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4. 2. 1. 23:23



연초에 터미널에서 극장까지 걸으며 간판 속 ‘통영’ 찾는 게 재미있었는데, 터미널에서 빠져나가는 길에 나도 가끔 가는 마트 이름이 찍힌 가방이 눈에 띄었다. 방금 통영에서 도착한 버스에서 함께 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난 번 기억이 나면서 이번에도 찾아볼까 싶어졌다. 사소하고 자잘한 발견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자주 하는 일이긴 하지만 즐거울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이번 ‘통영’은 가방으로 끝. 

1박 2일 동안 6편의 영화를 예매해 일정이 빡빡했다. 첫 번째 영화는 시간상 적당해서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다는 걸 확인하고 큰 기대 없이 선택했는데 무척 좋아서 시작이 괜찮았다. 연초 부산에 다녀온 후에 [나의 올드 오크] 개봉과 함께 켄 로치 특별전이 열렸고, 예전 극장에서 놓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감동적으로 봤던 [지미스 홀]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에만 맞춰 또 부산에 가는 건 무리여서 마음으로 손가락을 빨고 있었는데, 연장상영 덕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볼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부국제와 개봉을 통해 켄 로치 감독의 신작들을 다 챙겨 본 터라, 이전에 놓친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고 근작들과 달리 나름 시대극이어서 느껴지는 새로움이 있었다. 마지막 영화는 art2관에서 한 편은 보겠다는 일념으로 택했는데 꽤 좋았던 [조조 래빗]을 생각하면 아쉬웠지만 가벼운 마무리로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 하는 통화가 희한하게 부산에서 이루어지곤 하는 M과, 첫 번째 영화가 끝난 후 간만에 통화를 했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조만간 유럽 등지로 몇 달 여행을 떠날 예정이고 그전 2월에 통영에 오겠다는 연락, 좋아하는 M의 방문도 반가웠지만 못지않게 그의 여행에 혹하고 말았다. “나도 껴줘” 같은 말 안 하고 사는 편인데, 나도 모르게 순간의 간절함이 튀어나왔다. 부산에서의 통화는 우연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부산행의 번외 수확 같은 느낌. 실제 가보기 어려운 나라와 도시의 간접 경험에 대한 욕심으로 영화를 선택할 때 배경이 되는 지역도 많이 고려하는 편인데, 촬영지를 찾아가는 여행까지는 어렵겠지만 궁금했던 나라들을 주마간산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레 들떴다. 과연 나는 상반기에 해외여행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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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1. 28. 01:37

 


부제로 붙은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문구와 책 소개를 보고 재미있게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이전 독서가 선사한 흥미진진한 충만감 때문인지 읽기 시작할 때 적잖은 기대감이 일렁였는데 그런 마음은 중반부에 이르기 전에 사라졌다. 생물학과 지질학 등 과학 연구자인 저자 호프 자런의 삶과 일, 관계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보다 훨씬 뜨겁지만 덜 정제된 느낌이었고 때로 그가 하는 일만큼이나 커다란 끈기를 요구하는 읽기였다.  

저자는 자신의 삶과 일의 경험을 필요에 따라 매우 구체적이거나 혹은 듬성듬성하게 시간순으로 서술하면서 연구 대상인 식물 세계와 연결한다. 겨울이 긴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에서 북유럽 이민자의 후손으로 보낸 어린 시절과 대학 진학 이후의 독립적인 삶, 실험실을 주요 무대로 보낸 청년기와 결혼과 육아, 박사 과정부터 함께한 빌과의 만남과 이란성 쌍생아라고 묘사할 만큼의 오랜 파트너십 등 자전적 일대기가 글의 한 축을 담당한다. 실험실과 연구 과정에 대한 세밀화 같은 묘사들, 전쟁이나 우주 과학 분야와 비교할 때 규모가 작고 언제나 부족한 식물 관련 예산과 재정 확보 문제, 학계에 만연한 성차별 등 자신이 속하고 경험한 과학계의 크고 작은 면모가 다른 한 축이다. 전공 분야인 나무와 땅에 관한 정보와 지식 그리고 연구 과정에서의 깨달음, 식물의 생장과 생존 방식을 인간의 삶에 투영할 때 갖는 의미들이 더불어 서술된다.   

저자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이다. 문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경제적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해서 네 아이를 낳아 기른, ‘늘 화가 나 있는’ 엄마와 함께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문학 전공으로 학부를 마쳤다.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전문대학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함께 실험실에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에서 나름의 따스함을 묻어나는 데 반해, 책을 헌정한 엄마와의 유대감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부모와 그들이 만든 환경에서 형성된 저자의 특성이 글을 쓰는 과학자로 살아가는 토대가 되고, 훗날 빌의 당부와 만나 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학 시절까지를 다룬 1부가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잘 읽혔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며 만난, 근무 시작 전 담배 세 갑을 몰아 피우고 기계처럼 일한 밤 퇴근할 때면 여직원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리디아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단편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던 저자가 학부 논문 주제인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카퍼필드]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만나는 인물에 빗대는 부분은 그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적절하게 느껴졌고 흥미로웠다.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저자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고 이후가 기대됐지만, 중반부 이후의 전개에서는 전체적으로 TMI가 많고 산만한 데다 장황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저자의 일상과 식물 세계의 원리를 나란히 서술하는 데에서 때로 연결고리가 허약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전반적인 구성이 불균형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아쉬웠다. 

초반에 서술된 어린 시절이 그렇게 어둡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중반부 이후 늘 조울증에 시달리고 때로 광기에 휩싸이며 온갖 불운한 상상이 함께했던 과거가 당위적 전제처럼 등장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리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서술이 연관되는 부분은 미시시피 강변의 덩굴옻나무 연구 과정에서 얻은 급성 알러지 치료약 후유증이나 임신으로 평소 복용하던 약을 끊은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으니 이해하고 싶었지만, 마치 초면인 사람이 불쑥 자기 힘든 이야기를 쏟아 붓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즈음부터 내게는 글도 인물도 좀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그런 서술 방식을 통해 당시 느꼈던 기진맥진함과 숨 막힘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한 거라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머릿속에 늘 생각이 많고 어떤 상황에서든 관련된 다양한 상상이나 회상, 공상 등이 뇌리에 떠오르는 스타일의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상상들까지 집요하게 기술하거나 별로 와 닿지 않는 비유 혹은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수식어를 붙인 문장들이 중반 이후 자주 의식됐다. 사소한 모든 것까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과정을 수십 년간 집요하게 반복하면서 강화된 성향이 글에도 반영된 것일까 싶기도 했다. 하여, 1부 마지막에 등장해 저자와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친밀성을 나누는 빌이 내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저자에 의해 형상화되고 기록된 모습이지만 말이 별로 없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궁금해 할 여지를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1월의 모임 책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읽어야만 했고, 민망하지만 본문 전반에 걸쳐 빌드업되는 빌과 저자의 관계가 독서를 끌어가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다. 20대 중반부터 내내 붙어 지내며 빌과의 이성애적인 교감이나 일방적이었더라도 감정의 파고 같은 것이 한 번도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헐적으로 그런 가능성을 예측할 만한 서술이 존재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빌에 대한 감정은 이성애를 제외한 사랑과 우정, 의존, 지지 등 한 인간이 타인에게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긍정적인 감정의 총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단지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도 얼핏 그린라이트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생략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저자에 대한 빌의 감정은 알 수 없고, 보편적이고 익숙한 감정의 토대 위에서 글을 전개하는 게 극적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관계 맺기이기 때문에, 힘겹게 읽은 만큼의 관계는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구절절 쓴 만큼 별로이기만 한 건 아니긴 했다. 저자의 성향, 식물에 대해 알려진 지식들, 빌과 저자의 관계, 과학과 일의 세계 등 서술되는 모든 면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불규칙하다 못해 일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실험실 생활에 대한 묘사들은, 저자의 학문적 성취와 위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젊은 날의 오랜 불안과 방황과 치열함이 뒤섞여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영감을 받는 이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치열하게 해나가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치열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밀고 나갔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세계에 매진하는 이야기가 내게는 멋있기보다 도저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저자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금세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전혀 몰랐던 식물 세계의 인상적인 단편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도 적어둔다.  

 


호프 자런•김희정 옮김
2017.2.16.1판1쇄 2018.1.15.1판9쇄 펴냄, 알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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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1. 25. 02:32

 


[파리 스케치]를 읽고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알게 된, 헤밍웨이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시를 전공한 학자이자 소설가인 저자 폴라 매클레인이 헤밍웨이의 책에서 “해들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구절을 발견한 후 해들리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다가 쓰게 된 책이라고 한다. 책 말미 ‘저자의 말’에는 “그들의 삶을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데 만전을 기울였다”는 말과 함께 참고한 도서와 자료의 긴 목록이 나열된다. 제목처럼 ‘파리의 아내’ 시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작지 않은 판형에 500쪽에 이르는 분량 속에 헤밍웨이의 글에서는 알 수 없었던 해들리의 어린 시절, 헤밍웨이와의 만남과 결혼, 파리 생활, 기묘하고 지난한 이혼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먼 훗날 헤밍웨이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 ‘에필로그’에 담겨 있다. 

몇 장의 흑백사진들로 시작되는 책은 본문에 앞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말을 새겨 놓았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가 당신에게 선물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빼앗아가지 않고 남긴 것이다. - 거트루드 스타인”, “단 한 가지 진실이란 없다. 모두가 진실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어 “파리는 대책이 없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에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1920년대 파리의 풍경, 아들 범비와 함께 돌아온 파리에서의 가난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일상 그리고 시류에 맞지 않는 결혼 생활에 대한 당시의 믿음과 그 모든 것을 끝내게 만든 “나중에 등장해 모든 것을 망쳐놓을 그 아가씨”에 대한 짧은 언급이 담겨 있다. 작가는 해들리를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한다. 3인칭 해들리에 대한 글을 읽은 직후여선지, 다른 사람이 빙의라도 한듯 ‘내가’, ‘우리가’라고 말하는 문장을 읽자니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읽다 보니 적응이 됐다.   

해들리는 세인트루이스 출신으로 어렸을 때 다리를 크게 다친 후 원치 않는 과잉보호 속에 성장했다. 잘 회복해 문제가 없었지만 자신을 가엾은 존재로 여기며 언니와 차별하는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아픈 척하는 일이 잦았다. 엄마는 충고와 비판을 달고 사는 집안의 지배자였고, 밖으로만 돌던 아빠는 어느 날 지하실에서 총기로 자살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우울감에 시달리던 해들리는 잦은 결석으로 동기들보다 1년 늦게 학교를 졸업한 뒤 이모가 사는 필라델피아의 브린 마 대학에 진학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한다. 대학에 입학한 여름 큰 언니가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지병이 있던 엄마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자 해들리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돌보고 임종을 지킨다. 친할아버지는 공립도서관과 제약회사, 외할아버지는 학원과 사립 고등학교 설립자였던 건전하고 모범적인 청교도 집안의 후손이었지만 해들리는 이십대 후반에 엄마가 돌아가시기까지 가족의 그늘 아래 자신의 가능성이나 미래를 접어둔 채 살아가는 ‘노처녀’였다.  

헤밍웨이와 해들리가 처음 만난 건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얼마 후다. 절친 케이트와 함께 그의 동생 켄리가 사는 시카고로 여행을 떠난 해들리는 밤마다 열리는 파티에서, 켄리의 아파트에 세든 헤밍웨이를 알게 된다. 29살의 해들리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듯 사교계와 연애 경험이 없고 자신의 외적 매력도 잘 모르는 수수한 여성이었고, 7살 연하의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작가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자신만만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해들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고, 1921년 결혼해 시카고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언론사 기고를 그만두고 창작에 매진하며 때로 부상 트라우마와 우울에 시달리던 헤밍웨이의 작품을 검토한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작가 셔우드 앤더슨이 관심을 갖는다. 낯선 가난에 적응하며 불안정한 헤밍웨이를 돕는 데에 집중하던 해들리에게는 돌아가신 외삼촌이 팔천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 오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셔우드 앤더슨이 전하는 파리 생활 정보와 “검증은 안 됐지만 언론계 너머로 지평을 넓힐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갖춘 상당히 젊고 훌륭한 신문기자”라는 헤밍웨이에 대한 소개장을 안고, 두 사람은 1921년 12월 파리로 떠난다.  

파리로 이주한 이후의 생활 부분에서는 헤밍웨이의 글에서보다 많은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셔우드 앤더슨의 소개장 덕분에 교류하게 된 예의 유명 인사들은 물론, 스위스와 스페인 등지로 떠난 몇 차례의 여행에서 만나거나 함께했던 지인들, 헤밍웨이는 싫어했지만 해들리에게는 중요한 친구였던 키티, 두 사람 모두에게 다정하고 특별한 친구였지만 부부관계 파탄의 주인공이 되는 폴린 등 대부분이 파리의 문화예술계와 사교계에서 화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두 사람만의 일상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싸움과 인상적인 에피소드, 해들리가 리옹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들을 잃어버린 일의 전말, 모든 것을 철저히 기록하고 관리하던 헤밍웨이가 생리주기까지 따져가며 막으려 했던 해들리의 임신, 혹독한 파리의 겨울을 피하고 당시 최고 수준이었던 병원에서 범비를 출산하기 위해 감행한 캐나다행과 계획보다 이른 파리 귀환, 헤밍웨이와 폴린의 불륜과 그 사실이 알려진 후 예정대로 강행한 지인들과의 스페인행, 폴린까지 합세해 세 사람이 함께한 기묘한 날들과 두 사람의 마지막 순간 등의 기록은 [파리 스케치]에 대한 답장이자 긴 주석 같기도 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배어 나왔던 깊은 회한을 떠올리게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초반에 느꼈던 1인칭 서술의 거북함이 사라지고, 헤밍웨이와 해들리의 내면과 외면을 아우르는 이야기들에 빠져들어 읽었다. 헤밍웨이의 글에서는 간략히 다뤄졌거나 누락되었던 정황의 세부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많았고, 헤밍웨이의 입장에서 기록된 사건과 현상에 대한 다른 관점이 드러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물론 결말을 알고 있는 자의 과도한 암시나 복선처럼 느껴지는 지점도 있어서, 너무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거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것만큼이나 시대상에 대한 설명들도 흥미롭게 읽었다. 과거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의 오래 전 회상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져 생략하거나 염두에 둘 수 없는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간 세상에 나온 많은 자료들을 참조한 2010년대의 저자가 현재적 시점에서 구현해낸 과거가 알려주는 사실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다른 맥락이지만 [스토너]를 읽으며 이디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서사가 있었다면 했던 마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소 호사가스러운 관심에서 선택한 책이었지만 어떤 표준이 수립되기 이전의 세계와 인물이 선사하는 향수를 전해준 독서였다. 


폴라 매클레인•이은선 옮김
2012.1.30.1판1쇄인쇄 2012.2.3.1판1쇄발행,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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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