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에 해당되는 글 92건

  1. 2022.04.14 이사 욕구
  2. 2022.04.06 봄봄
  3. 2022.04.03 지휘자의 앞모습
  4. 2022.03.27 TIMF 2년차
  5. 2022.03.26 세상만사
  6. 2022.03.19 소동
  7. 2022.03.16 기지개
  8. 2022.03.10 1573, 22
  9. 2022.02.16 약간 새 출발 여행
  10. 2022.02.03 귀가
산책일기2022. 4. 14. 00:43



종일 바람이 거셌다. 오후에 집에 들어오는데 복도에 옆 집이 평소 현관문 옆 기둥에 매어놓는 커다란 재활용쓰레기 비닐의 매듭이 풀렸는지 널부러져 있고 페트병 따위가 우리집 앞까지 굴러와 있었다. 아무도 없나 싶어 비닐에 담아 세워 두었다. 바람 많은 날이니 귀가하며 확인하면 집 안으로 들여 놓겠지 생각했다. 거실에서 책을 읽는데 또 넘어졌는지 바람에 비닐 마찰되는 소리, 페트병 구르는 소리 같은 것들이 계속 들렸다. 실내가 조용해서 안에까지 들리는 건가, 신경 쓰였지만 무시했는데 잠자기 전 문단속하며 현관문을 열어 보니 우리집 앞으로 다 쓸려와 있다. 옆 집이 복도에 커다란 비닐 묶어두고 내놓은 재활용쓰레기가 날아온 건 처음이 아니다. 야심한 시각이니 이미 잠에 들어 모를 수도 있지만, 저녁에 분명 봤을 텐데 강한 바람이 계속되는 날에는 집안에 들여 놓는 게 상식 아닌가? 잊을 만하면 재활용쓰레기들을 날리던 반대편 끝 집에 새로 이사 온 이들 역시 뭔가 많이 쌓아두고 있지만 얼마 전 한 번 복도에 휘날린 뒤 나름 단속을 하는 것 같은데, 오늘이 지나면 옆 집도 방법을 바꿀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반복될 때마다 짜증스럽고, 바람 잦은 동네의 샷시 없는 복도식 아파트에 살면서 뭔가를 밖에 일상적으로 내놓는 옆 집도 끝 집도 이해가 안 된다. 기본적으로 잠재적 민폐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때로 적극적 민폐다. 이사 가고 싶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씩 사라진다  (0) 2022.04.20
처음  (0) 2022.04.14
봄봄  (0) 2022.04.06
지휘자의 앞모습  (0) 2022.04.03
TIMF 2년차  (0) 2022.03.27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4. 6. 20:46



통영국제음악제와 도서관 강의 덕분에 벚꽃을 만끽하는 날들이다. 어제와 오늘은 오전과 오후에 각기 다른 강의가 있어 이틀동안 네 번이나 도서관을 왕복하느라 온몸으로 봄을 실감했다. 오후 강의가 끝난 후 지난해엔 보지 못했던 봉숫골 벚꽃을 느껴보려고 용화사 입구까지 산책을 했는데, 시간대가 그러했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반 단위로 나타났다.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들도 있었고 신호가 멈추고 차량 통행이 없을 때는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다(기분 좋은 풍경이라 멀찍이서 사진 한 장 찍었는데 누군가에게 실례가 될 일은 아니기를-). 통영의 어떤 학생들에게 봄 벚꽃길의 단체 사진은 학창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겨지는가, 낭만적인 박제다 싶다. 오전 강의를 듣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스무 명이 될까 싶은 유치원 어린이들이 두 명의 교사들과 함께 산책 나온 모습을 보며 마음이 괜히 흐뭇해졌었는데, 오후에 만난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 역시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줬다. 잘 나가지도 않지만 일이 있어 나갈 때에도 주말이 아니면 거리에서 활력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겠지. 집으로 돌아오니 바람에 날려 옷에 붙었던 벚꽃잎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 함께 걸었구나.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0) 2022.04.14
이사 욕구  (0) 2022.04.14
지휘자의 앞모습  (0) 2022.04.03
TIMF 2년차  (0) 2022.03.27
세상만사  (0) 2022.03.26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4. 3. 22:00

 

 

통영국제음악당 합창석 첫 경험, 지난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 공연 때는 대전시립합창단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자리했던 곳에 앉게 되었다. 일찌감치 매진되었다가 티켓 추가 오픈 문자를 받고 잠시 고민하다 예매했는데, 지휘자(마르쿠스 슈텐츠였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이기도 하다고)를 정면으로 보며 유려한 움직임은 물론 표정까지 살필 수 있는 건 흥미로웠지만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파트 밖에 보이지 않아서 관악기와 타악기는 소리만 들어야 하는 게 아쉬웠다. 어차피 클래식은 잘 모르니까 오케스트라 공연의 경우 시각과 청각을 함께 가동하면서, 소리와 연주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재미있고 흥미로웠는데 그게 안 되니까 확실히 감흥은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아시아 초연이라는 첫 곡 “풀려나다”는, 나의 약소한 경험에 의거한 현대 클래식 음악답게 멜로디보다는 리듬과 불/협화음의 화성, 현악기들의 연주 파트가 전체적으로 두드러졌고 간혹 관악기와 타악기의 임팩트가 강조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한 번 들어서는 기억할 수 없고 주요한 멜로디라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아 인상적으로 남은 부분은 없었지만,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 있던 작곡가 앤드루 노먼이 소개되고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모습만은 인상적이었다. 내가 문외한일 뿐 '클래식 현대 음악계'(이 말 맞나?)에서도 새로운 작품은 계속 발표될 테고 수많은 악기들을 고려해 작곡과 편곡을 하는 작업은 엄청난 노력과 재능을 요구하는 걸 테니, 작곡가에게는 무척 기쁜 자리였을 것 같아 잠시지만 진심의 축하를 보탰다.

 

모르는 분야지만 대중 음악과 비대중 음악의 격차는 매우 클 것 같고, 현재의 기악곡들에도 그냥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장르 명명이 맞는 것인지 나만 모르는 것인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내게 공식화된 '클래식=고전'이라는 의미가 맞는 건가 싶어 'classic' 단어를 찾아보니 '1. 고전의 2. 클래식 3. 전형적인 4. 전통적인 5. 대표적인' 등의 뜻이 나오는데 보통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이런 식으로 배웠지만 클래식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악기 구성과 형식 등을 이용한 동시대의 음악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는지 궁금해졌다. 얼핏 modern이나 contemporary 같은 단어를 쓰나 싶지만 그 역시 시대 구분이지 음악의 장르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할 것 같으니 말이다. 금세 잊을 궁금증이긴 하지만, 내년이든 그 전이든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을 보게 된다면 다시 떠오를 것 같기는 해서 정리 안 된 와중에 적어둔다. 

 

다음은 바로 전날 저녁에 변경 공지를 받은 소프라노 박혜상의 협연이었다. 애초 폐막 공연의 협연자는 폴란드 피아니스트 데죄 란키였는데, 예매하면서 찾아보며 알게된 바 기존 내한 경험이 있는 노장이었다. 클래식 문외한에게 폴란드는 쇼팽의 나라이고 피아노는 편안한 악기이므로 마음에 들었는데, 일주일 전쯤 협연자가 러시아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로 바뀌었다는 문자를 받았었다. 한국의 코로나 상황을 우려해 데죄 란키가 내한을 취소했다는데, 통영국제음악당 기둥에 크게 포스팅된 그의 얼굴을 익혀버린 관계로 언젠가 연주를 보게 된다면 반가울 것 같다. 문자를 받고 부러 율리아 레즈네바의 동영상을 찾아 보기도 했던 터라 조금 아쉬웠지만, 누가 무대에 오르든 나는 일개 초심자이므로 나쁠 건 없었다.

 

소프라노 박혜상은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 중 "디도의 탄식",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어서 와요 내 사랑",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 목소리"를 불렀다. 합창석이다 보니 노래하는 뒷모습을 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오페라 연기하듯 팔을 뻗고 몸을 돌리는 등의 움직임이 더해져 그냥 성악곡을 들을 때보다 흥미로웠다. 듣는 것만으로 일별할 수는 없지만 제목만은 낯익은 오페라곡을 직접 들어본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평소 실력이 있겠지만 급박한 변경이었을 테고 그래선지 세 곡의 무대를 마친 후 협연자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사이의 찐한 인사에서 괜히 전우애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급변경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들의 커튼콜도 더욱 뜨거웠던 것 같다.

 

인터미션 후 2부의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었다. 찾아보니 브루크너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오르간 연주자이며 오스트리아 낭만파의 거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당연히 초면이었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는 건 약소한 경험과 눈치로 알고 있지만, 전곡이 1시간 넘고 한 악장이 20분은 될 것 같은데 끝난 후 잠시간의 적막을 그냥 바라보며 견디는 게 나는 좀 괜히 미안하고 불편했다. 물론 흐름을 깨는 일일 수 있고 그렇게 정해진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연주도 지휘도 음악가에게는 일인데 악장 사이에 박수를 쳐주면 어떨까 싶었달까.

 

실은 전곡 연주가 끝난 후의 기립 박수나 몇 번이나 반복되는 커튼콜로 몰아서 감동과 환호를 표현하는 게 내게는 조금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느껴져서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은 내 입장에서 "풀려나다"보다는 듣는 맛이 있었지만, 엄청 빠져들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년 폐막 공연의 프로그램도 모두 친숙한 작품들만은 아니었는데 나름 엄청 감흥에 젖었던 걸 생각하면, 블라인드석이나 마찬가지인 합창석이어서 그랬나 싶기도 한데 잘은 모르겠다. 암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의 교훈은 오케스트라 공연이라면 합창석에는 앉지 말자는 것, 내게 오케스트라 공연은 듣는 것 만큼이나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매우 깨달았고 청각은 시각을 자극하며 인간은 소리에 의해 무척 큰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 역시 새삼 느꼈다.

 

공연 보러 가는 길에 무척이나 뜬금없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고 심기가 잔뜩 불쾌해졌었다. 발신자는 거론하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가 경험한 가장 파렴치하고 뻔뻔한 인물이어서 즐거운 마음의 산책길에 예기치 못했던 뾰족한 분노가 솟아났다. 눈치 없고 자아도취적인 인물이라 너의 연락이 불쾌하다는 말조차 전하기 싫어 없는 일인 셈치려고 메시지를 삭제하고 차단했지만, 공연이 시작된 초반에는 그 망할 연락 때문에 자꾸 딴생각이 났고 마음의 산란함으로 집중력이 흐뜨러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미친 새끼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의 몰염치한 연락으로 망친 몇 분이 너무 아깝고,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절감했다. 그래서 오늘의 공연을 향하는 마음이 조금은 겉돌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가는 길과 현장은 이렇게나 아름다웠는데 말이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 욕구  (0) 2022.04.14
봄봄  (0) 2022.04.06
TIMF 2년차  (0) 2022.03.27
세상만사  (0) 2022.03.26
소동  (0) 2022.03.19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3. 27. 22:57

 

 

제목이 거창하네, 지난해 처음으로 통영국제음악제 공연에 갔었다. 통영국제음악당에 공연을 보러 처음 간 건 2월에 있었던 피아니스트 임동혁, 임동민 형제의 듀오 리사이틀이었는데, 프로그램에 쇼팽의 작품이 여럿이어서 며칠 전부터 애써 관련 책도 한 권 읽고 음악도 미리 찾아 듣고 했었다. 긴장과 성의로 준비를 한 덕분인지 연주회는 새로운 감각과 흥미를 일깨우는 시간이었고, 그래서 통영국제음악제 개폐막식 공연을 선뜻 예매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올해는 다소 침잠한 마음일 때 예매 오픈 문자를 받았고, 며칠 망설이다 들어가봤더니 매진인 경우도 많았다. 통영국제음악제 티켓값은 별로 비싼 편이 아니지만 가난한 클래식 문외한인 관계로 주로 B석을 예매하는데, 지난해 폐막 공연을 5층에서 보고 긴 커튼콜이 끝난 뒤 약간 상기된 마음으로 퇴장하는 사람들 틈에서 정관용 교수를 목격했다. 물론 나의 B석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저런 사람도 B석에서 보는구나 하는 약간의 반가움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다른 공연을 S석일 1층 중간쯤에서 본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은 1층보다는 2층이 총체적 조망이나 시야의 해방감에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나름 고심해서 세 개의 공연을 예매했다가 후에 추가 오픈 문자를 받고 또 두 개의 공연을 예매했었는데 결국은 저녁 공연 세 개를 모두 취소하고 올해는 일요일 낮 공연 두 개만 보기로 했다. 집에서 공연장까지 도보로 30분 정도 거리여서 항상 걸어갔다가 오는데, 전에 저녁 7시에 시작되는 공연을 보고 오는 길의 어둠과 드문 인적에 괜스레 불안하고 스산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 9시 이후의 거리를 겁내거나 두려워하는 일은 서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내려와 살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실은 이래저래 마음의 힘이 많이 떨어진 터라 굳이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하여 올해 나의 통영국제음악제 공연은 단 두 번, 그중 하나가 오늘의 [킹스 싱어즈 II - 하모니를 위하여 - 통영], 킹스 싱어즈는 워낙 유명하니 낯설지 않고 프로그램에 조지아 노래들이 있어서 궁금했다. 

공연 전날 오후에 멤버 중 한 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되어 프로그램 변경이 불가피하고, 예약 취소를 원할 경우 수수료 없이 환불해준다는 문자를 받았다. 치명률이 많이 낮아지고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걸렸지만, 먼 이국에 공연하러 왔다가 확진되어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좀 안쓰러웠다. 저녁에 유튜브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해주는 킹스 싱어즈의 첫 번째 공연을 봤는데, 원래 멤버가 여섯 명인지도 몰랐고 다섯 명의 공연도 충분히 좋아 보이기는 했다. 

오늘 나의 자리는 5층의 첫 번째 줄, 작년 폐막 공연 때 앉았던 자리였는데 어디에 시선을 집중해야 할까 싶을 만큼 악기와 연주자들로 공간이 가득찼던 오케스트라 공연과는 역시 달랐고 아카펠라팀이라 연주자 없이 커다란 무대 중앙에 다섯 사람이 모여 선 게 휑하기는 했다. 파트로는 카운터테너와 테너, 베이스가 각각 한 사람, 바리톤이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공연을 시작하며 미리 준비한 한국어로 어눌하게 인사를 전했다. 비영어권 국가의 관객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겠지만 경직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좋은 관례라고 느껴졌고 객석과 무대가 나누는 웃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후에는 영어로 간단히 곡에 대한 소개를 하며 무대를 이어갔는데, 프로그램 안내지 덕분에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역시나 영어는 늙어도 공부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아카펠라 무대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높고 낮은, 얇고 굵은, 가녀리고 묵직한 다섯 목소리들의 어울림과 절묘하게 만나고 흩어지고 서로를 받쳐주는 리듬감이 꽤 놀라웠다. 대부분 모르는 노래여서 순간의 황홀과 완전한 망각이 반복되는 건 아쉬웠지만, 기대했던 조지아 노래들에다가 프로그램에 나온 제목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에스토니아의 노래들까지 들을 수 있었던 건 반가웠다. 타악기가 등장한 한 곡 빼고는 온전히 목소리들로만 이루어진 공연임에도 지루하지는 않았는데, 곡 선정과 순서에도 신경을 썼겠지만 중간중간의 가벼운 멘트와 약속된 움직임들로 만들어내는 경쾌함 덕분이었던 것 같다. 2부까지 마치고 커튼콜과 앵콜이 이어졌고 마지막에 다시 나와 각자의 아이패드를 챙기는 일사분란한 동작(하루이틀 공연하는 게 아닐 테니 대부분은 약속된, 수없이 반복된 세레머니겠지만 가장 큰 웃음 포인트였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인사로 유쾌하게 공연이 마무리되어 돌아오는 길의 기분도 상쾌했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봄  (0) 2022.04.06
지휘자의 앞모습  (0) 2022.04.03
세상만사  (0) 2022.03.26
소동  (0) 2022.03.19
기지개  (0) 2022.03.16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3. 26. 21:05



집을 나서자 곧 지지 않은 동백과 이르게 핀 벚꽃이 눈에 띄었다. 강의 답사 수업에 가느라 오랜만에 구도심을 가로질러 산책했는데 토요일 오후여선지 곳곳에 활기가 돌았다. 청마문학관에서는 통영에 심히 뜨거운 강사님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간혹 끄덕거리고 간혹 웃었다. 집까지 걸어오고 싶었지만 지난주에 이어 <불후의 명곡> 김창완 편을 봐야 했으므로 중앙시장까지만 걷고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크라잉넛의 캡틴록님께서 산울림 노래에는 사계와 인생이 있다고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셨고, 김창완 아저씨는 많이 배우고 반성했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백만년 만에 <불후의 명곡>을 2회 연속 보면서 반복되는 예능 클리셰나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드는 재주의 한 엠씨에게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나의 오만이다. “안녕”에 붙인 게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민초희 언니’ 이야기가 비밀을 들킨 듯 반가웠고 그 옛날 <꿈과 음악 사이에>와 아저씨가 만들어 방송에서 들려주셨던 “초희”가 떠올랐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말로 할 수 없는 야릇하고 깊은 감정 같은 건, 나에게만 특별하거나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아무려나 벅찬 마음으로 방송을 보고 통영국제음악제 실시간 스트리밍을 틀어놓고 인스타를 열어봤다. 며칠 전, 좋아하는 선생님이 안식년으로 캐나다에 가셨다는 소식을 접했고 마침 그 며칠 전 뜬금없이 선생님이 통영에 강의하러나 놀러오셔서 우연히 마주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망상의 대가인가 싶어 괜히 더 아쉬워졌었다. 이래저래 좋은 날을 보낸 터라 기분이 좋았고 선생님의 새 소식을 보고 싶었는데 반가운 ‘방백’의 음반 표지사진을 만났고 댓글을 보고 순간 뒤통수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백현진님이 “안녕...”이라고 쓴다면 나는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는 관계이지만, 유앤미블루와 가끔 어어부와 방백의 음악들 그리고 여러 영화음악과 [삼진그룹영어토익반]에서 환영처럼 등장했던 첫 순간과 재등장해 대사까지 했던 그를 나는 좀 좋아했고 많이 반가워하는 정도는 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선 킹스싱어스가 앵콜로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믿을 수 없는 부고를 접하고 너무나 얼떨떨하고 이상하다. 조금 전 공연은 끝났고, 백현진님이 “안녕...”이라고만 쓴다면 나는 조용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겠지 싶다.

 

방준석님의 음악들 고마웠습니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휘자의 앞모습  (0) 2022.04.03
TIMF 2년차  (0) 2022.03.27
소동  (0) 2022.03.19
기지개  (0) 2022.03.16
1573, 22  (0) 2022.03.10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3. 19. 02:33



잠이 들락말락하는데 어디선가 계속 남자의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정원이...”, “살려주세요.”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위인지 아래인지 알 수 없고, 궁금하다기보다는 불안해져서 꿈결이었으면 싶다가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 정확히 들리지 않지만 급박하다기보다는 뭔가 그냥 계속 외치는 것 같아서 그만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조금 후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설마 우리집인가 하고 일어나 귀를 기울이니 정말 우리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그냥 넘길 수도 없어 열었더니 경찰 세 명, 후레시 불빛을 계속 비췄다는데 이 집 맞냐고 했다. 누군가 소리를 듣고 신고한 모양, 소리가 계속 들리기는 했다니까 아래인지 위인지 묻는데 모르겠고 그러는 사이 다시 소리가 들려왔고 바로 아래층이었다.

경찰들은 죄송하다고 하고 나는 들어왔는데, 어쨌든 경찰들을 보니 좀 안도가 되어 복도로 나가봤더니 아래층에서 경찰들과 거주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1층 아파트 입구로 119 구급차 한 대가 빠져나갔고 이어 소방차도 조용히 빠져나갔다. 아래에서 계속 작은 말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고 동 입구에는 경찰차가 있다. 이제는 잠잠해졌는데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낮에는 책모임 함께하는 지인이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서울에서 모임할 때 올라가면 신세를 지던 이고 혼자 사는 터라 마음이 쓰여서 배달음식을 시켜줬는데, 그는 동네 지인이라도 있으니 약 정도는 부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동네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이다 보니 갑자기 확진되면 꽤 난감하겠다 싶었는데, 새벽에 이런 소동을 겪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이 지금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느낌.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TIMF 2년차  (0) 2022.03.27
세상만사  (0) 2022.03.26
기지개  (0) 2022.03.16
1573, 22  (0) 2022.03.10
약간 새 출발 여행  (0) 2022.02.16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3. 16. 20:14



지난해에는 3월 13일부터 통영리스타트플랫폼에서 하는 여러 강의를 들으며 통영 유학이라도 온 듯이 봄을 보냈다. 날짜든 계절이든 시간의 마디가 있는 덕을 보며 살고 있고, 덕분에 동네에서 하는 강의를 발견해 신청했고 이번 주에 시작되었다. 통영에 와서는 자가격리 수준으로 지내는 터라 강의든 모임이든 혼자가 아닌 무엇인가는 꽤 이벤트가 된다. 극도의 낯가림에 보통은 닫힌 마음이며 웃는 상도 아닌 터라 낯선 사람들과 떼로 함께하는 시공간의 경험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마냥 그렇게 살 수만은 없으니 이런 강의가 개설되는 건 꽤 고마운 일이다. 그리하여 어제와 오늘 '독서심리지도사 양성(기초)', '인물로 만나는 서양미술사', '통영을 빛낸 문화예술인을 만나다'의 첫 번째 강의를 들었다.

 

'독서심리지도사 양성(기초)' 강의는 오전 10시에 시작인 데다 살펴본 강의계획서 내용이 다소 난감했기에 취소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는데, '내 세상'에서만 살 수는 없다는 다소 비장한 마음까지 끄집어내며 '도전'해보기로 했다. 자격증에 대한 관심은 없지만 책과 관련된 강의이고 통영에 살고 있는 책과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겠다 싶기도 했다. 자격증 취득을 목표하는 강의가 아니었음에도 첫 시간의 절반 가까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 협회에 대한 소개와 홍보에 할애하는 시작에 좀 당황스러웠지만, 민간 자격증 시장의 일면을 나름 경험해보는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남은 시간은 수강자들의 소개였는데 아이들 독서 지도에 꽂힌 젊은 엄마들 틈에 낀 무자녀 최연장자일 수도 있겠다는 은연중의 걱정과 달리 다양한 연령대의 분들이 각자의 계기로 참여한 듯해서 다행이었다. 공중파에 소개된 사례를 거듭 강조하고 강사는 상품이라는 교수의 말을 신봉하는 강사의 많은 말들에 마음속 물음표가 수시로 떠올랐지만, 총 9회차 강의니까 남은 8번 '편견 없는 열린 마음'을 준비해 소화해보려고 한다.

 

인물로 만나는 서양미술사는 마침 서양사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역사와 문화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반가웠다. 신청 후 강의계획서를 보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디에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마네, 모네, 빈센트 반 고흐, 프리다 칼로, 구스타프 클림트, 피카소' 순으로 10회차 강의 주제가 나와 있었다. 이름만은 익숙한 예술가들이어서 강의와 함께 일주일에 한 명씩 관련 책을 읽어야지 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책을 빌려와 읽던 중이기도 했다. 그런데 첫 시간의 주인공은 라파엘로, 내심 당황하였으나 일개 교양 강의에 너무 다부진 포부를 얹은 게 머쓱해졌다. 다행히 강의는 흥미로웠고 시대상과 역사, 작가와 작품을 절반쯤의 비중으로 설명하는 점도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적절한 구성이었다. 집에 와서 다시 찾아보니 강의계획서가 업데이트되어 있고, '라파엘로 산치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페르메이르, 렘브란트, 마네, 고갱, 폴 세잔, 클림트, 앤디워홀, 안토니 가우디'로 순이다. 강의 신청하고 둘러본 미술 관련 서가의 책들은 대체로 두꺼워서 매주 관련 책 한 권씩을 읽어볼 엄두는 안 나지만, 웹서핑으로라도 미리 조금씩은 알아보며 즐겁게 들어볼 생각이다.

 

통영을 빛낸 문화예술인을 만나다는 통영에 내려온 뒤 이런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유형의 강의다. 총 14회차로 '유치환, 윤이상, 이중섭, 김용익과 김상옥, 김춘수, 전혁림, 박경리와 서우승'에 대해 한 번은 강의, 한 번은 답사를 통해 알아보는 식. 강의 제목이 '을 빛낸' 대신 '의'였다면 좋았겠다는 깨알 바람 따위는 넣어두고, 백석 시인 이야기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두어 번 방문에 세 편의 작품을 남겼을 뿐이니 내 마음속의 연결로 만족하기로 했다. 강사는 통영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토박이로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 후 몇 년 전 퇴직한 분이셨는데,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시작된 지역의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퇴락한 시기인 지금의 통영에 대한 안타까움, 수많은 문화예술인을 배출한 고향의 경기 회복 혹은 부흥에 대한 순정한 열망이 대단해보였다. 첫 시간이어서 들려주는 통영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도 모르게 '극통주의자' '우통지사' '통영부시머' 같은 말들이 장난처럼 떠올랐지만, 말투나 태도가 개방적이고 꽤 유머러스하셔서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퇴직하며 낸 산문집을 일일이 사인해서 나눠주셨는데, 조만간 성심껏 읽어봐야겠다.

 

강의 시간이 화요일 오전과 오후, 수요일 오후로 나란해서 오랜만의 집중적인 움직임이 되었는데, 오후 강의로 향하는 길에는 초등학교 주변 횡단보도에서 노란 조끼를 입고 교통 지도하시는 어르신들을 마주치면서 괜히 조아리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혼자 너무 편하게 놀고 있다는 어떤 사회적 부채감 때문인 것 같은데, 양상은 다르지만 이런 류의 강박이 늘 어느 정도는 함께하는 이유가 뭘까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 쓸데없이 위인전 많이 읽는 어린이에게 인간남존여비였던 친할머니의 양육은 상당한 반골기질을 선사했고, 성장하며 피상적인 정의감과 헌신하는 삶의 가치에도 경도된 그는 학생운동 속에서 겪은 양가성을 내면에 안고 사회로 나왔으며, 오랜 시간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부류의 어렵고 힘든 이들을 만나면서 은근 상팔자인 자신이 일개인으로서 담당해야 마땅한 사회적 역할에 몰두하였으나, 결국 안 맞는 옷이었다는 걸 깨닫고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상태를 좇아 오늘에 이르렀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삶 안에 답이 있겠지만, 가끔은 오랜 세월 동안 공고해진 과도한 윤리적 허영심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암튼 허세가 문제.

 

화요일 아침, 강의실 가는 길에 예쁘게 만개한 동백꽃을 마주쳤다. 지난해 지인과 장사도에 갔다가 동백철에 어느 섬이든 가봐야지 했는데 까맣게 잊었다. 혼자 섬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에도 여러 겹의 이유가 있는데, 불과 몇 년 사이 생겨난 것들이라 핑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마음부터 동하지 않으니 별 수가 없다. 지난봄 처음 강의를 들으러 갈 때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생각에 의아할 만큼 떨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차수를 더해갈수록 급격히 늘어나는 빈 자리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탓인지 이번에는 덤덤했는데, 무심히 강의실에 들어섰다가 나란히 앉으신 노부부를 보고 약간 반색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이를 어지간히 먹은 후, 그러니까 몇 년 전부터 공연장이나 극장, 강의실 같은 곳에서 노인들을 조우할 때 느끼는 약간의 든든함과 반가움이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언행으로 그 마음에 균열이 일 때도 있고 나이주의에 근거한 일방적인 마음이라 비겁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여전히 흔들리고 침잠하는 내게는 유효한 발견이다. 일종의 '희끗한 위로'에 기대어 봄날의 움직임을 시작했고, 덕분에 동네를 이리저리 걸었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만사  (0) 2022.03.26
소동  (0) 2022.03.19
1573, 22  (0) 2022.03.10
약간 새 출발 여행  (0) 2022.02.16
귀가  (0) 2022.02.03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3. 10. 09:51

 

 

나가기 싫을까봐 부러 며칠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 내다 놓으며 투표하러 다녀왔다, 어제 얘기다.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은 투표권 행사 정도로만 굳어진 지 오래고,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굳이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는 기계적인 행위라고도 느낀다. 투표하는 후보에 대한 적극적 지지보다는 당선 유력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것에 마음의 방점이 찍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나의 한 표는 그 자체로 네거티브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편으로 도착한 공보물의 대부분은 바로 분리 수거하고 세 후보의 공보물만 남겨 대략 읽어 보았다. 이번 대선에 붙는 수식어 중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말에만 공감이 되고, 경합하는 두 후보와 정책의 미처 몰랐던 면모를 알고 싶다던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으니 세상이나 나나 문제가 있기는 한 것 같다. 밤이 되어도 당선자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아침이면 알게 될 둘 중 하나의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고, 아침이 되어 사파리앱에서 흐린 눈으로 당선자를 확인하자 오히려 무심해졌다.

그리고 실은 조금 궁금했던 걸 검색해보았다. 정당 지지도로 나타나는 정치색은 내게 자리한 '이상으로서의 통영'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내려온 후 처음 선거였기 때문에 3번과 7번의 득표수가 어느 정도일까는 괜히 궁금했다. 대선 결과에 관심은 없으면서도 막상 투표를 생각하면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음이 그 순간만큼은 꽤 깊어졌는데, 결과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수치들이고 다른 이들에게 갈등의 조합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확인하고 나니 1,573와 22라는 숫자가 괜히 약간 기억하고 싶어졌다. 의외로 7번이 많다고도 느꼈는데, 설마 6번 찍으려다 밀린 건 아니겠지, 생각해본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동  (0) 2022.03.19
기지개  (0) 2022.03.16
약간 새 출발 여행  (0) 2022.02.16
귀가  (0) 2022.02.03
반가운 이사  (0) 2022.01.23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2. 16. 10:47

 

 

5년 만에 여수에서 만난 A, B와 함께 통영으로 왔다. 이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B가 단체 대표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좋아하는 곳에서 마음 편히 살겠다고 내려온 상팔자로서 괜히 미안하고 혹시 심각한 사정이 있나 싶어 전화를 했었다.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다행인 상황이었고, 너무 멀기는 하지만 언제라도 며칠 쉬고 싶으면 내려오라고 숙식은 제공하겠다는 안 빈말을 전한 게 마지막 연락이었다. 부산의 A는 이주 후 가장 여러 차례 집에 온 지인이고 한 달 전에도 만났지만 셋이 함께는 오랜만이어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통영으로 오는 길에 이미 날이 저물어 2월 11일은 저녁 먹고 수다 떠는 것으로 끝. 다음 날은 온전히 여유로운 하루였는데 둘 다 딱히 원하는 바가 없어 본의 아니게 가이드 행세를 하였고, A의 차 덕분에 여기저기 다니며 아주 꽉 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느긋한 오전을 보내고 나간 곳은 서피랑, 십 년 전쯤 반나절 둘러본 게 전부라는 B에게 통영은 동피랑의 복작거림과 케이블카의 오랜 줄로 기억되는 듯했고 여수랑 비슷한데 좀 더 작은 바닷가 도시인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매력을 강권할 수는 없지만 먼 길 온 그에게 모르는 통영을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서피랑이 첫 행선지가 된 이유는 A와 B의 배려였다. 물론 좋은 곳이므로 흔쾌히 향했고 가벼운 경사로 이어지는 공원을 걸어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를 보며 여수 출입국 앞에 세워질 기념비 이야기를 나누고 서포루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고 관광객처럼 음악계단 쪽으로 내려왔다. 거의 모든 것이 좋았으나 농장(?)의 사슴들을 직접 보고는 마음이 좀 안 좋아졌고, 예전에 본 적 있었는지도 가물하지만 좁은 복도 같은 평지와 가파른 경사지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사슴들이 살아가는 게 괜찮은 것인지 의아해졌다.

모두 비슷한 마음이어서 민원을 넣자는 둥의 말이 나왔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으므로 털어버리고, 서피랑을 택한 진짜 이유를 떠올리며 적십자병원 뒤쪽에서 백석 시비까지 이어진 길을 걸으면서 거리의 가게들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로서는 고맙고도 연대감에 겨운 잠시, 미처 몰랐던 곳에 붙은 안내문을 사진 찍으며 머지 않아 마련할 새로운 공간이 여기가 된다면, 오늘을 기억하리라 생각했다. 나만 하던 일이지만 의기양양하게 두 지인과 함께 백석시비에 인사를 드리고 명정샘에도 들르니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음 행선지는 달아항, 2시 10분에 출발하는 학림도행 배를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느긋하던 걸음을 재촉하며 주차장까지의 오르막길을 경보하듯 걸어야 했다. 내비가 알려주는 도착 예정 시각이 2시를 넘은 상황이어서 배를 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작고 좁은 통영이라지만 서피랑에서 산양읍 남단의 달아항까지는 25분쯤 걸렸고 차 안에서 신분증을 미리 걷어 도착하자마자 뛰듯이 매표소로 가야했다. 승선명부를 급히 작성하고 다음부터는 조금 일찍 오시라는 친절한 안내에 송구스러워하며 배에 올랐는데, 우리가 타자마자 배가 출발했고 2시 7분이었다. 정원 40명의 작은 배지만 정시가 되기 전에 출발할 줄은 몰랐는데, 학림도 송도 저도 연화도 만지도 다섯 군데 섬을 도는 섬나들이호는 마을버스 같았다. 십 분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한 사투리의 선장님 안내 방송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해 학림도를 그냥 지나쳤고, 놀라서 갑판의 관계자분께 여쭤보니 다른 섬들 돌고 마지막에 다시 들르니 구경하다가 그때 내리면 된다고 하셨다. 덕분에 오랜만에 탄 배를 적당히 즐기고 학림도에 닿았다.

 

 


주말이지만 오후여선지 섬은 한산했다. 안내판을 보고 대략의 트래킹 코스를 정하고 걷다 보니 섬을 전세라도 낸 것 같은 기분, 고요하고 여유롭고 청량한 기운이 그만이었다. 선착장 주변은 잘 정돈되어 있고 왼편으로 폐교를 개조한 예술가 레지던시와 몇 군데의 식당과 펜션 그리고 해송숲공원으로 가는 오솔길이 이어졌다. 해송숲공원에서 전망대까지는 금방인 것 같아서 먼저 해안도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한적한 해안도로와 다른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바다, 드문드문 낚시 중인 이들이 보이고 '고래개능선' 산행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바닥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산행은 예정에 없었으므로 계속 걸었는데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얹혀진 그네에 이어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집이 나왔다. 마침 하얀 집 마당에 누군가 계셔서 해안도로 끝까지 가면 돌아서 전망대까지 길이 있는지를 여쭸는데, 울타리 앞 작업대에서 분주히 뭔가 하시던 그분께서는 산에 갔다가 마침 좋은 칡을 캐왔다며 잘라서 건네주셨다. 칡이라, 내게는 이원재의 노래로나 익숙한 것이었는데, 아무려나 무척 자연스럽게 그러나 반가운 호의를 잔뜩 얹어 건네주시는 걸 마다할 수 없어, 난생처음 칡을 씹어보았다.

 

 

덕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해안도로 바닥의 산행길 안내 글씨도 지나쳐온 그네도 그분의 작품이었고 돌아나가는 길 역시 조금만 더 가면 안내판이 나오는데 가서 보면 알 수 있다며 유쾌하게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해주셨다. 내릴 때 갑판 관계자분께서  4시 40분까지(티켓에는 16:30이라고 찍혀 있었지만) 선착장에 나와 있으면 배가 선다고 하셨는데, 마지막 배를 타기까지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선착장의 대략적인 안내도로 알 수 없었던 부분이 해결되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분의 안내판을 기점으로 섬 반대편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산행이 되었다. 몇 년 전 우도와 속초 여행에서 전에는 몰랐던 고소공포증을 실감한 나로서는, 중간중간 느슨한 로프가 매어져 있기는 했지만 한쪽이 벼랑과 바다인 좁은 산길을 걷는 일이 무척 고역이었다. 소시적 산악부 출신 A가 앞장서며 길을 개척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기거나 눕다시피 하면서 천근 같은 한 발을 겨우 옮기며 최고의 쭈구리 같은 모습을 둘에게 보이고 말았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목도하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비슷한 지형의 욕지도에는 있었던 데크길이 여기에는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고, 그렇게 삼십 여 분의 느닷없는 산행 끝에 다시 마주 친 해안도로의 바닥 글씨는 얼마 전 여유롭게 걸으며 지나칠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예정에 없던 산행으로 땀벅벅이 되어 평지의 안정감에 감읍하며, 전망대는 포기했지만 그보다 더 엄청난 풍경을 보았다고 합의하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4시 40분에 도착해 나머지 섬들을 돌아 달아항으로 간다던 우리의 섬나들이호는 5시가 다 되어 들어오셨는데, 배를 기다리는 다른 일행 덕에 불안감을 덜 수 있었고 이전의 안내와 달리 달아항으로 직행하셔서 더욱 좋았다. 두 번째여선지 선장님의 덕담 가득한 안내 방송이 잘 들렸고 덕분에 뭔가 벅차고 흔쾌한 마음으로 조타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기쁘게 배에서 내렸다. 3시간 동안 다른 세상에 다녀온 느낌이었고, 나만의 감정은 아닌 듯했다. 누군가 오면 꼭 섬에 가겠어,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해가 지기까지는 1시간 남짓, 달아공원의 석양이 유명하지만 날이 흐리기도 했고 주말에는 넓지 않은 전망대에 몰려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통영은 섬들이 많아 일출도 일몰도 수평선 기준으로 보기는 어렵기도 해서, 당포성지로 향했다. 몇 년 전 여행에서 발견하고 이후 몇 번 갈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곳이고, 한 달 살 때 A에게 소개해주려다 길을 잘못 들어 실패한 적도 있으니 이번에는 함께 가면 좋겠다 싶었다. 주말이어선지 우리만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고즈넉하고 호젓한 당포성지의 매력은 변함없었다. 섬에서부터 감탄을 연발하던 B의 찬사가 당포성지에서도 이어졌는데, 알고 보니 일등공신은 그가 쓴 선글라스였다. 맨눈으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신비한 색감으로 물든 풍경을 공유하며, 색안경을 꼈을 때 세상이 얼마나 달라보이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다음 여행에도 꼭 선글라스를 챙겨오기로 약속하며, 산양일주도로를 달려 봉평동으로 향했다.

 

 

 

식당의 방 테이블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데 12시부터 근무하듯 달린 8시간 여행의 노곤함이 모두에게 찾아왔다. A는 전날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여수까지 오랜 운전을 했고, B는 전날 새벽 비행기로 여수에 내려와 여수에서 통영까지 남의 차 초행길 운전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밤이므로 밤바다 산책을 빼놓을 수 없어 봉평동에서 충무교를 지나 미수해안로를 통해 연필등대까지 걸었다. 드문한 사람들과 내게는 이미 익숙해진 야경이지만 누구와 함께인가에 따라 인상은 달리 남는다. 한 시간쯤의 마무리 산책 후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 기진한 상태였지만 그야말로 알찬 여행이어서 뭔가 뿌듯했다. 일찌감치 씻고 작은 방에 들어간 B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소파에 쓰러졌다 일어난 A와 두어 시간 수다를 떨며 딸기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전, 다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거가대교를 지나 일요일이지만 일정이 있어 출근한 A의 사무실을 구경하고, 기차를 타기로 한 B와 부산역에서 헤어져 나는 2월 영화여행을 시작했다. A는 지금의 직분을 3월 말까지만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B는 여수행을 준비하던 중 합격 소식을 전한 일터에 월요일부터 출근할 예정이다. 오래 노는 중인 나는 상반기에 준비해 조촐한 공간을 열 계획인데, 마침 나의 통영행을 이끈(?) 이가 태어난 7월 1일에 꽂혀서 그에 맞춰볼까 게으르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5년 만의 만남이 따로 또 같이 삶의 어떤 분기점을 통과하는 여행이 된 것도 같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달라졌고 '여수 15주기'로 시작된 만남이 마냥 즐거운 여행이 되어서 민망한 감은 있지만, 일희일비 살아가며 경험과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몇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지개  (0) 2022.03.16
1573, 22  (0) 2022.03.10
귀가  (0) 2022.02.03
반가운 이사  (0) 2022.01.23
두 번의 만남  (0) 2022.01.16
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2. 3. 17:13

 


금요일 정오쯤 집을 떠나 수요일 저녁에 돌아왔다, 다섯 밤 만의 귀가. 책 모임이 있었던 지인의 집에서 사흘, 설날을 맞아 본가에서 이틀을 잤다. 토요일 책 모임이 오후 3시였으니 그날 오전에 올라가도 됐지만, cgv 무료쿠폰을 버리기가 아까워 금요일 저녁 수원에서 [킹 메이커]를 봤다. 시간을 맞출 수 있다면 [하우스 오브 구찌]를 보고 싶었지만, 일반 상영관은 설연휴에 맞춰 개봉하는 두 편의 한국 영화로 도배되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코로나19 초기 극장에서 뒤늦게 [불한당]을 재밌게 봤었는데, 완전히 다른 소재였지만 센스 있고 맨들맨들한 연출력은 여전해 볼 만했다. 

토요일 책 모임에는 네 명이 모였다. 절반이 책을 읽지 않아서 책에 대한 얘기는 짧게 나눴지만, 다들 간만에 모인 터라 오랜 시간 이런저런 수다를 많이 떨었다. 1년 반 넘게 지속되는 중이지만 책 읽기의 깊이가 더해진다거나 성원간 친밀도의 질적 변화가 있거나 하지는 않은데, 원래 활동하면서 아는 사이였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 몇 시간 만나는 것으로 관계의 질이 달라질 리 없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나마 늘 유쾌한 한 사람이 있어서 만나면 즐겁고 많이 웃는 건 좋은 일인데, 이후 명절부터는 책 모임 때문에 굳이 며칠 일찍 올라가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라인의 한계는 여실하지만 멀리에 산다면 감수할 일인 것 같다.

일요일에는 영화를 봤다. 1월 말까지 일반관 주말 사용이 가능한 무료쿠폰 두 장을 잘 쓰기 위해 고심한 결과, cgv압구정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 [어나더 라운드], [인어가 잠든 집]을  보는 것으로 알뜰하고 자족적인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영화관 가는 길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의 하마구치 류스케 편을 들었는데 역시 평론가들의 관점과 시선은 심오하고 입체적이어서 나랑 같은 영화 본 거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비록 많은 것을 놓치고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영화는 처음 볼 때 가장 충만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 같다. 다시 본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여러 상황에서 감춰진 심경이 드러나는 가후쿠의 표정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고 처음 보고 틀리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도 깨달았는데, 어차피 영화를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할 수 없고 어떤 영화를 몇 번 보더라도 감독의 의중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그랬구나 싶기로 했다.

영화 보기 전후 알라딘중고서점 강남점과 가로수길점에 들러 책을 한 권씩 사느라 강남역과 신사역 근처를 걸었는데, 오래 전 뤼미에르극장이며 씨네하우스에 영화 보러 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많이 변했는데도 다시 지나니 여릿하게 남은 향수에 젖는 게 웃기기도 하고, 아마 내가 서울을 떠났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이겠지 싶다. 지인의 집까지 가는 길에 신사역에서 이수역까지 버스를 탔는데, 고속터미널과 구반포를 지나면서도 옛 생각 이수역에 내려서는 이 근처 어디쯤 선생님이 살고 계시겠군 생각하며 괜히 아련한 마음이 되었다. 선생님 뵌 지 오래 됐는데, 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마주칠 수 있을까 싶고 실은 꼭 뵐 수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기척을 늘 염두에 두고 살 때는 그의 도저한 사유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픈 욕심으로 나름 공부도 좀 하고 관련 책들도 보고 했었는데, 너무 아득한 기억이 되어 버렸다.

다음 날 오전에 지난 설날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본가에 갔다. 시월에 다녀가셨으니 만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기분탓인지 나이탓인지 엄마아빠가 늙었다는 게 확연히 느껴져서 마음이 좀 그랬다. 여든 전후의 노인들이니 당연하고 나이에 비하면 건강하신 편이지만, 멀리 살면서 가끔 만나다 보니 느끼는 미안함과 죄책감 같은 것에서 자유롭기는 힘든 것 같다. 그럼에도 아빠가 계신 거실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북한' 어쩌고 하는 토크쇼 패널의 목소리와 엄마방 텔레비전이 발신하는 tv조선의 소란스러움은 무척 고역이어서, 역시 부모 자식 간의 안전거리는 필수적이라는 것 역시 재확인했다. 원랜 설날에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에 가서 영화 몇 편을 볼 생각이었지만, 혹시라도 고위험군인 엄마아빠가 걱정되기도 하고 나 준다고 이것저것하느라 부엌에서 바쁜 엄마에게 미안해 관뒀다. 2박 3일 꼬박 집안에만 있는 게 답답하기는 했지만 추석 이후 처음 간 거였으니 참길 잘한 것 같다.

일 년쯤 살아보니 어떠냐는 엄마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나의 계획을 고했다. 상반기에 작은 책방을 열까 한다고, 실은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고, 지내면서 계속 고민했고 어쨌든 해보는 걸로 결정했다고, 아주 작게 집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시작해볼까 한다고, 통영이니까 지금 내 수준에서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걸 거라고, 돈을 벌기는 어렵겠지만 소소하게 근근이 이어가다 보면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안정적인 상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엄마의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격렬한 반대는 없었다. 모든 것이 가정이고 일단 움직여봐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겠지만,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살면서 이따금 여행하며 책방에 가보고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며 상상해봤을 따름이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이제 정말 때가 되었구나 싶기도 했다. 

수요일 낮에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엄마아빠 보고 온 거지만 5박 6일의 외유이다 보니 피곤했고 이제 집에 가서 푹 쉬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고향 왔다가 아직 안 올라갔다는 통영산 지인의 연락이 왔다. 그는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의 귀인이지만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고, 무엇보다 빨리 가서 씻고 배구 볼 생각에 들떴던 터라 순간 귀찮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자주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일상이 쉬는 시간인데 싶어 약속 시간만 조금 뒤로 미뤘다. 얼마 전 만났을 때 책방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잘 모르는 세계임에도 자기 일처럼 관심해주던 그는 남는 시간 동안 부러 내가 고려하고 있는 동네를 돌아보고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거의 반백 년 살았고 이십 년 넘게 활동했는데 친구도 남은 사람도 없구나 싶어 공허할 때가 있는데, 고마운 마음을 자주 잊기 때문인 것도 같다.

설날 아침에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얼굴 본 지도 연락한 지도 한참인, 어른이 되어서는 많이 소원해졌지만 처음 안 때로부터치면 40년 된 친구의 연락이었다. 국민학교 친구들과 졸업 후에도 친하게 지냈고 선생님과도 그랬기 때문에, 이십대의 나는 오랜 관계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과 그로부터 얻는 안정감에 일정 부분 기대어 지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완전히 다른 동네로 이사해서도 우정은 이어졌고 대학교 시절부터 판이하게 달라진 생활에도 그러했으므로, 어떤 상황이 되어도 오랜 인연은 '당연히' 이전과 같을 거라는 암묵적인 신뢰가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럴 리 없고, 물리적 거리와 일상의 변화는 늘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던 관계를 변화시키고 무화시켰다. 오랜 기간 쌓인 우정과 추억이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없었던 일처럼 느껴질 때면 내가 잘못 산 건가 싶은 기분에 젖기도 했지만 그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삶의 시간에서 어릴 적만큼 순정하지는 않을지언정 다른 만남들이 생겨났고 그 자리를 채웠다.

집에 돌아와 한숨 돌리고 친구에게 전화해 오래 통화를 했다. 통영행이 아직은 막연한 계획이었던 몇 년 전, 친구와 선생님이 우리집에 온 적이 있다. 그때도 꽤 오랜만의 반가운 만남이었지만 몇 년 만에 몇 시간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드문한 인연으로 고착된 관계가 달라질 리는 없었다. 어린 두 아들을 키우는 친구와 나의 일상은 너무 다르고, 오래 편찮은 선생님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나니 옛날 생각이 났다. 서로 다른 중학교에 배정되고 나는 멀리 이사와 전학을 간 후에도, 휴대폰이 없던 때였음에도 자주 통화하며 길고 긴 수다를 떨었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마다 그를 알지도 못하는 친구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었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편지들에는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나눈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몇 년씩 연락 없이 사는 게 익숙해졌지만 멀리 남쪽 동네로 떠나왔다는 사실이 주는 거리감 때문인지, 친구도 좀은 옛 생각과 감흥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서로 빈 말은 아닌 채로 통영에서의 만남을 이야기했는데, 정말이 된다면 색다른 반가움일 것 같다. 크게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잃어버렸던 시절과 친구를 조우한 기분이다.

지난해 통영살이의 흔적 중 사회적(?) 물성으로 남은 유일한 것은 식물모임 덕분에 얻게 된 작은 책과 캔들이다. 유월부터 시월까지 한 달에 한 번 만나며 글과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덕분에 통영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조금은 고양되는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다른 차원의 삶이라고 느껴질 만큼 식물과 자연에 친화적인 이들인 데다 나 말고는 모두 삼십대여서, 내심의 반가움과 친밀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모임은 마무리되었다. 시한부였던 모임이 끝난 후 열 권의 책과 열 개의 캔들을 선물처럼 전해받았고, 올해 우리집에 오는 지인들에게 기념품처럼 전하고 있다.

내맘대로 통영으로 이사하고 엄마아빠한테 사후 통보를 했기 때문에 구멍가게 수준이라도 책방을 여는 일은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고, 서울 가는 길에 한 권 챙겨갔다. 가치관이나 취향의 공감대가 전혀 없는 엄마아빠에게 보이기엔 민망하지만 글을 쓰며 통영행의 마음과 이유를 담았고 앞으로 하고픈 일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슬쩍 내밀 심산이었다. 엄마랑 이야기하며 '이런 세계가 있다'는 증거처럼 책을 내밀었는데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민망해서 도로 들고 왔다. 매일 책을 읽고 도서관에도 자주 가는 아빠와 달리 엄마가 책을 읽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역시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려온 후 통화 중에 엄마가 책을 찾더니 다음에 꼭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계획이 현실이 된다면 오글거리는 필명은 책방 이름이 될 것이고 엄마가 글을 읽을 때쯤 나는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73, 22  (0) 2022.03.10
약간 새 출발 여행  (0) 2022.02.16
반가운 이사  (0) 2022.01.23
두 번의 만남  (0) 2022.01.16
다시 일상  (0) 2022.01.09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