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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2.25 크리스마스, 책 모임
  2. 2022.12.20 52년+1일
  3. 2022.12.04 기쁜 밤
  4. 2022.10.09 음악
  5. 2022.09.27 오후의 당황, 유감
  6. 2022.09.07 어떤 기념일 기념 세 가지 기념
  7. 2022.08.13 처음이자 마지막
  8. 2022.08.09 완벽한 1박 2일
  9. 2022.08.02 결행
  10. 2022.07.23 요정
산책일기2022. 12. 25. 19:05



의미 부여한 지 오래인 크리스마스, 대략 또래들인 책 모임 성원들도 그러한 덕에 12월의 모임 장소는 통영이 됐다. 서울, 안산, 의왕에 사는 세 사람이 집으로부터 왕복 10시간 쯤의 거리를 이동해 1박 2일 모임에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고, 마침 내가 책을 추천할 차례여서 통영과 관련 있는 세 권을 후보로 정했는데 투표 결과 전영근 화가의 [그림으로 나눈 대화]로 결정되었다.

 

단체 활동하며 ‘자료’가 아닌 책은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어렵다며 의왕 사는 K가 지인들에게 제안한 책 모임의 첫 번째는 2020년 8월이었다. 활동 그만둔 지 두 달째를 보내며 다음 달엔 집 구하기 겸 한달살기를 예정하고 있었던 내 사정으로 9월에 [백석 평전]을 읽고 1박 2일 모임을 한 이후, 이번이 통영에서의 두 번째 모임이었다. 그때 함께했던 두 사람은 이번에는 불참, 이후 모임에 새로 합류한 L은 장거리 버스 이동을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편임에도 큰맘 먹고 함께했다.

 

이주한 후에 두 번은 명절 전으로 모임을 잡아 하루이틀 K의 집에서 신세지며 모임을 했었는데, 이래저래 번거로운 일이라 지난해 가을 이후 나는 온라인으로만 참여했다. 성원은 일곱이지만 보통 너댓이 함께했고 다들 바쁜 단체 활동가들이라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넘쳐나는 백수이자 혼자만 온라인으로 참여할 때가 많은 나는 사실 점점 심드렁해지는 참이었는데, 오랜만의 '청객'들을 기다리며 마음이 살짝 들뜨기도 했다.

 

해가 짧은 겨울 여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모두가 터미널에 도착한 4시쯤 바로 이순신 공원으로 향했다. 지난 통영 모임에서 동피랑을 구경하고 갔더니 이미 어둠이 내려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바다와 닿은 공원 곳곳을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 통제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구안을 걸어 저녁 식사를 하러 들어간 곳은, 처음 가본 나름 유명한 해물 식당. 생해물을 먹지 않는 한 사람을 고려해 굴 정식 3인분과 굴전을 시켰는데 가격을 고려하면 많이 부실한 느낌이 들었지만, 언젠가 중앙시장 내의 식당에서 회정식을 먹었을 때처럼 많은 음식이 남는 곤란은 없어 다행이었다.

 

중앙시장에서 안주로 먹을 회를 조금 사서 집 도착, 어엿한 책 모임이지만 이번에는 장거리 이동의 1박 2일 여행이 좀 더 우위를 점한 관계로 책 이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의 수다로 시간이 흘렀다. 기분이나 내려고 사둔 작은 치즈케이크에 얼마 전 사촌의 슈톨렌에 동봉되었던 트리초를 꽂으니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고, 초를 불며 마음속 바람을 떠올리면서 성탄을 맞은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경솔한 결정으로 조용히 다사다난했던 올해의 일들을 떠올리며, 새해에는 조금 다른 일상을 보낼 수 있길 바랐다.

 

베이글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봉평동으로 향했다. 통영까지 와서도 급한 문서 작업을 해야 하는 한 사람을 공간에 남겨두고, 전혁림 미술관을 둘러 보고 동네를 산책하며 올해 새로 그려진 벽화들을 구경했다. 며칠 전 알게 된 RCE세자트라숲에서의 전영근 화가 초대전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 갔는데, 아무도 없는 전시공간을 작가가 지키고 계셨다. 책을 읽고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반가워 하시더니 그림을 둘러보는 우리에게 와서 한 점씩 작품 설명을 해주셨다. 덕분에 '에스키스'가 그림의 밑그림 단계를 이르는 말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 추상 작품에 담긴 의미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집과 차에 책을 두고 간 탓에 도록에 사인을 받았는데, 예기치 않은 만남이 유쾌했고 멀리까지 온 이들과의 책 모임이 잘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공간으로 돌아가 특근하던 이를 태우고 내가 경험한 통영 최고의 맛집, 통통칼국수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버스에서 불편할까 싶어 칼국수 대신 경아김밥을 선택한 두 사람을 포함해 모두가 만족한 식사였고, 김밥을 하나 더 추가해 남김없이 먹고 나왔다. 터미널 근처 해안가에 자리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4시 남짓 떠나는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최대한 늦게 떠나겠다며 6시대 티켓을 끊은 한 사람과 남아 수다를 떨었다. 내가 일하던 단체에서 활동하는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에 지난 시간이 떠오르며 공감이 되었고, '그저 책 모임'이라고 생각했던 관계의 선이 약간 흐릿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배웅하고 헤어졌다.

 

고작 1박 2일이었는데도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피곤한 것이어서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아프고 방전 상태가 되었지만, 좀처럼 여행하지 않는 L의 좋은 추억 하나 더 쌓고 올해를 마무리하게 되어 고맙다는 메시지는 반가웠다. 안부 연락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으로서 대다수의 지인들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혼자만의 생활에 더 익숙해지고 은연중 모두와의 마음의 거리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가끔의 만남이 주는 좋은 에너지와 정적인 일상의 조화를 새삼 느끼는 1박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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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짜리는 상상할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하루 늦은, 소소한 챙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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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2022. 12. 4. 23:34

 


당연하게 여기던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인데 너무나 홀가분한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다. 마감일지를 거의 다 쓴 상태에서 소통과 전달이 있었고, 앞으로 온전히 혼자일 집을 되찾았다. 대략 계획하면서도 혹시 모를 변수를 고려해 미루기만 했던 제주행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했고, 서울에 가서는 M에게 이틀 신세 지기로 했다. 바닥으로 꺼졌던 의욕이 생겨나 작은 방 짐을 치웠고, 내일은 침구 시트를 세탁하고 대청소를 하고, 아무도 없을 때도 내 방이 아닌 상태였던 작은 방으로 책상을 옮길 계획이다. 가만히 있어도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어깨와 팔이 걱정이지만, 이번에는 몸이 마음을 잘 따라주었으면 좋겠다. 잃어봐야 소중한 걸 깨닫는다는 말이 진실이었음을 절감한 6개월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 상황이 종료되어 흔쾌하고, 경솔한 결정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음을 얻었다.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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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10. 9. 00:15



광주시립교향악단과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공연, 전날 당도한 교통 혼잡 우려며 실황 음반 녹음 안내 문자로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통영국제음악당에 여러 번 갔었지만 거리두기 좌석제가 해제된 공연은 처음인데 원래 내 차로 갈 계획이었다가 주차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관뒀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G가 도착하자마자 차를 타고 바로 출발했지만 공연이 30분도 남지 않은 시각이라 음악당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진입이 불가했다. 안내에 따라 주변 공터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몇 바퀴 돌다가 겨우 주차하고 음악당 로비에 들어섰다. 거리두기를 시행할 때도 통영에 살면서 가장 많은 사람을 본 곳이 음악당이었는데 그때보다 배는 많은 인원에, 90초 매진이었다는 공연 예매에 성공하고 2달 넘게 기다린 사람들이 뿜어내는 고양된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늘의 자리는 처음 경험하는 2층 베란다석, 급한 중에도 나름 무대와의 각도를 생각해 선택한 좌석이었는데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정면의 모습이 보이는 괜찮은 시야였다. 클래식 문외한이지만 유튜브 영상으로도 빠져들었던 연주를 곧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상기되었다. 합창석까지 오픈해 관객으로 꽉찬 공연장은 시작 전에도 조용했는데, 그럼에도 객석을 채운 이들의 기대감과 긴장감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화해 공간에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사면에 빼곡한 관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피아니스트의 부담이 지레 걱정되기도 하고, 무대 끝으로 엄청 붙여 세팅된 피아노를 보면서 중간 블록 앞 좌석에서 숨죽이며 연주를 지켜볼 누군가들이 조금 부러워지기도 했다.

 

5시가 다가오고 실황 음반 녹음에 대한 삼엄한 안내에 실내 분위기는 더욱 고요해졌는데, 교향악단원들의 입장에 이어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엄청난 박수와 환호가 쏟아져나왔다. 1부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E b장조 Op. 73 '황제', 전날 몇 번 듣기도 했고 익숙한 주제구 덕분에 금세 집중이 됐다. 지휘자의 손짓과 몸짓에 따라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악기들의 활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황홀경에 빠진듯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연주를 멈추고 교향악단의 연주에 맞춰 가볍게 몸을 움직이거나 지휘자를 주시하며 연주 준비를 하는 피아니스트를 보고 연주를 들으며, 눈과 귀만 있는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클래식 음악에 주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따안 따라라라라 딴딴딴딴" 하는 부분이 나올 때면 절로 감흥이 환기되었고, 짧지 않은 연주가 끝나고 터져나온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객석과 무대의 분위기는 한껏 뜨거워졌다. 기립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많았고, 지휘자와 단원들과 인사하며 미소를 보이고 호흡을 가다듬은 피아니스트의 커튼콜은 세 번이나 거듭되었다.

 

연주를 하는 이들도 듣고 보는 이들도 엄청 고무됐던 1부가 지나고 인터미션, 긴장과 몰입으로 잔뜩 열기가 오른 공연장을 잠시 나와서야 나는 2부 프로그램에는 피아노 연주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1부가 끝났는데 커튼콜 연주를 세 번이나 해준 피아니스트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준비랍시고 전날 오늘의 프로그램을 리스트로 몇 번이나 들어놓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스스로가 놀라워졌다. 그런 수준에 무딘 귀를 가진 내게도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감동이었고, 수많은 관객들을 사방에 두고도 피아노와 둘만 있는 것처럼 무아지경에 빠진듯 연주하다 금세 교향악단의 연주에 동화되곤 하는 모습 자체가 신기하고 놀라웠다. 1부의 연주를 몰입해 듣고 보면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나만 받은 건 아니었을 것 같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느끼는 것은 다를 테지만 나처럼 잘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감동과 흡인력을 발휘하는 연주와 존재 자체가 그를 게임 체인저로 만든 것이겠거니 싶었다. 

 

2부에서는 무대 중앙의 피아노가 빠졌고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와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내게는 그저 잔잔한 느낌이어서 전날 몇 번 들었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광주여 영원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들을 때와 달리 엄청나게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해 윤이상이 1981년에 작곡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외신을 통해 현장의 참상이 생생히 전달되었을 테고 해외에서 고국의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느꼈을 비통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곡에 담긴 느낌이었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몇 번 윤이상의 작품 연주를 들었지만 뭘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었는데, 영상이나 책으로나마 알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이어서도 그렇겠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연주가 끝나자 객석의 환호가 정말 뜨거웠다.

 

1부가 끝나고 터져나온 감격적인 환호가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피아노 천재를 향한 열광이었다면 2부가 끝난 후의 반응은 지휘자와 교향악단이 한 호흡으로 선사한 연주와 작품에 대한 감동적인 찬사였던 것 같다. 객석의 뜨거운 열기에 화답하듯 커튼콜을 거듭하던 지휘자 홍석원은 빨간 표지의 "광주여 영원히" 악보를 들어 가슴에 대고 인삿말을 전했다. 아둔하게도 그제서야 '광주'시립교향악단의 "'광주'여 영원히" 연주가 갖는 남다른 의미가 새삼 다가왔고, 어지간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클래식 무대에서 말로 전하는 인사가 암묵적인 권위의 약속을 깨뜨리는 진심의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교향악단의 공연을 본 건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이나 폐막 공연 서너 번뿐이지만, 그때마다 공연이 끝나면 벅찬 마음이 가득히 차오르곤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부터 가사가 있는 노래를 통해 위로를 많이 받아왔는데, 다른 결의 음악의 힘이 클래식에는 있는 듯하고 좀 더 알게 된다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무대를 선사해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다. 반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피아니스트 손민수가 출연한 대담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면서, 우아하고 정갈한 클래식 음악가들의 세상이 다른 시공간처럼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어떤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 기예는 전제일 뿐 영혼과 정신의 일이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삶과 연주이기 때문에 분석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 마음을 연 누구에게나 깊은 감동이 전해질 수 있는 것 같고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음악의 힘, 예술의 힘일 것 같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비슷한 마음이었을 G와 함께 공연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G의 차를 두고 내 차를 몰고 닭갈비를 먹으러 무전동으로, 유튜브에 20분 내외의 클립으로 올라오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열심히 보다가 얼마 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신기하게 잊히지 않았다. 먹방에 관심 없고 tv에서 누가 뭘 먹는다고 덩달아 먹고 싶어지는 일이 거의 없는데, 먹는 일에 집요한 세태를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영향을 받는 건지 요즘 낙이 없어서인지 희한하게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나오는 음식은 가끔 먹고 싶어진다. 하여 검색까지 해서 프랜차이즈 닭갈비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고, 뭔가를 먹으며 엄청나게 맛있다고 느끼는 일이 거의 없는 평소의 경험대로 역시나 그냥 그랬다. 그 식당이 문제였던 것 같지는 않고 나의 둔감한 미각 덕분일 테다.

 

밤의 무전동은 처음이었는데 주말이고 술집과 식당이 밀집한 골목이어선지 거리에 사람들이 꽤 있었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대도시 먹자골목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통영에서 어둠 속의 활기를 목격하는 건 이상하게 반가운 일이었다. 공연의 감흥과 거리의 활력, 좋은 동행자 덕분에 살짝 들뜬 상태에서 동전노래방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G도 좋다고 해서 통영에서 처음 노래방에도 갔다. 천 원에 세 곡, 둘이 가진 현금을 탈탈 털었고 리모콘 조작 실수로 G가 1곡을 날린 덕에 20곡의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어렸을 때 노래방 참 좋아했는데 십수 년 멀리하다 어쩌다 보니 코로나19 시국에 일년에 한 번씩 가게 된다. 재작년엔 이사 직전 우리집에서 책 모임을 하고 오목교에 있는 동전노래방, 작년엔 책 모임 겸 신세진 지인이 사는 의왕역 근처 노래방, 올해는 바로 오늘. 갈고닦지 않으니 노래 실력은 마음에 차지 않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도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노래들을 확인하는 반가움은 컸다. 

 

잔잔하게 살다가 꽉찬 객석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밀도의 호응에 몰입도가 엄청 높았던 무대에 집중하고 꿈처럼 들뜬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노래방까지, 드물게 감상과 실연을 겸비한 그야말로 음악의 날이었다. 초심자로서 새롭게 접하는 클래식이 주는 신선한 감동도 어렸을 적부터 나를 키운 팔할이었던 가사 있는 노래들의 공감과 위로도 새삼 참 고맙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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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9. 27. 15:15



오늘 오후 2시 부산국제영화제 일반상영작 예매 오픈, 원래 어제오늘 부산에 영화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추석연휴에 몇 편 보기도 했고 그 사이에 엄청나게 보고 싶은 영화가 개봉하지는 않아 단정한 마음으로 예매에 집중하기 위해 계획을 취소했다. 통영에서는 카탈로그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오픈된 후 홈페이지를 열심히 들락거리며 보고 싶은 영화들을 정리했고, 올해 나의 원픽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감독 미야케 쇼의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GV임을 확인했다. 외에도 GV가 있는 몇 편의 영화들 중 감독이나 배우가 온다면 놓치고 싶지 않은 작품이 있어서 체크해두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남들도 보고 싶기 마련이니 매진을 대비해 동시간대에 두어 작품씩을 더 골라 추려두었다.

 

얼마 전 모바일예매권 1분컷 매진을 경험했지만 그 전에 실물예매권 10장 세트를 구입하는 데에는 성공했고, 올해 발행분 10장에 작년분 1장 보너스가 담긴 우편물이 지난주에 도착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고이 모셔두었던 예매권 뒷면의 스크래치를 긁어내고 메모장에 번호를 옮겨 적고 예매사이트에 들어가 한 장 한 장 번호 확인까지 마쳤다. 1시 50분에 휴대폰 알림이 뜨니 괜히 좀 긴장이 되었는데, 예매사이트에 로그인해 처음 예매할 스케줄코드를 미리 입력해두고 잠시 기다리던 중 문득 떠올라 포털에서 '현재시간 초단위'를 검색해봤다. 1분컷 매진의 충격이 불러온 무의식의 대응이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1시 57분경부터 180초 가까이 온라인 명상이라도 하듯 오로지 바뀌는 숫자에만 주목하며 새삼 시간의 흐름이라는 걸 온전히 느낀 기분이다.

 

1시 59분 58초쯤까지 확인하고 예매창으로 마우스를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리둥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놀라운 오류가 반복적으로 펼쳐졌다. 결제수단으로 예매권을 선택하니 '적용되었습니다'까지는 나왔는데 그 다음 단계에서 총 결제금액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뜨고 예매 자체가 불가능했다. 몇 번을 재시도해보고 1666-9177로 전화도 해보았지만 당연히 연결은 안 되고, 잠시 멘붕이 왔다. 예매권 오류가 나만의 문제는 아니겠지 싶어 일단 신용카드 결제를 택했는데, 그 흔한 간편결제 메뉴도 없어서 한 편 예매할 때마다 카드번호에 유효기간, 비밀번호 앞 2자리, 주민번호 6자리를 매번 입력하고 개인정보 이용동의 전체선택 탭도 없어서 네 개의 탭을 각각 체크해줘야 했다. 덕분에 불필요하게 신용카드 번호가 외워졌는데 아무 의미가 없네.

 

'해당 상영작은 매진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로 원픽 예매 실패를 확인했고 미야케 쇼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했던 터라 약간 현실을 부정하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올해 내가 보러 가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해서 괜한 찜찜함이 더해지기도 했는데, 취소표가 쉽게 나올 리 없지만 코드넘버 371을 기억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넘겼다. 나름의 간절함 때문인지 동시간대의 다른 영화들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끝내 취소표가 나오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공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타지키스탄 영화 [행운]을 예매했다. 말도 안 되지만 제목의 주술을 기대하며, 예매하고 보니 상영관도 7관이네? 하는 마음이 우습기는 하지만 결국 원픽을 놓치게 되더라도 괜찮은 시작이면 좋겠다.

 

아무려나, 적잖은 번호들를 한 땀 한 땀 입력해가며 예매를 마치고 인스타그램 계정에 가보니 이미 난리가 났고 예매권 판매 사이트의 문의하기 게시판도 마찬가지다. 항의와 함께 예매권 환불 요구부터 예매 초기화 후 재예매와 보상 요구 등 여러 의견들이 보인다. 예매권 사용이 아예 불가능하니 당연하게 카드로 예매한 내가 너무 초연했나 싶기도 하고, 오류 때문에 기대했던 영화들 다 놓쳤다는 하소연을 보니 일부 같은 처지로서 공감도 됐다. 2018년부터 예매권 사서 예매했었는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오류가 왜 하필 '정상화' 선언을 한 올해에 일어났을까, 사전에 제대로 점검하지 못해서 생긴 일일 테니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나름 대형사고라는 생각에 지금 동분서주하고 있을 누군가들이 괜히 안쓰럽기도 하고. 단계단계마다 기대하며 기다렸던 오후가 생각지도 못한 당황과 유감으로 채워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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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9. 7. 19:55

 

 


오늘은 어떤 기념일이다. 흔쾌한 기념일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갈수록 나만의 흔적을 새기고 싶은 날. 원래 대략 계획하고 캘린더앱에 기록한 게 있었는데 책방 오픈 준비와 연동된 거여서 미뤄진 터, 누구한테 얘기한 것도 아니고 계획이랍시고 기계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어설픈 시도가 될 것 같아 마음을 비웠다. 기념일도 기념도 나만 아는 거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건 아쉬울 것 같아 작업 관련해서 외근하러 나가는 김에 지난달 중순부터 차 계기판에 떠 있는 ‘oil change’를 해결하는 걸로 시작했다.

 

하여 첫 번째 기념은 엔진오일 교환, 내가 한 일은 정비소에 차를 맡긴 것뿐 그저 기능적이고 필수적인 일이지만 나한텐 생애 처음이니 기념 삼기로 했다. 엔진오일을 교환하면서는 오랜만에 충렬사 앞 백석 시비에 추석 인사를 드리고 서피랑을 둘러보았고, 차를 찾아서는 동피랑과 강구안 일대를 둘러보았다. 통영을 드나드는 내내 휑하게 비어 있었던 이문당 건물에 오픈한 베이커리카페가 괜히 반가웠고, 동피랑에서는 2년마다 바뀐다는 벽화 작업 중인 분들을 곳곳에서 마주쳤다. 차 안에 휴대폰을 두고 나와서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작업 관련 확인 사항 중 하나는 평인일주로 어디쯤 있었다. 운전한 지 두 달 반 가까이 됐지만 혼자서 멀리 갈 엄두는 여전히 못 내고, 시내에 나갈 때도 내비 안내를 무시하며 굳이 충무교를 건넌다. 연수할 때 통영대교의 빠른 속도와 커브가 무척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각인된 결과이자 안주하는 버릇 덕분이다. 시간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언젠가는 혼자 넘어서야 할 일이어서 나갈 때마다 내심 떠올리지만 쉽지는 않다. 오늘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통영 이주하면서부터 생각했던 새마을금고 계좌 개설이 떠올랐다. 통영대교를 직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길어올린 방어적 기억일 수도 있지만, 오늘이면 적당하겠다 싶었다. 시간은 4시가 다 되어가고 가능하려나 싶으면서도 일단 새마을금고 도봉지점 쪽으로 차를 몰았다.

 

2017년이었나, 여행 와서 걷다가 간판에 쓰인 '도봉'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끼며 사진을 찍었었다. 지금은 강북구가 되었지만 태어나 15년쯤 살았던 도봉구, 막연하게 통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여행자의 눈에 들어온 '도봉'이라는 단어는 어떤 인연을 예비한 것 같은 착각을 선사했다. 도봉은 아마도 도남동과 봉평동의 첫 글자를 딴 조합일 텐데, 지금의 나는 도남동에 살면서 봉평동으로 출퇴근 중이다. 거래은행의 지점은커녕 현금인출기도 미륵도에는 없기 때문에 통영에서 가장 밀도 높은 은행인 새마을금고 계좌를 만들어야겠다고 이따금 생각하며 계속 넘어갔는데,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 다행히 지점 오픈은 4시 30분까지였고 오늘자 '도봉'지점 계좌를 만들었다, 두 번째 기념.

 

즉흥적이었지만 원하는 날짜가 찍힌 새 통장을 만들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도남관광지에도 확인할 게 하나 있어 트라이애슬론 광장에 주차를 하고 잠시 외근, 광장은 연수 첫날 죽어라 안 되는 커브 연습을 했던 곳이다. 두 달 반 동안 이렇게 운전을 조금밖에 안 하고 실력도 안 느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차를 마냥 세워놓고 있지 않는 것만도 나로서는 기특하기 때문에 버벅거리던 기억이 생생한 현장에 여유롭게 주차를 하니 매우 흡족하였다. 실은 흡족을 넘어 이상한 자신감이 샘솟아서 내친 김에 통영대교를 건너기로 가상한 용기를 내버렸다. 평인일주로 어디쯤의 목적지에 가기 위해 예전 한달살기했던 인평동을 지나 구불구불한 해안로를 나름 드라이브, 비록 근처까지 가서 찾지 못해 그냥 돌아왔지만 나홀로 통영대교 왕복이라는 숙제 하나를 해결하였다.

 

기념이랍시고 한 게 엔진오일 교환, 신규계좌 개설, 통영대교 왕복이라니 좀 없어 보이지만 소소한 자로서 만족스럽다. 내년엔 어떤 기념을 해볼까... 지금은 여권도 없는 주제지만 해외여행 중이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해본다. 아니면 날짜 맞춰서 새 여권을 만들까, 그거 맞추는 게 가능한 건가? 역시, 여권은 미리 만들고 해외여행 중이면 좋겠다. 가고 싶은 곳은 유럽이나 남미지만 우선 가까운 블라디보스톡, 혹은 가마쿠라나 하코다테라도. 이뤄지도록, 주문을 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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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8. 13. 22:25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여름부터 약 1년간 시간여행까지 더해 경기를 챙겨보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여자 배구 직관.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순천행을 자처한 드라이버가 있어, 되면 좋고 아님 말고 부담없이 예매를 시도했고 비지정석에 성공하였다. 운동 경기 직관은 88올림픽 때 반 전체가 관중으로 동원됐던 수구, 고등학교 때 친구들 분위기에 휩쓸려 갔던 농구대잔치가 전부였는데 지난세기의 일이어서 모든 것이 가물가물하다.

 

비지정석은 만석일 경우 입석 관람이 될 수도 있다는 납득할 수 없는 안내가 있었지만 거리도 있고 나이도 있어 무리할 수 없었으므로, 입장 시작 시간 도착을 목표로 2시간 전 집을 나섰다. 11시 20분쯤 도착해 주차를 하고 줄에 서기 위해 끝을 찾느라 경기장 전체를 한 바퀴 돌았는데, 꽉 차면 3천 석이 넘는다는 경기장 입장을 위해 늘어선 인파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꺼번에 본 가장 많은 사람들인 것 같다. 날은 찌는 듯이 더웠지만 입장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경기장에 들어서니 아직 좌석은 절반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김희진 선수를 보고 싶었고 D는 김연경 선수를 보고 싶어했기에 쿨하게 찢어져 각자 응원하는 팀 방향의 좌석으로 향했다. 중계를 보며 갖고 싶었던 IBK기업은행의 클래퍼도 챙기고, 가져간 책을 읽다 보니 개막식이라며 마술사가 등장해 공연을 했다. 관중석이 점차 채워지고 개막식이 끝난 후 웜업을 위해 선수들 등장, 오~ 내가 직접 김희진 선수를 보다니! 멀어서 그저 봤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했지만, 아무려나 신기했다. 1시간쯤 지나 경기가 시작될 즈음부터는 중간중간 하나씩 비워져 있던 좌석도 채워지기 시작했고, 내 옆에는 또래 일행들과 주변의 빈 자리에 띄엄띄엄 자리잡은 60대 아저씨가 앉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박수와 응원을 유도하는 응원단장의 몸짓과 관중의 함성, '성격 좋은' 옆 자리 60대 아저씨의 팔 툭툭 침을 동반한 대화 공세, 비어 있던 바로 옆 계단에까지 앉은 사람들로 답답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시즌 주전으로 나서지 못했던 선수들의 플레이에 이름을 연호하는 응원은 뭔가 벅찬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의 적막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테크니컬 타임아웃 때마다 댄스 이벤트를 고지하고 극E로 추정되는 이들의 격렬한 춤사위를 카메라에 잡고 도드람한돈을 선사하는 반복은 견디기 힘들었다. 나름 경기에만 집중하고자 애썼지만 조용히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경기장에서 제맘껏 떠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수다와 함성은, 있지 않았으면 좋을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배가시켰다.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에 말을 얹을 입장은 못 되지만 지난시즌 여자 배구 거의 전 경기를 지켜보았던 자로서, 경기 내용은 그저 그러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세터 김하경 선수와 아웃사이드히터 표승주 선수의 국가대표 차출 영향이 크겠지만, IBK기업은행 선수들의 플레이는 빈 구석이 많아 보였고 전반적으로 결정력이 너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박민지 선수나 최정민 선수의 선전은 반가웠지만 기대했던 김희진 선수의 파워풀한 플레이는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지난여름 여자 배구를 보기 시작하며 선수도 팀도 전성기였던 시절의 IBK기업은행 경기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IBK기업은행이 나름의 준비를 확인하며 승리하길 바랐지만, 여자 배구씬에 향하는 관심과 주목의 절반 이상을 짊어진 김연경 선수의 복귀 경기 승리도 괜찮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난 후 기사를 보니 흥국생명 선수들은 부상과 코로나19 확진 때문에 가용 인원 8명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박수 받을 만한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축하합니다-

 

난생처음 여자 배구 경기를 직관하고 가장 강력하게 느낀 것은 고마운 줄 모르고 보았던 중계의 소중함이다. 멀리서나마 선수들을 직접 보는 것도, 토랑이의 똘아이짓을 직접 보는 것도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자생적 열기에 끊임없는 응원 유도가 더해진 경기장 분위기는 나로서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 일정 구간 앞서가는 IBK기업은행 알토스 배구단 버스를 보며, 오는 시즌에도 방구석에서 열심히 지켜보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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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8. 9. 19:39


6월에 함께 중고차 사러가주고 7월에 와서 조수석 인질이 되어주기로 했는데 코로나19에 확진되어 미뤘던 약속, 부산의 G가 어제 왔다가 오늘 갔다. 상반기로 일을 그만두고 간만에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시기여서 일찌감치 출발해 도착한 덕에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얼마 전 M이 보내준 어엿한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집을 나섰다. G가 해수욕을 좋아하는 터라 거제의 덕원해수욕장으로 갔는데, 차 없을 때도 기웃거리던 캠핑용품을 사모으기 시작한 내 차에는 의자 두 개와 원터치 텐트가 실려 있었지만 쓸 일은 없었다.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와 물에 들어갔던 G의 해수욕은 해파리 때문에 십여 분으로 끝났고, 나는 M이 보내준 책을 읽으며 얼마만인지 모르겠는 해수욕장에서의 여유를 잠시 즐겼다. 

우리는 다음 날 '한산대첩 승전항로코스' 해상택시를 탈 예정이고, G는 8월 하순 지인들과 한산도 1박 여행 예정이고, 나는 cgv vip쿠폰이 있는 터라 덕원해수욕장을 출발해 cgv거제로 [한산, 용의 출현]을 보러 갔다. [명량]은 언젠가 추석 연휴에 tv로 보았지만 별 감흥이 없었고, [한산, 용의 출현] 역시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통영에 살고 있으니 한 번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52년이었는데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잡은 게 다음 해이고 통영으로 옮겨온 건 1604년인가 하니, 장소 자막에 삼도수군통제영이 나오기는 했지만 영화에서 명확히 일별할 수 없었고 뭍씬의 주요 배경은 부산포였다. 오직 통영의 흔적을 찾기 위해 본 것만은 아니었지만, 영화 자체도 왜 수백 만 명이 보는지 의아할 만큼 퀄리티가 떨어져서 쿠폰으로 보기에는 알맞았다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저녁 식사 겸 집에서 멀지 않은 라인도이치 브루어리에 갔다. 술을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친한 지인들 대부분은 즐기는 편이어서, 운전을 하게 되며 기대한 부분 중 하나가 지인들이 집에 놀러왔을 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마음 편히 술 한 잔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라인도이치 브루어리는 예전에 통영해상관광공원에서 사량도 여객선 터미널까지 산책하며 알게 된 곳,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늦어 피자만 주문이 가능했고 G는 수제맥주 샘플러 3종을 마셨다. 이미 어둠이 내려 창 밖의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회식인 듯 십수 명의 사람들이 여러 테이블에 나눠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서 블로그에서 봤던 근사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G에게서 특별한 반응이 없었던 걸로 보아 맥주도 그저 그러하였나 보다 싶다. 그러나 앞으로는 술 좋아하는 지인에게 통영까지 찾아온 고마움을 전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고 다음 날 아침은 간단히 빵을 챙겨 먹고 해상택시를 타러 갔다. 야경투어만 두 번 탔었는데 모두 만족스러워서 '한산대첩 승전항로 코스'는 어떨지 궁금했고, 마음이 한껏 들떴다. 거의 마지막에 승선했는데도 비어 있는 제일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출발하며 목격한 옅은 무지개 덕에 마음이 들뜨다 못해 부풀어버렸다. 선장님의 명쾌하고 친절한 설명, 잘 어울리는 음악,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스릴까지 야경투어에서 느꼈던 해상택시의 매력은 낮에도 다르지 않았다. 미처 몰랐는데 이 코스에는 제승당 1시간 스탑오버가 포함되어 있었고, 여객선 탈 때와 달리 제승당 입구에 하선하는 신선함과 빵 챙겨 먹고 나온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G와의 약속을 어제오늘로 잡은 이유는 한산대첩축제 기간 이벤트로 단돈 만 원에 해상택시를 예약했기 때문이었는데, 전날 본 [한산, 용의 출현] 덕에 선장님의 설명이 더 쏙쏙 들어온 터라 내친 김에 조선군선도 관람하기로 했다. 날은 덥고 배는 고팠지만 다행히 통영시민은 무료여서 보람스러웠고, 군선 안은 덥고 여기저기 설명은 많았지만 뭔가 조야했고, 통제사가 208대까지 있었다는 것과 제해권을 재해권으로 쓴 오타 등을 발견했다. 주마간산이나마 조선군선 네 척에 다 들어가보고 나니 어쩌다 한산대첩 기념 여행을 한 셈이 됐고, 머지 않아 한산도에서 1박을 할 G의 화룡점정을 응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 주차장 사장님이 주신 상추와 통게하 사장님이 주신 빨간 사과 등을 넣은 샐러드와 감바스, 커리와 난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난은 브런치스타일을 좋아하는 G를 생각하며 티아시아에서 새로 나왔다기에 한 번 사본 건데, 인도네팔 레스토랑에서 먹던 난과는 당연히 비교가 안 됐고 방부제는 덜 들었겠지만 수입한 또띠야가 오히려 나은 느낌이었다. 아무려나 이웃이 준 재료로 지인과 먹는 점심은 낯선 곳에서의 적응에 성공한 이주자가 된 듯한 착각을 더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G의 차를 타고 나와서 공간에 들러 수다를 떨다가 5시 반쯤 나왔고, 미용실 앞에 나를 떨궈준 G는 얼마 전 시작한 8시 농구교실로 떠났다. 

G를 생각하면 나는 두 가지가 고맙다. 15년 전 어느 밤 그냥 생각이 났다며 걸어온 전화 그리고 10년 전쯤의 어느 밤 단도직입으로 날린 한 마디 “말 좀 그만해”. 2007년 2월 여수화재참사 현장에서 만나 두 달 가까이 함께 지내며 활동하다 무력감과 열패감을 잔뜩 안고 각자의 단체로 복귀해 일하던 시절, G가 먼저 연락해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인연은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2013년쯤, 마음으로 바라던 현장에서 일하게 되어 잔뜩 고양된 채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게 던진 G의 한 마디는, 그 순간에는 민망하고 멋쩍기 그지 없었지만 덕분에 편하거나 친하더라도 적당히 말하려는 의식을 갖게 만들어줬다. 물론 갈수록 많이 잊는 G의 기억 속에는 이 두 가지 모두 없을 것이지만. 

G도 인정한 바 이번 1박 2일은 매우 알차고 짜임새 있는 여행이었다. 몇 년간 조울을 오가며 최선을 다했지만 극복할 수 없었던 무언가로부터 받은 울화를 열심히 발산 중인 G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공허와 불신을 남긴 ‘빅실버’와의 10년 인연에 대해 몇 달간 혼자 곱씹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일말의 불편함 없이 순수하고 흔쾌하게 함께인 시간이 즐거운, 몇 안 되는 지인이어서 더 완벽한 1박 2일이었다. G와의 다음 만남은 무려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공연과 다음 날 부산국제영화제로 향하는 부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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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8. 2. 15:20

 


느긋한 쉼으로 8월이 시작되었다. 지인 방문과 출근으로 휴일이 없었던 지난주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해 어제는 종일 늘어져 있었다. 백현진님 인스타에서 어제가 방준석님 생일이었다는 걸 알았고, 언젠가 자비에돌란 인스타에서 리버피닉스 생일글을 봤을 때처럼 기일보다 생일을 기억하는 게 더 정답다고 느꼈다(한국인에게는 자연스레 붙이는 '님'을 외국인에게는 자연스레 안 붙이게 된다, 붙이려니 영 어색하고. 뭘까.).

 

지난주 월요일 메일함에 도착한 "비와 당신 그리고 방준석"이라는 제목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뉴스레터를 보고 백현진님이 함께하는 추모공연을 예약했다. 통영에서 제천은 승용차가 아니면 대구나 대전, 부산 혹은 서울을 거쳐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하는 길이어서 잠시 갈등했지만 소시적 '유앤미블루'부터 이따금 '어어부', 몇 편의 영화와 '방백'까지 짧지 않은 기간 그의 음악을 좋아했고 이른 죽음이 많이 슬펐던 자로서 마음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뉴스레터로만 궁금증을 달랬던 Jimff에 방준석님 덕분에 처음 가보게 되는 셈인데, 추모공연이 아니라 '방백'의 공연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당일치기는 불가능한 여정이라 급하게 시간표를 살펴보고 뒷시간 중단편 프로그램 하나를 예매했는데 그냥 추모공연의 여운을 간직하는 게 나을까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제천은 제천이지만 8월의 부산영화여행도 빠뜨릴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대구 사촌네서 하루 자기로 하고 통영에서 출발해 대구, 제천, 부산에서 각 1박하고 통영으로 돌아오는 아름답고 지난한 일정을 완성했다. 내친 김에 버스도 미리 예매하고 지도앱 열심히 보며 저렴하고 적당한 숙소 예약도 마쳤는데, 제천은 영화제의 영향인지 부산행 버스 자리도 예약 가능한 숙소도 얼마 안 남은 상태여서 나름 서두른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추모공연과 영화 보고 자는 시간을 빼면 터미널과 극장과 숙소 사이의 도보 이동 정도가 제천 여행이 되겠지만, 통영에 사는 동안 다시 엄두를 낼 수 없는 길이니 기쁘게 다녀올 생각이다. 낮은 텐션의 일상과 노화로 3박 4일의 장거리 이동을 체력이 잘 버텨줄지 약간 걱정인데, 좋아하는 마음이 동력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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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산책일기2022. 7. 23. 16:15

 


자정이 조금 넘어 M이 집 근처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실컷 잤다며 지가 마실 맥주 두 병에 내가 사려던 과자 한 보루까지 흔쾌히 결제하고, 새벽 세 시경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아침에 일어나 공간에 갔다가 점심 먹고 통영터미널에서 옥포행 버스를 타고 대우조선 앞으로 가는 게 M의 계획, 나보다 젊고 체력도 좋다지만 불편한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수면 포함 열두 시간쯤의 체류를 위해 굳이 통영에 들러준 게 고마웠다. 지난해 봄 놀러와서 나흘 정도 머물렀고 추석에는 이사한 그의 집에 가서 하루를 자며 놀았다. 활동할 때 한 달에 두어 번은 만났으니 일년에 한두 번은 꽤 뜸해진 것이지만, 완전 또래 친구도 아닌데 멀리에서도 이어지는 인연이 나로서는 소중하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집을 나섰다. 그가 고른 아점 식당은 니지텐이었는데 주차장 가는 길에 보니 이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간에 들러 구경하고, 면이나 칼국수를 먹고 싶다기에 얼마 전 알게 된 백서냉면으로 갔다. 나는 오이혐오자이므로 밖에서 냉면을 먹지 않고 맛도 모르지만 성의 있고 좋은 식당이라고 알려진 집이어서 가봤다. 점심 시간 전이라 손님이 별로 없어 오이를 따로 달라 부탁드리는 게 실례는 아닌 분위기였고,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냉면과 만두를 맛있게 먹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마침 들어온 손님들이 계셨고, 가방을 챙기느라 조금 늦게 일어선 M이 깜짝 놀라기에 돌아보니 방금 들어온 이들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세상에나.

 

깜짝 놀라고 반가워서 어수선하게 인사를 나누고 밖에서 통화하고 있는 K까지 확인하며 더욱 놀라워졌다. 그들은 나도 인사 정도는 나누던, 작년에 통영에 내려와 정착한 J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거제 희망버스 가는 길에 식사를 하려던 중이었다. 덕분에 M은 그들의 차를 얻어타고 거제로 가기로 하였고, 식사 후에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다. 원래 카페에 갈 예정이었으나 애매해져서 길가 벤치에서 떠들다가 다시 공간으로 와서 수다를 떨었다. 얼마 후 1박 2일로 다른 지역에 다녀온 공유파트너가 도착했고, M이 집으로 가져온 여러 가지 중 남해안여행엽서키트를 통해 M의 친구와 공유파트너가 아는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시 세상에나.

 

평소 M은 날씨요정을 자처했고 함께 여행하거나 무슨 일정이 있을 때 예보와 달리 날씨가 괜찮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부로 타이밍요정을 겸하게 되었다. 니지텐 웨이팅을 주장했다면, 백서냉면에서 일 분만 일찍 나왔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놀랍고 신기한 조우. 네 사람 모두 현장에서 마주치면 인사 나눌 정도의 관계였지만 마음속 저어함이 전혀 없는 이들이어서 꽤나 반가웠고, 내가 통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그들 역시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놀라워하고 반가워했다. 하여, 몇 년 전 군산 여행 함께할 때 사진 찍기를 강권하는 M에서 미친년이라는 돌직구를 날렸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들이대는 카메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사진 찍히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한결 줄어들기도 했고 잠시지만 오롯이 통한 듯한 빤짝하는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기도 했는데, 이런 마음이 든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들과 헤어져 M과 수다를 이어가며 놀랍다, 신기하다, 웃기다 등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M 배웅 겸, 집에서 챙겨온 천도복숭아와 비장의 달고나초코바를 챙겨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긴 그들에게 갔다. 오랜 투쟁 후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이따금 포털에서 불안한 미래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되는 K의 사업장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퇴직 후 통영에 내려온 J에 대한 이야기도, 몇 주 전 아파트 같은 층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지만 설마 하며 넘어갔던 밥차 연대하던 이가 정말 같은 층에 살고 있고 얼마 전 통영에서 식당을 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J와 친해 통영에 가끔 온다는 K는 다음에 올 때는 연락하겠다 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 신선했고, 아무 상관없었고 아직은 상관없지만 언젠가 달라질지도 모를 통영 이주자들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는 한다.

 

약간 마술 같았던 오늘의 몇 가지 일들은 M의 짧은 방문과 의도치 않은 요정질 덕분. M은 내가 정식으로 책방을 오픈하면 다시 내려오기로 했는데, 예기치 않은 깜짝 반짝임을 선사하는 그 요정력 변치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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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