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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30 5th 부산영화여행
  2. 2021.06.22 3박4일 수도권여행
  3. 2021.05.31 부산영화여행 4회차
  4. 2021.04.20 부산영화여행 3회차
  5. 2021.04.01 부산영화여행 2회차
  6. 2021.01.28 부산영화여행 1회차
  7. 2013.10.26 10월 25일, 부산-남해
  8. 2013.10.23 10월 23일, 경주
  9. 2013.06.03 6월 2일, 강릉
  10. 2013.06.02 6월 1일, 강릉
사는게알리바이2021. 7. 30. 13:42

 


6월엔 서울의 책 모임과 기한이 다가오는 쿠폰들도 쓸 겸 며칠 수도권에 다녀오는 것으로 부산영화여행을 대신했다. 7월 중순 두 달간의 알바를 마무리하고, 열흘 넘게 유유자적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선 길이어서 약간 들뜬 기분이 되었다. 첫 영화가 오후 늦게 시작이어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서부산터미널에 내려 알라딘중고서점에 들러서 다 읽은 책들을 팔고, 5시부터 체크인 가능한 숙소에 짐을 놓고 한숨 돌리고 극장으로.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마지막 영화의 상영 시각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밤 9시가 넘어 시작하는 영화도 있어서 하루에 세 편씩을 보기로 했다. 첫날은 [우리, 둘], [와인 패밀리], [오필리아], 다음 날은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갈매기], [피닉스]를 보았다. 세 편은 좋았고, 두 편은 별로였고, 한 편은 볼 만했으니 나름 만족. 여섯 편 중 [피닉스]가 가장 좋았고 마지막 영화여서 그 여운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괜찮았다. 새삼 놓친 [운디네]가 아쉽고 [트랜짓]을 다시 보고 싶어졌으나 당분간은 기약할 수 없는 일, 그래도 안타깝기보다는 좀 아련하게 남겨두는 것도 있어야지 싶으니 나쁘지 않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서면에 가다 보니 통영에 있을 때도 부산 지역 관련한 안전안내문자가 수신된다. 7월엔 서면 어디 방문자는 검사를 받으라는 문자가 자주 당도해서 가도 되나 좀 망설여졌는데, 부산영화여행에서 나는 뭔가 사먹거나 마시러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동선은 터미널, 중고서점, 영화관, 숙소로 한정되기 때문에 마스크 잘 쓰면 되지 생각하며 다녀왔다. 누그러들지 않는 확산세나 사적 이동에 예민한 시민들을 생각하면 자제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통영 생활에서 부산영화여행은 어느덧 꽤 절실한 환기구이자 소중한 의례가 되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행위 자체를 매우 좋아하고 즐긴다. 어려서부터 극장에 가는 걸 좋아했고, 언젠가부터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게 만든 이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영화관에서 볼 수 없거나 좋아해서 dvd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가끔 집에서 보기도 하지만, 어둠 속의 몰입으로 세상이 삭제되고 나와 영화만 존재하는 황홀한 경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집중하며 만나는 영화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보았다'는 기억만 남거나 아주 가끔은 보았다는 기억조차 휘발될 때도 있어 때로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잠시 암전의 순간이 지나고 커다란 스크린과 마주하며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경험이 행복하다.  

cgv앱에 따르면 나는 지난해 128편의 영화를 보았다. 메가박스아트나인에도 자주 갔었고, 에무시네마와 ku시네마테크, 대한극장, 롯데시네마에서도 영화를 봤다. 6월까지만 일했으니 시간이 많았고, 마스크 쓰고 영화 보는 것도 금세 적응이 됐다. 극장 내 음식물 섭취가 제한되어 관람 환경이 쾌적해졌고 객석이 한산해진 덕인지 방해자들이 뜸해졌다. 개봉작 수가 적어진 탓에 예전에 놓친 영화들이 재개봉했고 생각지도 못한 기획전에 반색하며 영화관을 찾을 때도 있었다. 솔직히 코로나19 때문에 이거 하나는 좋구나 생각하며 열심히 영화관에 갔다. 코로나19 초기 cgv성신여대입구에 확진자가 다녀갔었다는 것 외에 극장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없고, 갈 때마다 방역에 열심이라는 인상을 받아서 영화관에 갈 때 불안감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앱을 확인하니 올해도 cgv에서 46편, 롯데시네마에서 33편의 영화를 보았다. 상반기 롯데시네마통영에서 생각지도 못한 좋은 영화들을 많이 상영해준 덕이기도 하고, 나름의 영화여행 덕분이기도 하다. 부산영화여행은 대개 매월 마지막 주 수-목요일에 cgv서면 아트하우스관 두 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선택의 여지없이 이어서 보는 것이지만 괜히 갔다 싶었던 적은 없다. cgv통영이 리모델링 후 재개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화예술의 도시답게 한 관은 아트하우스로 열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대중문화 인프라 척박한 소도시에 전좌석 리클라이너로 영화관을 재개관한 것만도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통영에 사는 동안 부산영화여행은 계속될 것 같다. 이번에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주한 노을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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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6. 22. 23:19

 

 

서울에서 진행되는 책 모임을 주말에 듣는 강의가 겹쳐 두 번이나 빠지고 지난 달에 줌으로 함께했는데, 다음엔 한 번 오라는 동료들의 지나가는 말에 마음이 동했다. 마침 6월까지 써야 할 영화 쿠폰들이 있었고, 보고 싶은 영화들도 있었고, 스타벅스 쿠폰도 있었고.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해야 하는 재택 알바를 60% 가까이 완료하고 났더니 좀 진이 빠지기도 해서 후반부까지 잠시 쉬며 환기를 해야겠다 싶기도 했다. 어떤 주제에 대한 1천 개가 좀 넘는 판결문을 텍스트로 정리하는 작업인데 백수 주제에 어찌어찌 굴러들어온 알바를 다행이라 여기며 임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판결문이다 보니 알고 싶지 않은 사연들이 넘쳐 난다. 동물을 괴롭히는 이들은 아이를, 여자를 괴롭히고 괴롭힘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잔인한 사건들도 많은데 그에 대해 적나라하게 기록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 보니 때로 구역질이 날 것 같고 몇 번은 악몽도 꿨다. 역시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다. 


 


그러하여 6월은 부산영화여행 대신 수도권여행으로 결정하고, 집은 무민과 비틀즈오빠들과 식물들에게 맡기고 20일 [헝거] 책 모임을 중심으로 앞뒤 며칠을 붙여 다녀왔다. 토요일에 수원 터미널에 내려 롯데시네마 수원점에서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을 보는 것이 여행의 시작,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많이 봤다고 발급한 무료쿠폰이 통영점에서는 사용불가여서(어이리스) 약간 오기로 시간을 맞춰 보았는데, 별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괜찮았다. 돌아다니는 시간대에는 늘 인적이 드문 통영을 벗어난 지 몇 시간 만에 복작이는 사람들 틈을 지나 영화관으로 가는 길은 약간 벙벙한 느낌이었는데, 한적한 극장 안의 어둠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번의 숙소는 의왕, 안양에도 몇 년 살았었는데 처음 가보았고 역사와 가까운 시장 골목을 지나면 나오는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지인의 신세를 졌다. 재래시장은 잘 정비가 되어 있었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주말 저녁 거리를 지나고 있을 사람들의 풍경은, 통영에 살다 보니 거리의 활기가 낯설어진 내게는 반갑기도 하고 이채롭게도 보였다.

다음 날은 서울에서의 책 모임, 저자의 이름과 제목은 익숙했던 책을 여러 감정 속에 읽었는데 (일관된 주제가 없고 내용을 이끌 수 있는 안내자가 없으며 책을 다 읽지 않고 참여하는 성원도 있는) 우리 모임의 특성이 빛난 시간이었다. 일관된 주제가 없으니 깊이가 더해지지 않고 안내자가 없으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오가고 모두가 책을 다 읽은 것이 아니므로 온전하게 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가 어렵다는 말, 짧은 감상이라도 정리해보려고 하는데 포스트는 만들어뒀지만 잘 마무리가 될지 모르겠다. 오전 11시였는데 점심 식사를 겸한 모임이어서 조금 늘어졌고, 간만의 서울행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약속을 잡은 터라 나는 먼저 나왔다. 목적지는 길상사,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에만 두고 있다가 서울을 떠날 때까지 미지의 장소가 되어 아쉬웠는데 흔쾌히 받아준 지인 덕분에 처음 가볼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의 유골이 모셔진 곳이기도 하지만, 젊은 날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님의 시주로 지어진 절이라는 것 때문에 궁금했었다. '나타샤'의 진실은 죽은 시인만이 알고 있겠지만 반 세기가 흐른 뒤에도 그 마음을 유언 삼을 수 있는 사랑이라니, 도저하고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이 부럽다. 

 

 

 


마음의 흔적을 따라 세워진 곳이라선지 둘러볼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너무 넓거나 화려하지 않고 나무들이 우거진 오솔길이 적당해서 녹음 짙은 계절의 고즈넉한 산책으로 좋았다. 동행한 지인은 지난여름 일을 그만둔 직후 해방촌과 이태원에도 함께했었는데 그곳은 행복했던 내 학창시절의 공간이었다. 그날은 퇴근한 지인과 해방촌에서 만나기로 하고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영화를 본 후 좀은 낯선 길로 해방촌까지 걸었다. 여름이라 더웠지만 오랜만에 학창시절 오가던 남산순환도로와 남산도서관을 지났고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해방촌 곳곳을 홀로 걸으며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짧은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길상사에서 내려와 명동에서 지인과 이름이 같은 감독 겸 주인공이 나오는 다큐 [까치발]을 보고 두끼떡볶이의 마지막 손님으로 배부르게 늦은 저녁을 먹은 후 헤어졌다. 누군가를 만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가 편하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싶고, 그럼에도 각별한 마음의 장소에 누군가를 청하는 건 때로 고민스러운 일이 된다. 해방촌과 길상사를 기억할 때 함께 떠오를 지인에게 고맙다.

주말을 알차게 보내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오롯이 영화를 위해 남겨두었다. 월요일은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에서 [#위왓치유]와 [혼자 사는 사람들]과 [롤라]. cgv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알라딘에서 매월 하나씩 주던 맥스무비 쿠폰을 cgv로 바꾼 후부터다. 대자본에 휘둘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무려 4,000원이 할인되므로 무시하기 어려웠고, 2017년 1월 대학로에서 누군가와 [너의 이름은]을 본 게 시작이었다. 할인쿠폰을 사용하려고 앱을 깔았더니 신세계가 펼쳐졌는데 영화 한 편 볼 때마다 꽤 적립되는 포인트와 무엇보다 아트하우스 클럽이었다. 전에는 일에 바빠 영화를 자주 못 보기도 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유일한 돌파구 삼으며 아주 가끔 시내의 시네마테크에 가는 게 전부였는데, 마침 몇 년째 일하며 누적된 만성피로와 만나니 시너지가 장난 아니었다. 일에 지칠 때 잠시나마 다른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는 역시 영화만 한 게 없었고, cgv 아트하우스관은 시내 곳곳에 산재한 두어 시간 동안의 소도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5개 관이 모두 아트하우스관이 된 후로, 대자본 대기업을 향한 부정적 인식에서 cgv 아트하우스만은 제외하기로 혼자 마음먹었다.

일요일의 [까치발]도 cgv명씨네에서 보았지만 영화를 즐기지 않는 지인에게 나의 마음을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므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극장 입구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내부의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면서, 힘들 때 마음을 기댔던 영화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벅찬 기분이 되었다. 지난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외벽 입구에 자리한 후부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약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잘 있는지 확인하곤 했었다. 나는 폭 빠졌지만 크게 화제가 됐거나 한 작품은 아니어서 간판이 그대로인 게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는데, 늦가을에 SIPFF2020 때 포스터 이미지였던 [썸머 85] 현수막으로 잠깐 덧씌워졌을 때를 빼면 생명력이 길다. SIPFF2020 때 영화 보러 갔다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올 것이 왔구나 그러나 너라서 다행이다 하는 양가적인 감정에 빠졌었는데, 이후 cgv명씨네는 몇 달 휴관에 들어가기도 했고 코로나19는 계속되고 있으니 아마도 극장은 간판 교체조차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건재'한 것이겠다는 생각도 한다. 어쩌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조금은 볼품 없게 바랜 듯한 간판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늘고 운 좋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cgv압구정에서 [강호아녀]와 [애플]을 보았다. cgv압구정은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처음 가서 본 [몽마르뜨 파파]의 유쾌함과 함께했던 지인 덕분에 정겨운 기분이 드는 곳이다. 황막함을 채우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과 텅 빈 유려함 같은 것이 느껴졌던 [강호아녀]를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지금까지는 올해 가장 인상적인 영화 [애플]을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 사이에 서울 온 김에 잠깐 봐도 좋겠다 싶었던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와 반가웠고, 영화를 보러 들어갈 때 세차게 내리던 비는 나올 때 되니 이미 그치고 날이 환하게 개어 있었다. 통영에서 느리고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며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했더니 기분이 상쾌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다만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고 서울을 활보하자니 한 구석이 심히 캥기기는 해서, 이런 여행을 반복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통영으로 오는 먼 길은 프리미엄 버스 덕에 쾌적하였고, 남은 알바 마무리 리프레시로 충분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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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5. 31. 22:57

 

유일하게 잘하고 있는 매월 부산영화여행,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쉬기로 했으니 벌써 네 번째 꼬박 다녀왔다. 원래는 문화가 있는 날에 맞춰 가는 거였지만, 4월과 5월은 목요일 오후에 듣는 강의가 있어 날짜는 유동적으로. 이번 여행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넷플릭스를 볼 수 있는 숙소 예약, [판소리복서]의 이병구에게 반해 엄태구 배우를 좋아하게 됐는데 난 넷플릭스 유저가 아니므로 [낙원의 밤]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어제오늘 부산에서 [낙원의 밤]을 포함해 다섯 편의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

 

이번에도 9시 반쯤 집을 나서서 10시 20분에 부산서부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짜를 미리 잡아놓고 cgv서면의 영화시간표를 기다리는 일은 나름 흥미진진한데, 이번에는 롯데시네마의 무비싸다구로 [크루엘라]도 일요일 저녁에 예매를 해놓은 터여서 시간 맞추기가 조금 애매하였다. 하여, 어제는 12시 반에 [애플]을 보고 3시 체크인 가능한 숙소에서 조금 쉬었다가(원래 계획은 3시간쯤의 여유가 있으니 우암동도시숲이란 데를 다녀오는 것이었으나) 6시에 [크루엘라]를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애플]은 따로 기록해두고 싶을 만큼 좋았는데, 영화 보고 나온 직후 서울특파원이 전한 A의 소식에 너무 걱정이 되어 특파원과 통화하고 B와 통화하느라 뭔가 여운이 휘발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나름의 정리를 할 수 있었으면 싶다. [크루엘라]는 오랜만에 보는 디즈니 영화였는데, 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비주얼의 향연에 푹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언젠가도 느꼈지만 애플워치류를 차고 영화를 보는 이들의 머리 넘기기와 목 스트레칭은 극장에서 매우 주의해야 할 만한 일이라는 걸 심히 느꼈고, 앞의 옆자리 관객이 두 시간 넘게 반복하는 덕에 신경이 쓰여 끝나고 말해주고 말았다. 방해가 될 거라는 걸 모르고 하는 행동이었던 것 같아서 매우 친절하게, 하지만 애플워치류를 착용하고 영화관에 갔다면 누구든 뒷사람을 염두해주면 좋겠다.

 

1박 2일 내내 몸이 너무나 무겁고 뼈들이 뻑뻑하고 특히 허리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아파서 사실 힘이 들었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뒤쪽 허리뼈가 끊어질 것도 같고 이게 디스크가 터졌다는 증상일까 싶기도 했는데, 당장 어찌할 수는 없는 관계로 숙소에 와서는 잠시 쉬었다가 [낙원의 밤]을 보았다. 액션과 폭력 장면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 안타깝게도 절반 이상이 그런 장면들이어서 좀 힘들었고, 나름 각을 잡고 집중해서 보았으나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나만의 진리를 재확인하는 시간. 영화를 보고 났더니 유난스레 힘든 몸은 생리를 시작하셨고, 5월의 마지막 날이니 좀 일찍 돌아가서 이것저것 정리하자고 다음 날 영화는 두 편만 보기로 한 게 참 잘한 일이 되었다. 저리고 쑤시고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는 몸을 뒤척거리느라 새벽에 겨우 잠들었고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동시에 틀어놓고 어수선하게 오전을 보내다가 숙소를 나왔다.

 

오늘의 영화는 [비커밍 아스트리드]와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둘 다 좋아하는 아트2관이었는데 내가 예약한 통로 건너 자리에는 두 번 모두 같은 할아버지가 앉아 상영 내내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드셨다. cgv명씨네에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희끗한 머리의 어르신을 마주칠 때면 괜히 반갑기도 하고 나중의 내 모습이 저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었는데, E06번을 차지하신 할아버지는 정말 괴로웠다. [비커밍 아스트리드]는 관객이 3명뿐이어서 시작할 때 나는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도 그놈의 부스럭 소리는 어찌나 잘 들리던지. [쿠사마 야요이] 입장했을 때 E06에 데자뷰처럼 또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보고 내심 기겁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자리를 옮겼고 역시나 부스럭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cgv서면도 포기하면 나는 더 물러날 곳이 없으므로, E06님이 설마 매일 출근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고 잊어버릴 생각이다. 다음 달에 또 같은 공간에서 만나지는 않기를.

 

4시쯤 영화가 끝나고 5시쯤 출발하는 통영행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영화 다섯 편 본 것 말고는 달리 한 일이 없지만, 그래도 참 피곤하여 멍 때리고 씻고 났더니 서울특파원님께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어제 A를 걱정하며 통화했던 B에게 오늘 정말 멘붕할 만한 사건이 생겼다는 소식, 너무 걱정이 됐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일단은 그냥 알고만 있기로 했는데 마음이 참 그렇다. 좀 아까 오늘의 시를 필사했는데 다시 읽고 옮겨적으니 새삼 참 좋아서 멀리 A와 B에게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참았다. 대신 한 달 전에 강구안 뒷골목에서 이 시를 함께 보며 '락단하고'를 해설대로 무릎까지 치며 읊어댔던 지인들과의 텔방에 전달. 감히 '시의 마음'을 빌어 내 좋아하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전하고 싶었지만 차마 오글거려 말았고, 이 텔방이라도 있어 참으로 고마운 것이다. 

 

유월이 시작된다. 내일도 모래도 무비싸다구를 빌어 영화 한 편씩을 볼 예정인데 [슈퍼노바] 때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고,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알바를 내가 차질없이 잘 해나가기를 바라고, 인스타그램 공지를 보고 망설이다가 약간은 충동적으로 신청해 연락을 받은 글쓰고 책읽는 작은 프로젝트의 첫 만남이 유쾌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의왕 사는 지기의 집에서 하기로 한 책모임에 참여하고 그 김에 유월에는 부산 대신 수도권영화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음... 함께하는, 멘붕 중일 B 생각에 마음이 그렇네. 암튼, 음... 유월은 오월보다는 조금 덜 민망하고 아주 조금 더 부지런하게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본 영화와 읽은 책을, 욕심내지 않고 기록하는 것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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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4. 20. 23:34

 

 

뭔가 이것만 굉장히 잘하고 있는 느낌이다. 원래 부산영화여행은 '문화가 있는 날'에 맞춰 마지막 수요일에 진행하는데(유서 깊은 척), 이번 달에는 수목요일 오후에 교육 듣는 게 있고 다음 주 목요일부터 지인이 놀러올 예정이어서 어제오늘 다녀왔다. 서울에 살 때도 교통비 들여 외출할 때엔 두 건 이상의 용무 처리를 선호하는 편이었고, 실은 매사에 그런 편이다 보니 부산에 갈 때도 당연히 그렇다. 4월 들어 주 4일을 교육 듣느라 바빠져 책도 별로 못 읽었지만 그래도 중고서점에 팔 책 2권을 챙기고, 얼마 전 오빠가 휴대폰을 바꿔준 덕에 오래 쓴 아이폰7과 고이 모셔뒀던 아이폰5도 팔려고 챙기고, 통영에는 매장이 없는 더바디샵 클럽회원 생일선물도 받아오는 것과 더불어 이틀 동안 여섯 편의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9시 반쯤 집을 나서 다음 날 저녁 9시 반쯤 집으로 돌아오는 36시간 동안, 그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촘촘하게 계획대로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오랜만에 열심히 산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영화는 절반쯤 좋았고 절반쯤 쏘쏘였는데, cgv서면삼정타워에서 [서복]을 볼 때 맥주 몇 캔과 안주를 잔뜩 싸들고 맨 뒷자리 중앙에서 자기네집 안방인 양 영화 내내 떠드는 두 사람 때문에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짜증이 났다. 그들과 같은 열이었던 나는 영화 시작 후에도 계속 떠들길래 두 열 앞으로 자리를 살짝 옮겼는데, 그 자리까지도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와서 도저히 못 참고 한 번 더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들에게 자리 옮기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고 정말 놀랍게도 영화 내내 가끔은 너무 큰 소리로도 떠들어서 내 앞쪽 열에 앉은 사람까지 주의를 주듯 뒤돌아보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영화도 그냥 그러했지만 그 두 사람 때문에 불쾌하고 몰입도 안 되고 짜증이 나는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한두 사람이 부러 뒤돌아 그들을 째려보는 것도 봤는데, 이미 불콰하게 취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고 그래도 문화시민이라는 듯 쓰레기를 챙겨나가는 그들의 손엔 커다란 비닐봉지가 두 개나 들려 있더라. 소풍 왔니. 어쨌든 엔딩 크레딧 끝까지 보고 나갔는데 화장실에 들렀는지 그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고, 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영화 볼 때 계속 떠들어서 너무 불쾌하고 방해가 됐다고 다음에 다른 데에서는 그러지 말았음 좋겠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남성은 이미 좀 취한 듯한 발음으로 미안하다고 하고 여성은 그에게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던데, 그들의 소음은 남성의 소리가 훨씬 우세했지만 어쨌든 '대화'였다. 얼마 전 통영에서 [모리타니안]을 볼 때도 두 커플이 경쟁하듯 떠들고 휴대폰 불빛 발산하고 왔다갔다해서 미친 건가 싶었는데, 이번엔 다른 양상으로 최악이었다. 자신들의 언행이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체 뭘까? 이해할 수 없다. 민망은 했는지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와도 타지 않길래 쌩하고 혼자 타고 내려왔는데, 삼정타워를 나올 때는 앞서 가던 남성이 무거운 유리문을 두 번이나 심히 젠틀하게 잡아줬다. 혹시 [서복] 같이 봤나? 중년커플의 비매너에 질려서 부러 그런 걸까 싶을 만큼.

음... 쓰고 보니 이번 부산영화여행의 최대 이슈는 4월 19일 저녁 7시 15분, cgv서면삼정타워 8관 맨 뒷좌석에서 [서복]을 본 중년남녀의 만행이었던 것 같다. 다행인 건 그것 빼고는 대체로 괜찮은, 알찬 여행이었다. 영화를 여섯 편이나 몰아봤더니 너무 소비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짧게라도 감상을 정리해봐야겠다. 영화 보고 뭔가 기록하지 않으면 '봤다'는 것밖엔 기억할 수 없고, 그건 좀 쓸쓸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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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4. 1. 22:20

 

 

설 연휴에 서울 다녀오느라 2월은 쉬었고, 3월의 마지막 수요일이 31일이다 보니 1-2회차 사이의 텀이 길었다. 1박 2일 영화 본 후 통영국제음악제 이날치 공연을 함께 보기로 한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통영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일정도 고려했으나 지인이 나름 독립운동 중인 관계로 무산되었고, 부산에 하루 더 머물고 금요일에 함께 오는 것도 생각했으나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3월 31일 아침 9시 반쯤 집에서 출발한 덕에 알라딘중고서점에서 읽은 책들을 팔고 예매한 대로 [117편의 러브레터]와 [스파이의 아내], [아이카]를 무사히 잘 보고, 다음 날 [파이터]를 본 후 바로 통영으로 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뒤풀이까지 하고 귀가. 세상 깔끔한 영화여행이었다. 31일의 영화는 모두 cgv서면 art2관이었는데, 1월에 [438일]을 볼 때는 편안한 리클라이너 좌석이 살짝 부담스러웠으나 한 번 경험했다고 적응이 되어선지 무척 만족스러웠다. 다만 문화가 있는 날이라 관객이 적지 않았고 앞 줄의 휴대폰 불빛이 가려지지 않는 각도이다 보니 이따금 짜증이 나기는 했다. 다음 날 [파이터]는 임권택관이어서 살짝 아쉬웠지만 극장에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방해요소 없는 쾌적한 환경이 매우 만족스러웠더랬다.

영화를 이어서 보면 완전히 우연이지만 연관된 어떤 맥락이 생기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117편의 러브레터]는 1945년, [스파이의 아내]는 1940년대 초반이 배경이어서 자연스럽게 전쟁과 역사 속 개인의 선택, 운명 따위에 대해 생각이 옮아갔다. [아이카]와 [파이터]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20대 여성이 각각 모스크바의 '불법체류자'와 서울의 탈북자로 살아가는 힘겨운 생존과 관계 맺기를 보여주었다. 주인공을 조명하는 관점이나 스타일은 많이 달랐지만, 소수자로 살아가는 존재가 처한 취약함과 마주하는 고통이 신랄하게 혹은 덤덤하게 전해지는 영화였다. 모두 궁금했고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영화들이어서 참 좋았는데, 차분히 감상을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통영 와서 뒤풀이로 본 [아무도 없는 곳]이 의외로 그저 그랬는데, 24시간 동안 4편의 영화를 본 이후여서 다소 소화불량의 상태였던 것도 같고, 엣나인의 화려한 홍보에 기대가 과했던 것도 같다.  

3월 22일부터 [백석 정본 시집]으로 하루에 한 편씩 백석 시인의 시를 필사하는 카카오 프로젝트100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 접한 건 학창 시절이었지만 간헐적으로 들춰보고 매혹되곤 하다가 통영행을 결심하고 이따금 내려올 때마나 그의 흔적을 찾아보고 다시 시를 읽으며 더 좋아진 시인이다. 지난해 가을 통영에서 한 달 살 때 [백석 평전]으로 통영에서 책 모임을 하느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집중해 읽었더니 더욱 매료되었고, 매일 한 편씩 읽고 필사를 하는 건 또 새로운 느낌이다. 부산 가며 필사노트를 깜빡한 탓에 난감해하다가 영화 티켓 뒷면에 시를 베껴 적었다. 

첫날 서부산터미널에 내려 사상역 지하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카트를 끌던 한 아주머니가 길을 물으셨다. 난 잘 몰라서 말씀드렸더니 그 사이 다른 두 분의 아주머니가 길을 알려주시고 에스컬레이터에서 개찰구까지 원래 알던 사이처럼 웃고 떠들며 함께 가셨다. 다음 날 서부산터미널에 가려고 사상역에서 내릴 때는 고속버스 시간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앞에 계시던 아저씨가 카드 태그 안 하신 걸 모르고 내가 먼저 태그를 하고 바로 이어 아저씨가 태그를 하셨다. 다행히 빠져나오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좀 놀라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뒤돌아보신 아저씨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구 밀도 낮은 통영에 거의 혼자 있다 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잠깐 스치며 느끼는 감정도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꽉찬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니 현관 앞에는 나를 기다리는 대저토마토 5kg가 있었다. 며칠 전 엄마가 주문을 부탁했는데 집주소 선택을 잘못한 탓에 전날 낮에 우리집으로 배송됐다. 사먹은 적 거의 없는 토마토를 저렇게 많이 보유하게 되었지만 금요일에 지인이 오니 함께 먹고 가는 길에 나눠줄 수도 있어 다행이다. 이참에 나도 토마토랑 좀 친해지면 좋고. 정적인 일상이 계속되어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좀 움직이거나 하면 바로 몸 상태가 달라진다. 대충 집 정리하고 샤워하고 났더니 윗 입술의 한 부분이 빨갛게 부어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몸이 으슬으슬하다. 4월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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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1. 28. 22:09

 

어제 11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코로나19 때문에 시외버스가 앱의 시간표대로 운행되지 않아서, 12시 25분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1시 40분에 도착했으니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보통버스를 탔더니 자리도 불편하고 버스 자체가 오래되기도 해서 전혀 쾌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무척 답답하고 힘이 들었다. 중고서점에 팔려고 가져간 문지에서 나온 [어린왕자] 자수버전을 버스에서 읽었는데, 아주 어렸을 때 읽고 다시 읽으니 몇몇 에피소드 외에는 무척 새로웠지만(역자 후기를 보니 어린이용으로 다시 번역했다고 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듯) 그림책 잠깐 읽는 데도 멀미가 나서 혼났다.

버스들이 빨리빨리 연결되면 2시 20분에 하는 [블라인드]를 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서면역에 도착하니 2시가 넘어서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1년에 서너 번은 여기저기 며칠씩 여행하는 편이어서 몇 년 전부터 야놀자앱에서 예약을 하는데, 서면역에서 가장 싼 숙소를 예약했더니 역시나 싼 게 비지떡. 교지 만들던 대학생 때 취재차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왔던 게 처음 부산행이었는데 그때 멋모르고 잡았던 남포동 뒷골목의 숙소, 불결하고 허름한 여인숙 같았던 여관이 떠오를 정도였다. 

텔레비전에서 <유퀴즈온더블럭>을 하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엠씨들이 이동하느라 탄 택시의 기사님이 첫 번째 문제를 맞추고 상금 백 만원을 타셨다. 구경하던 시민 중 한 분이 한 달 월급 벌었다며 축하하고 기사님이 수긍하자, 유재석이 진심 놀라는 게 느껴졌는데 사실 나도 좀 놀랐다. 최저임금의 절반보다 조금 많은 벌이라니, 말씀하셨던 시민이 자기 가족도 택시를 해서 안다고 하셨고 약간 감성적인 자막이 흘렀는데... 감성팔이라는 느낌보다는 예능프로그램이지만 애쓴다는 느낌이 들어 괜히 고마웠다. 출연자가 문제를 맞췄을 때 너무 좋아하는 조세호도 인상적이었는데, 연출한 표정이나 리액션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이석원의 글에서 남의 슬픈 일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게 더 어렵다는 얘기를 읽고 공감이 됐었는데,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함께 기뻐하는 조세호가 좀 달라보였다.

수요일의 영화는 [키드]와 [438일], 첫 영화가 5시 20분 시작이어서 멀지 않은 부산시민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나가는 길에 알라딘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팔았는데, 무위도식하는 주제에 영화여행까지 하는 뻔뻔함을 약간 상쇄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사 둔 책을 묵히지 않고 읽고, 책짐을 줄이고, 돈도 생기니 일석삼조. 앞으로도 부산영화여행 올 때 숙박비 정도는 책 팔아서 충당해야겠다는 의지가 절로 생겼다. 

부산시민공원은 2010년 하야리아기지 반환 이후 조성된 곳이라는데, 서울로 치면 용산미군기지 정도 되었던지 엄청 넓었다.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아서 전체 중 사분의 일 정도를 주마간산으로 둘러보며 걸었는데, 구역마다 테마를 정해 꾸미고 어울리는 조형물이나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듯 했다. 낮시간임에도 사람이 꽤 많았다. 숙소에서 부산시민공원까지 가는 길에서도, 서면이 번화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높은 건물이 많고 사람들이 많을 줄은 전혀 몰랐어서 낯선 도시로 여행 왔다는 실감이 확 들었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가 아니라면 코로나19 상황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서, 문득 옛날 배낭여행 갔을 때가 떠오를 정도였다.

cgv서면이 서면역 기준으로 부산시민공원과 반대편에 있어서 나름 열심히 걸은 덕에 통영에서 산책하는 것만큼 걸을 수 있었다. cgv서면에는 임권택관과 art2관, 아트하우스관이 두 개였고 내가 볼 영화도 그 두 곳에서 연달아 상영했다. cgv가 무비꼴라쥬니 아트하우스니 하며 예술영화전용관을 만들 때 처음에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괜히 재수없어 했는데, 알라딘이 영화할인쿠폰을 맥스무비에서 cgv로 바꾼 이후에는... 앱을 깔고 아트하우스클럽에 가입하고 영화 볼 때마다 쌓이는 포인트와 쿠폰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대자본에 대한 적의는 디폴트이므로 여전히 재수없어는 하지만, 연말 리뉴얼한다며 문을 닫은 cgv통영이 문을 열지 않는 게 아쉬운,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으로서... 솔직히 cgv아트하우스가 없다면 내 일상은 좀 더 각박했을 것이다. cgv아트하우스는 각종 쿠폰과 제휴할인 같은 걸 활용하면 가난하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내가 꽤 싸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영화관이기는 하다. 마음은 인디스페이스, 씨네큐브, 에무시네마 같은 곳에서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사실 cgv에서 대략 그 반값으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미안해요;;; 암튼, 그리하여 cgv서면 임권택관과 art2관에서 처음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art2관은 좌석이 무려 리클라이너여서 과한 안락함이 민망할 정도였다.

영화가 끝나고 금요일 밤인가 싶게 활기 넘치는 서면 거리를 구경하며 숙소로 돌아왔더니, 벽에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있었다. 순간 얼음, 에프킬라가 있길래 열심히 분사했는데 끄떡도 없고 혹시나 해서 방에 있는 전화를 들어 0번도 누르고 *도 #도 눌러봤으나 신호조차 가지 않아서 숨쉬는 얼음 상태로 거미를 한참 주시했다. 그러다 벽의 모서리 쪽으로 계속 올라가던 거미가 바닥에 떨어지길래 쓰레기통을 뒤집어 덮어놓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침대에 누워 [라디오스타]를 봤다. 얼마만인지.

다음날도 3편의 영화를 볼 계획이어서 1시 쯤엔 잠을 자려고 했으나 거미로부터 시작된 불안함과 쾌적하지 못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고 덩달아 잠도 안 왔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텔레비전도 틀었다가 휴대폰도 봤다가 유튜브 잠오는 소리도 틀었다가 했으나 뭔가 불편하고 팔다리도 저리고. 결국 4시가 넘어 잠들었고 10시쯤 일어났는데, 아직 때가 아니건만 생리 시작. 나이 먹으면서 주기도 통증도 컨디션도 점점 난조가 되어가는데, 하필 오늘이었다.

오늘의 영화는 [파힘]과 [어바웃 타임], [블라인드]였고 마지막이 5시 20분 시작이어서 안 그래도 좀 애매했는데, 몸 상태도 그렇고 버스 시간 때문에 동동거리게 되면 별로일 것 같아서 아쉽지만 [블라인드]는 취소했다. 체크아웃이 12시고 컨디션이 안 좋아 일찍 나가기도 그래서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조금 나오다가 꺼지더니 신호가 안 잡혔다. 여행 다니면서 모텔에서 많이 자봤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덕분에 평소처럼 라디오를 듣다가 나와서 첫 영화관인 cgv서면삼정타워로 갔다.

도보 10분 거리에 cgv가 두 개나 있는 게 신기했는데, 이름만 들었을 때는 지역의 오랜 랜드마크인가 싶었던 삼정타워는 1층에 무려 쉑쉑버거가 있고 층마다 빽빽하게 살 거리 먹을 거리 놀 거리가 입주해 있는 새 건물이었다. 서울로 치면 영등포 타임스퀘어쯤 되나 싶었는데(왜 자꾸 서울로 치는지는 나도 잘;;;) 무척 의외였던. 점심시간이기도 했지만 평일 낮인데도 전체적으로 아주 휑하지는 않아서 좀 신기했으나 영화관은 썰렁했고 영화는 나 혼자 보았다. 특이한 건, 영화 시작 전 영화예고보다 삼정타워에 입점해있는 음식점 광고가 많았다는 것 그리고 비상시 대피 안내 화면 한 편에 수어통역사가 있었다는 것. 문득 자막으로 나오는 내용 그대로인데 굳이? 싶기도 했지만, 수어통역이 있어서 나쁠 건 없는데 왜 처음 보게 되었을까 싶기도 했다.

[파힘]을 잘 보고 나와서 [어바웃 타임] 보러 cgv서면으로. 영화 보기 전 지인에게 전화가 왔어서 가는 길에 통화를 했는데, 이전 활동에 관한 용건이어서 이야기하기 민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거기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하기는 했다.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기까지 나름 많은 일들과 내딴의 갈등과 인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오롯한 혼자의 일상이 매순간 즐겁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으니까. 팀처럼 시간여행의 능력이 생긴다고 해도, 지금인 미래를 바꾸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바로 부산서부터미널로 이동해 6시 14분 버스를 탔다. 다행히 갈 때 탔던 버스보다는 쾌적했고, 그러나 창문이 열리지 않는 버스 안에서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게 역시 답답하기는 했다.

집에서 챙겨간 것들로 대충 때웠더니 배가 고파 맥도날드에서 슈슈버거세트 사먹고 버스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8시 33분. 고요한 우리 동네, 적막한 집에 들어서니 이제야 높은 건물과 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서면이 별세계처럼 느껴진다. 1박 2일이 꽤 길었던 듯 피곤하기도 하지만, 네 편의 영화가 나름 다 좋았어서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는 중에도 만족스럽다. 통영발 부산행의 과정을 경험했고 서면역 주변과 영화관에 대해 대략 알게 되었으니 다음 번은 좀 더 익숙하고 편안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숙소 선택이었는데 두 달에 한 번으로 줄이게 되더라도 숙소 만큼은 쾌적한 곳으로 예약하는 게 중요하겠다고,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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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13. 10. 23. 20:37

대체로 늘 그렇지만 언제나 어딘가는 긴급, 위기 상황이다보니 은근 자주 놀러 다니는 편이면서도 여행을 결정하기까지는 며칠쯤 갈등과 고민 코스프레를 통과의례 삼게 된다. 밀양이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내심의 목소리를 접어두고ㅠ 경주-부산-남해-구례, 에서 하루씩 머무는 메뚜기 가을 여행 출발.
'소쩍새 우는 밤 보문산 기숡에 아름다운 사람 만나 기뻐서~' 하는 이성원의 노래를 하염없이 리플레이하며 청승에 빠져있던 어느 날, 보문산에 가야겠다 생각하고. 근데 경주에 보문호랑 보문단지 있는 건 알겠으나 보문산은? 대전에는 있던데ㅠ 암튼 지난 여름 "다큐3일"을 보며 가끔 마주치면 언젠가~ 하고 잊어버리곤 했던, 11월이면 복선화 공사로 운행이 중단된다는 동해남부선. 게다가 태화강역에 내려 울산 현대차 명촌철탑을 향한 카메라에 감읍하여 올 가을에는 꼭 저 동해남부선을 타야겠다 생각하고.
해서 이번 여행의 일정이 대략 잡혔다. 예전처럼 물 샐 틈 앖는 계획을 짤 마음도 정신도 없는 덕분에, 또 일하는 단체에 분기별로 일주일씩 휴가가 있는 덕분에, 봄 가을로 며칠 짜리 여행은 마음만 있으면 문제없다 싶은 여유로움까지 더해졌고 마침 남쪽에 사는 지인들도 만나고 동행할 겸 부산에서 남해, 구례까지 4박 5일의 짧지 않은 여행.
지난 봄 강릉을 여행하며 호기롭게 선택했던 도미토리의 실패를 거울 삼아, 이번엔 게스트하우스의 1-2인실 예약. 이번 여행의 숙소들이 마음에 들면 나중에는 2-3일 정도 한 곳에만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아무려나 오늘 경주, 동대구역에서 환승을 한 후부터 먹구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내리자 곧 빗방울. 다행히 맞을 만한 수준에 낯선 길을 걷는 운치까지 더해져 괜찮았고, 숙소를 찾아 30분 여를 걷는 동안 여기가 경주다~ 증명하듯 시야에 들어오는 고분과 릉 들 그리고 낮은 지붕의 정겨운 골목. 역시 여행의 즐거움은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기와 광경을 흡입하는 게 아닐까 싶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나와 예전 교과서에서 봤던 황남리 고분군이니 하는 노서•노동고분군을 주마간산 지나 경주시내 구경을 나섰다. 시청이 어딘가로 이전하고, 말하자면 구시가인 모양인데 도시 전체를 관광유적화하려는 욕심에 정리되지 않은 도로에 세운 자잘한 적잖은 조형물과 안내판 들이 꽤나 조야해보여 아쉬웠던. 날도 스산하고 여행 앞두고 월,화 무리한 탓에 컨디션도 그닥이라 점심 겸 저녁을 먹고는 시내버스 탑승. 원랜 포석정에 가볼까 싶었는데 자리에 앉으니 밀려오는 노곤함에 정말 오랜만에 종점여행 결정, 내가 탄 500번 시내버스의 종점은 무려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로 추정되는 봉계. 경주 시내를 벗어나 이런저런 릉들을 지나 무슨무슨 농공단지와 농촌마을을 지나자, 좀 의아스럽게 모여있는 식당들로 즐비한 그곳에 한우불고기특구라는 입간판이 떡하니. 시내로 나갈 버스를 기다리느라 종점에 앉아있자니 조금 후엔 울산시내버스가 도착, 행선지에 반구대암각화가 있는 걸 보고 잠시 혹했으나 이미 어둠이 내리고 찬 기운이 온 몸에 퍼진 터라 다시 509번을 타고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야경을 볼 수 있는 어딘가로 나서기엔 온 몸의 기운이 쫙 빠져 버스에서 제대로 내린 게 가상한 컨디션, 이제 시작이니 조절해야지 싶어 비상식량으로 초콜릿과 과자까지 사들고.



오늘의 숙소는 안팎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호모노마드 게스트하우스, 외국인들도 적잖이 찾아오는 곳인 듯. 내가 예약한 작은 방은, 이제껏 내가 경험한 방 중 가장 작은 공간이 아닌가 싶다. 퀸사이즈 침대 너비에 50cm 남짓한 길이가 더 있는 정도, 일상에선 꿈도 못 꿀 검박한 공간도 나름 여행의 맛인 듯. 한 가지 큰 아쉬움은 화장실과 욕실이 모두 실외에 있다는 것, 게다가 씻으러 갔다가 바스켓에 담아둔 칫솔이 변기로 직진한 통에ㅠ 음.. 역시 난 게스트하우스랑 안 맞는다는 자위성 확인을 한 번 더. 나이도 있고 사회성은 없으니.. 이후의 여행에선 이런 점을 무겁게 반영해야 할 듯.
암튼. 이렇게 여행이 시작됐고 오늘은 컨디션 조절차 일찍 자고 내일 오후 2시까지 경주의 시간을 또 즐겁게 흘려봐야겠다. 실은 매우 좋아하는 불국사는 나중을 기약, 환상 속의 보문산 기슭 역시 나중을 기약. 하여 매우 수학여행스럽지만 숙소와 경주역에서 가까운 천마총, 첨성대, 안압지 정도면 딱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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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13. 6. 3. 03:54



흡족한 기분으로 흔쾌히 잠들고 싶었으나 전날 못지 않은 소음과 간만의 열폭도보로 다리가 아파 새벽까지 뒤척뒤척, 덕분에 아홉시 반쯤 숙소를 나섰다. 거주민마냥 동네 산책으로 해변을 걷고 어제 약속한 슈퍼집 강아지랑 다시 만나 작별인사. 





가까운 초당마을, 유난스런 간판과 몰려드는 자가용들을 피해 들어간 집에서 식사를 하고 허난설헌•허균생가와 기념관으로. 
늘어선 가게들 뒤로 이어진 주택가 길목엔 아담한 교회가 있었다. 



2003년 여름 강진 갔을 때 부러 남녘교회를 찾아가 십몇 년 만에 예배 드리고 어쩌다보니 어울려 놀다 하룻밤 신세까지 졌던 기억이 문득, 해남으로 넘어갈 때는 다른 목사님 차를 얻어타기까지 했으니 시종일관 폐쇄적 인간은 아니었던 듯도 하고. 암튼 주인이 외지인인지 두부부자인지 알 수 없는 예쁘고 번듯한 집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마나 된 집을 언제 어떻게 복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시멘트공구리만 선연한 생가는 슬쩍 보고, 아는 게 없는 덕에 살짝 알차게 느껴졌던 기념관 구경.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정원과 건물에 언발란스다 싶은 동상과 시비들이 좀 아쉬웠지만, 입구 양쪽으로 설치된 데크 경사로랑 화단의 안내문은 퍽 맘에 들더라. 애니로 만들어진 허난설헌과 허균에 대한 정보들을 보면서 물론 주인공들이니 더욱 그렇겠지만 새삼 참 멋진 양반들이었군~ 싶은. 





입구 안내판 왈 홍길동박물관이 지척에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 빙빙 돌다 물어보니 없어졌다 한다. 검색해보니 몇 년 전 소송에서 패소해 이름도 홍길동'전'박물관이 되었다던데 이젠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 게, 뭔가 홍길동스럽단 느낌도 들더라. 생가 담벼락 밖에서 두꺼비집 지키는 홍길동을 만난 걸로 만족. 잠시 주변 솔숲에 널부러져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해주고, 팔랑이고 말 마음이지만 매혹된 김에 허난설헌•허균시비공원으로.



거창한 걸 기대하진 않았고 어울리지도 않겠다 싶지만, 나름 찰라 추모의 마음을 담아 한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덩그러니 놓인 두 개의 시비와 딱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는 배경조형물 그리고 그 뒤에 새겨진 내용들을 읽으며 괜히 씁쓸해지더라. 허난설헌과 허균은 어쩌면 참 드문 소위 고위층 반인습•반체제(?) 인사들이었는데, 이들을 기리는 시비의 건립에는 천박한 인습과 체제의 수호자들이 앞장을 섰던 듯도 하고. 아이러니라고 하기엔 이미 당위가 된 관제 기념의 매커니즘을 다시 확인하며, 나 역시 모르지만 지난 시대에 생동하던 정신은 이렇게 활자로 박제되어 안전한 명망으로 둔갑하는구나 싶은. 그걸 아니까 집권자들은 자꾸만 뭉툭한 기념비들을 세우고 그걸 알면서도 한쪽에는 재해석을 확산할 힘이 없고, 뭐 그런 중에 기념은 풍경이 되고 낭만으로 추억으로 전락하고 그런 거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 그들을 되짚어 볼 열정도 여력도 없으니, 그래서 더 씁쓸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바다는 한 번 더 봐야지 싶어 안목해변에 갔는데 해맞이공원의 쩌렁쩌렁한 색소폰 소리가 과하게 반겨주시고. 동행, 아이러브유, 사랑의미로, 황진이 등 정말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랑하시는 덕에... 



코 앞 카페 테라스에 자리잡고서는 이어폰을 아니 꺼낼 수 없었다. 잠시 강릉bgm을 바꿔 두어달 사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있는 몇 곡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언제나 여일한 바다를 두고 유난과 청승을 떠는 게 우습긴 하지만, 오늘은 괜히 더 아쉽더라. 이어폰을 빼고 카페를 나서는데 거짓말처럼 울려퍼진 이제하의 '모란,동백'을 감사하게 마지막 곡으로 듣고 발길을 돌렸다, 이런 건 정말 신기하고 좋은 기분^^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세리머니가 민망하지 않도록 담담히 또 살다가... 답답할 때 하루 여행으로도 다시 오면 괜찮을 것 같다. '솔향'강릉은 내게 매우 fine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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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13. 6. 2. 02:00




자정이 되기 전 퇴근한 주인장과의 게스트하우스 놀이를 마치고 객들은 본격 "짝" 놀이를 새벽까지ㅠ 조식 메뉴를 짜파구리로 미리 정한 듯 식탁 위엔 다소곳이 두 종류의 라면들이ㅋ
숙소가 있는 강문해변에서 경포해변 방향으로 걸어오다보니 적당히 흐린 하늘 적당히 부는 바람에 여전한 바다까지 참 좋다. 




98년쯤이 마지막이었던 듯 한데, 올 때마다 들렀던 윌카페는 우후죽순 들어서 해변상가를 채운 가게들 보란 듯이 '25년 전통'을 내세우고 있고... 기억 속 경포해변 조용한 구석의 통나무집 카페는 어느덧 커피도시 강릉의 작은 터줏대감이 된 듯. 찾아가볼까 싶었던 테라로사가 이웃해 있는데 너무 쉽게 발견해 패스. 인적 드문 바다를 보며 해변 그네의자에 앉아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있으니 옛날 생각난다. 여유롭게 오늘 여행 시작-





아침엔 적당히 흐려 걷기 좋더니 오후가 되니 덥다. 강문해변과 경포해변, 경포호 주변을 걸으며 오전시간 유유자적. 15년 만이니 당연하다 싶지만... 트윈폴리오니 서유석의 "아름다운사람" 같은 옛 노래를 울리던 포장마차들은 흔적도 없고 잘 짜맞춘 데크길이 여기가 관광지요~ 하듯 이어지더라.






뭐 그도 나쁘진 않고, 당시에도 좀은 시대착오다 싶었던 풍경과 노래의 기억이 남아있는 걸로 만족. 암만 깔끔무쌍 인공미를 발휘해도 사람 사는 건 별반 차이가 없어선지, 지나치다 발견한 낙서 하나에 살짝 뜨끔하고 반갑고 즐거운 마음이ㅋ

그렇게까진 필요없는데 400년이나 됐다는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매월당김시습'선생'기념관- 죽은 후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칭해달라는 글을 남긴 떠돌이저항시인의 "이생규장전"을 교과서 밖에서 짧은 애니로 처음 만나며... 최씨처녀의 용기와 이생의 사랑과 둘의 '절의'가, 무엇보다 그 시절에 사랑과 낭만과 공상을 버무린 이야기들을 남기고 자유롭게 살다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존재가 새삼 멋지다 싶더라. 평일마냥 조용하고 사람도 없어 전세내다시피 널부러져 쉴 수 있었던 것도 보람찬 추억으로 남을 듯.







그러고는 강릉의 개념부잣집 선교장- 고작 며칠 전 알고서 '열화당' 내의 작은도서관에 괜히 꽂혀서 왔는데... 안타깝게도 작도는 직원이 그만 둬 당분간 개방 안 하며 별 거 없단 성의없는 답변을 들었다ㅠ만, 허세 얹은 기대가 나름이었던 터라 매우 아쉽. 그래도 이름이 민망할 만치 아담한 민속자료'전시관'의 간략 사연(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 '동진학원'였다가 여운형 선생 영어교사 재직시 일제 탄압에 폐교ㅠ;;) 괜히 반갑고, 어딜 둘러봐도 주인집의 일가친척친구지인 등 통칭 사람 좋아하는 개방적 풍모가 느껴지는 집 구경도, 적당한 나무그늘에 선선한 바람 부는 둘레길도 괜찮았다. 게다가 입구에 떡하니 원두막 흡연구역, 진정 개념부잣집이라며~* 







자, 그럼 나눌 이 없는 나의 '열화'는 이쯤 시전하고;;; 또 발걸음을^^

어차피 면허도 장롱이지만 여행할 때는 내 차가 있음 좋겠네 싶기도 하다. 선교장을 나와 걷다보니 이정표에 뜨는 오죽헌, 나름 조상인데 함 가볼까 했으나 입간판 보는 순간 풉. 



동했던 맘이 사라져 바로 옆 공방골목으로. 주말인데도 한산하고 문 닫은 데가 많았지만 몇 안 되는 가게들이나마 아기자기하고 무지 예뻐서 왔다갔다 한참 구경을 했다. 끊은 지 좀 됐지만 여고시절 대유행한 하드보드지 필통은 물론, 이후에도 한 상자질 했는데... 나름 편집증도 있고, 지금이라도 길을 바꿔 이런 거 함 해보면 어떨까 싶더라는.









나이를 먹으면서 그럴 일 없을 거라 자신했던 일들을 별 계기도 없이 자연스레 하고 있는 날 마주치곤 하는데, 오늘 아주 만발하여 저녁은 이른바 맛집에서 짬뽕을 먹었다. 시간이 맞으면 영화 한 편 볼까 했던 신영극장에서, "내가 고백을 하면"을 보고 싶다는 되도 않는 기대를 했던 터라 벽에 붙은 두 주인공 사인이 괜히 반갑고. 유명세와 인기에도 허름한 분위기에 무리 않는 영업시간을 고수하는 식당도 반갑고. 암튼 친절한 주인 덕에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는 드디어 궁금했던 '바그다드카페'로. 





이 영화에 특별히 열광하진 않았지만 그런 데가 있단 걸 알게 된 후에 한참 영화 챙겨보던 시절의 기억과, 수없이 많은 영화 중 한 편에 꽂혀 소도시에 섬 같은 카페를 내고 지키는 주인장에 대한 이상한 동질감이 느껴져 꼭 가보고 싶었고. 있는 동안 유일한 손님이어서 괜히 미안했지만, 그래도 화장실마저 참 맘에 들더라. 없어진 지 한참인 예전 좋아했던 카페들이 줄줄이 떠오르고, 여긴 언제 다시 와도 그대로라면 좋겠다 싶은. 물론 나중에 내가 할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도 함께 떠올리면서ㅋㅋ


정류장까지 한참을 걷고 또 기다려 탄 버스는 기사아저씨마저 참으로 친절하셔서 먹이로 챙겨온 에너지바를 하나 드리고, 걸어오는 길에는 무지 예쁜 슈퍼 강아지랑 내일 또 만나기로 약속. 



오늘도 주인장과 새로운 멤버들은 게스트하우스놀이 중이지만, 일찌감치 이어폰 꽂고서 하루를 복기하니 꽤 괜찮은 기분이다. 심히 촌스럽게도 강릉행 버스에서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가 듣고싶어 오랜만에 '창고'를 들었는데, 잊고 지냈던 이범용 목소리에 눈물 날 뻔 한 뒤 강릉 bgm은 이범용과 김창기. 지금은 "꿈의 대화", 꿈나라엔 외로움이 없다는 호소력 터지는 절규를 함 믿어볼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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