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에 해당되는 글 477건

  1. 2023.10.24 [더 드리머]
  2. 2023.10.24 [키리에의 노래]
  3. 2023.10.23 [바람의 도시]
  4. 2023.10.23 [사라진 소년병]
  5. 2022.11.01 [허공에의 질주]
  6. 2022.10.14 [애프터 미투]
  7. 2022.10.14 [티켓 투 파라다이스]
  8. 2022.10.13 [칼날의 양면]
  9. 2022.10.13 [추방된 사람들]
  10. 2022.10.13 [슈퍼 에이트 시절]
빛의걸음걸이2023. 10. 24. 18:43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파엘은 외진 산골 오래된 저택의 별채에서 어머니와 함께 관리인으로 살아간다. 텔레비전의 신파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며 꼬장꼬장하게 팩폭을 날리는 노모가 젊은 시절부터 일꾼이었던 덕에 얻은 일자리다. 저택의 허드렛일과 마을의 악단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일 그리고 이따금 우편물을 전하러 들렀다가 모자와 수다를 떨곤 하는 배달부와 남몰래 나누는 섹스 정도가 라파엘의 일상을 구성한다. 한때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생활했고 이전의 주인이었던 선대의 초상화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저택은 대체로 비어 있다. 

 

어느 비 오는 밤, 샤프텔 가의 상속녀 가랑스가 돌아온다. 과거의 영화를 증거하듯 붙어 있는 초상화들을 떼어내고 저택에 틀어박힌 가랑스는 걱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술에 취해 지낸다. 노모가 챙겨준 식사를 전하러 간 라파엘은 거의 벗은 몸으로 침대에 쓰러져 있거나 의식을 잃은 듯 소파에 늘어져 있는 가랑스를 발견하며 신경이 쓰인다. 우편배달부가 전한 정보에 따르면 가랑스는 유명한 괴짜 예술가로, 1992년부터의 눈물을 모은 수많은 병들을 수집하고 자신의 몸을 부위별로 나눈 문신을 새기고 자신을 낳다가 세상을 뜬 엄마를 기억하며 자궁과 같은 조형물 안에서 생활하는 등 기상천외한 작품 활동을 한다. 

 

한동안 기척 없이 지내던 가랑스가 저택의 문과 창문에 기대어 일하는 라파엘을 바라보곤 한다. 얼마 후 저택에 들어간 라파엘은 자신을 모델로 한 수많은 스케치와 조각상 들을 발견하고 마음의 동요를 겪기 시작한다. 과거의 주종관계는 고용관계로 변화했지만, 라파엘에게 가랑스는 연정을 품기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욕망을 떨치지 못한 그는 가랑스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고 우편배달부와의 무의미한 섹스를 거부하며, 무엇보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잠식된 채 묻어두었던 감정의 파고에 휩쓸린다.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에서 마음 둘 데라곤 백파이프 연습뿐이었던 라파엘은 눈동자가 없는 한쪽 눈을 해적 안대로 가린 58세의 뚱뚱한 남성이다. 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 예술가의 눈을 통해 새로운 인상과 의미로 포착되자, 라파엘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노모를 진찰하러 온 의사가 내미는 안구 수술 카달로그를 챙기고, 자신의 백파이프 연주를 칭찬하는 가랑스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파일을 반복해 듣는다. 고급차를 타고 가랑스를 찾아온 남성 손님을 질투하고 가랑스와 함께 시내 펍에서 술을 마시며 꿈을 꾼다. 

 

불현듯 찾아온 꿈의 시간은 짧다. 괴짜 예술가는 남다른 뮤즈를 통해 영감을 충분히 얻었고 ‘풍경’처럼 자리를 지키던 라파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끝이 다가옴을 감지한 것일까. 아마도 다시는 없을 화양연화의 마지막을, 라파엘은 진흙투성이가 된 몸으로 스스로 작품이 됨으로써 완성한다. 뮤즈와 아티스트로서, 서로 다른 결의 감정에 깊이 빠졌던 두 사람의 시간은 끝이 나고, 조각상 “꿈꾸는 사람”은 라파엘이 아닌 익명의 작품이 되어 전시회장에 놓인다. 

 

 

뜨거운 객석 반응과 달리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는데, 내게는 비호감인 주연 배우의 비주얼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데 혼자 민망했다. 스스로 얼빠임을 인정하는 것과 어떤 작품을 볼 때 감흥 유무의 기준으로 그것이 작용하는 걸 인지할 때의 부끄러움은 확실히 다른 문제라는 것이, 이 영화가 내게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였다.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꼭 예쁘거나 잘생겨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개성적인 외모여도 내 취향이면 좋고 남들이 다 예쁘고 잘생겼다고 해도 내 눈에 아니면 별로라고 자위했던 마음이 무색해졌다. 

 

GV에는 감독과 주연 배우가 참석했고, 객석의 환호와 달리 나는 영화를 보며 떨치지 못했던 난처함이 되살아나 혼자 괜히 미안해졌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부산에 방문했다는 라파엘 티에리는 다시 오고 싶어서 감독에게 영화를 빨리 완성해달라고 졸랐다고 했고, 그의 기대와 바람에 응답하듯 영화는 부국제 플래시포워드 관객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영화 자체는 단단하고 묵직하고 중심이 잘 잡혀 있는 느낌이어서 괜찮았는데, 제대로 몰입하며 감상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보면서 뱅상 랭동이 주인공이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특출난 미남이 아니고 나이가 많을 뿐 그가 이 역할에 맞는 비주얼이 아니란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라파엘과 가랑스의 관계에서 내게는 뮤즈로서의 존중과 맹렬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어긋남이 크게 보였다. 영감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양감과 자존감과 희열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찾아오는 공허에 더 마음이 갔고, 결국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오더라도 감정의 폭풍을 겪는 게 나은 것일까 싶었다. 그런데 감독의 메시지는 그렇게 회의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이것은 얼빠적 스펙트럼을 통과한 후유증인가 싶기도 했다. 작품 속 가랑스의 창작 행위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소피 칼 등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모든 삶이 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메시지만큼은 나름 수긍이 되어 다행이었다. 

 

 

10/1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The Dreamer]

 

Director: Anaïs TELLENNE 아나이스 뗄렌느

Cast: Raphaël THIÉRY, Emmanuelle DEVOS, Mireille PITOT, Marie-Christine ORRY

국가/지역France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94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자크 리베트의 <누드모델>(1991)이 시간과 미의 예술이라면, <더 드리머>는 사랑과 꿈의 예술이다. 주인이 떠난 외딴 장원, 애꾸에 추하고 뚱뚱한 라파엘은 어머니와 지내며 그곳을 관리한다. 어느 밤, 상속녀 개랑스가 찾아온다. <미녀와 야수>를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밝혔듯이, 이건 21세기식 변주다. 개랑스는 벨처럼 순진하지 않다. 라파엘이 밤에 홀로 연주하는 민속 음악은, 현대미술가인 개랑스가 즐겨 듣는 일렉트로닉 음악과 다른 세계에 있다. 하지만 야수의 얼굴을 지닌 자가 가슴 깊숙이 간직한 사랑과 고통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이다. 라파엘 역할의 라파엘 띠에리는 영화의 주제를 연기한다. 작년에 <스칼렛>(2022)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그의 존재감은 영화 전체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외모 때문인지 그에게서 전설적인 배우 미셸 시몽이 연상되는데, 시몽이 익살맞다면 티에리는 야성적인 동시에 숭고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용철)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659&c_idx=390&sp_idx=0&QueryStep=2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없는 일요일]  (0) 2023.10.25
[나의 올드 오크]  (0) 2023.10.25
[키리에의 노래]  (0) 2023.10.24
[바람의 도시]  (0) 2023.10.23
[사라진 소년병]  (0) 2023.10.23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3. 10. 24. 15:15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1년 오사카. 어느 시골 마을에 어린 소녀가 홀로 나타난다. 개울에서 가재를 잡던 동네 아이들은 호기심에 말을 건네지만 소녀는 묵묵부답이다. 마을에 며칠째 혼자인 소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교사는 밤이면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나무를 찾아간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밤을 견디던 소녀는 교사가 청하는 대로 그의 집으로 간다. 교사는 잠든 소녀의 가방을 뒤져 언니 키리에와 약혼자 ‘나짱’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는 단서로 인터넷을 뒤져 나짱으로 불렸던 시오미와 연락이 닿는다. 동일본대지진 때 약혼자 키리에를 잃은 시오미는 홀로 남겨진 그의 동생 루카를 지키고자 하지만, 법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루카는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2018년 홋카이도. 동네 스낵바를 운영하는 엄마,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마오리는 여성성을 무기로 살아남은 그들의 삶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고향에 남는다면 스낵바의 3대 운영자가 될 것이 분명한 미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오리, 마침 엄마의 부자 남자친구가 대학 학비를 대주겠다며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청년 시오미를 과외교사로 보낸다. 대입을 멀리 떠날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한 마오리는 시오미와 과외수업을 시작한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홋카이도에서 생활하던 시오미는, 보호시설에서 나온 루카를 친동생처럼 보살피며 함께 지내는 중이다. 말수도 친구도 없는 루카의 외로움을 걱정해 마오리에게 소개하고, 학교 선후배인 두 사람은 가깝게 지내며 우정을 나눈다. 

 

2023년 도쿄. 술에 취해 귀가하던 마오리는 ‘키리에’라는 입간판을 세워두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루카를 발견한다. 파란색 가발에 요란스러운 옷차림, 잇코로 살아가는 마오리는 루카를 알아보고 매니저를 자청한다. 돈도 집도 없기는 둘 다 마찬가지지만, 어린 날의 우정과 기댈 곳 없는 처지라는 공감대는 두 사람의 동행을 든든하게 만든다. 파란색 원피스로 키리에의 퍼스널 컬러와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럴싸한 버스킹 장비를 마련하는 등 제법 매니저 역할을 해내는 잇코의 지원에도 힘 입어, 키리에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마오리의 전 남친이 사는 집과 결혼을 약속한 부유한 중년 남성의 집 등을 옮겨 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에도, 버스커들과의 협연과 음반 녹음, 페스티벌 출연 등으로 키리에의 무대는 점차 넓어진다. 그러나 며칠 온천여행을 다녀온다며 잇코가 사라진 후 결혼사기 혐의 사실이 드러나고, 영문을 모른 채 위험에 처했던 키리에는 다시 혼자가 되어 거리로 나선다. 

 

이야기는 2011년 오사카, 2018년 홋카이도, 2023년 도쿄를 배경으로 잦은 플래시백과 교차 편집을 통해 파편적으로 전개된다. 영화 초반 각각의 시공간에서 주요 인물들의 과거를 힌트처럼 짧게 담아내던 카메라는 2011년 키리에와 시오미의 과거 부분에 긴 호흡을 할당한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임신하고 두려움과 불안을 신뢰와 행복으로 덮으며 견디는 듯한 고등학생 키리에, 아이와 키리에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서서히 연락을 피하다 그들이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오사카의 대학에 지원하며 현실을 도피하는 시오미 그리고 대지진의 순간을 함께한 급박한 전화 통화와 키리에의 마지막. 감추지 못한 진심을 알았든 몰랐든 세상을 떠난 키리에에 대한 시오미의 죄책감은 돌이킬 수 없고, 고향의 농장에서 복구를 도우며 살아가기를 선택한 시오미는 루카/키리에와 마오리를 매개하는 당사자가 된다. 

 

영화의 정점이 되는 시공간은 도쿄 신주쿠에서 열린 노상주의 페스티벌이다. 허가를 받지 않은 공연은 주민의 민원에 불법이 되고 개의치 않는 뮤지션들은 무대에 오른다. 공연을 중단하라는 경찰의 경고 방송과 제지에 더 많은 청중들이 몰려들고, 파란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선 키리에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노래한다. 그 시각, 키리에의 페스티벌 무대를 기억하고 파란 꽃다발을 준비한 잇코가 공연 장소를 향해 걸어간다. 같은 시각, 이전 키리에의 버스킹 현장에 함께하는 잇코를 유심히 지켜보다 사라졌던 한 남성이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잇코를 칼로 찌르고 달아난다. 카메라는 피 흘리며 쓰러진 잇코 그리고 경찰과 청중과 키리에의 노래가 뒤섞인 페스티벌 현장을 오가며 갑작스러운 비극과 다중의 혼돈을 어지럽게 비춘다. 진공의 소란이 끝난 뒤, 바닷가에 함께인 루카와 마오리의 모습은 비로소 고요하고 평온해 보인다. 

 

 

영화는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남겨진, 새로운 삶을 위해 가족을 떠나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거대한 비극을 배경으로 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을 최소화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작은 이야기들을 연쇄적으로 펼친다. 소소한 우연을 연결고리 삼아 정교하게 엮어낸 인물들의 관계와 미세한 단서들을 배치해 직조한 인과적 사건들, 시공간을 오가며 장막을 하나씩 걷어내듯 보여주는 에피소드 전개는 여전한 감독의 개성을 보여준다.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불행 속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노래에 집중하는 루카, 할머니와 엄마로 이어진 운명의 틀을 탈피하기 위해 떠나왔지만 스스로 놓은 여성성의 덫에 갇히고 마는 마오리. 너무나 다르지만 불안과 미래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인생의 어느 시절 서로를 고양하며 의지하는 모습 자체가 주는 차분한 위로가 영화에 담겨 있다.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고통으로 말을 하려 하면 멈출 수 없는 오열이 되어버리는 주인공 캐릭터는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감독의 컬러가 묻어나는 설정이자 영화의 중요한 키였던 것 같다. 극도의 고통이 남긴 상흔 속에 부유하는 뮤지션, 말은 잃었지만 노래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키리에를 연기한 아이나 디 엔드는 실제 가수라고 한다. 노래할 때의 거친 발성과 허스키한 음색 때문에 에이미 와인하우스나 재니스 조플린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독특한 하강의 분위기와 연체동물 같은 움직임이 더해져 색다른 느낌이었다. 대사만큼이나 노래와 음악 자체의 비중이 큰 영화였는데 흡인력 있는 한두 곡 외에는 크게 매력적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고, 결정적인 몇몇 에피소드에 깔리는 장중한 첼로 연주는 너무 많이 반복되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점은 아쉬웠다. 

 

키리에 캐릭터는 제목으로 삼을 만큼 상징적이고 영화의 여운을 크게 좌우하는 것이었지만, 다소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측면도 커서 노래와 비주얼과 연기까지 완벽하게 소화할 적임자를 현실에서 찾기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고통과 슬픔을 뚫고 나오는 신비한 힘을 담은 노래뿐만 아니라 독특한 설정의 루카와 과거 키리에의 1인 2역을 어색하지 않게 연기한 낙점자가 최선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실은 미리 찾아본 영화 이미지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긴 머리로 가려졌던 키리에의 구체적인 얼굴을 스크린으로 마주했을 때 바로 흥국생명 배구단의 정윤주 선수가 연상되어, 개인적으로 이상한 각인 상태로 영화를 보았고 몰입이 좀 어려웠다.) 마오리/잇코를 연기한 히로세 스즈는 가끔 영화에서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이민정을 떠올리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살인]의 여고생으로 처음 봤을 때처럼 교복 입은 모습이 여전히 자연스럽지만 뭔가 잘 성장 중인 배우의 모습을 꾸준히 지켜보는 느낌이라 반가웠다. 

 

아무려나, 엄청난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영화를 본 후 뭔가 덜 채워진 느낌이 들었는데 노장 반열에 올랐어도 여전히 ‘시그니처 소녀 감성’을 유지하는 감독과 달리 나의 마음이 많이 늙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매를 하면서 예전 언젠가 부국제에서 [4월 이야기] 상영 후의 뜨거웠던 GV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떠올랐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니 그야말로 옛 일이고, 작년엔가 [라스트 레터]를 보았음에도 내게 이와이 슌지는 어쩐지 오랜 향수의 감각을 소환하는 감독인 것도 같다. 러닝타임이 꽤 긴 편이라 개봉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부국제와 이와이 슌지 조합이 주는 설레임도 즐기고 싶어 선택했는데, 11월 1일 개봉 소식을 들었다. GV 회차도 아니었는데 굳이 영화제에서 봤다 싶어 개봉하지 않을 영화 한 편 놓친 기분이지만, 여전한 청춘의 감성으로 돌아온 이와이 슌지가 지금의 청춘들에게도 통할지 궁금하다. 나는 마음의 늙음을 확인하였다. 

 

 

10/1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KYRIE]

 

Director: IWAI Shunji 이와이 슌지

Cast: AiNA THE END , Hokuto MATSUMURA, Haru KUROKI, Suzu HIROSE

국가/지역Japan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78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동일본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소녀 루카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지만 노래를 부를 때만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죽은 언니가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오사카의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걸 기억해 낸 루카는 무작정 오사카까지 찾아가지만 루카를 염려하고 보살펴 주려는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고아원에 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루카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키리에가 되고 우연히 키리에를 만난 옛 친구 이코는 키리에의 매니저가 되겠다고 자청한다. 키리에는 이코의 도움을 받아 가수로 성공할 것인가? 이와이 슌지는 이번 영화에서 상처받은 소녀들의 이야기를 한다. 가족의 죽음 혹은 이별로 시작된 아픔은 그녀들의 삶에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안간힘이 노래로 울려 퍼진다. 실제 가수인 아이나 디 엔드가 키리에를 맡았고 히로세 스즈, 구로키 하루, 마츠무라 호쿠토 등 눈길을 끄는 배우들이 그녀와 어울리는 조화를 이룬다. (남동철)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647&c_idx=385&sp_idx=0&QueryStep=2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올드 오크]  (0) 2023.10.25
[더 드리머]  (0) 2023.10.24
[바람의 도시]  (0) 2023.10.23
[사라진 소년병]  (0) 2023.10.23
[허공에의 질주]  (0) 2022.11.01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3. 10. 23. 23:55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둠이 드리운 게르 안, 아들을 걱정하는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무속인 그리고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몇 사람의 주술 의례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백발의 노인과 이마를 맞대고 접신한 영의 메시지를 전하던 이가 가면을 벗자 해사한 얼굴이 드러난다. 무당이자 고등학생인 17살의 제, 그의 일상은 울란바토르의 학교생활과 지역 사회의 출장 의례로 채워진다. 평소 여느 남매들과 다를 바 없는 관계인 누나도 제가 의례를 행할 때만큼은 경건하게 보조 역할을 수행한다.   
 
제가 사는 곳은 울란바토르 교외의 시골 마을, 제와 누나는 작은 방을 함께 쓴다. 크지 않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인 침대에서 각자 잠을 청하는 남매의 밤은 제가 연주하는 주즈하프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말고는 고요하다. 말수가 별로 없고 평온한 표정의 제는 학교에서 그럭저럭 모범생이다. 남녀 합반인 교실은 성적 호기심 가득한 사춘기 남학생들의 짓궂은 장난, 억압적인 교사의 고함과 호통으로 소란하지만 제는 적당한 존재감으로 풍경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말을 앞두고 지인의 부탁이라는 엄마의 당부에 출장 의례를 간 곳에서 제는 또래인 마랄라를 만난다. 딸의 심장 수술을 앞둔 엄마가 청한 소년 무당을 마지못해 마주한 마랄라는, 의례를 마친 후 제의 영적 능력을 의심하며 비수를 날리지만 제는 그런 마랄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교실에서 마랄라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교사에게 걸려 휴대폰을 압수당하기도 하고, 혼자만의 상상과 욕망에 빠져들기도 하던 제는 인스타 게시물에서 힌트를 얻어 하리보를 사들고 수술을 앞둔 마랄라의 병원에 찾아간다.  
 
금세 친구가 된 마랄라와 제는 울란바토르 도심의 거리를 함께 걷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눈다. 새로 지어지는 울란바토르의 높은 건물과 아파트를 보며 현대적 삶을 꿈꾸는 마랄라는 수술한 심장이 나으면 한국에 가고 싶다.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는 아빠가 보내주는 돈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지만, 아빠를 배신하고 남자를 끌어들이는 엄마와 답답한 몽골을 떠나고 싶다. 당차고 주관이 뚜렷한 마랄라와 함께하며 백화점이며 클럽을 드나들면서 도시적 삶의 양식과 일탈에 휩쓸리지만, 제는 여전히 동물과 자연과 함께하는 시골 생활로 마음이 향한다.  
 
시장에서 전통의상을 파는 엄마,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자신의 남다른 운명은 제에게 벗어나고 싶은 조건이 아니었다. 마랄라를 만나며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급속한 변화에 휩쓸리던 제는 어느 날 클럽의 거대한 소음과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즈음의 출장 의례에서 전에 없었던 영적 능력의 이상을 감지한 제에게, 적응하기 어려운 도시화와 지향점이 다른 사랑은 아직은 건너가기 어려운 먼 세계인지도 모른다. 
 
문화적 충격과 사랑의 혼란으로 방황하는 제의 학교생활은 겨울을 맞아 졸업을 향해간다. 여느 날처럼 고압적이고 모욕적인 교사의 막말과 짐승 취급에 학생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다함께 짐승 소리를 내며 일격을 가한다. 사춘기를 통과하며 제 나름 성장한 학생들의 얼굴은 찰나의 자존감과 해방감으로 빛난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글로벌 세계와 과도기적인 물리적‧사회적 환경을 동시에 살아가는 경계인의 분열감과 불안 같은 것들, 알게 모르게 이들을 지배하던 무거움을 잠시나마 스스로 제거한 느낌이었을까. 운명이었든 열망이었든 그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제에게도 이 순간은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아들을 걱정하며 의식을 청했던 옆집 할아버지는 제가 찾아가 깊은 속내를 에둘러 꺼내기도 했던 사이다. 알콜릭으로 직장에서 위기에 처했던 아들은 결국 해고되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염려를 현실로 만들었다. “아들아 너는 내 온 마음을 다해 얻은 아이란다. 백 살을 살고 백 번의 가을을 맞이하거라”, 마을길을 걷던 제는 할아버지의 영이 자신을 스쳐가는 것을 목도한다. 간절한 바람을 남기고 떠난 할아버지의 마음을 받아 실의에 빠진 아들을 위로하는 제의 모습은, 화려한 가면도 치렁한 의상도 없지만 첫 장면처럼 진심과 위엄을 담은 영매처럼 보인다. 
 
 
작년 부국제의 [세일즈 걸]에 이어 두 번째 본 몽골 영화, 애초 같은 시간대에 왕빙 감독의 [청춘(봄)]을 예매했는데 전날 시간표를 다시 살피다가 앞 시간 상영과 GV 이후 영화 시작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 급히 바꿨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지만 가급적 GV가 있는 영화를 보고 싶었고 [세일즈 걸]의 괜찮았던 기억으로, 몽골 영화를 한 번 더 보기로 선택. 앞서 본 영화의 주인공이 18살의 이스라엘 소년이었던 터라,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의 이야기라는 면에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이제는 어떤 영화든 젊은 세대가 주인공이라면 휴대폰과 sns는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이지만, 온라인으로 연결된 세계의 동시성과 동질성과 대비되는 오프라인 환경과 삶의 판이한 모습은 그래서 더욱 크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제의 주술뿐 아니라 영화에는 태양, 하늘, 대지 등 온 자연에 모두의 안녕을 비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자주 나왔다. 일상어와는 다른 결의 의고적인 말투에 담긴 축원의 말들은 도시화와 현대화에 밀려 사라진 인간의 순한 마음을 표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전통에 충실한 생활에 고루함을 느끼고 출장 의례 동행을 거부했던 누나가 미혼모가 된 후 오히려 안정감을 얻은 듯 보이고 가족 안에 녹아든 듯이 보이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개발과 발전이 가져오는 구획과 편견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질서 같은 것들이 부각되는 느낌이랄까. 너른 개활지를 사이에 둔, 멀리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울란바토르의 도심과 마을의 대비가 근대와 현대, 과거와 미래의 상징처럼도 보였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무엇이 더 낫거나 좋다는 비교가 무의미한 담담한 포착과 응시가 아닐까 싶다. 
 
GV에는 감독과 제 역할의 배우가 참여했는데, 영화를 보며 느꼈던 모든 궁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만 봤다면 알 수 없었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한국에도 각종 점집과 무속인들이 존재하지만 직접 찾아가본 적이 없고 영화만큼 일상에 깊이 뿌리박힌 문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험한 일이 닥쳤을 때 동네 무당을 찾아가거나 부르는 모습, 그 무당이 평일에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점 등이 신기했는데, 감독이 스물다섯일 때 엄마에게 이끌려 간 곳에서 소년 무당을 만난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라고 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흡인력이 크게 느껴졌던 제 역할의 배우는, 어리지만 샤먼으로서의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마스크와 분위기의 연기자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결국 방송국 촬영 스태프로 일하던 지금의 배우를 추천받아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데시벨이 낮고 고요한 영화였지만 늘어진다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체념이나 포기는 아닌 담담한 운명의 수용, 신체반응이 올 만큼 급격한 감정의 파고와 정신적 충격의 정적인 내면화, 눈빛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의 감정 표현 같은 주인공의 연기 덕이 컸다고 느꼈는데, 연기 경험이 처음인 배우였다는 게 신기했다. 캐스팅되었을 때 어차피 잃을 게 없으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는데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오리종티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마땅하고 축하합니다.
 
 
10/9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
 
 
 

 
 
[City of Wind]
 
Director: PUREV-OCHIR Lkhagvadulam 퓨레브-오기어 카비주램
Cast: Tergel BOLD-ERDENE, Nomin-Erdene ARIUNBYAMBA, Anu-Ujin TSERMAA, Bulgan CHULUUNBAT, Ganzorig TSETSGEE
국가/지역France/Mongolia/Portugal/Netherlands/Germany/Qatar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03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17살 제는 울란바토르의 근대적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샤먼으로서 조상의 영혼과 교감하며 전통적 삶을 이어 나간다. 도시적 삶과 전통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누나와 달리 제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수술을 앞둔 또래 소녀 마랄라를 위해 주술 의식을 하러 간 제는 반항적이면서 불안정해 보이는 마랄라에게 매력을 느끼고, 새로운 욕망이 싹튼다. 영화는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변화하는 몽골의 전통과 현대적 삶의 경계에 선 10대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의무, 전통과 현대, 도시와 시골, 현실적 삶과 영적인 삶의 가치와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이 영화의 10대 주인공들이 직면한 불안과 혼란, 외로움의 풍경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오늘날 몽골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이다. (홍소인)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644&c_idx=385&sp_idx=0&QueryStep=2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드리머]  (0) 2023.10.24
[키리에의 노래]  (0) 2023.10.24
[사라진 소년병]  (0) 2023.10.23
[허공에의 질주]  (0) 2022.11.01
[애프터 미투]  (0) 2022.10.14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3. 10. 23. 23:37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폐허가 된 건물 안에 극도로 긴장한 표정의 앳된 군인이 있다. 무리와 떨어진 듯 혼자인 그는 건물 밖으로 나와 정적이 감도는 건물 사이를 이동한다.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널부러진 시체들을 지나고, 마주치자 겁에 질려 살려달라 애원하는 민간인에게 총을 겨눈다. 쓰러져 있는 운전자를 내던지고 올라탄 차를 운전해 질주하다가, 철조망에 가로막히자 차를 버리고 달리기 시작한다. 

 

숨 가쁜 달리기 끝에 시골 마을에 당도하자 금세 변하는 눈빛, 밭의 수박을 통째로 쪼개 먹으며 달려오는 강아지를 반갑게 맞은 군인은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집, 상한 음식들, 고요하고 불안한 내부 공기에 조심스레 움직이던 그는 샤워를 하다가 밖에서 나는 소리를 감지한다. 문을 두드리고 집 앞을 서성이는 군인들을 블라인드 틈으로 발견하고, 반대편으로 몰래 나와 또 달리기 시작한다.

 

군복에 총까지 메고 도망친 군인이 도착한 곳은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는 도심의 한 레스토랑 주방, 부주방장으로 일하는 시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18살 소년으로 돌아온다. 바다에 몸을 담그고 긴장을 풀던 슐라미는 해수욕을 즐기며 군인의 충정을 치켜세우는 부부와 인사하고, 그들이 물에 들어간 사이 남자의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난다. 

 

건물 옆 후미진 곳에 총을 숨기고 일상복 차림의 손님을 가장해 시리의 레스토랑에 들어간 슐라미는 음식을 시켜 허기를 채우고, 사랑을 담아 저녁 데이트를 청하는 쪽지를 시리에게 전달하며 한껏 들떴다. 하지만 졸지에 옷과 휴대폰을 도둑맞은 부부가 유리창 밖에서 그를 발견하고, 다시 도망친 슐라미는 할머니 집으로 피신한다. 

 

슐라미의 아버지는 일하던 중 근처의 폭격에 충격을 받아 입원했고 어머니는 간병을 위해 병원에 함께 있다. 보병대로 입대해 가자지구 작전에 투입된 아들의 출현, 반나절 사이 급박하게 전장과 일상을 오간 슐라미의 사연을 관객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다. 슐라미는 곧 캐나다로 떠나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 시리를 잡기 위해 탈영했고, 부대에서는 납치로 추정해 집으로 찾아가고 어머니에게도 연락한 것이다.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부대 지휘관의 연락과 눈앞에 나타난 아들의 탈영 고백, 어머니는 자수를 강권하지만 슐라미에게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시리를 만나 자신과 함께하기를 설득하는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퇴근한 시리와 그의 집에 간 슐라미, 뭐라도 해서 이스라엘에서 함께 살아가자는 속마음을 꺼내지만 고대했던 하룻밤과 훗날의 결혼 약속은 가자지구에서의 병사 납치 뉴스로 물거품이 된다.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자수를 결심한 슐라미는 길에서 해변의 부부를 마주치고 도둑놈으로 몰려 시민들에게 봉변을 당한다. 아버지의 예비군복을 입고 자수하기 위해 들른 집에서 깜빡 잠이 든 슐라미는, 바람대로 무사히 자수하고 부모의 얼굴에 환히 웃음이 피어오르는 꿈을 꾼다. 하지만 현실은 신원이 밝혀진 납치병에 관한 취재를 위해 집 앞에 찾아와 진을 치고 있는 방송국 제작진들을 피해 다시 도망가는 것, 슐라미는 탈영 직후 부대 지휘관들이 찾아왔을 때처럼 다시 도주한다. 

 

긴장과 불안, 멘붕과 피로감에 범벅된 슐라미는 다시 차를 훔쳐 타고 질주하지만 곧 도로의 구조물을 들이받고 만다. 상처와 피로 얼룩진 채 차에서 빠져나온 기진맥진 슐라미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차들이 오가는 밤의 도로, 반대편에서 퀵보드를 타고 오던 청년이 잠시 그를 살피다 지나간다. 상점에 들어가 음료를 집어든 슐라미는 가게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납치병 신원 공개 뉴스를 보고 종업원에게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아무 관심이 없다. 

 

자포자기 상태로 달려오던 트럭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슐라미, 그를 피해 급히 핸들을 꺾느라 사고를 내고 멈춰선 트럭 기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폭행을 가한다. 피투성이가 된 채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슐라미,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뉴스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납치병' 슐라미는 그렇게 다른 현실로 돌아간다. 그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출혈뿐이다. 

 

 

영화 초반 전모를 감춘 채 전개되는 극도의 긴장 상황과 이어지는 다양한 일상의 풍경들이 의아하게 다가왔다. 연속된 시간선상, 분절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의 극명한 온도차가 절로 몰입감을 높였다. 평범한 일상복과 무장한 군복 차림의 뒤섞임에 위화감이 없고,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공습의 위협이 상존하며, 먼 하늘에 반짝이는 조명탄과 지금 여기 파티의 불빛이 공존하는. 불시의 포격과 함께 전시와 평시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저런 것일까 싶어졌다. 

 

줄곧 슐라미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입은 옷과 자리하는 장소와 처하는 상황에 따라,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여준다. 벌벌 떠는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누는, 가까스로 집에 닿아 달려오는 반려견 보비를 마주하는, 레스토랑에 찾아가 시리를 바라보는, 인지능력이 감퇴한 할머니 집에 찾아가 어린 손자로서 보살핌을 받는, 상황이 꼬이고 궁지에 몰리며 좌충우돌하는…. 하루 동안 겪을 수 있는 감정과 경험의 극단을 시험당하는 듯한 슐라미를 통해, 영화는 이스라엘의 현실과 더불어 ‘자연스러운 일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적들의 공격에 대한 대응은 군인들만의 몫인 듯 나머지 시민들은 술 파티와 해수욕을 즐기면서 그들을 국가를 지키는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모두가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징병제 국가이니 누구나 경험하는 통과의례이자 숙명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전장을 벗어난 18살 소년 슐라미의 불가능한 바람과 그를 둘러싼 거대한 소동 그리고 상처 입은 그가 거리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무감함과 무신경함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호쾌한 음악, 블랙코미디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무게감을 지우기에 역부족이었다.

 

부러 GV가 있는 작품을 찾아 예매한 올해 부국제 첫 영화였는데 시작 전 취소됐다는 걸 알게 됐고, 프로그래머가 나와서 대니 로젠버그 감독의 상황과 편지를 전했다. 전날 가족들이 있는 텔아비브로 돌아갔다는 감독은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 부산에 도착한 직후 하마스의 공습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편지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젊은 세대의 꿈과 미래에 드리운 그늘 그리고 현실은 영화보다 무겁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며 스크린에 재현되는 부조리와 블랙유머는 오히려 낙관적인 상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면전 뉴스를 볼 때마다 영화와 감독이 떠오른다.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감독과 가족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10/9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The Vanishing Soldier]

Director: Dani ROSENBERG 대니 로젠버그
Cast: Ido TAKO, Mika REISS
국가/지역Israel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98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가자 지구의 작전 중 뜻하지 않게 탈영한 병사의 이야기다. 텔아비브에 사는 연인과 부모를 찾아가는 순진한 얼굴의 18살 청년은 혼란스럽고 뜨거운 하루를 보낸다.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모른다면 마찬가지의 어지러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아랍인들의 시체가 곳곳에 너부러져 있는 가자의 현실과 반대로, 텔아비브의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테러를 규탄한다. 총을 멘 병사가 거리를 활보하는데도, 뉴스에선 그가 적에 의해 납치됐다는 오보가 종일 흘러나온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영화는 ‘눈을 감고 생각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이 머물고 싶은 곳인가?’라고 질문한다. 인물과 함께 질주하는 음악이 압권이다. 숨 가쁜 드럼의 비트에 맞춰 임프로비제이션 하듯 전개되는 연주는 인물의 심장을 박동기처럼 두드린다. (이용철)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598&c_idx=390&sp_idx=0&QueryStep=2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리에의 노래]  (0) 2023.10.24
[바람의 도시]  (0) 2023.10.23
[허공에의 질주]  (0) 2022.11.01
[애프터 미투]  (0) 2022.10.14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2022.10.14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1. 1. 00:33



영화 속 대니와 리버 피닉스의 고민과 아픔을 연결 짓는 것은 실례겠지만, 책을 통해 그의 어린 시절을 조금 알고 나니 대사 한 마디 표정 하나가 더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친한 친구에게도 진짜 이름을 말할 수 없고 위험이 예상되면 휘발되듯 사라지는 일상을 지속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학교 생활을 한 적 없고 또래 집단 속의 사회 생활을 경험한 적 없다는 리버 피닉스에게, 대니를 연기하는 일은 어쩌면 이중의 상상과 재현을 요구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다시 보니 어떤 부분이 주요한 장면이라고 꼽기 어려울 만큼, 잔잔한 중에도 명장면이 많았고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몰입이 되고 간혹 울컥했다. 1988년에 만들어진 영화니까 극중 대니와 리버 피닉스의 나이는 거의 같았을 것이고, 소년과 청년 사이의 젊음이 만개한 아름답고 예민한 그의 얼굴과 표정에 자주 마음이 멈칫했다.

 

예전 정영음의 귀로 듣는 영화인가 하는 코너에서 이 영화를 다뤘고, 그 방송을 녹음해서 가끔 들었었다. 정은임 아나운서의 청아한 목소리로 줄거리가 소개되고 대니의 가족들과 로나가 함께 춤추며 부르는 “fire and rain”이 흘렀던 것 같다. 29주기를 맞은 혼자만의 기념이었는데 혼자 있는 밤 dvd로 영화를 보는 일이 꽤 근사하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영화를 보고 잠시 하늘을 봤는데 별이 잘 보였다.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의 도시]  (0) 2023.10.23
[사라진 소년병]  (0) 2023.10.23
[애프터 미투]  (0) 2022.10.14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2022.10.14
[칼날의 양면]  (0) 2022.10.13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0. 14. 16:45



한 시절의 파열음으로 그칠 수 없는 목소리와 삶들의 진행형 후일담. 서울의 한 여자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스쿨미투를 다룬 "여고괴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당했던 성폭력의 상흔을 극복하고 발화하는 한 여성의 여정을 따라가는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들을 통해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을 재조명하는 "이후의 시간", 여성들의 성 경험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그레이섹스" 등 네 편의 단편이 함께 상영되었다.

 

'미투'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배경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외화된 사건과 이야기들의 고유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영상들이었다. 짧은 분량에 담긴 옴니버스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해서 하나의 소재를 더 깊이 다뤘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단편임에도 익명이나 블러 처리되어 등장하는 인물이 많았으니 이 정도도 대단한 노력의 결과였을 것 같다. '미투'와 관련한 현장 활동에 매진하느라 예술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작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현실을 토로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어떤 곳에서는 한때 세상을 집어삼키는 모든 것이었던 사건이 또 다른 곳에서는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미투'의 경우 가해자뿐 아니라 확장된 가해자그룹이 형성하는 만만찮은 백래시가 세력화되어 있기도 하니, 결국 기록되는 것이 기억되고 전승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다큐는 무척 소중한 작업이 될 것 같다. 네 편의 감독도 영상에 등장하는 절대다수도 여성이었다는 것 역시 '미투'의 현재적 의미를 보여주는 단면처럼 느껴졌다.  



10/14 cgv서면 art2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진 소년병]  (0) 2023.10.23
[허공에의 질주]  (0) 2022.11.01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2022.10.14
[칼날의 양면]  (0) 2022.10.13
[추방된 사람들]  (0) 2022.10.13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0. 14. 16:33

 


명불허전 배우들의 연기와 발리의 아름다운 풍광, 비현실적이지만 내려놓고 보면 부담없는 서사와 적당한 반전, 캐릭터와 대사의 티키타카가 잘 어우러진 웰메이드 로맨틱 코미디였다. 이제는 당연한 기본이겠지만 주요 배경이자 인물들인 발리와 원주민들의 문화를 잘 담아내기 위해 제작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고, 덕분인지 민망한 대상화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느껴지지 않은 점이 좋았다.

 

데이빗과 조지아는 눈만 마주치면 끊임없이 싸워대고 서로에 대해 오래 묵은 악감정도 진심으로 보이지만 몇 번의 고비와 사건을 통해 행복한 화해에 이르는 로코의 오랜 공식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착오적인 수식어가 된 '꿈의 공장' 헐리우드를 여전히 믿고 싶은 제작진의 결기가 가득한 영화처럼 느껴졌고, 제작에도 참여한 두 배우의 이름을 보며 한 시절 헐리우드를 풍미한 거물들의 로망과 향수 덕에 가능했던 작품일까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5박 6일 영화 여행의 마지막 날을 가볍고 유쾌하게 열어준, 쿠폰 덕에 더욱 부담없이 즐긴 영화였다.

 

 

10/14 cgv서면7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공에의 질주]  (0) 2022.11.01
[애프터 미투]  (0) 2022.10.14
[칼날의 양면]  (0) 2022.10.13
[추방된 사람들]  (0) 2022.10.13
[슈퍼 에이트 시절]  (0) 2022.10.13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0. 13. 23:33



장과 사라, 사라와 프랑수아. 거두절미하고 세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며 미세한 변화와 극적인 균열 그리고 그 자체의 모순에 집중하는 영화였다. 첫 장면은 어느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며 사랑을 나누는 장과 사라, 이어 휴가에서 돌아온 아파트에서도 그들은 이제 사귀기 시작했나 혹은 뭐 찔리는 게 있나 싶을 만큼 서로에게 신경쓰며 애틋한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다. 비가 내리니 데려다주겠다는 장의 제안을 물리고 지하철로 출근하던 사라는 거리에서 젊은 여자와 함께인 한 남자를 목격한다. 흔들리는 시선과 심상찮은 표정의 사라는 직장에 도착해서도 마음을 잡지 못한다. 그 시각 장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어머니와 아들이 사는 집에 들른다.

 

장과 사라는 9년차 커플, 장은 전직 운동선수로 사연을 알 수 없는 수감 생활을 거쳐 현재 실업자이고 사라는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장에게는 고령의 어머니가 버겁게 양육 중인 전 아내 사이에 낳은 아들 마르퀴스가 있고, 사라는 조금 전에 10년 전 헤어진 전 남편 프랑수아를 목격했다. 늙은 어머니에게 맡긴 사춘기의 마르퀴스는 자주 문제를 일으키고, 스포츠 스타에서 전과자가 되고 백수 처지인 현실도 장에게는 숙제다. 도입부에서 의아하리만큼 넘치는 혹은 불안을 무마하기 위함인 양 사랑의 느낌을 연출했던 장과 사라의 관계와 온도는 프랑수아의 출현과 함께 서서히 벌어지고 차가워진다. 

 

프랑수아는 장에게 스포츠 에이전시 사업을 제안한다. 전 남편과의 동업을 상관없다며 동의한 사라가 얼마 전 그를 보고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사정을 장은 모른다. 마르퀴스의 질풍노도가 시시때때로 발목을 잡는 가운데 장은 프랑수아와 함께 일을 진행시키고, 커플 앞으로 한결 전진해 다시 만난 프랑수아와 사라는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의 내면에 물결이 일 때마다 콘트라베이슨지 첼로인지의 느린 선율이 노골적인 복선처럼 깔리고, 내내 수상한 기운이 감지되기는 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인물들의 상태는 기복을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며 보였던 장과 사라의 서로를 향한 감정은 권태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라와 프랑수아는 너무 쉽게 몸과 마음을 연다.

 

장에게는 가족 문제가 지뢰밭처럼 깔려있고 사회적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낮은 자세로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라와의 관계도 마뜩지 않다. 장을 속이며 위태로운 만남에 빠져든 사라는 어느새 세상 가장 가련한 여인이 되어 프랑수아의 문자를 기다리던 새벽,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쩌고 하는 독백을 내뱉는다. 감독의 의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큰 진폭으로 변화하는 감정만을 따라가며 공감하기에는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전사가 빈약하게 느껴진다. 장의 일상을 뒤흔드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인 마르퀴스를 흑인 혼혈로 설정하고, 사라의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를 통해 프란츠 파농과 인종차별주의를 거론하는 등 세 주인공 이외의 인물과 상황에 대해 마련한 장치도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엔드크레딧의 쿠키 영상 속에서 흐르던 장과 마르퀴스의 새로운 삶과 화해마저도 살짝 뜬금없게 느껴졌다면, 내가 너무 삐딱한 걸까.

 

솔직히 말하면 뱅상 랭동과 줄리엣 비노쉬를 주연으로 영화를 이렇게 찍을 수 있다니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설득력 없이 급발진하는 감정들이 당황스러웠고, 커플이 다투다가 욕조에 폰이 빠지자 이어지는 "아무것도 없어요." 였나 하는 대사에서는 설마 중의적인 상징인가 싶어 민망해졌다. 감독의 작품은 [렛 더 선샤인 인]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름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이입이 참 어려웠고, 특히 사라 캐릭터의 오버스러움이 당황스러워서 배우는 순순히 수용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선택한 이유는 오직 뱅상 랭동이었지만, 올해 베를린영화제 감독상과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영화라니 안심했는데 내게는 정말 기대 이하였다. 크리스틴 앙고의 [삶의 모퉁이]가 원작이라는데, 인물의 감정과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었다면 영상화에 실패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감독이나 주연 배우 중 한 사람이라도 내한했다면 큰 뉴스가 되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제작자나 주요 스태프가 참여할 예정이었을까 싶었던 GV의 취소 안내를 보고 살짝 김이 빠졌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대로 진행되었어도 조금 민망했겠다 싶었다. 시작 전 뒤쪽 객석에서 감독 이름을 거론하며 기대에 차 떠들던 젊은 남성의 큰 목소리는 영화가 끝난 뒤 실망감이 어린 상태였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옆 객석에서 당황스럽다는 말이 들려왔다. 엄청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웰컴]과 [앳 워], [티탄] 같은 영화를 보며 믿음과 호감을 갖게 된 뱅상 랭동 아저씨가 나오는 작품을 나의 올해 부국제 마지막 영화로 볼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았다.   



27th Biff 
10/13 영화의전당 중극장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프터 미투]  (0) 2022.10.14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2022.10.14
[추방된 사람들]  (0) 2022.10.13
[슈퍼 에이트 시절]  (0) 2022.10.13
[세일즈 걸]  (0) 2022.10.12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0. 13. 23:22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습으로 대다수 이웃들이 떠난 포위 지역, 아빠 모타즈와 엄마 할라 그리고 막내딸 제이나는 외벽 일부가 허물어지고 수도도 전기도 끊긴 집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공습은 진행형이지만 모타즈에게는 평생 일군 집을 떠나는 것도 난민이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정비사였던 그는 집안에서 전기를 생산하려 기계에 매달리고 말통을 들고 나가 물과 식료품을 구해 돌아오곤 한다.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모타즈의 완강한 의지와 노력에 호응하면서도 할라의 마음에는 불만이 쌓여간다. 물정 모를 나이는 아니지만 제이나는, 너스레를 떨며 가족의 불안을 달래는 아빠를 거스르지 않는다.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며 집을 떠나라는 경고에 이어진 공습에 제이나의 집도 참혹하게 파괴된다. 거리로 난 벽은 골조만 남긴 채 전면창처럼 뚫리고 부서져내린 흙더미와 먼지로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현관문 옆 벽이 무너지며 또 다른 문이 생겨나고 제이나의 방 천장에도 휑하게 구멍이 났다. 그럼에도 조금만 손 보면 된다는 모타즈의 아집은 흔들림 없고, 외부를 향해 뻥 뚫린 공간마다 커튼처럼 걸어둔 커다란 천은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아직 떠나지 않은 극소수 중 하나인 소년 아메르가 천창처럼 뚫린 천장을 통해 제이나에게 다가온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둘은 각자 다른 이유로 포위 지역에 남았고, 만났다. 아메르가 내린 밧줄을 타고 옥상에 오른 제이나는 오랜만에 집안을 벗어나 바깥 공기를 만끽한다. 전자기기를 잘 다루고 수완이 좋은 아메르는 포위 지역 곳곳을 촬영해 영상으로 전송하고 위성 전화도 사용한다. 외부와 오래 차단된 상태였지만 사람이 죽는 영상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제이나에게 아메르는 말한다. “사람이 안 죽는 시리아 영상은 없어.” 이후 아메르는 차로 7시간이 걸렸던 가족 여행에서 담은 마다가스카르의 바다를 제이나에게 보여주고 묻는다. “전쟁이 끝나면 뭘하고 싶어?” 제이나는 낚시를 하고 싶다. 낚시는 남자의 일이라는 아메르에게 제이나는 말한다. 두 번째 아빠는 필요 없어.” 

 

포위 지역은 날이 갈수록 위험해진다. 전사와 결혼시킨 후 안위를 알 수 없는 딸을 걱정하던 할라는 아메르 덕에 어렵사리 통화를 시도하고, 즈음 언니들의 결혼을 중개했던 이가 찾아와 제이나의 결혼을 제안하자 폭발한다. 영화 초반에 제이나의 생리를 비밀에 붙였던 할라의 내면에는, 전쟁과 차별로 결혼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여성의 운명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다. 자신은 거부하지 못했고 사랑하는 딸들도 그랬지만 막내딸 제이나만큼은 그렇게 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는 할라의 마음은 모타즈와 헤어져 떠나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이슬람 가부장으로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모타즈는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지니고 있던 총을 꺼내 겨누기까지 하지만, 할라는 제이나와 함께 집을 나선다.

 

폐허가 된 마을은 낯설고 아이들의 물건이 그대로인 채 텅빈 학교도 위험하다. 포위 지역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 헤매는 가운데 모타즈의 추격도 따돌려야 하는 모녀의 머리 위에 어디선가 드론이 날아들고, 아메즈가 모습을 드러낸다. 떠날 사람은 다 떠난 마을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을 인도해주는 사람 역시 아메즈다. 폐쇄된 듯 보이는 터널을 어렵사리 통과해 겨우 당도한 땅 위에서 길목을 지키던 방위군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위험에 처하지만, 다행히 그는 세 사람이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포위 지역을 빠져나가는 낡은 트럭을 모타즈는 용케 뒤쫓아왔다. 멀리서 달려오며 간청하는 아빠를 발견하고 트럭에서 내려 달려간 제이나, 모타즈는 마침내 총을 던져버리고 말한다. “당신과 함께하면 난민도 되겠어.”

 

시리아 내전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는 관객에게도 영화는 낯설거나 어렵지 않다. 공습이 진행되는 포위 지역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그곳에 남은 몇 사람을 주요 인물로 하는 영화는 이슬람 사회의 여성 차별과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의 현실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전달한다. 자극적이거나 작위적인 연출이 거의 없어서 앵글과 별개로 구멍난 벽과 창을 통해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느낌도 들었다. 의외로 군림으로만 일관하지 않고 제이나밖에 없는데도 늘 “얘들아 Girls!” 라고 딸을 부르는 모타즈를 보며 '전사와 결혼시킨 후 생사를 알 수 없는 딸들'을 생각하는 그만의 습관일까 싶었다.

 

모타즈는 여러 모로 답답한(?) 인물이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난민이 된다는 것'에 대해 가장 강력히 환기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억지스러운 고집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생존을 위협하는 불가항력에 대한 개인의 불가피한 선택이 집단적 혐오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니 말이다.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행에 옮기는 할라 그리고 비이슬람 사회의 또래 소녀와 다를 바 없는 제이나의 일상적인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상상할 수 없는 공습, 여성에 대한 차별이 내면화된 언행과 관습이 횡행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행형의 공포가 살아 있는 작품이다 보니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특유의 순수한 분위기가 미덕처럼 곳곳에 녹아 있는 점이 좋았다. 뻥 뚫린 벽과 창문 밖으로 한없이 펼쳐진 하늘로 던진 돌이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어 사라지는 장면이나 부서진 창틀 밖에 어느새 자리한 비둘기는 잠시나마 참혹한 현실을 가려주는 동화적 아우라를 선사하는 느낌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어떤 복선이나 암시도 없이 담담히 이어가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현실과 그럼에도 여느 아이들처럼 마음속 바람을 잊지 않고 나누는 모습, 마침내 다른 세계를 향해 함께 떠나는 모습에 마음이 밝아지고 조금은 안심이 됐던 것 같다. 극장에서도 상영된다면 좋을 것 같다.  


27th Biff
10/13 롯데시네마센텀시티 8관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2022.10.14
[칼날의 양면]  (0) 2022.10.13
[슈퍼 에이트 시절]  (0) 2022.10.13
[세일즈 걸]  (0) 2022.10.12
[자기만의 방]  (0) 2022.10.12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2. 10. 13. 23:11



1972년 겨울 프랑스의 안시, 낯선 도시로 이주한 젊은 부부와 어린 두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집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외출에서 돌아온 젊은 엄마가 옅은 웃음기를 띤 얼굴로 현관에 들어서고 장난꾸러기 아들들은 카메라를 주시하며 귀여움을 발산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유행에 맞게 꾸며졌을 쾌적한 인테리어는 이제 막 부르주아의 일상에 진입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드러낸다. 평범한 주부의 모습인 아니 에르노는 아직 글쓰기의 열망을 품고 문학 교사로 일하는 여성, 그 집에는 딸의 사회 생활을 지원하며 손주들을 돌보는 엄마도 함께 살고 있다.

 

좌파 성향 인텔리인 부부는 그해 칠레 여행의 기회를 얻는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모네다궁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사회주의 개혁을 진행하던 시기, 가난하지만 평등한 발전을 지향하는 나라의 곳곳을 둘러보고 먼발치에서 잠시 그를 목격한 일은 다음 해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역사적 순간을 통과한 강렬하고 애잔한 기억이 된다. 프랑스의 중산층 가족들에게 여름의 긴 휴가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떠나는 여행은 당연한 일상이다. 아니 에르노는 남편의 출장길에 동반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일도 즐겼던 듯하고, 덕분에 홈 비디오는 1970년대 여러 국가와 지역의 어떤 순간을 그대로 포착해 보여준다.

 

가족은 남편 필립의 누이가 살고 있는 아르데슈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며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옛 현무암 건물이 즐비한 마을에서 전기도 없는 자연친화적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기도 하고, 필립의 부모가 살고 있는 어느 농장에서 미니골프를 즐기며 다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공산주의 정권의 감시가 삼엄한 알바니아, 프랑스 제국주의의 흔적이 여전한 모로코, 스페인 곳곳과 영국, 다큐에 마지막으로 담기는 1981년의 모스크바까지 부부 혹은 가족 단위로 여행은 이어진다. 그사이 화면 속 아이들은 성장하고, [빈 옷장]으로 데뷔해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로 펴내기 시작한 아니 에르노에게는 자신만이 기억하는 집필에의 강박도 투명한 레이어처럼 겹쳐진다. 

 

슈퍼 8mm 카메라를 장만해 홈 비디오를 찍기 시작할 때 화면을 채웠던 단란한 가족의 모습,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피사체를 향한 애정 가득한 시선은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서서히 변화한다. 아니 에르노가 19살에 6개월간 오페어로 살았던 영국 여행 영상에서는 부부간에 흐르는 권태와 불화의 조짐이 확연히 드러나고, 유쾌하지 않았던 과거의 시간에 대한 내레이션과 나란히 흐른다. 꼬마들이 어엿한 소년으로 자라는 사이 부부는 조금씩 멀어졌고 다음 해 파경을 맞았다. 카메라는 남편이 아이들의 양육과 촬영본과 영사기는 아내가 갖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촬영한 홈 비디오를 함께 보기 위해 여러 권의 책으로 수평을 맞추면서 기대로 두근거리던 시간, 가족의 행복을 상징하는 듯한 기다림의 시간은 그렇게 끝을 맞았다. 

 

가정 내에서 “양육자, 침묵의 관리자”였던 아니 에르노는 [얼어붙은 여자] 출간 이후 불화가 고조되었다고 회고한다. 남편과 헤어지며 홈 비디오와 관련한 물건을 나눈 것에 대해서는 “기억의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그 결과 40년이 지나 짧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다큐가 만들어졌다. 아니 에르노의 내레이션은 영상으로 남은 흔적이 소환하는 기억과 현재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덧붙여,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서도 냉정하게 객관화한다. 삶에 대해서도 필름에 대해서도 이후의 운명을 상상할 수 없는 시간들이 흘렀고, 촬영 당시와 다큐 작업 과정의 수십 년 시차는 의도하지 않은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보여준다. 

 

상영 정보를 보고 많이 궁금했는데, 예매 후 영화제를 기다리는 사이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신기했다. [단순한 열정]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선물을 받아 읽었었는데, 무려 20년 전이다 보니 중년 여성의 심리에 별로 공감할 수 없었고 나름 옛날이다 보니 자신의 불륜 경험을 세세히 기록했다는 사실도 낯설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읽은 그의 책은 없고 [사건]을 영화화한 [레벤느망]을 보며 뒤늦게 관심이 생긴 터였다. 정보에 따르면 아니 에르노는 이 영화를 ‘한 가족의 아카이브일 뿐 아니라 1968년 이후 10년 동안의 여가 생활, 삶의 방식, 중산층의 꿈 등에 대한 증언′이라 소개했다는데, 그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각별하고 내밀한 또 하나의 레퍼런스를 만나는 기분일 것 같다. 작가와 작품 세계를 잘 모르는 내게도, 한 가족의 10년을 통해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삶의 여러 면모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던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27th Biff
10/13 CGV센텀시티 1관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날의 양면]  (0) 2022.10.13
[추방된 사람들]  (0) 2022.10.13
[세일즈 걸]  (0) 2022.10.12
[자기만의 방]  (0) 2022.10.12
[리턴 투 서울]  (0) 2022.10.11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