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그만두고 통영행을 준비하면서 가끔이지만 제일 많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사촌이었다. 집 구할 겸 한 달 살러 내려와 9월 초에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났으나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었을 때, 결정은 오롯이 내 몫이었지만 뭔가 마음의 지지가 되는 대화가 필요했고 그때도 사촌과 통화했었다. 대구에 있으니 엄마나 아빠랑 만날 일 없고, 실수로라도 작은 이모한테 알려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든든한 상대였다.
설 전날 엄마한테 말하면서 사촌은 알고 있다고, 내가 엄빠한테 다 말한 다음에 통영에 오기로 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 이모가 전화했었다며 사촌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뭐라고 했냐니까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근데 통영 가서 좋더라도 너무 좋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란다. 사촌은 이모 너무 귀여워서 알려준다고 했다. 아빠의 의외로 담담한 인정,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의 서운함은 깊었다. 통영에 도착한 나랑 통화를 하면서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니 몇 년 살고 다시 서울로 오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서울에 살 때,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좀 뜸해졌지만 보통 한 달에 한 번 엄빠를 만나 식사하고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챙겨왔었다. 엄마는 평소에 홈쇼핑에서 먹을거리를 사면 내 몫을 따로 챙겨놓았고, 국이며 찰밥, 혼자서는 안 해먹는 고기 반찬 같은 것들을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가기로 한 날에는 나물이나 오징어채무침, 잡채, 전 같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챙겨줬다. 아빠는 식사를 하고 두어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피자를 시키라고 했고, 나눠 먹고 몇 조각 남은 건 싸가서 먹으라고 했다. 설이나 추석에는 전날 가서 자고 당일날 아침을 먹은 뒤 오빠네 가족이 새언니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를 데려다 줬는데, 그럴 때면 쌀이며 김치에 갖은 생필품까지 더해진 엄청난 꾸러미들이 함께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서른 살 즈음까지는 입이 많이 짧은 편이었고, 먹는 걸 좋아하고 음식 만들어 나누는 것도 좋아하는 엄마에게는 혼자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딸을 그렇게 챙겨주는 게 기쁨이었던 것 같다. 먹는 건 대충 한 끼 때우는 걸로 충분한 나는 엄마가 살뜰히 챙겨주는 음식들을 작은 냉장고에 채워두고 버리는 것 없이 알뜰히 잘 먹었다. 아빠는 맛있는 식당을 알게 되면 가족이 만나는 날 식사 장소로 잡아 티내지 않고 나를 챙겼고, 집에 가기로 한 날을 앞두고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이야기하면 엄마는 반가워하며 먹고 싸갈 수 있게 음식을 해줬다. 생각해 보면, 이 나이 먹도록 엄빠한테 의지하고 살아온 셈이다.
이번 설에는 날벼락 같은 일방고지를 하고 음식 챙길 분위기가 아니었고, 안산 지인집에서 며칠 더 있다가 오느라 전처럼 바리바리 싸오지 않았다. 와중에 큰 김치통 두 개와 가져간 가방은 꽉 채웠지만, 통화하면서 엄마는 평소처럼 음식을 충분히 챙겨주지 못한 걸 많이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나이도 있고 하니 이제 배추 한 포기 사서 김치도 담궈 보라고, 하다 보면 재미도 있고 느는 거라고 했다. 김치를 담군 적은 없지만, 예전 공부방에서 일할 때 2년 가까이 스무 명 아이들의 밥과 간식을 직접 챙겼기 때문에 음식하는 걸 어렵게 느끼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엄마의 음식을 의지해 살았고 감사했지만, 통영에서는 내 힘으로 해결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내 마음에 걸렸는지 화요일엔 홈쇼핑을 보다가 고래사어묵세트를 주문해서 보냈고, 오늘은 이런저런 반찬거리를 챙겨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보통 용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아빠는 간략족보 업글버전을 시험 공유하고 "잘 먹도록"이라는 한 마디를 전했다. 아빠의 카톡을 받고, 엄마의 택배를 받으며 부모와 자식은 뭘까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돈다. 자식이 없으니 나는 죽을 때까지 모를 마음이다. 어렸을 때 뭐든지 마음대로 하는 나 때문에 화가 나면 엄마는 나중에 꼭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보라고 했었는데, 만약 나한테 꼭 나 같은 자식이 있다면 나는 약오르고 얄미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