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며 지역을 탐색하는데, 퇴락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목격한 구인공고가 교도관 채용이었다고 적는다.
이런 조건에서 일하며 가치관과 관점의 변화를 겪으면서 “도덕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말한 빌처럼 많은 교도관들이 심리적‧정신적 어려움에 빠지고, 구조적 폭력이 공고한 시스템의 말단에서 그들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된다. 코로나19가 한창이었던 2020년 트럭 운전사, 물류창고 직원 등과 함께 ‘필수노동자’로 지정된 교도관 중 10만 명이 양성 판정을 받고 17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다중적인 위험을 몰아넣은 교도소의 물리적 열악함은 개선되지 않았고 특정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비난의 화살은 교도관들에게 쏠렸다. 저자는 관련해 과거 노예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남부 농장주 ‘신사들’과 그들에게 노예를 공급하며 ‘영혼몰이꾼’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잔혹한 노예상을 언급한다. 즈음 대니 레이니 살해 사건으로 여론의 포화를 맞은 플로리다 주정부의 재수사 결과 역시 대중의 비난은 교도관에게 집중시키면서도 교도소에 만연한 면책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장 ‘인권 대신 이윤을 좇는 교도소 자본주의’에서 저자는 1842년 찰스 디킨스를 초대한 펜실베니아주의 이스턴 주립 교도소를 방문하고 그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현재 미국 교도소의 물리적‧지리적 변화를 좇으며 잔인성의 가시성과 형식에 주목한다. 대런 레이니 살해 사건은 교도소 인권 상황에 대한 대중의 오랜 무관심을 환기했지만, 공공시설인 교도소의 운영 예산 삭감을 위해 시행된 인력 감축과 교정 사업 민영화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구조적 시스템으로 이미 안착됐다. 해리엇을 고용했던 코라이즌 등 교도소 의료서비스 제공업체는 재소자 규모가 큰 지역에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체로 자리잡았다. 민간 부문에 외주화된 노동의 조건은 악화될 수밖에 없고 내부의 재소자와 노동자 모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지만, 비용 절감은 ‘납세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포장된다. 저자는 부적절하게 과밀 수용된 교도소 내 정신질환자를 치료시설로 보내는 프로그램을 채택한 일부 주들과 재소자 인권운동가들의 활동으로 상황이 나아진 일부 주들의 사례를 통해 암울한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둔다.
PART 2. ‘드론 화면 너머’에는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군사작전의 드론 영상을 분석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미국이 과거의 팽창주의적 대외 간섭 기조를 폐기한 이면에는 드론을 사용하는 전투 방식이 보편적으로 자리했지만 공적 담론의 장에서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데, 베트남전쟁 이후 징병제가 폐지되면서 미국이 자행하는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무관심해졌고 이러한 방식에서는 미국 병사가 사망할 위험이 없으며 드론 전투 자체가 가진 비밀주의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대신 ‘조이스틱 전사’라는 비아냥 속에 해가 들지 않는 작은 방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도덕적 외상과 윤리적 딜레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전쟁의 부담을 짊어진다. 그들은 업무 시간과 일상생활의 도저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이 모니터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기밀 사항과 업무 수행에 따르는 트라우마를 홀로 감내한다. 전장의 물리적 위험이나 목숨을 건 동료애 같은 것이 부재하는 전투를 외롭게 수행하는 드론 조종사들의 혼란과 환멸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고, 과거 베트남전 등의 귀환병들에게 돌아갔던 형식적인 경의와 명예 또한 남의 일이다.
4장 ‘드론 조종사의 고립된 몸과 마음’에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아론은 드론 전투원을 자원해 활동하며 초기에는 제법 잘 적응하지만 결국 깊은 도덕적 외상을 입고 그만둔다. 이후 홀로 침잠하며 치유와 회복을 위한 시간을 보내던 중 친구의 권유로 ‘평화를 바라는 참전병사단’ 모임에 참여하고, 과거 표적살인에 가담한 자신의 일과 죄책감과 회한 등을 청중들과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비밀주의에 휩싸인 드론 전투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다. 익명의 협박 메일이 쇄도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으로 사회가 소수에게 위임한 보이지 않는 전쟁과 폭력의 실체를 가시화하며, 그는 “제가 죽인 모든 사람을 위한” 묵념을 청중들과 함께 올리기도 한다. 저자가 참여했던 한 모임에서는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귀환병을 둘러싸고 청중들이 “우리가 당신을 위험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 우리는 당신의 책임을 함께합니다.”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얼핏 가해자들끼리의 위로와 치유 같은 느낌도 들지만, 사회의 모두가 연루된 전쟁의 책임을 전투원에게만 전가하는 현실을 성찰하고 그 무게를 나누는 것이 전쟁을 멈추는 머나먼 길의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5장 ‘가난과 폭력의 상관관계’의 인터뷰이인 헤더 라인보는 나고 자란 시골 소도시의 탈출구로 영상 분석가를 선택했다. 해군에 지원해 멀리 떠나고 싶었던 그가 신병 모집 창구를 찾았을 때 자리를 비운 해군 담당자 대신 공군 담당자의 제안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반군 소탕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위한 영상 분석에 투입된다. 아군 병사 보호와 적군 병사 소탕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새기며 매일같이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죽음을 거듭 마주하던 헤더의 내면에는 점차 의구심이 일기 시작한다. 퇴근 후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잠을 잘 때면 강박적으로 이를 갈며 심신의 통증이 심화되던 중 찾아간 상담사는 그를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한다. 그런 헤더가 느끼는 또 다른 부담과 부당함은 출근길 기지 앞에서 자신들을 향해 반전시위를 벌이는 코드 핑크 시위대였다. 자신과는 다른 계급에 속한, 반전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의 독선적인 정의감과 엘리트 의식과도 싸워야 했던 헤더는 결국 3년의 근무 끝에 조기제대한다.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으로 돌아간 헤더는 드론 영상 속 목표물 같은 괴물 악령과 다정한 양육자였던 아버지의 질타를 당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헤더처럼 잠을 잘 때 강박적으로 이를 갈고 악몽에 시달리는 또 한 사람, 미국의 남쪽 국경에서 국경순찰대원으로 일했던 프란시스코 칸투가 등장한다. 어머니가 멕시코계 미국인인 칸투는 국경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출신과 언어가 이주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국경순찰대에 지원해 3년 6개월간 일한 뒤 도덕적 외상에 시달렸고, 당시의 경험을 담은 [선은 장벽이 되고]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을 출간하며 칸투는 국경순찰대의 비난을 각오했지만 그의 낭독회에 나타나 불매를 외치고 ‘나치’라고 호도한 이들은 이주민 인권운동가들이었다고 한다. 관련해 저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에세이 “회색지대”에 쓴, 나치가 저지른 가장 악마적인 범죄는 죽음의 수용소 내 노동 분업에서 강압된 협력이라는 “회색지대” 안에서 피해자의 무죄성을 강탈한 것이라는 부분을 인용한다. 레비가 경험하고 묘사한 상황의 무게는 압도적이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티 워커로 내몰린 이들의 무죄성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책을 펴낸 칸투처럼, 자신의 경험을 언론에 기고한 헤더도 충격적인 비난의 댓글을 마주한다.
PART 3.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6장 ‘착취의 연결고리가 된 도살장 노동자’에 등장하는 플로르 마르티네스의 성장기는 놀랍도록 기구하다. 어린 시절부터 빈곤과 폭력 등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언젠가 찾아올 행운을 믿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텍사스주에 당도해 닭고기 정육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가금류 도축공장의 노동 환경은 1906년 업턴 싱클레어가 소설 <정글>에서 열악한 현실을 폭로하며 사회적 주목을 받았고 이후 힘을 결집한 전미정육노동자조합이 단체교섭권을 쟁취해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1970년대 새로운 생산모델을 도입한 IBP 등의 정육회사가 시골 지역에 공장을 세우면서 변화를 맞았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한 사측은 중개업자를 통해 멕시코 등의 이주민과 시에라리온 같은 전쟁 지역 난민을 고용해 노동 조건을 하락시켰고, 시각적 참상과 각종 악취와 필연적으로 산재를 동반하는 도축노동은 급격히 증가한 닭고기 소비량과 함께 이주민에 특화된 “대농장식 자본주의” 더티 워크로 자리잡았다.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한 플로르의 남편은 정육공장의 관리자였다.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억압적인 관리자들에게 멸시와 혹사를 당했고 크고 작은 산재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정육공장은 이주민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드물게 안정적인 일자리였다. 고위직의 압력을 그대로 아래로 전가하는 관리자 남편과 이혼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얻은 산재를 개인 질병으로 호도하는 사측으로부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퇴사한 플로르는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봄 노동자 권리 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집단감염의 위험에도 ‘중요한 인프라 산업 종사자의 특별한 책임’을 강조하는 사측은 라인 가동 속도를 그대로 유지했고, 사태를 추적하던 플로르는 코로나19 감염에 이어 유방암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노동자 권리 센터 직원에게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플로르는 퇴사를 결정하고 저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한다. “이건 정말 기적이에요. 나는 원래 지금까지 살아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난 여기 이렇게 있어요. … 멕시코 사람은 고생해서 살아남는 데 익숙하니까.”
7장 ‘정육산업을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에서 저자는 도축노동이라는 더티 워크의 기반이자 원인을 미국인의 식욕으로 꼽는다. 더 많은 저렴한 고기를 원하는 시민들의 욕구에 부응하며 더 많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 정육산업은 나날이 고도화되었고 노동 조건은 더욱 열악해지고 비가시화되었다. 도축노동은 다양한 하위 분야로 세분화되어 노동자들이 자신이 동물을 죽이고 있다는 의식 없이 기계적 과정을 반복하게 만들었으나, 감정을 가진 인간의 영혼에 남기는 상처는 불가피하다.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공장의 비위생적인 환경이 이슈가 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마련된 각종 규준은 대체로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직업안전보건국의 방임으로 무력화되었고, 각종 화학 물질에 노출되고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육식 소비가 급증하면서 한편에서는 동물권 운동이 성장하고 윤리적 소비 실천의 흐름도 증가했지만, 이들의 관심과 문제제기가 노동 환경 개선까지 가닿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윤리적 소비가 구매자의 가처분 소득 수준에 상당히 좌우되며 결과적으로 계급 격차를 반영한다는 한계는 자명하다.
PART 4. ‘현대 사회의 뒤편으로’에서는 시추선과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석유와 디지털 기술은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떠받치는 필수 요소지만 노동자들의 위상과 현실은 천지차이다. 8장 ‘시추선 생존 노동자를 둘러싼 모순된 시선들’은 2010년 멕시코만 해상의 반잠수식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에서 발생한 대형 폭발 사고 이야기로 시작된다. 환경 재난과 탄소 배출로 석유산업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시추선 노동은 기존의 물리적 더러움에 도덕적 더러움이 덧씌워졌다. 심각한 기후위기의 대응책으로 대체에너지로의 전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2019년 전 세계에서 소비된 에너지원의 84%는 화석연료라고 한다. 누구도 석유 사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변화한 지구 환경과 사회의식은 손쉽게 석유산업을 겨냥한다. 독과점이 만연한 업계의 맹목적인 이윤 추구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조건에서 시추선을 선택한 노동자가 현장의 위험에 사회의 비판적 시선까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딥워터 호라이즌’ 사고의 생존자인 스티븐은 어려서부터 자연을 사랑한 문학청년이었지만 고졸 학력으로 가장 좋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여서 시추선 잡역부를 택했다. 그의 아내 세라는 풍부한 예술적 소양으로 사진과 회화를 전공했고, 우연한 만남에서 나눈 지적 대화와 석유산업 종사자가 많은 지역 출신이라는 공감대로 스티븐과 가까워져 결혼했다. 사고 현장에서 스티븐은 신체적 부상 없이 탈출하지만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과학소설과 우주공간에 탐닉하면서 간혹 과음과 돌발행동으로 강박적인 현실 도피 성향을 보인다. 세라는 스티븐을 돌보며 시추선 노동자와 가족들의 초상화 작품 ‘생존자들’을 작업하면서 표류하는 남편과 흔들리는 자신을 치유하려 애쓴다. 그러나 허술한 안전 관리로 사고 원인을 제공한 사측은 생존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입막음에만 급급하면서 책임 회피와 이미지 세탁에만 몰두한다.
편집증적인 공포와 공황 발작에 시달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스티븐은 믿었던 사측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더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자신이 했던 일과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에도 빠져든다. 이는 사고 이후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이 노동자의 고통은 외면하고 오염된 자연과 해양생물에만 집중되는 현실과도 연관된다. 석유산업 등 자원 채굴 산업은 한때 지역을 먹여 살리고 사회의 경제를 떠받치는 동력으로 인식되어 주민들에게 자부심의 원천으로 작용했지만,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제고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저자는 루이지애나주와 캘리포니아주를 대상으로 해양 시추 사업의 위상과 영향력을 비교한 연구를 예로 들며, 시추 노동을 결정하는 요소로 계급과 함께 지역 및 지리 조건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시추 사업 이입에 대한 지역의 저항성이 주민의 경제적 수준과 정치적 진보성, 학력 등에 어느 정도 좌우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에서 오염과 위험을 감수하고 산업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도소가 주로 시골 게토에, 정육공장이 외딴 산업단지에 지어지듯 정유공장과 시추선이 주로 루이지애나주와 앨라배마주에 들어서고 유지된 이유다.
9장 ‘실리콘밸리의 어두운 이면’에 등장하는 더티 워커는 앞서 나왔던 노동자들과는 다른 맥락과 선택을 보여준다. 구글에서 일하며 자신의 일이 비윤리적인 사안과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고 사직한 잭 폴슨과 로라 놀란은 전문성과 창의력을 겸비한 엘리트 노동자다. 이들은 각각 중국 정부의 규제를 따르고 사용자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검색 엔진 개발 프로젝트 드래곤플라이, 미국 국방부의 기밀 영상과 데이터 분석력 강화 프로젝트 메이븐의 존재를 인지한 후 도덕적 갈등에 휩싸인다. 내부에서 비밀리에 수행되던 프로젝트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자 문제를 인식한 이들은 일부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낸다. 기술의 유연한 전용 가능성에 잠재된 문제점, 자신의 일이 불러올 영향력과 파장을 알 수 없게 구획화되고 파편화된 테크업계 노동의 본질, 책임이 분산된 시스템이 비가시화하는 위험 등을 인지한 이들의 선택은 직접적인 문제제기 그리고 자의에 의한 ‘퇴장’이었다.
더 많은 연결, 더 좋은 세상에의 기여를 강조하는 구글 등 대표적인 테크 기업들은 무수한 사용자의 정보 수집을 통해 천문학적 이익을 얻고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다. 미디어 기술의 고도화와 과잉 상태는 테크 기업의 부정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환기했고 때때로 드러나는 반윤리적 이슈는 대중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한다. 구글에서 퇴사하고 언론 인터뷰에 응했던 잭 폴슨이 화려한 이력에 직업윤리까지 투철한 지식 노동자로 알려지면서 테크업계와 학계의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는 사실은 업계의 현실과 대다수 더티 워크와의 차이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잭과 로라 역시 자신의 일과 조직에 대한 배신감과 회의를 느끼고 나름의 고통을 겪지만 이들은 여타의 더티 워커들처럼 심각한 경제적 문제나 깊은 도덕적 외상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다음 스텝을 선택할 수 있었다. 유사한 업종으로 금융인이 거론되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다. 고임금과 사회적 지위, 성공 자체가 부여하는 도덕적 가치 획득이 가능한 직업군의 ‘더티 워커’들은 윤리적 타협을 요구하는 일 앞에서 불만을 제기하거나 퇴각할 수 있고, 나아가 공동체를 위한 폭로가 대중의 비난이 아닌 새로운 기회를 불러오기도 한다.
저자는 ‘나가며’에서 에버렛 휴스를 다시 소환한다.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숨겨진 더티 워크를 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은 여러 차원의 방벽이고 가장 중요한 방벽은 우리 자신이 세우는 방벽이며, 에버렛 휴스는 프랑크푸르트 일기에서 이러한 장벽을 세우는 사람을 ‘수동적 민주주의자’라고 썼다고 적는다.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이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계속 모르기를 원한다고도 썼는데, 실은 2월의 모임 책이어서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이 부분에서 뜨끔하면서 집중력이 확 높아졌다. 다루는 더티 워크의 배경이 되는 정책과 제도의 변화, 사회 분위기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과 진영의 인식,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매커니즘 및 연구와 이론의 다양한 연결 등을 통해 이해를 높여주는 서술이 좋았다. ‘더티 워크’는 새롭게 접한 개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관행화한 구조적 비가시성과 경제적 불평등은 어쩌면 조금 당위적인 이야기였는데, 그럼에도 모르는 분야에 대한 입체적인 서술과 생생한 사례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여러 번 등장하는 조지 오웰과 그의 작품, 다수 인터뷰이들이 글쓰기와 책 읽기 등 활자에 친화적인 인물이라는 점, 대체로 어두운 이야기들이었지만 더티 워크가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어느덧 냉담해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책이었는데, 간만에 책 모임의 보람을 진하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