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지는 않지만 몇 년간 본 스페인어권 영화들의 좋았던 기억과 관심을 끄는 소개에 기대감이 생겼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8살 아이 코코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영화였는데, 현실에서 체험하는 혼란을 늘 불만과 불안으로 표출하는 어린 주인공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어쩐지 감독의 사고를 어린이에게 투사해 대상화한 듯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감응이 좀 어려웠다.
영화에는 정체성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어린이의 혼란과 그를 둘러싼 어른들의 다양한 입장이 등장한다. 나름의 긴 인생을 살아온 엄마와 아빠, 할머니, 이모할머니 등 주인공의 주변 어른들은 각자 가진 기존의 관념과 편견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이모할머니를 제외하면 모두가 조금은 방어적이고 예민한 관계에 있고 소통방식 역시 그렇다. 은은하게 전제된 갈등은 그들의 과거사에 기인한 듯 보이지만 영화는 약간의 단초를 내보일 뿐 적정한 힌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가르치지 않는 엄마는 코코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그것은 중심이 없는 상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고, 그럼에도 한계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엄격한 거리감을 고수하는 존재다. 양봉을 하는 이모할머니의 다정하고 소탈한 동행이 코코에게 힘이 되고 “전 왜 이래요?” 라는 한숨어린 고백을 끌어내지만, 파티에서 사라진 코코를 찾으며 마침내 “루시아!”를 외치는 마지막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답을 찾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고 어린이 혼자서는 버거운 일일 것 같다.
주인공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배우의 입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민이 주입된 건 아닐까, 과연 맥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주제 넘는 생각이 중반부 이후 떠나지 않았다. 실존의 무게는 말로 표현하는 것과 별개로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주인공 배우가 실제로 그러한 사유와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연기’를 펼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린이의 연기는 대부분 어른의 고민과 시선이 담긴 시나리오와 연출을 통해 이루어질 테지만, 이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아쉽기도 어렵기도 한 작품이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무대의 연주를 중심으로 한 작품으로 예상했는데, 재단과 콩쿠르 그리고 2022년 대회 참가자들에 대한 소개 영상에 가까운 다큐멘터리였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인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기리며 1962년 그의 고향 텍사스에서 시작되어 5년마다 개최된다. 30세 이하만 참가 가능하고 예선과 본선, 준준결선, 준결선, 결선까지 여러 관문을 거치는데, 2022년에는 228명의 예선 참가자 중 선발된 30명이 텍사스주에 모여 본선부터 결선까지 치렀다고 한다.
영화는 재단과 콩쿠르에 대한 안내로 시작되어 본선 참가자들이 모인 시점부터 최종 우승자가 가려지는 순간까지, 2022년 콩쿠르의 여러 면모를 속도감 있게 담아낸다. 재단 관계자와 클래식 전문가, 유튜브 연주 영상에서 보았던 지휘자 마린 알솝을 비롯해 본선 참가자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와 짧은 연주 등이 모자이크처럼 이어진다. 실력 못지않게 전쟁 때문에도 주목받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참가자와 임윤찬 등 메달 수상자들과 더불어 미국과 벨라루스 참가자 등의 인터뷰 비중이 높았는데, 무대가 거듭될 때마다 당락이 결정되고 인터뷰가 추가되면서 생겨나는 서사가 흥미로웠다. 임윤찬의 우승이 몰고 온 화제성으로 이름만 익숙해졌을 뿐, 스크린에 펼쳐지는 모든 장면이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콩쿠르는 물론 클래식 음악계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대회의 기원이 된 평화의 의미를 담아내려는 노력에 더해 젊은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클래식 음악계의 지평을 넓히려는 재단의 역할이 크게 느껴졌다. 매번 제작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이런 다큐멘터리도 만드는 것 같고, 엔드크레딧 마지막에 콩쿠르 연주 QR코드가 떴던 점도 그 연장선으로 느껴졌다.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느끼는 클래식 음악계의 높은 문턱이 협소한 저변과도 연관될 것 같고, 관객과 청중의 외연 확대는 연주자들에게나 해당 분야 종사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지난 콩쿠르 우승자인 선우예권의 내레이션과 임윤찬 외 한국인 본선 진출자가 있다는 점도 약간 신기했는데, 한국에서의 홍보 포커스가 임윤찬에 맞춰진 것과 달리 영화 자체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이모저모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는 점도 좋았다. 콩쿠르 전반의 과정이 적당한 긴장 속에 전개되는 점도, 불가피한 경쟁이지만 출전자들을 북돋우는 따뜻한 분위기와 심사위원들의 포용적인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엔드크레딧에 ‘backstage mothers’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궁금했는데 검색으로 알아낼 수 없었지만 적어둔다. 언젠가 프로필에 ‘2022 반 클라이번 콩쿠르 본선 진출’이 적힌 누군가의 연주를 만나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괜히 반가울 것 같다.
지난해 봄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올해 첫 영화로 보았다. 다큐멘터리적인 서사가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는데, 한정된 시공간에서 진행하는 연주만을 거의 실시간으로 촬영해 편집한 작품이었다. 모던한 공간 중앙에 세팅된 그랜드 피아노와 연주자를 풀샷부터 초근접샷까지 다양하게 촬영한 연주가 흑백 화면 속에 담겼다.
내가 가본 대부분의 클래식 콘서트는 멀리 무대 중앙의 연주자를 내 자리의 시선과 거리 한계 안에서 지켜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주자의 손과 얼굴, 전체 모습 등을 다채롭게 조명한 화면이 연주와 음악의 육체성을 더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소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집중되는 연주에 몰입하다 보니 그사이의 공백과 공명, 여운도 크게 다가왔다.
중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몇 마디 말이 나온다. 연주를 다시 시작하거나 잠시 쉬어가는 순간이 삽입된 거였는데 접하기 힘든 장면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어떤 곡의 초입부를 치다 중단하고, 잠시 쉬는 시퀀스에서의 세 마디 정도. “다시 합시다.” “좀 힘드네.” “지금 무지 애쓰고 있거든.” 긴장감이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의 갑작스런 이완이었는데, 소리에 더해 몸짓과 표정으로 전달되던 음악과는 또 다른 육성의 감동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주 유명한 몇 작품만을 알고 있는 터라 그 음악이 연주될 때는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으로 가득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고인의 부재를 상징하듯 손 없는 건반의 눌림만으로 음악을 전한다. 그리고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진부한 격언이 생명력을 얻으며 엔딩에 떠오른다. 투병으로 삶의 막바지를 향하는 중에 남겨준 이 작품이, 고인의 팬들에게는 눈물겨운 선물로 기억될 것 같다. 문외한인 내게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거친 질감의 흑백 화면 속 저택으로 한 남자가 들어선다. 저택의 주인은 그에게 소녀의 얼굴이 담긴 사진 한 장을 건네며, 중국에서 헤어진 자신의 어린 딸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감독이자 작가인 미겔 가라이가 30여 년 전 작업했던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다. 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프랑코 역할의 배우 홀리오 아레나스는 촬영 중 실종됐고 작품은 중단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배우를 둘러싸고 억측이 난무했고, 친구이기도 했던 홀리오가 실종된 충격으로 미겔은 영화계를 떠났다.
과거의 미제 사건을 재조명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홀리오의 흔적을 좇는 미겔의 여정이 시작된다. 방송을 준비하며 검토하는 자료들에는 수십 년 전 홀리오의 모습과 더불어 미겔의 지난 날 그리고 이제는 퇴물이 되어 버린 영화의 유산들이 있다. 미겔은 창고에 보관하며 방치했던 옛 물건들, 필름보관소에 쌓여 있는 무수한 릴 테이프들을 다시 마주하며 감회에 젖는다. 오랜 친구이자 중단된 영화의 촬영감독이었던 막스, 홀리오의 딸 아나, 젊은 시절 잠시 연정을 나눴던 탱고가수 롤로와도 다시 만나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든다.
감독 은퇴 후 미겔은 청춘의 혼돈을 담은 첫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 등단했다. 창고에서 발견한 작은 상자 속 사진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존재가 드러나지만,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문 닫은 지 오래고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리조트 ‘마리나 링컨’ 한구석 컨테이너를 연결한 공간에 거하는 미겔은 그곳에서 ‘마이크’로 불리며 이웃의 젊은 부부, 마을 어부와 이따금 어울린다. 소박한 살림으로 반려견과 함께하며 글을 쓰고 번역하는 미겔의 현재는 평온하지만 은둔과 체념의 분위기를 풍긴다.
방송 출연 이후 미겔에게, 홀리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시청자가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 홀리오가 있다는 제보를 한 것이다. 3년 전쯤 거리에서 발견됐다는 그는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였고 돌봐준 수녀들이 붙여준 이름 ‘가르델’로 불리며 잡일을 도우며 살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더해졌지만 틀림없는 외모, 수첩에 보관하며 이따금 유심히 주시한다는 실종 직전 촬영한 영화 속 소녀의 흑백 사진이 그가 홀리오임을 증명한다. 요양원에 며칠 머물며 그를 관찰하고 조금씩 접근하는 미겔을 홀리오는 알아보지 못한다.
안타까운 미겔은 홀리오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의 딸 아나와도 만나게 하지만, 과거를 통째로 잃어버린 홀리오는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지만 미겔은, 예전 모습 그대로 폐관한 마을의 극장을 빌려 촬영감독 막스가 보관 중이던 실종 당시 촬영 중이었던 영화의 미완성 필름을 상영하기로 한다. 과거를 잊은 채 살아가던 친구의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되살아난 영화 속, 수십 년 전 프랑크로 분한 홀리오와 연유를 모른 채 보관 중이던 익숙한 흑백 사진이 등장한다. 화면을 지켜보는 홀리오의 목울대가 꿈틀대고 미세하게 변화하는 표정, 눈을 감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마지막 영화를 고심하다 경의와 찬사 가득한 소개를 믿어보기로 하고 선택한 작품. 감독의 이름도 [벌집의 정령]도 처음 들어본 내게 프로그램 노트가 발산하는 감격과 환희는 낯설었지만, 존재를 전혀 몰랐던 다른 세계의 전설적인 감독이 30여 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니 영화제 프리미엄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관객으로 살고 있지만 영화를 공부하듯 판 적은 없기 때문에 명작을 알아보는 배경 지식과 안목이 없는 터라, 영화를 본 후에도 감독과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와 위상을 크게 실감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친구와 더불어 영화와도 이별한 주인공이 친구와 더불어 과거의 영화와도 다시 만나는 영화를, 영화 속 영화 그리고 기술의 고도화로 처치 곤란이 되어버린 영화의 유물들과 함께 보여주는 노감독의 영화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좇는 애잔함이 진하게 느껴졌다. 미겔이 창고에서 발견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프레임 공책을 넘겨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극장에서 안방과 휴대폰으로 형식과 장소를 바꾸며 불가역적으로 변화한 영화의 기념비적인 시작을 기억하려는 감독의 의지였을까 싶었다. 인트로와 엔딩 타이틀 장면에 길게 나오는 야누스 조각상의 의미를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도저한 의도를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실감하며, 올해 나의 부국제가 끝났다.
Cast: Manolo SOLO, José CORONADO, Ana TORRENT, Petra MARTÍNEZ, María LEÓN, Mario PARDO, Helena MIQUEL, Antonio DECHENT
Program Note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귀하고, 지극히 사적이며 또 가장 감동적인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50년간 단 세 편의 걸작 <벌집의 정령>(1973), <남쪽>(1983),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를 만든 빅토르 에리세의 네 번째 장편이다. 미겔 가레이 감독은 33년 전인 1990년에 그의 친구이자 주연인 훌리오 아레나스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한다. 어느날 그는 편집용 필름을 보다가 훌리오를 찾아 나선다. 이 아름다운 탐색의 서사에서 감독이 찾아 헤매는 것은 사라진 친구의 행방일 뿐 아니라 본인 내면에서 점차 소멸한 열정, 바로 시네마의 정령이다. 에리세는 전통적인 시네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본다. 필름, 편집실, 버려진 낡은 극장.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일곱 살에 <벌집의 정령>의 주연을 맡았던 아나 토렌트가 감독의 카메라 앞에 귀환할 때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본인의 필모그래피와 영화사에 가장 시적이고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더했다. (서승희)
빈센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출근한 어느 날 미팅을 위해 둘러앉은 자리에서 새로 온 인턴 위고에게 딴의 농담을 던진 후, 갑자기 흥분한 그가 휘두른 노트북에 상처를 입는다. 주변의 제지로 상황은 진정되지만, 얼마 후에는 일하던 빈센트와 눈이 마주친 다른 팀원 이브가 갑자기 달려들어 볼펜으로 찌르는 일이 발생한다. 연이은 사내 폭력에 회사는 면담을 진행하지만 마주한 당사자들은 혼란스럽다. 볼펜으로 공격한 이브는 이성을 잃은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 없고 빈센트의 당혹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다.
퇴근 후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누군가도, 귀갓길 계단에서 마주친 위층의 어린 남매도 순식간에 돌변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일을 겪으며 빈센트는 공포에 휩싸인다. 창문 너머 맞은 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에게 시험 삼아 인사를 건네고 눈을 맞추자 그 역시 갑자기 격분해 재떨이를 던진다. ‘눈이 마주치면 시작됨’, ‘눈을 피하면 끝’. 며칠 사이 자신에게 반복되는 악몽 같은 현상에 대해 나름 분석하지만,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빈센트는 일단 도시를 떠나기로 한다.
야반도주하듯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아버지의 집, 하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동거인이 있는 터라 환영받지 못한다. 할 수 없이 비어 있는 어린 날의 집으로 피신하던 빈센트는 휴게소에서 부랑아 같은 입성의 조아킴DB를 만난다. 대학교수였다는 그는 빈센트와 같은 일을 겪고 있다며 선배로서 조언을 건네고, 같은 처지인 ‘감시병들’의 존재와 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해 알려준다. 고향 마을에 도착한 빈센트는 빈집의 기척을 반기며 인사하러 온 옛 친구도 낯선 이웃도 피해가면서, 조아킴DB의 조언대로 입양한 개 ‘술탄’과 함께 은둔을 시작한다.
누군가와의 마주침을 최소화하기 위해 빈센트는 집의 잔고장을 직접 수리하고, 음식을 대량 주문한 식당 앞에 차를 대고 몸이 불편한 척도 하지만 완벽한 비대면의 생활은 불가능하다. 와중에 음식을 전달하는 틈에 담배 한 대로 숨을 돌리곤 하던 식당 웨이트리스 마고에게 끌림을 느낀 빈센트는, 우연히 위험에 처한 그를 돕게 된다. 정박된 요트를 집 삼아 살아가는 무일푼의 자유로운 영혼 마고는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허우적대는 빈센트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서로의 눈을 피하며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사랑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불안하고 애잔하다. 둘만의 분투가 이어지는 사이 세계는 폭력 바이러스에 잠식됐다. 이유 없는 무차별 공격이 난무하고 생존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로 도로는 아비규환이다. 차 밖으로 나온 이들은 좀비처럼 아무에게나 질주하고 나뒹굴며 지옥도를 재현한다. 빈센트와 마고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안간힘을 다해 도주에 성공하지만, 창궐하는 바이러스는 마고와 빈센트의 입장을 바꾸고 만다. 비로소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눈을 가리고 수갑을 채우고, 그렇게 함께다.
각자의 삶을 짓누르는 스트레스가 방향 없는 분노와 증오로 발현되고 모두가 무의미하고도 치명적인 표적이 되는 세계의 위기. 아직 전면화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누적되며 잠복하고 있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위험을 물리적으로, 시각적으로, 직접적으로 과감히 영상화한 느낌의 영화였다. 감독이 구현한 디스토피아는 영화가 끝나면 종말을 맞지만, 풍자한 현실은 부정적인 가속화 경향의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무섭게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했다.
극한의 공포를 겪으며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궁지에서 인간은 움츠림과 경계를 넘어 적대로 나아간다. 인턴과 팀원의 일방적인 폭력에 나름의 관용을 보였던 빈센트가 도피 이후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 이웃과 사투를 벌이고 쓰러진 그를 트렁크에 가두는 모습은 섬뜩하다. 자신의 병이 다 나았고 아내에게 돌아간다는 연락으로 빈센트에게 희망을 안겼던 조아킴DB가 얼마 후 아내의 외면에 절망해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부분 역시 그랬다. 무수한 위험에 맞서며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더라도 삶을 떠받치던 의미를 상실하면 생의 의지는 무화된다.
상처 입은 마고와 빈센트의 마지막 모습은 얼핏 [퐁테프의 연인들]의 결말부를 연상시켰지만, 해골프린트 셔츠에 개성 넘치는 외모를 한 감독이 소개 영상에서 이야기한 ‘그럼에도 사랑’인지는 갸우뚱해졌다. 현실을 풍자하며 한계 없는 몽상처럼 확장되던 이야기가 나이브하게 봉합되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메시지와 이미지가 주효한 영화였던 것 같지만 뭔가 헐렁한 내러티브의 아쉬움이 남았다. 영화를 보며 내심 왜 선글라스 에피소드가 없을까 생각했는데, 퇴장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소한 거지만, 영화의 이야기가 현실과 유리된 헛소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아내는 궁금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일은 사실 시간표 채우기에 갈등이 많았던 날이다. 보고 싶은 영화들은 다른 날에 시간대가 겹쳐 있었고, 크게 기대되지 않더라도 GV가 있다면 선택하려 했지만 폐막 전날이어서 찾기 힘들었다. 숙박비 들여가며 머무는 건데 영화를 안 보기는 아쉬워서 시간표를 몇 번이나 훑어보다가 어렵사리 결정한 영화였다. 홈페이지의 영화 제목 아래 무려 ‘범죄/폭력 심리/미스터리/서스펜스/스릴러 코미디/유머/블랙코미디/풍자 호러/고어’라는 태그가 달려 있었음에도 프로그래머의 안목을 믿어보기로 했는데, 생각할 거리는 남겨줬지만 자주 등장하는 폭력 장면은 힘들었고 결과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빈센트의 일상은 요즘 악몽 그 자체다. 직장, 길거리, 아파트 등 곳곳에서 사람과 눈만 마주치면 이유도 없이 얻어맞는다. 이제 직장에 다닐 수도, 아무도 만날 수 없는 빈센트는 유년기를 보낸 시골 마을로 피신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설명할 수 없는 폭력의 물결이 프랑스 전역을 뒤덮는다. <빈센트 머스트 다이>는 긴장감 넘치는 공포물이자, 팬데믹과 경제적 위기로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풍자다. 음모론, 인종차별적 담론, 배타성 등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발현되는 세상의 잠재된 폭력이 빈센트의 삶을 잠식한다. 스테판 카스탕 감독은 유려한 미장센으로 무거운 주제를 장르로 풀어내고, 역동적이고 코믹한 카림 레클루의 연기는 작품에 핍진성을 더한다. 공포에 휩싸인 한 국가를 횡단하는 서스펜스 로드무비 <빈센트 머스트 다이>는 존 카펜터나 조지 로메로의 작품에 비견할 만하다. (서승희)
3대째 손인형극단을 운영하는 가족, 평생 헌신한 아버지가 늙고 힘에 부치기 시작하자 아들 루이가 인형극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피터르가 함께하기 시작한다. 화가를 꿈꾸지만 가난으로 인해 노숙인처럼 지하철에서 생활하기도 했던 피터르는 정말 돈이 없거나 궁하면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며, 가족과 함께하는 공연과 생활을 반긴다. 여러 사람이 장막 뒤에서 두 팔을 뻗어 올려 인형 동작을 표현하며 대사까지 맞추는, 체력과 호흡이 중요한 작업에서 피터르는 합격점을 받았고 모두의 바람대로 정식 구성원이 된다.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가족의 분위기는 다정하고 평화롭다. 젊은 날 공산주의자였던 할머니는 노령에도 멋지고 위트 있는 어른이고, 가업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는 언제나 일에 열정적이다. 어머니는 막내를 낳고 얼마 후 돌아가셨지만 이제 그 빈자리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익숙했던 손인형극을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은 남매들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인다. 자매들은 여성의 권리 찾기와 사회 참여에도 열심이고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대화는 자유롭다.
피터르의 합류로 안정감을 찾은 듯했던 손인형극단은 공연 중 쓰러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손인형극단에서 만난 로르와 사랑에 빠진 피터르는 임신 중인 동거인 엘렌과 점점 소원해지고, 에두아르가 태어난 후 헤어진다. 피터르를 찾아온 엘렌에게 호감을 느끼고 아기를 보러 찾아갔던 루이의 마음은 점점 엘렌을 향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위기를 맞은 극단의 돌파구로 남매들은 순회공연을 떠나지만 녹록지 않다. 피터르는 뒤늦게 손인형극에 대한 혼란과 회의에 휩싸이고, 아버지의 죽음 후 이상행동을 보이던 할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을 이어 경험한 남매들은 기로에 선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손인형극 작업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 루이는 연극배우로 전향하며 엘렌과 동거를 시작한다. 마르타와 레나는 새로운 시대의 서사를 입힌 인형극을 시도하며 분투하지만 극단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극단을 떠나 그림에 매진하는 피터르와 함께하는 로르는, 생계에 무심한 채 혼자만의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며 무너져가는 피터르를 힘겹게 견디고 있다.
연극배우로 주목받기 시작한 루이는 궁지에 몰린 피터르를 흔쾌히 돕고 동생들의 어려움도 헤아리지만, 이미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로르는 스스로 침몰하며 괴팍하게 변해가는 피터르를 마침내 떠나고, 현실을 깨닫고 그림들을 판매하려 지하철역으로 나선 피터르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절망해 폭발하고 만다. 난동을 부리다 체포되어 병원에 입원한 피터르는 그제야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서 놓여난 듯 평온해보이고, 유리창 너머로 로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은 많이 들어 봤지만 작품을 본 적이 없어 궁금했다. 몇 편의 영화로 낯설지 않은 아들 루이 가렐이 절반은 이해할 수 없는 소개글의 난감함을 상쇄해준 덕에 선택. 볼 때는 몰랐는데 정리하며 캐스트를 살펴보니 자매를 연기한 마르타와 레나의 성도 가렐이었다. 이전의 필모들 중에 아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있어 신기했었는데, 자녀들과 함께한 감독의 영화 작업이 작품 속 손인형극단의 상황과 겹쳐지면서 이중의 가족 기록으로 보여지는 점이 흥미롭다.
감독의 이름값이 주는 선입견 때문인지 할머니부터 갓난아기까지 대략 4대가 등장하는 어떤 유장함 때문인지 흔들리는 인물들과 불안한 상황이 연속되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안정감 같은 것이 있었다. 무신론자였던 할머니의 장례에서 가족들만 남게 되자 관 뚜껑의 십자가를 제거하는 루이의 모습은 가족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처럼 인상적이었고, 피터르와 엘렌, 엘렌과 루이의 쿨한 관계가 살짝 놀라웠지만 가족의 소중함만큼이나 다양한 가족 구성도 인정하는 문화적 풍토를 반영하는 것일까 싶어 신선했다.
루이의 내레이션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는 다행히 난해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인형극과 집안에서 자주 투샷으로 잡히는 자매 마르타와 레나 그리고 피터르와 사랑에 빠진 로르를 두고 혼란에 휩싸였다. 초반 손인형극 연습에 이어 피터르와 키스하는 로르를 당연히 자매 중 한 명이라고 인식했고, 이야기가 전개되며 가족과 함께하는 두 자매의 얼굴에서 로르를 찾을 수 없어 촬영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걸까 싶었는데, 헷갈림이 시작된 순간부터 로르의 ‘정체’를 나름 의식하며 봤음에도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났다. 잘 없는 경험이라 난감했고 뭔가 홀린 느낌에, 영화의 제목이 왜 북두칠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소회가 더해졌다. 속 시원히 알아낼 방법도 없으므로,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것으로 나랑 합의.
전작 <눈물의 소금>(2020)에서 여자가 ‘북두칠성’에 대해 묻자 남자는 관심 없다는 투로 답한다. 신작은 어쩌면 그 대답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가렐 영화에서 가족이 새삼스러운 주제는 아니지만, 근래 개인의 섬세한 내면을 그려온 것과 달리 <북두칠성>은 집단으로서의 가족의 모습에 집중한다. 이상할 정도로 바깥 풍경에 인색한 건 그래서다. 3대가 유지해 온 손인형 극단이 두 번의 죽음을 거치는 동안, 가족의 가지는 몇 갈래로 나뉜다. 그 결과, 꿈꾸는 예술가와 다사다난한 가족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긴다. 거기에서 단순하지 않은 가렐의 가족사와, 화려함이나 돈과는 거리가 먼 이력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가렐의 인물과 관계가 집결된, 아울러 거장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가렐의 숨결이 짙게 밴 작품이다. (이용철)
세계에서 가장 늦게 인터넷과 텔레비전이 보급된 나라라는 부탄, 2006년 국왕이 퇴위하며 민주화와 현대화 추진을 선언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처음 경험하는 민주주의와 선거는 국왕 치하에서 문제없이 살아가던 이들에게 혼돈의 신세계를 선사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정당의 후보들이 등장해 지지를 호소하고, 최초의 선거를 잘 치르기 위한 사전 모의 선거가 각지에서 진행된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의 우라 마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민주적 절차와 주권자의 권리 행사는 시골 사람들에게 낯선 일이다. 선거인 명부 정리를 위한 주민 등록에서부터 난관이 시작된다. 생일을 묻는 질문에 보름달 어쩌고 하는 답변이 돌아오고 이름 없이 살아온 이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이 마을에 도착하고 사전 모의 선거가 본격화되면서 정당 지지 여부에 따른 주민들의 반목이 생겨나고,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거부하는 주민들도 생겨난다. 선거 운동 교육이라며 정당별로 지지자를 줄 세우고 서로를 도발하도록 유도하는 공무원에게, 그 자리를 떠나며 한 노인이 남기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왜 서로 무례하게 굴도록 가르치죠?”
마을의 젊은 부부인 초모 가족도 격동의 당사자가 되었다. 어린 딸 유펠을 도시에서 교육시키고 후보에게 잘 보여 나중에 출세시키고자 선거 운동에 나선 남편은 다른 당을 지지하는 장모와 불화를 겪는다. 마을 주민 다수와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아빠 때문에 유펠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더 나은 교육 기회나 장래의 성공보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초모는 혼란스럽다. 민주화와 함께 당도한 현대화의 상징은 텔레비전이다. 큰 화면의 새 텔레비전을 들여놓은 상점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007’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젊은 타시스님도 예외가 아니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우라 수도원의 큰 스님은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다 일을 바로잡을 총 두 자루를 구하라는 명을 내린다. 큰 스님의 지시를 받은 타시 스님의 수소문에, 마을의 한 노인이 선대로부터 간직해온 총을 전달한다. 직전, 수도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벤지는 부탄에 입국한 미국인 총기수집가 론의 부탁으로 바로 그 총의 거래를 통역했다. 남북전쟁 시절에 사용된 총이라며 반색하는 론의 거액 제안에 난감해하며 훨씬 작은 액수를 제시했던 노인은, 돈을 가지고 다시 오겠다며 그들이 돌아간 사이 타시 스님이 찾아오자 총을 건넨 것이다.
돈 가방을 들고 돌아와 극적으로 타시 스님을 마주한 그들은 총을 돌려받으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카달로그를 내밀며 교환을 청한 끝에 ‘007’에 나오는 AK47 소총 두 자루를 요구하는 타시 스님과 극적 합의한 론과 벤지는 인도를 통해 AK47 소총을 들여오기로 하고 부탄의 암거래상을 통해 이를 손에 넣는다. 한편 정부는 여행객을 가장해 입국한 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침 우라 마을의 사전 모의 선거 현황을 취재하는 뉴스 리포팅의 배경인 상점 앞에서 나란히 앉아 음료를 마시는 벤지와 론이 텔레비전 화면에 포착되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출동한다.
총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달리, 사전 모의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파견 공무원이 상주하며 주민들을 독려한 결과 10%에 불과했던 등록률은 98%를 기록했다. 결과는 다수의 지지를 받던 파란 당도 유펠을 외롭게 만든 빨간 당도 아닌 노란 당의 승리, 참여자의 95%의 표가 몰린 압승이다. 선거로 인해 전에 없던 불화를 경험한 마을 사람들은 ‘국왕의 색’인 노랑을 택함으로써, 공동체가 마주한 격변과 불필요한 갈등을 스스로 봉합하고자 했을까.
큰 스님의 디데이, 마을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들었다. AK47 소총 두 자루를 챙긴 벤지와 론, 그들을 추적 중인 경찰들도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이다. 큰 스님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화합의 탑’ 건설을 선언하고 그 기반 자리에 증오, 갈등, 고통의 상징물을 묻기로 한다. 마을의 노인이 타시 스님에게 건넨, 대륙을 건너와 티베트인 수백 명을 죽이는 데 쓰였다는 귀한 총이 제일 먼저 던져진다. 극적으로 도착해 경찰들과 마주한 벤지와 론,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AK47 소총을 탑에 바치며 위기를 모면한다. 영화는 부탄이 2008년 3월, 첫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체제 전환을 이루었다는 후일담을 전하며 마무리된다.
[교실 안의 야크]의 좋았던 기억으로 선택하면서도 소개의 내용은 딱히 매력적이지 않아 반신반의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도시 문물과 현대적 삶에 물들지 않은 마을 사람들의 관습과 전통이 희화화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인간적인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고와 셈법이 주는 감동이 컸고, 우라 마을이 자리한 산악 풍경과 파란 하늘 못지않게 큰 스님이 기획한 대화합의 한 마당이 선사하는 청량감이 엄청났다. 평화와 화합을 열망하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차고 있던 총을 탑의 기반에 바치는 경찰들, 론의 쓰린 속을 알 리 없는 주민들이 의례에 쓰인 남근상을 그에게 전하는 장면 등 사뭇 진지한 상황에서 유발되는 웃음이 유쾌했고,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적절한 깊이와 밀도로 환하게 그려낸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영화 속 우라 마을에서는 두 대의 텔레비전이 등장하는데 브랜드가 각각 삼성과 엘지였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한글이나 한국어를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으니 이례적인 건 아니지만, 전날 본 [바람의 도시]에서 마랄라가 가고 싶어 하는 나라로 한국이 등장했을 때도 느꼈던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위상이랄까. 부심류의 차원이 아니라,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미발전 상태에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느끼는 친밀감에 비해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 혹은 인식은 전반적으로 어떤 우위를 전제한 무지의 상태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맴돌었다. 막 비유하자면 어릴 적 친척 중 누군가 이민 가있는 미국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에 비해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한국은 염두에 없는 상태 같은 것? 한때 이주 단체 활동을 했음에도 아시아에 무관심했던 나의 경우는 확실히 그러한데, 영화 덕분에 ‘언젠가 다시 유럽’, ‘언젠가 남미’를 품고 있는 마음에 흐릿하게 ‘먼저 아시아?’가 더해졌다.
영화제 후반부임에도 GV가 있어 더 좋았고,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든 감독이 ‘길버트 그레이프’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 더 반가웠다. 상기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즐거운 tmi를 전해준 벤지 역할의 남자 배우, 영화에서처럼 차분하게 소회를 이야기하는 초모 역할의 여자 배우도 함께여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부탄이 작은 나라인 건 알았지만 인구가 70만 명 정도이고 대다수 배우들이 연기 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는 건 놀라웠다. 원래 하던 연기보다 표정이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디렉팅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만족했다는 남자 배우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약간은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감독은 첫 번째 영화를 평론가의 관점으로 다시 보고 단선적인 구성 등 미비점을 보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부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장르 영화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감독의 다음 영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의구심 없이 선택할 것 같다.
[교실 안의 야크]를 만들기 한참 전 관객으로서 부국제에 온 적 있었다는 감독은 자신의 두 작품을 선정하고 초청한 프로그래머에 대한 고마움이 큰 것 같았다. 그가 이 이야기할 때 옆에서 민망한 듯 말리는 제스처를 했던 프로그래머는 GV의 마지막에, 감독과 배우들이 관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제안하며 양해를 구했다. 영화를 보고 GV에 참여한 것뿐인데 예기치 못한 흐뭇함과 행복감에 함께 취하는 시간이었다.
10/1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The Monk and the Gun] 국가/지역Bhutan/United States/France/Taiwan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07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Director: Pawo Choyning DORJI 파오 초이닝 도르지 Cast: Tandin WANGCHUK, Deki LHAMO, Pema Zangmo SHERPA, Tandin SONAM, Harry EINHORN, Choeying JATSHO, Tandin PHUBZ, Yuphel Lhendup SELDEN, Kelsang CHOEJAY Program Note 2006년의 부탄. 마침내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도착했다. 그리고 왕정국가 부탄에서 역사상 첫 번째 선거가 시작될 예정이다. 마을 사람들은 선거로 인해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왕을 두고 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부터 교육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먼저 모의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마을의 존경을 받는 큰 스님이 총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여전히 정치보다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탄에서, 첫 번째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오해들과 이에 대한 ‘부탄식 해법’을 말하는 이 영화는 무해하고 아름답다. 데뷔작 <교실 안의 야크>(2019)로 202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다. (박선영)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577&c_idx=385&sp_idx=0&QueryStep=2
새벽 5시 50분 알람이 울리자,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안젤라의 하루가 시작된다. 미리 약속을 잡고 찾아간 인터뷰이의 집에 당사자는 없고 가족들만 기다리고 있다. 낚시터에 있다는 산재 노동자와 배경을 바꿔 줌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안젤라는 또 어딘가로 향한다. 잠시 후 우스꽝스럽게 굵은 일자 눈썹을 한 인공적인 얼굴의 사내가 등장한다. 자신을 ‘보비처 형’이라 칭하며 과장된 제스처로 거친 욕설과 음담패설, 혐오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그는 틱톡 필터 속 안젤라다.
안젤라는 한 다국적 기업이 제작하는 산업 안전 홍보 영상에 출연할 산재 노동자를 찾기 위한 사전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물망에 오른 노동자들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하며, 적잖은 출연료에 대한 기대를 적당히 고취하면서도 산재를 기업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안전한 노동’에 방점을 찍는 발언을 조언한다. 두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다 다쳐 일을 쉬는 여성, 회사 입구에 방치된 낡은 안전대 때문에 퇴근길에 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세인 남성 등 산재 노동자들의 상황은 안타깝고, 숨 가쁘게 일에 치이는 안젤라의 처지도 못지않아 보인다.
적당한 공감과 사려 깊은 태도로 인터뷰를 마친 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안젤라는 거리낌 없는 보비처 형으로 변신한다. 이른 새벽부터 종일 운전대를 잡고 이 집 저 집 방문해 산재 노동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고되고, 와중에 부쿠레슈티에서 꽤 멀리 왕복 이동해야 하는 인터뷰와 다른 업무도 일방적으로 추가됐다. 부족한 잠과 부족한 팀원으로 인한 과부하를 혼자 감당하며 일하는 안젤라에게 틱톡은 과로와 스트레스의 무게를 잠시나마 날려 보내는 출구다.
1981년의 시공간에도 안젤라가 있다. 그는 부쿠레슈티의 택시 운전사다. 무질서하고 혼잡한 도로에는 조급하게 경적을 울리고 시비를 거는 운전자도, 여성 운전자를 만만히 보는 승객도 적지 않다. 와중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안젤라는 영화의 주인공답게 자주 슬로우 화면으로 포착된다. 승객으로 처음 만난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안젤라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40여년 후 두 안젤라는 산재 노동자의 엄마와 사전 인터뷰 담당자로 마주한다. 안젤라의 아들은 퇴근길에 사고를 당해 휠체어 생활 중인 오비디우다. 산재를 노동자 책임으로만 돌리는 기업과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적잖은 출연료에 인터뷰에 응했고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영화는 홍보 영상 촬영 현장에서 마무리된다. 산재 사고를 당한 공장 입구를 배경으로 오비디우와 아내와 딸, 어머니 안젤라까지 가족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대본 없이 오비디우가 사고 당시의 상황을 담담히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된 촬영은, 테이크를 거듭할수록 본래의 목적을 향해 변질된다. 사고의 핵심이었던 입구의 안전대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오비디우의 발언 내용은 제작자의 요청에 따라 누락되거나 정정된다. 다국적 기업이 주체가 된 산재 예방 홍보 영상 제작이 기만적 촌극일 수밖에 없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촬영 과정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익숙한 현실을 환기한다.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만을 대략 요약한다면 이렇게 정리해도 될지 모르겠다. 다국적 기업의 말단 혹은 외주 노동자인 안젤라의 현재는 흑백 화면으로, 택시 노동자인 안젤라의 과거는 컬러 화면으로 전개되면서 “안젤라, 살아가다”, “안젤라, 나아가다”라는 부제와 마지막 촬영 현장 에피소드까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구성된 영화다. [배드 럭 뱅잉]의 경험으로 산만하고 과잉인 감독의 연출은 예상했지만 틱톡이나 sns필터 문외한이라 보비처가 등장한 처음에는 맥락 파악이 어려워 당황스러웠다. 보비처의 정체를 인지하고 두 개의 시공간에서 각기 재현되던 안젤라가 만나는 장면부터 몰입도가 확 높아졌고,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인사 영상에서 감독은 이 작품의 주제 중 하나를 노동 착취라고 소개하면서 미디어로 접한 한국의 노동 현실을 언급하고, 매우 루마니아적인 영화지만 “국지적 영화의 힘”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코미디, 로드무비, 몽타주, 작은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들어있다고도 밝혔는데, 그에 더해 나로서는 소화불량이었던 각종 인용 텍스트들도 무지막지했다. 영화가 끝난 후 마지막까지 올라가는 몇 편의 하이쿠 자막에 살짝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미지와 텍스트 들을 공세적으로 삽입하는 것은 감독의 개인 취향인지 세계를 반영하려는 의도에 기인한 건지 궁금하다.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부캐’ 보비처의 “극단적 희화화” 표현은 나올 때마다 많이 부담스러웠는데, 과하고 독한 표현들이 착취적 상황을 탈피하기 위한 개인의 몸부림으로 설정한 것인지 약간 감독의 재질인지 모르겠다. 영화가 시작될 때 침대 옆에 놓여 있던 프루스트의 책 표지나 정차 중에 다가오는 상인에게 몇 권의 책을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에, 전반적으로 터프하지만 지적이고 진중한 면도 갖춘 안젤라 캐릭터와 보비처의 자동 전환이 내게는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배우들의 향연 속, 후반부에 ‘루마니아의 숲을 망치는 오스트리아 다국적 기업’의 임원으로 니나 호스의 등장은 낯선 루마니아 영화에 유럽성(?)을 더하는 묘한 느낌이었다.
부국제에서 처음 봤던 감독의 작품 [아페림!]은 황량한 배경에 이는 먼지와 소동을 담은 창백한 화면의 기억 정도가 남아 있지만 [배드 럭 뱅잉]은 극단적인 표현의 충격 못지않게 동시대 세계의 초상을 그려내려는 감독의 의욕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이번 작품도 구조화된 노동 착취와 이미지/영상의 실재 혹은 활용을 연결시킨 세계에 대한 풍자가 상당했고, 긴 영화 안에 많은 걸 꽉 채워 넣은 감독의 의도를 조금 더 이해하려면 적어도 한 번은 더 봐야할 것 같다.
러닝타임의 부담을 이겨내고 이 영화는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 언젠가 어디선가 루마니아 영화제 같은 기획전으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고, 정말 그런 게 진행된다면 몇 년 전 부산에서 봤던 [전사, 페렌타리 이야기]도 상영해주면 좋겠다. 아주 가끔 떠오르는 영환데, 이 영화에서 페렌타리 지역이 언급되어 괜히 반가웠다. 팬데믹은 끝났지만 해외여행 갈 돈도 용기도 의욕도 없는 자로서, 멀고 궁금한 나라 구경에 영화만 한 게 없다. 영화제 예매를 준비하면서 감독 다음으로 제작 국가를 살피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암튼 영화 덕에 주마간산이나마 루마니아 반가웠다.
10/11 영화의전당 중극장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
안젤라는 다국적 기업이 제작하는 산업 안전 홍보 영상에 출연할 인물을 물색하느라 부쿠레슈티 시내를 밤낮 누빈다. 과로에 시달린 안젤라가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틱톡에 등장하는 ‘부캐’ 보비타는 위악적인 조롱과 혐오 발언을 퍼부으며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되어준다. 전작 <배드 럭 뱅잉>(2021)을 통해 증명한 바와 같이, 풍자의 대가 라두 주데는 어지러운 과잉의 이미지와 필터링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향연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여곡절 끝에 적임자가 캐스팅되고 홍보 영상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후반부, 휠체어에 앉은 노동자의 목소리가 클라이언트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점점 힘을 잃어가고 진실은 마침내 몇 줄의 자막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목도한다. 이처럼 지구의 종말은 갑자기 찾아오는 재앙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잡아 자전할 동력을 서서히 앗아가는 것임을, 그리고 이미 진행 중임을 깨닫게 된다. (박가언)
막막하고 아련한 느낌이지만 어딘가 끌리는 제목, 부국제 홈페이지의 소개글과 이미지들을 보고 궁금해서 선택했다. 영화 상영 전 인사 영상에서 감독은 실제 거리에서 섭외한 일반인 청소년들을 따라다니며 취재해 몇 년간 촬영했고, 이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시간에 맞서고, 한여름의 열기에 맞서는” 이야기라고 작품을 소개했는데 ‘시간에 맞서는’ 건 나도 하는 일이어서 내심 반가웠다.
주인공은 로마 근교에 살면서 부랑아처럼 거리를 떠도는 두 소년과 한 소녀다. 딱히 하려는 일이나 해야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은 나란히 널브러져 멍을 때리거나 기차에 올라타 주인 없는 가방을 훔치고 로마와 근교의 곳곳을 돌아다닌다. 잘 굴러갈까 싶은 자동차나 한 대의 오토바이에 함께 탄 채 도로를 달리고, 거리에 주차된 차에서 기름을 훔치다가 기척에 사납게 짖는 개를 도발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동네 개울에서 장난삼아 가재를 죽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소녀가 할머니와 사는 집에서 얌전히 밥을 먹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알렉스는 막 스무 살이 되었고 브렌다는 알렉스의 아이를 임신했다. 알렉스를 늙었다고 놀리던 케빈은 부모가 늙은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하고 그들은 수긍한다. 브렌다가 임신하자 알렉스는 동네의 작은 목장에서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브렌다와 케빈은 멀리서 알렉스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둘이 로마에 나가 쏘다니다 키스를 하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자신의 사인을 남기던 케빈은 브렌다와 키스하며 묻은 립스틱 자국을 곳곳의 동상에도 남긴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주인에게 욕먹으며 양을 치는 일도, 권태롭고 무기력하지만 셋이어서 완전체 같았던 어울림도 갈수록 무의미해진다.
출산이 임박한 순간 브렌다의 곁에는 케빈이 있다. 꽉 막힌 도로, 뒷자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브렌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던 케빈은 운전석에서 나와 도와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나는 겨우 열여섯 살이라며 제발 도와달라는 절규, 단 한 번의 간절함도 진지함도 내보이지 않았던 케빈이 마침내 위악과 허세를 내려놓고 목놓아 외치지만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복잡한 인파를 뚫고 도심의 도로를 질주하던 알렉스는 사고를 내고 쓰러졌다. 알렉스를 싣고 하늘로 떠오르는 구조헬기, 테르미니역을 알리는 간판을 응시하다 저 멀리 공중으로 점이 되어 사라지며 영화는 끝난다.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이미지들과 편집, 정신없는 파열음과 이따금 엄숙하고 장중한 성가곡 같은 음악의 대비, 서사는 있지만 부수적인 요소인 듯 논리나 맥락을 초월한 전개로 가득한 영화였다. ‘로마’와 연결하기 힘든 빈한하고 황량한 배경과 기이하게 어그러진 인물들 덕에 간만에 키치니 세기말 같은 단어가 떠올랐고 내가 청춘일 적에 보았던 청춘의 영화들 몇 편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병 덕에 어떤 장면에서의 알렉스는 리버 피닉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어느 시대 어느 세대든 청춘이 겪는 삶과 세계의 무게 그리고 반항과 방황의 자장 같은 건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각자가 처한 현실의 디테일과 재질은 완전히 다를 것이므로 나도 겪었단다 같은 무엄한 심사는 아니고 말이다.
인사 영상에서 감독은 영화에 대해 “모든 이미지,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와 ‘우리 세대가 잘 아는’ 예술 영화의 소환”이라고 덧붙이고, 이미지의 최면 효과와 영화의 힘을 믿는 자신이 촬영하며 느낀 영화 속으로의 이동을 관객들도 경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미지보다는 서사에 민감한 구세대이고 애니와 만화에 문외한이며 1992년생이라는 감독과 동세대일 수 없는 관객으로서, 보았다는 사실이 주요 기억이 될 영화였다. 찬사 가득한 영화에 대한 나의 미진한 느낌을, 스크린 아래를 이미 살짝 침범함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이따금 왼쪽 팔도 들었다 놨다 했던 앞자리 관객 탓으로 돌리지는 않겠다.
Cast: Enrico BASSETTI, Zackari DELMAS, Federica VALENTINI, Lars RUDOLPH
Program Note
<끝없는 일요일>은 올해의 즐거운 발견이다. 브렌다, 알렉스, 케빈은 로마 외곽의 빈민촌에 사는 삼총사다. 돈도 없고 일도 없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이들은 해변에서 어울려 놀고 로마의 백화점이나 명소를 여행객처럼 쏘다니며 시간을 때운다. 우울하지만 젊은 기운으로 가득한 이들은 청춘의 마지막 순간을 불태우며 영원한 우정을 꿈꾼다. 이들의 모습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덥고 긴 여름의 어떤 일요일과 닮아 있다. 브렌다가 임신했을 때 알렉스는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처음 직면한다. 거침없는 시나리오, 풍부하고 짙은 농도와 색감, 다이내믹한 편집으로 완결된 <끝없는 일요일>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탈리아 청춘의 초상을 역동적이고도 가슴 아프게 그린다. 창의적이면서 대담하기 그지없는 갓 서른의 알랭 파로니 감독은 감동적인 첫 장편 <끝없는 일요일>로 무서운 이탈리아 신예 감독의 탄생을 알린다. (서승희)
2016년 영국 북부, 40년 전 광산이 폐쇄된 후 쇠퇴한 마을에 수십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당도한다. 대다수가 종사하던 산업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떠나고 집값은 나날이 떨어지는 마을의 주민들은 달갑지 않다.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자 수십 명의 주민들이 몰려들고 일부는 원색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와중에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던 소녀를 발견하고 흥분한 남성이 카메라를 빼앗아 실랑이를 벌이다 떨어뜨린다. 봉사자들의 제지와 안내로 건물 내부로 이동한 난민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기색이 역력하다.
마을에 하나 남은 펍 ‘The Old Oak’의 주인 발렌타인은 노동조합과 지역 커뮤니티 활동에 열심이었던 전직 광부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주민들은 펍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불만과 불안을 늘어놓는다. 동네에 한 번 와보지도 않고 빈집을 사들이고 되파는 기업형 부동산 회사,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정부 방침이라며 정착을 위해 마을로 이주한 난민들을 욕하는 주민들은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점점 보수화되었다. 폐광 이후 어려움을 겪는 것은 발렌타인도 마찬가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던 너른 홀을 걸어 잠근 게 20년 전이고 방향 잃은 비난을 늘어놓는 몇몇 단골들만 드나드는 펍을 언제까지 운영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도착하던 날 카메라를 고장 낸 남성을 찾기 위해 도움을 청한 일을 계기로 발렌타인은 난민 소녀 야라와 가까워진다. 변상을 받아내는 데에 실패하자 발렌타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오래 묵혀둔 옛 카메라를 수리해 선물하고, 야라는 다시 자신의 시선을 담은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찾기 위해 오랜만에 들어간 너른 홀의 벽에는 광산도 노동조합도 마을도 활기 넘치던 시절의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을 주시하는 야라에게 상황이며 인물에 대해 설명해주는 발렌타인에게도 잊고 지냈던 좋았던 날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에게 외면당하는 무의미한 삶을 끝내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다를 찾았던 게 2년 전이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난 강아지 마라와 교감을 나누면서, 평생을 함께했지만 이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단골들이 드나드는 펍을 무심히 지키는 것이 발렌타인의 일상이었다. 갈등과 혼란도 함께일망정, 새로운 존재들의 이입은 마을과 발렌타인에게 변화를 선사했다. 난민 구호 활동을 하는 옛 동료 로라의 요청으로 생필품 전달을 돕고, 카메라 선물에 감사하는 야라의 초대로 집을 방문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면서 무기력했던 마음이 환기되기 시작한다. 펍의 단골들은 그런 발렌타인에게 쓴소리를 하고 때로 조롱하지만, 가라앉은 시기에도 차별과 혐오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그는 개의치 않는다.
활동은 “우리는 함께 먹고 똘똘 뭉친다”는 슬로건과 함께 마을이 하나였던 광산 파업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소환한다. 20년간 방치했던 너른 홀을 주 2회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는 식사 공간으로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주민들의 재능 기부로 낙후한 시설을 수리하고 단체들의 물품 기부를 받아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이주민 원주민 할 것 없이 모여든 남녀노소는 같은 음식을 먹고 야라가 찍은 이웃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호혜로운 공존이 과거의 전유물만은 아님을 예감한다. 하지만 임시방편으로 수리한 홀의 시설은 완전치 않고 그런 모습이 못마땅한 단골은 밤중에 몰래 설비를 건드린다. 어렵게 피워 올린 희망을 단번에 꺼뜨린 이의 정체를 알게 된 발렌타인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그의 집에 찾아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야라의 집 앞에 다시 주민들이 북적인다. 생사를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져 영국으로 건너온 가족들은 뒤늦게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었다. 살아 있다는 반가움 못지않게 살인적인 환경에 고통 받을 아버지를 염려하며 눈물 흘렸던 야라는, 결국 부고를 전해 들었다. 얼마 전 유일한 가족인 마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던 발렌타인에게 야라와 가족들은 각별한 위로를 전했었다. 여전한 슬픔을 안고 발렌타인은 야라의 집을 방문해 조문한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삼삼오오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까이에서 또 먼발치에서 조의를 표하는 주민들 중에는 펍에서 불만을 늘어놓던 이도, 홀의 설비를 건드린 이도 있다. 거리의 기척에 밖으로 나온 야라의 가족들과 조심스레 위로를 전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들의 첫 만남 풍경과 사뭇 다르다.
세계의 변화와 혼란, 그 속에서 갈수록 힘겨워지는 삶의 주인공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메시지는 ‘용기, 연대, 저항’이다. 각자의 사정과 복잡다단한 갈등을 과연 “우리는 함께 먹고 똘똘 뭉친다” 정신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도 싶지만, 나와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의 힘을 믿고 꾸준히 움직인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기대나 희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과거 자신이 가졌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발렌타인의 모습이 좋았다. 활동 유무와 별개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조금 더 나아가는 일에도 용기 낼 수 있는. 마을의 부정적인 여론을 주도하는 조연들에 비해 별로 포커싱되지 않았던 주민들이 발렌타인의 홀과 야라의 집 앞에 등장할 때의 뭉클함도 기억하고 싶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늘 같은 맥락의 변주 같기도 하고 때로 ‘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수십 년 누적된 단단한 진심이 주는 힘과 감동이 있다. 이 작품이야말로 마지막일 수 있겠구나 싶어, 몇 년 전 [쏘리 위 미스드 유]([미안해요, 리키])를 보고 감격에 젖어 언젠가 부산에서 켄 로치 감독의 GV를 볼 수 있길 바랐던 마음이 떠올랐다.
영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한 마을, 예전엔 광산의 광부들로 활기찼던 마을이었지만 폐광 이후로 떠나지 못한 일부 주민들만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빈집이 늘어남에 따라 마을의 집값은 떨어지기만 하고 주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는 어느 날, 영국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주민들과 시리아 난민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은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 한 시리아 여성과 마을에서 유일한 술집을 운영하는 한 남자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나의 올드 오크>는 항상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의 약자를 대변해 왔던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26번째 장편이다. 그의 무수한 전작들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만, 그 가운데 힘겹게 솟아나는 인간애가 강조된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켄 로치 감독의 열정은 그가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