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서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경기를 제대로 보거나 응원한 기억이 없다. 나라 전체가 들떴던 2002년 월드컵 때, 전에 없던 자율적이고 공동체적인 축제 분위기에 마음이 덩달아 들뜨기는 했는데, 잠시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더욱 절감했던 건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는 승부의 비정함을 지켜보는 일이 괴롭다는 사실이었다. 다분히 경쟁적이고, 필연적으로 승패가 나뉠 수밖에 없는 스포츠 경기의 생리는 단지 구경하는 입장임에도 맞지 않았다.
'몸값'이니 '트레이드'니 하며 사람의 가치가 당연하게 돈으로 환산되고 선수들이 도구처럼 오가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불편했다. 여느 스포츠라고 다르지 않고 스포츠 밖의 세계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런 인식과 사고가 사람에게 값을 매기고 목표를 위해 사람을 도구화하는 문화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요인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알지 못하는 선수들의 땀과 꿈은 존중받아 마땅하겠지만, 내게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극단의 영역이라는 거부감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하였고 여전히 그러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여자배구 경기를 몇 편 봤다. 잘생겨서 최천식에, 어딘가 이상과 닮은 느낌이라 이상열에 혹해 룰도 모르면서 경기를 봤던 먼 한 시절의 기억 이후 처음이다. 여전히 룰 잘 모르고 15점 됐는데 왜 세트가 안 끝나지? 생각하며 대 일본전을 봤으니, 음... 암튼. 그렇게 도쿄올림픽의 여자배구 세 경기를 보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의 관련된 이야기와 이전의 여러 사진과 영상 들을 보며 8월을 보내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모르던 세상은 언제나, 내가 알고 경험해 온 아주 작은 세상을 제외하고 거의 무한대라는 걸 실감한다. 세상에는 온갖 매력으로 가득한 사람과 세계가 늘 존재한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던 누군가에 꽂혀 빠져들고 좋아하게 되는 일만큼 손쉬운 게 없다는 것 역시 실감한다. 덕질이야 덕질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전부터 해왔지만, 온갖 미디어와 sns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여자배구 관련 각종 장면들을 보며 유독 눈길과 마음을 끄는 지점이 있었다.
배구라는 종목이 지닌 다정함과 호쾌함 그리고 선수들간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스킨십. 다른 종목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선수들은 경기를 하며 셀 수 없을 만큼 서로를 건드리고 끌어안고 매달리고 어깨동무하고 쓰다듬고 툭툭 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경기력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기능적인 측면이나 세레머니로 자리잡은 부분도 있겠고 어느 정도의 관례도 있겠지만 승리하거나 패배했을 때는 물론, 득점하거나 실점했을 때에도 타임아웃으로 잠시 모일 때에도 코트 밖에서 응원을 하면서도 선수들은 서로의 감정을 말이나 표정만이 아니라 손길과 몸짓으로 서로 나누며 힘을 내고 있었다.
한 선수에 빠져 찾아본 영상들에서 보여지는 코트 밖이나 숙소에서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얼다큐의 형식을 취한 프로그램 속의 모습이 그대로 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여러 팀에서 여러 경기장에서 보이는 선수들간의 일상적이고 건강한 스킨십의 자연스러움은 정교한 연출로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그들의 몸에 배인 표현 양식이자 공동체에 체화된 문화처럼 보였다. 보통의(?) 사람들이 눈인사나 목례, 손을 흔들거나 잡는 정도로 발산하는 감정이, 몸을 쓰는 일에 특화된 선수들 사이에서는 훨씬 극대화된 몸짓과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훈련이나 플레이 과정에서의 노력과 긴장은 개인 종목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팀 스포츠는 팀원간의 진한 연결감과 유대감이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서로에게 눈물을 보일 수 있고 한 사람의 눈물이 모두에게 전이되고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관계 같은 건, 오랜 세월 팀 스포츠에서 단련된 선수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빠져서 찾아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겠지만, 팬들은 팀이어서 드러나는 끈끈한 부대낌과 케미의 폭발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선수의 매력을 발견하고 탐색하며 더욱 열광하는 것 같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 신체의 극한까지 몸을 쓴다는 것이 어떤 차원인지 상상할 수 없고, 단체 생활의 경험은 농활이나 공활 정도가 전부이니 팀 스포츠의 세계와 그에 속하는 개인들의 관계와 일상에 배인 감각과 분위기 역시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경기 자체가 주는 감동이나 재미와 별개로, 코트 안팎에서 보이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나 역시 몸 대 몸으로도 누군가를 만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좋으면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팔짱을 끼기도 하고 껴안기도 했던,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걸 의식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러웠던, 이제 내게는 없는 무구하고 계산 없는 몸의 세상.
음... 너무 나갔나. 아무튼, 그랬다. 관심이 가는 대로 조금 찾아보다 보니 배구협회니 대한체육회니, 각 구단들의 권위주의 같은 것들은 여전히 공고하게 작동하는 듯하지만... 그런 자장 속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새롭게 구축해가는 멋진 세계가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도 든다. 누군가들이 인생의 절반 이상 뼈를 갈아넣으며 갈고 닦고 변화시키며 빚어가는 세상의 감동과 아름다움에, 무임승차하는 마음이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양비론으로 보는 것이 익숙했던 내게, 다정하고 호쾌한 여자배구는 새로운 각성을 던져주었다.
지난겨울까지 내내 수도권에 살았고 그들이 경기하는 안산에서도 일을 했으나, 물리적 거리와 별개로 전혀 몰랐던 세상에 대한 뒤늦은 관심과 설렘이 민망하기는 하다. 이제 와서 '충무체육관'은 설마 통영? 하며 잠시 반색했던 무지함도 무안하고, 지금 나의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만으로 짐작할 수 없고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지 못하는 고민과 고통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오늘을 만든 여자배구 선수들이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란다. 특히, IBK기업은행 알토스 4번 김희진 선수의 멋진 경기와 밝은 웃음을 오래 볼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