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3. 1. 1. 23:21

제임스 조이스는 그다지 친밀하게 와닿는 이름은 아니다. 비전공자인 내게는 새로운 소설 기법이라는 이른바 자동기술법의 작가 정도로나 기억되곤 하는. '율리시즈'니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니 하는 작품명이 현대문학사에서 거론되곤 하지만, 작가와 별개로 떠도는 하나의 이름이거나 관용구라는 느낌도 부정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위에 거론한 조이스의 작품들은 여전히 뒷전이고, 고등학교 시절 흠모하던 선생님의 추천작이라는 이유로 문고판 '더블린 사람들'을 그야말로 통독했던 기억이 조이스와의 인연의 전부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의 이편과 저편, 예전과 지금을 살피는 눈이 분주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아일랜드와 더블린, 그리고 조이스는 묘한 연민과 동경을 담은 하나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독서의 기억도 10년쯤 전이라 그저 읽었다는 기억 외에 한참을 더듬어 건져올린 독후감은, 뭔가 쾌쾌했다는 혹은 아련하고 쓸쓸했다는 '더블린 사람들'이 풍기는 야릇한 정서일 뿐이었다.

 후세의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전기문이라면, 더구나 번역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새로 엮은 책이라면, 이전의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 사실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 전무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꽤 강렬한 매혹이며, 현재적으로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책세상에서 그의 위상을 생각해볼라치면 이 책을 손에 드는 일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단 나는 제임스 조이스와 그의 세계가 궁금한 한 사람의 독자였으므로.

 세상의 많은 천재가 그러하듯, 그 역시 격동의 시대를 굽힘없이 자기 스타일대로 밀고 나간 사람이었다. 남다른 시련과 남다른 파란이 인생에 없을리 없지만, 작가적 예술혼만은 천재의 영감과 함께 살아 빛나는.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과 반면 끊임없이 스스로 몰아치는 창작에의 열정을 뿜어내는 그의 모습은 은연 중에 내가 아는 이상의 그것과 겹쳐지기도 했는데 자동기술법과 연관지어 내가 알고 있는 유이한 이름들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조이스에 경도된 지은이는 무의식 중 발할 지 모르는 본인의 조이스 예찬을 우려하지만, 조이스에 무지한 일개 독자의 눈에 거슬리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알 수 없다는 점을 빼면 나름대로 객관성과 건조함을 적절히 견지한 소박하지만 성실한 조이스 안내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진실은 어차피 가려져 있는 법. 조이스를 알았으니 이제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2001-09-25 01:47, 알라딘



제임스조이스(세계작가들의삶과문학5)
카테고리 인문 > 문학이론 > 문인/작가론
지은이 나영균 (정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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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23:20


카프카에 관심을 갖는 일은, 어린 시절의 내가 조금은 깊어지거나 멋있어지는 듯한 묘한 허영심과 환상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게다가 '카프카'라는 건조하지만 절도있는 발음과 '프라하'라는 그가 태어나 묻힌 우아하고 울림이 있는 땅의 이름이 주는 뉘앙스가 뜻모를 매혹에 사로잡히게 만든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어릴 적 읽었던 책 속에서의 그는 상상불가한 이야기들을 너무나 태연하고 진지하게 풀어내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이후에 보게 된 영화 속에서 그는 어둡고 갑갑한 브라운관 속의 방황이 마치 운명처럼 잘 어울리는 음울한 인물이었다. 내가 만난 그의 책들은 거의가 어두운 무채색톤의 포장을 두르고 있었고, 책날개에 담긴 그의 사진 역시 병색이 완연한 창백함 위에 예민한 신경을 두 눈에 곤두세운 모습이었다. 그런 사진들을 보고 어떤 친구는 불길하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섬짓하다고 했다.

어리버리 짐을 꾸려 배낭여행을 떠났던 지난 가을,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쉬어가는 물가 싸고 볼 것 많은 고풍스런 도시 프라하에서의 3박 4일이 내겐 무척이나 특별한 기대와 황홀의 날들이었다. 쉽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 프라하에서 나의 테마는 카프카. 게으른 여행자의 가상한 열심에 부응하듯 마침 그 곳에서는 '카프카-프라하전'이라 이름 붙은 잔 패트릭(?)이라는 작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간 그 곳의 사진들은, 내가 익히 봐왔던 흑백의 창백한 카프카와 너무나 어울리는 조금은 음산하고 조금은 비밀스러운 그의 날들의 기록이었고, 유대인 지구 한 구석에 번잡함을 피해 자리 잡은 까페 '프란츠 카프카' 역시 편치만은 않은 나른함으로 내가 가진 그의 이미지의 끈을 이어주는 곳이었다. 또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간 황금소로에 자리한 카프카가 머물며 글을 썼다는 오틀라의 집은, 카프카의 책이 잘 보이게 전시해놓은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실망스럽지 않게 조용한 책방이였다.

<카프카의 엽서 -누이에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산 책 중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는 얼마 전 들은 김영하님의 명언(?)대로, 그에 대한 도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야 책장을 덮은 이 책은 '투병한 카프카. 요절한 카프카. 불행한 카프카. 멋있는 카프카' 로 이어지는 망자에 대한 나의 몹쓸 환상을 통쾌하게 박살내주는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정보를 담고자한 탓인지, 특이한 편집으로 성의를 보이려한 탓인지,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임에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카프카가 '그냥' 좋은 나같은 얼치기에게는, 그의 삶에 대한 궁금증에 꽤 많은 답을 주는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한 얘기가 너무 짧긴 하지만.. 사실 별 할 말은 없기 때문에.


2001-07-05 03:11, 알라딘



카프카의엽서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독일에세이
지은이 프란츠 카프카 (솔,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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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23:18


개인적으로 동물원의 노래를 오랫동안 들어온 내게 이번 작품에서 가장 먼저 각인된 것은 제목이었다.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이미 10여년 전부터 들어왔던 노래의 이미지 때문인지, 내가 알고 있는 전경린이라는 작가와 책의 제목이 얼핏 합치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추억은 소중하게, 사랑은 아름답게, 절망도 부드럽게, 방황 또한 조심스럽게... 늘 그렇게 노래하는 동물원과 흔하게(?) 흐뜨러지고 뒤집어지고 무너지고 상처내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심플하고 팬시한 북디자인과 무크지처럼 예쁘게 꾸며놓은 책갈피를 보면서도 조금 의아스럽고 부조화스럽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작품을 탐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책 속에는 자주 뭇여성들이 꿈꾸는 아주 매력적인 한 남자가 등장한다. 어느샌가 익숙해지기 시작한 활자의 이미지화를 따라 머리 속에 그려지는 풍경들 속에 그는 주로 늘씬하고 쓸쓸한 뒷모습을 가진 사내였고, 이번 작품에서는 유경이 그 역할을 맡았다. 시니컬하고 불안한 그의 등장 뒤에는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존재의 지극한 쓸쓸함이 숨겨져 있었고, 예상대로 그는 하얀 피부에 성마르고 외로우며 불가해한 신비를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 혹은 그와 같은 자리에 쉽게 무시하고 쉽게 빠져들고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진이 있으며 물론 그 사이에는 하염없는 희망과 그지없는 절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여자 은령이 있다.

그녀가 그려내는 세 사람의 일탈된 일상은, 어찌보면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한 편으론 누구나 꿈꿀 수 있기에 현실적이다. 극한의 대립점에 서있는 존재같이 느껴지는 유경과 이진은,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잠재하는 욕망 즉 정신과 육체, 모성애와 부성애, (치명적이지만) 낭만과 현실 같은 양립하기 힘든 부분을 각기 나누어 가진 남성이며 심지어 이들은 한 몸에서 나온 두 개의 영혼처럼 불가사의한 공감대를 이미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의 위태한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개인적인 매혹이다)한 사람의 자살과 가장 현실적인 한 사람의 등돌림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혼란스럽고 연약하지만, 제도 밖에서 더 안온해지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 은령은 전경린의 주인공답게 뭇사람의 눈으로는 쉽게 수긍할 수 없을 생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스물다섯 그녀가 유리로 만든 뱃전에서 떠돌던 낯선 바다가 아닌,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울고 웃고 희망하고 절망하는 일상이 지배하는 남루한 세상 속으로 말이다.

사실 책말미의 해설이나, 매체에서 접했던 이 책의 메세지는 물론 이런 가볍고 도식적인 얘기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봐도 탁월하고 마음에 꽂히는 그녀만의 언어로 자주 언급한 부분 역시 배반할 수 없는 '양부의식'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떠오른 그녀의 특화된 가족사나 현실적이고 스탠다드한 결혼 적령기의 남자 선모나 여자의 일생과 사랑의 본질을 설파하는 장롱 찾는 할머니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분명 건성은 아니었음에도 눈 떼지 못하고 읽는 내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마치 '캔디' 같은 은령과(알버트가 이진만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테리' 같은 유경의(사실 그 옛날 범람하던'캔디'의 결말은 TV에서 해줬던 하나의 버젼은 아니었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가슴 아픈 사랑 혹은 죽어도 이루어지지 못할 픽션의 안타까움이었던 것을.

그러나 전경린은 물론 탁월하다. 연필을 손에 쥐지 못한 전철 안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울 만큼 마음을 후벼파는 예리한 내면 묘사들. 중독된 자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여주는 그녀만의 표현들. 미처 상상치도 못했으나 너무나 들어맞아 소름이 끼칠만큼 찌릿찌릿한 비유들.

손에 든 초반부터 감히 순정만화를 떠올리며 캔디니 테리를 염두에 둔 것은, 작가의 속깊음과 행간의 뜻깊음을 간과한 미천한 독자의 경솔의 소치이겠거니...


2001-07-05 02:39, 알라딘


난유리로만든배를타고낯선바다를떠도네2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전경린 (생각의나무,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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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전경린 (생각의나무, 2001년) 상세보기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23:00


윤대녕은 나에게 있어 중단편의 작가다. 90년대 중반의 소설계에서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고 일정한 고정 독자군을 확보하며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동안 윤대녕이라는 이름은 내게, 동경해마지 않던 하나의 코드였다. 

알건 모르건 포스트모던이라는 취급 용이한 하나의 사조가 각종의 지면을 장식하는 사이, 윤대녕은 사회니 집단이니 하는 한물간(?) 거대 담론의 앙상한 대의를 완전히 배제하고 개인의 삶에 천착한 작품을 쏟아놓고 있었고,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내적인 밀도와 진지성으로 인해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일정한 아우라가 분명히 존재하는 까닭에 횡행하는 사조에의 구속조차도 비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이유로, 윤대녕은 사회에 속한 한 개인으로서의 의무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양심의 소리와 파편화된 세상살이로부터 느끼는 허무와 패배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하나의 일탈 기제로 작용해 주었다. 

몇 편의 장편이 있긴 하지만, 그의 소설에 뒤늦게 매료되어 허겁지겁 찾아 읽은 십수 편의 중단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존재에의 버거움에 눌려 중심을 잃고 떠도는.. 예외없이 반복되는 인물들은 나로 하여금 은연중 극한의 감정 이입을 경험케 했고, 그들만큼이나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고 떠돌고자 하는 영혼의 소리에 귀가 멀은 나에게 윤대녕의 소설 읽기는 가장 일상적인 위안을 가져다 줬다.

달의 지평선.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윤대녕 소설과의 차별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내가 아는 윤대녕은, 문학적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치와는 별개로 그것이 지난한 동어반복의 과정이건 어쨌건 간에 사회 속에서 부유하는 인물의 존재에 대한 번민과 그 여정에서의 신랄한 자기 발견의 과정을 그려나가는 작가였다. 

더불어 그의 단편의 빛나는 부분은, 흔히 극도로 정제된 시적 언어라 평가 받는 공들여 선택한 언어의 진중한 아름다움과 반복되는 인물 양상과 사건(?)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개성이 빛나는 상황적 긴장감 속의 탁월한 감정 전이였다. 

윤대녕이라는 이름을 두고, 일단 두 권이라는 분량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구조과 사건의 전개는 '달'이라는 하나의 매개를 축으로 풀어나간 이야기가 신화비평의 측면에서 볼 때 짜임새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후일담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강점에도 불구하고 생경한(?) 386세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전 작품들과 유사한 전개로 인해 오히려 그가 천착해 왔던 존재에 대한 순정한 성찰을 통속으로 흐르게 할 소지를 담은 불안한 설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중간 중간 삽입된, 흐름에서 돌출되는 에피소드와 인물들은 분량의 한계에 대한 작가의 부담일까 라는 추측과 함께 지루함마저 느껴져, 감정의 이완에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후에 간행된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로 <달의 지평선>의 시무룩한 감상을 어느 정도 달랠 수는 있었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존재에의 성찰과 삶의 이면에 대한 비현실적 실감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묻어나는 새로운 작품을 기대한다.

윤대녕 소설에 대한 열광은 변함없이 간직한 채로, 그러나 양질전화란 그에게 기대할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1999-09-24 12:57, 알라딘

 

달의지평선1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윤대녕 (해냄출판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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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지평선2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윤대녕 (해냄출판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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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22:51


<내일은 여는 집>과 <십년간>의 아슴한 기억 속에 반가운 이름, 방현석을 만났다. <아름다운 저항>, 제목 만으로 그는 여전히 어두운 시대 속에서 노동의 희망찾기에 여념이 없으리라는 반가운 믿음이 되살아난다. 

제대로 된 노동 한번 해 본 경험 없이 스물여섯을 살고 있는 나의 삶에서, 한 세기에 걸친 노동의 역사 그 저항의 역사가 얼마나 큰 마음의 반향을 일으킬는지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런지 조금 의구스럽기도 하고 다소간 부끄럽기도 했으나, 책을 읽어가며 사실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희망'이라는 화두 하나로 오늘의 현실이 그렇게도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상황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어디선가 한 번은 활자로 만났던 그 영웅적이고 위대한 투쟁의 역사는 분명 눈물 겹게 아름답고 소름이 돋도록 벅찬 것이기는 했지만, 현장에 발 담그고 있지 않은 때문인지 지난 투쟁을 승리적으로 평가하고 타산지석의 정신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는, 심정적 동감과는 별개로 사실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물론 어둡고 고단한 시대, 집단과 대의보다는 개인의 안락한 삶을 위한 이기에 함몰된 오늘의 삶에서 '희망'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 소외되고 낮은 자들이 내일의 빛을 볼 수 있을까마는,

그 '희망'과 빛을 겨누어 지난 투쟁의 성과들을 다시 한 번 펼칠 양이면 차라리(?) 투쟁을 모르고 저항을 모르는 일단의 대중 독자들과의 낮은 공감이라도 불러낼 수 있는 집필의 의도를 택할 수는 없었을까싶은 주제넘는 아쉬움 또한 책장을 덮은 후에 마음을 떠나지 않는 여운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돌아가는 현실을 호소하고 그 부조리에 대한 작은 공감대라도 얻어낼 생각이었다면 우리에게 있었던 정의의 승리와 그 벅참의 집단 경험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오늘의 '희망'을 되새겨 볼 생각이었다면, 소수의 마음을 요동치게 할 영웅적인 투쟁에 대한 후일담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시의성있는 반성과 대안이 조금 더 유효한 방법론이 아닐까 싶다. 

떠나온 사람의 현실적인 아쉬움이라고나 할까..


1999-09-22 16:28, 알라딘

 

아름다운저항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복지 > 노동문제 > 노동운동
지은이 방현석 (일하는사람들의작은책,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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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22:48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노동자 시인 박노해. 수감 생활 7년을 지나는 시기, 옥중 수상집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나왔다. 자신이 꿈꾸었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뽑혀져 나간 공허한 현실 속에서 다시 사람으로부터, 무언가 무너지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존재가 아닌, 언제나 주변에 있었던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새롭게 움트는 희망을 찾아내고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시인의 화두. 한 번은 다 바치고 가루처럼 부서졌을 그의 육신과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워 새롭게 정진하는 생활. 갈갈이 찢기고 상처입어 오히려 가벼워진 몸과 비워진 마음으로 시인 박노해가 눈을 들어 응시하는 희망의 세상은,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바꾸고자 했던 모순투성이 세상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바뀜없는 터전 위에서 그는 이전에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떨쳐버리며 패배를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끄집어낸다. 그의 내면에 깊이 깔려있는 사회 변혁과 진보에 대한 속깊은 열망과 '박/노/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상징하던 이상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한 채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박노해 시인의 글귀들이 투쟁성을 잃고 사념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좌절이든 타협이든 도피든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자신을 찾은 것이든간에 적어도 나에게는 박노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이제까지 전해줬던 지난한 삶에 대한 치열한 진정성에의 몸부림과 황막한 사회 속에서 우뚝했던 존재감.. 그 울림만으로도, 그의 변화(라면 변화)를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어떠한 믿음으로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인 자신의 말마따나 '길 찾는' 사람은 언제나 진행형 시제이고, 우리는 누구나가 다 '길 찾는' 사람일 뿐이므로.. 이것이 인간의 겸허한 모습이고 길이며, 박노해 시인 역시 그 누구보다 지금 자신의 길을 열심히 찾고 있을 것이므로...


1999-08-27 02:09, 알라딘
 


사람만이희망이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박노해 (해냄출판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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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30


최승호 시인의 글이 만만할 리 없건마는, 8월 초 일사의 더위 속 피서의 무리에 끼여들기를 작정하고 서해로 떠나기 전날 밤. 2박 3일의 너절한 휴가를 동반할 맞춤한 책 한 권이 아쉬워 책장 앞을 한참 서성이던 나에게 건져올려진 이유는 짐스럽지 않을 만큼 얇고 가볍다는 점과 얼핏 보니 아포리즘처럼 글씨와 여백의 비율이 조화롭다는 점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인터넷의 광고만 보고 성수기의 헐값 통나무집 민박을 예약한 대가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쏠려오는 후끈한 열기 뭉텅이들로 예감할 수 있었고, 이내 이 한 권이 나의 여름 휴가에 꽤나 유효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엄습한다.

지니고 온 책이 너무 물렁물렁해서였을까. 정말로 물렁해지고 미끈해져서 종내는 녹아없어져 버릴 것만 같은 불길함을 가득 담은 땡볕은 이제껏 내가 경험하지 못한 대기의 습도와 더불어 공격을 감행해왔다. 해변이고 숙소고 도저히 어딘가에 있을 수가 없어 찾아든 까페에서, 물렁물렁한 책읽기는 시작된다.

반죽과 혼돈의 아들처럼 물렁물렁하게 태어난 시인은, 아메바처럼 자유롭게(?) 마음 먹는 모든 것으로의 변환이 가능하다. 실은 그는 스스로를 녹이지 않고 만물에 스며들기가 가능한 시인이며 그 중에서도 최승호이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해도 사용하는 언어가 꽤나 불편하기 때문에 또다시 반죽을 꿈꾸고 반죽으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시인의 반죽 체험이 한마디로 뒤돌아설 수 있을 만큼 나긋하거나 가벼운 무책임함은 아니다. 어차피 천형처럼, 세계를 호흡하고 세계를 감식하는 시인의 운명을 타고난 그에게 반죽되기는 근원에 대한 물음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상정할 수 있는 하나의 유효한 방법론이다.

한때 반죽이었던 시인은,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그 형체 안에 갇혀버린 탓에 그가 사는 개포동 시장통을 구경하기도 하고 제주도에 가서 돌하루방을 보게도 되고 대도시의 '칭찬합시다'를 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인이 출발한 반죽의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반죽을 빌어 이렇게도 되어보고 저렇게도 되어보지만, 심지어 책마저도 물렁물렁하게 만들어보지만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물렁물렁한 책에서 마저도 여전히 네모진 종이에 딱딱한 활자로 우리가 한때 같은 반죽이었음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는 일 정도인 것 같다.

어떤 희망은 잔뜩 부풀어서 허망에 이른다. 뻥 터진 풍선의 너절함, 터져서 입가에 달라붙는 풍선껌의 너절함, 그러나 어떤 희망은 끝끝내 버려지지 않고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되씹힌다.(본문 73쪽)는 시인의 자조 혹은 인정처럼, 애초에 반죽에서 태어나 생각하는 무엇이건 될 수 있다고 한들 시인이 발견할 수 있는 반죽으로의 회귀 구멍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알고 있지만, 시인이기 때문에.. 끝없이 찾고 또 찾고 있는 것 뿐이지 않을까.


2001-09-16 16:25, 알라딘



물렁물렁한책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최승호 (마음산책,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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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27


고등학교때 새로 부임한 국어선생님은, 자신의 전공은 평론이라고 했었다. 아무 생각없이 시건 소설이건 수필이건 밑줄 긋고 까발리기 바빴던 그 시절, 국어 시간과 문학 편력이 공존하는 교실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신참 선생님의 '나의 전공은 평론'이라는 얘기는 한갓 날나리였던 나의 주의를 꽤 끌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경쟁하던 친구에게 시도 안되고 소설도 안되니 평론이나 하면서 욕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더라고. 물론 평론의 시작은 그게 아닐 것이다. 선생님의 진심도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읽어온 많지 않은 평론집들은 예전의 내게 각인된 '선생님의 평론'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들곤 했었다. 물론 어느 한 부분에서의 합치가 머리 속에서 확대되고 팽창하여 부적절하게 일반화된 느낌일 수도 있지만. 가끔씩 소설은 지루하기만 하고 시는 난해하기만 할 때 집어들던 것이 평론이었다. 그러한 한 때 우연히 만난 것이 남진우님의 평론집 '숲으로 된 성벽'이었던 것 같다. 그의 책에 손이 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선정한 텍스트들이 나의 관심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일반 독자의 다양한 관심에 대해 학자연하며 외면하지 않는 미덕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그의 다른 평론집들보다 더 일반 독자의 취향과 시선에 충실한(?)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주로 서문이거나 지면에 발표한 단평들의 모음일 것으로 생각되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본인이 밝힌대로 '인상적 소묘'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짧은 글 속에는 작가의 예리하고 명민한 분석의 시선이 살아 움직인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때로 아연할 만큼 순진하게 텍스트에 대한 흥분을 보인다는 점이다. 비판과 상찬의 황금률이 평론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겠지만, 그런 기계적 조화를 도외시하는 몇몇 작가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은독자로 하여금 문학을 단지 업이 아닌 삶으로 삼고 있는 글쟁이의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이성적이고 정연하지만 머리보다 가슴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글들의 연원이 바로 그런 자세가 아닐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시인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얼마나 뚜렷하고 극진한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얼마 전 김윤식 교수의 어느 인터뷰에서, 창작자가 되지 못한 자신은 결국 패자라는 식의 얘기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일개 독자의 눈에는 쉽사리 보이지 않는 행간의 무언가를 특유의 감식안으로 살피고 풀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근원적인 창작 컴플렉스가, 실은 그들의 글에 대한 자존의 다른 이름일 거라는 단정과 함께. 기다리던 그의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반갑다.


2001-09-16 14:34, 알라딘


올페는죽을때나의직업은시라고하였다
카테고리 인문 > 문학이론 > 수필론
지은이 남진우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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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23


제목도 표지도 편집도 내용도, 예쁘고 적절한 나무랄 데 없는 책이다. 그녀가 시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열심을 내어 그것들에 마음을 준 적이 없었기에, 처음 대한 사진들은 기대 없는 마음을 부드럽게 움직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책 속에 등장하는 40여개의 박물관은, 이 작은(?) 나라에 그 많은 것들이 다 있었나 싶게 생경하고 새롭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함께 나서는 길은, 말이 많지 않은 가이드의 여백을 둔 설명을 듣는 것마냥 독자에게 여유를 남겨준다.

너무 전문적이거나 앞서가지 않는 설명은 대상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담을 안기지 않는다. 어쨌건 기십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며 생겨난 막연한 집단무의식의 존재 덕인지, 포진해있는 우리 것들 속에 조금만 시선을 주면 되돌아오는 친근한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으니 말이다. 유행처럼 떠나는 유럽 배낭여행에서 주마간산이나마 각종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을 빠뜨리지 않는 우리들이라면, 이제는 그녀가 소개하는 이 작고 소박한 시간창고에도 한 번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때로 개인적인 추억담이나 기억 속으로 매몰되곤 하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동경하는 작가의 일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반가운 덤이 될 수도 있겠고, 나처럼 별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크게 거슬리지는 않으니 그 역시 나쁘지 않다. 그녀의 길을 따라나선 사람들 중 애초에 작가적 우아함이나 범접할 수 없는 필력의 황홀을 기대한 이는 많지 않을테니 말이다. 작가에 대한 선호도와 별개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의 세상에 대한 고운 시선을 목도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언젠가 사는 일의 신산스러움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그녀가 갔던 길을 따라 나도 한 번 가볼까 생각이 들 것 같다.


2001-09-16 13:39, 알라딘

 

시간창고로가는길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기행
지은이 신현림 (마음산책,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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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00:18


한때나마 윤동주를 사랑하지 않은 소녀가 몇이나 있을까. 해사하고 맑은 얼굴에 학사모를 쓴 흑백사진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서시'의 시인 윤동주. 동시대를 호흡하지 않은 시인의 시가 교과서를 지나 읽히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특히나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자화상' 같은 일련의 대표시들은 시인의 시심을 미처 가슴으로 느낄 사이도 없이 행과 연마다 헤집어진 채로 우리와 처음 만난다.

 잔뜩 밑줄 그어지고 주석 달린 채 참회니 속죄니 조국이니 하는 말들을 공식처럼 주워섬기며 우리는 윤동주를 익혔던 것이다. 와중에도 그의 시에(혹은 이미지에) 사로잡힌 우리 중 몇몇은 생애 첫 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직했고, '초 한 대'니 '무서운 시간'이니 '또다른 고향'이니 '태초의 아침'이니 하는 교과서 밖의 시들을 큰 비밀이나 되는 듯이 잠 못 이루는 밤 책상머리에서 들춰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때였다.

 시와 윤동주를 사랑했던 소녀들은 또다른 시들에 매료되었고 이미지의 윤동주를 사랑했던 소녀들은 쉽게 그를 잊어갔다. 그리고 그는 광복절 즈음이 되면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의혹에 싸인 죽음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종종 복제되곤 했다.

 이 책은, 윤동주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실존하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작가가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매우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윤동주와 일생을 기묘한 인연으로 함께 한 고종사촌 송몽규의 근친이며 소설가인 작가는, 대상에 대한 절도있는 애정과 문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시인의 일생을 훌륭하게 책 속에 되살려 놓았다. 사망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의 시대를 함께 보낸 사람들로부터 얻어낸 생생한 증언들은 흑백사진 속의 창백한 시인이었던 윤동주를 생동하는 인간으로 부활시켰다.

 몇몇 대표시와 글로써 저항하는 순교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박제가 된 시인은, 상급학교 진학 실패라는 좌절을 맛보는 평범한 소년기를 거쳐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유학할 수 없었던 식민 조국의 현실에 몸서리치던 피 뜨거운 청년기의 갈등 속에 번민하는 살아있는 젊은이였던 것이다. 또한 윤동주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의 배경인 북간도와 당시 세계 정세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세계사와 역사에 무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같은 민족임에도 우리의 의식 속에 비존재로 남아있던 간도와, 부끄러운 친일의 근대사를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는 기개와 자존의 삶을 실천했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뿌듯함마저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움이었다. 한편 개정판에서 추가되었다는,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나오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강처중과 관련된 일화 역시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버릴 뻔한 소중한 언급이라고 생각된다.

 윤동주에 빠졌던 어린 시절, '어두운 시대의 시인의 길'이라는 중학교 1학년생이 감당하기엔 무척 버거웠던 책이 한 권 있었다. 아끼고 아끼며 공들여 읽어낸 책장을 덮을 때,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아려오고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었다. 10여년이 훨씬 더 지나 문득 떠오른 그 책의 행방이 묘연해 아쉬움으로 대신하게 된 이 책은, 어쩌면 여중고생용으로 어쩌면 전국민용으로 팬시처럼 취급되곤 하는..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진짜로 알지 못하는 시인 윤동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성인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2001-09-16 11:52, 알라딘



윤동주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송우혜 (세계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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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