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기 전 맡아주었던 우리집 생명들을 데리고, M이 왔다. 아이비는 못 본 사이 두 배는 길어진 듯하고 테이블야자도 무럭무럭 자랐다. 몇 년 전 처음 샀을 때 작은 기둥처럼 탄탄해보였던 스투키들은 죽었지만 그 옆에서 작고 두꺼운 난처럼 자라난 아기 스투키들은 나름의 성장을 하고 있다. 덩굴을 감아나갈 무언가가 없는 관계로 너무 자란 아이비의 적당한 자리 찾기가 어려웠지만 휑하던 집에 녹색들이 돌아와 감도는 생기가 반갑다.
8월 초 에어컨에 또 문제가 생겨서 출장 서비스 신청을 했는데 가장 빠른 방문예정일은 14일이었다. 너무 더운 날이라 약속을 미루거나 숙소를 잡거나 하려고 했는데 M이 괜찮다고 해서 최대한 밖에서 놀다가 밤 늦게 들어오기로 했다. 도천동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 겸 여객선터미널 쪽으로 걷는데 한산대첩축제가 한창이었다. 오가며 현수막은 봤지만 일정은 몰랐는데 병선마당 광장에서 시끌벅적한 행사 중이었다.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했는지 팬클럽 단체티를 입거나 가수 이름이 쓰인 부채를 든 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강구안까지 차량도 통제하고 있었고, 문화마당 양편으로 둘러쳐진 수많은 천막에서는 다양한 무언가가 진행 중이었다.
통영 살면서 인구밀도를 체감한 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뿐이었는데,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의 물결이 강구안 브릿지까지 이어졌다. 한산대첩축제 본 행사를 구경한 적 없어 올해 규모나 참여도가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없지만 병선마당 광장부터 남망산 입구쪽 강구안까지 걷는 동안 변함없는 인파가 놀라웠고 강구안 브릿지를 줄 서서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신기했다. 축제의 기원이 전쟁이라선지 대부분의 체험 행사가 군사적 색채를 띤 건 아쉬웠지만, 이 정도라면 지역에서 축제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구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너무 더워서 카페로 피신했다가 끝물의 불꽃놀이를 보고 귀가했다. M이 오지 않았다면 갈 일 없었을 축제 현장, 내게는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은 한산대첩축제였다.
다음날 물 좋아하는 M을 위해 수륙해수욕장에 갔다. 2년 전 운전 연습 겸 함께 거제 덕원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수륙해수욕장은 집에서 차로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여행으로 통영에 왔을 때는 걸어서도 가봤던 곳인데 살면서는 처음, M은 튜브를 빌려 물에 들어갔고 나는 잠깐 발만 담그고 텐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볍고 작아서 장만한 나의 귀여운 텐트는 맞바람이 통하지 않아 무척 더웠다. 물놀이를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하다가 M의 열쇠 꾸러미가 없어진 걸 깨달았다. 물에 들어가기 전 휴대폰과 지갑을 따로 뺐고 샤워 후 확인했는데 열쇠는 기억도 실물도 없다고. 다시 해수욕장으로 가서 안전요원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M의 전화번호도 알려드렸다.
이후 어떻게 할지는 저녁 먹으며 생각하기로 하고 ‘브라운핸즈’에 갔다. 통영국제음악당 건물이라 공연 포스터들이 많이 붙어 있었는데, 임윤찬 사인 포스터도 있었고 재작년 가을 어렵사리 예매에 성공해서 M과 함께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났다. 통영 살면서 M과 함께 한 게 참 많고 오늘의 마지막 함께는 출장 제작 차키를 기다리는 일. 일요일 저녁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신기한 장비들이 실린 차를 끌고 기술자님이 오셨고 두 번의 시행착오 끝에 새 차키를 만들어주셨다. 열쇠 분실 소동 덕에 나는 저녁 6시였던 책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다른 이들도 사정이 있어 날짜를 연기했고, M은 예정보다 늦어졌지만 무사히 부산으로 출발했다. 간만에 밀도 높은 1박 2일을 보냈고 피곤이 몰려온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몇 년 전 11월, 스코틀랜드에 사는 채취인이자 약초연구자인 모 와일드는 야생식만 먹으며 1년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블랙 프라이데이 주간을 앞두고, 온 세상을 잠식한 팬데믹에도 변함없는 지구 파괴와 소비 열기에 좌절한 마음이 조금은 과격하고 성급한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생태 건축가이자 주류 양조의 달인인 게저, 25년 동안 버섯을 기르며 버섯과 닮아 ‘버섯 맷’이라 불리는 루리와 함께 살고 있다. 10년 전 스코틀랜드 중부 지역의 한 언덕에 지은 목조주택에서 이들은 서로의 기술과 자원을 공유하며 나름의 풍요로운 생활을 해왔고, 버섯 전문가이자 채취협회 회원인 맷은 저자의 실험에도 동참한다. 이 책은 모 와일드의 야생식 채취와 섭취 1년을 기록한 실험 일지이고 무수한 생명들의 개성과 식생에 관한 설명서이자, 그들과 더불어 변화한 저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야생식으로 1년 살기에 앞서 저자는 실험의 조건과 규칙, 예외 사항 등을 정리한다. 이에 따라 서식지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변, 울타리, 숲 등 다양한 지형에 자유롭게 접근해 먹거리를 채취하되, 90%가량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던 이전과 달리 채취로 먹거리 조달이 불가능한 겨울에는 야생동물과 생선을 섭취하기로 한다. 기존과 같이 식량의 저장을 위해 건조기, 냉장고, 냉동고, 오븐 등을 활용하고 채취와 운반을 위해 자동차를 사용한다. 식재료에는 야생화된 재래종이나 귀화종을 포함하되 채소를 키우지는 않는다. 모든 식량은 채취, 사냥, 선물, 물물교환 등으로 얻고 돈을 쓰지 않으며, 선물은 상업적으로 생산되지 않은 것을 받는다. 예외적으로 갑자기 결정한 만큼 미리 비축하지 못한 견과류를 구입하고, 이전에 저장해둔 올리브기름 그리고 설탕이 들어간 잼 중에서 1년 이상 보관이 불가능한 것들은 야생식 기간 중 활용하기로 한다. 몸의 변화를 알기 위해 시작과 함께 주기적인 장내 미생물 검사도 진행한다.
저자는 지구를 사랑하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며 원시 인류의 생활 방식을 지향하는 인물이다. 아프리카에서 성장하고 세계 곳곳에서 거주하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단순함과 풍요로움, 생명의 순환과 과거 인류의 지혜를 내면화한 자유인이다. 대안적 삶의 경험치와 식물과 버섯 등 자연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가졌고 50세에 대학에 진학해 약초학을 전공한 전문 지식 보유자이기도 하다. 평범한 현대인에 비하면 실험에 적합한 이력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과 60대 초반이라는 연령을 생각하면 1년간의 야생식은 생존을 건 모험이기도 했다. 겨울과 함께 시작된 실험 초기에는 식물과 버섯을 충분히 채취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웃이 잡아 건넨 사슴고기나 조류, 직접 낚시한 물고기 등 기존과 급격히 달라진 식단을 경험하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저혈당과 영양 부족, 긴 겨울의 우울증 등 위기의 순간을 이웃과 친구들의 선물,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정신의 자유로 이겨낸 저자의 1년은 ‘감사의 시간’으로 마무리된다.
실험을 시작한 겨울부터 ‘야라흐’(켈트어로 봄이자 배고픈 시기를 뜻하는, 4~5월의 봄이 오기 전 춘궁기라고 한다.)를 거쳐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마지막 나날’까지, 일기 형식으로 쓰인 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야생식 재료인 자연 요소들에 대한 설명과 요리법 등 ‘야생의 식탁’을 구성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무관심한 분야여서 반복되는 패턴의 글이 전반부에는 솔직히 지루했는데, 읽다 보니 실험에 가닿게 된 사유의 근원과 태도의 자연스러움 같은 것들이 서서히 드러났고 흥미가 생겨났다. 실험의 직접적인 매개였던 팬데믹과 블랙 프라이데이가 불러온 분노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가 파괴하는 생명과 지구에 대한 저자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험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회적 저항이 아니라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저자의 삶에 깊이와 확신을 더하는 계기로 보였다.
저자는 원시 고대 인류와 켈트족, 이교도 전통, 마녀 등 문명과 현대가 역사의 뒤편으로 감추고 낙인찍은 존재들에게서 자연과의 연결을 회복할 힌트를 찾는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어서 처음엔 낯설었지만 오래 탐닉하고 공부하고 감지하며 삶의 사표로 삼은 가치 같았다. 그래서인지 실험에 임하는 저자의 일상, 관련한 과거 조상들의 이야기, 비슷한 결을 가진 친구들과의 일화 등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느낌으로 다가왔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나이든 자, 많이 아는 자가 적게 말하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것은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자의 글이 그랬다. 남다른 인생을 살아온 것 같지만 과거사를 늘어놓지 않고 쉽지 않은 실험을 감행하면서도 부담스럽게 주장하지 않아서,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도 거리감을 느끼기보다 미처 몰랐던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연이 허락한 사계절의 기쁨을 채집하는 삶’이라는 부제와 그린 컬러의 표지가 주는 책에 대한 첫 느낌은 초반부, 저자가 이웃에게 받은 사슴고기를 직접 해체하는 부분에서 반전되었다. 야생식에 대해 모르지만 막연히 비건을 떠올렸는데 육식이 나오는 것도 동물의 시체를 직접 해체하며 묘사하는 것도 낯설었다. 작업하면서 생명의 흔적과 그에 담긴 영혼을 생각하며 경건해지고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먹으며, 자신의 시체도 언젠가 박테리아의 먹이가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리라는 저자의 순환적 사고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이름과 상황으로 유추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누구의 성별도 달리 언급되지 않는 점 그리고 친구 크리스티나의 출산을 돕고 마야의 출생을 축하하며 단 한 번의 위반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배움에의 의지와 호기심을 동력으로 영성, 마녀, 세대를 초월한 여성 연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행간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모습에는 야생식과 채취 빼고(시도할 의지와 용기가 없으므로) 배우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일단 자연친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걸까 싶기도 하지만, 성향과 별개로 태도가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류의 삶을 벗어난 경험을 기록한 독서에서 책은 좋았지만 저자에게서는 피로감을 느낀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저자의 유연함과 조화로움 덕분에 읽으며 점점 빠져들었고 독보적으로 편안한 독서였다. 자신의 장례식에 틀었으면 하는 노래로 Tom Waits의 “Green Grass”를 꼽은 것도 반가웠다. 이 노래는 몰랐지만 Tom Waits는 좋아하는 뮤지션인데, 본문에 ‘한국산 호미’가 등장했을 때처럼 저 멀리 나와 아무 상관없는 존재라고 여겨졌던 이와의 느닷없는 연결감 같은 게 불쑥 느껴진 대목이었다.
8월의 모임 책이었다. 야생도 식문화도 관심 없는 편이라 시큰둥했지만 추천자가 한 권만 선택해 결정된 터라 어쩔 수 없었다. 4년째인 모임의 톡방에는 6명이 있지만 한참 전부터 참여자는 4명으로 고정, 그중 성실하게 책을 읽는 이는 2명이다. 책 읽는 한 명이자 책을 추천한 이가 너무 바빠 책을 못 읽을 수도 있겠다고 모임 며칠 전 양해를 구했다. 마침 전날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김이 샜고, 어차피 나머지 2명은 안 읽을 텐데 읽지 말까? ‘프롤로그’와 1부의 도입 부분은 괜찮았는데 본문이 시작되자 줄줄이 나열되는 식물과 버섯 이름들이 대부분 초면이다 보니, 친절한 세밀화 그림들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에 갈등이 됐다. 그러나 기왕 대출했으니 읽기로 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을 남겨주는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