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파엘은 외진 산골 오래된 저택의 별채에서 어머니와 함께 관리인으로 살아간다. 텔레비전의 신파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며 꼬장꼬장하게 팩폭을 날리는 노모가 젊은 시절부터 일꾼이었던 덕에 얻은 일자리다. 저택의 허드렛일과 마을의 악단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일 그리고 이따금 우편물을 전하러 들렀다가 모자와 수다를 떨곤 하는 배달부와 남몰래 나누는 섹스 정도가 라파엘의 일상을 구성한다. 한때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생활했고 이전의 주인이었던 선대의 초상화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저택은 대체로 비어 있다.
어느 비 오는 밤, 샤프텔 가의 상속녀 가랑스가 돌아온다. 과거의 영화를 증거하듯 붙어 있는 초상화들을 떼어내고 저택에 틀어박힌 가랑스는 걱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술에 취해 지낸다. 노모가 챙겨준 식사를 전하러 간 라파엘은 거의 벗은 몸으로 침대에 쓰러져 있거나 의식을 잃은 듯 소파에 늘어져 있는 가랑스를 발견하며 신경이 쓰인다. 우편배달부가 전한 정보에 따르면 가랑스는 유명한 괴짜 예술가로, 1992년부터의 눈물을 모은 수많은 병들을 수집하고 자신의 몸을 부위별로 나눈 문신을 새기고 자신을 낳다가 세상을 뜬 엄마를 기억하며 자궁과 같은 조형물 안에서 생활하는 등 기상천외한 작품 활동을 한다.
한동안 기척 없이 지내던 가랑스가 저택의 문과 창문에 기대어 일하는 라파엘을 바라보곤 한다. 얼마 후 저택에 들어간 라파엘은 자신을 모델로 한 수많은 스케치와 조각상 들을 발견하고 마음의 동요를 겪기 시작한다. 과거의 주종관계는 고용관계로 변화했지만, 라파엘에게 가랑스는 연정을 품기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욕망을 떨치지 못한 그는 가랑스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고 우편배달부와의 무의미한 섹스를 거부하며, 무엇보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잠식된 채 묻어두었던 감정의 파고에 휩쓸린다.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에서 마음 둘 데라곤 백파이프 연습뿐이었던 라파엘은 눈동자가 없는 한쪽 눈을 해적 안대로 가린 58세의 뚱뚱한 남성이다. 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 예술가의 눈을 통해 새로운 인상과 의미로 포착되자, 라파엘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노모를 진찰하러 온 의사가 내미는 안구 수술 카달로그를 챙기고, 자신의 백파이프 연주를 칭찬하는 가랑스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파일을 반복해 듣는다. 고급차를 타고 가랑스를 찾아온 남성 손님을 질투하고 가랑스와 함께 시내 펍에서 술을 마시며 꿈을 꾼다.
불현듯 찾아온 꿈의 시간은 짧다. 괴짜 예술가는 남다른 뮤즈를 통해 영감을 충분히 얻었고 ‘풍경’처럼 자리를 지키던 라파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끝이 다가옴을 감지한 것일까. 아마도 다시는 없을 화양연화의 마지막을, 라파엘은 진흙투성이가 된 몸으로 스스로 작품이 됨으로써 완성한다. 뮤즈와 아티스트로서, 서로 다른 결의 감정에 깊이 빠졌던 두 사람의 시간은 끝이 나고, 조각상 “꿈꾸는 사람”은 라파엘이 아닌 익명의 작품이 되어 전시회장에 놓인다.
뜨거운 객석 반응과 달리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는데, 내게는 비호감인 주연 배우의 비주얼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데 혼자 민망했다. 스스로 얼빠임을 인정하는 것과 어떤 작품을 볼 때 감흥 유무의 기준으로 그것이 작용하는 걸 인지할 때의 부끄러움은 확실히 다른 문제라는 것이, 이 영화가 내게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였다.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꼭 예쁘거나 잘생겨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개성적인 외모여도 내 취향이면 좋고 남들이 다 예쁘고 잘생겼다고 해도 내 눈에 아니면 별로라고 자위했던 마음이 무색해졌다.
GV에는 감독과 주연 배우가 참석했고, 객석의 환호와 달리 나는 영화를 보며 떨치지 못했던 난처함이 되살아나 혼자 괜히 미안해졌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부산에 방문했다는 라파엘 티에리는 다시 오고 싶어서 감독에게 영화를 빨리 완성해달라고 졸랐다고 했고, 그의 기대와 바람에 응답하듯 영화는 부국제 플래시포워드 관객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영화 자체는 단단하고 묵직하고 중심이 잘 잡혀 있는 느낌이어서 괜찮았는데, 제대로 몰입하며 감상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보면서 뱅상 랭동이 주인공이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특출난 미남이 아니고 나이가 많을 뿐 그가 이 역할에 맞는 비주얼이 아니란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라파엘과 가랑스의 관계에서 내게는 뮤즈로서의 존중과 맹렬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어긋남이 크게 보였다. 영감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양감과 자존감과 희열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찾아오는 공허에 더 마음이 갔고, 결국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오더라도 감정의 폭풍을 겪는 게 나은 것일까 싶었다. 그런데 감독의 메시지는 그렇게 회의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이것은 얼빠적 스펙트럼을 통과한 후유증인가 싶기도 했다. 작품 속 가랑스의 창작 행위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소피 칼 등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모든 삶이 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메시지만큼은 나름 수긍이 되어 다행이었다.
10/1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The Dreamer]
Director: Anaïs TELLENNE 아나이스 뗄렌느
Cast: Raphaël THIÉRY, Emmanuelle DEVOS, Mireille PITOT, Marie-Christine ORRY
국가/지역France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94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자크 리베트의 <누드모델>(1991)이 시간과 미의 예술이라면, <더 드리머>는 사랑과 꿈의 예술이다. 주인이 떠난 외딴 장원, 애꾸에 추하고 뚱뚱한 라파엘은 어머니와 지내며 그곳을 관리한다. 어느 밤, 상속녀 개랑스가 찾아온다. <미녀와 야수>를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밝혔듯이, 이건 21세기식 변주다. 개랑스는 벨처럼 순진하지 않다. 라파엘이 밤에 홀로 연주하는 민속 음악은, 현대미술가인 개랑스가 즐겨 듣는 일렉트로닉 음악과 다른 세계에 있다. 하지만 야수의 얼굴을 지닌 자가 가슴 깊숙이 간직한 사랑과 고통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이다. 라파엘 역할의 라파엘 띠에리는 영화의 주제를 연기한다. 작년에 <스칼렛>(2022)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그의 존재감은 영화 전체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외모 때문인지 그에게서 전설적인 배우 미셸 시몽이 연상되는데, 시몽이 익살맞다면 티에리는 야성적인 동시에 숭고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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