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에 해당되는 글 403건

  1. 2003.01.24 날씨가 너무 좋아요
  2. 2003.01.23 클로디아의 비밀
  3. 2003.01.23 에버렛 루에스의 아름다운 날들
  4. 2003.01.2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5. 2003.01.20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6. 2003.01.20 71년생 다인이
  7. 2003.01.18 황선홍, 그러나 다시
  8. 2003.01.18 On The Road
  9. 2003.01.13 요절
  10. 2003.01.01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다.
비밀같은바람2003. 1. 24. 16:30
여든의 자살을 꿈꾸는 마흔의 소녀

황주리. 내게 그녀의 이름은 낯설고, 그림도 새롭다. 여든 살의 아름다운 자살을 꿈꾸는 불혹을 넘긴 독신의 화가. 그녀에 대한 무지와 무관하게 무척 매력적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는 책 첫머리에 그녀가 인용해 놓은 카뮈의 책 속에 나오는 말이다. 짧은 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평온함이 마음에 들었다. 여든의 자살을 상상했을 때, 글을 쓰던 그녀는 이제 꼭 반생을 살아내고 남겨둔 마흔 즈음이다. 화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의 감수성이 내 주변의 생활에 젖어 마흔을 넘기는 여인들과 같지는 않겠지만, 십 년을 남겨둔 나의 마흔에도 여생에 대한 그런 설렘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책장 사이에 등장하는 그녀의 그림들은 대체로 모노톤의 세련된 쓸쓸함을 한껏 담고 인간에게 닥치는 불가항력의 고독에 대해 속삭이는 느낌이다. 화려한 원색으로 치장된 그림들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은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인간 군상들의 불가해한 소통에 대한 담담한 응시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관계를 부정하는 외곬의 그림쟁이거나 인생의 따스함을 외면하는 냉혈의 여인 같지는 않다. 어쩌면, 결국 살아가는 일이란 자기 몫으로 던져진 고독을 등에 이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픈 욕망을 견뎌내는 일은 아닐까. 

그녀는 행복해보인다. 태생의 조건이나 자라난 환경, 타고난 재능도 '그녀의 행복'(?)에 적잖은 영향을 줬겠지만 그것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그녀가 홀로 감내해야하는 삶과 일의 무게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견디거나 버티기보다는 즐기고 음미하기.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맨해튼 고공의 자기만의 방,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싶은 곳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와 여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그릴 수 있는 그림. 한 사람의 삶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를 가진 그녀,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절대 고독이라는 존재의 멍에를 아름답게 즐기는 법을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그녀의 삶을 향한 마음이 참으로 부럽다.



날씨가너무좋아요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황주리 (생각의나무, 2001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게바라의 나라 쿠바를 가다  (0) 2003.01.24
소설가의 각오  (0) 2003.01.24
클로디아의 비밀  (0) 2003.01.23
에버렛 루에스의 아름다운 날들  (0) 2003.01.2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0) 2003.01.23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3. 23:31
당돌한 아이들의 비범한 가출기.

귀엽고 재미있다. 내가 클로디아만했을 적에 한참 유행했던 무슨무슨 비밀일기인가 하는 책이 있었다. 또래 친구들이 동화책이나 만화책에 눈을 박고 있던 시절, 어려울 것도 없는 그 시시한 책을 보면서 마치 내 정신이 한 단계 도약하는 듯한 우스운 착각에 적잖이 만족스러웠던 기억. 이유는 단지 다른 애들은 아직 읽지 못했다는 것 뿐이었데.. '클로디아의 비밀'을 읽으며 그 시절이 떠올랐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모범생 클로디아. 학교와 집이 세계의 전부인 시절, 모범생은 누구나 선망하는 타이틀이다. 하지만 명석한데다 독특한 자의식까지 겸비했던 클로디아에게 체제 순응적인 모범생의 일상은 지루했고, 집에서는 맏딸로서의 일정한 노동까지 책임지워져 있는 형편이었다. 하여 그 답답한 삶의 배경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삶의 목표가 되고, 똑똑한 클로디아에게 가출은 여느 문제아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나를 찾아 떠났다가 '무언가를 찾아 금의환향하는' 완벽한 계획으로 수립된다.

일단 계획에 돌입하면서부터 생활 반경 내의 모든 것을 참고 자료 삼아 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동반자 결정, 안전을 위한 가출 장소 결정, 실패 없는 출발을 위한 감행 날짜와 시간 결정까지를 완벽히 점검하고 마침내 실행! 결국 경제 관념이 철저한 구두쇠인 동생 제이미와 함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의 가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일어나는 자질구레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두 어린 아이의 비범한 가출기에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을 잃지 않는 작가의 철저한 계산이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풍부한 설명을 통해 작가는 두 아이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마치 눈에 보이듯 상세히 독자에게 들려준다. 화자로 설정된 프랭크 와일러 부인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을 굽어보는 어른의 시선이 아닌 동심과 교감할 수 있는 자상한 눈높이로 이야기를 더욱 부드럽게 이어나간다.

비밀을 가지고 싶은 하여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싶은 클로디아의 가출기는, 어린 시절을 옭아매는 집과 학교라는 두 개의 울타리를 떠나 자아 찾기에 (잠정적으로) 성공한 가장 유쾌한 예로 기억될 것 같다. 비밀을 간직한 채 돌아와도, 학교는 집은 여전하겠지만 가슴 깊이 간직한 비밀의 힘은 클로디아를 미소지을 수 있게 할테니 말이다.



클로디아의비밀
카테고리 아동 > 초등5~6학년 > 문학/고전 > 문학일반
지은이 E. L. 코닉스버그 (비룡소, 2000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가의 각오  (0) 2003.01.24
날씨가 너무 좋아요  (0) 2003.01.24
에버렛 루에스의 아름다운 날들  (0) 2003.01.2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0) 2003.01.23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0) 2003.01.20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3. 23:00
짧게, 순수하게, 아름답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비단 현실의 벽에 부딪쳐 상처 입은 사람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낮선 이름, 에버렛 루에스의 경우 특힌 그렇다.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도전에의 모험을 홀로 감행한, 그리고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어린 왕자처럼 증발(?)해버린 청년.

길지 않은 스무 해의 삶 중에서 1930년부터 34년까지 만 5년간, 실종되기 직전까지의 기록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이다.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낭만보다는 홀로 가는 길의 시련과 고통이 더욱 극명해 보이는, 혼돈스런 시절의 방황이라고 하기에는 일견 무모해보이는 길떠남의 기록들이다. 인적 없는 벌판의 어둠 속에서도 살을 에이는 추위만이 감도는 낯선 땅에서도, 길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스스로의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그가 남긴 일기로 그의 정신과 흔적을 좇는 일은 말 그대로 잃어버린 순수를 찾아떠나는 여행이다. 누구에게나 잠재된 야생과 자연에의 회귀 본능은 성장하면서 처하는 조건과 문명의 세례라는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며 하나의 성향으로 자리잡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몸 한 구석에 흐르는 예술가의 피가 문제였을까. 아쉬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가정과 좋은 교육, 탄생과 함께 정해진 인생 가도를 따른다면 분명 상류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의 미래가 보장된 태생이었던 사람. 에버렛은 자기 몸 속의 뜨거운 피가 원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고 결국 자연의 일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버렛루에스의아름다운날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에버렛 루에스 (중앙M&B, 2001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씨가 너무 좋아요  (0) 2003.01.24
클로디아의 비밀  (0) 2003.01.2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0) 2003.01.23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0) 2003.01.20
71년생 다인이  (0) 2003.01.20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3. 00:00
아주 개인적인 기억과 다시 만나게 해 준..

2년 전, 아니 벌써 3년 전이 되었다. 마음이 정처 없었던 어느 해 가을, 홀로 떠난 배낭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파리였다. 따스함과 화려함보다는 그늘진 우울함에 더 끌리는 마음 그대로 나의 여정은 독일을 중심으로 동부 유럽의 몇몇 나라들 위주로 짜여졌었다. 마지막 5일간을 파리에 머물며 베르사유도 별로고 루브르도 내키지 않았던 내가 유일하게 기대한 곳은 바로 근교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미술에 특별한 조예도 특출난 감식안도 없는 내가 마음에 담는 그림들은 대체로 고독하고 우울한 인생을 산 화가들이 그려낸 헛헛한 정조를 담은 것들. 그런 의미에서 고흐는 참 제격이다. 그림을 그려본 일도 없고 그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그저 좋아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던 그의 그림은 그 삶 만큼이나 쓸쓸하고 허허로와서 언제나 마음에 잔잔한 동요를 일으킨다.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인터넷 이곳 저곳을 뒤져 오베르 쉬르 우아즈, 일명 고흐마을에 대한 각종 정보를 찾아두고 2000년 10월 5일 마침내 나는 그 곳에 있었다. 평온한 전원의 풍경을 지나친 기차를 내려 고흐의 그림들이 걸려있는 소박한 역사를 빠져나와 내려선 길에는 그림 속 태양을 닮아 꼬불하게 말려있는 가로등과 인적이 드문 흐린 하늘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말년에 고흐가 머물던 여관은 식당과 기념관으로 바뀌었고 백여년 전 목숨을 끊었다는 방에는 그가 숨쉬던 광기어린 고독이 스며든 듯 잔잔하고 섬뜩한 공기가 배어있었다. 고흐의 그림 속 풍경을 따라 가셰박사의 집과 오베 성당, 까마귀 나는 밀밭까지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길을 걷다보니 동생 테오와 함께 묻혀있는 작은 묘지에 다다른다. 그의 삶만큼이나 초라하고 쓸쓸하게 붙박혀있는 비석에서 잠시 마음이 아련해지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그 날의 기억은 이 책과 함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어찌 보면 발랄하고 상큼한 제목. 단지 '고흐'여서 선택했던 이 책은 그만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샤갈, 마티스, 피카소, 르누아르를 비롯한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과 중요한 미술관들을 일별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 안내서와 교양서의 면모를 두루갖춘 작은 판형의 부담없는 내용으로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갔고 고흐에 대한 내밀한 기억을 가진 내게 고마운 환기를 불러일으켰다. 말미에 사진과 함께 덧붙인 미술관 안내는 프랑스 미술에 관심이 있고, 여행을 떠날 사람이라면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언젠가 이 작은 책을 배낭에 넣고 또다시 그 곳으로 떠나고픈 바램으로 나는 가끔 이 책을 열어본다.



고흐의집을아시나요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 청소년예술
지은이 최내경 (오늘의책, 2001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로디아의 비밀  (0) 2003.01.23
에버렛 루에스의 아름다운 날들  (0) 2003.01.23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0) 2003.01.20
71년생 다인이  (0) 2003.01.20
황선홍, 그러나 다시  (0) 2003.01.18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0. 11:30
조금은 고요해도 좋다면..

'성공과 승리란 좌절과 실패의 반어일 뿐 결코 행복의 진정한 모습이 될 수는 없다.'이런 얘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책장을 덮은 지 두어 달이 지나 다시 펼쳐보다 발견한 밑줄이다. 제목만큼이나 소박하고 잔잔하게, 비우고 비워 고요해진 삶을 살아가는 저자의 생활관쯤이 될 것 같다. 그는 하루 종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면서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충일을 느끼는 천상 자연의 사람이다.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꿈꾸고 그리던 바다와 마주해도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이리저리로 지루한 시선 돌릴 곳을 찾아대던 기억을 가진 나같은 사람과는 조금 다른 부류랄까.

희생이나 헌신, 깨달음이나 유유자적, 극복이나 인간승리. 한 인간의 흔적을 기록한 많은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부터 '나도 그처럼' 이라는 꿈은 조용히 접어버린 것 같다.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훌륭하구나. 대단하구나. 혹은 아름답구나. 이제 더이상 그들이 부럽거나 그들처럼 되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는다. 수없이 넘긴 책장과 아로새긴 감동이, 나를 변화시키는 추동질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엿보는 일은 분명 흥미롭다.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이라고 말을 꺼내는 작가의 이야기는 마치 속세를 초월한 듯 청아하고 우아한 삶의 본령을 파고들며 중간중간 우주와 세계를 향한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여름 홍수로 범람하는 개천을 걱정하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민박을 치고, 사랑하는 부인에게 줄 붕어싸만코의 낙상에 안타까워하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모 또한 숨김없이 드러낸다.실제로 가난한 화가이며 민박집 주인인 작가의 투박하고 정직한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그가 꿈꾸는 것이 피안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누구에게나 주어진 현실에서 세상 모든 생명있는 것과 상생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자연을 그리고 가축들을 키우며 인간들만의 것이라 착각되고 있는 소통과 교감에 더 큰 차원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름답고 애틋하지만, 아무나 그처럼 고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고요하고 담백한 그의 현재와 달리 피끓는 시절 연애에 목매고 청춘에 힘겨워했다는 고백처럼, 한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사람만이 차갑게 맑아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은가난해도좋다면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최용건 (푸른숲, 2001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버렛 루에스의 아름다운 날들  (0) 2003.01.2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0) 2003.01.23
71년생 다인이  (0) 2003.01.20
황선홍, 그러나 다시  (0) 2003.01.18
On The Road  (0) 2003.01.18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0. 00:00
조금은 어설프다, 하지만 진심어리다.

'경찰서여, 안녕'의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일종의 기대감과 함께 기억하고 있다.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그를 가까이서 접하고, 작품 속 비범한 발랄과 재기와는 달리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면서 그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한동안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71년생 다인이 또래의 선배들과 함께 학창 시절 절반 남짓을 운동의 언저리에서 보냈고, 그 시절 그들은 몇 살 나지않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선배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겨났다. 하지만,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대부분 외면한다고해서 당사자들마저 잊을 수는 없겠지만, 담담하게 돌아보기엔 너무나 뜨거웠었고 다시 빠져들기엔.. 안타깝지만 시대착오적이다. 

누구보다도 시대와 인간을 사랑했지만 광장의 시대 끄트머리에서 시작된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로서의 삶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변화의 주인공이었던 선배들의 환희에 찬 무용담에 덩달아 가슴 벅차하면서도 막상 돌아서면 세상에, 사람에, 현실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곤하던 그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스스로 결정한 양심의 무게에 짓눌려 눈부신 젊은 날을 소진해버린 그들. 아마 후회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후일담 소설의 퇴폐적 낭만성과 잠정적 패배주의라는 한계 때문인지, 이 작품은 다층적인 시점의 화자가 등장하는 입체적 구성의 성장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금은 구태어린 주제를 다루는 대신 미흡하나마 추리적인 구성도 가미해 소설적 재미에 신경을 쓴 흔적도 역력하다. 어쩌면 후일담도 성장기도 아닌, 그저 자신이 속했던 시대적 비극과 불운이 세상의 속도에 밀려 흔적을 잃어가는 것을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는 젊은 글쟁이의 개인적 욕망의 소산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이른 시도였을까. 행간에 보이는 작가의 마음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욕심이겠지만, 소수의 눈물어린 안타까움이나 뒤늦은 회한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개 끄덕일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71년생다인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김종광 (작가정신, 2002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0) 2003.01.23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0) 2003.01.20
황선홍, 그러나 다시  (0) 2003.01.18
On The Road  (0) 2003.01.18
요절  (0) 2003.01.13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8. 23:26
진부한 기획, 하지만 진심이 담겨있는 책

유명인의 인생사를 기술한 책들은 급조되거나 과장되거나, 그렇지만은 않더라도 단지 '판매'라는 목표를 위해 출판되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매대 하나 정도는 신드롬의 주인공이 된 유명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로 가득 채워져있고, 가끔 기분 전환 삼아 서점에 들르는 내게는 언제나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이름 황선홍. 축구도 몰랐고 그의 이름 석자는 그저 축구선수, 가끔 멋있는 비쥬얼이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그냥 그 뿐이었는데..월드컵의 환희와 광풍으로 오랫동안 이름으로만 친근했던 선수들의 일화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국가대표 은퇴와 붕대 투혼으로 유독 내게 감동을 주었던 그의 얘기가 궁금해졌다.

웹사이트도 찾아보고 그가 실린 신문 기사도 찾아보고 하면서, 젠틀하고 수려한 외모와 밝고 서글한 표정 뒤에 감춰져있던 그의 어두운 과거와 인생의 우여곡절을 알게 되고 마음에 잔잔한 동요가 일었다.그리고 만난 책이 '황선홍, 그러나 다시..'. 어찌 보면 그렇고 그런 신드롬에 편승해 출간된 예측 가능한 내용으로 가득찬 책이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진부한 기획이라 폄하할 수 만은 없는 그의 진실과 가려졌던 아픔에 눈길이 가닿았다. 아직 한참 진행형인 그의 인생 중간 결산 자서전쯤이 될 법한 이 책에는, 단지 운동선수여서 겪어야했던 특별한 아픔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평범한 한 인간의 고통과 환희가 담담하게 배어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월드컵 이후 그의 행보가 정해지기 이전의 혼란한 때였는데, 일찍부터 새옹지마의 인생사를 몸소 겪어온 주인공의 흔들림 없는 소신과 인생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보다 조금 덜 산 인생 후배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며 단지 겉으로 화려하고 일견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듯 보이는 한 유명인의 성공 뒷얘기에 감탄하고 혹하기 보다 시련 많은 그의 인생을 통해 조금은 나의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 같다.진실과 허위의 잣대를 거두고 전해오는 진정성에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자신과 가정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때로는 이렇게 속보이는(?) 기획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에 예외는 있다.

 

2003-01-18 18:32, 알라딘



황선홍그러나다시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운동선수/무도인
지은이 황선홍 (중앙M&B, 2002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0) 2003.01.20
71년생 다인이  (0) 2003.01.20
On The Road  (0) 2003.01.18
요절  (0) 2003.01.13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다.  (0) 2003.01.01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8. 18:30
꿈꾸는 길은 내 발 딛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누가 '길'의 흡인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노톤 표지의 잔잔한 매혹에 강렬히 끌려 책을 발견한 것은 이미 이 책이 '품절'된 후였다.어렸을 적 길을 잃고 동네의 낯선 골목들을 헤매며 느꼈던 공포와 혼돈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에 대한 작은 암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펠리니의 '길'이나 '아이다호', '길버트 그레이프' 같은 영화를 보면서, 또 끊임없이 길 떠나는 윤대녕의 소설을 보면서 나는 길 위의 영혼이라는 현실도피적이고 피상적인 일탈을 자주 꿈꿔왔다.하지만 가지 않은 길, 알 수 없는 길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두려움과 공포라는 만만치 않은 대가와 맞바꿔야만 충족시킬 수 있는 것, 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 발자국 발 떼는 것조차 쉽지는 않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이 책을 다시 발견하고, 사진 작가가 담고 적은 길 위의 풍경이 너무 궁굼해서 어렵사리 구해서(출판사인 디자인하우스 홈페이지에서 주문) 읽은 후의 느낌은 이렇다. 작가의 삶은 분명 평범하지 않다. 그녀가 숨쉬는 공기도 내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길이 내 살아가는 일상의 저 편 멀리에 아스라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땅으로부터 어디론가 뻗어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술에 의탁한 삶의 주인공이 대체로 그렇듯, 작가도 자신을 얽매는 구태에 갑갑하고 영혼이 숨쉴 수 있는 자유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다. 그녀가 택한 새로운 땅과 하늘 아래서 만난 사람들, 선택한 새로운 길은 범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다만 커다란 차이는 그녀가 따스한 가슴과 비범한 용기를 실천으로 옮겨 원하는 바를 얻었다는 것.

그녀의 얘기를 따라 가 본 적 없는 호주의 곳곳을 염탐하는 일은 신선하고 즐겁다. 호주라는 거대한 야생의 땅을 발견하고 여행하면서 그녀가 카메라를 들이미는 대상은, 작고 힘없는 동물이거나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슴이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스산하고 적막한 풍경에서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쓸쓸함보다는 삭막한 인공의 도시에서 벗어나 차분히 명상할 수 있는 자연의 선물로 여기는 작가의 건강한 밝음은 유쾌하게 빛이 난다.누추한 일상의 돌파구 삼아 집어들었던 이 책에서, 호주의 낯선 구석구석의 소소한 이야기들에 빠져있는 동안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길도, 꿈도, 이상도 결국엔 지금 내 자리에서 시작되는 마음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삶과 자연과 자유를 사랑하는 그녀가 선사한, 세상 가득히 널려있는 따스함과 사랑에의 발견에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ONTHEROAD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한현주 (디자인하우스, 2001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71년생 다인이  (0) 2003.01.20
황선홍, 그러나 다시  (0) 2003.01.18
요절  (0) 2003.01.13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한다.  (0) 2003.01.01
제임스 조이스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0) 2003.01.01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3. 23:23
요절, 강렬한 시대착오의 매력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만을 소란스럽게 고민하는 현실에서 요절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천재 예술가의 요절이라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퇴락과 염세의 매력을 담고 있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대상은 나혜석, 구본웅, 이중섭, 오윤 등 그 이름이 익히 알려진 작가로부터 조선조의 윤두서, 이인상,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던 전 기, 김종태 등으로 (일반인에 대한) 유무명을 막론하고 예술에 생을 걸었던 인물들이다. 옴니버스 인물 열전의 형식으로 쓰여져 한 인물에 할애되는 분량의 한계는 있지만, 말미에 덧붙여진 참고자료의 방대함이 아니라도 이 책에 들인 저자의 애정과 진심은 평전과 비평을 곁들인 객관적인 해설 사이로 보이는 감정 이입적 글쓰기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을 따르는 전형적인 수사들과 몇 점의 대표작으로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그들의 삶이, 죽음과 함께 연소된 예술혼과 고독하고 지난했던 생을 향한 저자의 진정어린 감탄과 애도로 행간을 통해 살아 전해지는 느낌이랄까.미처 알지 못했던 생과 사의 주인공들이 그저 요절한 천재예술가라는 진부한 이름 뒤에 가려져버린 아쉬움만큼이나 모노톤으로 조용히 가라앉은 책 표지의 잔잔함 역시 아쉽기 그지없다.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기력과 자기 소외에 빠져 공허한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나누고 싶은 쓸쓸함이 담겨있는, 그리고 조금은 살아야겠다는 새삼스런 기대마저 일게하는 고마운 책.


 
요절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예술가
지은이 조용훈 (효형출판, 2002년)
상세보기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1. 23:22


한때 너무 많은 노래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노래와의 상관이라면 기껏해야 잘 듣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듣는다는 정도, 노래가 없는 일상을 상상하면 마음이 심히 갑갑해진다는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음계와 박자와 화음과 등등의 노래의 룰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이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주제 넘는 걱정에 마음이 쓰이던 한 때가 있었다. 물론 이런 나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노래는 오늘도 또 내일도 끊임없이 새롭게 흘러나올 것이다. 비록 도가 넘는 리바이벌과 리메이크의 행렬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그 역시 새로움이라면 달리 할 말은 없으니.

한차현의 소설을 읽으면서 불현듯 이런 예전의 생각들이 떠오른 건 왜인지 잘 모르겠다. 소설은 이제 무슨 얘기를 해야할까, 물론 난 그런 주제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꽤 오래 집착하는 윤대녕과 김영하, 전경린에 이어 누군가 새로운 요즘 얘기를 풀어줄 사람을 기다리고도 있었던 것 같다. 소설 마당을 헤집고 다니며 찾아본다면 나와 맞는 글 몇 가닥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 내게로 다가온 어떤 심상찮은 글들의 여운을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알라딘의 에디터스 초이스라는 형광(?) 연두색 글씨에서 난 마음 놓고 자유롭지는 못한 편이다. 처음엔 너무 경쾌하고 리듬감이 느껴지는 산문체의 제목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주저했었지만,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면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골라잡은 책이다. 솔직히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감기는 눈과 힘 풀리는 손목을 무시한 침대맡 새벽 독서로 이 책을 읽었던 까닭일 게다. 비록 소설일지라도 행간에서 느껴지는 작가의(혹은 화자의) 고독하고 자존적인 자의식을 목도하는 일은, 실은 그런 훔쳐보기를 꽤나 즐기는 편임에도 침대맡이었기 때문에 다소 비루하고 지리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방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각 소설마다의 분위기와 문제의식을 도드라지게 새겨내는 것이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존재와 세계에의 화두를 내려놓지 않음에도 헛헛한 웃음 한 자락은 남겨놓는 여유는 소설과 별개로 자꾸만 감기는 눈을 치켜올리게 만드는 꽤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한편 시점의 혼용이나 화자의 교란(?)과 같은 장치에 잠시간 멀뚱해졌던 순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되새김이 무의미한 쉬운 글들에 무신경하게 노출되어왔던 정신의 나태에 상쾌한 자극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든 것은, 소설 말미에 실려있는 무려 세 장 반에 이르는 작가의 말이었다. 조금은 긴 호흡으로 담담하고 진솔하게 뱉어낸 그의 말을 읽고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으니까.


2001-09-25 02:37, 알라딘



사랑이라니여름씨는미친게아닐까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한차현 (생각의나무, 2001년)
상세보기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On The Road  (0) 2003.01.18
요절  (0) 2003.01.13
제임스 조이스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0) 2003.01.01
흑백 사진 뒤에 가려졌던 삶의 열정을 보다.  (0) 2003.01.01
진지한 순정 만화 같은  (0) 2003.01.01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