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 45분에 시작하는 [소울]을 예매한 터여서 2시간쯤 전에 집을 나섰다. 조선단지 안쪽길을 따라 걸었는데 벌써 꽃이 핀 동백나무가 있었다. 내가 본 최고의 동백은 2007년 여수 금오도의 군락지에 핀 동백이었는데, 그때 너무 엄청난 아이들을 보아선지 이후에 어떤 동백을 보아도 그때와 비교하게 된다. 오늘 본 동백도 역시... 가로수 동백과 섬 군락지의 동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겠지만, 음... 미안해. 그래도 좋아하는 동백을 이제부터 3월 정도까지는 자주 볼 수 있겠다 생각하니, 통영에서 살아가며 느낄 즐거움 하나를 발견한 것 같아 기뻤다.
비 예보에 미리 걱정했는데 걷는 동안은 흐리기만 했다. 날씨도 따뜻해, 오늘은 아래위 모두 내복은 입지 않았는데 2시간쯤 걷는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아 쾌적했다. 해저터널을 지나 윤이상기념공원을 가로질러 얼마 전 발견한 새 벽화들을 구경했다. 근데 음... 내가 찾은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전체적인 벽화길 안내 같은 게 없다 보니, 그냥 되는 대로 보고 지나치게 되는 것 같았다. 윤이상기념관에 들어가면 안내브로셔가 있으려나? 다음에 알아봐야겠다.
2만 보 가까이 걸었던 어제의 후유증인지, 오늘은 몸이 가뿐하지는 않았다. 아, 흐리고 비 오는 날이었으니 (까먹고 있었지만) 2년 반 전 교통사고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교통사고 이후의 상태를 기본값으로 꾸준히 늙고 있으니, 사실 잘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그리하여 오늘은 최단거리 기준으로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영화관에 도착하니 시작 30분 전이어서 내일은 3시에 집을 나서기로 했다.
[소울]은 아마도, [너의 이름은] 이후 처음 보는 애니메이션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 [미녀와 야수]는 봤지만 그 외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떠올릴 수 있는 극장판 관람의 기억이라고는 [셀마의 단백질 커피], [돼지의 왕], [언어의 정원] 정도. 더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소울]을 선택한 이유는 3천 원 관람 할인쿠폰;; 그러나 역시 디즈니 픽사 애니의 저력인지, 나 포함 무려 6명이 함께였고 그중 2명과는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함께였다. 통영에서 본 영화 8편 중 5편이 혼자였고, 나머지도 한두 명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흥행.
영화는 그냥 볼 만했고, 개인적으로 22번의 불꽃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으로 "하늘 보기와 걷기"가 언급되는 게 살짝 반가웠다. 통영에 살면서 생존을 위한 기본행동을 제외하면 제일 많이 하는 게 그 두 가지, 처음엔 조가 무시해서 괜히 흠칫했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비가 살짝 흩뿌리는 정도여서 버스 타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우산을 펴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도 이 정도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얼마 전 나름은 큰 마음을 먹고 신청한 '완벽한 날들' 정기구독의 첫 책이 도착했다. 다정한 우편물을 가끔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자기연민에 빠진 심정으로 신청했음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고. 물론 택배와는 다르지만, 음... 그냥 아 왔구나 하는 기분 외의 다른 감상은 안 들었다. 오늘의 교훈, 다정함과 위로를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