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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6.23 유체이탈 판단중지
  2. 2022.06.18 홀가분
  3. 2022.06.17 신세계
  4. 2022.06.16 덕담들
  5. 2022.05.06 막차 숙제, <테이크 유어 타임>과 <바다·그 영원한 빛>
  6. 2022.04.20 하나씩 사라진다
  7. 2022.04.14 처음
  8. 2022.04.14 이사 욕구
  9. 2022.04.06 봄봄
  10. 2022.04.03 지휘자의 앞모습
산책일기2022. 6. 23. 22:38



월요일에 도착한 차로 화요일부터 도로연수를 시작했다. 내 차가 생기고 도로연수를 앞두고도 운전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내일 마지막 도로연수를 앞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오래 전 면허 취득 후 몇 년 장롱이다가 일하던 공부방 차를 운전하던 동료가 그만두게 되어 함께 차를 몰고 나간 적이 있었다. 안양 석수동 어딘가의 넓은 도로였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첫 운전이 의외로 나쁘지 않아 신기했고 동료도 생각보다 잘한다며 할 수 있겠다고 용기를 줬다. 하지만 국도처럼 뻗은 길을 마냥 직진할 수 없어 돌아가기 위해 들어선 시골길에서 차가 도랑에 빠졌고 견인차를 불러야 했다. 면허 딸 때도 도로주행에서 한 번 떨어지고 연습 한 번 해보자는 아빠의 말에, 아빠차에 엄빠를 태우고 당시 주행시험 코스로 나간 적이 있었다. 양재동 트럭터미널을 돌아서 교육문화회관 앞길을 지난 후 내리막길에서, 맞은 편 굴다리에서 나오던 차와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면하며 급제동을 했다.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또르르, 아빠는 됐다고 시험 떨어져도 된다고 하셨고,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게 집까지 갔었다. 오래 전임에도 선명한 두 번의 기억으로 운전은 나와 무관한 일로 생각하며 살다가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며 더욱 확실해졌는데, 역시 장담할 일은 없는 모양이다.

 

월요일 밤에 나름 매뉴얼을 읽어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연수 첫날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강사의 연락을 받고는 허겁지겁 차키도 안 가지고 내려간 것으로 자기소개를 한 셈이 됐다. 무면허라고 생각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차에 올라 기본적인 기능 조작 설명을 듣고, 강사의 윙브레이크만 믿고 시키는 대로 트라이애슬론 광장 주차장까지 갔다. 나의 조작에 차가 움직이는 게 신기했지만, 주차장에서 선을 따라 도는 연습은 내맘처럼 되지 않았다. 한 시간쯤 하다가 정신도 없고 허기도 져서 잠시 쉬었는데, 강사는 바로 나가보자며 산양읍의 경사지고 구불한 도로로 이끌었고 아직 살아있는 건 강사의 윙브레이크 덕분이다. 차가 별로 없을 만한 코스를 택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지난 토요일에 왔었던 박경리 기념관과 산양스포츠파크 앞까지의 산길은 좌절을 안겨주는 경로였다. 왜인지 강사가 택한 코스는 다음 날도 산양읍이었고, 당황스러움은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집으로 돌아올 때의 코스는 미수동까지 새로 난 넓은 길이어서 꼬불꼬불한 산길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강사는 여전히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지적을 잊지 않았다.

 

오늘은 3일차, 이틀 동안 통영 도로 위의 차들에게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친 게 죄송해서 차 뒤에 "초보 연수 중, 죄송합니다..." 써붙였다. 산양읍 대신 시내로 나갔고 국도로 고성으로 넘어갔는데, 속도를 내는 게 어렵기도 했고 이래저래 실수가 잦았지만 다른 운전자들의 인류애 덕을 보았고 첫 셀프 주유도 (강사가) 했다. 강사의 윙브레이크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알지만, 어쨌든 내가 운전을 하고 왔는데도 내가 했다고 느껴지지 않으니 이 초월감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운전하는 걸 생각하면 뭔가 아찔하고 현실감이 떨어지지만 막상 운전석에 앉으면 생각보다 긴장이 되지는 않는데, 유체이탈 상태였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강사의 지시에 따라 운전하다가 윙브레이크에 힘입어 위기를 모면하는 반복, 나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판단중지 상태에 가깝다고도 느꼈다. 의외로 긴장되지 않는다는 느낌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마음이 허세를 부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유체이탈 판단중지를 거치며 왜곡된 인식은 약간의 정신승리에 이른다.

 

강사의 코멘트는 다소 양가적인데, 대체로 하루하루 나아진다고 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다다다 쏘아대는 지적질이 과해서 귀에 피가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예요."라고 사흘간 열 번은 말한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은 예상보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순전히 나의 운전에 대한 기대수준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의 운전'은 여전히 초현실적인 순간으로 느껴지고, 연수는 내일이 마지막이고 그다음부터는 혼자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악몽같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도로 정중앙을 자주 벗어나고 페달감 없고 핸들링 타이밍도 잘 못 맞추는 자로서, 운전은 어지간하면 나아진다는 보편성을 믿어봐도 되려나? 그럴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큰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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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6. 18. 22:42

 

 

갑자기 매일 바쁜 이번 주, 오늘은 석 달 넘게 열네 번으로 진행된 '통영을 빛낸 문화예술인을 만나다' 마지막 시간이었다. 지난 주 화요일 박경리, 서우승 작가에 대한 도서관 강의에 이어 오늘 오후 야소골 서우승 시비와 박경리 기념관, 묘소를 답사하고 간단한 수료식으로 마무리됐다.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강의를 발견했을 때 반색하며 신청했고, 다루는 모든 인물에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통영이 좋아 시민이 된 자로서 한 번은 듣고 가보고 가급적 관련 책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관련 책은 절반쯤만 읽은 것 같은데, 인지도와 위상이 곧 매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은 중반쯤부터는 강의날이 다가올 때마다 갈까말까 내적 갈등이 커져갔는데, 어쨌든 마지막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한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오랜만에 간헐적이지만 주기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한 시간들이었다.

 

산양스포츠파크 근처라는 야소골 서우승 시비와 박경리 기념관은 택시를 타면 금방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고, 몇 달 전 집 근처 케이블카파크랜드 쪽에서 박경리 기념관까지 임도가 개통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혼자 걸어가기에는 막막해 버스를 탔다. 지도앱으로도 버스정류장 전광판에서도 실시간 버스 도착 알림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통영의 현실이므로(도대체 왜?), 지도앱으로 대략 검색하고 여유롭게 나갔더니 한 시간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날은 덥고 산양스포츠파크는 휴무라 애매해서, 두 정거장 전에 지나온 꿈이랑 도서관에 가봤다. 예전에 여행하며 들렀을 때는 산양도서관이었던, 선생님의 책도 한 권 있어서 반가웠던 곳이었는데 작년엔가 리모델링해 어린이미각도서관인가로 바뀌었다는 소식만 들었었다. 길게 머물 수 없어 대충 둘러봤는데 시원한 바다 같은 바닥이 마음에 들었고,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꾸며진 아기자기한 내부도 귀여웠다.

 

서우승의 "물소리" 시비 앞에서 야소골 마을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분의 차를 얻어타고 박경리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기념관 앞에서 작가의 묘소와 기념관이 조성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자로 처음 기념관과 묘소를 찾았을 때 바로 인접한 양지펜션의 존재가 궁금했었는데, 작가가 생전 마지막으로 통영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곳이었고 농원과 펜션을 운영하시던 정창훈 변호사라는 분이 2005년 작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통영으로 장지가 정해지자 자신이 훗날 묻히려던 양지바른 땅을 작가의 묘소로 기부했다고 한다. 이후 장소 선정에 난항을 겪은 박경리 기념관은 그가 호텔 부지로 계획 중이던 지금의 땅을 시에 내주어 세워질 수 있었고, 2012년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묘는 박경리 작가의 묘소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통영에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처음 알게 된 자로서 감동적이기도 하고 대단한 일이다 싶었는데, 기념관이나 펜션 어디에도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건 아쉽게 느껴졌다. 열네 번의 강의를 들으며 열혈 강사님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의 박경리 기념관과 묘소가 가능할 수 있었던 고 정창훈 님의 결정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만큼은 공감이 됐다.

 

후반으로 갈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보다 모든 사연에 '나'가 너무 많고 감탄도 한탄도 과한 데다 청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스스로에 도취되어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감정노동의 괴로움이 커져갔다. 스무 명쯤의 수강 인원 중 절반 이상 강사와 혹은 서로 기존의 인연이나 친분이 있는 분위기였는데, 그렇지 않은 듯한 몇몇은 초반 이후 스승의날 주간을 기점으로 사라졌고 마지막까지 남은 수강자들의 강의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에 나는 때로 아연해졌다. 강의 때마다 이물감과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반색하며 신청할 때는 예상할 수 없었던 지난한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오늘로 끝났다. 시원시원 홀가분, 그래도 덕분에 이런 시간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어떤 이야기들 그리고 마주치면 인사 나눴던 분들이 있었고 따뜻한 눈빛이나 표정 덕분에 잠시나마 마음이 순해지는 순간이 있었다는 건 고맙게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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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6. 17. 20:56



근래 갑작스러운 분주함의 정점은 오늘, 중고차를 사러 다녀온 부산행이다. 이십 년 묵은 장롱면허자로서 몇 년 전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우회전하는 코란도에게 사고를 당한 후 남은 생을 장롱면허자로 살아갈 것이 더욱 자명해졌는데, 7월 1일(나의 사랑하는 백석 시인이 세상에 온 날이자, 마지막 일터를 그만둔 지 딱 2년이 되는 날이다.)을 디데이로 정한 연초의 결심이 완연한 미션 임파서블로 화함과 동시에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수 생활 2년 내내 유유자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간이 갈수록 무기력은 커져가고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로 한정된 통영에서의 나의 세계가 딱 그만큼으로 오그라든 느낌이기도 했다. 오그라든 세계에서 웅크린 일상이 나 역시 기껍지는 않았으므로,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운전에 생각이 미쳤고 좀처럼 도전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자극이 필요하다는 이상한 오기도 동반됐다.

 

운전도 차도 아는 바 없고 돈도 없으므로 당연히 중고경차를 생각했고 몇 년 전 중고경차를 구입해 몰고 다니는 부산 지인에게 상담을 청해 함께 중고차 보러 갈 날을 잡았다. 그게 한 달쯤 전이었고, 그 사이 중고차앱 몇 개를 생각날 때마다 살펴보며 모르는 중에도 보험이력 없고 연식 너무 오래지 않고 주인 많이 바뀌지 않았으며 가급적 저렴한 차를 중심으로 살펴보며(별로 없었다ㅠ) 대강의 시세를 익혔다. 어제 최종적으로 앱에 올라와 있는 몇 대의 차를 찜해서 지인에게 공유하고 터미널에서 가까운 사상구청 주변 중고차 단지로 향했는데, 몇 가지 조건에 집중하느라 그 차가 밴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음을 전화 문의로 깨달았다. 잘 응대해주셔서 근처에 온 김에 다른 차를 볼 수 있는지 여쭙고 단지로 갔는데, 그분은 통화할 때보다 더욱 친절하고 편안한 눈높이 설명으로 나와 지인을 사로잡았고 원하는 조건에 맞는 오늘 등록됐다는 차를 보여주셨다. 내친 김에 지인이 운전하고 그분이 동승해 시승을 잠시 해보고, 그래도 첫 방문에 결정하기엔 섣부른 것 같아 망설이는 눈치를 채셨는지 편하게 다른 곳도 둘러보고 오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서비스 노동자의 (내 입장에서는 이유 없는) 불친절은 좋아하지 않지만 팔할은 감정노동일 과한 친절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오해일 수도 있지만 이분은 사근사근한 태도가 몸에 배인 듯한 느낌이었고 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손님에게 수준과 필요에 맞는 설명을 해주시는 센스도 감동적이었다. 차에 대해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십여 년 전부터 운전자였던 지인 역시 이분의 설명과 태도에 신뢰를 느꼈다고 했는데, 사실 난 그 정도가 아니라 외롭고 서러운 사람에게 사상역에 중고차 보러 가라고 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려나, 오늘 둘러보고 홈서비스 신청까지 하기로 했기 때문에 지인의 차를 타고 사하중고차 매매단지로 향했고 찜해둔 차와 더불어 현장에 있는 경차들을 몇 대 보았다. 들른 매매단지는 두 군데였지만 예닐곱 대의 차를 보고 나니 여러 조건들의 결합으로 형성된 시세에 대해 좀은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고, 이외의 찜했던 차들을 굳이 보러 갈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됐다. 결국 처음에 방문했던 곳에서 오늘 등록됐다는 차를 사기로 결정하고, 그분께 전화를 드렸다.

 

처음에 볼 때 마음에 들어하는 기색을 느끼셨는지 앱에 등록된 가격보다 조금 싸게 해주시겠다고 했었는데, 그 가격 자체도 내가 결정한 예산을 초과한 것이기는 했다. 흥정 같은 거 못하는 편이라 깎아달라고 할 엄두는 못 냈지만 가격이 부담은 되어서 그 가격으로 홈서비스까지 해주시면 안 되는지 좀 불쌍하게 여쭤봤더니 그렇게 해주셨다. 날씨가 너무 더웠고 야외에서 성의껏 설명해주신 게 고마워서 사들고 간 커피 덕분도 조금은 있을 것 같다. 암튼 생각보다 깔끔하고 명쾌하게, 보험이력 없고 주인 한 번 바뀌었다는 중고경차를 편안하고 흔쾌한 마음으로 구입했다. 사무실에서 계약하고 난생처음 가입하는 자동차보험료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지만 오늘은 어차피 돈 쓰는 날, 운 좋게 만난 친절한 담당자님 덕분에 거래가 만족스러웠다. 차는 다음 주 월요일에 도착할 예정이고,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문 도로연수를 신청했다. 운전하기로 결심하고 불안해서 운전공포증도 검색해보고 별 상상을 다했었지만... 비행기도 아니고 우주선도 아니고, 별의별 사람 다 하는 건데 생각하며 나도 한 번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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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6. 16. 16:47

 



갑작스러운 제안과 즉흥적인 결정 후 시간이 참 잘 간다. 영등포 시절 또 통영으로 이사한 후 타인과의 짧은 동거를 한 적 있는데 별 일은 없었지만 내심 편치 않았고, 20년을 혼자 살아오며 갈수록 내맘대로가 진해지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적지 않다. 그러나 결정을 내렸고 일단 1년은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훈련이라 생각하며 버텨보려 애쓰는 중이다. 와중에 2월의 과유불급과 어떤 예감 이후 3월부터 어긋난 관계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ㄲ-ㅌ을 그리고 있고, 진의를 알 수 없는 체크성 연락에 오히려 그 ㄲ-ㅌ이 내게는 꽤 진심이라고 느끼면서, 각별했던 10년 세월이 남긴 게 인연의 허무함뿐이라는 걸 차분히 절감하고 있다. 각별함은 때로 필요하지만 그 어떤 별난 관계도 '나'보다 중요하거나 '나'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나 그러한 것인지 이기적인 내게만 당위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려나, 2년 가까운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갑자기 분주해진 일상만큼이나 마음속도 부산하고 혼란스러운 날들이었다.

 

그러한 중에 어제는 활동하던 시절 나를 나름 각별히(은근히 범용 표현) 생각해주던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어떤 활동에 집중하던 시기 그 공동체의 성원으로 만났고 활동이 일단락된 후에는 띄엄띄엄 마주쳤지만 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락을 하거나 우연한 만남을 조금 짙은 시간으로 만들고는 했었다. 단체를 그만두고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통영에 내려오는 몇 달을 거치면서 사람들에게 굳이 따로 알리지는 않았는데,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 전화를 몇 차례 해줬던 사람이기도 하다. 어제 그는 누군가에게 책방 이야기를 들었다며 잘 지내는지 물었고,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고 공식적으로 책방을 내는 건 연말이나 될 것 같다고 답하자 "OO아, 좋은 일이든 아닌 일이든 상의할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말했다. 실제로 뭔가 상의하며 전화할 일은 없을 테지만 알겠다고, 고맙다고 답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정말로 고마웠고 조금 울컥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장차 책방이 되고 싶은 공간에 짐을 나르고 대충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생처음 길거리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일하시느냐 물으며 건너 편 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다가온 아저씨가 내민 종이에 쓰인 여러 단어 중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야쿠르트'. 갑작스러운 일이라 좀 당황해서 "저 가게하기로 했는데요..." 대답했더니 환하게 웃으시며 "번창하시길 바랄게요." 하고 아저씨는 사라지셨다. 야쿠르트 요원을 거리에서 곧잘 마주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아저씨가 워낙 급하셨나 생각하다가, 문득 내 옷을 보니 상의가 야쿠르트 색깔이어서 혼자 웃었다. 본인 사정으로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이지만, 마침 작은 이사를 마친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터라 괜히 마음이 환해지기도 했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일 뿐이지만, 영향력 진정성 휘발성 같은 거랑 무관하게 흔쾌한 일이다. 어제오늘, 두 사람의 덕담을 당분간은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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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5. 6. 21:10

 

 


이른 봄부터 거리에 날리기 시작한 배너들을 오래 마주쳤고, 통영국제음악당에 공연을 보러 오가면서 주제관을 몇 번 지나쳤다. 브로셔와 홈페이지를 살피며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방대한 규모에 괜히 위축되기도 했지만, 장기간 진행되고 전시관도 여러 곳이니 아예 52일권을 사서 찬찬히 돌아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현대미술이나 융복합 예술 같은 데에 관심도 없고 무지해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과 우려가 컸지만 그래도 통영에서 하는데 싶어 염두에 둔 거였는데, 가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정보를 찾아볼수록 부담스러워졌다. 

돌아서면 까먹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내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버리지 못한 전작주의 강박도 큰 이유였고, 주제전만으로 범위를 좁혔음에도 7층이나 되는 전시장과 30명 이상 작가의 80여 점 작품 규모라는 점을 떠올릴 때마다 동반되는 망설임과 어리석음과 욕심 속에 4월을 흘려보냈다. 어린이날까지도 갈등하다 지나간 후, 이 정도로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안 가는 게 맞지 않을까와 그랬다가 다음 주가 되면 후회하지 않을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너댓 개나 찾아본 후 집을 나섰다. 

 

 

 

 

 

유튜브에서 큐레이터들의 설명과 도슨트 영상 등을 찾아봤지만 그래도 실제로 보면서 듣는 건 다를 것 같아서, 2시 도슨트 투어를 신청하고 70분 정도를 먼저 둘러보았다. 신아SB조선소 연구동을 리모델링해 재생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제전 <테이크 유어 타임>은 “과거로부터 얻어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설계한다.”고 표방한다. “예술의 목적은 순간적으로 아드레날린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다. 경이로움과 평온함의 점진적, 평생의 건설이다.” 글렌 굴드의 말이 전시관 1층에도 홈페이지에도 발문처럼 붙어 있는데, 멋진 말이지만 그가 온 삶을 예술에 걸고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고립된 생애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층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문구는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지금 하고 있는 그것이 당신의 실체이다.", 승산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시작부터 크게 뼈를 맞았다. 이동하는 계단에는 "반향"이라는 미디어아트 작품이 연속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트리엔날레 큐레이터인 다니엘 카펠리앙이 현각스님의 만트라 암송을 촬영해 작업한 것이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명상에 잠기는 경험을 의도했다는데 가능한 차원인지 잘 모르겠다. 이름만은 익숙한 강요배, 임옥상 작가의 작품, 이름도 이력도 모르지만 직관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몇몇 작품이 있었고, 적지 않은 미디어아트 작품은 짧게는 5분 내외 보통은 10분 이상의 길이인 데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연속되고 순환되는 느낌이어서 시간을 생각하며 주마간산할 수밖에 없었다.  

도슨트 덕분에 각 층마다 시간, 자연, 미래 등의 테마가 있다는 사실과 소소하지만 새로운 몇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7층까지를 40분에 소화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그 역시 주마간산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관심이 가는 작품은 해설을 열심히 읽었는데 해설 패널 위치가 너무 어두워 쉽지 않았고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장기 전시의 끝물이라선지 관람객이 적지 않았고 은근 연휴 기간이라선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도 있었는데 아이들은 귀엽지만 전시에 집중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했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연출된 음악의 큰 볼륨이 오히려 거슬리기도 했고 미디어아트 작품이 많다 보니 겹치는 소음 같은 것들도 있어 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경이로움과 평온함의 점진적, 평생의 건설'의 한 조각으로 삼기에도 내게는 전체적으로 별 감흥이 없었고, 끝나기 전에 봤다는 것이 의미라면 의미로 남을 것 같다. 


그럼에도 <바다·그 영원한 빛>을 보러 간 것은 통영에 샤갈과 피카소의 그림이 와 있다니 한 번 봐야지 싶은 단순한 마음이었다. 덕분에 전혁림 미술관에 꽤 오랜만에 가게 됐고, 갔었다는 기억만 남은 어릴 적 63빌딩에서의 전시 이후 다시 피카소의 그림을 만났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봤는데 사실 사진을 찍은들 얼마나 기억할 것인가. 샤갈의 "꽃다발"이라는 그림이 1973년작이라고 되어 있는 게 신기해서 찾아보니 그는 1887년에 태어나 1985년에 세상을 떠난 거의 동시대의 작가였다. 100점이 넘는 미술 작품을 접한 오늘의 가장 큰 발견이자 다소 충격적인 확인이었는데, 1990년대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카페에 드나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마침 톡을 나누던 사촌에게 전했더니 함께 놀래줘서 고마웠다. 

2층에는 전에는 본 적 없는 대형 초상화가 있어 이채로웠고 몇 번 봤다고 흔히 여길 것은 아니지만, 아무려나 통틀어 열 번은 와봤을 것이므로 잠깐 둘러보고 3층으로 향했다. 일곱 작가의 작품들이 한 점씩 있었는데,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라는 제목이 붙은 강렬한 추상화가 눈길을 끌었고 "Self-Portrait"라는 짧은 미디어아트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조금 큰 크기와 적당한 높이로 설치되었다면 작가의 자화상이 떨어져내린 후 관객이 마주하는 자화상이 좀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1999년작이라니 한참 전이군 싶으면서도 피상적이나마 현대미술의 흥미로움을 잠시 경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예술은 무엇이고 현대미술은 무엇이고 융복합은 무엇이고, 이 모든 것은 또 무엇일까. 문외한이기 때문이지만, 사진과 영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기록과 교육과 재현과 표현과 기타 등등의 실용적이거나 비실용적이거나 한 여러 기능을 담당했던 미술 장르 중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작가와 작품과 이야기들이 내게는 그나마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끄는 부분이라선지 참 어렵다. 물론 미디어가 발전을 거듭하고 첨단의 첨단을 구가해도 인간의 표현 의지와 욕구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 미술도 예술도 존재하는 거겠지만, 해설이 없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고 유추하는 재미도 별로 느낄 수 없는 작품들을 숙제처럼 연이어 마주하는 경험이 회의적으로 느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거대하고 방대한 스케일을 힘들어하는 성정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하여 오늘의 전시들은 막차를 놓치지 않고 숙제를 했다는 의의로 남겨진다. 이번 트리엔날레는 이후의 이벤트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농부의 마음으로 준비했다는 큐레이터의 말이 기억나고, 지금 통영에서 트리엔날레의 시작은 '지역의 밥'과 예술을 긴밀히 연결한 꽤 간절한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올해 뿌린 씨앗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3년 후의 나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 혹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에 갑자기 생각이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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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2. 4. 20. 21:21



영 별로인 게스트가 아니라면 <옥탑방의 문제아들>을 곧잘 챙겨봤었다. 편성이 바뀌면서 엠씨 일부가 바뀌었대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지금 보고 있는데, 와...... 새로 온 엠씨 말 너무 많고 비호감이어서 봐줄 수가 없다. 프로그램은 새엠씨의 말많음을 웃음포인트로 삼은 걸까, 하나도 웃기지 않고 자기 말만 끝없이 하는 거 보기 불편하기만 한데.

 

미디어의 동시간성이라는 게 이제 거의 의미 없는 것 같지만, 텔레비전이 가장 유력한 미디어인 시대를 쭉 살아왔다 보니 갖는 의미 같은 게 여전히 있다고 느낀다. 혼자 살면서 텔레비전이 없을 때도 있었고, 있어도 유선 연결을 하지 않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7년 동안 살았던 영등포집은 유선 연결을 하지 않아도 지상파 4개 방송이 나왔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하는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틀어놓을 때도 많았다.

 

지금 집에서는 hdmi 케이블로 가끔 보는데, 사실 볼 게 몇 개 없다. 즐겨보던 프로그램의 컬러가 이상하게 변해서 도저히 볼 수 없게 된 경우도, 좋아하던 프로그램의 엠씨 중 하나가 바뀌었는데 소화불량이어서 낭패스러운 기분으로 안 보게 된 경우도, 잘 보고 있었는데 시즌 종영으로 아쉬운 경우도 있었다.

 

세대적 이유인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어쨌든 약간, 아직은 동시대 동시간의 호흡 같은 느낌이 남아 있는데...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개는 유쾌하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소란스럽고 유난스러운 연예인들의, 차마 봐주기 힘든 오버가 경쟁적인 클리셰처럼 창궐하는 예능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다. <아무튼 출근> 좋아했었는데 종영 때 시즌2로 돌아온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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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2. 4. 14. 01:07



기분을 다운시키는 건 날아든 쓰레기만이 아니지만, 와중에 잠시 마음이 환해지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지난해 봄이었으니 벌써 1년을 함께한 살아남은 식물들, 마르고 시들면서도 용케 살고 있는 아이들 중 바질이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불안해보였던 율마와 테이블야자도 초록빛을 되찾는 중이고 길게 자란 부분들이 갈색으로 변하던 아이비의 새 잎들은 건강한 초록빛이다. 마침 얼마 전 읽은 [지구 끝의 온실]에서 작가의 아버지는 ‘식물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다던데, 어제오늘 우리집의 식물들은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이 한껏 침잠한 마음에 반짝 기쁨이 되어 주었다. 작년에 식물 글책모임을 하면서 매번 난감하고 어색했던 게 식물에 대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 거리가 아주 조금은 줄어든 기분이다. 사람처럼 눈치 없지도 돌변하지도 침범하지도 않는 나의 식물들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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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2. 4. 14. 00:43



종일 바람이 거셌다. 오후에 집에 들어오는데 복도에 옆 집이 평소 현관문 옆 기둥에 매어놓는 커다란 재활용쓰레기 비닐의 매듭이 풀렸는지 널부러져 있고 페트병 따위가 우리집 앞까지 굴러와 있었다. 아무도 없나 싶어 비닐에 담아 세워 두었다. 바람 많은 날이니 귀가하며 확인하면 집 안으로 들여 놓겠지 생각했다. 거실에서 책을 읽는데 또 넘어졌는지 바람에 비닐 마찰되는 소리, 페트병 구르는 소리 같은 것들이 계속 들렸다. 실내가 조용해서 안에까지 들리는 건가, 신경 쓰였지만 무시했는데 잠자기 전 문단속하며 현관문을 열어 보니 우리집 앞으로 다 쓸려와 있다. 옆 집이 복도에 커다란 비닐 묶어두고 내놓은 재활용쓰레기가 날아온 건 처음이 아니다. 야심한 시각이니 이미 잠에 들어 모를 수도 있지만, 저녁에 분명 봤을 텐데 강한 바람이 계속되는 날에는 집안에 들여 놓는 게 상식 아닌가? 잊을 만하면 재활용쓰레기들을 날리던 반대편 끝 집에 새로 이사 온 이들 역시 뭔가 많이 쌓아두고 있지만 얼마 전 한 번 복도에 휘날린 뒤 나름 단속을 하는 것 같은데, 오늘이 지나면 옆 집도 방법을 바꿀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반복될 때마다 짜증스럽고, 바람 잦은 동네의 샷시 없는 복도식 아파트에 살면서 뭔가를 밖에 일상적으로 내놓는 옆 집도 끝 집도 이해가 안 된다. 기본적으로 잠재적 민폐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때로 적극적 민폐다. 이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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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4. 6. 20:46



통영국제음악제와 도서관 강의 덕분에 벚꽃을 만끽하는 날들이다. 어제와 오늘은 오전과 오후에 각기 다른 강의가 있어 이틀동안 네 번이나 도서관을 왕복하느라 온몸으로 봄을 실감했다. 오후 강의가 끝난 후 지난해엔 보지 못했던 봉숫골 벚꽃을 느껴보려고 용화사 입구까지 산책을 했는데, 시간대가 그러했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반 단위로 나타났다.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들도 있었고 신호가 멈추고 차량 통행이 없을 때는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다(기분 좋은 풍경이라 멀찍이서 사진 한 장 찍었는데 누군가에게 실례가 될 일은 아니기를-). 통영의 어떤 학생들에게 봄 벚꽃길의 단체 사진은 학창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겨지는가, 낭만적인 박제다 싶다. 오전 강의를 듣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스무 명이 될까 싶은 유치원 어린이들이 두 명의 교사들과 함께 산책 나온 모습을 보며 마음이 괜히 흐뭇해졌었는데, 오후에 만난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 역시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줬다. 잘 나가지도 않지만 일이 있어 나갈 때에도 주말이 아니면 거리에서 활력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겠지. 집으로 돌아오니 바람에 날려 옷에 붙었던 벚꽃잎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 함께 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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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4. 3. 22:00

 

 

통영국제음악당 합창석 첫 경험, 지난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 공연 때는 대전시립합창단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자리했던 곳에 앉게 되었다. 일찌감치 매진되었다가 티켓 추가 오픈 문자를 받고 잠시 고민하다 예매했는데, 지휘자(마르쿠스 슈텐츠였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이기도 하다고)를 정면으로 보며 유려한 움직임은 물론 표정까지 살필 수 있는 건 흥미로웠지만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파트 밖에 보이지 않아서 관악기와 타악기는 소리만 들어야 하는 게 아쉬웠다. 어차피 클래식은 잘 모르니까 오케스트라 공연의 경우 시각과 청각을 함께 가동하면서, 소리와 연주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재미있고 흥미로웠는데 그게 안 되니까 확실히 감흥은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아시아 초연이라는 첫 곡 “풀려나다”는, 나의 약소한 경험에 의거한 현대 클래식 음악답게 멜로디보다는 리듬과 불/협화음의 화성, 현악기들의 연주 파트가 전체적으로 두드러졌고 간혹 관악기와 타악기의 임팩트가 강조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한 번 들어서는 기억할 수 없고 주요한 멜로디라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아 인상적으로 남은 부분은 없었지만,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 있던 작곡가 앤드루 노먼이 소개되고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모습만은 인상적이었다. 내가 문외한일 뿐 '클래식 현대 음악계'(이 말 맞나?)에서도 새로운 작품은 계속 발표될 테고 수많은 악기들을 고려해 작곡과 편곡을 하는 작업은 엄청난 노력과 재능을 요구하는 걸 테니, 작곡가에게는 무척 기쁜 자리였을 것 같아 잠시지만 진심의 축하를 보탰다.

 

모르는 분야지만 대중 음악과 비대중 음악의 격차는 매우 클 것 같고, 현재의 기악곡들에도 그냥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장르 명명이 맞는 것인지 나만 모르는 것인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내게 공식화된 '클래식=고전'이라는 의미가 맞는 건가 싶어 'classic' 단어를 찾아보니 '1. 고전의 2. 클래식 3. 전형적인 4. 전통적인 5. 대표적인' 등의 뜻이 나오는데 보통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이런 식으로 배웠지만 클래식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악기 구성과 형식 등을 이용한 동시대의 음악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는지 궁금해졌다. 얼핏 modern이나 contemporary 같은 단어를 쓰나 싶지만 그 역시 시대 구분이지 음악의 장르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할 것 같으니 말이다. 금세 잊을 궁금증이긴 하지만, 내년이든 그 전이든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을 보게 된다면 다시 떠오를 것 같기는 해서 정리 안 된 와중에 적어둔다. 

 

다음은 바로 전날 저녁에 변경 공지를 받은 소프라노 박혜상의 협연이었다. 애초 폐막 공연의 협연자는 폴란드 피아니스트 데죄 란키였는데, 예매하면서 찾아보며 알게된 바 기존 내한 경험이 있는 노장이었다. 클래식 문외한에게 폴란드는 쇼팽의 나라이고 피아노는 편안한 악기이므로 마음에 들었는데, 일주일 전쯤 협연자가 러시아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로 바뀌었다는 문자를 받았었다. 한국의 코로나 상황을 우려해 데죄 란키가 내한을 취소했다는데, 통영국제음악당 기둥에 크게 포스팅된 그의 얼굴을 익혀버린 관계로 언젠가 연주를 보게 된다면 반가울 것 같다. 문자를 받고 부러 율리아 레즈네바의 동영상을 찾아 보기도 했던 터라 조금 아쉬웠지만, 누가 무대에 오르든 나는 일개 초심자이므로 나쁠 건 없었다.

 

소프라노 박혜상은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 중 "디도의 탄식",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어서 와요 내 사랑",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 목소리"를 불렀다. 합창석이다 보니 노래하는 뒷모습을 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오페라 연기하듯 팔을 뻗고 몸을 돌리는 등의 움직임이 더해져 그냥 성악곡을 들을 때보다 흥미로웠다. 듣는 것만으로 일별할 수는 없지만 제목만은 낯익은 오페라곡을 직접 들어본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평소 실력이 있겠지만 급박한 변경이었을 테고 그래선지 세 곡의 무대를 마친 후 협연자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사이의 찐한 인사에서 괜히 전우애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급변경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들의 커튼콜도 더욱 뜨거웠던 것 같다.

 

인터미션 후 2부의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었다. 찾아보니 브루크너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오르간 연주자이며 오스트리아 낭만파의 거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당연히 초면이었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는 건 약소한 경험과 눈치로 알고 있지만, 전곡이 1시간 넘고 한 악장이 20분은 될 것 같은데 끝난 후 잠시간의 적막을 그냥 바라보며 견디는 게 나는 좀 괜히 미안하고 불편했다. 물론 흐름을 깨는 일일 수 있고 그렇게 정해진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연주도 지휘도 음악가에게는 일인데 악장 사이에 박수를 쳐주면 어떨까 싶었달까.

 

실은 전곡 연주가 끝난 후의 기립 박수나 몇 번이나 반복되는 커튼콜로 몰아서 감동과 환호를 표현하는 게 내게는 조금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느껴져서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은 내 입장에서 "풀려나다"보다는 듣는 맛이 있었지만, 엄청 빠져들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년 폐막 공연의 프로그램도 모두 친숙한 작품들만은 아니었는데 나름 엄청 감흥에 젖었던 걸 생각하면, 블라인드석이나 마찬가지인 합창석이어서 그랬나 싶기도 한데 잘은 모르겠다. 암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의 교훈은 오케스트라 공연이라면 합창석에는 앉지 말자는 것, 내게 오케스트라 공연은 듣는 것 만큼이나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매우 깨달았고 청각은 시각을 자극하며 인간은 소리에 의해 무척 큰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 역시 새삼 느꼈다.

 

공연 보러 가는 길에 무척이나 뜬금없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고 심기가 잔뜩 불쾌해졌었다. 발신자는 거론하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가 경험한 가장 파렴치하고 뻔뻔한 인물이어서 즐거운 마음의 산책길에 예기치 못했던 뾰족한 분노가 솟아났다. 눈치 없고 자아도취적인 인물이라 너의 연락이 불쾌하다는 말조차 전하기 싫어 없는 일인 셈치려고 메시지를 삭제하고 차단했지만, 공연이 시작된 초반에는 그 망할 연락 때문에 자꾸 딴생각이 났고 마음의 산란함으로 집중력이 흐뜨러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미친 새끼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의 몰염치한 연락으로 망친 몇 분이 너무 아깝고,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절감했다. 그래서 오늘의 공연을 향하는 마음이 조금은 겉돌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가는 길과 현장은 이렇게나 아름다웠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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