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에 해당되는 글 99건

  1. 2021.01.11 최적의 1만 보 코스 찾기
  2. 2021.01.10 정정당당
  3. 2021.01.09 영화 보러 가는 길
  4. 2021.01.08 뒷동네 탐험
  5. 2021.01.07 영화는 내일로
  6. 2021.01.04 통영대교 너머
  7. 2021.01.04 바닷가의 트럼펫
  8. 2021.01.04 옆 동네 봉평동
  9. 2021.01.03 좀은 충동적으로
산책일기2021. 1. 11. 23:30

 

 

늦잠을 잤다. 8시 33분 혹은 44분 알람을 들었으나 정신을 잃(은 듯 잠들)었고, 유발샘은 환한 옷을 입고 이미 와계시다던가 하는 김창완 아저씨의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으나 또 정신을 잃(은 듯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박하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 오고 이런 적이 없는데, '나 아픈가?' 늦잠 자고 일어날 때마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변함없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응, 안 아프다. 어제 루틴이라고 적어놓고 바로 다음 날 이렇게 된 게 웃겼지만, 다량함유된 자기보호본능 덕분에 푹 자고 일어나니 몸도 개운하고 좋아진 것 같았다. 


날씨가 종일 흐렸다. 1월에 가장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 집안일은 세탁이다. 설연휴를 전후로 오겠다고 한 지인들을 생각하며 무려 이불커버세트와 이불솜 및 토퍼 등 침구류를 여러 세트 주문했다. 좁은 베란다 및 사생활보호필름을 붙여 해가 잘 들지 않는 확장된 베란다에서 이들을 건조하는 것도 일이고, 이불커버를 뒤집어가며 말리고 이불솜과 체결하는 것도 생각보다 일이다. 오늘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불솜과 커버 차례였고 이제 토퍼 두 개가 남았는데, 날이 흐려 속도의 흐름이 살짝 끊겨버렸다. 딱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게 중요한데, 내일부터 맑다니 기대해야지.


롯데시네마 통영점 시간표를 확인하니 [미스터 존스]를 이번 주중에 계속 상영하길래, [걸] 감상을 올린 후에 보기로 했다. 마침 현관에서 바로 이어지는 주방을 가리려고 주문했으나 천장 꼭꼬핀이 들어가지 않아 걸지 못하고 있던 패브릭파티션을 걸기 위해 지난주에 주문한 매직파티션이 오후에 도착해서,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정리를 했다. 처음 패브릭파티션을 주문할 때 생각했던 그림과는 달라졌지만 어쨌든 싱크대가 훤히 보이는 것보단 낫고, 가운데 갈 곳 잃은 고정끈이 거슬려 작년 5월 통제영 옆 굿즈샵에서 산 패브릭책갈피 두개를 달아줬더니 보기가 한결 괜찮아졌다. 으쓱~ 


어제 정정당당하게 산책을 마쳤지만, 1만 보 코스 몇 가지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오늘은 나름 탐색을 시도했다. 충무교 앞에서 미수동 쪽으로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가 김춘수유품기념관까지 해안로를 걷고 봉평오거리 쪽으로 나와 돌아오는 길을 일단 가보기로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겨울방학이 유동적이 된 건지 통영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처럼 통영의 인파과 활기를 느끼며 충무교까지 걷고, 몇 년 전 통영여행하며 엄마아빠가 묵었다는 거북선호텔을 지나, "사랑한다"는 절규를 지나, 통영대교와 닿은 공원을 오늘은 구석구석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름이 통영해양관광공원이었는데 해안을 포함한 여러 갈래 산책로에 지압길이며 인공암벽이며 쌈지도서관 등 여러 가지가 소소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지금도 유효한지 모르지만 우림이와 온유가 사귄다는 정보까지 전달하고 있었다, 축하해요.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다시 해안길을 지나 제주해녀상과 등대를 지나 김춘수유품기념관 앞 벤치에서 숨을 돌리고 미륵도 쇼핑의 메카 탑마트에 들렀다가 봉평오거리에 이르니 걸음수가 7천 보 정도였다. 대로로 바로 가면 오늘도 계단행이겠다 싶어 봉평오거리에서 통영도서관을 지나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드문 인적에 비하면 스산하지 않았고 사거리에서 좌회전, 주공아파트에서 내려가면 대략 1만 보가 되겠다는 계산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처음 갈 때와 두 번, 세 번 갈 때의 느낌이 정말 다르다. 오늘 걸은 길들도 여행 와서 혹은 산책으로 처음 지날 때는 눈 앞의 길만 뚝 떨어진 채 존재하는 기분이었는데, 반복해 걸으며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진다는 게 인식되고 나름의 좌표가 생기니 결국 연결된다는 안정감에 친숙함까지 더해져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편해진 마음과 달리 걸음수 체감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 나름의 계산으로 -자로 올 수 있는 길을 ㄷ자로 돌아왔음에도 동 현관 앞에서의 걸음수는 어제와 마찬가지였고, 오늘도 씩씩하게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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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10. 22:58


어제 본 영화 두 편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리,라 봐야 나중에 다시 읽고 기억할 수 있게 줄거리와 인상 정도 기록하는 거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보았다'는 기억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어제 들었던 생각대로 영화를 나름 소화시키고 다음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하여 원래 오늘 보려고 했던 [미스터 존스]는 다음으로.

지난 일요일 도남관광지에서 들었던 트럼펫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여러 번 오다 보니 구석구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늘 멀찌감치 지나쳤던 유람선터미널과 관광정보센터 사이로 끝까지 가봤다. 연필등대가 정면으로 보이고 옆에는 낮은 데크전망대, 전망대에 오르니 바다 쪽과 요트정박지 쪽의 풍경이 익숙한 듯 새롭게 펼쳐졌다. 내려와 해안산책로로 향하는 길은 평소에 자주 다니던 방향과 반대였는데, 기준 시점이 달라지니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낯설어 신선했다.

마리나리조트에서 바로 이어지는 삼칭이해안길을 조금 걷다가 스탠포드호텔 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통영국제음악당과 주차장을 공유하다시피 붙어 있는데 이쪽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라 그 역시 익숙하고도 새로운 광경. 풍경도 현상도 늘 보던 곳에서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른 위치에서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야말로 몸소 체험하니 뭔가 작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이왕 새로운 길 가는 김에 이번에는 돌아가는 길도 그래보자 싶어 도남관광지에서 케이블카 쪽으로 처음 가는 길을 걸었는데, 뭐랄까... 지도앱이 도보길을 굳이 안내해주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깨달음을 덤으로 얻었다.

고작(실은 무려) 열흘째이지만 매일 산책을 하면서 나름 정한 게 있는데, 걸음수 1만 보가 안 되는 날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11층 집까지 올라가는 거다. 걷는 걸 좋아하고 걷기 말고는 운동이라고 하는 게 없기도 하고, 서울에서도 보통 1시간 정도 거리는 걸어다녔었고 1주일에 반 이상은 1만 보 이상 걸었었다. 그런데 산책을 하다 보니 해저터널 건너 육지까지 갔다 오는 게 아니면 1만 보가 안 되고, 매일 그러기에는 보통 오후 산책이라 금세 날이 어두워진다.

오전에 산책을 할 수도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들으며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설거지하고 멍도 좀 때린 후에 11시부터 2시까지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게 너무 좋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놓치기가 아쉽다. 보통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집 정리 같은 걸 하고 간단히 뭘 먹고 산책을 나서는 게 약간 루틴처럼 되었고, 그게 좋다. 해가 길어지면 4시쯤 집을 나서도 1만 보 산책을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어렵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걸음이 7천 보 정도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계단 오르기가 싫어서 나도 모르게 동 현관을 가로질러 케이블카파크랜드를 향했다. 이번에는 지난 번에 갔던 옆 골목으로 가봤는데 음... 쓰레기가 잔뜩 쌓인 공터와 겨울이라 가꾸지 않아 쓰레기 나뒹구는 텃밭 등을 지나야 했고, 케이블카파크랜드를 한 바퀴 돌고 8천 5백보가 넘었길래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겠군 생각하며 횡단보도를 향할 때 노란색 'ㄷㅈ고속관광' 버스를 보았다. 아, 선생님 보고 싶어라! 그러나 동 현관에 도착했을 때 확인하니 아직 5백 보 정도 모자랐고, 나는 정정당당하게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랑은 보통 1주일에 한 번 주말에 통화한다. 엄마는 늘 자식 걱정하고 만날 때면 엄청 세심하게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주는 것에 비하면 잦은 연락이나 방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서울에 있을 때도 상도동과 양평동, 버스 한 번 타면 도착하는 거리임에도 7년 동안 우리집에 온 게 몇 번 되지 않는다. 가끔 톡을 보내기는 하지만 안부 연락은 주말에 내가 하는 전화가 전부, 한 달에 한 번쯤 가족 식사 겸 냉장고 털러 가던 것도 코로나19 상황과 나의 이주로 텀이 늘었다.

나는 엄마를 좋아하고 통영도 좋아하지만, 엄마는 나를 좋아하나 통영은 싫어한다. 실은 일을 그만둔 것도, 내가 통영으로 이사한 것도 모른다. 이주를 마음 먹은 몇 년 전, 완충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통영에 가서 살겠다는 이야기를 한 번씩 했는데 그때부터 엄마는 통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는 아빠는 건너뛰고 엄마한테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얄미웠는지, 비겁하다며 짜증을 냈다. 생각해 보니, 아주 어려서부터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아빠와 담 쌓고 지내며 나는 엄마에게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시켜왔다. 돌이켜 보니 그건 아주 비겁한 짓이 맞았다.

6월 말에 일을 그만두고 9월에 통영에서 한 달 살며 집을 계약했고 11월에 이사를 했다. 12월엔 서울집 정리와 이런저런 일들로 안산 지인집에 3주나 있었고 그 때 엄마아빠의 50주년 결혼기념일이 있어 가족 식사를 했다. 이 나이에 일이며 이사며 엄마아빠의 허락 받는 게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 아무런 말 없이 이 모든 걸 질러버린 게 엄마아빠에게는 꽤 충격일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저 통영에 살고 싶어서 멀쩡히 다니던 사무실 그만두고 이사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게 간단한 사정만은 아니지만, 가족간에 공유되는 건 사실의 표면일 수밖에 없다. 이사 후 엄마와 통화하거나 집에 갔을 때는 마음이 너무나 불편해서 간만에 양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퇴근했냐?" "요즘 사무실에서 밥은 어떻게 먹냐?" "이렇게 추운데도 매일 출근해서 일하냐?" ... 대충 뭉개는 대답으로 거짓말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일요일이라 저녁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 주 서울이 너무 추워서, 안부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추위를 많이 타지 않고 코로나19 때문에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엄마란 걸 알지만, 원래 주말에나 한 번 전화하는 딸이니 그러려니 했겠지만, 많이 미안했다. 춥고 길 미끄러운데 출퇴근 조심하고, 밥 잘 챙겨먹고... 집에 먹을 건 있는지 한 번 와서 가져가면 안 되는지,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산책하면서 안부 전화 네 번만 견디고 설날 가서 엄마아빠한테 다 불자고 결심했는데, 이제 세 번 남았다. 오늘의 산책처럼, 이번 설에는 엄마아빠에게 정정당당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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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9. 22:41

 

[완벽한 가족]과 [걸]을 예매하고 3시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섰다.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걸으면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서 참 좋은데, 들려주는 노래들도 좋지만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한 dj의 목소리와 그에 담긴 이야기들도 좋다. 오늘은 dj선곡으로 '결산 아닌 산'에 관한 노래들을 들려줬는데, <영상앨범 산>에 나온 소리라며 어떤 국악인의 목소리를 앞에 붙였고... 너무 웃겨서 들으며 걷다가 혼자 킥킥대며 즐거웠다. 나 나름, '유앤미블루' 학전 콘서트 갔던 사람인데ㅋ 이사하느라 짐 정리하다 보니 그때 나눠준 엽서도 있더라. 그냥 그렇더라고.

이어폰을 끼고 해저터널을 건너는데 어쩐 일로 "건너가면 바다가 보이냐", "터널 얼마나 더 가야하냐"고 묻는 이들이 두 팀이나 있었다. "건너가면 통영운하 바다가 보인다. 터널 끝까지 가는 데에 7분 정도 걸린다", "여기까지가 대략 80% 정도 온 거다"라고 답을 하면서 뭔가 통영사람 된 듯 기분이 좋아졌다. 통영산 지인이 일주일에 두어 번 걸어오는 전화, 엄마랑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통화, 어쩌다 지인의 안부 전화 말고는 말할 일이 없는 처지라 그것마저도 괜히 신이 나더라는 슬픈 이야기.

여객선터미널 즈음에서 방송이 끝났고, 바닷길에서 안길로 들어섰다. 이미 많이 지나다녔지만 그 얼굴 때문인지 멈춰서게 되는 '이중섭' 안내판을 지나 오늘은 백석 시인의 "오리 망아지 토끼"를 유심히 읽고(이 시 볼 때마다 너무 귀엽다.), 백석 시인이 [테스]를 번역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의 시들이 걸려 있는 골목에 테스 노래방이 있는 걸 다시 한 번 재밌어하며 길을 걸었다. 집에서 롯데시네마 통영점까지는 5.5km, 북신시장 근처부터는 처음 걷는 길이어서 기웃기웃 구경하는 마음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너무 많고 인적도 너무 뜸했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이 줌아울렛이라기에 남는 시간에 아이쇼핑이나 할까 했으나 1층에는 두꺼운 셔터가 철통처럼 내려와 있었다.

이 정도면 영화관 영업하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입구로 들어서니,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큰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고. 3층으로 올라가니 그렇게나 크게 환영할 만하다 싶게 사람이 없었다. 예상대로 두 영화 모두 극장을 독차지하고 봤으며, 영화는 두 편 모두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작년에 극장에서 본 첫 영화가 [차일드 인 타임]이었는데 그저 그랬어서 설날 본 [페인 앤 글로리]를 첫 영화로 쳤는데(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하니까.), 올해 첫 영화 [완벽한 가족]은 뭔가 엄청났고 [걸]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잔뜩 고무된 지금의 마음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줄이라도 기록을 하고 다음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싶을 지경.

암튼 두 편의 영화로 벅차오른 마음을 다독이며 여운을 달랠 사이도 없이 버스정류장으로. 통영은 안 그래도 뜸한 버스가 밤이 되면 더욱 뜸해지므로 일단 집 근처로 향하는, 먼저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 지도앱으로 노선 확인하니 봉평오거리를 지나길래 내려서 20분은 걸을 생각으로 충무교 지나며 여유롭게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안내방송에서는 다음 정류장이 미수해안로라고 해서 다리 건너자마자 급히 하차. 너무 추워서 집 앞까지 가는 기약 없는 버스 기다릴 용기는 안 나고 지도앱으로는 도보 25분 거리를 열심히 걸어 17분 만에 집으로 왔다. 덕분에 오늘의 걸음수는 11,767. 영화도 산책도 아주 성공적이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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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8. 23:39


역대급 한파가 전국에 휘몰아쳤다 하고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곳도 있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통영도 춥기는 춥다. 어제 취소한 영화를 오늘 보려고 했으나 마침 업체 직접배송이어서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었던 dvd 정리용 책장이 낮에 배송되었다. 영화는 내일로, 천지창조도 엿새 하고 하루 쉬었다는데 일주일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으니 오늘은 정리나 하며 쉴까? 생각하는 순간 한파 어쩌고 외출 자제 어쩌고 하는 중대본 문자가 날아왔다. 그럼 나가줘야지. 난 마스크도 잘 쓰고 통영은 어차피 길에 사람도 별로 없고, 코로나19며 건강은 알아서 조심해야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중대본 문자가, 딱히 중요한 정보를 담은 것도 아니고 그냥 분위기 환기용 전체문자로 날아오는 건 정말 별로다. 암튼, 그리하여(?) 오늘은 가벼운 동네 산책으로 결정. 마침 얼마 전에 검색하다가 알게 된 목공방이 집 가까이 있다기에 실물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아파트 뒤편의 좁은 차도변에는 앞길과 달리 생활감이 느껴지는 작은 가게들이 많다. 케이블카, 루지와도 가까운 편이어서 카페도 있고 바이크대여점도 있다. 십년 전 처음 통영에 왔을 때 케이블카를 탔었는데, 예전이기도 하지만 차로 가는 길과 걷는 길은 기억도 풍경도 많이 다르다. 집 근처를 걷다 보면 케이블카니 루지를 알리는 이정표들을 자주 만나지만 저 뒤 어딘가에 있겠지 생각할 뿐, 그런데 지도앱에서 검색한 목공방 주소를 따라 걸어가니 정말 가까운 곳에 다 있어서 좀 놀랐다. 

뒷길로 봉평동에 갈 때 우회전을 하면서 맞은 편의 휑한 공터와 뭔가 조야한 시설물(쏘뤼)은 뭘까 얼핏 생각하며 지나쳤었는데... 오늘 보니 그 맞은 편의 휑한 공터는 케이블카파크랜드라는 곳이었고 뭔가 조야한 시설물은 통영어드벤처타워라는 곳이었다. 케이블카파크랜드에서 가장 인공적이지 않은 곳은 가운데 자리한 동산, 짧은 데크계단을 오르면 둘레와 정상으로 이어지는 갈래길을 따라 거적산책로가 깔려 있다. 둘레를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데에 십분이 안 걸렸고, 정상에 놓인 벤치에 앉으면 케이블카와 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에는 케이블카 땅에는 루지구만' 생각하며 산책로를 걷다 보니 케이블카 탑승대 쪽 커다란 입간판에 정말 그렇게 써있어서 웃겼다. 가까이 지나가는 케이블카를 향해 손이라도 흔들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대부분 비어 있었다. 

한 시간쯤 산책하며 동산을 오르내리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안쪽으로는 루지와 어드벤처타워, 캠핑장 이용객을 위한 푸드코트 등의 편의시설이 있었고 주민용인 듯한 '도남 100세 건강길'도 조성되어 있었다. 100세를 꿈꾸지는 않지만 도남동 주민으로서(실은 20분 걸린다기에) 걸어보았으나 산기슭으로 진입하려니 무척 스산하고 인적 없는 해질녘이어서 후달려 돌아나왔다. 오늘은 30세도 채 못갔지만 언젠가 동행이 생기면 완주해보기로 하고, 문을 닫은 통영어드벤처타워 앞 벤치에서 파크랜드를 전세 낸 듯 풍경을 즐겼다. 바로 집 뒤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새삼스러웠고, 그 사이에 자리잡은 빵집이며 과일가게를 보며 단골까진 몰라도 가끔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공방이 궁금해 나선 길이었는데, 내가 사는 동네가 한결 가까워진 기분. 다른 날보다 짧았지만 8일차 산책을 마쳤고, 돌아와서는 대충 넣어뒀던 dvd장 정리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진짜 영화 보러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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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7. 22:23

 

롯데시네마는 별로 간 적이 없는데, 작년에 신도림 아르떼관에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러 갔다가(스티커 받으러 갔다가;;;) 자막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앞쪽 출입구로 누군가 들어와서 불을 확 켰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불쾌해서 더욱 염두에 없었다. 그런데 통영에 단 두 곳 있는 극장 중 cgv는 연말 리뉴얼이라더니 문을 열지 않고, 나머지 하나가 롯데시네마. 그래도 혹시 뭔가 볼 만한 걸 하는가 싶어 앱을 살펴보다가 [걸] [미스터 존스] [완벽한 가족]이 상영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 7시 반으로 [걸]을 예매하고, 느긋하게 2시간쯤 걸으면 되겠다 싶어 길을 나섰다. 서울은 폭설에 한파에 난리라고 들었고, 통영은 아침에 잠깐 진눈개비 같은 게 흩날렸고 평소보다는 추웠지만 그래도 영화 보러 갈 만은 한 날씨라고 생각했다. 

9월에 한 달 살 때, 영화 보다는 그냥 통영에 있는 영화관에 가보자는 마음으로 [오, 문희]를 봤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는 없었지만 어렸을 적 연극 [어머니] 초연 주인공이었던 나문희 배우의 연기를 펑펑 울며 보았었고 나문희 배우에 대한 호감이 있어서 한 선택이기도 했다. 평일이었고 낮이었고 cgv, 관객은 나 하나였고 발열체크도 티켓 확인도 없었다. 어쨌든 cgv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어서 그래도 통영에 cgv 있는 게 어디냐, 천지가 개벽해서 아트하우스관 하나 생기면 좋겠다는 되도 않은 생각을 했었다. 사실 지금도 한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평소보다 긴 산책에 시간도 많아서, 잘 가지 않던 길로 부러 돌아가다 보니 귀여운 물고기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작은 쌈지공원 같은 공터였는데 공간에 대한 설명은 찾지 못했고, 눈을 들어 보니 바로 뒤편에 교회 이름과 십자가. 아... 오병이어의 기적을 형상화한 건가? 암튼 물고기들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그러나 오병이어는 5전병과 2물고기였다는 깨달음과 함께, 귀여우면 됐지 뭐. 

조형물을 지나 운하 쪽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오늘 나는 영화를 혼자 보게 될 것인가 싶어 앱을 확인했는데 역시 나 말고는 예매자가 없다. 바닷가로 나오니 바람이 꽤 차갑고, 30분 이상 걸었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과연 영화관에서 자막 마지막의 제작사 로고가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청소하시는 분이나 관리하시는 분이 자막 올라가기 시작할 때 들어와서 불을 확 켜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오늘은 날이 많이 추운데, 나 하나 안 보면 그들 모두의 귀가시간이 좀 당겨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사실 춥기도 무지 추웠다. 

해저터널에 가서 생각해 보자, 포르투나 호텔 앞을 걷는데 역시 춥다. 주말 상영시간표를 확인하니 위의 세 영화가 모두 있다. 순간 결단을 내리고 예매를 취소했다. 예매가능좌석 89, 그러니까 오늘 이 영화는 상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바로 집으로 가기는 좀 아쉬워서 봉평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도 불을 밝히고 있는 내성적싸롱 호심을 지나 봄날의책방. 홀수를 좋아하고 7을 좋아해서, 실은 7일에 올해의 첫 영화를 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 뭐라고 해야지 싶었다. 내성적싸롱 호심에 가서 커피를 한 잔 할까 하고 지나며 봤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부담스러워. 봄날의책방에 가서 뭔가 의미 있는 책을 한 권 사야겠다. <세상에서 지켜진 아이들>이 있다면 좋겠다 싶었는데 없었고, 카운터 앞 매대에 놓인 신간이 있어 한 권 사왔다.  

통영에 내려온 후 잦은 전화로 마음을 써주는 통영산 지인은 자주 통영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영에 올 때면 서호시장 고향식당에 꼭 들러 시락국이 나오는 백반을 먹는 그와 함께, 이사한 다음 날 나도 그 밥을 먹었었다. 된장을 먹지 않는 내게 시락국은 음식일 수 없었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밑반찬과 벌써 이름을 까먹은 생선조림, 구수하고 뜨끈한 누룽지는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집밥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게는 집밥로망이라는 게 없고, 냉장고를 부탁하느라 며칠 연속으로 같은 음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람직한 식습관의 보유자이며, 미식이나 식도락과는 거리가 먼 다행스럽고도 싼 입맛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백미'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어쨌든 '통영'이 들어가 있는 책이라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동네서점 방문자의 예의도 갖추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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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4. 23:36

 

몇 년 전 충무교를 도보로 건넌 적이 있다. 걸어서 다리 건너는 걸 좋아하고 기회가 되면 한강이든 어디든 건너곤 했던 터라 별 생각없이 시작했는데, 차도와 인도 사이 난간이 없고 인도폭이 좁아서 길지 않은 다리인데도 꽤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3년 전 여름, 성산대교 남단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인 뒤 한동안 다리는커녕 긴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걸어서 다시 다리를 건너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이후 집 근처 오목교와 보행자신호등이 잘 되어 있는 양화대교, 보행자가 많은 마포대교 정도가 걸어서 건넌 다리다. 지난해 9월 통영에 한 달 살면서도 통영대교와 충무교를 건널 용기를 내지 못해 늘 해저터널을 통해 다녔다.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 것도 있는데, 예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고소공포가 상당히 심해졌다. 우도 비양도의 3미터도 채 안 될 봉수대를 오르다 중도에 포기했고, 작년 1월 속초에서는 등대전망대를 오르는 가파른 철제계단이 정말 공포스러웠다. 해저터널보다는 충무교나 통영대교를 건너고 싶지만, 여전히 혼자서는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괜히 오늘은 한 번? 싶은 마음에 산책 방향을 충무교 쪽으로 잡았고, 대건성당을 지나 자연스럽게 미수동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내려갔다.

통영대교가 한 눈에 들어왔다. 9월에 한 달 살았던 곳은 저 너머 인평동이다. 막막한 마음으로 싼 원룸을 예약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가 아직은 안 되는 탓에 바리바리 짐을 부치고 싸들고 찾아갔던 곳. 에어컨 고장으로 다음 날 방을 바꾸고 짐들을 옮기고 하느라 시작은 어수선했지만, 나름 한 달 잘 살면서 통영을 걷고 집을 구하고 했었다. 산책이나 외출을 할 때면 늘 통영대교 아래를 지났는데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 한 분이 같은 자리에 앉아 계셨다. 해질녘 통영대교 아래 해안로와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책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아니면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그 분만은 같은 옷을 입고 운하 반대편을 바라보고 계셔서 괜히 더 눈길이 갔던 것 같다. 말이라도 붙여볼까, 사탕이라도 건네볼까 어줍잖은 생각을 잘 참아 넘기고 마음의 인사만 곱씹고는 했는데... 통영대교를 가까이서 보니 그 분 생각이 났고,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자전거교육장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나오는데, 전에도 있었나 싶은 낙서가 눈에 띄었다. 통영에는 이런저런 벽화가 참 많은데, 그것은 벽화는 아니었고 낙서도 아니었다. 절규였다, "사랑한다"는 절규. 둘러쳐진 안전띠 때문에 더 처연해보였다. 그리고 제주해녀상, 처음 보고 신기해하며 제주 지인이 떠올라 오랜만에 연락했던 기억이 났다. 얼마 전 연락에 통영 이주를 알렸더니 통영에 갈 데 생겼다며 좋아했는데, 제주에 가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그를 여기서 만나면 참 반가울 것 같다. 우리집에서 lp로 노래 들으며 이야기 나눴던 추억이 있는데, 실은 좀 심심도 하다는 말에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라고 말해줬다. 내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고 말해주는 사람, 그는 내가 알고 믿는 좋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9월에는 어수선했던 충무교 아래 해안로도 잘 정비가 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김춘수유품기념관까지 바다를 보며 걷다 보면 재미있는 게 나온다. 마주칠 때마다 궁금하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하고, 뜬금없지만 이제는 없어진 합정역 '축지법과 비행술'이 떠오르기도 하는 'GUESS'집. 그 앞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인지 뭔지를 정리하고 계셨는데, 여기는 뭔가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냥 알아서 짐작들 하라고 붙여놓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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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4. 23:12

 

통영국제음악당을 지나 그 뒤편의 해안산책로를 따라 등대낚시공원 너머까지 처음 걸었던 게 지난해 9월이었다. 이사 온 후 처음 그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조선소는 문을 닫았지만 대부분의 건물과 부지는 그대로 방치된 채 남겨져 있어 담벼락 쪽이든 펜스 쪽이든 10분쯤 걸어 지나야 하는데, 그 길이 사실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오늘은 윤이상 추모지에 가서 인사해야지,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일요일임에도 이름이 무색하게 썰렁한 도남관광지의 해안길을 따라 걷는데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노래와 노래 사이,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볼륨을 줄였더니 누군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툴고도 애잔하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7년 전 어느 주말, 이직하는 사이 짧은 강릉 여행을 했었다. 금요일의 퇴사, 마지막 퇴근길은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일터로의 출근을 앞둔 일요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어렴풋하고도 아련하게 마음에 담은 누군가가 있었고, 강릉을 떠나기 전 들른 해변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마 그 사람을 생각했겠지. 터미널로 향하기 위해 문을 나서는데, 카페 통유리를 넘어오지 못했던 맞은 편 해변의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하의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도남관광지의 트럼펫은 2013년 6월 2일 오후, 강릉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 소리가 사라진 후 윤이상 추모지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제하의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을 오랜만에 찾아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정처없고 하염없는 마음이 되어 곽성삼의 노래를 집에 올 떄까지, 집에 와서도 이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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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4. 22:23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듣고 가벼운 산책에 나섰다. 예전 여행 왔을 때 봉평동에서 지금의 집 쪽으로 걸었던 기억이 있어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무작정 나가보았더니 통하는 길이 있었다. 올해 안에 내려와야지, 하는 마음이었던 5월 여행에서는 이전과 달리 동네와 집들을 기웃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때 봉평동에서 내려와 무작정 걷다가 마주친 3층짜리 'ㄷㅈ빌라'(좋아하는 선생님의 이름이랑 같다.)를 보며, 저기쯤은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내 집은 이미 정해졌지만 빌라 이름이 새겨진 그 건물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전, 막연히 통영행을 꿈꿀 적의 목적지는 산양읍이었다. 박경리 기념관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 소박한 산양도서관을 만났을 때 참 반가웠고, 부러 들어가 선생님의 책을 찾아보며(한 권 있었다.) 괜히 기뻤다. 또 한참을 걸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이 고즈넉한 당포성지에 닿았을 때 느꼈던 시원함과 평안함도 마음에 들었다. 산양읍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계획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면서는 정말 시골마을인 데다 차도 없는 내게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통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강구안 뒷골목이다. 사이의 "태평양을 등지고"에 나오는 '호주머니 속 바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은 바다와 마주한 오래된 골목. 차도 쪽은 온통 충무김밥집이지만 뒤편에는 구석구석 백석의 시가 적힌 판넬들이 있어 마음이 일렁였다. 처음 발견한 이후 한 번씩 올 때마다 흐릿해진 기억을 대조하며 시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는 게 의례가 되었다. 트루베르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으며 골목 골목의 시들을 읽다 보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나름의 인사를 전하려고 먼저 찾아가는 "통영2" 시비와도 멀지 않았다. 언제든 강구안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면 참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충렬사와 서피랑이 있는 -란이라는 처녀가 살기도 했던- 명정동쯤은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나중의 일. 

지금의 집에서는 봉평동이 멀지 않다.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 내성적카페 호심 그리고 아직은 가보지 못한 식당과 카페 들이 많이 있는 곳. 부러 용화사로 이어지는 메인스트리트가 아닌 옆 길로 올라갔더니 새로운 풍경들이었고, 새해 첫날의 봉평동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지만 내성적카페 호심은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내성적인 나는 차마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봉평오거리로 향하는 길 오른 편의 통영도서관 역시, 공휴일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도 휴관 중인 것 같았다. 집을 정한 후 일상이 안정되면, <토지>를 빌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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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1. 1. 3. 23:54

 


어떤 이의 글을 이어 읽다가, 나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오래 그리던 통영으로 이사를 왔다. 12월 5일부터 3주간은 처리해야 할 이런저런 일들과 집안일도 있어 안산의 지인집에 머물렀고, 12월 28일 통영시민이 되었다. 7년 만의 이사와 정리는 적잖이 많은 일거리를 남겼고, 어지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할 일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나는 자꾸만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사 후 집을 떠나 있었던 시간을 빼도 통영에서의 시간이 3주 이상인데 그 사이 내가 집에서 한 일이라고는 <티보가의 사람들>을 4권 후반까지 다시 읽은 것과 <지붕 뚫고 하이킥>을 126회까지 다시 본 것. 그 외에는 매일 먹고 자고 담배 피우고 라디오 듣고 멍 때리고 집 정리하고 휴대폰 들여다 보고, 이따금 처리해야 할 일을 위해 외출하는 정도가 다였다.

이사하고 짐과 집을 정리하면서 라디오를 다시 만났다. 어렸을 때 정말로 라디오를 좋아했다. 국민학교 졸업 선물로 엄마가 사준 빨간 라디오가 시작이었다. mbc나 kbs에서 김희애나 박중훈이 dj를 하던 밤의 프로그램들을 주로 들었고, 중학교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 주파수를 돌리다가 우연히 김창완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게 됐는데 cbs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직도 책장에 꽂혀 있는, 이후 책으로 묶여나온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시한부 암환자 민초희 언니의 사연이 이따금 소개되고 dj도 청취자들도 같은 응원의 마음이었을 그 방송은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후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 김광석 아저씨가 진행하는 bbs <밤의 창가에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유희열의 음악도시>, <김장훈의 우리들>, <김영하의 책하고 놀자> 등은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라디오를 듣지 않고 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2002년 이후 완전히 잊고 지냈다.

tv 연결을 하지 않으니 적막한 집, 짐 정리를 하는 와중에 cd나 lp를 골라 음악을 들을 여유는 없고 반복되는 휴대폰의 플레이리스트가 아무 의미 없이 들리던 순간 라디오를 떠올렸다. 김창완 아저씨가 어딘가에서 dj를 하고 있지 않을까? sbs 주파수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고릴라앱을 깔았고, 순전히 김창완 아저씨 덕분에 대략 9시 이전에는 일어나 오프닝부터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날이 시작됐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가 끝나면 <박하선의 씨네타운>, 그 다음엔 주파수를 돌려 <윤고은의 ebs 북카페>,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 밤 10시 이후에는 가끔 <정형석의 밤의 라디오>를 듣는다. 그런 패턴으로 라디오를 듣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려 7시간을 라디오에 매여 있는 꼴이 되는 것 같아 요즘엔 11시부터 2시까지는 가끔 패스하기도 한다.

이사 전 몇 번의 여행에서 어디를 가든 가까이에, 눈 앞에 바다가 있는 통영 걷기가 참 좋았지만 이제 살게 됐다고 생각하니 절실한 느낌이 없어졌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바다가 보이고, 비록 방범창살이 시야를 가리지만 작은 방 창문 너머에도 바다가 있으니 종일 11층을 벗어나지 않는 날이 많았다. 게다가 참 좋은 라디오까지 다시 만났으니, 그 핑계로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뭉개는 시간이 더 편안해졌다. 

새해를 앞두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늘 실전보다는 준비에 공을 들이고, 어쩌면 그렇게 '진짜'를 유예하는 습관이 일상 자체가 되어버린 걸 언제까지고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 첫날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이 끝나고 찾아온 적막의 시간. 이제 뭘할까 잠시 멍 때리다가 문득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소와 달리 망설임 대신 대충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물론 1월 1일이었기에 가능했던 외출이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까지, 고작 3일이고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산책을 계속하고 있다. 매일 이어가고 싶은 일이고, 좀은 충동적으로 카테고리를 만들었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라도 '매일 쓰기'까지 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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