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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11 여자배구
  2. 2021.05.24 을의 심정
  3. 2021.05.09 끝의 시작
  4. 2021.05.09 끽소리
  5. 2021.04.26 저자극성 생활
  6. 2021.04.18 '그래도'의 마음
  7. 2021.03.03 무리와 후유증
  8. 2021.02.25 부모
  9. 2021.02.24 3일 전
  10. 2021.02.22 생일날
산책일기2021. 8. 11. 19:45

 

 

어른이 되어서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경기를 제대로 보거나 응원한 기억이 없다. 나라 전체가 들떴던 2002년 월드컵 때, 전에 없던 자율적이고 공동체적인 축제 분위기에 마음이 덩달아 들뜨기는 했는데, 잠시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더욱 절감했던 건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는 승부의 비정함을 지켜보는 일이 괴롭다는 사실이었다. 다분히 경쟁적이고, 필연적으로 승패가 나뉠 수밖에 없는 스포츠 경기의 생리는 단지 구경하는 입장임에도 맞지 않았다.


'몸값'이니 '트레이드'니 하며 사람의 가치가 당연하게 돈으로 환산되고 선수들이 도구처럼 오가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불편했다. 여느 스포츠라고 다르지 않고 스포츠 밖의 세계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런 인식과 사고가 사람에게 값을 매기고 목표를 위해 사람을 도구화하는 문화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요인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알지 못하는 선수들의 땀과 꿈은 존중받아 마땅하겠지만, 내게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극단의 영역이라는 거부감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하였고 여전히 그러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여자배구 경기를 몇 편 봤다. 잘생겨서 최천식에, 어딘가 이상과 닮은 느낌이라 이상열에 혹해 룰도 모르면서 경기를 봤던 먼 한 시절의 기억 이후 처음이다. 여전히 룰 잘 모르고 15점 됐는데 왜 세트가 안 끝나지? 생각하며 대 일본전을 봤으니, 음... 암튼. 그렇게 도쿄올림픽의 여자배구 세 경기를 보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의 관련된 이야기와 이전의 여러 사진과 영상 들을 보며 8월을 보내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모르던 세상은 언제나, 내가 알고 경험해 온 아주 작은 세상을 제외하고 거의 무한대라는 걸 실감한다. 세상에는 온갖 매력으로 가득한 사람과 세계가 늘 존재한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던 누군가에 꽂혀 빠져들고 좋아하게 되는 일만큼 손쉬운 게 없다는 것 역시 실감한다. 덕질이야 덕질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전부터 해왔지만, 온갖 미디어와 sns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여자배구 관련 각종 장면들을 보며 유독 눈길과 마음을 끄는 지점이 있었다.


배구라는 종목이 지닌 다정함과 호쾌함 그리고 선수들간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스킨십. 다른 종목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선수들은 경기를 하며 셀 수 없을 만큼 서로를 건드리고 끌어안고 매달리고 어깨동무하고 쓰다듬고 툭툭 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경기력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기능적인 측면이나 세레머니로 자리잡은 부분도 있겠고 어느 정도의 관례도 있겠지만 승리하거나 패배했을 때는 물론, 득점하거나 실점했을 때에도 타임아웃으로 잠시 모일 때에도 코트 밖에서 응원을 하면서도 선수들은 서로의 감정을 말이나 표정만이 아니라 손길과 몸짓으로 서로 나누며 힘을 내고 있었다. 


한 선수에 빠져 찾아본 영상들에서 보여지는 코트 밖이나 숙소에서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얼다큐의 형식을 취한 프로그램 속의 모습이 그대로 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여러 팀에서 여러 경기장에서 보이는 선수들간의 일상적이고 건강한 스킨십의 자연스러움은 정교한 연출로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그들의 몸에 배인 표현 양식이자 공동체에 체화된 문화처럼 보였다. 보통의(?) 사람들이 눈인사나 목례, 손을 흔들거나 잡는 정도로 발산하는 감정이, 몸을 쓰는 일에 특화된 선수들 사이에서는 훨씬 극대화된 몸짓과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훈련이나 플레이 과정에서의 노력과 긴장은 개인 종목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팀 스포츠는 팀원간의 진한 연결감과 유대감이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서로에게 눈물을 보일 수 있고 한 사람의 눈물이 모두에게 전이되고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관계 같은 건, 오랜 세월 팀 스포츠에서 단련된 선수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빠져서 찾아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겠지만, 팬들은 팀이어서 드러나는 끈끈한 부대낌과 케미의 폭발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선수의 매력을 발견하고 탐색하며 더욱 열광하는 것 같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 신체의 극한까지 몸을 쓴다는 것이 어떤 차원인지 상상할 수 없고, 단체 생활의 경험은 농활이나 공활 정도가 전부이니 팀 스포츠의 세계와 그에 속하는 개인들의 관계와 일상에 배인 감각과 분위기 역시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경기 자체가 주는 감동이나 재미와 별개로, 코트 안팎에서 보이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나 역시 몸 대 몸으로도 누군가를 만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좋으면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팔짱을 끼기도 하고 껴안기도 했던,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걸 의식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러웠던, 이제 내게는 없는 무구하고 계산 없는 몸의 세상.


음... 너무 나갔나. 아무튼, 그랬다. 관심이 가는 대로 조금 찾아보다 보니 배구협회니 대한체육회니, 각 구단들의 권위주의 같은 것들은 여전히 공고하게 작동하는 듯하지만... 그런 자장 속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새롭게 구축해가는 멋진 세계가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도 든다. 누군가들이 인생의 절반 이상 뼈를 갈아넣으며 갈고 닦고 변화시키며 빚어가는 세상의 감동과 아름다움에, 무임승차하는 마음이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양비론으로 보는 것이 익숙했던 내게, 다정하고 호쾌한 여자배구는 새로운 각성을 던져주었다.


지난겨울까지 내내 수도권에 살았고 그들이 경기하는 안산에서도 일을 했으나, 물리적 거리와 별개로 전혀 몰랐던 세상에 대한 뒤늦은 관심과 설렘이 민망하기는 하다. 이제 와서 '충무체육관'은 설마 통영? 하며 잠시 반색했던 무지함도 무안하고, 지금 나의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만으로 짐작할 수 없고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지 못하는 고민과 고통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오늘을 만든 여자배구 선수들이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란다. 특히, IBK기업은행 알토스 4번 김희진 선수의 멋진 경기와 밝은 웃음을 오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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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5. 24. 14:20



지인의 소개로 두 달간 재택알바를 하기로 했다. 처음 지인의 연락을 받은 건 2월 말이었지만 내 사정과 담당자의 독특한 소통 방식이 겹쳐 5월 초순에 시작하는 것으로 했고, 얼마 전 명기된 날짜는 일주일 전인 계약서를 작성했다. 맡기는 측에서도 처음하는 작업이고 나 역시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 예측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오가던 3월, 담당자는 작업 관련 자료를 보내줬고 나는 대략 보고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일을 맡기는 측에서 먼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맞는 것인데 이상했지만, 대략의 답변을 듣고 일단 넘겼다. 정확한 시작 시기가 정해진 게 아니어서 나도 서두르지 않았고, 이런 식의 진행이라면 결국 안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연락이 없고 나름 기다렸다가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연락을 하면 늦어진 이유는 생략된 채 다음 주에- 이런 식의 소통이 몇 차례 반복됐다. 날짜가 명기된 계약서를 검토해달라고 보내오고 계약일자에 아무 연락이 없다가, 하루이틀씩 지나서 대표의 출장이니 계약 담당자의 휴가 등을 이유로 늦어졌다며 죄송하다는 말이 덧붙었고 일주일 후 직인 찍인 계약서를 작성했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는 진행이었지만, 두 달 정도 띄엄띄엄 연락을 하며 그런 사람인가보다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가보다 했다.

지난주 월요일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화요일은 다른 일하느라 패스하고 수요일에 작업을 시작했다. 막상 시작하니 이전에 대략 이야기한 기준으로는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디테일한 확인이 필요했지만 석탄일에 연락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다음 날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를 했다. 마침 출장길이라고 해서 유선상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했는데, 작업을 하려면 새로운 파일들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확인됐다. 새로운 파일들은 이후에 받기로 하고 궁금한 점들 몇 가지를 정리해 메시지로 남겼다. 다음 날, 전날의 메시지 답변 대신 지급증 파일이 올라왔다. 앞서 질문한 것들을 먼저 정리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하자, 몇 가지 중 하나에 대한 한 줄의 답변으로 끝이었고 월요일 오전에 두 개의 전체파일을 보내주마고 했다. 그리고 월요일 오후 2시가 넘은 지금, 하나의 파일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금요일 지급증을 보낸 후 계약금의 절반이 입금됐고, 궁한 처지이지만 반갑기보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커졌다. 생각하기에 따라 엄청 까다로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작업이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며 일을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싶은 걱정과 짜증스러움이 주말 내내 가시지 않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별로 갑을관계에 놓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계약서를 작성하며 무슨 일을 한 기억이 거의 없고, 일했던 단체들은 나름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었다. 정확한 맥락 위에서 설명하고 합의점을 찾아야 이후의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고 용이하다는 건 일을 하면서 늘 느끼는 부분이다. 기껏 상세히 설명해도 한두 마디의 부족한 대답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있고,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은 다 다르다를 되뇌이며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그렇게 부족한 답변의 남은 구멍들을 내 노력으로 메울 수 없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방이 집요하다고 느끼더라도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고 기준을 마련해야 일이 진행된다. 내가 알바를 시키는 입장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태도를 대면하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고 이게 을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상엔 별의별 일이 다 있고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낯선 오기가 마음 한편에 자리잡았다는 것. 그는 모를 것이다. 무신경하고 무성의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안기고 있는지, 일을 맡겼지만 갑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그런 태도 자체가 을에게 얼마나 큰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것인지. 오늘은 작업의 기준이 정리되고 제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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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1. 5. 9. 22:16

 

 

실은 오늘, 아쉽지만 좋은 날이었는데... 티스토리 카카오계정 강제전환 당하고(!)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주의 일로 계속 기분 나빠하는 건 나만 손해이므로... 나는나는 어른답게 나의 오늘을 기록하겠다.

 

오늘, 좋은 시간들이 끝났다. 좋은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테니 좋고. 약간의 바지런과 용기를 내어 고마운 마음을 전한 오늘의 나도 좋다. 너무 큰 강의 타이틀의 부담, 자연인 모드에서는 변함없는 낯가림과 수줍음, 그럼에도 예상치 못했던 충만함과 어떤 위로, 여전히 세상엔 내가 모르는 좋은 이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막연히 꿈꾸던 좌표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리라는 마음의 확인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내일부터 7월 9일까지 나는 한 떨기 재택알바로 살아갈 것이다. 이 역시 예상치 못했던 인연이 가져다준 선물이라면 선물.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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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1. 5. 9. 22:05

 

항복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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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1. 4. 26. 23:10

 

 

대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상은, 열 달쯤 해보니 외부 자극이 거의 없는 생활이다. 그래서인지 마냥 혼자인 평소와 달리 누구를 만나 수다를 떤다든가, 3시간쯤 집중해서 강의를 듣는다든가 하는 정도만으로도 꽤 피로하다고 느낀다. 본격적인 통영 생활이 시작된 1월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밖에 나가고 가급적 1만 보를 걸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코 안이 헐어 딱지가 앉는 지경이면서도 희한하게 늘 9시 전에 눈이 떠지고 오후가 되면 의무감에라도 문밖을 나서는 날들이 이어졌었다. 의외라고, 스스로를 기특해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 나는 불안했고 어쩔 줄 몰라한 거였다는 생각도 드는데. 암튼, 불과 석 달 전인데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지금의 나는 쉽게 피로하고 잘 늘어진다. 사촌이 왔을 때 진심 반갑고 즐겁고 재밌었는데도 함께한 시간들 이상을 앓았고, 한 달 뒤 지인이 1박 2일 왔다간 뒤에도 아슬아슬했다. 얼마 전엔 통영산지인이 집안일로 내려와 저녁에 만났는데, 수다 떨고 같이 걷고 하는 몇 시간이 좋았지만 다음 날 어김없이 늦잠을 잤다. 기분탓인지 모르지만, 그냥 늘어져서 잔 늦잠이라기보다 기절한 듯 정신 못 차리고 일어나지 못하는 늦잠. 핑곈가? 며칠 후 지인이 온다. 하나는 수요일이나 목요일, 또 하나는 금요일. 그러니까 길게는 4박 5일간의 동거가 시작되는데, 통영이 가까운 길이 아니다 보니 즐거운 여행이 됐으면 싶고 그러다 보면 나는 또 무리해서 앓게 되는 건 아닐까 지레 걱정도 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지는 만큼 내면이 깊어지는 것도 아닌데, 가끔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싶다. 조금씩 관계의 근육을 회복하고 자극에 대한 적절한 반응력도 기르는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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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1. 4. 18. 23:33

 

 

생일이다, 아직 오늘이 조금 남았으니까. 멀리의 늙으신 엄마아빠는 뭔가 안쓰럽고 그러신 모양인데, 성인이 된 후 먼저 생일이 언제라고 말하거나 내 생일 챙기는 제안을 하거나 SNS 같은 데에 생일을 공개한 적 없는 내게 혼자 생일은 특별히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언니네이발관의 "생일기분"을 처음 들은 후로 오래 좋아했고, 나이를 먹으며 이제 그런 기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태어난 날이니 내게는 나름 특별한 날이지만, 덤덤하게 보내도 서운하지 않은 날 정도가 됐달까. 가족이나 애인이나 매우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면 '남의 생일'은 별 감흥이 없는 것이고, 영혼 없는 축하는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살면서 자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로그에 '오늘이 생일'이라고 쓰는 것도 지금이 처음인 것 같은데, 뭐랄까. 누가 몰라줘도 서운한 마음은 없지만, 혼자 살면서 때로 삶의 의미를 모르겠고 왜 사는지 모르겠고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고... 실은 가끔, 사는 걸 온통 모르겠고 살아가는 모든 걸 다시 배워야하는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 요즘의 내게, 약간의 격려와 위로와 혹은 어떤 마음가짐의 환기가 필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렇게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게 오늘이라면 꽤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오늘의 백석 시 필사는 그동안 순서대로 해오던 걸 벗어나서 몇 년 전부터 특별히 좋아하게 된, 통영에 가자 결심한 후 이런 마음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함주시초" 네 번째 시인 "선우사"를 필사했더랬다. 

 

 

 

선우사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혜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시의 마지막 두 연은 지금도 내 휴대폰 잠금화면이기도 하다. 전문을 다시 옮겨 적고 보니, 스스로를 너무 미화하며 감정이입한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ㅋ 암튼, 덕분에 서울에서 이 시를 다시 '발견'하고 공감하고 감동하고 좀은 가슴 떨려하며 휴대폰 잠금화면으로까지 등극시킬 때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지, 난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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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3. 3. 19:07


2월의 마지막 이틀과 3월의 처음 이틀을 극명하게 대조적인 컨디션으로 보냈다. 뭉뚱그려져 흘러간 나흘이 꿈결처럼 느껴질 만큼. 

 


2월 27일로 약속한 뒤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마음으로 기다린 사촌이 오후 2시 넘어 도착했다. 창녕쯤에서 난 교통사고로 길이 막혀 예상보다 늦어졌고, 잠시 숨을 돌리고 함께 집을 나섰다. 흐린 날씨였고 바람도 좀 불었지만 수많은 갈매기들 사이에 오똑하니 홀로 있는 왜가리를 보며 운하해안로를 지나 해저터널을 걸었다. 건너온 맞은 편 미륵섬을 보며 여객선터미널까지 다시 운하해안로를 걷고, 강구안 골목에 자리잡은 백석 시들을 보고, 사촌이 궁금했다는 동피랑이교네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동피랑 마을의 벽화를 새단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메인로드라고 할 수 있는 곳들에는 처음 보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운 바다 생물의 그림과 함께 고래, 해마 등의 이름으로 말장난을 한 시리즈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뭐야 싶다가 이어진 그림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고 오랜만에 동포루에 올라 바라보는 강구안은 여전히 정감 어린 '호주머니 속 바다'였다. 내려오는 길 간판이 눈에 띄어 포지티브통영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부엌 패브릭 파티션에 걸어놓은 소품을 마음에 들어한 사촌을 위해 작년 5월에 구입했던 통제영 옆 가게에 갔는데 타로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쉬워하며 서문고개 쪽으로 서피랑에 가려고 길을 건넜는데 횡단보도 바로 앞 '포에티크'라는 간판을 보자 바로 그 집이라는 게 떠올랐다. 작은 가게일수록 힘들게 버티고 있을 요즘이라 많이 반가웠고, 사촌과 함께여서 낯가림도 잊고 사장님께 가게의 확장 이전을 축하드렸다. 사촌이 고른 몇 개의 소품을 선물하고 흔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오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서피랑은 한적했지만 그래서 여유롭고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박경리 생가를 조용히 보고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를 보고 서포루에 올라 바람을 느끼다 보니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중섭의 작품 조형물이 있는 쪽으로 해서 중앙시장으로 내려왔다. 겨울 여행에서 제일 아쉬운 건 해가 짧다는 것, 27일의 일몰시간은 6시 20분이었다. 통영에 살지만 먹거리와는 별 일가견이 없는 터라 좀 꾸물대다가 지난해 책 모임 때 회를 샀던 곳에서 저녁으로 먹을 회와 멍게, 매운탕 거리 등을 사서 집으로 왔다.

사촌은 회랑 함께 마시자며 화이트와인을 챙겨 왔고, 평소 술을 먹으면 팔다리 등 관절이 아파 거의 안 마시지만 그날은 기분이 좋아 나도 조금 마셨다. 어렸을 때 함께 공연장에 가거나 좋아하는 노래들을 공유하곤 했었고, 사촌이 오기 며칠 전 <아카이브 K>라는 프로그램에서 '학전' 이야기를 한다며 톡을 보냈었다. 이런저런 cd와 lp를 들으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새벽이 됐고, 다음 날을 위해 잠자리에 든 게 3시. 하지만 오랜만에 들어간 술기운은 역시나 강렬했고 난 6시가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다.

 


9시쯤 일어나 대충 준비를 하고 이번엔 사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순신 공원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아쉽게도 날이 흐려서 가슴까지 탁 트이는 전망을 마주할 순 없었고 잠시 데크길을 걷는 것으로 만족. 사촌이 궁금해 한 서피랑떡볶기집에 다행히 자리가 있어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윤이상 기념관에 들렀다. 베를린하우스는 주말에는 열지 않아 기념관 2층과 공원을 둘러 보고, 박경리 기념관으로.

처음 혼자 왔을 때는 평일이어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작년에 지인과 왔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휴관이어서 묘소에만 갔었는데, 일요일이어선지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전시품과 판넬들을 꼼꼼하게 보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이 많기도 하고 하필 같은 공간의 한 무리가 눈치없이 떠드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피해 가며 사촌의 속도에 맞춰 대략 둘러보았다.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를 읽은 사촌이 꼭 보고 싶다는 곳이었는데, 자신들의 목소리가 꽤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듯한 그들 때문에 좀 아쉬웠다. 

박경리 기념관을 나와 향한 곳은 봉평동,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에 들러 구경을 하고 사촌과 나에게 책도 선물하며 기분 좋게 나왔는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섯 시가 안 됐는데 벌써 하늘은 어둑했고, 연휴가 무색하게 봉평동은 그냥 일요일 저녁 같은 분위기였다. 사촌이 단백질보충식단을 알려준다며 사온 식재료와 전날 끓인 매운탕, 엄마가 보내준 반찬들이 냉장고에 가득하기도 해서, 저녁은 집에 가서 먹기로 하고 내성적살롱 호심의 커피와 쿠키로 봉평동 구경을 마쳤다.

봉평동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통영에서 처음 본 체인인 맞은 편의 비촌치킨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사촌이 치킨을 주문했다. 가게 주인이 직접 배달을 오신 건지 강아지가 함께였는데 무척 귀여웠다. 둘 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의 컨디션은 최상이어서 전날과 다름없이 이런저런 노래를 들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아카이브 K> '동아기획' 편을 보기 위해 기어이 SBS 아이디를 찾아내 휴대폰으로 틀어 놓고, 소시적 스크랩북까지 꺼내 보며 그야말로 추억에 젖었다. 다음 날은 비 예보도 있고, 화요일 영업 준비를 위해 점심 즈음에는 대구로 출발해야 하는 사촌의 일정을 감안해 느긋하게 늦잠 자고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잠자리에 든 건 역시나 새벽 3시가 넘어서였는데, 단지 속이 미식거려 눈이 떠졌고 아침 8시였다. 다시 잠들기엔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사촌이 깰까봐 나름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식거림과 어지러움은 더해가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십수 년 전 지리산 둘레길 여행에서 이렇게 죽나 싶었던 토사곽란을 경험한 적 있었는데, 강도는 그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명백히 그러한 증상. 맛있는 밥을 함께 먹고 배웅하고 싶었지만, 사촌의 상비약을 얻어 먹고 손을 따도 앉아 있기가 힘든 상태였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기진해졌다. 미안하게도 사촌은 자기가 만들어 온 빵으로 혼자 아점을 챙겨먹고 대구로 떠났고, 나는 겨우 배웅하고 돌아와 토하기를 반복하다가 쓰러져 잤다.

밤에 잠시 깼지만 미식거림과 어지러움이 가라앉지 않았고 냉장고의 매실청이 떠올라 마시니 그나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를 먹을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 잠은 왔고, 몽롱한 채로 또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나서 목이 마르면 매실청을 탄 따뜻한 물을 마시고 몸살기운이 밀려와 애드빌을 먹고 또 잤다. 계속 굶었는데도 희한하게 배는 안 고프고 그렇게 잤는데도 애드빌의 기운을 빌면 또 잠이 오는 게 고마웠다. 이틀을 비몽사몽 앓고 나니 오늘에서야 좀 괜찮아졌는데, 사촌도 집에 도착하니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어제는 가게 일찍 마무리하고 쉬었다고 한다.

잠 제대로 못자고 낮에는 바쁘게 돌아다니고 새벽까지 떠드는 반복이기는 했지만, 겨우 이틀이었는데... 나이 먹어 그런가 싶어 서글프기도 하고 어쨌거나 낫고 나니 어이없기도 하다. 안 먹던 술과 그로 인한 통증과 불면이 직접적인 원인이기는 하겠고, 이틀간 굶으면서 계속 잤더니 나아진 건 다행이지만. 주로 혼자 있다가 누구 왔다고 마음이 좀 들뜬 건 사실이지만, 몸이 이렇게나 안 받쳐주다니. 앞으로 누구 올 때마다 이런 식이라면 스스로 무척 한심할 것 같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련(?)을 해야겠다. 

아무려나 사촌과 함께한 시간은 참 좋았고, 1년 반 만에 대구를 벗어난 사촌도 재밌었다고 말해줘서 더욱 좋았다. 엄마와는 기질과 성정이 다른 작은 이모의 응원과 은근한 지지도 반가웠고, 무엇보다 멀리 떨어져 혼자 있는 딸이 불가해하고 안타깝기만 한 엄마에게도 잠시나마 기쁜 일이 되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사진 찍는 사촌을 흐믓하게 바라보느라 나는 찍은 사진이 별로 없지만, 멋지고 예쁜 것들을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며... 내가 찍는 사진 따위는 눈으로 보는 걸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으니 별로 아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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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1. 2. 25. 22:52

 
일 그만두고 통영행을 준비하면서 가끔이지만 제일 많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사촌이었다. 집 구할 겸 한 달 살러 내려와 9월 초에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났으나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었을 때, 결정은 오롯이 내 몫이었지만 뭔가 마음의 지지가 되는 대화가 필요했고 그때도 사촌과 통화했었다. 대구에 있으니 엄마나 아빠랑 만날 일 없고, 실수로라도 작은 이모한테 알려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든든한 상대였다.

설 전날 엄마한테 말하면서 사촌은 알고 있다고, 내가 엄빠한테 다 말한 다음에 통영에 오기로 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 이모가 전화했었다며 사촌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뭐라고 했냐니까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근데 통영 가서 좋더라도 너무 좋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란다. 사촌은 이모 너무 귀여워서 알려준다고 했다. 아빠의 의외로 담담한 인정,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의 서운함은 깊었다. 통영에 도착한 나랑 통화를 하면서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니 몇 년 살고 다시 서울로 오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서울에 살 때,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좀 뜸해졌지만 보통 한 달에 한 번 엄빠를 만나 식사하고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챙겨왔었다. 엄마는 평소에 홈쇼핑에서 먹을거리를 사면 내 몫을 따로 챙겨놓았고, 국이며 찰밥, 혼자서는 안 해먹는 고기 반찬 같은 것들을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가기로 한 날에는 나물이나 오징어채무침, 잡채, 전 같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챙겨줬다. 아빠는 식사를 하고 두어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피자를 시키라고 했고, 나눠 먹고 몇 조각 남은 건 싸가서 먹으라고 했다. 설이나 추석에는 전날 가서 자고 당일날 아침을 먹은 뒤 오빠네 가족이 새언니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를 데려다 줬는데, 그럴 때면 쌀이며 김치에 갖은 생필품까지 더해진 엄청난 꾸러미들이 함께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서른 살 즈음까지는 입이 많이 짧은 편이었고, 먹는 걸 좋아하고 음식 만들어 나누는 것도 좋아하는 엄마에게는 혼자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딸을 그렇게 챙겨주는 게 기쁨이었던 것 같다. 먹는 건 대충 한 끼 때우는 걸로 충분한 나는 엄마가 살뜰히 챙겨주는 음식들을 작은 냉장고에 채워두고 버리는 것 없이 알뜰히 잘 먹었다. 아빠는 맛있는 식당을 알게 되면 가족이 만나는 날 식사 장소로 잡아 티내지 않고 나를 챙겼고, 집에 가기로 한 날을 앞두고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이야기하면 엄마는 반가워하며 먹고 싸갈 수 있게 음식을 해줬다. 생각해 보면, 이 나이 먹도록 엄빠한테 의지하고 살아온 셈이다.

이번 설에는 날벼락 같은 일방고지를 하고 음식 챙길 분위기가 아니었고, 안산 지인집에서 며칠 더 있다가 오느라 전처럼 바리바리 싸오지 않았다. 와중에 큰 김치통 두 개와 가져간 가방은 꽉 채웠지만, 통화하면서 엄마는 평소처럼 음식을 충분히 챙겨주지 못한 걸 많이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나이도 있고 하니 이제 배추 한 포기 사서 김치도 담궈 보라고, 하다 보면 재미도 있고 느는 거라고 했다. 김치를 담군 적은 없지만, 예전 공부방에서 일할 때 2년 가까이 스무 명 아이들의 밥과 간식을 직접 챙겼기 때문에 음식하는 걸 어렵게 느끼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엄마의 음식을 의지해 살았고 감사했지만, 통영에서는 내 힘으로 해결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내 마음에 걸렸는지 화요일엔 홈쇼핑을 보다가 고래사어묵세트를 주문해서 보냈고, 오늘은 이런저런 반찬거리를 챙겨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보통 용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아빠는 간략족보 업글버전을 시험 공유하고 "잘 먹도록"이라는 한 마디를 전했다. 아빠의 카톡을 받고, 엄마의 택배를 받으며 부모와 자식은 뭘까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돈다. 자식이 없으니 나는 죽을 때까지 모를 마음이다. 어렸을 때 뭐든지 마음대로 하는 나 때문에 화가 나면 엄마는 나중에 꼭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보라고 했었는데, 만약 나한테 꼭 나 같은 자식이 있다면 나는 약오르고 얄미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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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2. 24. 23:49


지난주에 싸다고 영화 막 보고서 반성해놓고 이번 주에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할 뻔했다.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다섯 편을 홀린 듯 예매했고, 모두 롯데시네마에서 1천 원 관람쿠폰 이벤트를 하는 영화들인데 그중 정말 보고 싶은 건 [라스트 레터] 하나였다. 오늘은 이어 볼 수 있는 시간에 상영하고 로버트 드 니로, 우마 서먼, 크리스토퍼 월켄 등이 나온다기에 [워 위드 그랜파]를 함께 봤는데 시작부터 자막에 제공 ㈜티브이조선미디어렙이 뜨더라ㅠ 막내 손녀 제니역의 배우가 너무나 귀여워서 나올 때마다 행복했고 대배우들의 유머러스한 연기도 좋았지만 그냥 웰메이드 가족 영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영화였는데... 해서 정신줄 잡고 일단 나머지 영화들은 취소했다. 


기절베개를 사용한 지 이틀째다. 첫날은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뒷목이 종일 엄청 뻐근했는데 오늘은 뒷목이 전체적으로 종일 불편했다. 첫날은 첫날이라 정말 기절하나 보자 하며 누웠는데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고, 어제는 잠이 안 와서 한참을 뒤척였다. 기절베개 받았을 때 택배상자 안에 엄지손가락 절반 정도 크기의 돌멩이가 들어있었다. 무지 당황스러웠고 뭐지 싶어 안 버리고 현관 바닥에 놔뒀는데, 기절베개 사용한 이틀이 다 불편하고 보니 그걸 볼 때마다 돌의 저준가 하는 시덥잖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돌을 깨끗이 씻어서 머리맡에 두기라도 해야 하나?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어떤 컨디션일지 궁금하다.


토요일에 사촌이 온다. 대구와 서울에 살았지만 어렸을 적엔 방학이 되면 대구 외할머니 댁에서 만나 며칠씩 놀았고, 어른이 된 이후에는 몇 년에 한 번씩 뜸하게 만나지만 동갑이라 친구 같은 사촌이다. 2013년에는 숙명여대 르 꼬르동 블루에 다니느라 대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집에 와서 함께 지냈는데, 관심사나 취향은 다르지만 나이 먹으면서 몇 안 남은 편하고 말이 잘 통하는 친구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재작년 여름, 대구에서 디저트카페를 하는데 휴가를 맞춰 며칠 문을 닫고 우리집에 와서 맘먹고 함께 놀았다. 르 꼬르동 블루 다닐 때 이후 오랜만에 서울에 놀러온 사촌과, 머지 않아 오래 살았던 서울을 떠날 계획인 나는 8월 초 3박 4일 동안 부지런히 곳곳을 싸돌아다녔다.


하루는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를 보고 익선동과 인사동 북촌 광화문을, 다음 날은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체험전을 보고 망원시장을 구경하고 홍대 앞과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다음 날은 예의상 엄빠네 가서 밥 먹고서 [알랭 뒤카스: 위대한 여정]을 보고 여의도 한강공원 밤도깨비야시장 구경하고 밤에 공연을 봤다. 카페하는 사촌 덕에 익선동 '경성과자점'이며 홍대 앞 '몽카페 그레고리' 같은 데를 가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나치며 나중에 언젠가 했던 '아이다호'와 '공간 비틀즈'는 결국 가보지 못했다. 폭염 속에 돌아다니다가 너무 더우면 다이소에 들어가서 잠시 땀을 식히고 또 돌아다니고 하면서 늦은 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나이에 뭔 극기훈련이냐며 에어컨 틀어놓은 거실에 나란히 편 이부자리에 누워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돌이켜 보니 새삼스럽고 그리운 시간이다.


사촌이 오기로 한 날짜를 정한 뒤부터 열흘 정도까지의 예보가 나오는 아이폰 날씨앱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본다. 금요일부터 화요일까지, 함께하기로 한 날들을 포위하듯 계속 비였던 예보는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며칠 전에는 토요일에 반짝 햇님이 떴었는데 그제부터는 토요일 바람, 일요일 햇님, 월요일 비다. 오랜만의 여행에 날씨가 안 좋으면 괜히 내가 미안할 것 같아 연락했더니 나 보러 오는 거기도 하고 날씨는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날씨가 극적으로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주에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도 모르게 5일 남았네, 4일 남았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4시에 오기로 한 친구를 생각하며 3시부터 행복해질거라던 [어린 왕자]의 여우가 떠오른다. 3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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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2. 22. 23:12


이다, 김창완 아저씨 : )  모두들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난 대체로 내가 좋아했던 걸 좋아하고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것들 안에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중 가장 너른 스펙트럼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김창완.

국민학교 때 아마도 처음으로 혼자 집에 있게 된 오후, 좀 두렵고 음산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 라디오에서 나온 "지나버린 날들"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고 안도했던 기억이 각인되어 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시간이 흐르며 어떤 의지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지만, 미니 2층 거실의 육중한 나무창문과 흐린 날이어서 어두웠던 실내 공간의 적막한 분위기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즈음 뮤지션의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구성해 들려주던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서, 또래보다 어린 나이에 국민학교에 입학해 수업의 시작과 종료 종소리를 구분하지 못해 종이 치면 운동장에 나가 모래놀이를 하고 선생님이 안아서 교실로 데려갔다던 이야기 속의 아이를 혼자 오래 귀여워했다. 중학교 때는 산울림 그레이티스트히트 2집과 3집을 열심히 들었는데, "독백" "청춘" "회상"의 세계에 푹 빠지고 가끔은 무서워 죽을 것 같으면서도 새벽에 "떠나는 우리 님" 같은 노래를 굳이 들었던 기억도 있다. 늦은 시간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다 그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환해진 마음으로 매일 들었던 cbs <꿈과 음악 사이에>, 나중에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과 영화로 만들어진 그 시절 밤의 라디오는 내게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그 시절이 지난 뒤 몰입의 온도는 달라졌지만 고등학교 때 대학로 충돌2에서 열린 아주 작은 그의 솔로 공연이나 김광석 박기영 안치환과 함께한 꽤 큰 무대에서의 '본능적 처방' 콘서트는 오랫동안 충만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따금 그가 내는 책과 새로 발표하는 노래들은, 그의 노래 "무지개"처럼 내 삶에 함께였다. 통영으로 이사한 후 아침마다 라디오로 듣는 그의 목소리 덕분에 지금의 나는 자주 행복하고, 지난해 발표한 <시간의 문> 음반의 노래들을 들으며 그에게 고맙다.

오늘은 그런 그의 생일이어서 기분이 좋았고,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에서 알게 된 #saveourstages 공연 전일권을 나에게 선물로 사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축하의 마음을 직접 전할 수 없어도 흔쾌하고, 그가 존재하는 기쁨으로 내게 선물해도 즐거운, 이런 거리와 여유는 나이를 먹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일이다. 김창완 아저씨,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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