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거실에 있는데 뭔가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옅은 공포와 진한 짜증 속에 소리가 들려온 부엌과 작은 방 쪽을 유심히 살폈으나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밖에서 난 소리인가 싶어 현관 밖도 살피고, 혹시나 싶어 옥외계단 바깥까지 살펴봤으나 이상무. 창호 없이 난간만 있는 바닷가의 복도식 아파트여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종종 밖에서 뭔가 스러지는 소리도 들리곤 하는데, 어제는 바람도 별로 없었다. 이리저리 살펴도 별 일 아닌 것 같아 잠깐의 미어캣 모드는 해제. 자정 넘어 자려고 씻고 방의 불을 켰는데 창문 쪽 천장의 몰딩이 침대로 추락해 있었다. 이사했을 때부터 여러 번 덧방한 도배지가 여기저기 떠 있고 그사이 자력 팽창해 찢어진 곳도 있었고 덩달아 오래된 몰딩도 살짝 들뜨거나 틈이 벌어지거나 한 상태이기는 했다. 그러려니 하고 몇 년 살다 보니 별 생각 없었고, 이사 결정하고 집 보러 온 분이 중개사에게 몰딩 이야기를 하길래 그제서야 눈길이 갔었다. 위태로울 정도라곤 생각 안 했는데, 저렇게 본격적으로 떨어진 걸 보니 문득 무척 심란해졌다. 침대에 있을 때 떨어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주인한테 연락하는 것도 별로고 자는 동안 나머지 몰딩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건 아닐까 나무 틈새에서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건 아닐까 불길한 생각도 들고. 통영 적응에 실패하고 떠나려는 마당에, 여기는 아니었다는 집의 격려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주접이겠지. 그러나 쓸데 없는 의미 부여가 잦은 인간에게, 살면서 처음 경험한 몰딩의 추락은 꽤 상징적이다.
올해 11월 1일은 엄마의 팔순 생신날, 오랫동안 김현식 아저씨 기일로 기억하는 날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부모님 생신을 양력으로 보내기로 하면서 덮어쓰기가 됐다. 칠순이니 팔순에 잔치라는 말이 붙는 건 과거의 일이 되었고, 소소하게 식사 모임으로 대체하게 된 건 우리집도 마찬가지. 추석 때 아빠가 나름의 엄마 팔순 기획을 내놓으면서 당사자 의사와 무관하게 친가 쪽과 한 번, 외가 쪽과 한 번, 두 번의 팔순 식사 모임을 하게 됐지만 말이다.
통영에서 서울까지는 먼 길이라 나는 빠졌던 아빠 주도 모임은 지난 주말, 친가 쪽 사촌 언니 내외들이 대구와 수원에서 올라와 전망 좋은 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상반기 나의 여행에 자극을 받아 일찌감치 교토 여행을 예약했던 빵 만드는 사촌은 이모 팔순이라고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작업한 2단 케이크를 올려 보냈다. 아빠의 일방적인 계획에 바쁜 사람들 불러 모은다며 저어했었던 엄마에게도 괜찮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짜 팔순날인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곳을 예약해 대구와 문경에서 오신 이모와 삼촌, 숙모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어제 저녁 서울에 도착해 동네에서 포장 주문한 전복미역국으로 오늘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이번에도 사촌은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한 고3 조카가 좋아하는 초코케이크를 만들어 보냈다. 이모가 내일부터 친구들이랑 서해안 여행을 가실 거여서 엄빠네서 주무시는 덕에, 점심 식사 후 나는 바로 통영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는 우리 집만 서울이고 친가와 외가 친척들은 대부분 경상도에 살았다. 방학이면 대구며 울산에 가서 외할머니네, 큰집, 이모네, 삼촌네를 전전하며 놀다 오는 게 큰 낙이었다. 개방적이고 멋진 외할머니네서 또래 외사촌들과 어울려 엄빠 없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신이 났었고, 큰집에 가면 나이 차이 많은 사촌 언니들과 오빠 내외가 조카처럼 챙겨주고 놀아줘서 즐거웠다. 간혹 친척이 우리집에 오면 신발 먼저 숨겨두고 몇 밤 자고 갈 건지 확인할 만큼, 어렸을 적 친척들은 늘 반갑고 정겨운 존재였다.
어른이 된 후 통 안 가다 보니 친가 쪽 친척들은 거의 못 보고 엄빠 통해서 소식만 들은 지 꽤 됐다. 큰집 사촌 오빠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암으로 돌아가셨고 언니들도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다. 어렸을 적엔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당황스럽게 눈물이 나서 참느라 애를 써야 했는데, 반은 인사치레겠지만 지난 모임에 없는 나를 사촌 언니들이 보고 싶어하더란 말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고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에서 우연히 지나쳐도 서로 못 알아볼 만큼 소원해졌는데, 흐른 세월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재작년까지 몇 년간 아빠는 고향에 가족 납골묘 만드는 일에 열심이셨다. 가 본 지 너무 오래라 기억도 가물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정비해 가족 납골묘에 모시고 아빠랑 엄마 자리를 만들고, 나보고도 나중에 오고 싶으면 오라고 선심을 쓰셨더랬다. 일 년에 몇 번씩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시젠가 하는 행사까지 챙기며 고향에 가시는 아빠도, 늘 동행하며 ‘집안’의 일로 여기는 엄마도 나는 신기하다. 그분들 덕에 아빠도 엄마도 나도 있는 거고 어렸을 적의 소중한 추억도 남았지만, 조상과 가족을 동일시하는 건 여전히 낯설다. 은연 중 내 세대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을 일이고 사라질 마음이라고 생각해 더 그런 것도 같다.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까지 한강변을 걸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에서 멀지 않아 가끔 지나던 길이었는데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곳도 있어 예전 생각이 났다. 서울과 통영을 오가는 마지막 길이라, 야반도주하듯 통영으로 이사하던 날도 떠올랐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며 사는 것도 무겁고 버거운데, 부모 모시고 자식 낳아 키우고 조상 챙기며 살아온 엄빠 세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은 변하고 알게 모르게 적응하며 많은 게 달라지지만 가족으로부터 연원하는 온기는 분명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늙어간다.
여행 가기 전 맡아주었던 우리집 생명들을 데리고, M이 왔다. 아이비는 못 본 사이 두 배는 길어진 듯하고 테이블야자도 무럭무럭 자랐다. 몇 년 전 처음 샀을 때 작은 기둥처럼 탄탄해보였던 스투키들은 죽었지만 그 옆에서 작고 두꺼운 난처럼 자라난 아기 스투키들은 나름의 성장을 하고 있다. 덩굴을 감아나갈 무언가가 없는 관계로 너무 자란 아이비의 적당한 자리 찾기가 어려웠지만 휑하던 집에 녹색들이 돌아와 감도는 생기가 반갑다.
8월 초 에어컨에 또 문제가 생겨서 출장 서비스 신청을 했는데 가장 빠른 방문예정일은 14일이었다. 너무 더운 날이라 약속을 미루거나 숙소를 잡거나 하려고 했는데 M이 괜찮다고 해서 최대한 밖에서 놀다가 밤 늦게 들어오기로 했다. 도천동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 겸 여객선터미널 쪽으로 걷는데 한산대첩축제가 한창이었다. 오가며 현수막은 봤지만 일정은 몰랐는데 병선마당 광장에서 시끌벅적한 행사 중이었다.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했는지 팬클럽 단체티를 입거나 가수 이름이 쓰인 부채를 든 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강구안까지 차량도 통제하고 있었고, 문화마당 양편으로 둘러쳐진 수많은 천막에서는 다양한 무언가가 진행 중이었다.
통영 살면서 인구밀도를 체감한 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뿐이었는데,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의 물결이 강구안 브릿지까지 이어졌다. 한산대첩축제 본 행사를 구경한 적 없어 올해 규모나 참여도가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없지만 병선마당 광장부터 남망산 입구쪽 강구안까지 걷는 동안 변함없는 인파가 놀라웠고 강구안 브릿지를 줄 서서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신기했다. 축제의 기원이 전쟁이라선지 대부분의 체험 행사가 군사적 색채를 띤 건 아쉬웠지만, 이 정도라면 지역에서 축제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구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너무 더워서 카페로 피신했다가 끝물의 불꽃놀이를 보고 귀가했다. M이 오지 않았다면 갈 일 없었을 축제 현장, 내게는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은 한산대첩축제였다.
다음날 물 좋아하는 M을 위해 수륙해수욕장에 갔다. 2년 전 운전 연습 겸 함께 거제 덕원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수륙해수욕장은 집에서 차로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여행으로 통영에 왔을 때는 걸어서도 가봤던 곳인데 살면서는 처음, M은 튜브를 빌려 물에 들어갔고 나는 잠깐 발만 담그고 텐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볍고 작아서 장만한 나의 귀여운 텐트는 맞바람이 통하지 않아 무척 더웠다. 물놀이를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하다가 M의 열쇠 꾸러미가 없어진 걸 깨달았다. 물에 들어가기 전 휴대폰과 지갑을 따로 뺐고 샤워 후 확인했는데 열쇠는 기억도 실물도 없다고. 다시 해수욕장으로 가서 안전요원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M의 전화번호도 알려드렸다.
이후 어떻게 할지는 저녁 먹으며 생각하기로 하고 ‘브라운핸즈’에 갔다. 통영국제음악당 건물이라 공연 포스터들이 많이 붙어 있었는데, 임윤찬 사인 포스터도 있었고 재작년 가을 어렵사리 예매에 성공해서 M과 함께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났다. 통영 살면서 M과 함께 한 게 참 많고 오늘의 마지막 함께는 출장 제작 차키를 기다리는 일. 일요일 저녁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신기한 장비들이 실린 차를 끌고 기술자님이 오셨고 두 번의 시행착오 끝에 새 차키를 만들어주셨다. 열쇠 분실 소동 덕에 나는 저녁 6시였던 책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다른 이들도 사정이 있어 날짜를 연기했고, M은 예정보다 늦어졌지만 무사히 부산으로 출발했다. 간만에 밀도 높은 1박 2일을 보냈고 피곤이 몰려온다.
mbc fm4u에서 방송 중인 고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방송을 듣고 있다, 부제가 "여름날의 재회". 얼마 전 기사를 보고 알게 되어 듣고 싶어서 챙겼는데, mbc의 영화음악 방송 dj가 한예리인지 1부 시작부터 그의 내레이션이 흐르고 때로 정은임의 목소리와 오버랩되어 기대했던 마음이 초장부터 한풀 꺾였다. 아직은 성공한 미래를 알 수 없었던 여러 영화인들의 웃음 섞인 회고담들이 그냥 그랬는데, 세월이 흐른다는 게 그런 것일 테고 고인이 된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이 늘 무거울 필요는 없겠지만 덕분에 또 한풀. 와중에 이름만 익숙했던 '홍동식' pd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고, 정성일과 손석희의 기억담을 처음 들었다. 지금은 AI 기술로 구현한 정은임의 목소리로 2부 방송이 흐르고 있다. 현재 시점으로 인사를 전하는 오프닝의 목소리는 정밀한 기술로 흐른 세월 만큼의 나이도 입힌 듯했는데, 얼마 전 [원더랜드]를 보면서도 느꼈던 양가감정이 온몸을 통과하고 있다. 과학 문외한 주제에 할 말인지 모르겠지만, 생인들의 기술과 욕구로 고인을 소환해 무언가를 도모하는 일 자체가 나는 뭔가 선을 넘는 일 같기만 하다. 한참 전 고인이 된 뮤지션의 홀로그램 공연이니 뭐니 하는 소식을 듣고도 소름이 끼쳤었는데, 살아있는 자들의 욕심일 뿐 아니라 무례이고 오만이라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다. 특집방송 덕분에 [아이다호]니 리버 피닉스를 언급하는 정성일과 정은임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게 되어 마음이 반짝였고, 당연히 엄청난 고심과 성의를 모아 구성했을 지금의 2부 방송이 거론하는 영화와 들려주는 노래들에 마음이 일렁이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굳이 가상으로 되살려 타인의 기억과 욕망으로 채우는 현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기억도 추모도 재회도 고맙고 반가운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식이어서, 마냥 빠져들지도 못하고 차마 끄지도 못하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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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3부를 찾아 들었고, 마지막 정은임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팟빵에 가입한 계기도 처음 구독한 것도 정영음이었고 가끔 다시 찾아듣고는 했는데, 아버지와 민연홍님 덕분인 줄 몰랐다. 고맙습니다.
어학사전을 찾아보니 '다짐'에는 이런 뜻이 있다. 1.어떤 일을 반드시 행하겠다는 굳건한 마음가짐 2.이미 한 일이나 앞으로 할 일에 틀림이 없음을 단단히 강조하거나 확인함 대충 알고 있었지만 찾아본 이유는 한 달하고도 열흘 넘게, 생각만 하며 시간만 흘려보낸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일을 그만둔 후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던 사회적 네트워크도 다 끊겨버리고 없는 사람처럼 혼자 사는 동안 나만의 다짐을 무시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을 넘다보니 세상 제일 편하지만 세상 제일 한심한, 그러나 나 말고는 모르는 게으른 현존에 익숙해지다 못해 잠식되었다.
빠져나오는 것도 내 몫이지만 쉽지 않아, 그런 날들의 고리를 끊어보고자 봄에 큰맘 먹고 여행을 다녀왔다. 팬데믹 국면이 진정되면서 막연히 꿈꾸고 있었지만 무기력에 젖어 용기를 내지 못했던 유럽행. 함께 여행할 정도는 되는 지인의 장기 여행 소식에 동하는 마음을 실행으로 옮겼고, 4월 18일부터 6월 13일까지 한국을 떠나 있었다. 급하게 결정한 데다 이미 여행 중인 동행의 사정에 맞춰 띄엄띄엄 일정을 맞춰야 하는 터라 3월부터 4월 초까지는 이것저것 알아보고 결정하고 예약하느라 많이 바빴다.
2000년 가을 5주간 유럽 배낭여행을 했었는데 거의 사반세기 전이니 그때의 기억은 추억일 뿐. 준비하던 초반에는 너무 비싼 물가에 가는 게 맞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온전히 혼자 떠날 자신도 없고 물가가 이러하다면 지금 가는 게 제일 싼 거라는 생각으로 놀란 마음을 달랬다. 가고 싶은 많은 곳들 중 여러 여건을 고려해 갈 수 있는 곳을 추리고 각종 블로그와 체크인유럽 카페와 유레일패스 공홈과 부킹닷컴을 들락거리며 3월이 다 갔다. 4월 초순까지 8주간 여행의 루트와 숙소 등을 열심히 채우며 나중엔 진이 빠졌지만 간만의 몰입은 나쁘지 않았고, 출발 일주일 전부터는 카프카의 장편소설들을 읽으며 나만의 워밍업을 할 수 있었다.
4월 18일 입국한 마드리드부터 4월 27일 바르셀로나에서 마르세유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스페인 여행은 너무 오랜만의 해외 체류와 동행/들과 함께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여행하느라, 뭔가를 매일 기록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혼자 여행을 시작한 마르세유에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포스트 만들어 놓고 대충 메모하고 넘어가는 게 버릇이 되어 마무리가 어려웠다. 기록과 기억을 위해 찍은 사진들이 나날이 쌓이고 정리되지 않는 텍스트들과 더불어 갈수록 부담스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스트레스 받기보다 귀가 후 정리하며 일상도 함께 정돈되기를 바라며 여행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은 바짝 부지런을 떨며 짐을 정리하고 내친 김에 내년 초의 이사를 생각하며 책장까지 손을 댔는데, 차분히 앉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미루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다. 좁아 터진 노트북으로는 사진들을 감당할 수 없어 몇 년 전부터 생각만 했던 아이패드까지 장만했음에도,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의 부담은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는 걸로 이어졌다. 와중에 이따금 사진첩을 넘겨보며 내가 여기 있었다니 싶어 가슴이 뛰는 순간이 있어 새삼스럽기도 했는데, 덕분에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추석 전까지 꼭 여행 기록을 정리하자고 시작일로 정한 디데이가 오늘이다. 새벽 6시 넘어 잠들었다가 정오쯤 일어났고 또 망했나 싶었지만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 정말 오랜만에 노트북을 펼쳤다.
어제 저녁 세상을 떠나셨다는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접했다. 중학교 때 우연히 해금 후 그가 출연한 방송을 보고 그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은 책을 읽으며 감동하고 노래들을 들으며 깊이 빠졌었다. 고등학교 때는 막 개관한 학전 소극장을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공연에 벅찬 날들이 많았고, 지금은 탁 트인 차로가 된 좁은 골목에서 그를 마주쳐 혼자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를 선생님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시간들이 있었고 아주 옅은 인연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추억이다. 그 시간들을 끝으로 나는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이번 여행 중에는 sbs의 김민기 다큐 보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오래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친구가 톡을 보냈고, 덕분에 여행 다녀와서 오랜만에 통화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부고에 기대어 알량한 추억을 떠올리는 게 민망하지만,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마음들이 존재할 테니 나는 이렇게 소소하게 기억하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그의 작품에서 받았던 진한 감응을 많이 잊고 살았지만, 수렁에라도 빠진 듯 침잠한 일상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던 중 만난 부고가 내게는 여전히 유효한 자장 같기도 하다.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의 슬픔은 너무나 클 것인데, 나는 너무 담담해 죄송한 마음도 든다. 생의 종착점인 죽음은 늘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할 일을 마쳤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전하고 가셨다는 기사와 환한 웃음의 영정사진을 보니 감사한 마음으로, 평안하시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진심의 인사, 선생님 고맙습니다.
6월 말부터 에어컨을 살짝씩 켜기 시작했는데 어제 저녁 갑자기 바람이 매우 약소하게 느껴졌다. 평소 온도를 많이 낮추거나 바람을 세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약한 바람과 내려가지 않는 계기판 숫자를 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에어컨 주변 바닥에는 새어나온 물이 흥건했다. 이사 와서 에어컨 설치할 때 집의 구조상 물이 역류할 수 있다는 기사님의 예언이 적중해 몇 달 후 배수펌프를 설치했었다. 이후 물이 새는 일은 없었는데 뭔가 불길했다. 3년 만에 다시 기사님께 연락, 오늘 방문해주셨고 첫 번째 작업은 벌집 발견이었다.
확장된 베란다의 안전가드에 바로 실외기가 달려 있어 방충망 열 일이 없다 보니 몰랐는데, 바로 앞에 주먹보다 작은 벌집이 있었다. 벌집을 발견하면 119에 신고해야 한다는 걸 주워들은 것 같아 연락했더니 금세 소방관들이 오셨다. 너무 작아서 민망했지만 벌집은 벌집, 세 분이나 오셔서 뭘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는데 약 뿌리고 벌집을 자르는 걸로 제거 과정은 정말 금방 끝났다. 기사님이 작업하시는 중에, 잠깐 외출한 사이에 집이 없어져 당황했는지 벌 한 마리가 베란다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너무 인간중심적이라 미안한데, 함께 살 수는 없다.
예전 어느 새벽 아랫집의 소동에 경찰관들이 방문한 적 있었다. 뭔가 관운이 있는 집인가 싶은데, 에어컨운은 없는 집으로 확인됐다. 가스 보충으로 바람은 한결 시원해졌지만 배수펌프는 정상 작동이 안 됐다. 직접 설치한 펌프 고장은 처음이라며 갸우뚱하는 기사님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음날 배수펌프를 교체할지 직접 물을 버려가며 여름을 날지를 내가 선택해야 했다. 내년 1월 계약 만료 때 이사할 계획이고 배수펌프 교체 비용도 아깝고 다시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수동 배수를 선택했다. 소문자119 같은 상황인데, 벌집이든 에어컨이든 추가적인 문제가 생기지만 않으면 좋겠다.
여행 출발일이 다가오며 동거 중인 식물들의 거취 문제 해결이 시급해졌다. 통영 이주 후 첫봄에 전에 없이 식물에 마음이 가서 대략 열 가지쯤을 집으로 들였었다. 이런저런 허브류와 반음지식물류 그리고 베란다텃밭용 씨앗류 등이었는데, 생명을 보살피는 게 부담스러운 동거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대개가 요절하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사다가 죽이는 일이 반복되며 역시 난 식물이랑 아닌가 보다 싶어 더욱 데면데면해졌는데, 그래도 살아남은 아이들은 우리집에서 세 번째 봄을 맞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기적으로 물만 주면 알아서 살아가며 자라기까지 하는 식물들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스투키와 테이블야자는 작은 화분이 비좁아 보여 대충 분갈이를 했는데도 끄떡 없었고, 아이비는 넝쿨 없는 실내에서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수십 배 자랐다. 우리집 유일의 성장캐들이라 대견하기도 하고 반려라는 게 이런 건가 싶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대체로 손이 안 가는 아이들이지만 8주나 수분 공급이 중단되면 살아남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온라인으로 자동급수기를 알아봤지만 애매했고, 당근마켓 나눔은 그동안 든 정이 있어 내키지 않았고, 폐쇄적인 일상 덕에 편하게 맡길 만한 이웃도 없어 고민이 깊었다.
얼마 전 여행 준비 잘하고 있냐며 연락 온 G와 통화하다 사정을 말했더니 식물 쉰들러를 자청해주었고, 어제 만나 전달했다. 새 일터에 적응하느라 주말이면 뻗기 바쁜 중에 거제까지 와줘서 감동이었고, 예전 유럽에 6개월간 머물렀던 G의 이야기와 나의 계획을 나누며 즐거웠다. 그러다 일정은 누가 알고 있냐고 물었는데 잠시 멍-. 열심히 표까지 만들어 정리했지만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은 안 했는데, 듣고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오글거려서 말은 안 했지만 G가 맡아준 게 식물만은 아닌 듯, 일정표는 최종 버전을 출발하며 전달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지인과 연말연시를 함께 보냈다. 덕분에 한 번은 가봐야지 했던 카페 배양장 방문, 딱히 비슷하진 않지만 예전에 갔었던 속초 칠성조선소가 떠올랐고 나도 이제 보조석 인질이 있다면 풍화일주로쯤은 갈 수 있는 운전자임을 확인했다. 오래 전 스페인에서 배운 거라며 부엌을 차지한 지인 덕에 2023년 마지막 식사는 빠에야, 그리고 한참 이어지던 수다 중 새해를 맞은 순간 올해의 첫 “새해 복” 인사를 나눴다.
아점으로 떡국을 끓여 먹고 두 번째 북포루 도전, 차로 가니 조금 다른 경로가 되겠지만 나름 산행이었던 첫 번째 북포루행이 떠올라 정상에서 먹을 생각으로 샤인머스켓을 챙겨갔다. 통영산 지인의 지도편달로 알게 된 길은 다행히 산책 수준이었고 미세먼지인지 구름인지로 시야가 흐렸지만 탁 트인 풍광에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말고도 누군가 있을 것 같아 샤인머스켓을 넉넉히 담았는데 마침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있어 나누고 먼저 내려가는 그들과 두 번째 “새해 복” 인사를 나눴다.
해 지기 전 떠날 지인과 이른 저녁을 먹으려 집 근처 텐동집에 갔지만 브레이크 타임. 지인은 새로 생긴 보도교와 정비 작업이 마무리된 강구안을 보지 못한 터라, 이전에 맛있게 먹었던 강구안 인근 통통칼국수에 갔다가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역시 브레이크 타임인 듯했으나 사장님이 재료 준비를 많이 해놨다며 흔쾌히 입장을 허락해주셔서 식사를 하고 나오며 기분 좋게 세 번째 “새해 복” 인사를 나눴다.
지인과 헤어지고 귀가했다가 잠시 나갈 일이 생겨 샤인머스켓 한 송이를 챙겨 경비노동자 아저씨께 드렸다. 단지 입구에 경비실 하나가 있는 아파트여서 동마다 경비실이 있던 서울에서보다는 소원하지만 내게는 나름 가깝고 고마운 이웃이어서 이래저래 작은 먹거리와 인사를 건네는 일이 잦은 편인데, 날이 갈수록 웃음이 환해지는 느낌이라 부담이 없어진 덕에 네 번째 “새해 복” 인사. 그러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 마침 외출하려 현관을 나서는 옆 집 분들을 마주쳐 오늘의 마지막 “새해 복” 인사를 나눴다.
문어체인 듯 확신의 구어체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하루에 다섯 번이나 직접 나눈 1월 1일이 언제였나 싶다. 지인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세 번의 인사는 없었을 것이고, 어떠면 뒤의 두 번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연말연시에 국한된 형식적 인사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직접 마주하며 인사 나눌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각별하고 흐뭇한 느낌이다. 우연히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달 전쯤 엄마 부탁으로 네이버스토어에서 판매 중인 약을 구매하면서 네이버멤버십플러스에 가입했다. 네이버에서 뭘 살 때마다 뜨는 각종 혜택에 혹해서 지난 여름 가입했다가 해지한 이후 두 번째. 여름 한 달간 오랫동안 제목만 익숙했던 [나의 아저씨]를 보았다. 특별히 엄청 좋아한 적은 없지만 그가 출연했던 인기 많은 드라마들을 젊은 날의 나도 봤었다. 봄에는 유튜브에 올라오는 [아주 사적인 동남아]를 보면서 같은 시절을 지나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대략 동년배 배우의 매력과 친밀감이 새삼 느껴져 그의 이름을 검색해 이런저런 지난 영상들을 찾아 봤었다.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연예인의 이미지를 그 사람 자체라고 믿을 수만은 없겠지만 옛 영상들 속의 그는 솔직한 성격에 시원한 웃음이 청량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다시 한 달간 티빙을 보는 동안에는 그의 이름이 포털에 자주 눈에 띄었다. 존재를 몰랐던 통영에서 촬영한 드라마 [검사내전]을 보았고 [시베리아 선발대]를 보았다. 멤버십 유효기간 마지막 날이었던 그저께 저녁에는 [나의 아저씨] 코멘터리라는 한 시간가량의 영상을 보았다. 불운과 불행이 공격하듯 몰아치는 삶의 한가운데 있는 지안에게, 박동훈 부장은 건물의 내력과 외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람도 그렇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외력보다 내력이 탄탄하면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지옥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가 자신이 연기했던 박동훈 부장의 대사들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주변의 누군가가 박동훈 부장이 지안에게 했던 말들을 그에게 돌려주면 좋겠다고, 그 장면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그의 소식을 들었다. 박동훈 부장의 말이 틀렸다. 한 사람의 내력에는 한계가 있다. 온 세상의 눈들과 근거 없는 비난과 무수한 억측을 홀로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