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에 해당되는 글 477건

  1. 2022.08.18 [멋진 세계]
  2. 2022.08.18 [보일링 포인트]
  3. 2022.08.17 [썸머 필름을 타고!]
  4. 2022.08.17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5. 2022.08.10 [한산, 용의 출현]
  6. 2022.07.06 [김광석, 못다 한 이야기]
  7. 2022.07.06 [레드 로켓]
  8. 2022.07.06 [모어]
  9. 2022.07.05 [호수의 이방인]
  10. 2022.07.05 [컴온 컴온]
빛의걸음걸이2022. 8. 18. 00:2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긴 형기를 채우고 출소를 앞둔 미카미, 다시는 감옥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커다란 진심이 그를 채우고 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 맡겨졌고 평탄하지 않은 성장기를 보낸 그는 14살에 소년원에 처음 들어간 후 감옥을 6번 드나들었고 그 세월을 합치면 28년이다. 13년만에 출소하는 전과 10범의 전직 야쿠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어려서 헤어진 어머니를 찾고 싶어하는 그의 두터운 수감기록을 멀리의 츠노다가 살펴보고 있다. 오래 전 입소할 때 맡겨둔 고급 손목시계는 고장났고 오랜만에 입은 사복은 어색하지만, 교도소를 뒤로 하고 버스에 오른 그의 눈에는 다시 만난 세상에 대한 결의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단절되었던 세계의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저녁, 다행히 그를 집으로 초대해 맞아주는 이들이 있다. 신원보증은 취미라고 쿨하게 말하며 부담을 덜어주는 변호사 쇼지와 말을 아끼며 따뜻한 식사를 권하는 그의 아내다. 막막한 자유와 노부부의 조용한 환대, 식탁에서 울컥하고 만 미카미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한다. 작지만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고 당장의 생활을 위한 사회서비스 신청에는 쇼지가 동행해 돕는다. 혈압약을 달고 살며 관리 중이지만 태생인지 학습된 것인지 쉽게 흥분하고 돌변하는 그의 성질과 시스템은 잘 맞지 않는다. 사회보장의 대상이 되는 게 내키지 않지만 당장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없는 상황, 미카미는 감옥에서 익혔던 미싱 기술을 발휘해 이것저것 만들어 집을 꾸미고 쇼지의 아내에게 하나뿐인 가방을 선물하기도 하면서 나름의 일상을 꾸려간다.

 

미카미의 수감 기록을 살피는 츠노다는 소설을 마음에 깊이 품고 있는 청년이다. 꿈도 삶도 어딘가 막혀버린 듯한 프리랜서인 그는 뜻대로 되지 않는 글과 일의 무게에 눌린 채 작은 원룸에 살고 있다. '개과천선한 전과자의 일상 그리고 친모와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감동 코드를 노리며 프로그램을 기획한 담당 피디에게 떠밀리듯 일을 맡았다. 취재를 위해 검토한 기록 속 미카미는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인물, 계획이 성공한다면 프로그램 속 미카미의 삶과 위상은 달라질 것이다. 흔하고 뻔한 스토리의 반복이 될 작업에 츠노다는 시큰둥하지만, 미카미의 집보다도 좁은 원룸에서 늘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쪼그려 잠드는 그가 세상으로 나와 활보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카미와 함께일 때다.  

 

오래 전 그야말로 개과천선을 다짐하고 결혼해 조용히 살고 있던 미카미는 한 사건을 계기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정당방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상대를 너무 많이 찔렀고 결국 죽게 한 그의 행위는 13년의 시간과 자신이 구하려던 사랑하는 아내를 앗아갔다. 복역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아내도, 야쿠자 시절의 동료들도 과거가 되었다. 그보다 더 먼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출소할 즈음 미카미가 떠올린 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진 그가 성장하면서 늘 어머니를 그리워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수감 생활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가 될 누군가에게,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어찌됐든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소망은 생활보다 멀리 있다. 적당한 거리로 친절을 베푸는 쇼지 부부와 마냥 기계적이지만은 않은 사회복지 공무원의 도움만으로 미카미의 적응과 일상이 원활하기도 어렵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연립주택에는 미카미의 신경을 긁는 이웃이 있고, 전과자임을 알게 되어 지레 의심하고 무례를 범하는 이웃도 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평범한 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는 미카미는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의심했던 수퍼마켓 주인과 친구가 되고,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츠노다와 피디를 이따금 만나고, 적당한 일자리와 말소된 운전면허를 찾기 위해 행정과 대면하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적응에 애쓰던 그가 당당한 활기를 되찾는 순간은 '부정의한' 상황에서 야성을 발휘하며 본때를 보여줄 때뿐, 보통의 삶을 위한 궤도는 생각보다 더 울퉁불퉁하다. 잊었던 옛 아내가 떠오를 만큼 외롭고 새 삶을 향한 굳은 결심이 때로 흔들린다.

 

세상의 1/n로 녹아들어 살고 싶은 그의 바람은 인생의 절반쯤을 감옥에서 보낸 이력 때문에 아주 어려운 일이 된다. 바라던 직업교육이나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은 자연스레 과거의 인연을 찾는 것으로 향한다. 미카미는 때로 떠올리고는 곧 묻어버렸을 전화 한 통으로 잠시 다른 세상에 건너간다. 친형제처럼 살갑고 호탕하게 미카미를 맞아준 옛 동료는 성매매 여성이 대기하는 호화로운 숙소에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사를 대접하며 언제든 함께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서 야쿠자만 예외일 리 없고 시대착오적인 의리와 허세는 한물간 세력의 몰락을 부정하는 안간힘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미카미는 심기일전해 과거를 숨기지 않고도 취업이 가능한 요양병원에 일자리를 얻는다. 오랜 단체 생활을 통해 몸에 배인 정리정돈의 습관이 일의 능률을 올리고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터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선임 파트너인 아베는 경미한 지적 장애를 가진 듯 보이는데, 꽃을 좋아하는 그에게 일을 배우고 함께하는 시간은 평온하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와 작은 축하 파티를 열어주고 쇼지 부부는 새 출발을 기념해 멋진 자전거를 선물한다. 미카미의 얼굴에도 환하게 웃음이 번지고, 딱 그만큼이면 충분할 듯한 다정함과 희망이 그들 사이에 흐른다.

 

여러 사정으로 프로그램 제작은 중단되고 어머니를 찾는 일은 무산되었지만, 그가 지내던 시절 고아원에서 봉사하던 노파가 어렵사리 연결되어 짧은 만남이 있었다. 말을 건넬 수 없었던 전화에 이어 직접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던 옛 아내의 담담한 안부도 미카미에게 전해졌다.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 한 고비를 넘기듯, 미카미가 바라던 일들이 고요하고 따뜻한 단념으로 일단락되고 있다.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요양병원으로 출퇴근하는 미카미에게 드디어 찾아온 평범한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은 장애를 가진 아베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동료들과 둘러앉아 '평범한 다수'에 속하기 위해 솟구치는 분노를 눌러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베는 태풍 예보에 쓰러질지 모를 화단의 코스모스를 꺾어 미카미에게 건네고, 아베의 코스모스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온 미카미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쓰러진다. 코스모스 다발을 손에 꼭 쥐고 바닥에 쓰러진 미카미의 심장은 태풍이 몰아치는 밤 그대로 멎었다.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황망한 낯으로 찾아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카미와의 만남을 통해 글을 향한 열망과 확신을 갖게 된 츠노다는 통곡한다. 13년 혹은 28년의 단절, 어쩌면 애초에 사회의 온전한 일원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던 미카미의 분투는 짧았다. 예감하지 못한 마지막 순간이었지만 꽃을 쥐고 떠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런 극적인 효과 없이 바닥에 쓰러진 미카미의 손과 쥐어진 꽃을 비추는 화면은 참으로 먹먹했다.

 

어느 신문의 사회면 기사들을 모아 붙이면 완성될 법한 인생, 멀리 있으면 안타깝지만 가까이 있으면 부담스러운 이웃. 카메라가 없는 미카미의 삶은 딱 그 정도였는지 모르겠다.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의 전형적 서사를 벗어나지 않지만, 스크린 속 그를 지켜보며 관객은 선입견과 전형성이 가리는 모든 삶의 특별함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고아원, 소년원, 교도소에서 보내고 마침내 '멋진 세계'에 발을 딛은, 평범하게 살아보고자 참으로 애쓴 한 인물에게 미카미를 선사했고 덕분에 그렇게 쓸쓸했을 미카미들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해준다. 과하지 않은 전개와 적당한 관계 설정이 야쿠쇼 코지가 재현한 생동감, 그를 관찰하고 그와 공명하며 츠노다가 불어넣는 입체감과 더해져 공감을 이끌어내는 영화였다. 미카미가 그토록 바랐던 평범함에 닿기 위해 견뎌야 했던 지난함들이 기억에 남았고, 그가 끝내 안착하지 못한 '멋진 세계'는 씁쓸했다.


8/17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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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8. 18. 00:01



일터와 노동의 관점이 부각된 고급 레스토랑의 다양한 면모가 새롭게 와닿는 영화였다. 개인의 사정, 노동자간 위계와 갈등, 인종차별, 미디어와 sns의 그늘, 위생과 안전 등 아이스 브레이킹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졌고 몰입감이 엄청났다. 원테이크로 촬영되었다고 들어서 그 부분에 집중하기도 했는데 그러다가도 흥미로운 드라마에 빠져서 카메라워킹에 주목하는 걸 까먹고는 했다. 한 번에 촬영할 것을 계획하고 시도하고 만들어낸 것 자체가 놀라웠다. 픽션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다큐이거나 최소한 페이크처럼 느껴졌다. 

 

길지 않은 95분의 러닝타임에 밀도 있게 삽입된 에피소드들이 조화로웠고,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드는 짧은 씬들에는 임팩트가 있었다. 비중이 적은 인물들에게도 몇 마디의 대사나 상황을 통해 각자의 서사를 부여하는 구성도 인상적이고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 출신 주방 보조의 난항, 베이킹을 돕는 조수 청년의 아픔, 베이킹 마스터의 인간적인 면모, 진상 손님과 웨이트리스의 감정노동, 유쾌한 손님들과 웨이터의 케미, 농땡이에 마약 거래까지 하는 노동자와 그의 설거지 파트너 노동자의 극도의 스트레스 같은 부분들은 잠시 보여지면서도 캐릭터에 생생함을 부여하고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당국의 까다로운 위생 검사, 공사다망한 어려움에 놓인 오너 셰프의 사정, 그를 돕고 주방을 함께 지휘하며 많은 것을 감당하는 셰프의 고충, 그리고 무엇보다 레스토랑 경영에 문외한인 매니저와 과거 오너 셰프의 동료였던 스타 셰프와 평론가의 관계와 역할 같은 부분도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잘 짜여진 상황을 통해 한눈에 보여져 매력적이었다. 연중 가장 바쁜 성탄 시즌의 레스토랑이 배경이어서 시작부터 바로 절정으로 치닫는 느낌이기도 했는데, 높은 텐션을 유지하면서도 과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유기성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스타 셰프들이 미디어를 통해 솜씨와 카리스마를 뽐내고 그의 레스토랑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어떤 계기를 통해 추락하기도 하는 현실은 동시대적 현상인 것 같다. 셰프가 주인공이지만 한 사람의 존재감만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레스토랑의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 점도,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일을 해내는 노동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편견없이 그려낸 점도 좋았다. 단골 손님의 알러지 정보와 관련한 사고와 그를 계기로 폭발하는 구성원들 그리고 물처럼 술을 마시며 위태하게 주방을 지휘하던 오너 셰프의 마지막 모습까지, 제목도 '키친 스릴러'라는 수식어도 딱 들어맞는 놀라운 영화였다.  


8/16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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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8. 17. 23:45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몇 번 마주쳤던 제목이었고 시간이 맞아 선택했는데, 캐릭터의 온도와 표현 방식이 매우매우 취향을 타는 감성이었고 나로서는 적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늙었어도 청춘 영화에 큰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편인데, 아주 어렸을 적 텔레비전에서 봤던 어린이 드라마가 떠오를 만큼 유치하다고 느꼈다. 편의적으로 선택된 배경 범위와 어설프고 헐렁한 SF적 설정, 대체로 과장된 연기톤과 오글링 대환장파티가 이어져 힘들었고 '여름이었다' 느낌의 싱그러움만으로 모든 것을 돌파하려는 듯한 영화가 부담스러웠다. "미래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어", "어제 저녁에 몰입을 끝냈어" 정도의 대사만 인상적으로 남았다.  


8/16,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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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8. 17. 23:4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슬로우를 잔뜩 건 샤방한 화면에 등장하는 댄디하고 섹시한 청년, 한눈에 봐도 매력이 넘치는 그는 여유롭게 자신의 멋짐을 뽐내며 카페에서 거리로 나선다. 같은 시각, 창밖으로 저 멀리 다른 세상처럼 시티뷰가 펼쳐진 호텔방에서는 엄청 긴장한 중노년 여성이 자신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좌불안석이다. 나이도 스타일도 심리 상태도 대조적인 두 사람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인트로는 조금 짖궂지만 이후 전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입부다.

 

얼마 후 여성의 호텔방에 청년이 찾아온다. 극도의 내적 갈등과 불안함으로 혼돈에 빠진 낸시와 그런 낸시를 자연스럽게 리드하며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청년 리오 그랜드. 자신의 선택과 호기심을 변명하듯 이런저런 말을 내뱉으며 혼자만의의 처절한 전투를 치르는 낸시에게, '실증적'이니 '환원적' 같은 고급 단어를 사용하는 리오의 화법은 무의식적인 편견과 긴장을 낮춰주고 약간의 안도감을 안긴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몇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상대였던 낸시에게 섹스는 일종의 의무방어전이었다. 얼마 전 퇴직하기 전까지 종교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순결과 정절을 강조하며 직업 생활과 윤리에 충실한 삶을 오랫동안 살아 왔다. 자녀들은 장성해 떠났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일상의 중심이던 일터에서 떠나온 낸시는 이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 자신을 억누르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터다.

 

늦게나마 낸시는 자신을 사로잡는 궁금증을 직접 해소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섹스가 선사하는 충만감, 스스로 억압했던 몸을 통해 오르가슴과 해방감을 느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여 적지 않은 돈과 그보다 더 큰 용기를 들여 섹스 워커 리오 그랜드를 호출했지만, 오랜 세월 짓눌렸던 고정관념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와중에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의 전화까지 혼란을 가중시키고 돈만 날릴 위기에도 처하지만, 부끄럽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편안함을 선사하는 리오와의 만남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리오와의 첫 만남과 섹스에서 신선한 자극과 미처 몰랐던 성적 쾌락을 경험한 낸시는 조금 더 담대해진다. 각자의 고유한 몸과 욕망을 긍정하고 서툴고 어설픈 모습도 사랑스럽게 수용하는 리오에게 느낀 신뢰가 더해지자,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던 다양한 체위의 우선순위까지 메모하며 낸시는 몸에 밴 계획성을 드러낼 만큼 편안해진다. 변화와 적극성을 이끌어내는 리오의 부드럽고 젠틀한 퍼스널 서비스는 고독한 노년을 앞둔 낸시에게 나타난 놀라운 신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솔한 몸과 마음의 대화가 거듭되며 애초의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전직 선생의 강력한 오지랖이 찾아든다. 이전의 만남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나눴던 각자의 이야기에 고무된 낸시는, 세 번째 만남에서 리오의 본명과 본업을 찾아봤고 알게 되었음을 천진한 표정으로 털어놓는다. 경악한 리오와 어리둥절한 낸시, 육십 년 넘는 인생의 굳건한 장막을 걷어내준 리오의 마법에 홀렸던 낸시는 경계를 넘어버렸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리오는 고성과 과격한 몸짓으로 호텔방을 엉망으로 만들고는 떠나버린다.

 

그들이 다시 만난 곳은 카페, 세 번의 만남을 가졌던 호텔의 1층이다. 난생처음 성적 쾌락과 해방감을 안겨준,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깨우쳐준 리오와 그렇게 끝낼 수 없었던 낸시는 다시 만남을 청했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어색하게 홀로 앉은 낸시에게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은 깜짝 놀라며 알아보는 과거의 제자다. 의외의 장소에서 민망한 관계의 상대를 기다리다 조우한 제자가 반갑지 않은 낸시와 달리 그는 수다스럽다. 그리고 얼마 후 나타난 리오와 서먹하게 재회한 낸시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문한 커피를 전하러 온 과거 제자의 미심쩍은 눈초리에 리오는 중고거래 운운하며 거짓말을 둘러대지만 낸시는 편견의 굴레를 벗기로 결심한 양 말을 잇는다. 교사 시절 여학생들에게 너희는 걸레라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던 낸시, 아니 수잔이 호텔방을 벗어난 자신의 세계에서도 다른 삶을 살기로 선언하는 순간. 눈짓으로 리오의 동의를 확인하고 둘의 관계를 제자에게 가감없이 이야기한 수잔은 시간이 아깝다며 마지막으로 예약한 호텔방에 리오와 함께 올라간다. 리오와 섹스를 나누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벗은 몸을 수잔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오랫동안 부정했던 몸과 욕망에 대해, 뒤늦게 마주한 삶의 고독과 공허에 대해 자기만의 돌파구를 찾는 낸시의 솔직함과 용기, 갈등과 혼란이 엠마 톰슨의 연기 덕분에 현실감을 더했던 것 같다. 어쩌면 멋모르고 벌였을 친구들과의 난장과 그로 인한 엄마의 외면, 어린 시절의 고충과 난관을 이상적으로 승화시킨 리오 그랜드 캐릭터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경직된 낸시의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선사하는 만큼 판타스틱한 요정질과는 어울렸다. 엠마 톰슨의 관록과 대릴 매코맥의 신선한 존재감, 두 배우의 이상적인 케미 덕분에 더욱 빠져들어 본 것 같다.   

 

금기와 본능의 경계를 넘나들며 성적 욕구와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여주지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았고, 누구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인간을 공허와 외로움에서 구원하는 것이 성적 경험만은 아니겠지만, 그 부분에서 남모를 결핍과 콤플렉스를 강하게 느꼈던 낸시를 통해 솔직하고 유쾌하게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점도 좋았다. 미니멀하게 축소된 공간과 딱 필요한 만큼의 등장 인물을 통해 각자 다르지만 모두가 겪는 고민과 문제를 밀도 있게 펼쳐보이는 솔직하고 유쾌한 영화였다. 


8/16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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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8. 10. 09:36

 



통영시민으로서, cgv쿠폰 다수 보유자로서 보게 된 영화다. 완성도나 작품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주제는 아니지만, 보게 된 이유가 매우 형식적이었음에도 아쉬움이 많이 느껴졌다. 잠자리에서 틈틈이 읽고 있는 [영화 언어]의 내용이 떠올랐는데, 그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무척 게으르고 안이하게 연출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포 진영과 각종 세트, 전투씬에 들어간 특수효과 등에 심혈을 기울인 건 느껴졌지만 서사의 전개와 주요 인물의 캐릭터 표현 등은 쉬운 선택으로 일관한 느낌이었다. 

 

비중 있는 조연의 임팩트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준사 등장씬의 과도하게 극적인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전투를 치르며 끊임없이 혼잣말을 시전하는 왜장을 연기한 변요한 배우가 참 힘들었겠다 싶었고, 실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김향기가 연기한 기생 캐릭터는 너무 전형적으로 소비되고 있어 민망했다. 서사에 입체성을 부여하는 캐릭터로 주요하게 활동하는 준사의 다이나믹이나 마지막에 죽음을 맞으면서 수십 년 전의 영화에서도 봤던 듯한 독백을 읊조리는 의병 이준혁 역시 보기에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정말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안성기 배우를 만난 건 반가웠다.   


한 가지 진하게 남은 궁금증은 조선 수군 수뇌부의 작전 회의에 두어 번 등장하는 지도에 '통영'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이었다. '통영'은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을 1604년 당시 두룡포로 이전한 후 유래된 지명으로 알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인 1592년의 지도에 통영이 나오는 게 맞는 걸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영화니까 기본적인 팩트 체크는 당연히 했겠지 싶으면서도 의문이 들었고, 여전히 궁금하다.

 

텔레비전으로나마 [명량]을 봤으니 기대는 없었고 어릴 적 배웠지만 까맣게 잊은 임진왜란과 한산대첩에 대해 환기하게 된 건 나쁘지 않았지만, 스펙터클 이외의 매력이 전혀 없고 시대착오적인 감동 코드가 횡행하는 영화의 만듦새가 몹시 유감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재해석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구도가 전제된다고 해서 꼭 이런 식이어야 할까 싶기도 했다. 소위 '국뽕'을 잔뜩 장전한 이런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각광받는 게 아연하다.   


8/8 cgv거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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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7. 6. 00:27

 



1992년 10월, 미국 여행 중 세인트루이스의 한 대학에서 유학생들을 관객으로 연 작은 공연이라는 자막에 이어 승용차에서 내려 이동하는 김광석 아저씨의 모습을 담은 짧은 인트로 화면, 그리고 시작된 공연의 첫곡은 "친구"다. 익숙한 기타 반주와 첫 소절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에 반응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긴 시간을 건너뛰었다. 십대 시절 언젠가 이어폰을 끼고 우면산을 내려오며 수차례 반복해 들었던 김민기 선생님의 목소리에 담긴 "친구" 그리고 이후 김광석 아저씨의 목소리로 전해지던 조금 더 물기어린 "친구"의 기억. 공연장에서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들던 때가 생각났고, 온전히 노래에 취하고 싶어 눈을 감으려다 눈앞의 모습을 놓치는 게 너무 아까워 눈을 크게 떴다. 수십 년 전 계몽아트홀, 마당세실극장, 학전소극장 그리고 또 어딘가, 그때도 충만한 순간들이라 느끼며 빠져들었지만 새삼 정말 얼마나 귀한 순간들이었나.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지나간 순간이 다시 올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음질도 화질도 당연히 좋지 않고 포커스 아웃되는 순간들도 엄청 많았지만, 시각과 청각의 결합 그리고 스크린의 힘은 압도적이어서 새삼스럽게 감동적이었다. "기다려 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부른 후의 짧은 이야기 그리고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한 내 사랑"에 이어 객지의 유학생들에게 전하는 담담한 위로의 말, 마지막 곡은 "먼지가 되어"였고, 공연 후 뒤풀이 자리로 옮겨 노천 카페에서 라이브로 부른 "나의 노래"가 더해졌다. "나의 노래"에서 카메라는 김광석 아저씨에 집중하기보다 자리에 앉거나 주변에 서서 노래를 듣는 이들을 많이 비추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 이 영상을 본다면 감회가 정말 새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남짓 짧은 영상은 성의없이 마무리됐다. 엔딩 타이틀과 함께 "거리에서"가 다시 한 번 흘렀고, 타이틀이 짧기는 하지만 너무하다 싶을 만큼 노래가 중간에서 뚝 끊겨버렸다. 30년 전 홈비디오 촬영본이니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아쉬움은 감수하며 보았지만, 엔딩 타이틀 자막의 속도를 조정한다거나 하는 식의 작은 성의로도 영상 종료 시점을 보컬 중간이 아니라 간주를 페이드 아웃하는 식으로 맞출 수 있지 않았을까.

 

중학생이던 시절 그룹 동물원에서 독립해 "기다려 줘"를 타이틀곡으로 1집 음반을 낸 그의 계몽아트홀 콘서트에 갔던 게 생애 첫 공연 관람이었다. 고등학생 때 학전소극장에서 열린 김광석 안치환 콘서트 즈음 그가 디제이를 맡은 불교방송의 "밤의 창가에서"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고, 이후 그의 공연에 참 많이 갔었다. 감수성 예민한 시절부터 보고 듣고 감응했던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의심할 바 없이 어른의 것이었고, 영상 속에서 노래하고 말 건네는 그 역시 세상을 잘 아는 어른처럼 보였지만 서른도 채 안 되었을 시절이다. 잊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듣고 보니 정말 일찍 떠나셨구나 싶고,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이 나갔던 대학 시절 겨울 방학 공활을 하며 지내던 자취방에서의 내 모습이 꿈처럼 떠올랐다. 몇 년 전 다큐 [김광석]이 제기했던 의혹의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엔딩 크레딧 시작 부분에 나오는 이름에 마음이 잠시 멈칫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게 오히려 이상하다 싶고 모르는 채로도 편견의 그늘을 아주 걷어버릴 수 없는 것 역시 개운치 않았지만, 그래도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김현식 아저씨의 공연, 살아계시지만 김목경 아저씨의 공연도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가, (그럴 수도 없겠지만)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재현되는 것이 좋은 것일까 싶어지기도 했다. 아무려나, 추억은 힘이 세다.


7/5 cgv서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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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7. 6. 00:1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허름한 입성의 한 사내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마이키 세이버, 그가 도착한 곳은 고향인 텍사스의 전 아내 집이다. 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다 전화를 건 그는 잔뜩 허세를 부리며 선물처럼 자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문을 연 장모 릴의 표정에는 경계하고 무시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어 나온 전 아내 렉시 역시 불청객인 마이키의 너스레를 일축하며 접근금지 명령 운운, 집 밖으로 내쫓는다. 하지만 집 경계 밖으로 물러나서도 막무가내로 자신의 구차한 상황을 소란스럽게 늘어놓던 마이키는 결국 집안 입성에 성공한다.

 

포르노 배우 동료였던 마이키와 렉시는 십여 년 전 결혼했고, 마이키는 오래 전 집을 떠나 홀로 떠돌았다. 배우로 활동하며 제법 인기가 있었던 그는 과거와 허황된 꿈에 취해 제멋대로 살아왔고, 엘에이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곡절과 사연이 있었던 둘은 여전히 서류상 부부이지만, 마이키는 이혼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올 만큼 정신 없고 뻔뻔하다. 렉시와 릴은 한마음으로 그를 백안시하지만, 월세를 분담하겠다는 제안에 임시 기거를 허락한다. 거처 문제가 해결되자 마이키는 마리화나 배급책인 옛 이웃을 찾아가 동네에서의 거래로 돈을 모으고, 어수룩한 성인이 된 옆 집 꼬마 로니와 어울리며 그의 차를 얻어타고 동네를 누빈다.

 

격렬한 적의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은근슬쩍 렉시의 침대로 들어가 섹스도 하면서 마이키는 무료하지만 안정된 일상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입만 산 한량 사위가 못마땅하지만 애초의 약속대로 월세를 내고 렉시와 동침하는 기색을 알아챈 릴은, 마이키에게 정착하거나 당장 떠나거나 택하라고 압박한다. 하나뿐인 딸이 채팅앱 성매매로 생계를 꾸리는 현실이 가슴 아프고 또 다시 상처 받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당장 갈 곳 없는 마이키의 선택은 안주, 잠시나마 제법 가족 같은 화기애애함을 장착한 세 사람은 마이키가 쏘는 외식을 하러 함께 동네 도너츠 가게로 향한다. 마이키는 온갖 생색을 내며 원하는 도너츠와 음료 주문을 종용하고, 렉시와 릴은 흔쾌히 호의를 받아들이며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외식 덕분에 앳되고 매력적인 도너츠 가게 알바노동자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한 마이키 역시 흔쾌하고 만족스럽다.

 

다음 날 자전거를 타고 도너츠 가게에 찾아가는 마이키는 들떴다. 부재 중인 알바노동자의 이름과 근무일을 알아내고 다시 찾아가 능구렁이 같은 아재개그를 늘어놓으며 접근하는 마이키, 관심을 즐기는 듯 레일리는 살갑고 웃음이 많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자 지루한 일상이 답답한 열여덟 레일리는 자신의 끼와 섹시함을 잘 알고 있는 맹랑한 소녀, 예명은 스트로베리다. 도너츠 가게에 자리를 잡고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마이키에게 근처 정유공장 노동자들로 판매망을 확대하라는 조언을 할 만큼 거침이 없고, 조금씩 가까워지며 카운터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마이키와 노닥거리면서 눈치껏 가게 주인을 눈속임하는 데도 능숙하다.

 

삼촌과 조카 뻘인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지고 스트로베리의 적극적인 어필로 커플 비슷한 관계로 급발진한다. 엄마의 트럭을 몰고 출퇴근하는 스트로베리는 매일 가게에 죽치는 마이키를 집(이라고 속인 부잣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더욱 과감해진다. 자신의 전직을 알고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스트로베리에게서 마이키는 사랑과 그를 이용한 재기의 욕망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한다. 도너츠 가게에서의 키스를 목격한 스트로베리의 섹스파트너에게 집까지 찾아가 경고했다가 온가족의 응징을 당하는 민망한 신파를 통해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 가까워진다. 엄마의 외박에 마이키를 집으로 초대한 스트로베리와 사랑을 나누며 도발적인 스타성을 확신한 마이키의 마음은 이미 고향을 떠나고 있다.

 

무일푼에 맨몸으로 돌아온 지 몇 주만에 돈과 사랑과 미래를 거머쥔 마이키의 뇌리에서 자신을 받아준 렉시와 릴은 지워진다. 불편한 소파 신세를 면하려 질척거리며 차지한 침대에서 렉시의 요구는 거추장스럽고, 마리화나 거래로 제법 두둑하게 모은 돈으로 당당하게 생활비와 월세를 지불하며 목소리도 커진다. 극적인 변화의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순진한 로니뿐, 그의 차를 얻어타고 스트로베리와의 일들과 자신의 계획까지 모조리 털어놓으며 마이키는 희망에 부풀었다. 수다에 장단을 맞추며 운전하던 로니는 길을 잘못 들고 마이키의 지적에 방향을 튼 차는 고속도로에서 엄청난 사고를 내고 만다. 급히 차를 돌리고 너무 놀라 토하는 로니에게 마이키는 자신의 동승을 비밀에 부치라고 요구한다.

 

십수 명의 부상자를 낸 고속도로 22종 추돌사고 소식이, 대선 이슈를 제치고 뉴스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유례없는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까지 감행한 파렴치한에 지역의 분노가 몰리고 금세 밝혀진 범인 로니는 구속된다. 신세 조진 착한 이웃을 안타까워하는 렉시와 달리 마이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좌불안석, 하지만 소심한 것인지 충직한 것인지 로니는 공범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는다. 한숨 돌린 마이키가 고향을 떠날 이유는 더욱 분명해졌고, 사고 직후 뜸했던 도너츠 가게에 꽃다발을 사들고 간 그는 스트로베리에게 내일 아침 함께 엘에이로 떠나자고 프로포즈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따분한 고향을 떠나는 것은 스트로베리 역시 바라던 바다.

 

귀가해 엉뚱한 말들로 이별을 고한 마이키 앞에, 렉시의 연락을 받은 마리화나 배급책의 자식들이 나타나 빼돌린 마리화나와 숨겨둔 돈을 압수한다. 새 출발을 앞두고 청천벽력을 만난 마이키는 옷 갈아입을 시간을 청한 뒤 벌거벗은 채로 동네를 달려 배급책을 찾아가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배급책은 날이 밝기 전에 텍사스를 떠나라며 장거리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내밀고, 돌아올 때처럼 다시 빈털터리가 된 마이키는 스트로베리의 집 앞으로 간다. 현관문이 열리고, 망연자실한 마이키와 달리 빨간 비키니 차림으로 그를 맞이하는 스트로베리의 농염한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극중 누구도 웃기려는 의도가 없어 보였지만 캐릭터도 대사도 상황도 어이가 없어서 웃겼고, 그게 바로 블랙코미디겠지만 너무나 미국적이어서 재미있기보다는 대체로 황당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반화이겠지만 작품에서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을 때는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이미지와 어떤 특성이 메시지와 결부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텍사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보니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도너츠 가게 근처 정유공장과 굴뚝, 공장과 집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 과거 노예무역이 이루어졌다는 항구 등 지역의 변화와 현재를 담은 배경과 장면 들을 삽입한 것도, 단지 제작 시기가 맞아 떨어졌던 걸 수도 있지만 대선 이슈를 실내 텔레비전 사운드로 계속 흘려보낸 것도 의도와 함의가 있을 텐데 싶었지만 알아챌 수 없어 아쉬웠다. 

 

릴과 렉시의 공간에서 대사만큼이나 두드러졌던 텔레비전 사운드가 대선을 비롯한 크고작은 갈등들을 내내 다루다가 로니와 마이키의 교통사고라는 직접적인 균열이 전면화된 후에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게 기억나고, 애국심 운운하며 성조기 패턴의 담배 종이를 선택하는 마이키의 취향이 마초 이미지에 너무 부합해 인상적이었다. 도너츠 외식에 반색하는 렉시와 릴의 가난하고 누추한 일상, 그들을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 대를 이어 마리화나 배급책으로 활약하는 이웃이라는 사실, 아내가 죽은 후 집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던 아버지와 그를 뒤로 하고 모든 걸 뒤집어쓴 채 구속된 로니의 운명 같은 것들이 쓸쓸한 느낌으로 남았다. 보수성이 지배적인 지역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을 마이키와 렉시의 허름한 현재를 생각하니, 스트로베리의 반짝이는 젊음과 당돌한 아름다움은 시간과 함께 어떻게 변해갈까 싶어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시간이 맞으면 볼까 했었던 기억이 있어 기획전 극장 상영이 반가웠던 영화다. 예전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궁금했는데 놓쳤고 이 감독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못했는데 "인간들의 추한 단면을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해 유머로 승화시키는 션 베이커의 연출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소개 때문에 혹했던 것 같다. 감상을 말하자면, 영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웃기긴 웃겼는데 그야말로 계속되는 실소여서 보는 동안 실시간으로 감정적인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징그럽게 배역 그 자체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는 대단했지만, 내게는 꽤나 피곤한 농담 같은 영화였다.

 


7/5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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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7. 6. 00:0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농염한 표정으로 춤추는 댄서와 코앞에서 환호하며 팁을 던지는 관객들로 열기 가득한 클럽, 포스터 속 드랙퀸의 화려한 쇼로 영화가 시작된다. 쇼가 끝나고 분장실에 들어선 댄서는 외국인 관객을 욕하며 그가 브라에 집어넣은 천 원짜리를 꺼낸다. 깃털처럼 세팅된 긴 속눈썹과 블링블링 반짝이는 진한 화장에 체지방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비현실적인 몸, 무대를 마치고 "지겨워"를 연발하는 그에게서 생활인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귀가하며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뒷모습, 역사의 노점에서 야채를 사고 승객으로 가득한 지하철에 몸을 실은 그의 존재감은 양각처럼 도드라진다.

 

"담다디"를 좋아했던 시골 소년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그때는 왕따 같은 거 없었다는 누나와 엄마의 회고와 달리 수면제 50알을 한 번에 삼켰지만 다 토한 뒤 살아났던 학창 시절, 죽으려다 살았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음 날 시험을 보러갔던 소년은 발레의 꿈을 부여잡고 무거운 생을 견디며 성장했다. 아버지가 빚을 내어 사준 100만 원짜리 발레복을 입고 서울 콩쿠르에 참가했고, 목포 시내에 플래카드를 휘날리며 대학에 진학해 서울로 갔다. 발레가 선사한 날개가 데려다준 서울은 해방구가 아니었다. 여성성을 버리라는 선배의 폭언과 폭력, 세상의 지긋지긋함은 여전했고 그는 이태원 환락가로 숨어들어 트랜스젠더 드랙퀸이 되었다.

 

또 다른 지긋지긋함 속에서 정체성을 찾고 미친년처럼 끼를 발산하며 추기 시작한 자기만의 춤으로 그의 예술은 공고해지고 세상은 확장되었다. 2018년 촬영을 시작했다는 다큐에는 드랙쇼뿐 아니라 그의 예술의 뿌리일 발레, 퍼포먼스와 현대무용 장면을 담은 시퀀스들이 뮤직비디오처럼 삽입되어 있고, 과거의 발레 공연을 찍은 비디오 화면과 시골집의 부모님 앞에서 춤추는 장면, 2019년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 공연의 한국 대표로 발탁되어 연습하는 모습과 뉴욕 라 마마 극장에서의 공연 등이 담겨 있다. 드랙도 발레도 춤도 모르는 관객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무대에 오르든 그만의 자연스러움이 발휘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성소수자 예술가로서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상처와 혼란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다행히 모어에게는 사랑하는 이들과 때로 힘이 되는 이들이 있었다. 남다른 아들의 재능과 성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준 부모님, 20대 중반에 만나 20년간 함께인 애인 제냐, 그들이 둘러앉은 시골집의 식탁과 마당에서의 공연 그리고 경운기 퍼레이드는 이질성을 무화시키는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가 집으로 데려갔던 일과 자신이 받았던 어렴풋한 위로를 기억하고 그 친구를 찾아가 이야기 나누는 모습, 오랜 우상이었던 [헤드윅]의 존 카메론 미첼과의 어쩔 줄 모르는 만남과 우정을 이어가며 심지어 끼부리는 모습도 지켜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큐에서 제냐는 불안정한 일과 체류자격으로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화학박사였던 그는 당시 하는 일 없이 포켓몬 세계에서 평온과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었고 무기력해보였다. 제냐에게 담배와 커피믹스 줄이라고 잔소리하고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려는 걸 제지하다 토라져 멀리 가버리자 욕을 하면서도, 함께 이동할 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 포켓몬이 있는지 묻는 모어의 모습이 참 다정해서 좋았다. 자신의 장례에 써달라며 퇴직금을 보낸 제냐에 대해 말하며 울컥하던 모어, 스톤월 항쟁 50주년 공연으로 뉴욕에 가 무대에 서고 미첼을 만나는 모어와 비자 연장에 실패했는지 러시아영사관에서 초조해하던 제냐가 교차하던 순간은 안타까웠는데 모어보다 "담다디"의 가사를 더 잘 기억하는, 시골집에 함께한 후반부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제냐를 만났기 때문에 두려웠던 성전환 수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그들이 온전히 행복하면 좋겠다.

 

영화에는 이랑의 노래들과 "서기 2000년", "아, 대한민국", "조율" 등이 배경음악 이상의 위상으로 쓰였고, 때로 모어의 립싱크가 어우러지거나 뮤직비디오처럼 삽입되기도 했다. 특히 광화문역사와 광장을 무대로 춤추는 모어와 혐오세력들이 상당히 부각된 퀴어퍼레이드 현장 스케치 그리고 퍼레이드 선두에 선 모어의 모습에 깔린 "아, 대한민국"은 강렬했다. 서울에 있을 때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도 노골적이고 화려한 드랙퀸 분장에는 솔직히 '굳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다큐를 보며 처음으로 그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러한 자기표현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높은 텐션과 튀는 무언가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성향은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역시 보이지 않는 폭력이거나 적어도 무례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입체적인 모습을 청각적으로도 전달하려는 듯, 담담하거나 끼를 부리거나 때로 무당의 주술 같기도 하고 오래고 유구한 운명을 담은 전래동화 같기도 한 여러 버전의 내레이션이 줄곧 이어졌고 그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하는 다양한 영상들이 펼쳐졌다. 주인공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기획과 연출이 어느 정도 개입된 다큐라고 느꼈는데 다양한 결로 차원을 넘나드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화가 놀라웠고,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스타일과 인간미 넘치는 감정씬들이 잘 녹아든 점도 인상적이었다. 벚꽃나무 아래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 학창 시절의 극단적 선택을 말하던 장면, 싱크가 조금 안 맞았지만 좋아하는 노래 "조율"이 흐르던 장면, 시골집에서의 여러 장면들, 마지막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 흘리던 모어의 모습은 이따금 떠오를 것 같다.

 

모어는 다큐 촬영을 시작할 때 이미 최고의 드랙 아티스트였던 것 같고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는 전방위적인 활동으로 상당히 유명한 예술가였던 것 같은데, 나는 이 다큐를 통해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 몇 년간 찍었고 가족과 연인, 내밀한 사생활까지 많은 부분이 담겼지만 81분짜리 다큐에서 그의 모습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부시고도 처연한 성소수자 예술가의 일면들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는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하고도 평범한 삶을 지독하게 담아낸 미친 다큐였고, 그 속의 모어는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몇 번이나 울컥하다가 결국 울었고, 엔딩크레딧을 보며 '모행진, 이옥금' 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대사와 마지막 자막 "팁이나 내놔, 이 썅것들아"는 과몰입 신파 관객을 위한 감독의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7/5 cgv서면 art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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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7. 5. 23:5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숲 입구 공터에 주차된 차들과 도착해 주차하는 차들을 비추던 카메라가 숲길 너머 호숫가로 향한다. 나른하고 무료한 분위기의 호숫가에는 혼자이거나 둘이거나인 남자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나체이거나 편안한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거나 수영을 하는 이들은 여름이면 호수로 모여드는 게이들이다. 그들은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파트너를 물색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면 숲에서 섹스를 한다. 고요하고 한적한 호숫가에서 여유로워 보이는 이들 대부분은 육체적 욕망을 나눌 상대를 본능적으로 탐색 중이다.

 

아는 얼굴과 인사와 안부를 나누기도 하는 이들 사이에 나타난 프랭크는, 홀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앙리 곁에 자리를 잡았다. 미끈한 몸매로 시선을 끄는 이도 불룩한 배를 그대로 드러낸 이도 거리낌없이 벌거벗고 있거나 웃통을 벗고 있는 호숫가에서 옷을 갖춰 입고 멀찍이 앉은 앙리는 무기력해보인다. 간단한 몇 마디와 통성명을 한 두 사람은 긴 휴가를 보낼 곳도 애인도 없는 처지를 공감하며 덤덤한 대화를 이어간다. 이따금 수영을 하며 상대를 찾고 섹스를 하는 프랭크와 달리 앙리는 매일 같은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 잠시 다가오는 프랭크와 짧은 대화를 나눌 뿐이다.

 

느 날 잘 다듬은 콧수염과 근육질 갈색 피부의 미셸을 발견한 프랭크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인사를 건네지만, 어디선가 나타나 경계심을 드러내는 애인과 함께 그는 사라진다. 해가 진 뒤에도 숲에 남아 시간을 보내던 프랭크는 다들 떠난 호수에서 애인과 수영하는 미셸, 얼마 후 물 속에서 엉겨붙은 두 사람, 허우적거리다가 사라진 애인, 물 속에서 홀로 나오는 미셸을 목격한다. 섬뜩한 적막 속에 보아서는 안 될 것을 혼자서 보고 만 프랭크. 하지만 미셸도 프랭크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호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사라진 애인의 비치타올과 소지품은 며칠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변사 사건 수사를 위해 담로디 형사가 호수를 찾는다. 게이들을 탐문하며 사건이 일어난 날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호수에서 사체가 인양된다. 담로디 형사는 섣불리 살인을 단정하지 않지만 미셸과 프랭크 주변에 자주 나타나 그들의 행적과 피해자에 대해 거듭 묻고, 진실을 숨기는 두 사람 사이에는 이따금 어색한 순간이 찾아온다.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숨긴 채 위험한 욕망에 몸을 맡긴 프랭크는 미셸이 자신에 대해 선을 긋고 오로지 숲과 호수에서만 둘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큰 불만이다. 늘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앙리는 잠시 곁에 와서 인사를 건네는 프랭크에게, 미셸과의 관계에 대한 우려를 전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연인이 되었음에도 함께 밤을 보내자는 요구를 무시하고 사생활을 비밀에 부치는 미셸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던 프랭크는 미셸과의 섹스 중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언급하고 말다툼을 벌이다 헤어진다. 그 사이 담로디 형사의 수사망은 점점 가해자와 목격자인 두 사람을 향해 좁혀온다. 호숫가에 혼자인 미셸에게 다가가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음을 암시하고 프랭크도 죽일 거냐고 내심을 드러낸 앙리는 숲으로 뒤좇아온 미셸이 휘두른 칼에 맞는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발견하고 사색이 된 프랭크, 앙리는 "괴로워하며 사는 거 힘들었어. 네 앞에서 죽어서 행복해." 유언처럼 말하고 숨을 거둔다.

 

어둠이 내린 숲속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프랭크의 귀에 미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팽팽한 긴장으로 숨죽인 프랭크의 이름을 부르던 미셸은 프랭크가 그렇게 원했던 "함께 밤을 보내자"는 말을 서늘하게 내뱉으며 그를 찾아내려 한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던 프랭크의 시야에 숲 입구에 도착한 담로디 형사가 포착된다. 형사의 등장은 잠시나마 안도감을 선사하지만, 무방비상태로 숲길에 들어서던 그 역시 어느 순간 나타난 미셸의 칼에 찔려 쓰러진다. 머리가 어찔해지는 정적과 침묵 속의 세 번째 살인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공간은 입구의 주차장과 숲과 호수로만 한정된다. 여름이면 암묵적으로 게이들만의 해방구가 되는 세계가 딱 그만큼으로 한계 지어진 느낌이었고, 그들을 향한 다수의 시선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호수 건너로 가봐야 섞여들 수 없는 이들은 미셸의 출현 이전에는 평화로웠을 혹은 매년 다른 미셸에 의해 사건이 줄을 이었을지 모를 그곳에서 각자의 비루한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성기는 물론 섹스 장면도 노골적으로 응시하는 카메라는 '다른' 세상을 가감없이 비춘다. 가림없는 나체가 계속 등장하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고, 소외되었거나 자처한 배제를 통해 그곳에 모인 소수들 사이에서도 엄연히 작동하는 매력자본의 위계와 권력장이 느껴져 어떤 부분에서는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매일이 별로 다르지 않은 숲과 호수에 모여드는 매일이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 피살된 자의 비치타올과 소지품들이 며칠이나 방치되어도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 성적인 욕구는 느끼지 않고 친구로 만족한다던 앙리의 프랭크를 향한 마음과 마지막 모습 등에서 그들의 특별한 외로움이 느껴졌고, 담로디 형사의 입을 통해 발화된 "당신네들은 익사체가 떠오른 호수에 이전과 다름없이 모여든다. 익사체는 사흘동안 가라앉아 있었다. 동정이나 연대감에 호소하는 게 아니다." 같은 말들이 기억에 남았다.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그들만의 세상,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은 이들이 만들어낸 고독하고 자비없는 세계의 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이방인들이 모여든 그곳에서 이방인 아닌 자는 누구이고 '호수의 이방인'은 과연 누구였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신선하고 이채로웠지만 심란하고 착잡한 영화였다.

 

 

7/4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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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7. 5. 23:43



주요 사건은 삼촌 조니와 9살 조카 제시의 만남과 그를 통한 남매의 화해, 가족의 의미 재발견 정도가 되겠지만 시작부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줄기차게 나오고 중간중간 학술적인 레퍼런스가 인용된 덕에 어떤 질적 연구의 과정을 섬세하게 담은 영화처럼 느껴졌다. 미래와 삶에 대한 질문에 또박또박 정제된 답변을 내놓는 인터뷰이 어린이들과 온전히 일상을 함께하며 혼을 빼놓는 제시의 대비가 한 인간을 양육하는 일의 지난함을 잘 보여주었고, 조니에게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능청스럽게 알려주는 제시가 맹랑하게도 느껴졌지만 어린이는 자신의 수준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지혜를 보유한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머니의 간병으로 인한 갈등, 질리지도 않는 고아놀이에 질문이 끊이지 않는 제시, 남편 폴의 병과 노이로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비브가 종종 절규하지만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잔잔하고 사색적이라고 느껴진 작품이었다. "미래가 어떨 것으로 같니?", "감정이 일렁일 때는 언제니?" 등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솔직한 답변들이 새롭게 다가왔고, 인터뷰 녹음파일을 듣고 인터뷰에 대한 단상을 녹음하며 기록하는 조니의 정적인 모습과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일상적인 텐션으로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를 볼 때면 (둘의 얼굴이 별로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례스럽게도 은연중에 리버 피닉스가 나이를 먹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게 되는데, 역시나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내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몰입이 필요한 영화였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게 아쉽다. 상영 내내 과자 비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계단에 손을 털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앞의 앞 자리 인간 때문에 정말 짜증이 났고, 영화 감상의 절반은 객석 컨디션이 좌우한다는 걸 절감했다. 아이처럼 순수한 몰두와 유연함을 가지지 못한 어른으로서, 좋아할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놓친 기분이라 서운하다. 



7/4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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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