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11


선언적인 책의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이라크전 발발 즈음 <전쟁에 반대한다>가 출간된 후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의 인터뷰를 읽은 일이 있다. 인상 좋은 노교수의 이야기는 희망적이고 흥미로웠다. 올바른 관점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의지가 같은 세계를 얼마나 다르게 바라볼 수 있고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하워드 진은 자신의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펼쳐보여준다.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2차 대전과 베트남전 등의 굵직한 현대사의 극적인 순간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경험한 하워드 진의 인생은 한 개인의 삶이 역사와 만나서 변화하고 상승하는 가장 아름다운 하나의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는 부모 밑에서 빈민가를 전전하던 어린 시절이 그를 반골기질이 다분한 청년으로 키웠고,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인류애적인 명분과 사명감으로 참전을 결정한다. 광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청년의 혈기는 그러나 이후 그의 삶을 결정짓는 반성의 계기가 되어주었고, 대학에 진학하고 교수가 된 이후에도 그의 삶의 방향은 주저없는 직진이다.

곳곳에 산재하는 희망의 불씨들을 돌보고 피우는 일은 마음 속에 담은 기대와 바람 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움직여야 하고 또다른 나와 연대해야 하고 또한 끊임없어야 한다. 하워드 진은 자전적 역사 에세이라 명명된 이 책에서 담담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2차대전과 미국 남부의 민권 운동, 베트남전 반대 운동 그리고 그 이후를 회고한다. 격동의 물결을 따라 급박하게 변화하는 역사의 중심에서 좌파 지도자의 삶을 살았던 그의 이력은 꽤나 묵직하고 현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여유와 유머 그리고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평범해서 오히려 아름답다. 

며칠 전 일하러 가는 전철 안에서 책의 첫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래저래 나 좋은 것을 좇아 살다가 서른이 되었고, 20대 중후반을 지나며 개인사의 언덕에서 힘겨워하면서도 차마 내 사는 세계의 어둠과 그늘에 대한 연민과 사회 일원으로서의 작은 책무에 등돌리지 못하는 어정쩡함이 늘 삶에 배어있었다. 인생의 한 고비를 일단락짓고 나는 지금 새로운 시작의 경계에 서있고, 그것은 투철하지는 못했지만 학창 시절 내가 꿈꾸던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이다. 그 시작을 축복하는 선물처럼, 그의 삶만큼이나 일관되게 감동과 환희로 독자를 고양시키는 아름다운 책이다.

당장 보이지 않고 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세상 곳곳에서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잠재력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마침내 그들이 일어섰을 때 경이롭게 일궈지는 하나의 변화에 대한 감동을, 그는 이제껏 목도했고 단호히 희망한다. 거꾸로 가는 혼돈의 세상에서 희망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는 그의 메세지는, 역설적이지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그야말로 희망적인 전언이다.


2003-08-07 04:17, 알라딘



달리는기차위에중립은없다
카테고리 역사/문화 > 청소년 역사
지은이 하워드 진 (이후,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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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05


희생과 인류애의 대명사와 같은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는 어려서 누구나 한번쯤 감동적으로 들었음직한 동화의 고전이다. 그와 함께 오스카 와일드라는 뜻모르는 이국의 이름도 떠올리면 무언가 따스한 느낌의 아련함으로 내게는 오래 남아 있었다. 정확히 어떤 연유에선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직 '행복한 왕자'만으로 기억되던 오스카 와일드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 생겨 웹싸이트를 검색한 일이 있다. 그리고 1800년대를 살다간 그의 분방한 일대기에 흥미가 일었던 것 같다.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혔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거의 매장이 되고, 퀴어영화제가 갖은 심의와 검열의 그물망에 걸려 무산되는 문화적 전체주의는 2000년을 몇 년 앞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문화적으로 선진화된 유럽이라한들 한 세기 전의 커밍아웃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악마적 행위로 여겨졌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씌워진 억압의 멍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매료된 탐미주의 문학 천재였던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연하의 소년과의 애정 행각으로 실형을 살게 된 오스카 와일드는 '참회의 아픔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세상과 외떨어진 독방 속의 인간이 된 와일드는 분방하고 자신만만한 이전의 모습과 초라한 현실 속의 자신의 모습 간의 괴리를 담담히 드러내며 옥중의 기록을 완성해내었다. 하지만 태생의 나르시시즘과 그에 걸맞는 천재를 타고난 그의 본성은 감옥이라는 현실을 떠나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탐미와 유미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새로이 문학적인 한 완성을 보기에 이른다. 한없이 추락해버린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애정과 생에의 의지는 시대의 고난을 짊어진 그리스도를 향한 끝없는 간구와 동일시로 돌파구를 찾은 듯 보인다.

그러나 끊임없이 생동하는 열정과 이반의 성향은 '감을 옥하는' 물리적인 분리 따위로 잠재워질 수 없었고, 하여 출소 이후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마지막 10년은 이전보다 더욱 문제적인 행보로 채워지게 된다. 존재하는 순간순간이 늘 논란의 중심이었으나 사후 머나먼 이방의 나라 한국에서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오로지 따스한 비극 '행복한 왕자'의 작가로만 알려졌던 오스카 와일드의 아이러니가 새삼 이채롭게 느껴졌다. 시대를 조롱하며 자신의 세기를 풍미했던 이단 천재작가의 진면목을 발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2003-08-04 18:15, 알라딘



옥중기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오스카 와일드 (범우사펴냄,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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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02


우리 현대사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내가 동시대를 살지 못했더라도 시간적 근접성으로 인한 친근감 덕에 어떠한 사건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애가 끓도록 안타까운 마음이 되곤 한다. 이 책의 주인공 장준하 선생의 죽음 역시 그렇다. 그리고 반복된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생각하며, 혹시 세상은 정복하고자하는 몇몇의 더러운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그 진보가 유예되는 안타까운 반복이 아닌가 답답해지곤 한다. 나라를 잃는다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거국적이고 민족적인 슬픔은 당시 피끓는 젊은이들의 운명을 바꾸는 매우 당위적이고 아름다운 이유가 되었고 후대인 내게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를 남겨주었다. 

장준하 선생은 1973년 의문사로 돌아가셨다. 엄혹한 시대의 의문사가 정권에 의한 타살의 다른 이름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학자풍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학생 시절 '브나로드' 운동을 통해 애국심과 반일의식을 고취하게 되고 이후 자신의 삶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기로 마음 먹는다. 불가항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학병에 차출되지만 중국으로의 탈출에 성공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돌베개를 마다하지 않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 

조국이 광복되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 미국과 소련이 군정을 실시하는 혼란의 와중에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의사들의 임시정부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동족끼리의 전쟁이 벌어지는 한반도. 3년 간의 소모전 끝에 정전이 되었지만, 반으로 갈라진 조국에서는 나라를 팔아 일신을 돌보고 치국의 야욕을 드러내던 기회주의자들의 득세로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섰다. 그 혼란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혀 바른 조국을 만들어보려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등에 업은 정권의 푸른 서슬 아래 얼마나 고통받고 죽어갔는가를 생각하면, 역사의 비정함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1950년대부터 '사상계'라는 정론잡지를 만든 언론인이었던 그는 중국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열악한 상황에서도 잡지를 통한 계몽활동을 쉬지 않는다. 장준하 선생의 용기와 신념은 50년이 흐른 지금보다 더 진보적이고 진실한 언론의 정도를 지켜내며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비양심적인 정복자 집단인 박정희 정권의 광기에 맞서는 일이었던 까닭에 음모 속에 폐간되고 만다. 하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장준하 선생은 목숨을 건 박정희와의 정면 대결을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고 결국 그가 걸었던 목숨은 독재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장준하와 박정희, 역사를 선택한 박정희와 역사가 선택한 장준하의 운명이 눈물나도록 가슴 아프고 원망스러운 까닭은 아직도 인간이 만들어낸 이 땅의 모순이 너무나 극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에 태어난 이 책을 읽을 어린 아이들에게 일제강점기나 혼란의 근대사는 조선시대나 삼국시대만큼이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해를 거듭할수록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유독 우리나라는 기술과 정치사상의 지체현상이 두드러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도덕적인 정치가들에게 맡겨진 정치판의 시대착오적 퇴행이 여전하고, 그와 별개로 풍요로운 일상의 세례 속에서 아이들은 더욱더 진정한 현실의 문제를 멀게만 느끼며 성장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외쳤던 '대~한민국!'은 불과 쉰 살을 조금 넘긴 짧은 역사를 지닌 정부이고, 날 때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있었다고 믿을지도 모르는 현재의 부조리와 불합리가 실은 바름을 향한 열망을 지닌 분들의 힘겨운 싸움을 짓밟은 야욕적 인간들과 외면한 다수 사람들이 남긴 상처라는 것을, 하여 이제 우리들이 더욱 바른 조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3-07-18 22:54, 알라딘



장준하민주주의의등불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김민수 (사계절출판사펴냄,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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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59


제대로 읽지 않았어도 몇 번을 읽은 듯 내용이 훤한 책들이 있다. '키다리 아저씨'나 '톰소여의 모험'같은 어린이 명작 동화류에 속하는 이야기들. '빨간머리 앤' 역시 나에겐 제대로 정독(?)한 기억은 없지만 너무나 잘 아는 그것들 중 하나였다. 다 큰 뒤에 다시 본 이런 책들은 어렸을 적 수많은 만화 영화 중 한 편으로 흔하게 스쳐갈 때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이미 어른이 된 내 마음의 한 구석에 설레임을 불러 일으킨다. 양장본 책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 이 책이 내 책장에 꽂히게 된 건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아이들에게 주려고 산 것 같은데 한 번 읽어나 보고 떠나보내려고 책장을 열었다. 

지나치게 풍부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장황하고 수다스런 말수의 주인공 빨간머리 앤은, 에이번리의 초록지붕 집으로 잘못 입양되어온 11살 소녀다. 어려서 고아가 되고 세상 의지할 무엇도 없이 십여년을 흘러다니며 살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분방한 상상력의 힘으로 묵묵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흔치 않은 매력을 소유한 귀여운 꼬마 아가씨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으로 시작되는 '빨간머리 앤'의 만화주제가가 너무나 딱 어울리는 좌충우돌 철없는 11살 소녀의 성장기는 사실 나 역시 겪었고 비슷비슷한 많은 이야기들로 인해 이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앤 만큼이나 정신없고 진지하며 한편 엉뚱한 작가의 필력으로 눈을 뗄 수 없는 생명력을 발산한다. 

무뚝뚝하고 숫기 없는 매슈 아저씨와의 뿌듯한 교감, 냉정하지만 속깊은 마릴라 아주머니와의 깊은 애정, 세상 가장 막역한 친구 다이애나와의 타는 듯한 우정, 마릴라 아주머니대로부터 이어진 인연의 복선을 깔고있는 길버트와의 경쟁과 대립, 스테이시 선생님과 나누는 사제간의 아름다운 교류, 앨런부인과 주고 받는 친교와 영향 등 초록 지붕의 앤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관계의 디테일한 묘사는 내가 지나온 어린 시절의 잊고 있던 누군가를 오랜만에 떠올리게 하고, 어렴풋이 떠오른 그들로 인해 문득 가슴 한 켠이 싸해지고 주변이 훈훈해지는 듯한 경험을 안겨준다. 우리 모두가 견뎌온 예리한 성장의 통증을 우리는 지나고 나면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그 시절의 번민을 온전히 간직하게 살기에 세상이 너무 각박한 탓에, 어른이 되고난 후에 어린 영혼의 고뇌와 갈등은 그 시절에만 유효한 귀엽고 대수롭잖은 고민으로 치부해 버리는지도 모르겠다. 

눈 닿는 모든 것이 상상력의 재료가 되고 언제나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하고픈 말들을 애써 참고 있는 상태인 혈기왕성하고 생기발랄한 앤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매슈 아저씨의 죽음과 마릴라 아주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탓에 레드먼드에서의 대학생활을 유예하고 에이번리에 머물기를 결단하는 모퉁이길까지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에이번리에서 새로 시작하는 앤선생님의 이야기와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풋풋한 호감의 내음을 엇나가게 풍기던 길버트 블라이드와의 우정과 사랑도 다음 책을 만나기 전까지, 일단은 나도 앤처럼 상상력을 발휘해봐야 할 것 같다. 지난 해까지는 갈등하면서도 읽고 싶은 책이 나오면 이따금 사곤 했지만, 책 만드시는 실무자님들께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더 이상은 이 출판사의 책을 구입하지 않기로 '빨간머리 앤'처럼 사소하게 영혼을 걸고 다시 한 번 다짐했기 때문이다.


2003-07-18 22:05, 알라딘



빨간머리앤
카테고리 아동 > 초등5~6학년 > 어린이동화 > 명작동화
지은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 (시공주니어,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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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58


10년전, 바랜듯한 누런 표지의 실천문학사판 닥터 노먼 베쑨을 어렵사리 하지만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잘 알지 못했던 세계사의 자락들을 따라가며 너무 작고 빽빽한 글씨를 읽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내가 접한 이른바 위인이란 대부분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큰 일을 한 사람들이었기에 고통받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그의 이야기가 조금은 생경한 감흥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체 게바라를 알기 전, 양쪽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세계의 어두운 구석에서 사람사랑이라는 너무나 당위적인 하나의 이유에 자신을 바친 그의 이야기는 내가 처음 접하는 인류애의 숭고함이었다.

하지만 10년만에 버전을 바꾸어 펼쳐든 그의 이야기는, 간략하게 삶의 줄거리를 압축해 부드러운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탓에 마치 새로 보는 듯한 신선함이 앞섰다. 노먼 베쑨의 소소한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기에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거나,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생의 조건이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 일반성을 따른다면 베쑨의 인생과 스페인 내전은 또 중국과 일본의 전쟁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구촌 저 편의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나누고 있는 자신의 현재에서조차 좌불안석할 만큼의 선량하고 광범위한 인류애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여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 스스로 절대고독의 십자가를 향하며 되돌려보냈던 아내마저도 그의 끓는 피를 가라앉게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시엔 치명적이었던 결핵으로 이미 죽음과 대면했던 그는 이후 자신의 생명에 대해 초월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어 민중의 심신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자신을 혹사하던 그는 마침내 중국의 산속으로 찾아들어 그 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중국 대륙을 붉게 물들인 전쟁의 배후(?)에는 자신의 피를 흩부리며 전장의 부상자를 돌본 그의 희생이 점점이 뿌려져있었다는 것이, 어쩌면 사상의 볼모가 된 이 땅 반도의 우리들에게만 너무 늦게 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피상적인 사상의 덫이 실재하는 인간을 잡아채던 어둠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검은 땅 아프리카에서 죽어간 슈바이처 박사만이 숭고한 의사의 전형이 아님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알려줘야하지 않을까. 책의 서두와 말미에서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렇게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한 직종 전체를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의사 집단이 가장 많은 것을 가지되 가장 나눌 줄 모르는 직업군 중 하나라는 인식은 이미 일반적이다. 그때문에 더욱 자기 삶의 성공을 위해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늘어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리즈의 이름대로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 '나도 이렇게 되고 싶어요'라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어린 날 독서의 기억이 인생의 한 고비에서 되살아나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3-07-17 00:30, 알라딘



사랑으로세계를치료한의사노먼베쑨(나도이렇게되고싶어요3)
카테고리 아동 > 초등1~2학년 > 역사/문화/인물 > 세계위인
지은이 홍당무 (파란자전거,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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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57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를 봤다. '새만금 사업 잠정중단 결정' 새만금을 살리려는 분들의 고난에 찬 삼보일배가 끝나고 다시 조용해지는가 싶었는데..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세상은 이렇게나마 조금씩 나아지려는 걸까?

최열 아저씨는 지구촌의 문제를 먹을거리, 쓰레기, 물, 공기, 에너지, 생태계의 여섯 주제로 나누어 환경의 실태와 문제와 작지만 실천적 대안까지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친절히 설명해주고, 그도 모자라 재미있고 귀여운 삽화까지 곁들여놓았다. 각 장의 마지막 부분은 주제에 적합한 관련 인물을 선정해 간단한 인터뷰로 마무리하면서 앞에서 다룬 이야기를 더욱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편집에 글씨도 크고 쪽수도 많지 않은 터라 처음 책을 읽으면서는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환경교과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읽다보니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겨온 많은 것들이 환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왜곡되고 잘못된 상식이었다는 것, 이미 몸에 배어버린 생활 습관 역시 지금이라도 의식적으로 고쳐나가야한다는 절박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 대부분의 문제들이 그 유기적 관련성은 흐려지고 일차적 당사자들에게만 큰 문제거리로 다가가곤 하지만, 지구의 일 만큼은 그 누구라도 당사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어쩌면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벌레를 보면 일단 징그러워 기겁을 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부정적 의미의 인간 중심적 사고로 점철된 이기심 덕은 아닐까 싶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인간의 관점으로 타자화시킨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상생하며 스스로 생동하고 자정하는 지구촌 환경 교육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가끔 숙제나 하면서 잠시 느끼고 잊어버리기에는 시간이 갈수록 병들어갈 우리의 삶터가 너무나 소중하니까. 오랜만에 만난 읽기 위한 책만이 아닌, '실천하기 위한 책'이다.


2003-07-16 00:16, 알라딘



최열아저씨의지구촌환경이야기2(풀꽃문고2)
카테고리 아동 > 과학/수학/우주 > 환경/생태
지은이 최열 (청년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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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56


독서와 관련해 아이들을 분류한다면, 책을 아주 많이 읽는 극소수와 거의 읽지 않는 대다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여 갖은 장르의 서적들이 만화로 둔갑되어 아이들에게 읽혀지기 위해 나오고 심지어 교과서 만화까지 학년별로 나오는 형편이다. 물론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이십년 전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세계사나 역사에 관한 만화들은 많이 있었고, 만화가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인식도 이미 깨져버린지 오래다.

이 책은 아이들을 주독자층으로 겨냥해 엮어진 만화다. 어렸을 적부터 만화에 별 흥미가 없었던 까닭에 지금까지도 나는 만화에 관한한 재미를 못느끼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재구성한 만화가 이상의 '날개'라는 점 때문에 책을 구해 읽었다. 유치함과 단순함이 학습(?) 만화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아쉬운 점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가벼움은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 훌륭한 한국의 현대문학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친근히 느끼게 하고픈 동기에의 공감에도 불구하고 '날개'의 만화화는 조금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어렸을 적 시간이 남으면 백과사전의 책장을 여기저기 펼쳐보던 버릇으로 초등학교 5학년때쯤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됐다. 백과사전 인물편에 있는 '이상'이라는 이름이 이상한 사람, 어두운 인상의 흑백사진에 나도 모르게 끌렸고 그의 본명은 여자 이름 같은 김해경이며 일제시대에 건축가로 소설가로 시인으로 살다가 요절을 했다는 간단한 바이오그래피만으로도 특별한 관심이 가서 마음에 새겨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작품들을 읽게 됐고 '날개'에 흠뻑 빠져 지내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그의 존재를 알고 이유없는 호감을 지녔다한들, 그 시절에 그의 책을 읽고 제대로 이해했을지에 대해서는 긍정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어린이에게는 독서의 적령기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날개'를 만화로 보는 경험은 기대치에의 부응과 무관하게 신선한 경험이었지만, 이 책을 읽은 어린 아이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생각을 하면 조금 의구심이 인다. 차라리 이상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만화로 구성하는 게 제대로 알리기 위한 출판작업이라면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2003-07-06 23:27, 알라딘


날개(만화로보는어린이한국문학소설5)
카테고리 아동 > 아동만화 > 창작동화
지은이 이상 (꿈이있는집,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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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50


책을 읽기 전 윤이상 선생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는 것은 동백림 사건과 이후 그가 재독 한국인으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한편 세계가 인정한 현대 음악계의 거장이었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의 음악에 대한 가치가 폄하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학창 시절 학생회실 구석에 있던 윤정모님의 '나비의 꿈'을 대강 넘겨보다가 말았던 기억, 사후 어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속에서의 베토벤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다소 무거운 인상을 한 그의 얼굴, 일생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다는 통영의 푸른 앞바다가 떠오른다. '광주여 영원히'나 '심청' 같은 대표작의 제목만 들어보았을 뿐 제대로 그의 음악을 감상해 볼 기회가 없었고, 현대 음악가로서의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체감해 볼 수는 더욱 없었다.

'상처 입은 세기의 거장'이라는 다소 고답적이지만 매우 적절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윤이상 선생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와 그에 의존한 피상적 호감만을 가지고 있던 내게 참 고마운 느낌이었다. 현대의 인물임에도 실제 사진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어린이 도서답게 소박하고 예쁜 그림과 함께 중요한 사건과 개념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주석, 다소 도식적인 위인전의 딱딱함을 상쇄시켜주는 성의어린 편집 등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인물을 미화하고 업적을 찬미하는 위인전의 오류를 탈피하고자하는 작가의 노력은, 윤이상 선생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가족적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이어져 그의 삶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비범하게 나고난 음악적 재능보다 가슴이 따스하고 삶의 범주가 넓은, 그러면서도 떠날 수 없는 열정과 사랑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완성해갔던 의지적 인간 윤이상 선생의 이야기는 때로 가슴이 뛰고 때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선사해준다.

윤이상 선생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이미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가장이 된 나이 마흔 즈음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탓이기도 했지만 거장의 반열에 오른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청년의 책임을 온전히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통영과 부산에서 보낸 이삼십대 시절의 이야기는 내게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유럽에서의 음악적 성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뒤에도 그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직접 나서서 모임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동백림 사건이 있은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양심의 길을 따라 행동했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활동이 부자연스러울 때에도 범민련의 초대 의장직을 기꺼이 맡았다. 두 개로 나뉘어진 조국을 가슴에 끌어안고 윤이상 선생은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코스모폴리탄의 치열함을 보여줬다. 그를 잘 몰랐던 내게 그의 삶은 감동을 넘어 경이로움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그의 조국이며 또한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속속들이 왜곡되고 뒤틀어진 역사인지를 새삼 느끼며 소름이 끼쳤고, 옳은 것과 바른 것에 대한 올바른 시선을 견지하려는 이런 책들이 아이들에게 읽혀진다면 나중의 우리 나라는 조금 나아질까 하는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경계도시'의 후반부에 선생의 묘소를 찾아간 장면이 나온다. 송두율 교수 또한 분야는 다르되 윤이상 선생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개의 조국을 끌어안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으로부터 외면 받는 해외파 인사다. 여전히 그분들 이외에도 조국이 버린 수십 분의 애국자들이 해외 곳곳에서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까지 때늦은 안타까움으로 이런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려야할까. 얘기가 조금 번졌는데,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슴 아프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이런 이야기들이 널리 읽혀지고 윤이상 선생님 같은 어른을 존경하는 위인으로 가슴에 새기며 자라는 아이들이 생겨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2003-07-06 21:11, 알라딘



윤이상상처입은세기의거장
카테고리 아동 > 초등5~6학년 > 역사/문화/인물 > 한국위인
지은이 최지숙 (교학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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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49


10년전쯤 읽었던 '금강'의 감동을 기억하며, 가르치는 어린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산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아이들 책의 좋은 점은 술술 잘 읽히는 부드러운 문장과 부담없는 글씨와 편집,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동안이나마 아이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신동엽'이라 써있는 책을 내밀면 십중팔구는 방송인을 생각하겠지만, 그리고 시인 신동엽이라는 사람이 선뜻 아이들 구미에 당기는 대상은 아니겠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면 소박한 그림과 친절한 설명이 잡은 책을 그냥 놓지는 않게 만들 것 같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까닭에 시인 신동엽은 서사시 '금강'이나 '껍데기는 가라'와 함께 어느 정도는 박제화된 대상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시기는 다르되 윤동주나 이상 만큼이나 형식적으로 이미 완성된 이미지로 다가온 신동엽 시인의 전집을 펼쳐본 일이 없어서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볍게 쓰여진 책이어서 신동엽 시인의 삶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이나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간략하나마 그의 일대기를 처음 접하면서 '금강'의 탄생 신화를 지켜보는 듯한 설레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어느 시대건 세상과 사람을 향한 올바른 신념을 가진 '그들'이 있어 오늘의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고마움 역시 잔잔한 비장함으로 다가왔다.

온라인 게임의 현란한 비주얼과 말초적 스릴에 빠진, 해리 포터를 따라 마법의 학교로 가기를 꿈꾸는 우리의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되돌리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숨가쁘고 각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맑은 눈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때묻지 않은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인간으로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2003-07-05 18:20, 알라딘



신동엽(금강을노래한민족시인)(우리시대의인물이야기5)
카테고리 아동 > 역사/문화/인물 > 한국위인
지은이 김응교 (사계절,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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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5. 20:48


데뷔작 '경찰서여, 안녕'은 그즈음 비슷비슷한 소설들에 지루해있던 내게 반갑고 새로운 발견이었다. 농사짓는 어버이께 첫 소설집을 헌정하는, 문학노동자를 자임하는 작가의 겸허함이 작품 속에 녹아난 현실에 대한 충실성과 진정성을 더욱 빛나게 했고 나는 순순히 감동했다. 다중의 화자과 입체적인 형식으로 기존의 후일담 소설이 범했던 우를 피해가려 애쓴 흔적이 엿보였던 '71년생 다인이'는 지지부진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두번째 중단편집인 '모내기 블루스'를 읽으며 여전히 탄탄한 작가의 현실을 향한 긴장감과 기층을 향한 연대의 시선을 재확인할 수 있어 든든한 느낌이다.

표제작 '모내기 블루스'를 포함한 아홉편의 소설은 일단 소재적 측면에서 작가의 관심이 향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소설들은 작가 특유의 유머와 눙치는 충청도 사투리의 여유로움으로 시골을 모르는 서울살이들에게 땅의 진솔함과 고향의 따스함을 전해주면서도 지금 우리 농촌이 겪고 있는 갖은 문제들에 대한 냉정한 직시를 잃지 않는다. 중소도시 혹은 서울 어느 변두리를 배경으로 한 경우, 지리멸렬한 인생들의 부박한 현실의 밑바닥을 훑어내는 작가는 인물 각자가 처한 자체의 모순과 관계의 갈등을 거침없이 짚어낸다. 하지만 작가가 더욱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주변인의 삶을 사는 그들에 대한 냉철한 묘사가 아닌 그들의 혹은 우리의 삶이 이토록 황폐해진 근원에 대한 조금은 거친 파헤침이다. 

김종광의 소설은, 그간 발표된 십여편의 중단편들로 볼 때 여느 신세대(?) 작가들과는 다른 개성으로 정형화되는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사회가 흩어버린 개인 속으로 침잠하여 사소하고 미세한 부분에 천착하고 있는 반면, 김종광은 여전히 '사회'라는 거대한 화두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소설은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형식 실험으로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데 충실하고 있다. 물론 아홉 편의 소설 모두가 고른 작품성과 재미를 담보해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작품간의 편차 역시 아직은 시작선상에 더 가까이 있는 젊은 작가를 지켜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2003-06-14 14:32,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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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