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12. 24. 02:34

 


밤마다 침대에서 느릿느릿, 한참 동안 띄엄띄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어서 깊이 음미하며 잘 읽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런저런 영상과 음향에 중독된 하루의 잔상이 남은 밤이어선지 쉬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디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배경에서 적군의 미사일과 방공호와 포격이 난무하는 첫 소설 “두 번째 밤”이 약간 난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모두 죽을 거야.” 아빠가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그것뿐이었다.”는 문장에 이상하게 수긍하는 마음이 되었다. 

 

책에는 스무 편 가까운 길고 짧은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 덕인지 여름의 느낌을 풍기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표지 컬러 덕인지 찌는 듯한 더위보다는 여름 저녁의 서늘함과 어떤 그리움의 여운을 짙게 남겨주는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오래 살았던 아파트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에 그곳을 함께 산책했던 강아지와의 다정한 시간을 떠올리고 의미 없이 뿌리 뽑힐 수많은 나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원치 않는 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던 학창 시절을 채워준 음악과 친구와 고향의 기억,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아련함에 마음이 공명했다(“여름의 마지막 숨결”).   

 

언젠가부터, 내게 각인된 것은 아마도 [눈먼 자들의 국가]에 수록된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까지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야.” 같은 작가 특유의 조용히 진취적인 삶의 태도와 세계관이 “첫 여름”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일관되게 드러나서 약간의 친근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다가왔었지만, 믿음으로써 사실이 되고 삶이 되고 운명이 되는 말의 힘 같은 것. 신비주의나 주술은 아니지만, 마음에 품고 잘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은 말을 마주하며 잠시나마 고양감을 느끼곤 했다. 이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우리들의 섀도잉”은 오래 전 작가를 처음 만난 “꾿빠이, 이상”을 떠올리게 해줘서 반가웠다.

 

최근 자주 생각했던 참이라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언급되는 조지 오웰 그리고 “우리의 발밑에 광부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광부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수학 여행 간 딸이 목숨을 잃은 경주에 작은 서점을 내고 오래 된 무덤이 즐비한 길을 걷는 이의 이야기인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그리고 뭐라도 하고픈 책임감에 안산 지역 과학경시대회 입상자 수련회 참가자 명단에서 숨진 아이들을 찾아 편지를 남긴 주희와 시진 엄마의 이야기 “거기 까만 부분에”(근데, 도입부 시진 엄마는 이주희라고 하고 서술이 진행되면서 김주희라고 써져 있다. 오기일까,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를 읽으면서는 영화 [너와 나]가 떠올랐다. 압도적인 슬픔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환기하는 기록들을 마주할 때면, 다정하고 사려 깊은 예술가들이 고마워진다.

 

“토키도키 유키”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하코다테가 나와서 인덱스를 붙였는데 “언젠가, 봄이 되자 어른들의 키보다 더 높이 쌓였던 눈더미가 녹아내리면서 젊은이의 시체가 나왔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사람들이 늘 지나다니던 대로의 한복판에서, 머리는 검고 얼굴은 하얀,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이가.”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됐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담은 두 문장에 소설 속의 소설이 자리한 느낌이었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는 일본에서 엄마의 장례를 치른 손녀가 제주의 할머니에게 보낸 서툰 한국어 편지의 일부다. 작가의 제주 레지던시 생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인 듯한데 동료 예술가의 노래를 듣고 이어지는 서술에 눈길이 멎었다. “벨 에포크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절이 벨 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수록작 중 가장 분량이 긴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어린 날의 다양한 기억과 사연 들을 회상한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전복적인 현실에 직면해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소로(“1854년 2월 19일, 소로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 이 시기는 여름철에는 걷기 어려운 늪지, 강, 호수를 걸어야 할 때다.”)와 아우구스티누스(“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남긴 지침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를 사유하고 암 판정 이후 모임에서 단 한 번 만났던 이소노와 편지를 주고 받은 미야노를 인용한다. 1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단속적으로 과거와 더 먼 과거, 현재를 오가고 무수한 생략을 거쳐 2063에 이르는데, 이 때는 화자의 아이가 지금 자신의 나이쯤 될 40년 후의 미래이며 첫 번째 수록작 “두 번째 밤”(“왜 이 전쟁이 시작됐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언제 끝날지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안다고 믿고 행한 일들로 다다른 미래다.”)의 시기이기도 하다. 읽고 나니, 첫 소설에서 마지막 소설까지의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삶들의 순환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산만한 컨디션 탓에 때로 지루하게도 느껴졌지만 잠언처럼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았고, 사색적이고 정적인 이야기들에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했다. 단편 소설을 잘 못 읽는 탓에 딱히 연작이랄 수 없는 짧은 소설들을 연이어 읽으며, 읽고 잊고 읽고 잊고 하는 일이 반복되는 독서이기도 했다. 같은 언어를 쓰는데, 세상 처음 보는 표현도 아닌데 이렇게 새로운 느낌일 수 있다니 싶은 부분이 종종 있었고 위에도 적잖이 인용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은 “걷는 동안에는 적어도 걸어가고는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부분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마음을 두드린 문장들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그중 하나라도 실천하며 일상을 변화시키는 일이지만 말이다.

 

여러 곳에서 낭독회를 하며 발표한 소설들을 묶은 책이라는 걸 작가의 말에서 알게 되었다. 말미에는 각 소설의 제목과 연관된 스무 곡이 넘는 플레이리스트와 2021년 10월 30일부터 2023년 6월 3일까지 낭독회가 열린 서점과 도서관의 목록이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 낭독회가 열린 곳은 창원, 인스타그램의 책방 소식에서 보았던 기억이 나서 새로웠다. 작가의 첫 책부터 단독으로 낸 거의 모든 책을 읽어왔으니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직접 보고 싶다거나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신간을 마주하고, 때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를 테면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확고한 사유의 방향, 조금씩 익숙해지고는 있다.)은 넘어가면서 읽게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참으로 다정하게 사랑의 순간들과 사랑하며 사는 일에 대해 기록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울컥 슬퍼지고 마음이 이상해기도 했지만, 자전적인 고백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부터 근사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까지 읽고 잊고 읽고 잊고 하면서 내가 보냈던 많은 여름들 그리고 오래 잊고 지낸 얼굴과 이름 들이 떠올랐다.  


김연수
2023.6.26초판발행, 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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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2. 17. 10:58

 

 

연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40년 전 지구에서 이주한 정착민들이 일군 심스 뱅코프 콜로니에서는 운영 주체인 컴퍼니의 사업권 상실로 재이주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 세대 이상 피땀으로 일군 터전에서 쫓겨나는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극저온 캡슐에 실려 장기간 수면 상태로 우주를 이동해야 하는 여정에는 위험이 따른다. 회의의 형태를 빌린 일방적 과정을 거쳐 이주일은 한 달 뒤로 다가오고, 1세대 정착민인 70대의 오필리아는 홀로 남기를 남몰래 결정한다.

 

어린이고 젊은이였던 지구에서 오필리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원하는 만큼 배우지 못했다. 일찍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콜로니의 정착민으로 살아온 세월은, 저항할 수 없는 컴퍼니의 지배 속에 죽은 남편과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그리고 며느리의 강압과 간섭이 늘 함께였다. 평생 무엇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던 오필리아는, 맨발과 맨 머리로 정원을 돌보며 자연과 교감하는 고요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버려진 정착지의 단 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셔틀이 순서대로 정착민들을 싣고 출발하는 동안 숲속에 몸을 숨겼던 오필리아는 무사히 홀로 남겨지고, 전에는 상상도 못한 해방감에 젖어 두려움을 털어내며 혼자만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거리에 나서고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정원의 식물들과 마음껏 교감하는 끝없이 자유로운 생활. 이웃들이 살던 집을 뒤지고 콜로니 센터를 살펴 식량을 챙기고, 이주 초기 정착민으로서 배워야 했던 기계 설비 조작법을 떠올리며 나름의 안전을 도모한다.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콜로니의 센터에 남은 것들을 활용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기계를 가동하고 제어하면서 오필리아는 로그 파일에 접속해 자신의 기억 속 콜로니에서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도 시작한다. 누가 볼 리 없지만 무의미하게 잊혀지거나 단순한 정보로 왜곡된 사건을 애써 서술하고 바로잡기도 하며 자신이 경험한 역사를 남긴다.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여러 일들을 시도하며 표현의 욕구에 사로잡혀 광기와 예술 사이 어디쯤일 행위에 몰두하기도 한다. 고독과 자유를 손에 넣은 인간에게 기록과 창작은 숙명과 같은 행태다. 

 

무한히 혼자인 시간을 보내던 오필리아는 우연히 센터 제어실의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소리를 듣는다. 멀리 떨어진 어느 행성에 도착한 새로운 개척민들이 그곳의 미확인 생명체들과 충돌해 모두 죽는 현장 그리고 모니터하는 우주선 인간들의 목소리다. 낯 모르는 누군가들의 떼죽음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동시에 정체 모를 괴동물의 존재를 알게 된 오필리아의 마음은 죽은 이들에 대한 연민,  자신 역시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혼란스럽다. 그리고 유난한 바다폭풍이 불어오던 날, 오필리아는 괴동물 <종족> 일부와 조우한다. 

 

개척민들을 죽인 괴동물들과 오필리아의 만남과 나름의 소통은 의외로 평화롭게 진행된다. 말은 물론 몸짓으로 전하는 의미도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서로에게 상대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확실시되자, 오필리아가 견뎌야 할 것은 뚫어지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는 괴동물들의 시선 정도다. 시간이 흐르며 상호 관찰이 거듭되면서 오필리아는 괴동물들의 습성과 특징에 대해 조금씩 더 파악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완전히 거슬리지는 않은 존재가 된다.

 

즈음 지구에서는 새로운 행성을 향하던 개척민들의 죽음과 정체 불명의 생물체에 대한 대응 논의가 진행되고, 생물학자와 언어학자, 인류학자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팀이 군사고문단과 함께 폐콜로니가 된 심스 뱅코프에 당도한다. 셔틀에서 내리기 전 정체 불명의 자생종은 물론 한 인간의 존재도 파악하고 있던 그들을 맞은 것은 오필리아다. 모두가 떠난 폐콜로니에 홀로 남은 70대 여성은 지구인 전문가들에게 자생종 만큼이나 놀랍고 기이한 대상이자, 정상성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로 인식된다.

 

오필리아는 괴동물들과의 공생 과정에서 <종족>의 외교관격인 가수 파란 망토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고 기이한 소리로 소통하지만, 기계와 컴퓨터 등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과학기술의 원리를 꿰뚫는 놀라운 지적 능력을 가졌다. 오필리아가 겪었던 다수의 인간과 달리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과 거리감을 존중할 줄 알며 무엇이든 배우기에 열성적이기도 하다. 오필리아는 원치 않은 인간들 속에서 속으로 삭이기만 했던 자유에의 갈망을 해소하면서도 한없이 혼자여서 때로 잠식됐던 외로움과 무력감을, 괴동물들과 함께하며 비로서 떨칠 수 있었고 편안해졌다.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괴동물들은 타행성에서 인간을 공격하고 죽인 위협적인 존재로서 연구의 대상이고, 그들과 소통 가능한 유일한 인간인 오필리아는 신뢰할 수 없는 노인 여성으로 여겨진다. 오필리아 역시 그들이 죽인 인간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맘속 한 편에 자리잡았던 경계심은, 인간들이 그들의 둥지를 파괴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해소된다. 더불어 콜로니에 셔틀이 도착하던 날 태어난 괴동물 아기들과 가까워지고 ‘둥지수호자’로 받아들여진 오필리아에게 이제 괴동물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전문가 집단은 콜로니에 머무는 동안 인류의 갖은 폐단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자신들의 기준에서 무지하고 약하고 이상한 존재를 낮잡아 보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낯선 존재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품고 복속시키려 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맹신하면서 그외의 많은 것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프로세스에 따르면 괴동물들은 최초의 외계인으로서 자신들이 제안하는 협상에 동의해야 하고, 불법적으로 콜로니에 남은 오필리아는 자신들과 함께 떠나야 한다. 그 계획은 가장 경솔하고 권위적이었던 팀장이 괴동물 아기를 공격하려다 목숨을 잃은 후의 극적이고 전체적인 반전으로 모든 것이 변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의 ‘현재적’ 결론은 오필리아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콜로니가 부활한다는 해피엔딩이다. 전문가 중 나름 상식적이었던 인류학자 오리와 오필리아의 관점에서 어정쩡했던 생물학자 키라는 결혼해 오필리아의 ‘인간 보조’로서 콜로니에 남아 외계인과 함께하는 새로운 문명과 생태계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어느 시공간에서도 쓸모와 지혜를 인정받지 못했던 출산과 양육 경험이 있는 노년 여성들이 새로운 ‘둥지수호자’로 활동하며, 마을은 서서히 사람들로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한때 계획했던 대로 혼자 죽지는 못했지만, 웃음 지으며 죽었다.” 그는 물론 오필리아다. 



12월의 모임 책이었다. 평균치를 밑도는 상상력의 보유자로서 책을 읽을 때 시공간적 배경이 모호하게 인식되면 서사를 따라가기가 난감해지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어디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펼쳐지는 오필리아의 일상이 세세히 묘사되는 소설의 도입부터 흥미가 떨어졌지만, 읽어야 해서 읽다 보니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대략 이주 한 달 전부터 시작되는 오필리아와 콜로니의 상황에 대한 극세 묘사 덕에 이렇게 하루하루의 변화로만 소설이 채워지나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속도감이 붙고 낯선 존재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전되는 내내 오래된 목소리와 새 목소리가 경합하는 오필리아의 내면에 공감이 됐고, <종족>과 조우하기 전 어떤 낌새를 감지한 오필리아의 공포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며 으스스하게 느낄 만큼 몰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란 망토의 등장과 오필리아와의 언어 교류, 배움 부분의 디테일이 유치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등장할 때마다 흥미가 떨어졌다. 영어와 영어로 표기된 외계어, 그를 다시 한국어로 큰따옴표 안의 대화로 번역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깨알 같은 디테일 묘사가 많은 데 반해, 정작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던 괴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이해하는 원리 같은 것들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 맥이 빠졌다.

 

주인공 이름을 오필리아로 설정한 것이 [리어왕]에서 비극적 운명의 상징처럼 박제되었던 오필리아를 새롭게 해석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부활시킨 것일까 싶었는데, 그렇다면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언급 속에서도 내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죽은 남편 움베르토의 명명은 무엇에 연유한 걸까 궁금했다. 내가 아는 오필리아가 리어왕의 막내 딸 뿐이듯, 내가 아는 움베르토는 움베르토 에코 뿐이니까. 짧지 않은 분량에 가장 압도적으로 빈번히 등장하는 이름이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는데, 모임을 하면서 누군가 오필리아라는 이름에 대해 말을 꺼내며 이야기가 풍성해졌기에 생각과 발설의 결과론적 차이가 새롭게 느껴졌던 점도 기록해둔다.

 

몇 년 전 김초엽의 몇몇 작품들, 작년이었나 김영하의 [작별 인사], 전통적 분류로써 조지 오웰의 [1984] 정도가 내가 평생 읽은 SF소설의 목록이다. 모임 덕분에 자의 없이 오랜만에 SF소설을 읽었고 가장 강력한 독후감은 역시 나는 SF장르에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라는 점이었다. 서사의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적 배경에 대한 거리감을 차치하더라도, 사건과 인물 등이 창작자의 자유분방한 상상에 기반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SF소설 읽기는 기꺼이 배우고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기르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소설 속 오필리아와 괴동물들이 서로 그러했듯이. 

 

 

엘리자베스 문•강선재 옮김
2021.10.29.첫판1쇄 2031.12.10.3쇄, (주)도서출판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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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1. 18. 23:18

 

[오웰의 장미]라니, 장미에는 관심 없지만 매력적인 제목이다. 유명한 몇 권의 책 제목만 알고 있을 뿐인 리베카 솔닛을 나는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인가, 멋진 부제가 지금의 내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차피 오웰도 마찬가지니까. 대체로 반가운 마음으로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뒀는데, 좋아하는 것에 비해 오웰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한참 전이라 적당한 시기에 읽자고 묵혀뒀다. 출간 후 1년이면 궁금했던 것에 비해 오래 묵힌 셈이지만, 그사이 출간된 현암사의 소설 전집에서 [동물농장]과 [1984]를 제외한 네 권을 여름 동안 읽었고 11월 모임 책으로 결정된 뒤 [나는 왜 쓰는가]와 [조지 오웰의 길]까지 읽고 나니, [오웰의 장미] 독서를 위한 최적의 환경이 조성됐다. 

 

책에는 저자 자신과 조지 오웰 그리고 장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가 형식적으로 대략 1:4.5:4.5 정도의 비율로 담겨 있는 것 같다. 일 때문에 런던에 가게 된 저자가 나무를 사랑하는 친구와 ‘오웰이 심은 나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오웰이 살았던 월링턴의 집에 찾아갔다가 사라진 나무 대신 그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미를 만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로부터 오웰의 삶과 글, 장미가 가진 다양한 상징과 관련된 사례들, ‘오웰의 장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일련의 사유 등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개념인 ‘리좀형’ 전개로 펼쳐진다. “1936년 한 남자가 장미를 심었다”라는 문장을 중심으로 아이스 브레이킹처럼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은 가뿐하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과하다 싶게, 그러나 그 본령이 오웰이므로 읽을 만하게 이어진다. 게다가 본문 곳곳에 등장하는 미주 표시, 장미 모양이 귀엽다.

 

처음에는 솔닛의 필터를 통과한 ‘오웰의 세계’에 대한 재해석, 1936년의 오웰과 장미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2020년대 솔닛의 스펙트럼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일상과 자연, 효용성 없는 것과 삶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한 오웰의 알려지지 않은 세부를 찾아내고, ‘오웰과 장미’와 연관시킬 수 있는 여러 키워드들을 방사형으로 진전시키며 또 하나의 독립적인 주제로 다룬다. 비가시적이고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근원적인 삶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거대하고 중요한 것들에 가려진 사소하거나 무시되었던 것들의 재발견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현학적이지만 대체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로부터 연원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닿는 곳은, 기존에 익숙한 오웰의 대표 이미지 혹은 상징과도 같은 사회 참여와 변혁, 운동, 혁명 등과 관련된 역사적 내용들이다. 양자를 비교하거나 우위를 따지는 차원이 아니라 그 모두가 삶에 또 세계에 필요한 것이라는, 어쩌면 유려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거쳐 다시 ‘빵과 장미’에 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방식으로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 중에는 티나 모도티와 스페인 내전, 1910년대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시작된 전통적 구호 ‘빵과 장미’의 구체적 원전, 러시아 우생학에 대한 오웰의 관심(그가 죽지 않고 살아 다음 작품을 냈다면 그 역시 오늘날 오웰을 수식하는 한 권의 책 제목이 되지 않았을까?)과 스탈린 시대의 참상, 대영제국의 이중성과 오웰의 가계 탐색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또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하던 시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 ‘넬리 이모’의 존재 그리고 신혼 시절 “너무나 계속, 그리고 심하게 싸웠기 때문에, 살인이든 별거든 일어난 다음에 모두에게 한꺼번에 알리는 편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신혼 시절 아일린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부분적이지만 오웰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재미있었다. 엄청난 자료 조사와 탐색과 연결 능력으로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는 저자의 글쓰기는 감탄스러웠고, 대단한 통찰력과 혜안을 보여주는 지점도 여러 번 만났다. 석탄기와 기후 위기, 장미 공장과 콜롬비아 화훼 산업의 현실 등 의미 있는 내용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강렬하고 새롭게 다가온 것은 오웰의 질병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사실로써의 그의 일대기를 어느 정도 아는 상태로 작품을 읽으면서도 병의 위중함과 일상에 미쳤을 파장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논리와 의견과 주장이 가득한 에세이들, 유머와 촌철살인이 넘치는 소설들을 읽으며 그의 신체적 취약함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제국 경찰 복무를 반성하며 빈민 생활을 자청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드는 선택과 용기에 대해서도, 이미 그런 삶을 살았기에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글을 읽었던 것 같다. 아직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결핵의 검증되지 않은 신약을 투여하면서까지 살고자 했다는, 내용상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어 [1984]를 직접 타이핑하느라 더욱 위중해졌고 요양을 결정한 후 각혈로 피범벅이 된 채 홀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고 참 무성의한 독자였구나 싶어 무색한 마음이 됐다. 평생을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생각과 글을 일치시키기 위한 삶의 행보에 주저함이 없었던, 마침내 결핵으로 50년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작가의 치열함과 헌신이 새삼스러웠다.

 

저자의 책은 처음이지만 페미니즘과 관련한 글을 많이 썼고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는 건 들은 바 있다. 오웰의 여러 에세이에 대해 자신의 사유를 덧붙이고 [1984]에 풍부한 재해석과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책 살 때 굿즈로 앞치마가 나왔었는데 [1984]의 세탁부를 주목하는 “꽃과 열매”에서 앞치마가 등장한다. 그래서였나?) 기본적으로 작가에 대한 호감이 없다면 이런 책을 쓸 리도 없었겠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오웰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이 거의 없는 건 약간 의아했다. 당대에 활동하던 여성 작가에 대한 논평이 전혀 없다는 지적이나 “젠더에 관해, 결혼과 가정이 어떻게 권위주의 체제의 축소판이 될 수 있는지, 진실을 탄압하고 강자를 보호하는 거짓을 선포하기에 이르는지에 관한 것”을 오웰의 가장 의미심장한 맹점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글의 분량을 생각하면 존재감은 미미하다. 한 세기 전의 인물에 대해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억지가 되겠지만, 인물이든 현상이든 민감하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저자의 시선이 오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아 좀 신기했다.

 

저자의 책을 처음 읽은 자로서 불손한 말이겠지만 글에서 생동감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는 아닐 것 같고 그냥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은데, 자신의 사변과 사유를 자유분방하게 쏟아내도 되는 문화 권력을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체감 상 절반쯤이 ‘직접적으로’ 오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장미나 자신의 이야기와도 뒤섞여 서술되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때로는 사고의 깊이와 지적 권위를 가진 연장자가 상대의 주목 여부와 무관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여 문득,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도 잠겼다. 이 많은 사유와 성찰과 정보와 지식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책을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엇을 습득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나만 그런지 몰라도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망각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까지 많은 걸 쏟아 붓듯 채워야 했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내용과 소재와 주제에 우열이나 주종 관계 같은 것 없는, 무엇이 핵심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는 이런 식의 글쓰기가 페미니즘적인 서술 방식인가 싶다가도 ‘우먼스플레인’이란 단어도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달의 모임 책으로 내가 추천했는데, 너무 방대하고 때로 산만하게 느껴져 버겁기는 했으나 오웰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나름 흥미로웠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장미를 뺐다면 ‘오웰의 장미’일 수 없겠지만, 왠지 저자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인장을 누락시킬 수 없는 캐릭터 같다고 느꼈지만, 또한 남성 작가의 평전 성격의 글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저자의 빛나지만 너무 많았던 말들 대신 그 덕에 새롭게 감지한 오웰의 전기적 단편들을 취하는 것이 더 흡족했다. 아일린 사후에 그토록 결혼하고 싶어 했다는 오웰의 소망은 시대적 한계에 갇힌 남성의 모습일까,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했던 사랑 많은 한 인간의 모습일까. 죽음을 맞은 병실에 남겨진 낚시대를 떠올리면 자신의 회복과 이후의 삶을 믿었던 것 같지만, 마침내 병실에서 결혼한 그의 ‘반려’를 향한 염원의 정체가 나는 궁금해졌다. 어디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에 이상하지만 진심으로 덧붙이자면, 책은 좋았다. 그리고 내가 깊이 사유하는 인간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영영 그러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리베카 솔닛•최애리 옮김
2022.11.14.1판1쇄 찍음 11.25.1판1쇄 펴냄,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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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