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에 해당되는 글 92건

  1. 2021.01.04 옆 동네 봉평동
  2. 2021.01.03 좀은 충동적으로
산책일기2021. 1. 4. 22:23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듣고 가벼운 산책에 나섰다. 예전 여행 왔을 때 봉평동에서 지금의 집 쪽으로 걸었던 기억이 있어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무작정 나가보았더니 통하는 길이 있었다. 올해 안에 내려와야지, 하는 마음이었던 5월 여행에서는 이전과 달리 동네와 집들을 기웃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때 봉평동에서 내려와 무작정 걷다가 마주친 3층짜리 'ㄷㅈ빌라'(좋아하는 선생님의 이름이랑 같다.)를 보며, 저기쯤은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내 집은 이미 정해졌지만 빌라 이름이 새겨진 그 건물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전, 막연히 통영행을 꿈꿀 적의 목적지는 산양읍이었다. 박경리 기념관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 소박한 산양도서관을 만났을 때 참 반가웠고, 부러 들어가 선생님의 책을 찾아보며(한 권 있었다.) 괜히 기뻤다. 또 한참을 걸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이 고즈넉한 당포성지에 닿았을 때 느꼈던 시원함과 평안함도 마음에 들었다. 산양읍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계획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면서는 정말 시골마을인 데다 차도 없는 내게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통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강구안 뒷골목이다. 사이의 "태평양을 등지고"에 나오는 '호주머니 속 바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은 바다와 마주한 오래된 골목. 차도 쪽은 온통 충무김밥집이지만 뒤편에는 구석구석 백석의 시가 적힌 판넬들이 있어 마음이 일렁였다. 처음 발견한 이후 한 번씩 올 때마다 흐릿해진 기억을 대조하며 시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는 게 의례가 되었다. 트루베르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으며 골목 골목의 시들을 읽다 보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나름의 인사를 전하려고 먼저 찾아가는 "통영2" 시비와도 멀지 않았다. 언제든 강구안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면 참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충렬사와 서피랑이 있는 -란이라는 처녀가 살기도 했던- 명정동쯤은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나중의 일. 

지금의 집에서는 봉평동이 멀지 않다.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 내성적카페 호심 그리고 아직은 가보지 못한 식당과 카페 들이 많이 있는 곳. 부러 용화사로 이어지는 메인스트리트가 아닌 옆 길로 올라갔더니 새로운 풍경들이었고, 새해 첫날의 봉평동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지만 내성적카페 호심은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내성적인 나는 차마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봉평오거리로 향하는 길 오른 편의 통영도서관 역시, 공휴일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도 휴관 중인 것 같았다. 집을 정한 후 일상이 안정되면, <토지>를 빌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뒷동네 탐험  (0) 2021.01.08
영화는 내일로  (0) 2021.01.07
통영대교 너머  (0) 2021.01.04
바닷가의 트럼펫  (0) 2021.01.04
좀은 충동적으로  (0) 2021.01.03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3. 23:54

 


어떤 이의 글을 이어 읽다가, 나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오래 그리던 통영으로 이사를 왔다. 12월 5일부터 3주간은 처리해야 할 이런저런 일들과 집안일도 있어 안산의 지인집에 머물렀고, 12월 28일 통영시민이 되었다. 7년 만의 이사와 정리는 적잖이 많은 일거리를 남겼고, 어지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할 일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나는 자꾸만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사 후 집을 떠나 있었던 시간을 빼도 통영에서의 시간이 3주 이상인데 그 사이 내가 집에서 한 일이라고는 <티보가의 사람들>을 4권 후반까지 다시 읽은 것과 <지붕 뚫고 하이킥>을 126회까지 다시 본 것. 그 외에는 매일 먹고 자고 담배 피우고 라디오 듣고 멍 때리고 집 정리하고 휴대폰 들여다 보고, 이따금 처리해야 할 일을 위해 외출하는 정도가 다였다.

이사하고 짐과 집을 정리하면서 라디오를 다시 만났다. 어렸을 때 정말로 라디오를 좋아했다. 국민학교 졸업 선물로 엄마가 사준 빨간 라디오가 시작이었다. mbc나 kbs에서 김희애나 박중훈이 dj를 하던 밤의 프로그램들을 주로 들었고, 중학교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 주파수를 돌리다가 우연히 김창완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게 됐는데 cbs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직도 책장에 꽂혀 있는, 이후 책으로 묶여나온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시한부 암환자 민초희 언니의 사연이 이따금 소개되고 dj도 청취자들도 같은 응원의 마음이었을 그 방송은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후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 김광석 아저씨가 진행하는 bbs <밤의 창가에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유희열의 음악도시>, <김장훈의 우리들>, <김영하의 책하고 놀자> 등은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라디오를 듣지 않고 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2002년 이후 완전히 잊고 지냈다.

tv 연결을 하지 않으니 적막한 집, 짐 정리를 하는 와중에 cd나 lp를 골라 음악을 들을 여유는 없고 반복되는 휴대폰의 플레이리스트가 아무 의미 없이 들리던 순간 라디오를 떠올렸다. 김창완 아저씨가 어딘가에서 dj를 하고 있지 않을까? sbs 주파수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고릴라앱을 깔았고, 순전히 김창완 아저씨 덕분에 대략 9시 이전에는 일어나 오프닝부터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날이 시작됐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가 끝나면 <박하선의 씨네타운>, 그 다음엔 주파수를 돌려 <윤고은의 ebs 북카페>,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 밤 10시 이후에는 가끔 <정형석의 밤의 라디오>를 듣는다. 그런 패턴으로 라디오를 듣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려 7시간을 라디오에 매여 있는 꼴이 되는 것 같아 요즘엔 11시부터 2시까지는 가끔 패스하기도 한다.

이사 전 몇 번의 여행에서 어디를 가든 가까이에, 눈 앞에 바다가 있는 통영 걷기가 참 좋았지만 이제 살게 됐다고 생각하니 절실한 느낌이 없어졌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바다가 보이고, 비록 방범창살이 시야를 가리지만 작은 방 창문 너머에도 바다가 있으니 종일 11층을 벗어나지 않는 날이 많았다. 게다가 참 좋은 라디오까지 다시 만났으니, 그 핑계로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뭉개는 시간이 더 편안해졌다. 

새해를 앞두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늘 실전보다는 준비에 공을 들이고, 어쩌면 그렇게 '진짜'를 유예하는 습관이 일상 자체가 되어버린 걸 언제까지고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 첫날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이 끝나고 찾아온 적막의 시간. 이제 뭘할까 잠시 멍 때리다가 문득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소와 달리 망설임 대신 대충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물론 1월 1일이었기에 가능했던 외출이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까지, 고작 3일이고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산책을 계속하고 있다. 매일 이어가고 싶은 일이고, 좀은 충동적으로 카테고리를 만들었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라도 '매일 쓰기'까지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뒷동네 탐험  (0) 2021.01.08
영화는 내일로  (0) 2021.01.07
통영대교 너머  (0) 2021.01.04
바닷가의 트럼펫  (0) 2021.01.04
옆 동네 봉평동  (0) 2021.01.04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