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2. 4. 18. 22:36

 

 

4월에는 매주 화, 수요일과 격주 토요일마다 듣는 강의가 있어 날짜 잡기가 애매했다. 3월 하순 거제에서 영화 몇 편을 보기는 했지만 4월 들어 cgv서면 아트하우스관 상영시간표에 군침만 흘리면서 중순을 지나고 있었다. 3월 10-11일에 다녀왔으니 오래도 되었고 4월엔 생일도 있으니까 선물 겸 2박 3일로, 여러 조건이 맞는 4월 21일부터 23일까지로 숙소 예약을 미리 해뒀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업데이트된 21일 이후 상영시간표를 확인하고 절망, 보고 싶은 영화들은 거의 다 수요일로 종영이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들 중에는 보고 싶은 게 별로 없었다. 혼자 비상에 걸려서 고심한 결과,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다음 날로 일정을 바꿨다.

 

원래 사전 계획 없이 안 움직이는 편이고 느긋하게 지낸 지 오래라, 1박 2일이지만 갑자기 급하게 준비하는 여행은 낯설다. 17일 삼문당 정밀아 님의 공연 소식에 반색했다가 공연비가 내게는 부담이어서 접었고 18일 오후 온라인 책모임이 다음 주로 연기됐는데, 주말 부산행을 위한 것이었나 싶기도 했다. 부산 서면까지는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질 때 3시간, 해서 보통은 오후 두세 시 영화를 시작으로 삼았는데 이번에는 꼭 보고 싶었던 [페러렐 마더스]를 12시 15분에 봐야 했다. 하필 답사 강의 겸 나간 김에 너댓 시간을 걷고 온 터라 많이 피곤했지만, 영화 보고 싶은 마음을 믿고 잠들었더니 잘 못 자고 뒤척거렸음에도 일찍 눈이 떠졌고 심지어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영화를 보러 가는 여유를 만끽했다.

 

첫 영화 시간을 당기고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들을 욕심내다 보니 일요일은 [페러렐 마더스], [루이스 웨인-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사랑 후의 두 여자], [고스팅 글로리아] 그리고 월요일은 [복지 식당], [태어나길 잘했어], [엄마와 나]까지 일곱 편의 영화를 몰아서 보는 무리 겸 호사를 누렸다. 부러 맞춘 건 아니지만 일요일은 외국 영화, 월요일은 한국 영화였고 생일에 [태어나길 잘했어]를 보게 되면서 별 것 아닌 게 딱 맞아 떨어지는 재미와 의미 부여도 가능했던, 꽉 차다 못해 보람찬 이틀이었다. 놓칠까 아쉬워 일정을 급변경한 게 전혀 후회되지 않는 괜찮은 영화들이 많아서 무척 행복했다.

 

영화 볼 때 뭘 안 먹기도 하고 팝콘이나 탄산음료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어서 매점 쿠폰은 사실 필요없는데, 지난해 생일콤보 무료쿠폰 버리기 아까워 교환했다가 좀 곤란했었다. 음료 하나는 대기 공간에서 혼자 있는 이에게 살짝 내밀었더니 다행히 고마워하며 받아주셨지만 팝콘은 결국 반 이상 버려야 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렇다고 무료쿠폰을 아예 버리기도 아쉬웠는데, 지난 1월 일요일에 영화 보러 갔을 때 우연히 키오스크 근처에 있다가, 아이를 동반한 엄마가 다가오길래 약간 우발적으로 여쭤보고 쿠폰 바코드를 찍어드렸었다. 이번에도 일요일이니 아이 동반 엄마가 있겠지 생각했는데, 다행히 딱 마주쳤고 놀라면서도 반가워하시는 엄마와 적극적인 아이 덕분에 기분 좋게 생일콤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별 것 아니지만 이것도 재미있는 일, 나 콤보쿠폰 또 있는데 다음에 아이 동반 엄마 만나면 또 써먹어야겠다.

 

며칠 전 엄마가 생일날 잘 챙겨 먹으라고 이것저것 잔뜩 보내줬는데, 미역국은커녕 오전에 김치사발면 하나 먹고 굶으며 영화 보다가 집에 오니 9시가 넘었다. 터미널에 내려 햄버거라도 사먹을까 하다가 관뒀는데, 너무 먹는 요즘이라 속이 좀 빈 느낌이 오히려 가뿐하다. 2박 3일 느긋하게 즐길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아직 나에게 '부랴부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도 반가웠다. 한 달에 한 번 부산영화여행은 역시 약간 치열한;; 느낌이 드는 1박 2일이 적당한 것 같고, 개봉 예정 영화들을 확인하며 5월은 12일과 13일로 미리 택일을 해뒀다. 그리고 영화는 맥시멈 하루 세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허리가 아프고 피곤하지만, 난 내일 오전 강의에 늦지 않고 잘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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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3. 12. 21:59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강의를 몇 개 신청했고, 다녀온 지 한 달이 다 되었으므로 부산에 다녀왔다. [리코리쉬 피자]가 내려가기 전에 보고 싶었고 [레벤느망]도 궁금했고, 아무려나 부산에서의 이틀은 통영 생활의 환기창이므로 일찌감치 숙소를 예약하고 영화시간표가 뜨기를 기다려 다섯 편의 영화를 예매했다. 2월 14일 부산에서 통영으로 돌아온 후 도서관 이용과 투표 말고는 내내 집에만 있었던 터라 간만에 버스 타고 터미널로 가는 길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괜히 새로웠다. 잠깐씩의 동네 외출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선거 다음 날이어서 아직 붙어 있는 거리의 특정 후보 현수막에 특히 눈길이 갔다. 무전동 우체국 앞에 붙은 걸 보고 약간 반색하는 마음이 되었다가 터미널 주변에서는 무려 3개나 발견했는데, 통영에도 이렇게 많이 붙어 있었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방역패스 중단한 지가 좀 되어서인지 밤 10시 이후에도 영화를 상영하는 덕에, 목요일은 오후 5시경부터 세 편의 영화를 예매했고 오후 1시가 다 되어서 집을 나섰다. 은행 들를 일이 있어 버스 시간보다 30분쯤 미리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신한은행에 갔더니 원래 있던 365코너는 기계가 다 빠진 상태고 가까이에 무인화점이라는 새 간판이 붙은 곳은 공사 중이었다. 시간도 남고 국민은행이라도 가야지 싶어 찾아갔는데 횡단보도 신호등을 기다리며 보니 지점을 철수한 듯 출입문을 가로질러 현수막 안내문이 붙어 있고, 근처에 새로 연 듯한 365코너가 있어 거기서 볼 일을 볼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은행 창구 철수나 무인화 전환 등에 대한 뉴스를 가끔 접하는데, 자주 들르던 곳은 아니지만 새로운 불편함이었다. 가속화되면 됐지 역진할 리는 없을 텐데, 자본 입장에서야 절감되는 게 많겠지만 좋은 흐름은 아닌 것 같다.

부산에 도착해서도 여유로웠다.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숙소에 짐을 놓고 한숨 돌리고, 당선 인사 현수막이 걸려 있는 거리를 지나 영화관으로 갔다. 이번에 예매한 영화들은 어떤 이유로든 모두 궁금한 작품들이었는데, 결과적으로 1번과 5번은 별로였고 나머지는 꽤 좋았는데, 특히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압권이었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영화들이 다 실패였더라도 이 영화 한 편 때문에라도 부산에 올 이유가 충분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좋았다. 다음 날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피그]와 시간이 겹쳐서 좀 고민을 했었는데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잔잔한 드라마인 데다 대배우들의 연기 덕에 푹 빠져서 볼 수 있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선호하지 않는 스릴러 장르지만 [판의 미로]와 [셰이프 오브 워터]가 참 좋았으므로 선택했는데, 전반적으로 장황하고 지루한 데다 엔딩도 뻔해서 이게 뭔지 감독에게 토로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차라리 순서가 바뀌었다면 영화의 여운을 음미하며 귀가할 수 있었을 텐데 싶지만, 다 가질 수 있나. 집으로 오는 길, 벌써 다음 달을 기대하며 [6번 칸] 개봉도 다시 한 번 소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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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2. 16. 10:48

 


다소 무리하지만 며칠간의 여행에 이어 부산영화여행을 결정한 이유는 [듄]의 아이맥스 재상영 때문이었다. 통영과 부산에서 한 번씩 보면서 나도 SF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그러나 SF고 뭐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는 티모시 샬라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듄]을 아이맥스로 볼 수 있다니. 그러나 얼마 후 무려 비틀즈의 마지막 루프탑 라이브 다큐가 단 3일만 아이맥스로 상영된다는 낭보를 접했다. 지난해 북펀딩 소식에 반색하고 몇 달을 기다려 얼마 전 당도한 [비틀즈: 겟 백] 책을 이따금 넘겨보던 중이었고, 수많은 마니아에 비하면 소소하기 그지없지만 나 역시 그들을 많이 좋아하므로 참으로 아름다운 콜라보 일정이 되었다. "Don't let me down" 라이브를 유튜브로 몇 번씩 돌려보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야말로 기뻤다.

일요일 4시에는 IBK기업은행알토스와 현대건설의 배구 경기가 있으므로, 비틀즈 다큐를 본 후 숙소에서 배구를 보고 나와 [온 세상이 하얗다]와 [원 세컨드]를 보고, 다음 날의 메인은 [듄]이지만 오후 3시대이므로 그 앞에는 시간 맞는 영화를 무료쿠폰으로 보는 것으로 적당한 일정이 짜여졌다. 하지만 코로나19로 V리그 여자부 경기가 중단되었고, 몇 시간을 숙소에서 때우는 게 아깝기도 해서 일반관 무료쿠폰으로 [나의 촛불]을 추가로 예매했다. 오전에 집을 떠나 거가대교를 통해 도착한 부산은 드라이브 코스로 참 좋았다. 함께한 여행의 여운을 나누며 부산에 당도해 A와 B와 차례로 헤어져 서면에 도착, 날은 많이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여수와 통영의 바닷가와 섬에서 느꼈던 해방감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도심은 또 그 나름대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영화관이 있기 때문이다.

첫 영화 [비틀즈 겟 백: 루프탑 콘서트]를 객석에 앉아 기다릴 때는 그야말로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아주 어릴 때 63빌딩 어딘가에서 아이맥스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영화였는지 그냥 어떤 영상이었는지도 가물하고 뭔가 압도하는 자연이 내게 쏟아질 것 같았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이후 수십 년간 아이맥스를 경험한 적이 없는데, 그 처음이 비틀즈의 마지막 라이브라니 감읍할 일이다. 노래 한 곡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는데, 영화가 끝나자 마찬가지였는지 박수를 치는 이들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소리를 보태며 괜히 막 벅찼다. 기대했던 만큼의 엄청난 박진감이나 웅장한 사운드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반 세기 전의 비디오와 사운드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만방자한 감상일 테고, 다양한 화면 분할 편집이 반복되어서 작은 화면에서 봤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기는 했다. 길게 선 줄에 합류해 A3 포스터와 아이맥스 스탬프까지 찍으며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고 영화관을 나왔다.

숙소에 들러 잠시 숨을 돌리고 세 편의 영화가 줄줄이 기다리는 영화관으로, 2박 3일의 여행 끝이어서 약간 불안은 했지만 적당한 러닝타임의 영화들이었고 보면서 피곤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혀 예정에 없었던 [나의 촛불]은 쏘쏘했고, 강길우 배우의 출연 말고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던 [온 세상이 하얗다]는 의외로 흥미롭고 인상적이어서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원 세컨드]는 설을 맞아 올라갔을 때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두 영화는 art2관이어서 쾌적하고 편안했고 꽤 늦은 시각 프런트 불빛이 꺼진 고요한 영화관을 나서는 것도, 걸어서 5분이 채 안 되는 숙소까지 가는 길도 모처럼의 흔쾌한 도심 체감이었다(고 썼지만 불과 열흘 남짓 만이다).

부산영화여행의 숙소에서는 주로 지난 <방구석 1열> 방송을 보는데, 얼마 전 새로운 시즌의 공동진행자로 새로 영입된 인물에 대한 기사를 보고 몹시 낭패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실제로는 일면식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언행과 이미지로 판단하고 싫어하는 일이 부당하거나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tv를 연결하지 않고 지내는 이유 중 큰 부분이 무심코 틀어놨다가 무방비상태로 '싫은 연예인들'을 목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난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고 흐린 눈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버스럽거나 요란하거나 저열하거나 등등의 매우 싫어하는 특징을 보유한 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궁금해도 아예 안 보게 된 지 오래다. 한 달에 한 번 두어 편이 전부였지만 이제 <방구석 1열>마저 끊어야 하나 싶어 괜히 억울하고(?), 그래서 일요일 밤과 월요일 오전 몇 편을 몰아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 날 첫 영화는 봐도 안 봐도 그만이었지만 체크아웃하고 3시까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선택했고, [신과 함께] 시리즈의 첫 편을 보았지만 큰 감흥이 없었던 데다 대만판은 대놓고 이십대 이하를 겨냥한 듯한 구성과 연출이었기 때문에 정말 킬링타임 영화가 되었다. 대망의 [듄] 아이맥스 체험은 나오기만 해도 재미있는 티모시 샬라메의 존재감과 스케일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정체감이 묘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모양새였고, 덕분에 뭔가 0에 수렴하는 쏘쏘의 결과에 이르고 말았다. 기존 아이맥스 개봉 때 간접적으로 접한 반응들을 생각하면, 서면 아이맥스관의 좌석 단차는 의외로 낮아 앞 사람의 머리가 화면을 가리기도 했기 때문에 용산과 서면의 물리적 차이인가 싶기도 했지만, 용산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비교할 방법이 없다. 

그러하였으나, 이번 부산은 [비틀즈 겟 백: 루프탑 콘서트]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온 세상이 하얗다]가 좋았기 때문에 의외로 무감했던 아이맥스 [듄]에는 연연하지 않으며 통영으로 돌아왔다. 집을 비울 때 늘 그렇듯이 각종 쓰레기들은 정리했지만 오전에 함께 나서느라 두 손님이 개어둔 침구류는 방에 그대로여서, 이제 치울 일만 남았구나 싶어 마음이 귀찮으면서도 시원해졌다. 누군가 와도 좋지만 가도 참 좋은, 나만이 아니라 혼자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느끼는 심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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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2. 16. 09:55

 


많이 묽어졌지만 2007년 이후로 십 년 넘게 2월 11을 맞는 마음은 여느 날과 달랐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2007년 2월 11일 새벽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에서 불이 났고 수용된 열 사람이 목숨을 잃고 스무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다.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사흘 뒤 '북핵 타결'이라는 어마어마한 뉴스에 묻혀버렸고, 엑스포 실사단의 방문을 앞둔 4월 초에 장례가 치러졌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한족과 중국동포였고 사망자 중에는 임금체불로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우즈베키스탄인도 한 분 계셨다. 이주단체에서 일한 지 석 달쯤이던 당시 여수에서 한 달 반 정도를 지내며 난생처음 어떤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고, 장례가 끝난 뒤 무력감과 회의감에 젖어 일상으로 돌아왔다.

 

담담하게 회고하기에는 이후의 크고작은 일들과 마음속 부침이 간단치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몇 년 후 이주단체를 떠났으니 말할 계제가 못된다. '여수'와 관련된 여러 기억은 2월 11일 즈음이 되면 복잡한 부채감과 함께 다시 떠오르곤 했지만 5년 전 10주기에 오랜만에 내려가는 것으로 얄팍하게 상쇄하며 마음으로 안녕-을 고했었다.

 

2007년 봄 여수에는 중국와 우즈베키스탄에서 날아온 유족들, 병원에 입원한 한족과 중국동포 부상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이 함께였다. 비교적 친해졌던 유족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담당처럼 챙겼던 부상자가 치료를 위해 출국 후 다시 입국해 연락을 해왔을 때 만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여수공대위의 경험은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진 대신, 부산과 일산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이 인연으로 남았다. 15주기라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2월 11일 세 사람이 여수에서 만났다.

 

 

 

통영에서 여수는 고속버스가 자주 없어 진주에서 부산 지인 A의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덕분에 잠깐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는 것으로 처음 진주에 발을 디뎠다. 버스 타고 1시간 내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 여럿 있는데 영화 보러 cgv거제에 몇 번 간 것 외에는 진주가 처음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로 흐르는 남강 풍경을 잠시 구경하고 여수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도심의 널찍한 도로와 높은 건물들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통영과 비교하는 걸 의식하고 좀 웃겼다.

 

일산 지인 B는 새벽 비행기로 여수에 내려가 오전에 지역 분들과 추모제를 치르고 한 카페에 대기 중이었다. 5년 만에 가본 여수출입국 주변은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의 카페에는 가득히 내리쬐는 햇살이 그리 높지 않은 여수출입국 건물 덕에 완전히 차단되어 주변이 온통 음지처럼 느껴지는 건 그대로였다.

 

 

 

민망하지만 아주 짧게 묵상을 드리고 주변을 잠시 걸었다. B에게서, 적극적인 시의원이 있어 어쩌면 내년쯤 출입국 앞 시 부지에 작은 추모비가 세워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공대위 활동 이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몇 년에 한 번 여수에서 만나며 희생자들을 잊지 않을 수 있게 작은 돌 하나라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잊고 살았지만 끈질기게 기억하고 활동한 이들 덕분이다.

 

물리적 기념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권력과 성공을 상징하는 관제 조형물이 아니라면, 더구나 타지에서 억울하게 죽고 다치고 금세 잊혀진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아예 잊혀지지는 않을 수 있도록 작은 기념비 정도는 세워졌으면 좋겠다. B는 언젠가 돌아가신 분들의 자식이 한 번은 여기에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돌아가신 분 대부분은 중국동포와 한족이고, 그들에게 한국은 마음만 먹으면 찾아올 수 있는 나라니까.

 

 

여수에서 만난 감회가 남다르기는 했는데 B가 15년 전 한 달 반쯤 지내며 오가던 여수 시내 곳곳을 무척 상세히 기억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몇 년 후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를 들어봤냐며 연락을 해온 것도 B였다. 계속 이주 단체에서 일하며 백서를 내고 보호소 감시 활동을 해온 그의 15년에 '여수'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잠시나마 여수에 함께할 수 있게 된 것도 실은 그의 덕분이다.

 

공사 중인 진남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바닷가를 걸었다. 여수와 통영은 이순신 장군과 진남관, 세병관 때문에 뭔가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아기자기한 통영과 달리 너르고 탁 트인 바닷가 광장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역시 내게는 매력적인 스케일은 아니었다.

 

우리 셋은 십 년 동안 길게는 한 달 넘게 짧게는 1박 2일 정도로 너댓 번 여수에 함께였는데, 그리 오래 전도 아니건만 무슨 이야기가 나오면 그게 언제였는지 각자 분분하고도 불분명한 기억이 허다해 좀 웃겼다. 아무려나, B가 언젠가 모두 함께였다가 자전거를 타고 어떤 터널을 지나 혼자 갔었다는 만성리 해수욕장을 마지막으로, 짧은 여수행을 마치고 통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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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1. 15. 13:45

 

 

2월 초가 설날이라 1월 마지막 주말 서울에서 책 모임이 잡혔다. 주말과 설 연휴에 영화를 볼 테니 이번 달엔 부산행을 건너뛸까 했지만 [프랑스]가 꼭 보고 싶었고 시간이 된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도 다시 보고 싶었다. [프랑스] 개봉에 맞춰 날짜를 잡았다. 연초에 함께한 지인들 덕분에 가리비 삶기 경험치와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는데, 조개류 좋아하는 부산 지인이 떠올라 연락하니 마침 시간이 맞았다. 2007년 여수에서 일로 만난 지인은 멀리 살면서도 꾸준한 인연이다. 내가 일을 그만둔 후 서울 출장길에 세상 화려한 케이크를 사들고 와 축하해줬고, 통영에서 집 구하느라 한 달 살 때는 차 몰고 와서 1박 2일 알차게 놀고 먹으며 생긴 음식물쓰레기를 싸들고 돌아갔다. 멀지 않은 덕도 있지만, 이사 후 세 번째 방문에 부산국제영화제까지 치면 최근 가장 자주 보는 지인이다. 안 맞는 옷이었다고 나는 떠나온 바닥에서 당연한 삶인 듯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서, 만나면 잊고 지내던 단정한 마음가짐 같은 걸 환기하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상영 중이기는 했지만 시간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지인이 목요일 저녁 모임을 마치고 서면에서 만나 통영에 함께 오기로 한 덕에, 하루에 세 편씩 꽉 채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수요일 오전 집에서 나와 부산에 갔다. 중고서점에 들러 챙겨간 책을 팔고 1시 20분에 시작하는 [전장의 피아니스트]를 시작으로 [노웨어 스페셜], [그린나이트]를 봤다. [그린나이트]가 특별히 장기상영 중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봉 당시 보려니 시간이 안 맞기도 했고 난해하다는 후기들이 많아 많이 망설였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30분쯤 간격으로 깔끔하게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숙소로, 또 영화를 보기는 그래서 <방구석 1열>을 봤다. [세 자매]와 [단지 세상의 끝]을 함께 다루는 회차를 봤는데, 김선영 배우가 나와서 좋았다. 언젠가 자비에 돌란의 [마티아스와 막심]과 프랑소와 오종의 [썸머 85]를 함께 다뤄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잠자리가 바뀌니 새벽까지 뒤척이느라 10시쯤 일어났다. 그래도 시간이 많아 느긋하게 이것저것 먹고 늘어져 있다가 12시 5분에 시작하는 [해탄적일천], 이후 [프랑스], [비올레타]로 올해 첫 번째 영화여행을 마쳤다. 세 편 다 괜찮았지만 큰 여운이 남거나 정말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올해는 [6번 칸]이 꼭 개봉했으면 좋겠다. 영화를 이어 보고 나니 허기가 몰려와 햄버거를 먹고 지인과 만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알라딘중고서점에 갔다. 계륵이 된 럭키백 할인을 사용하기 위해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들을 살피며 골랐다. 지인 덕분에 낑낑거리며 들고가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호사다. 그러고도 10,800원의 잔액이 남아 아득하지만, 럭키백의 유혹에 다시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은 굳건해졌다. 모임을 마친 지인을 만나 통영으로, 밤의 드라이브는 즐거웠다. 창원 즈음에서 길을 잘못 들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시간쯤이라 운전한 지인에게 크게 무리는 아닌 듯해서 다행. 적잖은 부산행 중 가장 깔끔한 여정이었다, 지인님 고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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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12. 23. 23:57

 

 

숙박대전 쿠폰 덕분에 올해 마지막 부산영화여행은 2박 3일로 계획하고 일찌감치 숙소를 예약했다. 마지막 주 수요일에 맞추려니 너무 연말이었고 날짜를 당기되 성탄 직전의 북적거림은 피하고 싶어서, 그리고 IBK기업은행알토스의 경기 일정이 18일과 23일이기 때문에, 12월 20일부터 22일까지로 결정하고 매우 흡족하였다. 아, 그런데 기다렸던 [드라이브 마이 카]가 23일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고, 예약을 변경하자니 쿠폰이 날아가게 생겨서 에라 모르겠다, 하루 더 늘렸다. 마침 이번에 볼 영화 중에는 러닝타임이 5시간 반인 [해피 아워]도 있었기 때문에, 2박 3일은 너무 빠듯하다는 마음의 소리를 매우 수렴한 결정이기도 했다.

부산행 11시 45분 버스를 타야 첫 번째 영화인 2시의 [돈 룩 업]을 안전하게 볼 수 있는데, 11시가 다 되어서 집을 나서게 됐다. 지도앱에서도 버스정류장 안내 스크린에서도 정확한 버스 도착 시간을 적절하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터미널 향하는 길에는 늘 약간의 불안과 초조가 동반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지도앱의 도착 예정시간은 39분이었지만 버스정류장 안내 스크린에는 아무 정보도 뜨지 않았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므로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니 몇 분 지나서 터미널행 버스가 왔다. 보통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월요일 오전은 원래 그런 것인지 정류장마다 내리고 타는 승객들이 있었고 토성고개 사거리에서는 긴 신호에 걸렸다. 마음이 바빠지니 그때부터 계속 걸리는 신호들이 야속했고 사람이 없는 버스정류장에서도 서행과 잠시 멈춤을 잊지 않는 훌륭한 기사님께 속으로 '빨리 좀...' 자꾸만 텔레파시를 보내게 됐다. 고요한 버스 안에서 혼자 마음의 말을 줄곧 내뱉고 있자니, 마스크를 쓰고 조용히 앉은 다른 승객들도 나처럼 속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졌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이 공간의 어떤 차원은 꽤 시끌시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터미널 버스정류장에 내린 게 42분, 다행히 출발 직전 부산행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고 기사님은 통로에서 티켓을 걷는 중이셨다. 내 자리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아계셔서 멈칫하며 "자리 맞으세요?" 했더니 빈 자리에 앉으라는 식의 반응, "네?" 했더니 마침 곁에 있던 기사님도 마찬가지 말씀을 하셨다. 뒷쪽에 빈 자리가 있어서 거기에 앉기는 했는데, 마음은 납득이 되지 않아서 계속 생각이 났다. 다행히 좌석의 반쯤은 비어 있었고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모두 앉을 수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그렇다 쳐도 기사님은 정해진 자리에 앉도록 안내를 해야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이면 좌석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별 일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정해진 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 대한 가볍지 않은 스트레스와 함께 '질서'를 좋아하는 나를 새삼 느낀다. 어려서 '공중도덕'을 주입받은 세대인 데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고 타인과 피해를 주고받는 걸 싫어하는 나는, 이런 상황을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예매한 첫 영화를 놓칠 일은 없어졌으니, 2021년 마지막 부산행의 액땜 삼기로 했다.

터미널에 내려 서면역으로, 알라딘중고서점에 가서 챙겨온 책을 팔고 cgv서면삼정타워로 가니 시간이 딱 맞았다. 통영에서도 [돈 룩 업]을 짧게 상영했지만 영화관에 갈 때마다 무례한 관객들 때문에 불쾌해졌던 경험이 강렬해 차라리 영화를 놓치자 했었는데, 다행히 부산에서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재밌게 읽고서 별과 하늘 이야기에 대한 마음의 문턱이 조금 낮아졌고, 같이 늙어가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귀여운 티모시 샬라메도 궁금했는데 영화가 무척 깔끔하고 재미있어서 시작이 상쾌했다. 2박 3일 예약한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 한숨 돌린 후에 cgv서면에서 [피부를 판 남자]를 봤다. 이번 달 모임 책으로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었는데, 영화에 그 책과 닿는 부분들이 많아서 흥미롭기도 하고 정연하게는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서는 넷플릭스를 살펴보다가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았다. 예전이지만 두세 번 봤고 좋아하는 영환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또 새로웠다.

다음 날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던 [티탄]을 첫 영화로 보았다. 수상 이력과 '충격파'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이전 몇 편의 영화에서 보고 좋아하게 된 뱅상 랭동에 대한 믿음이 주효했다.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해 걱정했지만 다행히 잘 일어나서 무려 조조로 상영되는 영화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영화는 공식 러닝타임이 328분인 [해피 아워], 어렸을 때 동숭씨네마텍에서 심야에 본 [킹덤]이 내가 본 가장 긴 영화였는데 정확한 러닝타임은 기억나지 않는다. 10분의 인터미션 덕에 적절한 휴식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상영관이 리클라이너 좌석인 art2관이어서 몸도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티탄]과 아마도 가장 긴 [해피 아워]를, 고작 10분 텀으로 보고 나니 몰입과 흡수의 낙차에서 오는 불균형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컨디션 봐서 한 편 더 볼까 했던 생각은 지우고 숙소로 돌아가 쉬는 걸 택했다.

원래대로라면 마지막 날이었을 수요일에는 조금 부담없이 세 편을 보기로 했다. [끝없음에 관하여], [노트르담], [아멜리에]. 영화제가 아닌 부산영화여행에서는 여지없이 cgv서면 아트하우스 두 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 중 시간이 맞고 조금 더 당기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데, 3일차에는 [해피아워] 덕분에 임권택관의 상영작을 줄줄이 보는 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러닝타임이 짧고 긴장도나 자극도도 낮은 영화들이었는데, 프랑스 영화 두 편은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굳이 찾아보지 않았을 것도 같다. 마지막 날의 숙소는 cgv서면을 오가면서 눈여겨보던 곳이었는데, 시설은 좀 노후했지만 극장에서 아주 가깝고 창밖 풍경이 보이는 드문 곳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전반적으로 깔끔했지만 암막스티커로 가려진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 벽이어서 답답한 숙소에서 이틀을 묵었던 탓인지, 이제야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tv에서 무료 영화를 찾아보다가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발견, 러닝타임이 1분인 관계로 대여섯 번을 반복해서 보았다. 어느 때보다 영화에 많이 의지하며 지내고 있어서인지, 일종의 정보로만 알고 있던 1895년 12월 28일의 역사적 사건을 뒤늦게나마 경험하게 된 것에 약간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당시 영화를 본 사람들의 경이와 충격을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1895년의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어도 누군가 영화를 처음 만들고 상영했겠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신사동에 위치한 뤼미에르 극장에 가끔 갔었는데, 세 개관이 있었던 그곳에서 난생처음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경험을 했었다. 재수생이었던 나는 학원을 땡땡이치고 당시 많이 좋아했던 연극배우 이얼 님이 주인공인 [짧은 영화의 끝]을 보러 갔고, 매표소에서 권하는 [은밀한 유혹]과 [지중해]를 물리치고 꿋꿋이 티켓을 샀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극장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순간의 생경함, 영화가 시작된 후에도 닫히지 않는 출입문과 커튼을 내가 직접 닫고 쳤던 기억이 아직도 있다. 영화는 이얼 님이 나왔다는 것 외에 별 감흥을 주지 않았지만, 극장에서 오롯이 혼자의 처음 경험은 강렬했던 것 같다.

다음 날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통영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으므로 영화 목록을 둘러봤는데 [스모크]가 있었다. 얼마 전, 곧 크리스마스네 생각하며 다시 보고 싶어진 영화였다. 비디오테이프는 가지고 있지만 십수 년 플레이하지 않은 데크가 제대로 작동할지 알 수 없고, 몇 년 전에 클리너를 사긴 했지만 귀찮아서 테스트를 미루고 미루는 중이다. 이번 성탄에는 클리너로 청소를 하고, 두 개 있는 비디오테이프로 테스트를 하고, 성공하면 [스모크]를 다시 보겠다는 생각을 며칠 전 의식의 흐름처럼 했었는데, 신기했다. 하비 케이틀의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모크]의 오기는 많이 좋아했고 깊은 주름이 잡히는 그의 미간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젠가 그가 [라스트 갓 파더]에 출연했다는 소식이 오랫동안 의아함으로 남았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가 [라스트 갓 파더]에 출연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니고 난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참 오래도 의아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의아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그런 의아함 속에는 알지도 못하면서 심형래 감독을 무시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암튼 [스모크]를 플레이해 루비의 이야기까지 보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 오전에 나머지를 보았다. [스모크]의 백미 중 하나는 마지막에 흐르는 탐 웨이츠의 "Innocent when you dream"이기 때문에, 체크아웃과 영화 시작 시간을 고려해 그 부분까지 보느라 영화의 20%쯤은 1.2배속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스모크]는 기억 속 이미지보다 더 재미있어서, 집에 가서 비디오테이프 테스트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기대와 기다림 그리고 숙박비 써가며 하루 더 부산에 머무른 성의에 충분히 답을 해준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세 시간, 미동도 소리도 없이 함께 숨죽이며 몰입하는 객석의 공기까지 완벽해서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익명의 연대감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하루키의 책은 두어 권 읽어봤을 뿐이고 영화의 원작이 수록되었다는 [여자 없는 남자들]은 낯설었지만 읽어보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알라딘중고서점 부산덕천점에 들러서 그간 장바구니에 담아놨던 cd와 dvd 들을 잔뜩 샀다. 앞으로 책은 가급적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했지만 올해 참지 못하고 지른 럭키백 포인트가 아까워서 한 짓인데 사실 한심한 감이 있다. 하지만 덕분에 내년부터 럭키백은 없다,로 시작해 알라딘 탈플래티넘은 물론 일반회원 되기라는 구체적 목표가 탄생했으니 나름 교훈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통영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영화의 여운을 곱씹으며 아무것도 듣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팟빵에서 찾은 [드라이브 마이 카] 낭독을 찾아 1/3쯤을 들었다. 시작 부분의 내용부터 낭독자들의 목소리나 분위기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소설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영화는 상당히 많은 부분 각색이 된 것일 것 같고,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하다.

계획했던 대로 7시 전에 집에 도착해 IBK기업은행알토스의 배구 경기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졌잘싸, 세트스코어 2:3의 패배였는데 경쟁이든 승부든 자신들의 목표하는 최선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선수들을 보고 있자니 응원도 응원이지만 나는 뭘하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추석 이후 나는 통영에 산다기보다 집에서만 살고 있다. 영화가 아니면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데 통영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갈수록 난감한 일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다가는 집안 지박령이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부산영화여행은 좋아하는 영화들을 몰아보는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약간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인가를 시험하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무리없이 작동하고 있지만, 부산영화여행과 이외의 시간들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감 같은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무턱대고 잡아두려는 강박과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잘 흡수하고 소화하고 기록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온전히 내게 달린 일인데, 쉽지는 않다. 배구 경기를 보고서 베란다에 나갔는데 심은 지 일주일도 안 된 대파가 나흘만에 엄청 자라 있었다. 부산 가기 전에 하얀 밑동에 물을 줬는데, 놀랍다. 파만큼을 바라지는 않지만 나 역시 조금씩 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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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11. 27. 13:27



부산국제영화제는 독보적인 것이므로, 이번을 7회차로 친다(놀고 있다.). 더 잘 놀라는 뜻인지 숙박대전 쿠폰이 나돌았고, 덕분에 40여 일만의 부산행은 2박 3일로 정했다. 일찌감치 숙소를 예약해놓고, 늘 그랬듯 영화 시간표가 뜨기를 기다렸다. [듄] 아이맥스 재개봉에 반색했으나 너무 짧기도 했고 서면은 12월 1일이라는 비보를 접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개봉일부터 엄청 탐나는 뱃지 세트를 증정한다기에 속이 많이 쓰렸지만, 지방소도시 거주민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득함을 자찬하며 11월 3주차를 넘겼지만, 실은 아직도 아쉽고 아쉽다.

수도권에 비하면 아직 늦가을이지만 여기도 일교차가 커졌고 온수매트를 깐 잠자리는 한없이 아늑해 늦잠을 자곤 한다. 9시에 시작되는 김창완 아저씨 라디오의 오프닝이 나름 일상의 망가짐을 부축해줬는데, 요즘 며칠의 기상 시간은 심히 민망한 수준이 되었다. 몸이 좋지 않아 애드빌을 먹고 자는 일도 잦았는데, 반복되다 보니 새벽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늦게 일어나는 일이 많아졌다. 부산에 있는 이틀도 새벽 네 시를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사진으로는 번듯해보였던 숙소의 컨디션이 영 아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부산영화여행은 별 일 없는 일상에 의욕과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숙소를 예약하고 영화 시간표가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계획할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즐거워지기도 한다. 24일, 다행히 9시 전에 일어나 빵을 챙겨 먹고 김창완 아저씨의 클로징을 들으며 집을 나섰다. 통영터미널에서 부산서부터미널까지는 1시간 20분 전후가 소요되니 먼 길은 아닌데, 터미널까지 또 극장까지 가는 길을 포함하면 3시간은 잡아야 하는 길이다. 별 것 아닌 것도 나도 모르게 머릿속 자동 시뮬레이션이 되는 스타일이라 현실에서 무언가 계획대로 되는 건 중요한데, 통영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건 버스 도착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앱에는 대략의 도착 예정시간이 뜨지만 믿을 수 없고 버스정류장의 정보도 들쑥날쑥하다. 언제 버스가 올지 알 수 없는 막연함은 1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고, 버스 타고 어딘가 가기 위해 운을 바라며 집을 나설 때마다 통영에 잘못 온 걸까 싶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그래도 10분 정도만에 터미널 가는 버스가 왔다. 날짜를 맞추기 위해 좀 급하게 읽어낸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팔고 첫 번째 영화 [어 굿 맨]을 보러 갔다. [아워 미드나잇]을 두고 갈등하다가 노에미 메를랑 믿고 선택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못지 않게 영화 자체도 감동적이었다. 다음 영화까지 약간 텀이 있어 숙소 체크인을 하고 짐을 두고 나왔다. 오래된 모텔을 리모델링한 체인모텔이었는데 무려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이 붙은 객실이었지만 천정이 너무 낮고 퀴퀴한 느낌이 들어서 좀 그랬다. [나의 끝, 당신의 시작]과 [파워 오브 도그]를 연달아 보고 여운에 취해 돌아온 숙소에서 화장실 변기 청소가 전혀 안 된 걸 발견했는데 시간이 늦어 그냥 넘기려니 내내 신경이 쓰여 잠을 더 설친 것 같다.

다음 날 첫 영화는 [연애 빠진 로맨스], 예전에 우연히 중간부터 보게 된 [최고의 이혼]이라는 드라마의 손석구 배우도 이름만 들었던 전종서 배우도 궁금했는데 덕분에 발랄하고 솔직한 요즘 로코를 오랜만에 봤다. 범죄 액션 스릴러 일색이라 이따금 독립영화가 아니면 한국 영화를 잘 안 보게 되는데, 로코든 드라마든 잔잔한 장르의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다음엔 [듄]과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통영에서 [듄]을 흥미롭게 보고 나도 SF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기도 했고 실은 그냥 티모시 샬라메를 보는 것만도 재미있기 때문에 다시 보았는데, 날짜를 맞출 수 없는 아이맥스 상영이 새삼 아쉬워지긴 했다. 나중을 위해 짧은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지만 나의 감상은 언제나 기억이 휘발된 후의 나를 위한 줄거리 정리에 집중되기 때문에 미뤄지고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즐겁게는 보았는데 한 번으로 끝이라는 게 벌써 아쉽다.

마지막 날은 이른 기상에 성공하면 [송해 1927] 조조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네시가 넘어 잠들었으므로 불가능했다. 일찍 잠들고 싶어서 애드빌을 먹고 불을 끄고 누웠지만 실패하고 무료 영화 목록을 살펴보다가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이야기]가 있어 플레이했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30분쯤 보다 말았다. 며칠 전 도서관 가는 길에 들은 팟캐스트에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서 우연치고는 운명적이라고 반가워했지만 열악한 화질과 자막을 인내하기 어려웠고, 이틀 동안 여섯 편의 영화를 본 뒤여서 무리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하여 잔뜩 늦잠을 자고 회복된 컨디션으로 [뉴 오더]와 [행복의 속도]를 보았고, 마지막 영화가 잔잔한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무리해서 알라딘중고서점 경성대부경대역점에 들렀다. 사들인다고 바로 듣고 보고 읽는 것도 아니면서 cd와 dvd와 책을 자꾸 사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올해도 덜컥 럭키백을 사버렸고 해서 올해의 럭키백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소장하고 싶은 것들을 이번까지만 사자고 마음먹었다. [내 사랑]을 비롯한 몇 개의 dvd와 좋아하는 책이지만 누군가에게 줘버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사들고 터미널로 향했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통영터미널의 배차 간격은 괜찮은 편이지만 저녁 7시 40분차 다음은 10시이므로, 조금 서둘러야 했고 버스도 전철도 앱에 뜨는 대로 딱딱 도착하는 대도시의 시스템 덕분에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나의 살던 소도시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다시 막연한 기다림을 동반했지만 다행히 20분을 넘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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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10. 17. 14:07

 

 

2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오라는 사람은 없지만 일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며칠이다. 사는 동안, 열리는 동안 늘 그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재작년에는 토요코인호텔 유료 멤버십에 가입하고 해운대에 묵으며 영화를 보러 다녔다. 멤버십은 6개월 전부터 예약이 가능해서, 작년에도 영화제 일정이 나온 뒤 예약을 했는데 코로나19 자가격리 시설로 지정됐다며 취소를 당부하는 연락을 받았었다. 마침 장거리 이사를 앞두고 마음이 분주하기도 했고 코로나19로 인한 변수도 있을 것 같아 한 해 건너뛰기로 했다. 올해도 미리 예약을 했었는데 역시나 자가격리 시설로 지정됐다는 연락에 취소했다.

올해는 메가박스장산이 상영관에 없고, 재작년보다 2년 더 늙었으니 해운대에서 센텀시티나 영화의전당까지 한시간여를 걸으며 영화를 보는 게 부담이 될 것도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부산의 동네책방도 둘러보고 싶지만 막상 영화제에 가면 영화 보는 일 말고 다른 걸 할 여유가 별로 없다. 올해는 영화제가 시작되는 주에 지인이 놀러오기로 해서, 후반부의 4박 5일 동안으로 정했는데 마지막 날은 폐막일이라 영화제 대신 cgv서면에서 나 혼자 뒤풀이 삼아 영화 두 편을 보고 돌아오기로 했다. 걷는 여유로움을 포기하는 대신 영화 사이의 한두 시간 텀에 잠시 쉴 수 있도록 센텀시티역 쪽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라고 자연스럽게 쓰기에는 나로서는 꽤 고민한 결정이었다. 센텀시티 인근에는 싼 숙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년 여성 백수로서, 이제는 가성비보다 쾌적함을 선택하는 자기애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48,200원이라는 거액을 숙박비로 치렀으며 후회는 없다.

남도 지인이 놀러와서 3박 4일을 함께하고 돌아가는 길, 나를 통영터미널에 내주는 것으로 부산행이 시작됐다. 날이 궂었고 따뜻한 음식이 좋을 것 같아 유명하다는 칼국수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지인은 직장 동료와 지인들을 위해 꿀빵을 사야했고 강구안에 널린 수많은 가게 중 줄을 길게 선 유명한 곳을 택했다. 한글날이 낀 연휴의 대체공휴일이어서 월요일이지만 관광객들이 많았고 10월 11일 오전의 통영 중앙시장 인근은 내가 미처 모르던 세계였다. 덕분에 꿀빵을 사는 데에만 30분이 훌쩍 넘게 걸렸고 터미널에서 나는 부산행 버스를 4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 터미널에 닿게 될 상황에서 지인은 통영도 시골이므로 버스에 먼저 가서 말한 다음 매표소에 들르면 된다고 마치 삶의 지혜를 알려주듯 말했지만, 나로서는 꿀빵 사는 줄을 서는 것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규칙하게 오는 시내버스도 40분 넘게 기다린 적은 없어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부산행 액땜이라고 억지로 생각했다.

덕분에 숙소에 들러 체크인을 하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첫 번째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깔끔한 계획은 불가능해졌다. 4박 5일 짐가방을 메고 영화관까지 걸어가기도 입장하기도 난감하고 민망했는데, 다행히 같은 영화를 보기로 한 부산 지인이 센텀시티역에서 픽업을 해주었다. 해서 주차장에서 아직 온기가 남은 꿀빵을 부산 지인에게 선보이고, 다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첫 번째 영화를 보러갈 수 있었다. 끝난 후에는 지인과 근처 버거킹에 가서 저녁을 먹고 각자 7시 영화를 보러 헤어졌다. 지인의 선택은 너무 긴 러닝타임 때문에 내가 포기했던 [파비안], 나는 온라인 GV가 끝나고 나와 지인의 차로 편하게 숙소까지 갈 수 있었다.

 

숙소는 좁았지만 쾌적했고 부산 도심에서의 하루 6만 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지만, 이번 예약은 홈페이지 이벤트로 할인된 가격이니 내년에도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암튼 나흘간 숙소를 오가며 아래와 같이 영화를 보았다. 이전보다 행사나 홍보물은 확연히 줄었고 <씨네21> 데일리마저 사라진 건 아쉬웠지만, 너무 많은 종이들이 버려지는 것도 사실이니 좋지 않은 방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 수익도 반토막일 테니 영화제 사무국에는 미안하지만, 1년 반 넘게 그에 익숙해진 탓인지 거리두기 좌석제도 편안하고 좋았다.

실은 어떻더라도 나는 좋았을 것이다. 할 일이 영화 보는 것뿐인 며칠을 보내는 건 천국이나 마찬가지니까. 숙소에서 영화관까지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숙소로 돌아가 잠깐 쉬고, 두어 번은 시간을 맞춘 부산 지인과 만나 수다를 떨고 사이 식사를 하며 나흘이 금세 지나갔다. 9월 말 메일함의 뉴스레터를 별 생각없이 클릭해 읽다가 "'그분'께 드리는 추천작'이라는 글을 보았고, 잠깐이었지만 따뜻했던 기억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사탕을 챙겼는데 어찌 됐든 다시 들고오지는 않을 수 있었다. 어른들에게도 버찌씨는 필요하고, 부산국제영화제를 고맙게 여기는 작은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 폐막일에는 각종 수상작들이 상영되기에, 나는 선생님이 보셨다는 [다함께 여름!]과 보고 싶었던 [바바라]로 cgv서면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몰랐는데 두 작품 모두 마지막에 '자막 부산국제영화제 제공'이라고 떠서 아주 적절한 피날레라는 느낌이었다.

 

2019년까지는 이렇게 알차게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기고 돌아가면, 곧장 바쁜 일상에 빠져들어야 했고 그래서 더욱 꿈결처럼 느껴졌었다. 실은 이번 영화제를 기다리면서, 하는 일 없이 한심하게 사는 건 의도치 않게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별 것 아니게 만드는 행위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살면서 짬 내서 영화 보고 책 읽던 때랑 매일 유유자적 놀면서 영화 보고 책 읽는 건 그 반짝임과 밀도가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다. 며칠 너무 행복했던 터라, 좋아하는 것들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 생활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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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모임에서 써야 하는 글이 있어 한창 들뜬 마음에 부산국제영화제 이야기를 주절거렸는데,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 되었다. 부산에서 연락을 받은 터라 다녀와서 부랴부랴 다른 글을 썼고, 돌아본 기억들이 정겨워서 남겨둔다.

 


뤼미에르극장, 씨네코아, 코아아트홀, 하이퍼텍나다, 로드쇼, 스크린, 키노, 으뜸과버금, 영화마을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20세기 말 20대를 보낸 내게는 하나의 선상에 존재하는 그립고 정겨운 이름들이다. 이 중 홀로 건재한 부산국제영화제는 규모와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여전히 마음의 고향 같은 느낌.

교지를 만들던 대학 시절, 취재를 빙자해 처음 찾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신세계였다. 이후 가을이 되면 영화 동호회 친구들과 <씨네21> 별책부록으로 나온 프로그램 책자를 들고 모여 수강 신청하듯 영화 시간표를 짜고 부산으로 달려가곤 했다. “영화인이냐?”, 엄마의 비아냥과 잔소리를 뒤로 하고 며칠씩 부산국제영화제로 떠나는 일은 20대 후반 몇 년간 이어진 가을 의례였다. 하지만 청춘과 축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없듯이, 나이를 먹고 일에 매여 지내며 자연스레 멀어졌다.

영화제가 아니면 갈 일 없던 부산을 다시 찾은 건 2011년 ‘희망버스’ 때문이었다. 마냥 즐겁고 설레는 영화제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지만, 몇 달 새 몇 번을 오가며 부산이 다시 친숙해졌다. 덕분에 욕심껏 짬을 내 오랜만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수 있었다. 'Piff'에서 'Biff'로 영문 표기가 바뀌고, 남포동과 수영만에서 센텀시티와 해운대로 주무대가 옮겨지고, 거대한 영화의 전당이 새로 문을 연 영화제는 낯설고 어색했다. 

이전에 느꼈던 소박함과 정겨움은 추억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휘황한 백화점을 통과해야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주인공인 적도 없지만 느닷없이 대상화된 듯한 착잡함 속에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오르며 불퉁해진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그 모든 불만이 사라지고, 어쩌면 평생 가볼 일 없는 낯선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2011년 이후 가을은 다시 부산국제영화제의 계절이 되었다. 사회단체에서 일했기에 어떻게든 휴가 일정을 맞춰 며칠이라도 짬을 낼 수 있었고, 보이콧에 동참하거나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례행사처럼 여기며 일상의 해방구 삼아 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암흑 속에 영사되는 영화는 다를 것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하루에 몇 편의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걸으며 며칠을 보내는 건 꿈같은 일이다.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나라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이국의 풍광도,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와 객석까지 전해지는 떨림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인들을 접하는 것도 행복한 추억.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중에는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 많고, GV의 어떤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도 정겨운 기억으로 박제되고는 했다. 

2013년에 봤던 [세바스티안]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 주인공이 페루의 고향 마을을 방문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GV에서 친형제인 감독과 제작자가 영화의 소재가 된 자전적인 경험과 작업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순서를 마친 후에는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직접 사인한 브로셔를 나눠 주었다. 별 것 아닌 종이 한 장에 담긴 그들의 마음과 수더분하면서도 진심 어린 태도에 마음이 일렁였고, 지금껏 책상 앞에 붙어 있는 브로셔는 매년 영화제가 다가오면 한 번 더 시선을 끌면서 반짝이던 순간을 환기한다.

가난한 단체 활동가이다 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궁화호를 타고 오가고는 했는데, 언젠가는 기차에서 읽으려고 챙겨간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목차에서 ‘부산국제영화제’라는 단편소설을 발견하고 마음이 반색했던 기억도 새롭다. 하는 일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숨 돌릴 구멍은 부산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았던 2019년에는 오랜만에 자비에 돌란의 새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을 만났다. 두 주인공의 예민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다룬 영화였는데 겪어보지 못한 상황임에도 깊이 이입이 됐고, 주체할 수 없는 흔들림을 상징하는 어떤 장면들은 이따금 선연히 떠오르면서 이후 몇 계절 동안 심란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고마운 영화가 됐다.

언제나 첫 번째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영화 보는 걸 좋아했고 어느 시기에는 하는 일과 별개로 마음을 폭 파묻으며 살았다. 어렸을 적 비디오 가게에 가면 셀 수 없이 많은 네모 상자 안에 숨겨진 무수한 이야기들이 경이롭게 느껴지고는 했는데, 지난해 코로나19와 이사 준비로 한 해 건너뛴 부산국제영화제를 기다리는 마음도 비슷했다. 9월 말, 온라인 예매를 앞두고 프로그램 pdf 파일을 다운 받아 시간표를 살펴보며 나도 모르게 슬며시 차오르는 황홀한 기대감이 반가웠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아무런 연고 없는 통영에서 살게 된 것도 시작은 영화였다. 저 멀리 남쪽 도시에 불과했던 통영이 십 년 전쯤 재미있게 본 [하하하]를 통해 궁금해졌고, 여러 차례의 여행으로 이어졌다. 서울을 떠나고 싶어 곳곳을 기웃거리던 마음에 백석 시인의 이야기며 영화 [판소리 복서] 등에서 접한 조각들이 덧붙여지면서 막연히 꿈꾸던 통영행은 현실이 되었다. 현실이 된 꿈은 그저 현실이고, 서울이며 부산에서 상영되는 궁금한 영화들을 고파하는 일상이지만 2년 만에 다시 부산국제영화제에 갈 짐을 꾸리는 마음은 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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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9. 24. 20:19

 


9월은 부산영화여행 대신 추석 본가 방문에 맞춰 수도권과 서울에 다녀오며 영화를 몇 편 봤다. 9월 17일 오후 수원행 버스를 타고 올라가 9월 22일 통영행 버스에 몸을 싣기까지 5박 6일 동안 세 군데서 자면서 의왕에서 서울로, 일산으로, 다시 의왕으로 또 다시 서울로 이동하는 바쁜 며칠이었다. 와중에 일요일에 [열망]과 [토베 얀손], 화요일에 [코다]와 [그대 너머에]와 [옐라]를 보았는데, 한 편 빼고는 다 좋았고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 기획전이 추석 연휴 이후에 본격적으로 상영된다는 게 무척 아쉽다. 하지만 10월엔 부산국제영화제에 며칠 갈 거여서 아쉬움은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금요일에는 늘 바쁘지만 연휴 앞두고 저녁 일정이 없었던 지인과 동네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지난 번에는 떠올렸으나 시간이 늦어 불가능했던 노래방에 갔다. 작년 11월 이사 직전 우리집에서 책모임을 하고 서울 떠나는 기념으로(?) 갔던 이후 처음이었는데, 역시 1년에 한 번 정도로는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걸 실감했지만 의외로 김목경 아저씨의 노래들이 있어서 신기했다. 비록 반주는 매우 구렸지만 "남은 건 하나뿐"이 있었고 "하룻밤"은 무려 mr 반주(그래도 구렸지만)여서 경이로웠으며, 두 노래를 꿋꿋이 부르며 가수의 남다름을 실감했는데 나중에 노래방 가도 또 부르고야 말 것만 같다. 

토요일에는 책 모임에 간만에 직접 참여해 이 달의 책이었던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책보다 준비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 나누기를 즐기는 지인 덕분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모임을 마치고는 얼마 전 이사한 일산 지인과 만나 니은서점에 함께 들렀다. 다른 지역으로 여행 가면 동네책방을 부러 들르곤 했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별로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서점]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궁금했었다. 약속 잡으며 얘기했을 때 마침 지인도 예전에 북토크에 간 적이 있다기에 더 반가웠고, 책방에 갔을 때 마침 손님이 우리뿐이고 북텐더분은 별로 신경 안 쓰시되 친절하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서가 곳곳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동네책방에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만 내 책을 사기에는 짐스러워 지인에게 책 한 권을 고르라고 권해서 선물했는데, 계산할 때 오픈 3주년 기념이라며 예쁜 파우치와 엽서세트를 주셔서 기뻤고 그건 내 몫이 되었다. 책방을 나와 지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재밌었는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버스를 잘못 탄 덕에 환승을 위해 내린 낯선 길을 걷고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과 일산 경계에 내려 천변을 걸었다. 마침 해가 지기 시작했고 신도시의 휘황함과 식물들로 우거진 천변 산책로의 호젓함 속을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정겨웠다.  

다음 날 아침 지인과 함께 집 주변을 산책하고 기한이 임박한 배라 기프티콘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10시에 문 여는 근처 쇼핑몰에 들렀다. 서울 살 때 집 근처라 자주 갔던 영등포 타임스퀘어랑 영화 보러 가끔 갔던 여의도 ifc몰이 떠올랐는데,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거 1도 없는 통영시민이 되고 보니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이삿짐 정리하며 가지려냐고 물었던 cd와 dvd, 책 등을 살펴보았고, 이사하며 남겨둔 물건들 중 나 역시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 괜히 반가웠다. 의미없이 버려지는 게 아까워 찜해뒀던 김현식 아저씨 기획 음반과 [커미트먼트] 말고도 버릴 거면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딱히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다행히 또 다른 지인을 떠올리며 그에게 먼저 물어보기로. 나중에 지인이 김현식 아저씨 cd와 [커미트먼트] dvd를 갖고 통영에 오면, 함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인이 준비한 모밀국수를 아침 겸 점심으로 맛있게 배불리 먹고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받으며 다시 서울로 이동했다. 

추석 연휴 직후 조기 종료된다는 무민 전시회를 성수동에서 보았다. 예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의 전시가 좋았어서 많이 기대했는데, '원화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과 달리 주요한 컨셉은 무민 연작소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공간마다 각 소설에 대한 설명과 관련된 작품, 조형물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고, 작가와 원화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나 4면으로 영상이 흐르는 공간도 있었다. 그냥 귀여운 캐릭터로만 많이 알려진 무민의 탄생과 성장(?) 배경 등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대체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아쉬우면서도 다행이었던 것은 마지막 기프트샵이었는데, 전시 라이센스 굿즈보다 기존에 여기저기서 판매 중인 무민 관련 물품들을 망라해놓은 것 같은 구성이었다. 덕분에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돈도 굳고 짐도 늘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예쁘고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딱 하나는 사고 싶었던 터라 아쉽기는 했다.

 

마침 개봉 중인 [토베 얀손]을 꼭 보고 싶었고, cgv용산에서는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열망]이 그 앞 시간 상영으로 잡혀 있어 시간을 맞추느라 전시를 아주 여유롭게 즐기지는 못했다. 아무튼 전시장을 나와 종종걸음으로 정류장을 향했지만 타야 할 버스가 떠나는 걸 보았고 한참을 기다려 다음 버스와 지하철을 탔고, [열망]의 처음 2~3분을 놓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아... 정말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만회할 수 없는 일은 있으니 뭐. 원래 예매한 자리로 가기에는 민폐여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어 있는 사이드 자리에 앉아 마치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는 듯 영화에 집중했는데, 그랬다. 정말로 금세 빠져들며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고, 흠뻑 빠졌다가 나왔다. 다음 영화 [토베 얀손]까지 보고 다시 의왕으로.

 

다음 날은 평소 아침 안 먹는 지인이 챙겨준 아침 겸 점심을 예의상 혼자 먹고 목욕재계한 뒤 서울 본가로 향했다. 자처한 일이지만 잠자리가 바뀌니 잠을 잘 못 자서 내내 피곤했고, 본가에 머문 2박 3일 동안은 약 50시간의 극한 인내와 경미하지 않은 금단 현상 및 그로부터 파생된 각종 심란함들로 인해 더욱 피곤하였다. 명절 연휴는 전날 오후에 본가에 가서 소소하게 음식 준비를 돕고 하루 잔 다음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한 뒤 친정집에 가는 새언니네 가족과 함께 나오는 게 십수 년 반복된 루틴이었다. 하지만 지인들 집에서 며칠 놀다가 간 주제에 꼴랑 하루만에 내려오면 엄마가 너무 서운해할 게 뻔해서 2박 3일을 잡았는데, 통영 사는 동안은 각오해야 할 일이지만 심히 고역이기는 했다. 내내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추석날엔 아침 먹고 나가서 영화 세 편 보고 해가 져서야 들어갔는데도 그랬다.

 

서울 떠나기 전까지 한두 달에 한 번은 만나다가 이번에는 어버이날 이후 처음이었는데, 생물학적 나이란 게 있으니 당연하지만 부모님을 보며 이전과 달리 '노인'이시구나 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 애틋함을 살갑게 표현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오글거리고, 어릴 적부터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한 생각이 부모님과는 달랐기 때문에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가능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며 느끼는 애잔함 같은 게 없지는 않지만 우리집의 경우 아직도 자식보다는 부모가 여러 모로 당당한(?) 편이고, 세상살이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 역시 판이하기 때문에 떨어져 있어야 나름의 다정한 관계가 유지되는 게 사실이다. 나만 원하는 대로 편하게 살겠다고 훌쩍 내려온 나쁜 자식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만... 수요일 저녁 집에 돌아왔을 때 느낀 안온함과 해방감, 그러나 동시에 엄습한 부채감 같은 것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반복될 것인가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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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1. 8. 30. 17:46

 

 

대구 사는 사촌의 디저트카페 바로 앞에서 주상복합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 8월 중순쯤 시끄러운 공정이 진행될 예정이라 휴가 겸 문 닫고 일주일쯤 와 있겠다는 말이 반가웠었다. 내심 기다렸던 8월 중순은 그냥 지나고, 공사 일정이 기약없이 밀리고 있고 당분간 가게를 닫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다는 소식과 함께 수다를 떨다가 즉흥적으로 내가 대구에 가기로 결정했다. 어렸을 때는 방학이면 외할머니, 작은 이모, 큰 이모, 큰집 식구들이 살고 있는 대구에 가서 이 집 저 집 다니며 노는 게 연례 행사였는데, 어른이 된 후로는 몇 년에 한 번 갈까 말까다. 마침 8월 마지막 주 영화 보러 부산에 갈 예정이어서, 부산에서 바로 대구로 가는 4박 5일의 짧지 않은 외유가 됐다. 

외가쪽 갖은 친척들과 일상적인 소통이 되는 사촌과 달리 나는 이모나 삼촌 및 사촌들의 연락처도 모르고 지내는데, 이모들은 지난 봄 놀러 온 사촌 편에 금일봉이며 용돈을 들려보냈고 사촌에게 걸려 온 영상 통화로 이모랑 안부를 나누고 고마움을 전했었다. 다 늙은 조카가 수 년 만에 가면서 빈 손인 건 민망한 일이라, 영화 보러 가는 길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중앙시장에 들렀다. 이모네들과 함께 먹을 회를 미리 택배로 주문하고 부산으로, 통영도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부산에 도착하니 일찌기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집중호우 때문에 거리 배수에 문제가 생겼는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에도 발이 푹 잠기는 상황이 되었고 신발은 물론 바짓단까지 다 젖어버렸다. 아무튼 첫 영화가 6시여서 숙소에 들러 짐을 두고 폭우를 뚫고 영화관에 도착해 [캐논볼]과 [자마]를 보았고, 다음 날은 [남색 대문]과 [박강아름 결혼하다]를 보았다. 영화 여행치고는 소박한 편수였는데 [남색 대문]만이 좋았다. [캐논볼]은 괜찮은 정도였고 [자마]는 새로웠지만 내 취향이 아니었고, 마지막 영화는 유일한 기대작이었지만 내게는 좀 고역이었다.

부산역으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탔다. 낯선 도시에서 타는 버스는 언제나 여행의 기분을 배가시키고, 부산역도 오랜만이라 부산국제영화제 오갈 때 긴 시간 무궁화호를 타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통영에도 기차역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몇 년 후 KTX가 다닐 예정이라지만 내가 좋아하는 기차는 무궁화호다. 2인 좌석 사이 칸막이가 없는 건 불편하지만 넓고 느리고 느긋한 느낌이 좋고, 아직까지는 부담 없는 가격도 좋다. 오랜만에 탄 기차는 퇴근 시간 전이어서 적당히 한산했고, 적당한 시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었다. 사촌의 가게에 간 것도 몇 년만인데, 조용하고 호젓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카페와 마주한 공사장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놀랐다. 통화하며 상황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보니 스트레스가 적잖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낮시간까지 대구에 있는 동안 어릴 때로 돌아간 듯 외가 식구들을 고루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 낮 사촌이 영업하는 동안 멀지 않은 책방에 가볼까 싶었지만 비가 내려서 주저앉았고 저녁에는 가게문을 조금 일찍 닫은 사촌과 작은 이모댁에 갔다. 십수 년만이지 싶은 사촌 오빠와 동생을 만났고 어릴 때와는 완연히 다른 거리감으로 각자 살아가고 있지만 막상 만나면 또 아주 어색하지는 않은, 친척의 세계를 경험하며 둘러앉아 통영에서 공수한 회를 먹었다. 너무 겉돌지도 깊이 들어가지도 않는 대화를 나누며 이따금 웃었고 자고 가라는 농담과 진담이 섞인 말을 뒤로 하고 사촌과 함께 돌아왔다. 다음 날은 지난해 경산으로 돌아온 큰 이모댁, 셋째 사촌 언니도 함께였고 역시 십 년은 된 듯한 만남이었지만 전날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의 핫한 카페에 갔지만 자리가 없어 큰 이모댁에서 과일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별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리가 길어졌고 내친 김에 사촌의 카페에서 멀지 않은 사촌 언니네 집에도 갔다가 돌아왔다.

대구는 코로나19가 창궐했던 초기에 직격탄을 맞은 곳이고, 사촌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이다 보니 대구에서의 시간은 심히 조신하게 흘러갔다. 영화라도 한 편 볼까 했지만 사촌과 함께 갈 수 없었고 혼자 가는 것도 마뜩하지 않아 사촌의 집인 카페 2층과 외가 식구들의 집 세 군데를 방문하며 3박 4일이 흘렀다. 부지런을 떨었다면 혼자서라도 책방 두어 군데는 둘러볼 수 있었겠지만 날씨도 그렇고 딱히 계획을 했던 것도 아니어서 이번엔 그냥 '윤명순의 후예'로서의 여행에 만족하기로 했다. 윤명순 님은 내가 사랑하는 외할머니다. 돌아가신 지 사반세기가 지났는데,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 그리고 외가 식구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아주 가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 방 옷장에는 지금도 어릴 적 외할머니가 손수 떠주신 스웨터가 고이 간직되어 있다. 사촌하고 수다 떨다가 얘기했더니 자기는 안 떠줬다고 했다,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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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