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에 해당되는 글 99건

  1. 2021.01.21 하늘 보기와 걷기
  2. 2021.01.20 무지개, 비슷한 것
  3. 2021.01.19 햇살
  4. 2021.01.18 바람과 새
  5. 2021.01.17 하루가 또 하루를 걷게 한다
  6. 2021.01.16 미륵도에서는 해가 져도 괜찮다
  7. 2021.01.15 변신은 어렵다
  8. 2021.01.14 변신을 앞두고
  9. 2021.01.13 즐겁게 걷기
  10. 2021.01.12 기복
산책일기2021. 1. 21. 23:44

 

4시 45분에 시작하는 [소울]을 예매한 터여서 2시간쯤 전에 집을 나섰다. 조선단지 안쪽길을 따라 걸었는데 벌써 꽃이 핀 동백나무가 있었다. 내가 본 최고의 동백은 2007년 여수 금오도의 군락지에 핀 동백이었는데, 그때 너무 엄청난 아이들을 보아선지 이후에 어떤 동백을 보아도 그때와 비교하게 된다. 오늘 본 동백도 역시... 가로수 동백과 섬 군락지의 동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겠지만, 음... 미안해. 그래도 좋아하는 동백을 이제부터 3월 정도까지는 자주 볼 수 있겠다 생각하니, 통영에서 살아가며 느낄 즐거움 하나를 발견한 것 같아 기뻤다. 

 

비 예보에 미리 걱정했는데 걷는 동안은 흐리기만 했다. 날씨도 따뜻해, 오늘은 아래위 모두 내복은 입지 않았는데 2시간쯤 걷는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아 쾌적했다. 해저터널을 지나 윤이상기념공원을 가로질러 얼마 전 발견한 새 벽화들을 구경했다. 근데 음... 내가 찾은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전체적인 벽화길 안내 같은 게 없다 보니, 그냥 되는 대로 보고 지나치게 되는 것 같았다. 윤이상기념관에 들어가면 안내브로셔가 있으려나? 다음에 알아봐야겠다.

 

2만 보 가까이 걸었던 어제의 후유증인지, 오늘은 몸이 가뿐하지는 않았다. 아, 흐리고 비 오는 날이었으니 (까먹고 있었지만) 2년 반 전 교통사고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교통사고 이후의 상태를 기본값으로 꾸준히 늙고 있으니, 사실 잘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그리하여 오늘은 최단거리 기준으로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영화관에 도착하니 시작 30분 전이어서 내일은 3시에 집을 나서기로 했다. 

 

[소울]은 아마도, [너의 이름은] 이후 처음 보는 애니메이션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 [미녀와 야수]는 봤지만 그 외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떠올릴 수 있는 극장판 관람의 기억이라고는 [셀마의 단백질 커피], [돼지의 왕], [언어의 정원] 정도. 더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소울]을 선택한 이유는 3천 원 관람 할인쿠폰;; 그러나 역시 디즈니 픽사 애니의 저력인지, 나 포함 무려 6명이 함께였고 그중 2명과는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함께였다. 통영에서 본 영화 8편 중 5편이 혼자였고, 나머지도 한두 명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흥행. 

 

영화는 그냥 볼 만했고, 개인적으로 22번의 불꽃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으로 "하늘 보기와 걷기"가 언급되는 게 살짝 반가웠다. 통영에 살면서 생존을 위한 기본행동을 제외하면 제일 많이 하는 게 그 두 가지, 처음엔 조가 무시해서 괜히 흠칫했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비가 살짝 흩뿌리는 정도여서 버스 타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우산을 펴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도 이 정도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얼마 전 나름은 큰 마음을 먹고 신청한 '완벽한 날들' 정기구독의 첫 책이 도착했다. 다정한 우편물을 가끔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자기연민에 빠진 심정으로 신청했음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고. 물론 택배와는 다르지만, 음... 그냥 아 왔구나 하는 기분 외의 다른 감상은 안 들었다. 오늘의 교훈, 다정함과 위로를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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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20. 23:49

 

햇살이 참 중요하니까 날씨앱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본다. 당일부터 열흘까지 대략의 예보가 나오니 계속 조금씩 변하지만, 내일부터 다음 주 초까지 며칠씩 비가 내리는 건 맞는 것 같다. 비가 오면 하늘이 흐리겠지, 별론데... 그러면 산책은 어떡하나? 내일이랑 모레는 영화를 보러 갈 거니까 비가 와도 걷겠지만 토요일이 문제다. 또 달라질지 모르지만 비가 온다고 되어 있던 다음 주 수목요일이 맑음으로 바뀐 게 변함없기나 바라야 할까?

 

통영에 살면 보고 싶은 영화를 잘 못 볼 테니까, 올해부터는 한 달에 한 번 cgv서면으로 1박 2일 영화여행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예상과 달리 롯데시네마에서 적잖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궁금했던 [운디네]와 다시 보고 싶었던 [굿바이]는 놓치게 될 것 같아 아쉽다. 암튼,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은 관람료가 싸니까 점심 때쯤 출발해 2편의 영화를 보고 싼 숙소에서 자고 다음날 2편의 영화를 보고 오는 것, 내가 계획한 월 1회 부산영화여행이고 다음 주에 대망의 1회차가 진행된다.

 

암튼 내일부터 비가 오는 건 확실한 것 같아서, 맑은 오늘은 이순신공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 갈 때마다 강구안에서 동호항 바닷가를 따라 걸었었고 그 길이 약간은 아득한 느낌이 있었다. 지도앱이 알려주는 최단경로는 이전에 갔었던 해안길이 아니라 안쪽으로 걷는 길, 그렇게 가니 영화 보러 가는 길과 걸음수나 소요시간에서 별 차이가 없었지만... 한참을 걷다 만난 막다른 벽의 마지막 이정표가 반가웠다.

 

이름이 주는 선입견이 있어 나 역시 가보기 전에는 전혀 기대가 없었던 이순신공원은, 맑은 날 가면 저 멀리 한려수도와 망망대해가 조화롭게 탁트인 풍경이라 가슴이 시원해진다. 날씨가 좋아선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좀 있었고, 1월 말까지는 나무데크 보수작업도 하는 모양이었다. 지난해 여러 번 왔었고 무심코 지나쳤던 안쪽의 위령탑을 자세히 본 날은 마음이 숙연해졌었다. 혼자서는 맑은 날 낮에만 왔었는데, 지난 가을 부산 지인이 왔을 때랑 책모임에서 왔을 때는 걷다 보니 해가 진 뒤여서 많이 아쉬웠던 기억이 났다. 1월에, 2월에 하며 놀러오겠다는 지인들은 아직 소식이 없지만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오게 된다면 맑은 날이면 좋겠다. 오늘은 귀가길도 걸을 생각이어서 바다만 좀 보다가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잘 모르는 골목들을 돌아 동피랑에 잠시 들렀다. 따뜻한 날씨였지만 바닷바람은 또 모르는 거라 위아래로 내복을 입고 간 탓에 이순신공원에 도착한 뒤로는 롱패딩을 벗고 걸었는데도 더웠다. 동포루까지 갈 엄두는 못내고 중앙시장쪽 계단으로 내려오며 바라본 하늘, 서포루 옆으로 무지개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온전한 무지개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그 색감만으로도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왈칵 반가웠다. 내일부터 비 오고 흐린 날을 앞두고 하늘이 준 선물을 살짝 받은 기분, 그리고 산울림의 "무지개"도 떠올랐다.

 

'네가 친구와 같이 있을 때면 구경꾼처럼 휘파람을 불께, 모두 떠나고 외로워지면은 너의 길동무가 되어 걸어 줄께' 언제나 혼자인 내게는 무지개가 필요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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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9. 23:51

 

어렸을 때는 전혀 염두에 없었던 햇살이 지금은 하루 기분을 팔할쯤 좌우한다. 사생활보호필름과 패브릭포스터로 가려져 해가 직접 들지 않는 거실이지만, 그들을 통과해 들어오는 햇살의 밝은 기운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진다. 어느새 낮시간 침대를 비추는 햇살독서에 집착하게 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오늘은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별권을 다 읽는 것으로 [티보가의 사람들] 다시 읽기를 마쳤다. 11월 27일 밤에 1권을 읽기 시작했으니, 안산에 있었던 12월의 3주를 빼도 꽤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별권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과 소설가로 데뷔한 이후 문화계 동료들과의 교류, 작품을 집필할 때의 일화 등이 <회상>으로, 미완으로 남겨진 <모모르 대령의 수기>를 대신해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던 시기의 일기와 앙드레 지드와 나눈 편지의 발췌본이 실려 있다. 번역자의 해설대로, 별권을 읽는 것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가 작품을 써나가는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독서였다. 특히 [티보가의 사람들]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그러나 애초의 구상에서는 자크만 죽고, 앙투안느는 살아 남아 제니와 결혼을 하여 장 폴을 키우며 장 마리라는 딸이 태어나고, 성장한 장 폴은......(마음이 아파서 이하생략) 물론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독자이지만 지금의 [티보가의 사람들] 버전으로 집필을 마무리해준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더불어 별권은, 인생의 어느 때라도 필요하고 중요한 우정에 대해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과 삶의 쇠락에 대한 기록이기도 했다. 사라진 거대한 세계에서 남겨진 한 성실하고도 특출난 인간의 초상이자, 모든 삶의 맥락에도 비추어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생애사 같은 느낌. 사실 [티보가의 사람들] 자체가 그런 장대하고도 구체적인 인간과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매료되었고, 언젠가 진지한 독후감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아마도 안 하겠지.

 

오늘은 5시 55분에 [#아이엠히어]를 예매해놓은 터여서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 마지막 곡이 끝남과 동시에 라디오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 맑은 날이어서 해안로를 걷는 기분이 상쾌했고 어제 그냥 지나친 동피랑호떡을 사먹고 배가 불렀다.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 때로 느릿느릿 걷고 호떡까지 사먹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영화 시작 1분 전에 극장에 도착, 영화는 기대보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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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8. 22:55

 

바람이 많이 불었고, 실제 기온보다 많이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작년 9월에 바닷마을의 태풍을 아주 조금은 경험했는데, 당연히 그만큼은 아니지만 바닷마을의 바람은 좀 다르다. 12월 안산에서 돌아온 날, 현관문 앞에 웬 풍선 하나가 날아와 있었다. 환영표신가? 혼자 의미를 갖다 붙이고 말았는데 다음날은 커다란 비닐봉지가 집 앞에 날아와 있었다. 슬쩍 무서워져서 내가 뭐 잘못했나? 한동안 아무것도 없다가 다음엔 빈 아메리카노컵이, 그다음에 1107호 라벨이 붙은 택배상자를 보고서야 알았다. 우리집은 복도식 아파트 1101호,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저쪽 끝집인 1107호에서 현관문 앞 복도에 쌓아둔 재활용쓰레기 같은 것들이 날아온 거였다. 암튼, 바람이 종일 많이 불었고 추운 날이었다.

 

걷고 있거나 걷고 돌아오면 걷기를 예찬하게 되는데, 나가기까지는 아직도 깔끔하지 않다. 날이 추우니 더욱 그러했고, 저녁에 예매해놓은 영화를 취소할까 생각까지 들었으나... 17일 동안 꾸준히 해온 걸 춥다는 이유로 관두는 게 아쉬웠다. 더 추운 날도 있었고, 집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후회만 할 것 같았다. 영화 보러 갈 때는 그래도 세수하고 선크림이라도 발랐는데, 오늘은 날도 흐리고 나갈 때의 시각이 이미 5시였던 데다 여느 날보다 좀 깊은 갈등 후의 외출이다 보니 괜히 나가는 것만도 어디냐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나갔는지는 차마.

 

바람이 많이 불면 새들의 움직임이 더 집단적이 되고 활발해지는 걸까? 집 뒤쪽에 미륵산 줄기가 있어 보통은 까마귀들이 울거나 날아다니는데 오늘은 정말 오십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은 까치들이 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그렇게 많은 까치들을 떼로 본 건 처음이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운하해안로에서는 보통 때는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볼 수 있었던 갈매기들이 엄청 무리를 지어 있었다. <비밀보장>을 들으며 걷던 중이라 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가니 말 사이로 그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좀 무서웠다. 새들은 많이 있으면 왜 무서울까. 히치콕의 <새>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 영화프로그램에서 봤던 장면들이 각인이 된 걸까? 암튼 좀 무서웠다, 까마귀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가는 길이니 오늘은 다른 길,이라고 무심코 생각하다가 강구안을 지나 블럭제빵소를 찍고 정량동 쪽으로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강구안은 한동안, 감싸주고 싶을 만큼 어수선하고 풍경이랄 게 없는 모습이었는데 폐수정화였나 하는 말이 붙어 있던 큰 수중시설들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거라도 없으니 훨씬 나아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블럭제빵소빵은 참 맛있고 내게는 많이 비싸다. 지난 주에 영화 보고 들른 마트에서 사온 천 원짜리 식빵으로 토스트를 해먹었는데, 아... 나도 모르게 블럭제빵소를 찍고 정량동 쪽으로 빠지게 된 이유가 거기 있었던 모양이다. 동피랑호떡가게도 오랜만에 지났는데, 천원짜리 토스트로 배가 부른 상태라 사먹지 못했다. 아끼며 살아야 하는 처지이지만 천 원짜리 식빵은 삼가도록 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한다. 

 

영화 시작 시간에 맞춰 나간 길이어서 절반은 해가 진 뒤에 걸었다. 지금의 집을 물리적으로는 좋아하지만, 계약이나 집주인이나 제반 상황과 관련해서는 마음에 드는 점이 1도 없기 때문에(라고 순화해서 기록) 2년 후가 될지 4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이미 다음에 살고 싶은 곳을 찍어두었고 정량동이다. 그래서 일부러 지나갔지만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날씨도 추워서 별달리 보이는 것도 느낌도 없었고, 시청 제2청사를 지날 때는 바람의 언덕에 오른 기분이었다. 그렇게 100분을 걸어 영화관에 도착하니 마음이 좀 상쾌해졌다. 이 기분,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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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7. 22:50

 

어제에 힘입어 오늘은 다르게 그리고 좀 더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은 다른 세상에서 건너오는 기분이었다. "하루가 또 하루를 살게 한다"는 박상영의 명언이 떠올랐고, 지금의 나는 하루가 또 하루를 걷게 하는 셈이다. 어제보다 일찍 나갔더니 통영해상관광공원에 닿았을 때 해가 지기 전이었고, '유동 골뱅이'를 돌아가면 어디가 나올지 궁금했다. 지도앱을 확인하니 사량도여객선터미널이 14분 거리,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보았다. 어제오늘은 이어폰과 휴대폰만 지니고 가볍게 산책에 나섰는데, 터미널 앞에 있는 배를 보니 훌쩍 떠나고 싶어졌지만 자세히 살펴 보니 마지막 배는 3시 30분이었다.

 

사량도여객선터미널을 지나서도 해안도로는 이어져 있었지만,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왔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걷는 셈이어서 이따금 석양을 보기 위해 멈춰 서거나 뒤를 돌아야 했다. 서울에서 자주 보던 비둘기나 참새에 더해, 여기에서는 까마귀나 왜가리(아닐지도 모른다, 백로라기엔 마냥 하얗지가 않아서 추정)를 종종 보게 된다. 얼마 전 김춘수유품기념관 앞 바다에서 물고기를 물고 있는 왜가리를 보고 신기했고, 도남관광지에서는 요트정박지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한 마리를 보며 생각했다, '너, 나니?' 내가 본 왜가리(라 치고)는 주로 혼자 있어서, 발견하면 어쩐지 시선을 오래 두게 된다. 오늘도 두 왜가리를 보았고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나는 걔네들처럼 고고한 외양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햇살독서 시간에 드디어 [티보가의 사람들] 5권 말미에 수록된 알베르 카뮈의 발문 "영원한 현대인, 마르탱 뒤 가르"를 읽었다. 며칠 전 앙투안느의 죽음과 "장 폴"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로 본문을 다 읽고, 역자의 해설까지 읽었는데 그다음으로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늘 엄청 좋아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5권의 앞표지 뒷장에는 다 읽은 날짜와 사인이 없었다.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시 읽으며 푹 빠져드는 순간들이 적지 않았지만, 긴 호흡의 책 읽기를 잘 못하기도 하고 새해가 되어서도 계속 이 책만 붙들고 있다는 이상한 조급함에 오히려 집중이 안 될 때도 있었다. 난 자크를 오래 좋아했는데, 뒤로 갈수록 특히 "에필로그"에서는 (자크가 죽어서만이 아니라) 앙투안느의 생각과 행동과 성찰 들에 무척 공감이 되고 자신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성숙하고도 우아한 인간이라는 생각까지하며 그를 보냈다. 그러나 해설에 이어 카뮈의 발문 도입부를 읽으며 마치 난독증에 걸린 것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아 아예 덮어뒀다가, [티보가의 사람들] 별권까지 잘 읽기 위해 오늘 펼친 것이다. 물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대비하고 당대 프랑스 소설의 흐름을 짚어가는 도입부는 여전히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이전과 달리 활자와 문장이 조금씩 머리에 전달됐다. 그리고 작가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와 본격적으로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정말 재미있다고까지 느끼며 독서를 복기하면서 읽었다. 물론 번역을 거친 텍스트이지만, 역시 작가는 달라서 내가 느낀 문장이 되지 못한 느낌들을 그를 통해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하여, 발문에 이어 별권을 읽기 시작했고 그 뒤에는 예전에 분명 읽었으나 1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뻬루 마을 사람들]을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까 읽기도 마찬가지네, 하루가 또 하루를 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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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6. 23:39

 

그제 세탁한 두 번째 토퍼매트리스가 다 말라 초대형 압축팩에 넣었고, 1월 1일에 주문했으나 오늘에야 도착한 비틀즈 패브릭포스터를 베란다창에 달았다. 그리하여 오늘은 나름의 집 정리가 일단락된 날. 이사하고 11월 하순에는 가져온 짐 정리하느라 바빴고, 1월 초순에는 이 집에서 뭔가 새로 사지 않겠다는 애초의 다짐이 스르르 변질되어 이것저것 사들이고 정리하느라 바빴다. 11월에는 안 쓰는 스카프 두 개를 박음질한 발란스커튼을 베란다창에 달고 자족하였으나, 아... 인간의 이기심이란, 이라기보단 나의 이기심이란;;; 

 

집안에서 왔다갔다하며 정리하다 보니 마치 운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어느새 5시가 다 되었지만, 현관문 밖 상쾌한 공기와 풍경의 여릿한 중독성에 기꺼이 산책을 나갔다. 일몰이 한 시간도 안 남은 터라 도남관광지는 애매하고, 봉평동은 너무 짧은 것 같아, 오늘은 좀 다른 길을 통해 해양관광공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진남초등학교 뒤편으로 처음 가봤는데, 예전에 통영여행 준비할 때 이름으로 친숙해진 게스트하우스들이 있어 괜히 반가웠다. 공원에 서있는 앙상한 겨울나무와 작고 작은 초승달이 참 예뻤고, 해가 진 뒤에도 운하해안로에는 걷는 사람들이 있어 나 역시 편안하게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7시 정도, 산책 후 귀가로는 가장 늦은 시각이었는데 미륵도에서는 이제 해가 져도 괜찮다는 걸 확인하니 여기가 좀 더 우리 동네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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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5. 23:52

 

점심 때부터 해질녘까지 열 통쯤의 전화와 너댓 건의 문자, 부동산 방문으로 부산했다. 그렇게 하기로 한 계약서가 있고 전날 확인 연락을 했는데도 다른 말이 들려오고, 나는 당황과 동시에 바닥 수준의 신뢰마저 상실했다. 그랬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을 예사로 번복할까. 빨라야 다음 주 혹은 1월 말이 되어야 해결이 되겠지만, 어쨌든 일단락은 될 것이다. 변신은 어렵다. 왜 어려워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어려웠다.

부동산에서 나와 영화를 보러 갔다. 진이 좀 빠졌고 5시 정도였기 때문에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들으며 마음을 가벼이, 홀가분하게 하며 걸었다. 어제 영화 본 후에 장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5회를 들었는데 김생민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물론 이 때는 성폭력 사실이 알려지기 한참 전이었고, 그는 정말 웃겼으며 심지어 고민 사연자에게 모은 돈에서 10만 원을 남겨 통영 여행을 하라는 조언을 해서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통영을 마음에 둔 후, 어디에선가 통영이라는 말을 들으면 갑작스런 친근감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 살게 되니 더하다. 그런데 그가 통영이라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문득,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태도에 대해 나름 깊이 고민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폭력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온전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대처하고 연대해야 하는 일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마땅한 징계와 처벌을 받아야 하며 반성과 성찰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당연하고 사실 쉽기도 하다. 그런데 어려운 부분은, 성폭력 가해자는 그렇다면 기존의 모든 관계를 단절당한 채 고립되고 세상에서 파묻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나랑 아무 상관 없는 김생민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로 인해 떠오른 어떤 사건과 인물(지인)이 다시 불러온 생각이다. 많이 어렵게 느꼈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장을 보고 정류장까지 걷고 버스를 타고 하며 어쨌든 5회를 들었다. 4시 이후 산책길에는 <비밀보장>을 듣게 될 테고 앞으로도 그가 자주 등장할 텐데 스킵해야 할지 그냥 들어야 할지, 내 선택이 갖는 의미랄 건 없지만 계속 생각이 날 것 같다.

해저터널을 지나 간만에 운하해안로를 걸었다. 드문드문 여행을 온 듯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요일을 따지지 않으며 시간을 보낸 지가 꽤 되었다. 너무나 편안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무의미하다고도 느끼는 날들이다. 전에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으며 여러 부분에서 공감을 했었다. 어려서도 그런 편이었지만 서른 이후의 나는 혼자하는 것들이 참 많다. 혼자 사는 게 기본값이고 좋아하는 걸 즐기는 일도 대부분 혼자다.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도, 가끔의 예외가 있지만 여행도 혼자 한다. 그렇게 혼자하는 걸 어렵게 느끼지 않았고, 그 상태를 온전하고도 홀가분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나이를 먹으면서 친구라는 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혼자 오래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 타인을 수용하는 깊이도 폭도 얉아지고 좁아짐을 느낀다. 일을 할 때에는 좋든 싫든 사람들 속에 있으니, 길지 않은 일과 중에도 피곤을 느낄 때면 어서 혼자가 되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지난해 유월까지 일했다. 반년이 넘었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통영으로 뚝 떨어져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게 때로는 무덤처럼 편안하다. 뭔 소리니.

어제오늘 통영은 훈풍이 불어오는 봄날 같았다. 오늘은 운하를 따라 해안로를 걸어 강구안을 지나쳤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지만 해질녘의 노을과 점점이 켜지는 조명들을 보며 여행자 같은 기분이 되어 걸었다. 움직여야만 느낄 수 있는 살아있다는 감각, 가끔은 뭘 위해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상팔자 인정) 아무려나 또 다른 시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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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4. 23:59

 

통영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즈음부터 몇몇 부동산 블로그를 즐겨찾기해놓고 2-3년 동안 올라오는 매물들을 꾸준히 봤었다. 처음 이주하며 덜컥 바닷가 작은 집으로 갈 수는 없는 터라 혼자 살기에 적당한, 내 주제에 맞는 안신축아파트들을 눈여겨보았었다. 그러나 집을 구할 겸 한 달 살러 내려온 9월은 임대차 3법이니 뭐니 해서 시장이 어지러울 때였고, 몇 달 전인 5월 여행에서 본 부동산 창에 횡행하던 전세 매물 리스트는 대부분 사라졌다. 서울이나 수도권 같은 영향은 없지만, 전세 계약을 4년씩 해야 되면 혹시라도 집주인들이 원할 때 세를 뺄 수 없을까봐 내놓았던 전세를 월세로 돌리거나 다시 거둬들였다는 이야기를 부동산에서 들었다.

한 달 거처였던 동네 부동산에 들러 월세로 나온 몇 군데를 보고 차를 내려준 도남동을 걷다가 눈에 띄는 부동산에 무작정 들어갔고 지금의 집을 만났다. 5월 여행에서 지금의 집 앞을 지나다가 바다도 가깝고 조용하지만 너무 외지지는 않고 맞은 편 새마을금고 지점 이름이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랑 같은 걸 보고서 혹시 운명? 하며 사진을 찍어뒀었는데, 신기했다. 집 보러 가느라 올라탄 실장님의 차 뒷좌석에 조선일보가 가득 쌓여 있었지만 경상도에서 그 정도는 디폴트겠거니, 앞서 다른 부동산에서 봤던 집들과 월세는 같으나 상태는 현저히 양호하고 현관문을 열면 어쨌든 바다가 보이는 집이 마음에 확 들어왔다. 

비록 하루지만 여섯 군데를 보았고, 이만한 집은 없다는 성급할지 모를 결론을 내렸다. 지불능력이 없기 때문에 월세는 염두에 없었는데 다행히 집은 월세 혹은 전세로 나와 있었다. 공실이었기 때문에 입주 시기가 문제였는데 내가 이사할 수 있는 때는 빨라야 11월 중순이었다. 어쨌든 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다음 날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고, 실장님은 서울의 집주인과 여러 차례 통화하며 입주 시기를 맞춰주셨고 순전히 내 사정에 맞춰 처음 두 달은 월세를 내고 이후 전세로 전환하는 것까지 소통해주셨다. 주거복지산 줄 알았다(여성실장님 한정). 덕분에 많은 게 낯선 통영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선택해 이사할 수 있었고 이사한 후 고마운 마음에 한 번 찾아뵈었었다. 내일이면 나는 월세인에서 전세인으로 변신한다. 하여 산책의 첫 목적지는 부동산, 내일 이후 나는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큰 기쁨을 안전하게 확인하였다. 

산으로 가는 산책일기. 오늘의 산책길은 집에서 부동산을 거쳐 롯데시네마 통영점까지 이어졌다. 어제까지의 경험치로는 집에서 영화관까지, 4시 이후일 경우 <비밀보장>을 들으며 걷는 게 최적의 1만 보 걷기. 마침 롯데시네마에서는 '무비싸다구'(이름 참...) 쿠폰을 자주 날리고 있어 3천 원에 [늑대와 춤을]을 예매했다. 낮시간이어선지 나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붙어 앉은 그들은 러닝타임 내내 마치 자기 집 소파에서 영화를 보는 듯이 대화를 나눴다. 볼륨이 높지는 않았지만 몇 줄 뒤에 앉은 내게까지 충분히 거슬리는, 마치 층간소음처럼 잊을 만하면 시작되고 한 번씩 돌출하며 신경을 박박 긁는, 충분히 불쾌한 소리였다. 아, 나쁜 사람들. 덕분에 역시 영화는 저녁에 봐야겠다고 생각해 1천 원에 예매한 내일 4시의 [아이 엠 우먼]을 취소했다.

사실 오늘 가장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나갈 준비하며 오랜만에 듣게 된 <윤고은의 EBS북카페>, 걸을 때도 곱씹으며 착잡했었는데... 제대로 된 공부도 사색도 하지 않으며 즉자적인 감정에만 현혹되며 살아온 시간이 오래이다 보니, 안 그래도 많지 않던 단어들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심정만 강렬할 뿐 글로는 전혀 정리가 안 된다. 그럼에도 거칠게나마 되묻고 싶은 건, 주식이니 투자니 하는 제도와 행태가 정말 그렇게 가치중립적인 것인 양 다뤄져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윤고은의 그 낭랑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증권과 주식과 투자 등에 대해 알아본다며 '북카페 주식회사'를 상정하고, 요일별 코너를 계열사에 청취자들의 사연을 투자에 빗대어 한참 이야기하는데 듣고 있자니 사실 소름이 끼쳤다. 주가가 오르고 배당금이 높아지는 현상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돈이 일하게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언명 뒤에 얼마나 많은 절규들이 있는지, 작가와 제작진은 정말 모른 체해도 되는 것일까? 차마 끝까지 못 듣겠어서 꺼버렸고, 부동산에서 나온 후로는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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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3. 23:45

 

오늘은 [미스터 존스]를 보기로 마음먹은 날, 며칠 전 앱을 보니 4시 상영에 예매자가 1명 있어서 괜히 궁금하기도 하고 누군가와 같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또 늦잠을 잤고(올해 들어 열흘은 성공적이었는데, 그제에 이어 또다ㅠ) 뭘하든 예열의 시간이 많이 필요한 데다 뭔가 챙겨먹고 걸어가기에는 마음이 바쁜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시간을 놓치기 아쉬워 12시부터 2시까지는 [티보가의 사람들]을 읽고,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아침겸점심겸저녁을 먹고 대충 집 정리를 했다. '임헌일의 사운드 스케이프' 코너에서 웃음소리를 들려줬는데 둘이 웃는 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정말로 웃어본 지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더라.

5시쯤 산책 겸 영화 보러 나가면서 문득 즐겁게 걷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이 떠올랐다. 지난 달 안산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내 의지와 별개로 한동안 나를 감싸고 있었던 부정적인 기운을 떨쳐내고 싶다는 바람과 동시에 직관적으로 떠올라 처음 들었었다. 최근 회였고 김숙이 연예대상을 받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어쨌든 덩달아 유쾌해진 기분이 되어 좋았다. 뭔가 마음에 들면 시작부터 끝까지 알고 싶은 전작주의 본능 때문에 이후에 1회랑 2회를 찾아 들었는데, 라디오에 팟캐스트에 듣기만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아 관뒀다가 오늘 떠오른 거다. 영화관까지는 느긋하게 걸으면 2시간, 별 것 아닌 걸로도 많이 웃는 두 사람 덕분에 걷는 길이 즐거웠다. 300회 가까이 업로드되고 있으니 앞으로 영화관 가는 길에는 <비밀보장>을 듣기로!

해저터널을 지나 윤이상기념관을 지나 오랜만에 안쪽길로 걸었는데, 윤이상기념관에서 서피랑으로 이어지는 쪽의 벽들이 "안단테 윤이상 음악여행길"이라는 테마로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가장 윤이상다운 악기 첼로로 윤이상의 삶을 그리다'라는 글과 함께 파란색 초상화가 있었는데, 음... 솔직히 처음에는 그래서 이 분은 어느 첼리스트인가? 싶었다가 자세히 보니 윤이상 선생이었네. 윤이상기념관 2층에 생전에 쓰던 첼로가 전시되어 있는 걸 봤었는데, 예전에 들었던 cd에서 느꼈던 화성과 불협화음의 조합 같은 곡들 말고 그냥 첼로 연주곡이 있다면 좀 덜 어렵게 느끼며 차근차근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간도 있고 해서 벽화길을 따라가볼까 하는 찰라 통영산 지인님께 전화가 걸려왔고, 통화하느라 벽화길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오늘은 안쪽길을 택했으므로 오랜만에 항남1번가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이전 가게의 브랜드가 남아있었던 명성레코드 간판이 바뀌었고 '나 5월에 커피 한 잔 킵했었는데 주인아저씨는 기억하실까?' 생각만 하며 지나쳤다. 난 혼자서 극장이든 식당이든 카페든 잘 들어가는 사람이지만, 긴축 생활 중인 백수이므로 통영의 식당과 카페 방문은 지인과 함께일 경우로 한정하고 있는데... 9월에 부산지인이랑 마셨던 커피가 너무나 맛있었던 삼문당을 건너편 길에서 보니 불 켜진 모습이 참 예뻐서 들어가고 싶었지만 사진으로 패스. 

초행일 때는 북신시장부터 꽤 낯선 길이었던 영화관은 두 번째가 되니 금세 익숙해졌고, <비밀보장> 걷는 길이 가볍고 즐거웠다. 오늘도 혼자서 영화를 잘 보았고, 25분 기다려 15분 만에 도착한 버스 타고 집 앞에 도착해 1만 보에서 500보쯤 모자란 걸음수는 계단 오르기로 채웠다. 비록 늦잠으로 시작한 하루지만... 책 읽고, 조금 먹고, 지인과 통화하고, 많이 걷고, 영화 보고, 말끔히 씻는 것까지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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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2. 22:16

 

업앤다운앤다운앤다운...을 반복하는 기분 속에 하루를 보냈다. 제때 일어나 김창완 아저씨의 오프닝을 놓치지 않았고 어제와 달리 환한 햇살이 좋았다.

이사하고 짐이 대충 정리된 후부터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회색노트]를 읽고 매료된 후, 이후의 이야기들을 오래 궁금해했고 2000년에 민음사에서 전권이 간행됐을 때 정말 행복했다. 긴 호흡의 책을 잘 못 읽는 편인데, 자크에 홀려서 한 권 한 권 읽으며 이야기 속에 한참을 빠져 지냈었다. 계기가 되면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고, 이번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면 다시 빠져들어 인물의 마음에 이입하며 예전의 밑줄을 다시 보고 새롭게 밑줄을 긋고는 한다. 이제 막바지, 5권 중반을 넘어섰는데 반항적인 외톨이에서 숭고한 평화주의자로 성장한 자크는 '행동하기 위한' 선택에서 허망하게 죽었고 가스에 중독된 앙투안느는 죽어가는 중이다. 500쪽을 넘나드는 다섯 권의 책에서 다루는 십여 년 동안 인물들은 제각기 성장했고, 전쟁에 휘말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갈라진 운명은 안타깝고 비통하다. 따뜻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책을 읽는 시간도, 이십 년 만에 다시 보니 새롭기만 한 [티보가의 사람들]도 좋지만 예전에 비해 책을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어쩐지 이 책을 빨리 다 읽어내야 다른 책들을 읽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두세 시간의 집중으로도 100쪽을 채 읽어내지 못하는 게 자주 시무룩하다.

3시 반이 조금 넘었을 때 엄마에게 보이스톡이 왔다, 두 번이나. 잘 없는 일이라 무슨 일이 생겼나 마음이 두근거리면서도 제발저림에 그대로 두었다가 조금 후에 전화를 하니, 눈이 많이 오는데 사무실에 있는지 걱정이 돼서 연락했다고 한다. 아... 통영은 흐렸던 어제에 비하면 맑은 하늘에 춥지 않은 날씨, 그러나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기분이 급격히 다운됐다. 양심이라는 게 그런 건가.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한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밖이라고, 괜찮다고, 하고 말았다.

오늘 읽은 [티보가의 사람들]에서 퐁타넹 부인은 앙투안느에게,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절단한 다니엘의 사고와 자신이 경험한 공명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퐁타넹 부인은 매종 라피트에 있는 티보씨의 별장을 빌려 군인 병원을 세우고 헌신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몸이 아파 새벽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정오가 가까운 시각에는 정신을 잃기까지 했던 날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가 다니엘이 부상을 당한 때라는 것을 열흘 후에 알았다는 것.

너무 갖다 붙이는 거겠지만... 평소 집에 오는 일이 없던 엄마가 12월 초 내가 집에 갔을 때 오빠한테 말해놨으니 차 타고 같이 집에 가자고 했던 것이나, 주중에는 특별한 용건이 있어도 톡을 보내는 정도였는데 불쑥 보이스톡을 보내고 하는 게 혹시 무슨 예감이 있어서였나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연극이며 콘서트 보러 가고 엘피며 씨디 사모으느라, 좀 더 커서는 데모하느라 엄마한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었는데... 그렇게 훈련된 덕분에 지금도 겉으로는 잘 모면하고 있지만, 암튼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다. 주절거리는 지금도.

기분도 그렇고 해서 오늘은 나가지 말까 하다가, 한 번 관두면 계속 그럴 것 같아 한 시간만 걷기로 하고 산책을 나섰다. 케이블카파크랜드에서 발개로를 거쳐 봉수돌샘길, 그리고 봉평동 메인스트리트로 내려와 집으로. 마음이 불편하니 텅 비어 줄 지은 케이블카도 괜히 다르게 보이고, 한편으로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거니 싶기도 하고. 오랜만에 존 레넌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걸었는데 하필 첫 곡이 "Mother"였고, 가사나 의미랑 무관하게 그냥 좋아하는 "The Luck of the Irish"를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니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돌아와서는 6시부터 시작된 '꽃다지'의 유튜브 온라인 콘서트를 봤다. '꽃다지'도 좋지만 실은 정윤경 감독의 노래들을 많이 좋아했었고, 백수 되면서 후원도 끊었지만 어쨌든 날아오는 문자를 보니 반가워서 1인분을 하고 싶은 마음에 유튜브 실시간 라이브라는 걸 처음 접속했다. 콘서트의 타이틀이 "놀진 않았Show", 이미 오래 놀고 있는 입장에서 내 마음만 들여다 보며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는 주제라 좀 민망했다. 변영주 감독의 막되먹은 진행이 편안하기는 했는데 채팅창으로 올라오는 활기찬 인사와 대화와 이모티콘 들에 약간의 이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운앤다운앤다운... 내일은 기분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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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