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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형기를 채우고 출소를 앞둔 미카미, 다시는 감옥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커다란 진심이 그를 채우고 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 맡겨졌고 평탄하지 않은 성장기를 보낸 그는 14살에 소년원에 처음 들어간 후 감옥을 6번 드나들었고 그 세월을 합치면 28년이다. 13년만에 출소하는 전과 10범의 전직 야쿠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어려서 헤어진 어머니를 찾고 싶어하는 그의 두터운 수감기록을 멀리의 츠노다가 살펴보고 있다. 오래 전 입소할 때 맡겨둔 고급 손목시계는 고장났고 오랜만에 입은 사복은 어색하지만, 교도소를 뒤로 하고 버스에 오른 그의 눈에는 다시 만난 세상에 대한 결의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단절되었던 세계의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저녁, 다행히 그를 집으로 초대해 맞아주는 이들이 있다. 신원보증은 취미라고 쿨하게 말하며 부담을 덜어주는 변호사 쇼지와 말을 아끼며 따뜻한 식사를 권하는 그의 아내다. 막막한 자유와 노부부의 조용한 환대, 식탁에서 울컥하고 만 미카미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한다. 작지만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고 당장의 생활을 위한 사회서비스 신청에는 쇼지가 동행해 돕는다. 혈압약을 달고 살며 관리 중이지만 태생인지 학습된 것인지 쉽게 흥분하고 돌변하는 그의 성질과 시스템은 잘 맞지 않는다. 사회보장의 대상이 되는 게 내키지 않지만 당장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없는 상황, 미카미는 감옥에서 익혔던 미싱 기술을 발휘해 이것저것 만들어 집을 꾸미고 쇼지의 아내에게 하나뿐인 가방을 선물하기도 하면서 나름의 일상을 꾸려간다.
미카미의 수감 기록을 살피는 츠노다는 소설을 마음에 깊이 품고 있는 청년이다. 꿈도 삶도 어딘가 막혀버린 듯한 프리랜서인 그는 뜻대로 되지 않는 글과 일의 무게에 눌린 채 작은 원룸에 살고 있다. '개과천선한 전과자의 일상 그리고 친모와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감동 코드를 노리며 프로그램을 기획한 담당 피디에게 떠밀리듯 일을 맡았다. 취재를 위해 검토한 기록 속 미카미는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인물, 계획이 성공한다면 프로그램 속 미카미의 삶과 위상은 달라질 것이다. 흔하고 뻔한 스토리의 반복이 될 작업에 츠노다는 시큰둥하지만, 미카미의 집보다도 좁은 원룸에서 늘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쪼그려 잠드는 그가 세상으로 나와 활보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카미와 함께일 때다.
오래 전 그야말로 개과천선을 다짐하고 결혼해 조용히 살고 있던 미카미는 한 사건을 계기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정당방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상대를 너무 많이 찔렀고 결국 죽게 한 그의 행위는 13년의 시간과 자신이 구하려던 사랑하는 아내를 앗아갔다. 복역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아내도, 야쿠자 시절의 동료들도 과거가 되었다. 그보다 더 먼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출소할 즈음 미카미가 떠올린 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진 그가 성장하면서 늘 어머니를 그리워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수감 생활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가 될 누군가에게,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어찌됐든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소망은 생활보다 멀리 있다. 적당한 거리로 친절을 베푸는 쇼지 부부와 마냥 기계적이지만은 않은 사회복지 공무원의 도움만으로 미카미의 적응과 일상이 원활하기도 어렵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연립주택에는 미카미의 신경을 긁는 이웃이 있고, 전과자임을 알게 되어 지레 의심하고 무례를 범하는 이웃도 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평범한 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는 미카미는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의심했던 수퍼마켓 주인과 친구가 되고,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츠노다와 피디를 이따금 만나고, 적당한 일자리와 말소된 운전면허를 찾기 위해 행정과 대면하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적응에 애쓰던 그가 당당한 활기를 되찾는 순간은 '부정의한' 상황에서 야성을 발휘하며 본때를 보여줄 때뿐, 보통의 삶을 위한 궤도는 생각보다 더 울퉁불퉁하다. 잊었던 옛 아내가 떠오를 만큼 외롭고 새 삶을 향한 굳은 결심이 때로 흔들린다.
세상의 1/n로 녹아들어 살고 싶은 그의 바람은 인생의 절반쯤을 감옥에서 보낸 이력 때문에 아주 어려운 일이 된다. 바라던 직업교육이나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은 자연스레 과거의 인연을 찾는 것으로 향한다. 미카미는 때로 떠올리고는 곧 묻어버렸을 전화 한 통으로 잠시 다른 세상에 건너간다. 친형제처럼 살갑고 호탕하게 미카미를 맞아준 옛 동료는 성매매 여성이 대기하는 호화로운 숙소에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사를 대접하며 언제든 함께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서 야쿠자만 예외일 리 없고 시대착오적인 의리와 허세는 한물간 세력의 몰락을 부정하는 안간힘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미카미는 심기일전해 과거를 숨기지 않고도 취업이 가능한 요양병원에 일자리를 얻는다. 오랜 단체 생활을 통해 몸에 배인 정리정돈의 습관이 일의 능률을 올리고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터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선임 파트너인 아베는 경미한 지적 장애를 가진 듯 보이는데, 꽃을 좋아하는 그에게 일을 배우고 함께하는 시간은 평온하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와 작은 축하 파티를 열어주고 쇼지 부부는 새 출발을 기념해 멋진 자전거를 선물한다. 미카미의 얼굴에도 환하게 웃음이 번지고, 딱 그만큼이면 충분할 듯한 다정함과 희망이 그들 사이에 흐른다.
여러 사정으로 프로그램 제작은 중단되고 어머니를 찾는 일은 무산되었지만, 그가 지내던 시절 고아원에서 봉사하던 노파가 어렵사리 연결되어 짧은 만남이 있었다. 말을 건넬 수 없었던 전화에 이어 직접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던 옛 아내의 담담한 안부도 미카미에게 전해졌다.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 한 고비를 넘기듯, 미카미가 바라던 일들이 고요하고 따뜻한 단념으로 일단락되고 있다.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요양병원으로 출퇴근하는 미카미에게 드디어 찾아온 평범한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은 장애를 가진 아베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동료들과 둘러앉아 '평범한 다수'에 속하기 위해 솟구치는 분노를 눌러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베는 태풍 예보에 쓰러질지 모를 화단의 코스모스를 꺾어 미카미에게 건네고, 아베의 코스모스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온 미카미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쓰러진다. 코스모스 다발을 손에 꼭 쥐고 바닥에 쓰러진 미카미의 심장은 태풍이 몰아치는 밤 그대로 멎었다.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황망한 낯으로 찾아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카미와의 만남을 통해 글을 향한 열망과 확신을 갖게 된 츠노다는 통곡한다. 13년 혹은 28년의 단절, 어쩌면 애초에 사회의 온전한 일원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던 미카미의 분투는 짧았다. 예감하지 못한 마지막 순간이었지만 꽃을 쥐고 떠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런 극적인 효과 없이 바닥에 쓰러진 미카미의 손과 쥐어진 꽃을 비추는 화면은 참으로 먹먹했다.
어느 신문의 사회면 기사들을 모아 붙이면 완성될 법한 인생, 멀리 있으면 안타깝지만 가까이 있으면 부담스러운 이웃. 카메라가 없는 미카미의 삶은 딱 그 정도였는지 모르겠다.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의 전형적 서사를 벗어나지 않지만, 스크린 속 그를 지켜보며 관객은 선입견과 전형성이 가리는 모든 삶의 특별함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고아원, 소년원, 교도소에서 보내고 마침내 '멋진 세계'에 발을 딛은, 평범하게 살아보고자 참으로 애쓴 한 인물에게 미카미를 선사했고 덕분에 그렇게 쓸쓸했을 미카미들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해준다. 과하지 않은 전개와 적당한 관계 설정이 야쿠쇼 코지가 재현한 생동감, 그를 관찰하고 그와 공명하며 츠노다가 불어넣는 입체감과 더해져 공감을 이끌어내는 영화였다. 미카미가 그토록 바랐던 평범함에 닿기 위해 견뎌야 했던 지난함들이 기억에 남았고, 그가 끝내 안착하지 못한 '멋진 세계'는 씁쓸했다.
8/17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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