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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롤은 부모의 강권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공대에 진학했다. 강의 시간에는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학교와 집을 오갈 때는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져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어느 날 친하지 않은 같은 과 친구가 다리를 다쳤다며 당분간 알바를 대신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유는 그곳이 섹스샵이고 사교적이지 않은 사롤이 비밀을 지켜줄 것 같기 때문이다. 얼결에 수락하고 알바를 시작한 사롤에게는 섹스샵에 진열된 다양한 물건들도 찾아오는 손님들도 전혀 몰랐던 세상의 일, 때로 배달을 나가서는 상상도 못했던 별천지 같은 상황을 조우한다.
가게를 지키고 배달을 나가는 것 외에도 중요한 일과는 퇴근길에 정산된 돈과 고양이 사료를 사서 섹스샵 사장 카티야의 집에 들르는 것이다. 카티야는 넓고 세련된 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살고 있는 중노년의 여성, 비싸 보이는 가구들와 장식품들로 채워진 우아한 공간에 어울리는 화려한 차림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먹하게 시작되지만 기침을 심하게 하는 걸 기억해 약을 사다주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내성적이고 조용해 보이지만 자신에게 주눅들지 않는 사롤에게 카티야는 금세 호감을 느낀다. 사롤 역시 카티야의 독특한 개성과 비밀스러운 카리스마에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고, 여러 사건들과 함께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씩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가까워진다.
사롤의 집은 낡고 작은 아파트, 슬리퍼를 직접 만들어 시장에 내다파는 부모와 미취학 아동인 동생이 함께 산다. 평범한 소시민인 부모에게 사롤은 똘똘하고 믿음직한 맏딸이지만 각각 생업과 육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느라 적당히 데면데면한 사이다. 늦은 귀가의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알바 사실은 대충 둘러대고 방에 들어가 그림에 몰두하다 잠드는 사롤에게는 낙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따금 동네 한 구석에서 어릴 적부터 친구인 종수와 나란히 앉아 시덥잖은 수다를 떨거나 담배를 피우고, 종수가 키우는 개 빔과 노는 정도가 영화에 나오는 사롤의 여가다. 한국 드라마에 대한 선망으로 한국식 이름을 쓰는 종수는 배우를 꿈꾸지만 스스로도 가능성을 별로 믿는 것 같지 않고, 사롤 만큼이나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는 젊은이로 보인다.
집과 강의실과 동네 한 구석에서, 섹스샵과 카티야의 집이 추가된 사롤의 동선과 반경은 점점 확장된다. 배달 나간 모텔에 들이닥친 단속반에게 잡혀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하고, 카티야의 고객인 수감자에게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함께 먼 길을 이동해 교도소에 들르고 초원에 닿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선입견과 다른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며 더 가까워지고, 자신의 방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목격한 뒤 트라우마를 갖게 된 사롤을 위해 카티야는 장난스럽지만 진지하게 주술을 시전하기도 하고 과거의 깊은 상처를 털어놓기도 하며 두 사람은 나이를 초월한 친구처럼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마냥 앳된 느낌이었던 사롤은 부끄러움 없이 손님들에게 제품 설명을 할 수 있게 되고 섹스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커져간다.
하지만 배달 나간 부잣집에서 중년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자 사롤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이고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었던 카티야에 대한 신뢰를 철회한다. 섹스샵을 그만두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온 사롤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여러 경험과 사건을 통해 조금 달라졌다. 섹스샵과 카티야는 답답한 현실에 잠식된 채 학교와 집을 오가던 사롤에게 다양한 삶과 어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 일탈의 용기 같은 것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됐다. 약간의 우여곡절을 거쳐 재회한 두 사람에게 이전과 같은 친밀한 시간이 돌아올 수는 없고 이내 소원해지지만, 좌충우돌 성장 중인 사롤은 조금 더 과감해지고 한참을 잊었다가 찾아간 카티야의 집에서 새 주인을 통해 선물 상자를 전해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꿈꾸던 미대생이 된 듯 화구통을 메고 경쾌하게 광장을 가로지르는 사롤의 뒷모습으로 긴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작은 산뜻하다. "Banana"라는 타이틀 자막과 함께 거리의 큰 쓰레기통을 향해 고정된 카메라, 속도감 있게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군가 버린 바나나 껍질이 쓰레기통 앞에 떨어지고 젊은 여성이 그걸 밟고 넘어지는 것이 첫 번째 에피소드. 이어 다리에 붕대를 감은 그 여성이 찾아가는 사람이 바로 사롤이다. 무료하게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사롤이 버스에 앉아 헤드셋을 쓰자 음악이 화면 밖으로 흐르고 버스 안은 영롱한 조명과 함께 환상적인 공간으로 변화한다. 앵글의 가장자리에 있던 버스 안 다른 자리의 남자는 남자는 이동한 포커스의 중심에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그는 이후 초원에서도 광장에서도 밴드와 함께 등장해 영화 속 경계를 오간다. 사롤의 무채색 일상이 음악으로 인해 황홀하게 혹은 강렬하게 채색되고 전환되는 감각적인 장면이 중반까지 몇 차례 등장하는데 자연스럽고 인상적이다.
신기했던 건 중반부 이후 특히 카티야가 자신의 사연을 넋두리하는 즈음부터 희한할 만큼 이전의 리듬을 잃고 지루하게 전개되었다는 것. 전반부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옛날 문예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권태로운 일상을 보내던 소녀가 낯선 존재를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게 되는 성장 영화의 공식에 충실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몽골이라는 낯선 배경과 감각적인 연출과 과감한 효과가 몰입의 키라고 느꼈는데 전반부와 판이하게 달리 느껴지는 후반부의 느린 호흡과 맥 없는 전개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중반까지 적당한 텀으로 등장하던 센스 넘치는 타이틀 제목도 후반에서는 사라졌던 것 같고 말이다. 그럼에도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롤의 뒷모습에 이어지는, 어느새 구면이 된 밴드의 연주로 마무리되는 엔딩의 소격 효과와 개방감 덕분에, 긴 영화의 마지막이 시원하고 유쾌하게 느껴졌다.
기억이 맞다면 처음 보는 몽골 영화였는데, 마침 GV도 있어 좋았다. 감독과 조감독이 참여했고, 영어에 서툰 감독의 몽골어를 조감독이 영어로 통역하면 통역자가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세 단계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참여한 GV에서 영어, 일본어, 불어 이외의 외국어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비영어권 국가의 감독 모두가 영어를 원활히 구사할 줄 아는 건 아닐 테고 효율성을 따진다면 당연히 떨어지겠지만, 3중 통역을 거치더라도 다양한 나라의 작품과 제작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필요한 것 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GV 덕분에 영화에 자주 등장한 밴드가 마그놀리아라는 몽골의 뮤지션이라는 것과 꽤 좋게 들렸던 노래들이 그들의 곡이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 종수의 개 빔에게 초코볼이랑 비아그라를 던져주는 장면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고,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영화적 허용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27th Biff & GV
10/12 영화의전당 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