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6. 11. 8. 01:00


뒤늦게 '발견'한 '경성 트로이카'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이관술을 주인공으로 한 안재성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실은 좀 됐다, 지난 8월의 일이다.) '경성 트로이카'의 여성 주역들이었던 동덕여고생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의 교사이자 이순금의 이복오빠였던, 대다수 조직원들의 검거로 와해되다시피 한 '경성트로이카'의 후신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준비그룹(경성재건그룹)' 활동을 위해 이재유와 단둘이 와신상담 목숨 건 길을 떠났던, 이재유가 검거된 뒤에도 '경성준비그룹'의 활동을 지속하며 '경성콤그룹'을 결성하고 일제하 최후의 저항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바로 그 이관술이다.
 

'경성 트로이카'에도 많은 혁명가들이 등장하지만 워낙 이재유의 존재감이 눈부셨던 까닭에, 사실 해방 이후까지 활발히 활동했던 이관술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감이 있었다. 물론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혁명가들이 그렇겠지만, 그 역시 이재유의 카리스마에 가려져 그저 조역 정도로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빛나는 삶을 살았다. 남 부러울 것 없는 경제력과 명예를 두루 갖춘 집안의 장남이었던 이관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택해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다. 사상과 이념보다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를 우선시했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동덕여고에 부임해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의 의거와 그에 대응하는 학교측의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와 한계를 절감하고 공산주의를 선택한다.
 

만석꾼 집안의 수재로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관술의 삶은,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단 한 번의 좌회전(?)을 거쳐 죽는 날까지 흔들림없이 직진한다. '경성 트로이카'에서 이재유와 콤비를 이루며 마치 암행어사와 보좌역처럼 그려졌던 이관술은 그러나, 이재유의 검거 이후에도 고군분투하며 옛 동지들을 규합해 결국 '경성콤그룹'의 재건을 이루고 해방 이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에서 새 조국 건설에 열정을 바쳤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해방 후 우익 성향 단체인 '선구회'의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순위에 꼽힐 만큼 대표적인 항일 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로 국민들의 신망을 받는 영향력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분단 고착 및 공산주의 씨말리기 공작에 힘 입어 그는 '정판사 위폐사건'에 연루, 투옥되고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총살형으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생전에 그가 남긴 회고록의 제목이자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는, 식민 조국이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태어나 지하 활동과 검거 고문 투옥이라는 쳇바퀴를 돌며 한 생을 살았던 그가 남긴 참으로 절절한 소회다.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이 맞이할 운명을 그가 예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심과 정의의 길을 따라 비타협적으로 묵묵히 살아 온 이들에게 결국 현실은 배반 혹은 죽음이라는 양단의 선택을 강요할 뿐이었다. 스스로 배반하지 않으면 역사가 배반해버리는, 끝까지 가봐야 처참한 죽음과 연좌로 이어지는 불행 말고는 달리 별 볼 일 없다는 것. 어쩌면 현대사 고비마다에서 마주치는 안타까움보다, 우리가 더욱 눈여겨보고 민감해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어진다. 저자는 책 서두에서, 이관술의 유족을 만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잠시 후, 영하의 모진 바람이 불어대는 부평역 광장에 때 아닌 울음바다가 행인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경환 할머니와 이관술의 두 외손녀 손옥희 씨와 박경희 씨, 또 이들을 태우고 온 손녀사위들까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단지, 이관술을 그린 작가, 그의 생애의 일부분이나마 긍정적으로 복원한 작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통곡을 터뜨린 것이었다.  ...  이렇게까지 한이 깊은지 짐작 못했던 내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한 맺힌 삶을 살아왔는가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경성 트로이카'에 은혜(?)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다소 맥 빠지고 지루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전자가 망자들로부터 발신된 초역사적 영감 같은 것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이 책은 '쓰기 위해' 저자가 무척 애를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표제로 내세운 '1902-1950 이관술'은 단지 그의 생몰연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반쯤은 그 시대에 관한 글쓰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관술이 살았던 시대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이 다소 어수선하고 방만하게 서술되고 있어 한 인물을 내세운 책 치고는 산만하고 집약성이 떨어지는 게 아쉽다. 어쩌면 그 만큼 주인공에 대한 자료가 빈약했거나 혹은 그가 '영웅으로 선택'될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드러지는 존재감과 후대의 독자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의 활자로 살아숨쉬는 영웅의 재생산보다 더욱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불과 몇십 년 전의 '역사' 마저도 픽션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갈기갈기 찢긴 현대사 복원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비단 유족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함만이 아니라,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거라고 느껴질 만큼 너절하고 빈곤한... 뿌리를 잃은 오늘, 여기, 우리들의 삶과도 깊이 관계된 일이 아닐까.



이관술1902-1950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안재성 (사회평론,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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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6. 8. 12. 06:00


트렌스젠더, 넝마주이, 레즈비언, 장애인, 외국인 이주노동자, 소외 어린이, 비전향 장기수, 사이버 코뮤니스트. 그야말로 '다르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여덟 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앞의 일곱은 대략 알겠는데 '사이버 코뮤니스트'는 영 낯 설어 검색창을 두드려봤는데, 정보라고 뜨는 것 역시 이 책과 관련한 소개글이거나 기사인 걸 보면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소수자들 중의 소수자인 모양이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소외 어린이에 대한 꼭지를 제외하고는, 소수자인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쓴 글이다. 그가 속한 소수자 집단 전체를 포괄하는 입장(?)을 전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해하거나 뜬구름 잡는 느낌 없이 잘 읽혀서 좋다.
 

하리수가 급부상하기 시작할 무렵 '못생긴 트렌스젠더 이야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는 트렌스젠더 김비의 글은 여성지 수기가 연상될 만큼 자기고백적이고 일면 신파적이다. 남 달랐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영어강사로 나름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는 현재까지의(2002년) 이야기, 태어나기도 성장하기도 참 남 달랐던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역시 상처나 치부는 드러낼 때 오히려 담담해지는 걸까. '동성애자 그룹(?)'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저 다르다는 인정에 머무는 이해지만, 어쩌면 그 역시 타고난 생물학적 성이라는 주입된 지식을 너무 맹신하고 있었던 탓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넝마주이 윤팔병은, 나만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무려 아홉 형제의 여덟 째라는 저자는, 한국전쟁 한 복판을 지나며 더욱 파란만장해진 가족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객사한 아버지와 참전, 월북, 행불, 학살, 자살 등으로 가족의 연을 달리한 대다수의 피붙이들, 그 중 막내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윤구병씨다. 동생에 대한 유쾌한 소개를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1943년 윤구병, 상머슴이 꿈이었던 동생 구병이는 외도를 하여 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자본주의 교육의 역기능에 견디지 못하여 교수직을 그만두고 지금은 전라북도 변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제수씨 왈, "똥장군 메고 똥품 잡고 있다." 출간되고 세월이 좀 흐른 탓에, 그가 지금은 어찌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얼핏 아름다운 가게쯤에 걸쳐진 이름을 본 기억이 있다. 아무려나, 적어도 이 즈음까지의 그의 삶은 그야말로 거지왕, 야인의 풍모를 물씬 풍기며 밑바닥 세상으로부터의 정의와 연대를 실현하는 통쾌한 무용담이 가득하다. 읽다가 심지어, 나도 모르게 '아이다호'의 밥이 떠오르기까지.
 

일곱 빛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소비하듯 읽어버린 감도 좀 있어 괜히 미안하기도 한데... 나머지 글들은 위의 두 이야기만큼 생생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한참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상식선의 선이해가 만들어 낸 무감흥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인간은 내 문제가 아닐 경우, 같은 이야기의 반복에 무던해지기 마련이고 좀더 실감 나거나 자극적인 무엇이 없다면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소수자건 아니건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사실 모두 타인일 뿐이고, 소수자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 결국엔 다름에 대한 무심한 인정은 아닐까 싶어 좀 씁쓸해지기도 했다. 물론 내 독후감을 쉽게 일반화했을 때 얻어지는 결론이다.
 

책을 엮은 윤수종 교수는 여는 말에서 소수자들의 삶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전체 민중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라는 선언적인 당부(?)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라는 제목의 발문에서 소수자에 대한 학술적 접근, 소수자 운동의 사회적 의미와 정당성 나아가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물론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감정적 공감과 달리 '소수자'의 존재를 그 역시 너무나 자의적으로 과잉해석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주제 넘는 의문이 떠올라버렸다. 이를테면 그는 소수자의 특성을 지배가치에 저항하는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담지한 것,으로 규정하고 우리 모두 소수자가 될 것을 선동하고 있는데 물론 그것이 혁명적으로 폭발하듯이 진행되는 무엇은 아니라고 해도 과연 얼마나 엄정한 근거를 가진 주장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나름 반골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무척 반가운 말이지만, 그래도 좀 지나친 건 아닐까.
 

더구나 이 책에 목소리를 담은 소수자들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분명 우리 사회 차별과 억압의 당사자로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제껏 그래왔던 그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스스로 움직이며 조직하기 시작한 그들과 연대를 모색하는 것은 당연히 지향해야겠지만, '소수자'라는 명명에 기대어 실제 그들의 삶을 너무나 정치적으로 주체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를테면, 대략(!) 민주화되고 불과 이십 년이 지나지 않아 벌써 구시대적 유물처럼 되어버린 지지부진한 '거대' 운동의 돌파구 같은. 물론 '소수자'의 정의 혹은 실체가 무엇이건, 단지 대다수와 다르다는 이유가 그들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찬 피폐함으로 남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선정적인 농락과 과잉해석이 난무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한 반짝 신드롬이나 쿨하고 이물스런 유행을 넘어설 수 있을까. 어렵고 잘 모르겠다. 어지러운 독후감을 남겨주는 책이다.



다르게사는사람들(우리사회의소수자들이야기)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사상 > 사회계층
지은이 윤수종 (이학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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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6. 1. 25. 01:00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동화의 마지막 문장이다. 어느 리뷰에선가 읽고 이 말이 뇌리에 진하게 남아 책을 찾아 읽었다. 100만 번을 살았다는 말. 한 번 사는 인생도 이리 고달픈데 어떻게 100만 번을? 생명 있고 감각이 있는 존재라면, 의식까지는 모르겠지만... 인생과 묘생이 굳이 다를 건 없을 거라고, 어쨌건 그 자체로 분명 삶에 따르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 생이 끝나면 아무 것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굳이 또 태어나야 한다면 자기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무엇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편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면 그조차도 불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100만 번을 태어나고 죽은 이 엄청난 고양이. 임금님의, 뱃사공의, 마술사의, 도둑의, 할머니의, 여자아이의... 그러니까 늘 누군가의 고양이로, 사랑받으며 한 생을 살고 한 생을 마감했으나 죽음이 아무렇지 않았던 고양이다. 하지만 이 도도한 고양이에게 삶이 의미롭지 못했던 것은 언제나 태어나고 죽기를 무려 100만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100만 번이나 태어나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밖에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구하지 않았으나 당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동안, 고양이는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하고 시시했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좋았을 뿐이었다.
 

100만 번이나 끊임없이 사랑받았으나 늘 누군가의 소유격 속에 존재했던 고양이가 온전히 자기만의 고양이로,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 것은, 멋진 얼룩무늬 도둑고양이로의 환생.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로 태어난, 하지만 100만 번이나 끔찍히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충만한 고양이는 이전에 없었던 혼란에 시무룩해진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이 너무나 끊임없고 당연하여 도무지 관심 없었던 고양이에게, 하얀 고양이의 시큰둥한 반응은 자못 충격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많이 서툴다. 무의식 중에도 늘 스스로를 향하던 마음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분산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혼돈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것, 이 도도한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고양이는 하지만, 동화책 속의 고양이답게... 두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꼬리를 내리고 고백을 한다.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그리고 초스피드, 하얀 고양이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많이많이 낳아버렸고, 고양이는 더 이상 100만 번이나 살고 죽었던 과거를 언급하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가 되어버린다. 급기야 할머니가 되어가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해버리던 고양이는, 실로 울음을 그친 하얀 고양이 곁에서 밤낮을 오열하다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춰버린다. 그리고 명문장,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선거를 하고 나서라 그런지 어이없게도 책장을 덮으며 '한 순간을 살아도~'하는 노래가 생각나 버렸지만(정말 어이없다. 제목은 '아, 민주정부'다..;;), 이 도도한 고양이의 100만 한 번째 삶이 주는 교훈(?)이 요즘 내가 많이 생각하는 문제들과 딱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인생도 동화책처럼, 만나야 할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나 아닌 누군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다음에야 환생이 필요 없는 종지부에 이른다면 얼마나 선명하고 간결할 것인가. 물론 누군가를 만나 극진한 자기애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그런 스스로에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혹은 세상을 진심으로 좋아할 필요는 분명 있는 것 같다,고 방금 동화책을 읽은 사람답게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나로 태어나기 전, 나는 몇 번이나 누군가의 그 무엇으로 살았던 걸까. 전생 같은 거 궁금해한 적 없는데, 문득 궁금해진다.




100만번산고양이
카테고리 유아 > 4~7세 > 그림책일반 > 세계명작그림책
지은이 사노 요코 (비룡소,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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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5. 8. 26. 04:00



나는 김창완 아저씨가 좋다. 가끔 길거리 로또광고나 인터넷 무슨무슨 론 광고에서 마주치는 것 이외에는 어디건 대체로 반갑다. 초등학교때였나,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베스트극장'에 삽입된 '안녕'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어른같지 않은 여리고 얇은 목소리의 첫느낌은 라디오를 끼고 살며 조금씩 접하게된 그의 새노래(실은 이전의 명곡들)들을 통해 차츰 깨어지기 시작했고, 우울하고 낮게 읊조리는 혹은 터질듯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포효하는 그의 노래들은, 한 사람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지만 '김창완'으로 자연스럽게 수렴된다.
 
본격적으로 김창완에 열광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였다. 김기덕이 진행하던 '2시의 데이트'에는 뮤직드라만가 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한 뮤지션의 살아온 이야기를 그의 노래들과 함께 라디오드라마로 엮는 형식이었다. 당시 '독백'과 '청춘'과 '회상'을 특히 좋아했던 나는, 불같은 연애 후에 이른 결혼으로 어린 아빠가 된 그가 아들의 백일인가 돌잔치날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와 지었다는 '청춘'의 비하인드스토리가 너무나 멋지게만 느껴졌고, 다섯살 어린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구분 못 해 아무때나 모래밭에 나와 노는 자신을 선생님이 안아서 교실로 데려가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서 귀엽다며 흐뭇해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의 공개방송에서 나이를 먹을 수록 자기 나이가 좋아진다고 했던 그의 말을 나는 이르게 알아버린 인생의 비밀인 양, 한동안 마음 속에 간직했었다. 당시까지 정규음반도 무려 10집이상 나온 터여서 내가 주로 들었던 산울림의 노래들은 네 장으로 나온 '산울림 Greatest Hits'라는 시리즈 음반이었다. 뭔가 열받고 분노조절이 안 될 때에는 나직이 읊조리는 '독백'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고, 괜시리 마음이 슬퍼져서 위로받고 싶을 때에는 '지나버린 날들'이나 '날 사랑하신 님이여'를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중3때 DJ였던 그가 진행했던 방송, CBS AM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우연히 주파수를 맞추다가 듣게 된 낯익은 목소리,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방송이었다.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기뻐하며 그 날 이후 매일 밤 귀 기울여 들었던 그 방송은, 이른바 고정팬들의 엽서들로 거의 커뮤니티와 같은 분위기였고 당시 그 중심에는 백혈병을 앓고 있던 '민초희'라는 언니가 있었다. 나보다 두 살인가가 많았던 그 언니는 글도 잘 쓰고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그림도 잘 그리고, 사연을 통해 짐작하건대 마음도 정말 고운... 안타깝게 아픈 언니였다. 육개월 가량 나는 방송을 통해 그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고, 나처럼 방송을 들으며 언니를 걱정하고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고, 어느 날은 방사선치료로 머리가 다 빠져 모자를 쓰고 있는 게 너무 슬프다며 삼단같이 긴 머리의 인어공주 그림과 자신의 나비핀을 보내주었다는 말과 함께 연달아 내보낸 두 곡의 노래 뒤에 묻힌 아저씨의 흐느낌을 들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아마 자기는 세상에 없을 거라는 사연, 아저씨는 '초희'이라는 노래를 손수 만들어 그 방송에서만 가끔 들려주셨고(나중에 임백천이 음반을 낼 때 '슬픈 꽃잎'이라는 제목으로 불렀었다, 왜 임백천이었을까..;; 나는 정말 아쉬웠었다.), 얼마가 지나 어디선가 정말로 그 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얼마가 지나 다른 심야 방송에 나온 아저씨의 소지품 뒤지기(어느 심야방송이었는데, 그런 코너가 있었다..--;)에서 발견된 나비핀의 정체를 의심스러워하며 농을 하는 DJ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이 나왔고, 또 시간이 더 지나서는 문성근이 아저씨 역할을 한 동명의 영화가 나왔다. 그냥 이렇게만 쓰는 것이 야박(이거 요즘 누구때문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하게 느껴질 만큼, 내게 그 시절은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참 풍부한 시간들이었고 그 한 축은 분명 김창완 아저씨가 맡아주고 계셨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나는 그 사람과 그의 노래를 꾸준히 좋아한 관계로,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암튼, '그런' 김창완 아저씨의 새 책이다. 수백곡은 족히 넘을 그의 노래들이 놀랍도록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글 또한 벅찬 사랑의 환희와 헛헛한 인생 무상, 예쁜 동화와 극단의 우울을 오가는 것 같다. 이번 책에는 주로 흑백 혹은 모노톤의 아련한 느낌들, 추억들,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상들이 담겨있다. 언젠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에 '꽃은 왜 아름다운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던 그의 대답이 생각난다. 너무너무 소박하고 친절한 동네아저씨같지만 그는 지독하게도 외롭고 고독한 천재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아주 특별한 인생을 가장 평균적인 평범의 이미지로 살아가는 사람.
 
비교적 무난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책에서 그는 꿈과 유년시절과 가족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제야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혹은 마음에 보인 것은 무엇일까... 에필로그에는 그의 친구 '위대한 그림자'와의 대화가 한 토막 나온다. 내가 스스로를 비관주의자라고 그러자 친구는 나지막히 말했다. "그것만은 말하지 마라." 너무나 진지하고 무겁게 말을 꺼내서 나는 대꾸도 못하고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계속 중얼거렸다. '난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어. 그렇게 생겨먹은 게 나라구. 이 바보야' 그 친구는 인내심이 대단했다. 나의 게으름, 나의 주벽, 나의 허황된 꿈, 나의 편견을 다 견뎌냈다. 그는 이 친구가 있어 그렇게도 여러가지 모습을 한 몸에 담고 살아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노래했던 '무지개'처럼, 다른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구경꾼처럼 휘파람을 불고 모두 떠나고 외로워질 때는 길동무가 되어 같이 걸어주는. 그리고 실은 나도, 그를 친구 삼아 무지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제야보이네(김창완산문집)(오디오북CD1장포함)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김창완 (황소자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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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5. 8. 1. 19:30


1994년이었다, '나마스테'라는 연극이 있었다. 조선일보에서 우연히 기사를 봤는데 극단 한강의 장소익씨가 연출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며, 극의 실제 주인공인 나바라즈(당시 강제추방인가, 암튼 불안한 위치였다고 했다)라는 노동자가 직접 출연을 할 가능성도 있어 썰렁한 객석을 수사관들 몇이 채우고 있다나 뭐 그런... 며칠 후 나는 조선일보에 대한 재수없음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얕은 관심과 장소익씨에 대한 믿음과 연극을 보고 싶은 마음, 등등을 담아 극장으로 향했다. 예술극장 한마당이었나, 대학로 대다수 극장들과 다소 동떨어져 찾기도 쉽지 않았던 그곳은, 안타깝게도 신문 기사 그대로 썰렁한 객석의 냉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드문드문 자리를 채운 열 명도 채 안되는 관객들 앞에 펼쳐지는 무대 위의 이야기는, 원초적인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그야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만들었고 공연의 감동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마스테'는 우리말로 치면 '안녕하세요'쯤 되는 네팔의 인사말이라고 했다.
 

1995년 지자체 선거 때였다. 선거운동에 결합해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던 어느 날, 뭐가 거슬렸는지 경찰들이 떠서 하루를 공치는 거 비슷하게 보낸 적이 있다.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단체티를 맞춰입은 터라 눈에 띄어 어디 딴 데로 갈 수도 없고 해서 성남시청 뒤편에 위치한 주민교회 지하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외국인노동자들과 중국동포의 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교회에는, 그때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쫓겨온 우리들 수십 명은 본의 아니게 한가한 일요일 낮 시간의 여유를 즐기던 외국인 노동자분들에게 방해꾼이 되어 민망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디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마스테'를 본 이후로 나름 생각한 건 있어서, 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마주치게 되면 따뜻한 표정과 눈인사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던 나였지만 미처 준비도 없이 마주치자 영 어색하고 불편을 끼치는 입장이라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누군가로부터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노동자분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십 분 쯤 지났을까. 나갔던 한 분이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사와서 쑥스러운 듯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동에 눈물이 다 날 뻔 했다. 그리고 그 날, 선거운동을 공 친 우리는 오후 내내 교회 뒷마당에서 그분들과 배드민턴도 치고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반나절의 짧은 시간,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위의 두 사건으로 나는 외국인 노동자분들에 대해 나름대로는 조금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류애와 솔직히 말하면 단지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 조국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정말이지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해서 마음만이라도 각별하게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차에 내가 상당히 열광했던 <느낌표>의 '아시아 아시아'가 시작됐다. 첫 주에 나왔던 삐뿌씨가 불렀던 '서울로 가는 길'의 그 처연함과 남양주 이정호 신부님의 여유로움과 인간미에 반해, 한참 노느라 바쁘다가도 토요일 밤 11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매주 눈물을 질질 짜대며 열심히도 봤다. 남들 다 하면 좋아라 하던 것들도 딱 그만 두고는 하는 이상한 성격이지만, '아시아 아시아' 신드롬의 냄비현상이라고 한대도 언제건 기회가 되면 자원봉사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리고 2003년 5월말에 이사를 와서 내가 처음 한 안양 나들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있는 전진상 복지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조금 서운한 이유로 자원봉사를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외국인 노동자분들에게 적잖은 마음의 빚을 가지고 살고 있고 언젠가는 꼭 그분들을 위해 자원활동이라도 할 생각이다. 이 책도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만났다. 외국인 노동자분들의 입국이 이미 십여 년을 넘긴 지금에는 2세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가 작게나마 이슈가 되고 있어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방 활동을 정리하면 이후에는 가능하면 이쪽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다.
 

잡설이 너무 길었는데... 책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딱 표지만큼 인간적이고 따스하다.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일곱 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인공들은... 이틀 후면 낯선 모국으로 돌아가는 여섯 살짜리 코시안 띠안, 부모의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인해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코시안의 사연을 접한 이후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자원교사, 머나먼 타국땅 안산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친구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타 쉼터를 7년째 지키고 있는 아저씨, 코시안으로는 처음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몽골 소년, 그럭저럭 살만한 형편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삼아 한국행을 선택했다가 몸 상하고 맘 상한 조선족 부부, 월드컵 때는 오로지 신나게 즐기기 위해 사직서를 내고 제주도까지 경기를 보러갔었다는 미래의 영화감독 방글라데시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인식된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가족의 대표선수격이다. '때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제일 먼저 배우고, 하루의 반 이상을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월급을 떼이거나 강제추방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 - 하지만 그들은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가 아니며 당연히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저 다른 국적, 다른 생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 역시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르다는 것은 그저 차이일 뿐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 말로는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우리는 나와 다른 상대에게서 느끼는 근원적인 몰이해와 몰지각의 벽을 생각만큼 쉽게 헐어버릴 줄 모르는 게 아닐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국경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례 위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과 고단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지만, 대상 선정에 있어 남녀노소의 비를 고루 고려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게 조명하고 있어 마치 우리 이웃의 살아가는 이야기인 양 읽으며 웃음 짓고 한숨 짓게 만든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시선 역시 억압받는 피해자 일색이거나 동적적이지 않아, 오히려 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 그들을 취재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이 글을 집필한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그들을 각각의 국적을 가진 개인으로 - 개인이 가진 각각의 이름으로 소통하며 '외국인 노동자'라는 뭉뚱그린 정의를 거두어낸 후에 오히려 그들을 진정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각별히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들과 가까이 만나볼 기회를 가지지는 못한 내게는, 책 속에 소개 된 그들이 저자의 소개로 건너건너 알게 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국경없는마을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박채란 (서해문집,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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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5. 5. 29. 22:00


대학원에 와서 3학기째를 보내며, 어찌하다보니(?) 나의 주관심은 '빈곤'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홀로 생계를 꾸려가며 나름의 미래를 감당해야하는 시점에서 그나마 부끄럽지 않게 입에 풀칠할 직업군으로 선택한 직종이 사회복지 혹은 NGO 종사자였다는 결론이 작용한 결과다. 현재의 나의 직업이 공부방 실무자라는 것도 물론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대학원에서의 전공수업 선택은 잠정적 필수과목이 아닌 다음에는 늘 빈곤 혹은 아동에 맞춰졌고, 기말 페이퍼 등의 과제 선택도 역시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사회복지운동론 개별 연구 덕분에 읽게 되었다. 주제를 공부방 운동으로 정하고 보니, 공부방 운동의 모태이며 뿌리가 된 도시빈민운동 혹은 주민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필요했고, 공부방에서 일하며 나름대로 필요나 관심에 의해 찾아보고 혹은 교육에서 들었던 내용들은 선택적 기억에 의해 댕강댕강 흐름을 짤라먹은 상태로 내 안에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교적 NL과 PD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나는 이른바 NL계열이었고, 폄훼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 안의 PD동아리 아이들에 대해 무관심 내지는 냉정한 편가르기식의 시선을 나름대로 주입시켰던(?) 선배들 덕택에, 도시빈민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때도 같은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도대체 왜 잘 지내지 못하는지 의아스럽고 짜증이 났지만, 같은 조직 안에서도 조직성 없는 자유주의자로 이른바 독사들한테 혹독한 비판을 받곤 했던 터라... 게다가 나는 끝까지 운동판을 지킬 그릇도 못되는 인간이라고 일찌감치 주제 파악을 하고 있던 터라,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것 같다.
 

도시 빈민운동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보면 단행본으로 된 유용한 자료는 '아침'이라는 이 출판사에서 나온 몇 권의 책이 자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절판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구해서 보니,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이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한 때 운동은, 과잉이다 싶으리만치 각광을 받은 한 영역으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도시빈민 혹은 철거민이라는 운동의 주체세력은 연구 대상으로도 운동의 결과 무언가 개선된 세상의 주인으로도 대접받지 못한 채 그저 사회의 주변부,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조용히 양산되고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도시빈민에 대한 관심으로 몇 권의 시리즈 연구서를 펴낸 한 출판사 대표(물론 그의 정체성의 일부다)에 의해 그나마 관심을 가진 후배들에게 빛바랜 몇 권의 책이나마 소중한 자산으로 남겨졌을 따름인 것 같다.
 

농민의 자녀, 노동자의 친구일수도 있지만 농민도 노동자도 아닌 비공식집단에 속한 도시빈민들은 60년대 경제개발 계획과 7.80년대 도시개발 계획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가난하고 정많은 순박한 달동네 사람들'로 미화되거나 '무식하고 겁없는 징글징글한 철거민들'로 비하되거나 하는 양극단의 이미지로, 가끔 매스컴을 통해 왜곡된 시선으로 주목 받은 것 이외에는 늘 무화된 존재로서 살고 있는 집단이다. 책을 읽고 있던 요 며칠 사이에도 오산의 철거민들에게 골프공을 날린 미친 경찰들 얘기가 오르내리고 있고, 도시재개발 뿐 아니라 거대 미군기지가 이전한다는 평택의 어르신들도 수십년에 걸쳐 몇 차례 계속된 철거에 이제는 남은 목숨을 걸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번듯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서민들은 엄두도 못낼 집값과 땅값을 자랑하는 서울 지역의 대부분은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저곡가정책, 소농제 유지 등 온갖 농촌 죽이는 정책에 떠밀려 아무런 대안 없이 서울로 서울로 온 가족이 봇짐 싸 올라온 철거민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떠밀리고 떠밀리며 자리잡은 서울의 대단위 판자촌인 사당동이나 낙골지역에 대한 이야기들도 생각해보니 90년대 초반 뉴스를 통해 접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다. 봉천동 어디쯤이었나 용역깡패들에 의해 할머니들의 속옷에 연탄재가 짓이겨지고 할머니며 아줌마며 할 것 없이 폭행이 자행되던 어느 르포 프로그램을 보며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저럴 수 있는가 하는, 과연 내가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엄청난 절망감과 슬픔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이 책에서 대표적인 철거민촌 혹은 빈민촌의 사례로 나오는 몇몇 지역 중 삼양동은,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미아동과 바로 옆이었다. 소중한 몇 백원의 용돈을 모아 너무 맛있었던 떡볶이를 사먹으러 가곤 했던 삼양시장 바로 윗편부터는 아마도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가는 빈민들의 판자촌이 펼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중학교 때 이사를 왔던 서초동 역시, 새로 입주한 아파트의 번지르르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진입로 한 켠으로 그때는 용도를 알 수 없었던 비닐하우스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닐하우스들은 자취를 감추고 무슨무슨 식당들과 사무실들이 들어섰고 결국 그 자리에서 떠밀린 사람들은 포이동, 개포동 등지의 어디론가를 흡수되어 버렸던 거다. 도시개발이니 국제회의니 아시안게임이니 올림픽이니 하는, 우리 사회 성장 신화의 이면에 가려진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성장을 위한 희생양이었던 동시대의 그들에 대한 나의 관심이 새삼 불편하게 느껴질 만큼, 그들의 삶은 처절한 인간 이하의 그것이었다. 그들의 짐승같은 삶을 담보로 내가 편히 살아왔다는 자책과 미안함을 지울 수 없으며 동시에, 그러한 사실마저 아무도 모르게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
 

과제 때문에 읽기는 했지만, 머리보다 가슴으로 읽은 책이라 리뷰가 영 잡기스럽지만... 현재 검색되는 빈민운동 자료 단행본으로는 가장 통합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한 지역에 대한 집중 탐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질적 연구 방법에 근거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결과를 내놓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도시빈민에 대한 이론 정립과 자료 정리가 거의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고통 받는 도시빈민들의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엮었다는 겸손을 보이고 있지만, 출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시빈민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의 가치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7장으로 묶여진 도시빈민 운동 자료 모음이 아닌가 싶은데,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들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와 운동세력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있어 활자를 넘어 시청각 자료와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한편 도시빈민운동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주민운동정보교육원과 같은 단체들에서도 꾸준히 교육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서의 기능이 좀더 추가된다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도시빈민연구(아침새책2)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복지 > 사회복지이론 > 사회정책
지은이 정동익 (아침,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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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5. 16:00
재미와 의미, 나무랄 것 없는 적당함.

나는 김영하가 좋다. 그의 글쓰기와 박학다식과 유창한 달변과 아이러니한 유머와, 심지어 큰 키와 염색한 머리까지. 일정한 거리를 가진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 안에서 나는 그가 참 좋다. 작업하는 그를 본 일은 없지만 하나의 문장을 위해 하얗게 밤을 지새우고 하나의 작품을 위해 일상을 희생하는 이른바 작가적 삶의 구현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김영하는 고전적인 작가상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내보이는 글들은 하나같이 적당한 심도와 밀도를 유지한다. 글을 읽다보면 그만의 필터링을 거친 일상의 모습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의미를 담아 뒷머리를 잡아채는 듯한 짜릿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오랜만에 나온 그의 책은 산문집이다. 주황과 파랑의 대비로 장식된 단순한 책 표지는 조금 의외였지만, 속에 담긴 그의 재기와 영민함은 여전하다. 아이콘이라 이름 붙여진 첫 장에서 그가 주목하는 대상들은 엉뚱하지만 유쾌한 상상력으로 그럴싸한 의미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 어렴풋한 느낌으로 스쳐지나간 어떤 생각에 대한 적확한 지적이며 환기일 때가 많다. 또 이 책에는 전작 소설들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개인사적인 면모가 많이 드러나있어, 대체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길래 저렇게 사고할 수 있는가 궁금했던 나의 호기심도 조금은 채울 수 있었다. 물론 혼자 내린 결론은, 평범과 비범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유연함과 재능을 '타고난' 사람인가보다, 였지만.

지난 가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 피프 광장에서 영화제 부스를 기웃거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꼬리 잡아 농담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글 속의 냉소가 떠오르는, 여유로운 거리감을 풍겨내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방송을 진행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의 글을 읽고 느끼는 유쾌함과 그의 방송을 들으며 느끼는 그것이 내게는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는 김영하라는 코드를 통해 변환되고 생산되는 갖은 의미들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령이나 본분에 대한 충실함보다, 그를 통해 새롭게 사고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욕심내는 내게 그의 글은 유쾌한 충전제다. 하지만, 너무 잠잠하다 싶은 그의 신작 소식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포스트잇김영하산문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김영하 (현대문학,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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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5. 15:00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어떤.. 동질감.

사진작가 윤광준의 '소리의 황홀'에서 언급된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화장실 휴지 대신 신문지를 사용해야하는 궁핍함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지극한 애착, 사춘기 시절이었다면 정말 멋있다고 느꼈을까. 한마디로 광적이다. 지면이나 웹상에서 스치듯 그의 잡글을 읽은 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책으로 접하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단편적인 그에 대한 정보로 내가 가진 선입견은 대체로 맞아들어가는 느낌이다.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에 걸맞게, 책의 반쯤은 음악에 그리고 나머지는 그의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있다. 어쩌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 만큼 두 가지는 그의 삶을 채워가는 하나로 혼융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쯤 되는 그의 청년기는 청춘과 방황, 낭만 같은 현재적 의미에서 소구력을 잃어가는 가치들이 꽤나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에 어울리는 불우하고 결핍되고 외곬인 인간 김갑수의 모습이 있다. 지난한 삶에서 그를 구원해준 것 역시 음악과 사랑,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책장 가득 넘쳐난다.

차례로 나열되는 수많은 연주가들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들은 그의 전문성보다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들어온 그의 과거를 생각하게 한다. 행간에 스며있는 기형도 시의 그늘은 그의 글에 신산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가 언급한 '베티 블루'를 이십대 초반 나도 봤었다.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강렬하게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파괴의 욕구를 어찌하지 못해 미쳐 죽어버리고 마는 여자 베티. 이십대 초반이라고 해서 세상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때로 환한 불빛 뒤에 감춰진 세상의 모습인 양 되살아오곤 한다. 영화만큼 미화하지 않는다면, 김갑수의 페르소나는 나이 먹어 다소간의 안정을 찾은 베티 정도가 되지 않을까. 볼 수는 있되 매혹에는 금기가 따르는, 흔하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분명 볼 수 있는 그런 존재.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동경은 그래서 더욱 애틋한 건지 모르겠다.



텔레만을듣는새벽에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음악 > 교양음악 > 음악감상
지은이 김갑수 (웅진닷컴,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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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4. 20:00
체는 없다. 그저 쿠바가 궁금하다면...

한 때 불어닥쳤던 게바라의 열풍은 이제 잠잠해졌다. 팬시가 되어버린 혁명가의 포스터는 뭇 영화 포스터나 가수들의 브로마이드와 변별할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저 궁금한 사람은 언젠가 다시 찾아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음에 새길 것이고 아니면 그만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던 시절, 교육 방송에서 봤던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축 늘어져있는 한 사람에 대한 흑백의 기억이 시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97년을 전후해서는 조용히 그의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사망 30주년을 기념하는, 다소 함량 미달이었던 그의 일기와 삶을 재구성한 소설 등이 출판되었다. 조악한 편집과 떨어지는 밀도, 시의성에 편승한 기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단편적인 정보와 인터넷 말고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 길이 없었기에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2000년, 인물에 대해 지나치게 미화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마치 이것이 진짜라고 말하듯 당당한 양장본으로 돌아온 '체 게바라'는 그 신드롬의 정점에 불을 붙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실천문학사의 양장본 평전 출간으로 신드롬이 일어난 후 나온 몇 권의 '체 게바라' 관련 책들과도 많이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저 먼 나라에서 이미 살다간 인물에 대한 나의 매혹이나 진심과 별개로 그는 이미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므로, 그를 읽고 새기면서 무언가 다르고 싶은 욕구나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 한 권이라도 붙잡고 확인하고픈 나의 마음 역시 그리 별다른 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책의 내용에 대해 말을 하자면 '체 게바라의 나라'를 뺀 '쿠바를 가다'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남미 그리고 쿠바는 매혹적인 자연과 신비로운 문명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선망의 땅인 동시에 물리적 거리 만큼이나 아직은 아득한 심리적 거리감에 둘러싸인 곳이기도 하다. 이 미지의 땅에서 선구적(?) 상공인의 길을 걷고 있는 저자는, 조금씩 환기되는 남미와 쿠바를 향한 관심에 대해 경험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안내와 정보를 제공한다. 게릴라 혁명에 성공한 이상적인 국가 모델이었던 과거의 이미지가 아닌,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압도적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활기찬 공산주의 국가 쿠바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열 번 이상 방문했던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쿠바의 이모저모를 따스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소개한다. 

호감이건 반감이건 나처럼 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집어든다면 일종의 배신감 내지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게 될 지 모르겠다. 제목과의 연계성을 의식해서인지 쿠바 곳곳에 산재한 체 게바라의 기념물이나 혁명 정부에서 활동할 당시의 흔적들을 일별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쿠바와의 무역을 업으로 삼는 사업가의 쿠바 안내에 머무른다. 게다가 전내용에 걸쳐 깔려있는 저자의 과시 욕구와 전시성 일화들은 책의 흐름을 끊어놓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성격은 앞 뒤 표지가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데, 앞표지에는 너무나 익숙한 체의 사진이 뒷표지에는 저자의 활동을 자랑하는 사진과 설명이 채우고 있다. 얻을 것이 없는 책은 아니지만 무언가 불순한 의도를 감지할 수 밖에 없는 조금 씁쓸한 독서였다.



체게바라의나라쿠바를가다
카테고리 여행/기행 > 해외여행 > 북남미여행
지은이 강태오 (마루(김억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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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03. 1. 24. 17:00
마루야마 겐지, 천명의 글쓰기

윤대녕의 관심 작가라는 이유 하나로 마루야마 겐지라는 낯선 이름은 내게 기억되었다. 영화도 책도 우리 것을 유난히 밝히는 나는, 학창 시절 뭔가 찔리는 마음으로 회색 제브라펜을 쓰던(난 회색이 너무나 좋고, 당시 국산 회색펜은 없었다) 심정의 소산인지, 어지간해선 일본 것에 손이 가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애국과는 별개의 문제다. '상실의 시대'가 유일한 일본 문학 독서였던 내게, 게다가 당대의 거품 평가에 대한 반감으로 진심으로 책장과 교감할 수 없었던 내게, '물의 가족'은 신선한 느낌을 안겨줬고 이어 잡은 책이 바로 '소설가의 각오'다. 

둔중하고 선언적인 무언가를 담은 듯한 제목의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부담없고 흥미롭다. 학문의 길을 가는 선승같은 모습의 사진이 주는 선입견은 책장을 넘기다보니 그 뒤에 숨은 엉뚱함을 더 궁금하게 만들어준다. 천상 작가의 운명을 뒤늦게 깨달은 거장의 한 평생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내가 갖고있던 '선민 - 글쟁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재고해 볼 여지를 남겨줬다. 물론 겐지의 경우 뒤늦게 깨달은 선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려나 글과는 아무 인연 없이 청춘을 보냈던 그의 이야기는 잠재된 그 무엇에 대한 묘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반가운 증거였다고나 할까. 

후반부에 기술한 그의 현재는 남다르다. 뒷골목 깡패같은 정처없는 청춘을 보낸 그의 모습이 고요함 깃든 선승의 풍모를 지닌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가다운 삶'의 결과일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인간 관계망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오직 글을 쓰기 위해 먹고 자고 뛰는 생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만을 누리는 놀라운 자제력은 글쟁이의 운명을 타고난 자의 소임 이상이다. 작가는 이래야 한다, 라는 정석을 말하기에는 이제 너무나 다양한 스타일과 패턴이 존재하지만, 타고난 천재보다 빛나는 것은 돌고 돌아 뒤늦게 깨달은 천명의 글쓰기를 온몸으로 행하는 작가의 삶이다.



소설가의각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일본에세이
지은이 마루야마 겐지 (문학동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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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