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지는 않지만 몇 년간 본 스페인어권 영화들의 좋았던 기억과 관심을 끄는 소개에 기대감이 생겼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8살 아이 코코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영화였는데, 현실에서 체험하는 혼란을 늘 불만과 불안으로 표출하는 어린 주인공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어쩐지 감독의 사고를 어린이에게 투사해 대상화한 듯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감응이 좀 어려웠다.
영화에는 정체성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어린이의 혼란과 그를 둘러싼 어른들의 다양한 입장이 등장한다. 나름의 긴 인생을 살아온 엄마와 아빠, 할머니, 이모할머니 등 주인공의 주변 어른들은 각자 가진 기존의 관념과 편견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이모할머니를 제외하면 모두가 조금은 방어적이고 예민한 관계에 있고 소통방식 역시 그렇다. 은은하게 전제된 갈등은 그들의 과거사에 기인한 듯 보이지만 영화는 약간의 단초를 내보일 뿐 적정한 힌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가르치지 않는 엄마는 코코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그것은 중심이 없는 상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고, 그럼에도 한계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엄격한 거리감을 고수하는 존재다. 양봉을 하는 이모할머니의 다정하고 소탈한 동행이 코코에게 힘이 되고 “전 왜 이래요?” 라는 한숨어린 고백을 끌어내지만, 파티에서 사라진 코코를 찾으며 마침내 “루시아!”를 외치는 마지막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답을 찾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고 어린이 혼자서는 버거운 일일 것 같다.
주인공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배우의 입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민이 주입된 건 아닐까, 과연 맥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주제 넘는 생각이 중반부 이후 떠나지 않았다. 실존의 무게는 말로 표현하는 것과 별개로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주인공 배우가 실제로 그러한 사유와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연기’를 펼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린이의 연기는 대부분 어른의 고민과 시선이 담긴 시나리오와 연출을 통해 이루어질 테지만, 이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아쉽기도 어렵기도 한 작품이었다.
1/4 cgv서면 art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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