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1. 21. 01:55

 

 

헤밍웨이가 작가 초년 시절을 보냈던 1920년대 파리에서의 생활을 담은 에세이다. 29편의 글이 1부 “움직이는 축제”와 2부 “파리 스케치”로 나뉘어져 있다. 각부의 마지막 한두 편을 제외하면 두 부분에 실린 글들의 배경 시간대나 다루는 인물들에서 큰 변별성이 없는데 굳이 나눠 묶은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찾아보니, 1부는 1961년 사망 후 1964년에 출간된 에세이집에 수록된 글들이고 2부는 2010년에 추가된 초고 상태의 글들이라고 한다. 

 

거두절미하고 파리의 어느 날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대체로 시간순으로 흘러가지만 파리 생활이 시작된 계기나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은 없다. 시인 베를렌이 숨을 거둔 호텔 꼭대기 층의 작업실에서 단편 작업에 몰두하는 헤밍웨이는 이제 막 문단에 발을 들인 신참이다. 아내 해들리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는 계단참에 공동 화장실이 있고 염소떼를 몰고 다니며 젖을 파는 상인을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동네에 있다. 캐나다 언론사의 특파원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빠듯한 살림으로 자주 허기에 시달리는 생활이지만, 부부는 함께 산책하고 때때로 경마장을 찾는다. 겨울이 오면 추위를 피해 스위스며 스페인 등지로 떠나 집필을 하고 스키를 타며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책에는 이름을 알릴만한 대표작이 아직 없는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기꺼이 친구가 되는 많은 지인들이 등장한다. 당시 파리 문화예술계의 중심 인물이었던 거트루드 스타인를 비롯해 시인이자 문학계 마당발이었던 에즈라 파운드, 소설가이자 문학잡지 발행인 폭스 매덕스 폭스, [위대한 개츠비]로 떠오른 소설가 스콧 피츠제랄드와 젤다 부부, 대여문고를 운영하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실비아 비치 등이다. 글쓰기에 대한 야망과 열정 가득한 20대 청년 헤밍웨이는 그들의 격려와 호의로 친분을 쌓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고민과 의견을 나눈다. 이외에도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많은 작가들 그리고 특별한 교류의 에피소드는 없지만 제임스 조이스와 피카소 등도 언급되며 당시 파리 문화예술계의 분위기를 더한다. 

 

특히 거투르드 스타인과 스콧 피츠제랄드와 관련된 일화들이 꽤 비중을 차지한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잃어버린 세대’라는 타이틀을 붙인 거트루드 스타인의 직설적인 독설과 명예남성 같은 캐릭터 묘사, 방문할 때마다 헤밍웨이와 독대하며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자들의 구역에서 수를 놓는 앨리스와 함께였던 해들리의 처지, 결국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결별’로 마무리된 기울어진 권력장 속에서의 관계. 견디지 못하는 술을 과음하고 취해 기절하곤 했던 스콧과 누구보다 사교계에 열심이었던 젤다 부부의 기묘한 사랑과 질투, 악천후 때문에 두고 온 차를 가지고 오기 위한 스콧과의 엉망진창 리옹 여행 등등. [미드나잇 인 파리]가 연상되기도 했던 이런 부분들은 전체적으로 대사로 처리한 구절이 많아 생생하고 흥미로웠고, 짧은 소설처럼 읽히기도 했다. 

 

초반부에서는 미지의 미래인 소설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자로서 이미 성공한 이들과의 만남과 교류에서 느끼는 거리감과 괴리 등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비해, 그들과의 만남이 빈번해지고 친밀도가 높아진 후반부에서는 은은한 풍자와 비판적인 시선이 더해진다. ‘예술가가 아닌’ 해들리를 진지한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만 헤밍웨이를 지지하는 문학계 인사로서 보인 실비아 비치와 거트루드 스타인의 태도,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질다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해들리의 성격과 언행에 대한 묘사가 대비적으로 느껴진다. 

 

카페에서의 글쓰기로부터 시작되는 글이지만, 핫한 카페를 전전하며 건들거리는 뭇 작가들과 달리 아는 사람들의 방해를 피해 조용한 카페를 찾아서 진지하게 글쓰기에 몰두한 후 홀로 센강변을 걸으며 사색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하는 ‘건전한’ 일상을 영위하던 헤밍웨이 자신의 변화도 책에는 드러난다. 유명 인사들과의 친분으로 알게 모르게 삶에 침투한 허풍과 화려함 그리고 일상이 된 ‘카페 생활’, 그러나 마침내는 모든 이들의 부재를 말하며 덧없음으로 마무리되는 글의 흐름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압도적인 비중은 아내 해들리가 차지한다. 만남과 결혼에 대해서도, 헤밍웨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도 생략하지만 화려한 도시에서 꿈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가난하지만 애틋한 일상은, 수십 년 후의 회고담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동감 넘치게 기록되어 있다. 헤밍웨이의 스위스 출장 후 이어질 여행에 합류하기 위해 그간의 모든 원고를 사본까지 챙겨 리옹역을 출발한 해들리가 가방을 도둑맞은 엄청난 일도 발생하지만, 운명공동체처럼 굳건한 부부의 신뢰는 변함이 없다. 다양한 개성과 분방한 행태의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생활에서 해들리의 소박함과 수수함은 헤밍웨이가 초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원동력이자 안정감의 토대처럼 느껴진다.

 

사망 50년이 지나 출간된 2부의 마지막 두 글에서는 앞선 글들에 비해 내밀한 사정과 사적인 소회가 깊이 묻어난다. 다소 우회적으로 서술되지만 “파일럿 피시와 부자들”에는 해들리와의 파경과 파리 생활의 끝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 나오고, 마지막 글인 “허무 그리고 허무”는 아예 이렇게 시작된다. “이것은 해들리와 내가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었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과 갔던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지 않았고 첫 번째 파리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의 사랑이 건재한 가운데 시작된 또 다른 사랑, 변명 같기도 하지만 당사자의 회한이 너무 극심해 보여 어쩌면 그가 네 번이나 결혼했던 건 첫 번째의 실패로 인한 거였을까, 그럼에도 생의 허무를 떨쳐내지 못하고 그런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싶기도 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함께였던 사랑을 스스로 저버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선명히 남은 아름다운 기억과 그만큼의 고통이 이 글들을 쓰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나이 든 작가의 아픈 회상을 읽으며 나이 들어가는 자로서 느끼는 공감 지점이 적지 않았고, 어쩌면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기억을 마지막까지 갖고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등장했던 모든 이들이 고인이 된지 이미 한참 지났고, 그게 누구나의 삶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인지 마지막에는 진한 여운이 남았다. 헤밍웨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걸 책날개에서 먼저 보았는데, 게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소가 아이다호라니.

 

완전히 다른 맥락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유럽 기행]을 읽고 나니 유럽의 도시 이야기를 읽고 싶어져 선택한 책이었다. 어떤 부분은 많이 달라졌을 파리의 거리와 건물들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을 것 같고,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은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이 출간과 함께 꽤 화제가 되었을 것 같다.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 몇 권의 제목만 아는 무식함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글이 아니라 사람으로 겪게 된다면 불감당일 뜨거움과 마초 기질과 왕성하고 열정적인 성향, 동시에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성정 등이 책을 읽은 후 찾아본 그의 인생사와 더불어 꽤 매력적으로 느껴져 민망하기도 했다. 명성 때문인지 거의 동시대인처럼 느껴지는 작가의 야성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삶과 글의 독보성에 약간 반해서 이참에 그의 대표작들을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한데, 실행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송은주 옮김
2019.8.25.1판1쇄인쇄 2019.8.30.1판1쇄발행, 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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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1. 19. 18:1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냉전 시기였던 1957년, 동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를 여행한 기록이다. 작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접경이자 최전선인 베를린에서 시작해 사회주의의 심장부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반소련 혁명에 실패했지만 그 맹아는 살아 있는 헝가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충동적으로 결행한 여행이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닿을 때쯤 마침 모스크바에서는 ‘세계청년축전’이 열린다. 조국의 군사독재로 유럽에 머물며 사회주의에 대해 호의적 궁금증을 가졌던 작가는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현실과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의 긴장과 괴리를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출신의 언론계 동료들과 함께 ‘철의 장막’을 통과해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시작이다. 어렵사리 검문을 통과한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외부의 힘으로 부자연스럽게 복구된 도시 풍경이다. 급조된 자본주의의 활력이 넘치는 서베를린과 조잡하고 압도적인 러시아풍으로 단장된 동베를린의 겉모습은 대조적이지만 재건의 방식과 목적은 다르지 않다. 인민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의 민낯을 보고자 했던 작가는 사회주의 수립 후 해외로 도피하지 못하고 체제를 혐오하며 살아가는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 소비에트가 이식한 동독의 혁명을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 학생들, 독일의 통일과 외국 주둔군의 철수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기계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러시아 주둔군들 등 장막 뒤에 가려진 다양한 군상을 통해 편린의 진실을 전한다.   

동서 유럽의 여러 나라는 물론 소비에트 연방에도 기계류를 수출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넘기는 유연하고, 기차에서 만난 시민들은 정치에 초연한 듯 보인다. 작가는 프라하를 ‘가장 소화하기 힘든 영향들을 너무 살찌지도 않고 위궤양에 걸리지도 않고서 잘 흡수한 도시’라 칭하며 고대와 현대의 균형, 군과 시민의 통합이 유지되는 현상을 인상적으로 기록한다. 괴멸된 바르샤바에 우뚝한 소비에트 연방의 선물 문화궁전에 대한 위화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의 공산주의와 가톨릭에 대한 열정이 공존하는 폴란드에서는,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사진들 속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젊은 통역사의 아버지를 마주하기도 한다. 기차가 국경을 지날 때마다 제각각인 관세와 환율, 출입국 정책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전쟁이 끝난 후 거대한 두 우산 아래 복속된 작은 나라들의 격차와 혼란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나는 돋보기 너머에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라는 세계학생축전 영국 대표단원을 인용하며 작가는 모스크바를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고 표현한다. 오차 없이 운행되는 정확한 시간표와 버튼이 하나뿐인 라디오 수신기가 장착된 러시아의 기차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존재하지만 독특한 획일성을 보여주는 광활한 대국의 첫인상이다. 러시아에 진입한 후 며칠간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각지의 주민들은 놀랄 만한 환영 의례를 선보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 선물과 인사를 참가단에게 전하는데, 그 격렬함은 모스크바에서 절정에 달한다. 광기라고도 할 만한 반응을 작가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아온 이들이 발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해석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자발적인 것인지 배후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한다. 고도로 조직된 거대한 축제의 한복판에서 그 어떤 것도 분명히 알아낼 수 없었다고 인정하지만, 잠시 열린 러시아에서 만난 내부인과 외부인 모두가 서로와 세계에 대해 열렬히 알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축전에 참가하고 싶어 6개월간 스페인어를 공부한 30년 경력의 푸주한 남성이 증인이 될 수 있겠다.  

작가는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이 특히 궁금했고 수없이 질문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는데, 통역사를 자청하며 고리키 극장에 동행한 중년의 연극 무대 디자이너에게서만은 명확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공포 정치 하에서 수많은 예술가 동료를 잃은 그녀는 극장에 이르러 “우리는 이곳을 ‘감자 극장’이라고 불러요. 이곳에서 연기한 최고의 배우들은 모두 땅 밑에 있거든요.” 라고 말한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와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를 이끈 두 인물, 레닌과 스탈린의 영묘를 둘러보고 떠나기까지 공식적으로 전시되지 않은 현실을 열심히 탐색한 작가에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러시아의 현재는 만연한 관료주의의 폐해다. 체제 경쟁과 공포 정치, 극심한 불균형 발전과 양극화 등은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열광한 축전의 화려함에도 감춰지지 않았고, ‘관료주의자’라는 말이 새로운 욕설로 통한다는 그곳에서 프라하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프란츠 카프카가 소환된다. 이어 계엄령 하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넘어간 작가가 여행기를 마무리하는 지점은 10개월 전 소련의 종속에 반대하는 혁명의 시발점이 된 장소다.   
 
이름의 무게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내가 모르는 시대의 비밀과 인문학적인 깊이가 상당할 거라는 피상적인 기대와 우려가 있었는데, 모르는 사실이 많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잘 읽혔다. 극심한 냉전과 체제 경쟁이 가른 세상 저 편을 탐험하며 제한되고 차단된 정보의 조각들로 그곳과 그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 덕인 것 같다. 여행 당시에도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유를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차이를 그대로 남겨두는 선택이 마음에 들었고, 멀지 않은 과거지만 완전히 사라져버린 감각과 세계를 엿보는 아련함을 느꼈다. 유명한 몇 작품의 제목을 알고 있을 뿐 책을 읽어본 적은 없고 작가가 콜롬비아 출신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야 제대로 알았는데, 거장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의 작가의 면모도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다.

 

전체적으로 인상기에 가깝지만 당시의 정치사회적 격변이 주효한 글이어서 관련된 해설이 있었다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됐을 텐데 책에는 옮긴 이의 말도 따로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 게시된 출판사 제공 책 소개를 읽으면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좀은 선명해지는 듯했는데, 콜롬비아 문화부의 지원으로 출간되었다고 책 서두에 적혀 있기는 하지만 출판사의 위상을 생각하면 해설이 없는 점은 아쉽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송병선 옮김
2022.5.25.1판1쇄찍음 2022.5.31.1판1쇄펴냄, (주)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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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1. 9. 23:32

 

 

책에서 다룬 열 편의 영화 중 고작 두 편을 봤을 뿐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영화는 줄거리’ 주의자로서 엄청난 스타일리스트인 웨스 앤더슨의 존재와 영화는 오랫동안 관심 밖이었다. 뒤늦게 기획전인지 재개봉이었는지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왜 이제서야? 생각했고 이후 반가운 마음으로, 게다가 티모시 샬라메까지 출연한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는 솔직히 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듯 말 듯했다. 지난해 개봉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내려놓은 마음으로 즐겁게 감상하다가 무방비상태에서 훅 들어온 에디 아놀드의 “캐틀 콜”에 무장해제, [아이다호]가 아닌 영화에 흐르는 그 노래가 썩 잘 어울려서 고마워졌다. 

책은 웨스 앤더슨이 발표한 장편 영화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그야말로 영화와 삶을 아우른다. “아이코닉 필름 메이커” 시리즈의 하나라고 하는데, 인터뷰 출처만 7쪽에 이를 만큼(페이지 여백이 많긴 하지만) 저자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성실하게 집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 깐깐하고 편집증적인 외곬수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던 웨스 앤더슨의 여러 면모들과 대략적이지만 영화 작업의 과정들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데뷔작부터 헐리우드의 기성 스튜디오와 함께했지만 커다란 흥행 수익을 얻는 경우는 없었음에도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고수하며 영화 작업을 지속한 비결은 물론 독보적인 재능과 노력에 기인하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열광하던 문화적 요소와 영웅 들을 차례차례 영화로 풀어낸 이력은 순정의 승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따로 또 같이 작업을 이어가는 오웰 윌슨을 비롯해,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그와 반복적으로 작업하는 혹은 새로 합류한 영화인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재미있었고 특히 빌 머레이의 에피소드는 좀 감동이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작업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물론 웨스 앤더슨 영화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과 완성도 등 영화적인 부분도 크겠지만, 인간으로서의 다정함 같은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영화들이 지향하는 가족, 낭만, 동심 등이 단순한 과거 지향이나 향수를 넘어 정제되고 세련된 스타일을 통해 새로운 감성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인간미에도 기인하는 게 아닐까 싶고 말이다. 그의 오랜 작업 파트너인 로만 코폴라가 했다는 “웨스 앤더슨은 사회적 동물입니다”에서 빵 터졌다가, [다즐링 주식회사] 부분에 등장하는 그의 말 “감독은 혼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생겨나는 새로운 혼란을 창조하는 겁니다.”라는 말에서 다시 존경스러워졌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영화 관련 책들 중에 문체나 편집의 문제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를 좀 경험했었는데, 이 책은 독보적으로 잘 읽히고 사진들도 훌륭하고 전반적으로 신경 많이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트로’를 제외하면 목차 자체가 작업한 장편 영화의 제목이자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표 시기가 1990년대 중반부터 25년에 이르고, 그 영화들이 착안된 시점과 개인사적인 부분들 그리고 당대의 감독들과 작품들, 당시의 헐리우드 분위기와 상황 등까지 자칫 장황해질 수 있는 스토리가 정말 읽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어릴 적 좋아했지만 잊고 있었던 이름들을 마주하며 반가웠고,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비주얼 모티브 가이드, 핵심 배우들, 독특한 장치들, 영향을 준 예술가들의 목록’ 등 한 쪽의 요약 박스도 성의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즐겁게 읽다가 막바지로 갈수록 눈에 띄는 표기 실수가 살짝 반복되고 179쪽에서는 사진 설명 위치 오류까지 발견되어 아쉬웠지만, 책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그래도 좀은 아쉽다. 


이안 네이선•윤철희 옮김
2023.8.23초판1쇄, (주)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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