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5. 14:41

 

 

많지는 않지만 몇 년간 본 스페인어권 영화들의 좋았던 기억과 관심을 끄는 소개에 기대감이 생겼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8살 아이 코코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영화였는데, 현실에서 체험하는 혼란을 늘 불만과 불안으로 표출하는 어린 주인공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어쩐지 감독의 사고를 어린이에게 투사해 대상화한 듯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감응이 좀 어려웠다. 

영화에는 정체성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어린이의 혼란과 그를 둘러싼 어른들의 다양한 입장이 등장한다. 나름의 긴 인생을 살아온 엄마와 아빠, 할머니, 이모할머니 등 주인공의 주변 어른들은 각자 가진 기존의 관념과 편견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이모할머니를 제외하면 모두가 조금은 방어적이고 예민한 관계에 있고 소통방식 역시 그렇다. 은은하게 전제된 갈등은 그들의 과거사에 기인한 듯 보이지만 영화는 약간의 단초를 내보일 뿐 적정한 힌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가르치지 않는 엄마는 코코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그것은 중심이 없는 상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고, 그럼에도 한계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엄격한 거리감을 고수하는 존재다. 양봉을 하는 이모할머니의 다정하고 소탈한 동행이 코코에게 힘이 되고 “전 왜 이래요?” 라는 한숨어린 고백을 끌어내지만, 파티에서 사라진 코코를 찾으며 마침내 “루시아!”를 외치는 마지막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답을 찾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고 어린이 혼자서는 버거운 일일 것 같다.   

주인공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배우의 입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민이 주입된 건 아닐까, 과연 맥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주제 넘는 생각이 중반부 이후 떠나지 않았다. 실존의 무게는 말로 표현하는 것과 별개로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주인공 배우가 실제로 그러한 사유와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연기’를 펼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린이의 연기는 대부분 어른의 고민과 시선이 담긴 시나리오와 연출을 통해 이루어질 테지만, 이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아쉽기도 어렵기도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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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5. 14:14

 

 

반 클라이번 콩쿠르 무대의 연주를 중심으로 한 작품으로 예상했는데, 재단과 콩쿠르 그리고 2022년 대회 참가자들에 대한 소개 영상에 가까운 다큐멘터리였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인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기리며 1962년 그의 고향 텍사스에서 시작되어 5년마다 개최된다. 30세 이하만 참가 가능하고 예선과 본선, 준준결선, 준결선, 결선까지 여러 관문을 거치는데, 2022년에는 228명의 예선 참가자 중 선발된 30명이 텍사스주에 모여 본선부터 결선까지 치렀다고 한다.  

영화는 재단과 콩쿠르에 대한 안내로 시작되어 본선 참가자들이 모인 시점부터 최종 우승자가 가려지는 순간까지, 2022년 콩쿠르의 여러 면모를 속도감 있게 담아낸다. 재단 관계자와 클래식 전문가, 유튜브 연주 영상에서 보았던 지휘자 마린 알솝을 비롯해 본선 참가자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와 짧은 연주 등이 모자이크처럼 이어진다. 실력 못지않게 전쟁 때문에도 주목받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참가자와 임윤찬 등 메달 수상자들과 더불어 미국과 벨라루스 참가자 등의 인터뷰 비중이 높았는데, 무대가 거듭될 때마다 당락이 결정되고 인터뷰가 추가되면서 생겨나는 서사가 흥미로웠다.  
 
임윤찬의 우승이 몰고 온 화제성으로 이름만 익숙해졌을 뿐, 스크린에 펼쳐지는 모든 장면이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콩쿠르는 물론 클래식 음악계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대회의 기원이 된 평화의 의미를 담아내려는 노력에 더해 젊은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클래식 음악계의 지평을 넓히려는 재단의 역할이 크게 느껴졌다. 매번 제작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이런 다큐멘터리도 만드는 것 같고, 엔드크레딧 마지막에 콩쿠르 연주 QR코드가 떴던 점도 그 연장선으로 느껴졌다.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느끼는 클래식 음악계의 높은 문턱이 협소한 저변과도 연관될 것 같고, 관객과 청중의 외연 확대는 연주자들에게나 해당 분야 종사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지난 콩쿠르 우승자인 선우예권의 내레이션과 임윤찬 외 한국인 본선 진출자가 있다는 점도 약간 신기했는데, 한국에서의 홍보 포커스가 임윤찬에 맞춰진 것과 달리 영화 자체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이모저모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는 점도 좋았다. 콩쿠르 전반의 과정이 적당한 긴장 속에 전개되는 점도, 불가피한 경쟁이지만 출전자들을 북돋우는 따뜻한 분위기와 심사위원들의 포용적인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엔드크레딧에 ‘backstage mothers’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궁금했는데 검색으로 알아낼 수 없었지만 적어둔다. 언젠가 프로필에 ‘2022 반 클라이번 콩쿠르 본선 진출’이 적힌 누군가의 연주를 만나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괜히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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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5. 13:49

 

 

지난해 봄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올해 첫 영화로 보았다. 다큐멘터리적인 서사가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는데, 한정된 시공간에서 진행하는 연주만을 거의 실시간으로 촬영해 편집한 작품이었다. 모던한 공간 중앙에 세팅된 그랜드 피아노와 연주자를 풀샷부터 초근접샷까지 다양하게 촬영한 연주가 흑백 화면 속에 담겼다.  

내가 가본 대부분의 클래식 콘서트는 멀리 무대 중앙의 연주자를 내 자리의 시선과 거리 한계 안에서 지켜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주자의 손과 얼굴, 전체 모습 등을 다채롭게 조명한 화면이 연주와 음악의 육체성을 더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소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집중되는 연주에 몰입하다 보니 그사이의 공백과 공명, 여운도 크게 다가왔다. 

중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몇 마디 말이 나온다. 연주를 다시 시작하거나 잠시 쉬어가는 순간이 삽입된 거였는데 접하기 힘든 장면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어떤 곡의 초입부를 치다 중단하고, 잠시 쉬는 시퀀스에서의 세 마디 정도. “다시 합시다.” “좀 힘드네.” “지금 무지 애쓰고 있거든.” 긴장감이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의 갑작스런 이완이었는데, 소리에 더해 몸짓과 표정으로 전달되던 음악과는 또 다른 육성의 감동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주 유명한 몇 작품만을 알고 있는 터라 그 음악이 연주될 때는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으로 가득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고인의 부재를 상징하듯 손 없는 건반의 눌림만으로 음악을 전한다. 그리고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진부한 격언이 생명력을 얻으며 엔딩에 떠오른다. 투병으로 삶의 막바지를 향하는 중에 남겨준 이 작품이, 고인의 팬들에게는 눈물겨운 선물로 기억될 것 같다. 문외한인 내게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1/3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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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