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24.02.29 [벨기에 에세이]
  2. 2024.02.24 [더티 워크]
  3. 2024.02.15 [결혼·여름]
  4. 2024.02.11 [바튼 아카데미]
  5. 2024.02.11 [플랜 75]
  6. 2024.02.06 [넥스트 골 윈즈]
  7. 2024.02.06 [추락의 해부]
  8. 2024.02.06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9. 2024.02.06 [웡카]
  10. 2024.02.06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비밀같은바람2024. 2. 29. 17:17

 

 

19세기 초중반을 살다간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세 자매의 글을 발췌해 담은 작은 책이다. 읽은 건 어릴 때 으스스하게 매료됐던 [폭풍의 언덕]뿐이니 이들에게 별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벨기에 에세이]라는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본문은 “앤 브론테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샬럿의 짧은 시를 시작으로 6편의 일기와 11편의 편지를 묶은 “바람 부는 하워스에서” 그리고 12편의 산문이 담긴 “벨기에 에세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글들이 아닌데 서문처럼 읽힌 첫 번째 글을 동생의 죽음에 부치는 시로 넣은 점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망자의 고통이나 남은 자의 비감을 토로하기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담담히 수용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내용도 이채로웠는데, 아버지가 목사였고 종교의 무게가 지금과는 다른 세계였을 테니 그렇겠지만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시작부터 죽음을 마주하며 그들의 삶이 궁금해 살펴보니 책 말미에 짤막하게 실린 생몰년도는 샬럿 1816~1855, 에밀리 1818~1848, 앤 1820~1849. 세 자매가 모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시대를 감안해도 너무 짧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와 앤이 함께 썼다는 일기 부분에는 자매들이 자란 하워스 목사관에서의 소소한 일상, 가족과 주변인의 소식 등이 담겨 있고 일기의 원본과 배경이 된 공간의 사진 몇 장이 실려 있다. 자매들은 오랫동안 함께 구축한 상상의 세계에서 ‘곤달 연대기’ 등의 서사를 진전시키며 글쓰기를 이어갔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곳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훗날 함께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과 포부를 키워나갔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과거에 함께 쓴 일기를 열어보고 지나온 날들과 몇 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자매들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일기는 1845년 7월 30일, 에밀리의 생일 다음 날의 기록이다. 어릴 적부터 공유한 상상의 세계와 미래의 꿈을 여전히 기억하면서 1848년 7월 30일의 삶을 궁금해 하며 자신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편지 부분에 실린 11편 중 7편의 수신인이 샬럿과 평생 5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친구 앨런 너시, 3편이 에밀리, 1편이 아버지다. 현재 세 편만 확인된다는 설명과 함께 실린 에밀리의 편지들은 모두 샬럿의 여행 일정과 귀가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안부를 담아 앨런에게 쓴 것이다. 샬럿이 아빠와 에밀리 그리고 앨런에게 쓴 편지들에는 비교적 세부적인 사실들이 담겨 있는데 그 수가 적은 데다 작성일이 뒤죽박죽이어서 맥락적 이해는 어려웠다. 1841년 4월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에서 원하는 직장을 얻을 방법이 없어 뉴질랜드 북부의 섬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한 지인 메리의 이야기를 하며, 그에 대해 ‘이성적인 기획력인지 절대적인 광기’인지 염려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1848년의 마지막 두 편지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에밀리와 죽음의 소식이 담겨 있다. 일기에서도 느껴졌던 자매들의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데, 생에 대한 적극성의 원동력이 신앙심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벨기에 에세이” 부분에 실린 글은 에밀리와 샬럿이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1842년에 9개월간 벨기에 브뤼셀의 에제 기숙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프랑스어로 쓴 과제 형식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샬럿은 과제를 봐주던 에제 선생을 짝사랑했고 이후 소설 [빌레트]에 그 경험이 담겼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제목만으로 19세기 여성들의 벨기에 여행기 같은 걸 기대했던 터라 살짝 당황했지만, 전반부의 일기와 편지가 구성이나 내용의 완결성보다 사료로서의 가치와 무게를 갖는 글처럼 느껴져 아쉬웠던 점을 상쇄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첫 번째 글 “한 인도인 과부의 희생”은 죽은 남편을 따라 불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는 아내와 그 의식을 목격한 기록이었다. 샬럿이 인도에 갔다는 정보는 없으니 이주한 인도인들의 현장을 벨기에에서 목격한 것 같은데, 내용 자체의 충격파에 어지럽게 혼재된 세계와 인식의 이질성이 크게 다가오는 글이었다. 의아했던 한 가지는, 과부는 스물 셋, 넷 정도로 보인다고 하고서 그 옆에 ‘열 여섯 살’ 난 딸이라고 쓴 부분이었는데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차여서 몰입해서 읽다가 의구심이 증폭했다. 원문의 오기라면 달렸을 주석이 없어 편집 과정의 오타인가 보다 싶은데, 이런 부분은 많이 아쉽다.  

이후 에밀리의 “고양이”, “해럴드의 초상, 헤이스팅스 전투 전날”, “어머니에게”, “자식의 사랑”, “형제가 형제에게”, “나비”, “죽음의 궁전” 그리고 샬럿의 “앤 에스큐-샤토브리앙의 「순교자들」”, “애벌레”, “죽음의 궁전”, “가난한 화가가 고귀한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뒤섞여 실려 있다. 대체로 두 사람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 인간에 대한 양가적 인식, 독실한 신앙을 전제로 한 세계에의 사유가 녹아 있는 글들이다. “나비”, “애벌레”와 두 편의 “죽음의 궁전”은 같은 글감으로 각각 쓴 글이었는데 신과 자연의 위대함과 유한한 인간의 타락과 비극에 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죽음의 궁전”은 감정과 현상을 의인화하고 인간 세계의 질서로 구조화한 상상력과 묘사가 감탄스러웠고, 모티프가 되었을 원전이 궁금해졌다. 화가 초년생 조지 하워드가 밀로드 남작에게 후원을 요청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래의 성취를 소망하는 마지막 글에서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나 흥미로웠고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샬럿의 간절한 바람이 투사된 느낌이었다.  

책 전반에 걸친 세심한 주석과 설명, 많지는 않지만 적절히 들어간 자료와 사진들,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자의 ‘옮긴이의 말’에 출판사의 ‘편집 후기’까지 모두가 무척 애써서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문한 독자로서 원작 언어에 따른 번역 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고, 구성과 편집에 들인 출판사의 노고를 책 말미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브론테 자매와 그들의 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독자라면 무척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초심자로서는 여성의 입지와 활동에 대한 제약이 당연하던 시대의 한계를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경계 없는 사유와 일상적인 글쓰기와 꾸준한 배움의 길을 걸었던 브론테 자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좋았다. 너무 짧은 생애로 다 펼치지 못한 탁월한 재능과 진취적인 미래 계획은 안타깝지만, 남겨진 흔적은 충분히 소중한 것 같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김자영, 이수진 옮김
2023.8.25초판1쇄 발행, 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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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2. 24. 23:39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책에서 다루는 ‘더티 워크’는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더럽다고 여겨지는 일 혹은 임금노동 그리고 물리적 측면보다는 도덕 또는 윤리의 위반을 뜻한다.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사회로부터 더럽다고 여겨지는 개인, ‘더티 워커’다. 저자는 교도소 노동자, 드론 영상 분석가, 도살장 노동자, 시추선 노동자 등을 심층 취재하고 이러한 노동이 현대 미국 사회에서 더티 워크가 된 맥락과 현황 등을 여러 관련 이론과 연결해 서술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더티 워크’ 개념을 처음 사용한 시카고대학교 사회학자 에버렛 휴스를 소환한다. 그는 ‘인간 생태’ 연구에서 직접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시카고 사회학파의 공동 창립자 로버트 파크의 제자로 1948년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면서 여러 단상과 지식인들과의 교류 등에 대한 일기를 남겼고, 특히 유대인 ‘문제’에 대한 대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2년 몬트리올 맥길대학교 강연을 바탕으로 학술지 <소셜 프라블럼스>에 기고한 “선량한 사람들과 더러운 일”에서 그는, 유대인 학살이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것이며 자신이 나치의 ‘최종 해결책’에 주목하는 것이 ‘우리 가운데 언제나 숨어 있는 위험들에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라고 썼다고 한다. 

과거 에버렛 휴스가 제기한 질문들을 현대 미국 사회로 가져온 저자는 팬데믹을 통과하며 명명된 ‘필수노동’ 가운데, 주로 여성과 소수 인종에게 할당된 열악한 저임금 노동들 중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하게 숨어든 더티 워크의 실상과 더티 워커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밝힌다. 특히 ‘불쾌한 행위가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의 뒤편으로 옮겨졌다’고 쓴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을 인용하며 혐오스러운 것을 격리하는 문명화를 더티 워크의 비가시성과 사회적 은폐와 연결하고, 계급 분석의 초점을 노동자가 겪는 ‘도덕적 부담과 감정적인 어려움에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리차드 세넷의 <계급의 숨겨진 상처>를 참조해 노동과 도덕적 외상의 관계를 주목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특징을 갖는다. 1) 다른 인간 또는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이따금 폭력을 행사하는 노동 2)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 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인 노동 3) 타인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찍혔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는 노동 4)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만약의 경우 책임 회피 가능한, 그러나 누군가 매일 고역을 치르리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위임하는 노동 

보통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용인한 일종의 제도적 폭력인 더티 워크는 대체로 가난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이들에게 할당되고, 사회의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문제가 될 경우 노동자 개인에게 비난의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더티 워크를 지속시키는 권력의 움직임과 복잡한 공모 관계를 감추는 데에 유용하고, 더티 워커를 결정하는 사회의 구조적 차별을 은폐하는 기제가 된다. 저자는 서양에서 백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계약’을 통해 보장된다고 지적한 철학자 찰스 밀스를 인용해 더티 워크 역시 보이지 않는 계약의 산물이라고 쓴다.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기 더욱 쉽고 책임을 전가하거나 원인을 거대한 외부의 힘으로 돌리기에도 용이한 계약이다.  

PART 1. ‘교도소 담장 안에서’에서 저자는 2012년 플로리다주 데이드 교도소의 정신과 치료시설인 ‘전환치료병동’에서 벌어진 재소자 대런 레이니의 ‘샤워기 치료’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교도소와 더티 워크를 둘러싼 인권 상황과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탐색한다. 1970년대 정신질환자 ‘탈시설화’ 운동이 1980년대 긴축재정 및 징벌적 형사처벌 정책과 만나면서 주 정부의 정신병원들이 대거 폐쇄되자 미국 사회의 정신질환자들은 교도소에 과밀 수용되었고, 적절한 치료 대신 부적절한 감금과 학대 상황에 놓였다.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수감자가 1,000퍼센트 이상 증가한 플로리다주에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지역 경제가 파탄난 상황에서도 교도소 일자리가 많았다.  

1장 ‘학대로 얼룩진 시설로 들어가다’의 주요 인터뷰이인 정신건강 상담사 해리엇은 이 시기 정신보건 서비스 사설공급업체 코라이즌을 통해 데이드 교도소에서 일하기 시작해, 교도관의 재소자 인권 침해를 수시로 목격하고 그에 묵인할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런 레이니의 죽음에 침묵한다. 두려움과 일자리의 필요로 내부 고발을 하지 못한 죄책감은 신체적 이상 징후로 이어지고 결국 퇴사 후 플로리다주를 떠난다. 그는 이후 심리치료를 받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고, 저자와 만났을 때 교도소에서 일하며 고통스럽게 써내려간 ‘트라우마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교도소의 잔인한 상황을 전한다. 일을 시작한 초기에 불합리한 관행을 상사에게 공유하자 돌아온 교도관들의 압박에 자신의 한계를 실감한 뒤, “사다리의 맨 아래층에 속한 채” 무관심과 방임의 동조자로서 느낀 괴로움과 혼란에서는 교도소를 벗어난 후에도 벗어날 수 없었다.  

2장 ‘어떤 시스템이 교도관을 잔혹하게 만드는가’에서 저자는 폭력적인 범죄자를 수용하는 엄중 감금 시설로 지정된 플로리다주의 샬럿 교도소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 커티스 등 교도관들 그리고 교도관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심리치료사 스피나리스를 인터뷰한다. 교도관 생활을 “끝없는 불안” 상태로 설명한 빌은 교도소 내에 팽배한 ‘우리 대 저들’이라는 적대적 사고방식과 잔혹한 습성의 ‘연쇄 공갈꾼’ 동료들 그리고 자신 역시 행사했던 폭력 등에 대해 증언하면서, 각종 교정 사업의 민영화와 인력 감축 및 재정 긴축 정책을 주요인으로 지적한다. 주립 정신보건 시설의 급감 및 ‘삼진아웃법’ 등 엄벌 정책의 유행으로 더욱 악화된 교도소 환경은 너그러운 교도관마저 물리력에 의존하게 만들었는데, 때로 발생하는 동료의 죽음과 자살은 자기 보호를 위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1970년대 이후 교도소는 시골성, 인종, 지역, 빈곤이라는 사중의 낙인을 짊어진 지역에 세워졌고, 교도관 생활로 내적 갈등과 도덕적 혼란을 느끼면서도 침체되고 척박한 시골에서 드문 일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1960년대의 정치적 격변과 1971년 아티카 폭동 등의 여파로 1970년대부터 증가된 흑인 교도관들은 만연한 인종차별과 직업 규율 사이에서 가중된 갈등을 경험했고, 전과가 있으면 교도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빈곤율과 범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흑인과 라틴계 여성이 교도관으로 일할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플로리다시티의 데이드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며 지역을 탐색하는데, 퇴락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목격한 구인공고가 교도관 채용이었다고 적는다.  

이런 조건에서 일하며 가치관과 관점의 변화를 겪으면서 “도덕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말한 빌처럼 많은 교도관들이 심리적‧정신적 어려움에 빠지고, 구조적 폭력이 공고한 시스템의 말단에서 그들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된다. 코로나19가 한창이었던 2020년 트럭 운전사, 물류창고 직원 등과 함께 ‘필수노동자’로 지정된 교도관 중 10만 명이 양성 판정을 받고 17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다중적인 위험을 몰아넣은 교도소의 물리적 열악함은 개선되지 않았고 특정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비난의 화살은 교도관들에게 쏠렸다. 저자는 관련해 과거 노예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남부 농장주 ‘신사들’과 그들에게 노예를 공급하며 ‘영혼몰이꾼’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잔혹한 노예상을 언급한다. 즈음 대니 레이니 살해 사건으로 여론의 포화를 맞은 플로리다 주정부의 재수사 결과 역시 대중의 비난은 교도관에게 집중시키면서도 교도소에 만연한 면책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장 ‘인권 대신 이윤을 좇는 교도소 자본주의’에서 저자는 1842년 찰스 디킨스를 초대한 펜실베니아주의 이스턴 주립 교도소를 방문하고 그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현재 미국 교도소의 물리적‧지리적 변화를 좇으며 잔인성의 가시성과 형식에 주목한다. 대런 레이니 살해 사건은 교도소 인권 상황에 대한 대중의 오랜 무관심을 환기했지만, 공공시설인 교도소의 운영 예산 삭감을 위해 시행된 인력 감축과 교정 사업 민영화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구조적 시스템으로 이미 안착됐다. 해리엇을 고용했던 코라이즌 등 교도소 의료서비스 제공업체는 재소자 규모가 큰 지역에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체로 자리잡았다. 민간 부문에 외주화된 노동의 조건은 악화될 수밖에 없고 내부의 재소자와 노동자 모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지만, 비용 절감은 ‘납세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포장된다. 저자는 부적절하게 과밀 수용된 교도소 내 정신질환자를 치료시설로 보내는 프로그램을 채택한 일부 주들과 재소자 인권운동가들의 활동으로 상황이 나아진 일부 주들의 사례를 통해 암울한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둔다.   

PART 2. ‘드론 화면 너머’에는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군사작전의 드론 영상을 분석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미국이 과거의 팽창주의적 대외 간섭 기조를 폐기한 이면에는 드론을 사용하는 전투 방식이 보편적으로 자리했지만 공적 담론의 장에서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데, 베트남전쟁 이후 징병제가 폐지되면서 미국이 자행하는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무관심해졌고 이러한 방식에서는 미국 병사가 사망할 위험이 없으며 드론 전투 자체가 가진 비밀주의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대신 ‘조이스틱 전사’라는 비아냥 속에 해가 들지 않는 작은 방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도덕적 외상과 윤리적 딜레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전쟁의 부담을 짊어진다. 그들은 업무 시간과 일상생활의 도저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이 모니터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기밀 사항과 업무 수행에 따르는 트라우마를 홀로 감내한다. 전장의 물리적 위험이나 목숨을 건 동료애 같은 것이 부재하는 전투를 외롭게 수행하는 드론 조종사들의 혼란과 환멸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고, 과거 베트남전 등의 귀환병들에게 돌아갔던 형식적인 경의와 명예 또한 남의 일이다.    

4장 ‘드론 조종사의 고립된 몸과 마음’에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아론은 드론 전투원을 자원해 활동하며 초기에는 제법 잘 적응하지만 결국 깊은 도덕적 외상을 입고 그만둔다. 이후 홀로 침잠하며 치유와 회복을 위한 시간을 보내던 중 친구의 권유로 ‘평화를 바라는 참전병사단’ 모임에 참여하고, 과거 표적살인에 가담한 자신의 일과 죄책감과 회한 등을 청중들과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비밀주의에 휩싸인 드론 전투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다. 익명의 협박 메일이 쇄도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으로 사회가 소수에게 위임한 보이지 않는 전쟁과 폭력의 실체를 가시화하며, 그는 “제가 죽인 모든 사람을 위한” 묵념을 청중들과 함께 올리기도 한다. 저자가 참여했던 한 모임에서는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귀환병을 둘러싸고 청중들이 “우리가 당신을 위험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 우리는 당신의 책임을 함께합니다.”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얼핏 가해자들끼리의 위로와 치유 같은 느낌도 들지만, 사회의 모두가 연루된 전쟁의 책임을 전투원에게만 전가하는 현실을 성찰하고 그 무게를 나누는 것이 전쟁을 멈추는 머나먼 길의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5장 ‘가난과 폭력의 상관관계’의 인터뷰이인 헤더 라인보는 나고 자란 시골 소도시의 탈출구로 영상 분석가를 선택했다. 해군에 지원해 멀리 떠나고 싶었던 그가 신병 모집 창구를 찾았을 때 자리를 비운 해군 담당자 대신 공군 담당자의 제안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반군 소탕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위한 영상 분석에 투입된다. 아군 병사 보호와 적군 병사 소탕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새기며 매일같이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죽음을 거듭 마주하던 헤더의 내면에는 점차 의구심이 일기 시작한다. 퇴근 후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잠을 잘 때면 강박적으로 이를 갈며 심신의 통증이 심화되던 중 찾아간 상담사는 그를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한다. 그런 헤더가 느끼는 또 다른 부담과 부당함은 출근길 기지 앞에서 자신들을 향해 반전시위를 벌이는 코드 핑크 시위대였다. 자신과는 다른 계급에 속한, 반전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의 독선적인 정의감과 엘리트 의식과도 싸워야 했던 헤더는 결국 3년의 근무 끝에 조기제대한다.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으로 돌아간 헤더는 드론 영상 속 목표물 같은 괴물 악령과 다정한 양육자였던 아버지의 질타를 당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헤더처럼 잠을 잘 때 강박적으로 이를 갈고 악몽에 시달리는 또 한 사람, 미국의 남쪽 국경에서 국경순찰대원으로 일했던 프란시스코 칸투가 등장한다. 어머니가 멕시코계 미국인인 칸투는 국경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출신과 언어가 이주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국경순찰대에 지원해 3년 6개월간 일한 뒤 도덕적 외상에 시달렸고, 당시의 경험을 담은 [선은 장벽이 되고]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을 출간하며 칸투는 국경순찰대의 비난을 각오했지만 그의 낭독회에 나타나 불매를 외치고 ‘나치’라고 호도한 이들은 이주민 인권운동가들이었다고 한다. 관련해 저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에세이 “회색지대”에 쓴, 나치가 저지른 가장 악마적인 범죄는 죽음의 수용소 내 노동 분업에서 강압된 협력이라는 “회색지대” 안에서 피해자의 무죄성을 강탈한 것이라는 부분을 인용한다. 레비가 경험하고 묘사한 상황의 무게는 압도적이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티 워커로 내몰린 이들의 무죄성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책을 펴낸 칸투처럼, 자신의 경험을 언론에 기고한 헤더도 충격적인 비난의 댓글을 마주한다.  

PART 3.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6장 ‘착취의 연결고리가 된 도살장 노동자’에 등장하는 플로르 마르티네스의 성장기는 놀랍도록 기구하다. 어린 시절부터 빈곤과 폭력 등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언젠가 찾아올 행운을 믿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텍사스주에 당도해 닭고기 정육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가금류 도축공장의 노동 환경은 1906년 업턴 싱클레어가 소설 <정글>에서 열악한 현실을 폭로하며 사회적 주목을 받았고 이후 힘을 결집한 전미정육노동자조합이 단체교섭권을 쟁취해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1970년대 새로운 생산모델을 도입한 IBP 등의 정육회사가 시골 지역에 공장을 세우면서 변화를 맞았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한 사측은 중개업자를 통해 멕시코 등의 이주민과 시에라리온 같은 전쟁 지역 난민을 고용해 노동 조건을 하락시켰고, 시각적 참상과 각종 악취와 필연적으로 산재를 동반하는 도축노동은 급격히 증가한 닭고기 소비량과 함께 이주민에 특화된 “대농장식 자본주의” 더티 워크로 자리잡았다.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한 플로르의 남편은 정육공장의 관리자였다.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억압적인 관리자들에게 멸시와 혹사를 당했고 크고 작은 산재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정육공장은 이주민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드물게 안정적인 일자리였다. 고위직의 압력을 그대로 아래로 전가하는 관리자 남편과 이혼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얻은 산재를 개인 질병으로 호도하는 사측으로부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퇴사한 플로르는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봄 노동자 권리 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집단감염의 위험에도 ‘중요한 인프라 산업 종사자의 특별한 책임’을 강조하는 사측은 라인 가동 속도를 그대로 유지했고, 사태를 추적하던 플로르는 코로나19 감염에 이어 유방암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노동자 권리 센터 직원에게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플로르는 퇴사를 결정하고 저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한다. “이건 정말 기적이에요. 나는 원래 지금까지 살아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난 여기 이렇게 있어요. … 멕시코 사람은 고생해서 살아남는 데 익숙하니까.”  

7장 ‘정육산업을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에서 저자는 도축노동이라는 더티 워크의 기반이자 원인을 미국인의 식욕으로 꼽는다. 더 많은 저렴한 고기를 원하는 시민들의 욕구에 부응하며 더 많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 정육산업은 나날이 고도화되었고 노동 조건은 더욱 열악해지고 비가시화되었다. 도축노동은 다양한 하위 분야로 세분화되어 노동자들이 자신이 동물을 죽이고 있다는 의식 없이 기계적 과정을 반복하게 만들었으나, 감정을 가진 인간의 영혼에 남기는 상처는 불가피하다.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공장의 비위생적인 환경이 이슈가 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마련된 각종 규준은 대체로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직업안전보건국의 방임으로 무력화되었고, 각종 화학 물질에 노출되고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육식 소비가 급증하면서 한편에서는 동물권 운동이 성장하고 윤리적 소비 실천의 흐름도 증가했지만, 이들의 관심과 문제제기가 노동 환경 개선까지 가닿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윤리적 소비가 구매자의 가처분 소득 수준에 상당히 좌우되며 결과적으로 계급 격차를 반영한다는 한계는 자명하다.   

PART 4. ‘현대 사회의 뒤편으로’에서는 시추선과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석유와 디지털 기술은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떠받치는 필수 요소지만 노동자들의 위상과 현실은 천지차이다. 8장 ‘시추선 생존 노동자를 둘러싼 모순된 시선들’은 2010년 멕시코만 해상의 반잠수식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에서 발생한 대형 폭발 사고 이야기로 시작된다. 환경 재난과 탄소 배출로 석유산업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시추선 노동은 기존의 물리적 더러움에 도덕적 더러움이 덧씌워졌다. 심각한 기후위기의 대응책으로 대체에너지로의 전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2019년 전 세계에서 소비된 에너지원의 84%는 화석연료라고 한다. 누구도 석유 사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변화한 지구 환경과 사회의식은 손쉽게 석유산업을 겨냥한다. 독과점이 만연한 업계의 맹목적인 이윤 추구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조건에서 시추선을 선택한 노동자가 현장의 위험에 사회의 비판적 시선까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딥워터 호라이즌’ 사고의 생존자인 스티븐은 어려서부터 자연을 사랑한 문학청년이었지만 고졸 학력으로 가장 좋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여서 시추선 잡역부를 택했다. 그의 아내 세라는 풍부한 예술적 소양으로 사진과 회화를 전공했고, 우연한 만남에서 나눈 지적 대화와 석유산업 종사자가 많은 지역 출신이라는 공감대로 스티븐과 가까워져 결혼했다. 사고 현장에서 스티븐은 신체적 부상 없이 탈출하지만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과학소설과 우주공간에 탐닉하면서 간혹 과음과 돌발행동으로 강박적인 현실 도피 성향을 보인다. 세라는 스티븐을 돌보며 시추선 노동자와 가족들의 초상화 작품 ‘생존자들’을 작업하면서 표류하는 남편과 흔들리는 자신을 치유하려 애쓴다. 그러나 허술한 안전 관리로 사고 원인을 제공한 사측은 생존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입막음에만 급급하면서 책임 회피와 이미지 세탁에만 몰두한다.  

편집증적인 공포와 공황 발작에 시달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스티븐은 믿었던 사측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더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자신이 했던 일과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에도 빠져든다. 이는 사고 이후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이 노동자의 고통은 외면하고 오염된 자연과 해양생물에만 집중되는 현실과도 연관된다. 석유산업 등 자원 채굴 산업은 한때 지역을 먹여 살리고 사회의 경제를 떠받치는 동력으로 인식되어 주민들에게 자부심의 원천으로 작용했지만,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제고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저자는 루이지애나주와 캘리포니아주를 대상으로 해양 시추 사업의 위상과 영향력을 비교한 연구를 예로 들며, 시추 노동을 결정하는 요소로 계급과 함께 지역 및 지리 조건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시추 사업 이입에 대한 지역의 저항성이 주민의 경제적 수준과 정치적 진보성, 학력 등에 어느 정도 좌우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에서 오염과 위험을 감수하고 산업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도소가 주로 시골 게토에, 정육공장이 외딴 산업단지에 지어지듯 정유공장과 시추선이 주로 루이지애나주와 앨라배마주에 들어서고 유지된 이유다. 

9장 ‘실리콘밸리의 어두운 이면’에 등장하는 더티 워커는 앞서 나왔던 노동자들과는 다른 맥락과 선택을 보여준다. 구글에서 일하며 자신의 일이 비윤리적인 사안과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고 사직한 잭 폴슨과 로라 놀란은 전문성과 창의력을 겸비한 엘리트 노동자다. 이들은 각각 중국 정부의 규제를 따르고 사용자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검색 엔진 개발 프로젝트 드래곤플라이, 미국 국방부의 기밀 영상과 데이터 분석력 강화 프로젝트 메이븐의 존재를 인지한 후 도덕적 갈등에 휩싸인다. 내부에서 비밀리에 수행되던 프로젝트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자 문제를 인식한 이들은 일부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낸다. 기술의 유연한 전용 가능성에 잠재된 문제점, 자신의 일이 불러올 영향력과 파장을 알 수 없게 구획화되고 파편화된 테크업계 노동의 본질, 책임이 분산된 시스템이 비가시화하는 위험 등을 인지한 이들의 선택은 직접적인 문제제기 그리고 자의에 의한 ‘퇴장’이었다.  

더 많은 연결, 더 좋은 세상에의 기여를 강조하는 구글 등 대표적인 테크 기업들은 무수한 사용자의 정보 수집을 통해 천문학적 이익을 얻고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다. 미디어 기술의 고도화와 과잉 상태는 테크 기업의 부정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환기했고 때때로 드러나는 반윤리적 이슈는 대중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한다. 구글에서 퇴사하고 언론 인터뷰에 응했던 잭 폴슨이 화려한 이력에 직업윤리까지 투철한 지식 노동자로 알려지면서 테크업계와 학계의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는 사실은 업계의 현실과 대다수 더티 워크와의 차이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잭과 로라 역시 자신의 일과 조직에 대한 배신감과 회의를 느끼고 나름의 고통을 겪지만 이들은 여타의 더티 워커들처럼 심각한 경제적 문제나 깊은 도덕적 외상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다음 스텝을 선택할 수 있었다. 유사한 업종으로 금융인이 거론되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다. 고임금과 사회적 지위, 성공 자체가 부여하는 도덕적 가치 획득이 가능한 직업군의 ‘더티 워커’들은 윤리적 타협을 요구하는 일 앞에서 불만을 제기하거나 퇴각할 수 있고, 나아가 공동체를 위한 폭로가 대중의 비난이 아닌 새로운 기회를 불러오기도 한다.  

저자는 ‘나가며’에서 에버렛 휴스를 다시 소환한다.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숨겨진 더티 워크를 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은 여러 차원의 방벽이고 가장 중요한 방벽은 우리 자신이 세우는 방벽이며, 에버렛 휴스는 프랑크푸르트 일기에서 이러한 장벽을 세우는 사람을 ‘수동적 민주주의자’라고 썼다고 적는다.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이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계속 모르기를 원한다고도 썼는데, 실은 2월의 모임 책이어서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이 부분에서 뜨끔하면서 집중력이 확 높아졌다. 다루는 더티 워크의 배경이 되는 정책과 제도의 변화, 사회 분위기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과 진영의 인식,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매커니즘 및 연구와 이론의 다양한 연결 등을 통해 이해를 높여주는 서술이 좋았다. ‘더티 워크’는 새롭게 접한 개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관행화한 구조적 비가시성과 경제적 불평등은 어쩌면 조금 당위적인 이야기였는데, 그럼에도 모르는 분야에 대한 입체적인 서술과 생생한 사례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여러 번 등장하는 조지 오웰과 그의 작품, 다수 인터뷰이들이 글쓰기와 책 읽기 등 활자에 친화적인 인물이라는 점, 대체로 어두운 이야기들이었지만 더티 워크가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어느덧 냉담해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책이었는데, 간만에 책 모임의 보람을 진하게 느꼈다. 



이얼 프레스•오윤성 옮김
2023.5.12.1판1쇄인쇄 2023.5.26.1판1쇄발행,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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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2. 15. 17:33



본문이 시작되기에 앞서 몇 장의 사진들과 카뮈의 삶을 간략히 서술한 출판사 편집부의 ‘책 머리에’ 글이 나온다. [결혼·여름]이라는 제목만으로는 언제 쓰인 어떤 글들일지 짐작하기 어려워 막연했는데 글의 주요 배경이 되는 알제리 지역의 대표적인 장소 사진들과 지도, 카뮈의 생전 모습과 묘지 사진 등을 먼저 살펴보며 마음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표지에서부터 느껴졌던 출판사의 감각과 성의가 친절한 길잡이 덕에 더욱 사려 깊게 다가왔다. “결혼”에 담긴 네 편의 글은 카뮈가 고향 알제리에서 살았던 20대 시절의 습작으로 1938년에 알제에서 한정판으로 출간됐던 것이고, “여름”의 여덟 편은 1939년부터 1953년에 집필되었다고 한다.   

 

1913년 알제리의 벨쿠르에서 태어난 카뮈는 손찌검이 일상인 할머니와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어머니와 살았다. 가난했지만 도서관을 해방구 삼았던 밝고 총명한 소년은 상급학교 진학 대신 돈벌이에 나서야 할 운명이었는데, 교사 루이 제르맹의 설득 덕분에 할머니의 반대를 극복하고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십대 때부터 앓은 폐결핵으로 교수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이른 결혼은 실패로 끝나는 등 20대 중반까지 이어진 시련에도 청춘의 카뮈는 삶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먼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 후 은인인 제르맹 선생에게 수상 기념 연설문을 모은 책을 헌정하는데, 이때 주고받은 편지에서 선생은 어린 시절 그에게서 보았던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기쁨’과 낙천주의를 언급한다.   

 

첫 장 “결혼”에 묶인 글들은 폐허가 된 고대의 유적과 조야한 현대 문명, 압도적인 자연이 기묘하게 불화하고 조화하는 알제리 몇몇 지역의 인상기이자 찬가 같은 느낌이었다. 첫 글의 도입부부터 줄줄이 열거되는 나무와 꽃 들의 이름이, 아는바 없이 진지하고 회의적인 느낌으로 내게 새겨져 있던 카뮈의 이미지를 흔들었다. 돌과 바다, 태양, 식물에 대한 찬탄, 삶의 경이와 행복에의 의지, 모순과 아이러니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기술들이 조금 낯설어 적응이 안 되기도 했다. 그의 내면과 영혼에서 이어진 듯한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탄과 감각적인 묘사, 현대 문명과 발전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오가는 행간에서 나는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을 받았다.   

 

책 서두의 사진과 지도를 들춰가며 글의 추상성에 어떤 구체성을 덧붙여 이해해보고자 했는데 중반부까지는 이따금 기억하고 싶은 문장은 있으되 마음에 크게 와 닿는 글이 없었다. 서사가 없다고 하면 이상한 말이겠지만,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의 기둥이 있다고 한들 전반적으로 의식의 흐름에 좀은 과하게 느껴지는 미문과 찬탄이 부담스러웠다. 하여 초반에는 역시 습작은 습작인가 싶다가, 내게 이제 청춘의 환희를 수용할 수 있는 감성은 완전히 사라진 건가 싶다가, 그리스 신화와 알제리의 자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감흥이 없는 걸까 싶다가…. 이 얇은 책을 읽어내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자책하며, 머리로는 다양한 잡생각이 출몰하고 눈으로는 활자를 따라가는 통독 상태와 의지를 발현한 각성 상태를 오갔다.   

 

책을 읽는 내면과 책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내면의 충돌을 다스리며 중반을 넘어, “아몬드나무”에서부터 글자가 글로 변하면서 몰입이 시작되었고 특히 후반부 “헬레네의 추방”은 드디어 필사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전혀 모르는 도시와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사적인 깊은 감정과 경험이 배인 묘사보다는 차라리 전쟁이 파괴한 것들이나 당대 작가의 위상 등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느 정도의 보편적 추론이 가능한 시사적인 주제를 다룬 글들이 훨씬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다소 주리를 틀며 지나왔지만 중반부까지의 지난한 독서로 나름의 적응 궤도에 오른 후 마주한, 덜 추상적인 글의 지도에 머릿속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갈구, 명징, 약동, 작열’ 같은 단어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든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 결국엔 괜찮은 읽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카프카의 모든 예술은 독자에게 다시 읽게 만드는 것”이라는 카뮈의 말을 인용하며 마친 ‘옮긴이의 말’처럼 문득 떠오를 때 들춰보면 마음에 박히는 문장들이 반가울 책인 것 같고, 그러라고 이렇게나 공들인 표지와 편집으로 만든 것 같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 자리하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는, 프란츠 파농이 독립 혁명을 위해 활동한 나라라는 정도가 아는 것의 전부인 알제리에 대한 거리감은 책을 읽은 후에도 물심양면 그대로 남았다. 외국 작가가 쓴 어떤 글이든 배경 장소에 방문할 확률은 매우 낮지만, 작가의 사유만큼이나 ‘그 시절의 장소성’이 절대적인 책이라는 느낌이어서 더욱 그런 듯하다. 어릴 적 다이제스트로 접한 [이방인]과 작가를 수식하는 ‘부조리’라는 표현의 강력함 때문에, [페스트]를 흥미롭게 읽은 후에도 남아 있던 무겁고 심각한 카뮈의 이미지를 새롭게 환기한 독서였다.   

 


알베르 카뮈•장소미 옮김

2023.8.4초판1쇄 8.29초판5쇄, 녹색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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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11. 22:44

 

 

1970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둔 바튼 아카데미는 들뜬 분위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고 적막해진 학교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기숙사를 떠날 수 없는 학생 몇과 이들을 책임질 고대문명사 선생 폴 허넘, 급식매니저 메리와 경비 대니가 남았다. 바튼의 졸업생이자 고지식한 교사 허넘은 나름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그나마 하나둘 떠나고 반항아 앵거스 털리만이 홀로 남겨진다.  

그리고 펼쳐지는 깐깐한 교사와 문제 학생의 대결과 반목, 이해와 화해라는 클리셰에 바튼 졸업생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들을 둔 급식 매니저 램의 존재감, 학교를 벗어난 두 번의 짧고 긴 외유를 더하며 영화는 조금씩 서사를 확장한다. 영화가 시작될 때 등장하는 타이틀 텍스트와 디자인부터 영화 전반에 흐르는 포크음악까지 ‘우리 복고풍이야’ 선언한 듯한 작품이어서, 당대를 기억하는 미국 성인 관객이라면 꽤 향수에 젖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나는 한국 관객이므로 탈락.  

배경과 인물과 주요 서사 등에서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영화여서 큰 기대는 없었는데, 캐릭터들의 개성과 디테일한 설정을 통해 상처받은 외강내유의 인물들과 관계의 변화를 적당한 온도와 거리감으로 그려낸 점이 괜찮았다. 남겨졌다가 보스톤으로 떠나는 한국계 학생 예준 캐릭터가 이채로워 ‘1970년 미국 사립학교에 한국계 학생?’ 싶었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의 다양성 요건을 위한 설정이겠지 싶었지만, 미국 영화 속 인종적 다양성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테고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변화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메리와 아들을 통해 시대의 아픔까지 과하지 않게 담아낸 점도, 누락됐다면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부분을 환기시켜주는 느낌이었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존재하고 수십 년 동안 적지 않은 영화를 본 자로서, 이제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어떤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한 새로움과 독보적인 감동을 경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휴머니즘 가득한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과 제작진의 고충도 엄청 클 거라는 주제 넘는 생각, 한편으론 텐트폴 무비가 장악하는 산업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맙게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간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깊이 남은 작품들은 예전 영화들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이 영화는 내가 느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말이다. 부국제 때 눈여겨보다가 놓쳤는데, 본 걸로 만족이다.  
 

2/10 cgv신촌아트레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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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11. 21:21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방금 사건이 일어난 듯 어지러운 공간, 관객이 그 현장을 걷는 것처럼 눈높이와 움직임을 맞춘 카메라가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훑으며 나아간다. 이어 국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서 긍지를 느끼는 일본 전통을 언급하는 독백과 사건 용의자인 장총을 든 청년의 자살, 고요하고 강렬한 인트로는 노인혐오 범죄 관련 뉴스 멘트로 마무리된다.  

미치는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과 함께 숙박업소의 룸 어텐던트로 일한다. 7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가족 없이 혼자이기에 생활을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다. 힘에 부치는 일일 수 있지만 아직은 체력이 받쳐주고 세월과 더불어 쌓인 연륜도 있다. 동료들은 일과 중 나누는 점심은 물론 여가 시간에도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관계, 그중 최고 연장자인 이네코는 집에도 왕래하며 가까이 지내는 친밀한 사이다. 

국가는 얼마 전부터 ‘플랜75’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 중이다. 실업과 경제 위기가 고질화되면서 노인을 사회적 비용으로 치부하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안락사를 진행하는 공공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플랜75 신청자에게는 어떤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10만 엔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시신의 공동 처리에 동의하면 무료 장례를 치러준다. 콜센터에서는 신청 후 예정일 직전까지 주 1회 15분의 전화 돌봄 서비스가 지원되어 외로운 일상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케어해준다. 

히로무는 플랜75 센터의 말단 스태프다. 제도가 궁금해 찾아온 이들을 상담하고, 공공장소의 가판 행사에 나가 무료급식을 제공하며 플랜75를 홍보한다. 대대적인 캠페인처럼 진행되는 가판 행사장에는 ‘주민등록 없어도 신청 가능’ 따위의 배너가 세워져 있고, 삶이 괴로운 이들에게 깔끔한 죽음을 권하는 국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노인과 늙은 노숙인 등 사회가 불필요하다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이들에게, 플랜75는 히로무처럼 예의 바르고 친절한 청년의 얼굴로 다가간다.   

필리핀 출신의 간병인 마리아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딸의 수술비 마련이 시급하다. 이주노동자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사정을 전해들은 관계자가 모금으로 도움을 주고, 얼마 후 시설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 마리아는 플랜75 센터에서 안락사 당한 이들의 유품을 분류하는 일에 투입된다. 2인 1조의 작업 분위기는 무겁고 조금 전 세상을 뜬 이들의 마지막 소지품을 정리하는 일도 가끔 나오는 고가의 시계나 물품을 눈치껏 챙기는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는 일도 착잡하다.   

가성비 좋은 상품을 안내하듯 플랜75를 설명하고 성실하게 신청자를 모집하던 히로무는 센터를 찾아온, 오랫 동안 만난 적 없는 삼촌을 알아본다. 매뉴얼에 따라 담당자에서 배제되지만 삼촌의 집으로 찾아가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히로무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고 안락사된 시신이 폐기물업체를 통해 처리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혼란에 휩싸인다.  

그사이 미치는 일자리를 잃었다. 동료 이네코가 일터에서 쓰러진 후, 숙박업소에서는 손님들이 보기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고령의 룸 어텐던트들을 모두 해고했다. 고령의 미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던 이네코에게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간 집에서는 식탁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둔 시신을 발견했다. 마침 살고 있는 집도 비워줘야 할 처지가 되자 미치는 수순처럼 플랜75를 선택한다.   

플랜75 콜센터의 상담사 요코는 미치의 담당자다. 주 1회 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어느새 마음을 연 미치는 통화를 하며 잊고 지냈던 과거와 지난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15분으로 정해진 통화의 종료 알림음이 울리면 현실이 환기된다. 플랜75의 마지막 서비스는 건조한 일상으로 이어온 삶을 마감하려는 마음에 적잖은 울림을 남기고, 미치는 용기 내어 과거 추억이 깃든 볼링장에서의 만남을 요코에게 청한다.  

콜센터 노동자인 요코에게 플랜75 신청자와의 통화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입을 교육하는 팀장은 통화를 하며 신청자의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유도하라는 팁을 전달하고, 규정을 어기고 미치와 만나 따뜻한 시간을 보낸 후 생겨난 심란함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미치의 안락사 전날 밤, 복받치는 감정을 숨기고 담담한 척 통화를 마친 요코는 끝내 눈물을 쏟는다. 마음의 채비를 마친 듯 통화가 끝난 후 전화기 코드를 뽑아 정리한 미치에게, 요코가 다급하게 거는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진공 상태처럼 느껴지는 플랜75 안락사 병동은 국가가 강권한 삶의 최후를 선택한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에게, 마지막 평온을 선사하듯 고요하고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배웅하는 히로무와 삼촌은 말이 없고, 안내에 따라 동요 없이 침대에 누운 미치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약물이 투여되는 사이 고개를 돌리면, 옆 침대의 주인공이 보인다. 삼촌은 미동 없이 절차에 따라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옅은 경고음에 이은 직원들의 대화, 시간이 흘렀지만 의식이 살아 있는 미치는 무언가의 오작동으로 죽음에 실패했다.  

삼촌을 보낸 후 갈등하던 히로무는 안락사 병동으로 찾아가 삼촌의 시신과 마주한다. 삼촌의 선택을 막을 수 없었지만 시신이 폐기물로 처리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히로무는 어렵사리 시신을 빼돌린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마리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옮기는 일을 돕고, 히로무는 생전에 그랬던 대로 조수석에 삼촌을 앉히고 긴박하게 화장장을 수배하기 시작한다. 환생이라도 한 듯 병동에서 나와 돌아온 세상에서, 외진 길을 걸어 미치가 닿은 곳에서는 애잔하게 아름다운 석양의 하늘이 펼쳐진다.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상황만을 제시하고 그와 관련한 인물의 생각이나 의견, 선택의 이유 등을 생략하거나 최소한으로 보여주며 전개되는 영화였다. 플랜75를 중심으로 교차되는 주요 인물들의 상징성을 부각하며 디테일을 과감히 건너뛰는 데도 전체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데에 무리가 없었고, 세련되고 유려한 편집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초반 이네코가 쓰러진 후 미치 등이 일 그만둘 때, 콜센터 팀장의 신입 조언을 곁으로 들으며 혼자 밥 먹던 요코가 고개를 들 때의 정면샷은 관객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묻는 듯했다.  

노인, 빈곤, 죽음, 안락사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난한 노인을 안락사하는 제도 운용이 가능한 디스토피아를 영화는 과잉 없이 보여준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온갖 공간에서 홍보되는 플랜75는 공기처럼 사회를 장악하며 죽음의 기류를 확장한다. 섬세한 운용과 작동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인 빈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게 되는 죽음이라는 별개의 현상을 당위적인 인과관계로 왜곡하는 제도는 저항의 기력을 잃은 가난한 노인을 겨냥하며 모두의 인간성 또한 잠식해간다.  

동료들과 일하고 노래하고, 조카와 반주를 곁들여 식사하는 모습 어디에서도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노인들 그리고 가난한 노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정책이 마련한 일자리에서 마음을 다해 성실하고 친절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회초년생 청년들의 대비는 섬뜩했고 현실적인 박진감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졌다. 이미 돈이 전부라는 가치관이 팽배한 세상에서 만약 그런 제도가 입안되고 지속된다면 그 속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나 젊은이 역시 자신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울 테고 결국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상식이 되고 말 것 같다.  

부국제 때 놓쳤는데, 설 연휴 부모님 댁에 머물던 서울에서 시간이 맞아 볼 수 있었다. 소개를 통해 내용을 대략 알고 있던 터여서 고령인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며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는데, 영화 마지막에 대상 연령을 65세로 낮추는 걸 검토한다는 뉴스 멘트를 생각하면 나이 들어가는 누구에게도 무관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안락사나 조력 자살에 찬성하는 편인데, 경제적 생산성을 잃은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인식의 결과로서 이런 미래가 닥친다면 인류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겠다 싶어 소름이 끼쳤다. 너무 잘 만든 영화의 무서움을 느꼈다. 


2/10 cgv신촌아트레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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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20:20

 

 

영화의 배경이었던 덕에 아메리칸사모아를 처음 알았다. 폴리네시아 중심부인 하와이와 뉴질랜드 사이의 사모아제도 중에 서쪽 지역은 독일과 뉴질랜드의 통치를 받다가 1962년에 독립해 사모아라는 국가가 되었고, 동쪽 지역은 현재도 미국령으로 아메리칸사모아라 불린다고 한다. 200㎢의 땅에 57,000명가량이 살아간다는데 감이 안 와서 찾아보니, 240.2㎢의 통영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절반쯤의 인구가 살아가는 곳이다.  

아메리칸사모아가 영화의 배경이 된 이유는 2001년 월드컵 예선 호주전에서의 31:0 패배 때문이다. FIFA 랭킹 최하위에 쉽게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을 보유하고 만 아메리칸사모아 대표팀의 이후 목표는 오로지 한 골, 201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수단은 딱 봐도 오합지졸인데 엉망인 경기 중 쉬는 시간에 대기실에 모인 그들에게 대표팀 감독은 이제부터 심한 말을 하겠다며 누가 들어도 심하지 않은 “Bad!”를 연발한다.  

즈음 미국에서는 퇴출 위기에 놓인 토마스 론겐이 구단 관계자들과의 면담 끝에 아메리칸사모아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는다. 2014년 월드컵을 준비하며 새로운 국대 감독을 선임한 아메리칸사모아, 공항에 도착한 론겐을 tv프로그램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 카메라가 맞이하고 촬영 감독은 또 축구협회 관계자고 뭐 그렇다. 아메리칸사모아 국대 선수들 역시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며 축구도 하고 있고, 대표팀은 중요하지만 누구 하나 축구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것이 그곳의 현실이다.  
 
이후 전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의 정석을 비껴가지 않지만, 간결한 설정과 짧은 대사를 통한 상황의 고유성과 캐릭터의 개성이 잘 드러나고 전반적으로 과하지 않은 톤이어서 오글거림 없이 볼 수 있었다. 평생 가볼 일 없을 아메리칸사모아의 시원한 풍광과 아직은 문명에 찌들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주는 여유로움 역시 좋았다. 개인적으로 축구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보니 낯선 배경과 사람들이 발산하는 청량감이 좋았고 축구 외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흥이 더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실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요 캐릭터들의 개성과 사연도 나름 매력적인 요소였다. 인성 논란 전력의 이혼남인 토마스 론겐 감독은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하지만 남모르는 아픔과 인간미가 있다. 아메리칸사모아에 도착해 안부 전화 대신 딸의 음성메시지를 반복해 듣는 모습이 의아했는데, 하나뿐인 딸은 몇 년 전 이미 세상을 뜬 상태다. 동상이몽의 국대팀이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에이스 선수 ‘파파피네’ 자이야의 존재는 극적이었고 그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태도는 감동적이라는 느낌을 덧붙이는 게 이상할 정도지만 감동적이었다.   

부산에 갔으니 쾌적한 art2관에서 한 편은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찾아보다가 선택한 영화였다. 참 좋았던 [조조 래빗]을 떠올리고 기대했는데 그에 비하면 꽤 헐렁하게 느껴졌고 장르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스포츠 소재 ‘감동 실화’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는 못한 작품인 것 같다. 그래도 ‘펠레 마라도나 론겐’ 같은 위트 넘치는 대사가 기억에 남고, 마지막에 보여주는 미국 cbs의 해설자 론겐 감독, FIFA 평등 앰배서더 자이야, 40대로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흑역사의 골키퍼 니키 살라푸 등 주요 인물들의 현재는 흥미로웠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도 영화 시작과 마지막 쿠키에 발랄하게 등장하는데, 그건 그냥 그랬다.  


2/1 cgv서면 art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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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걸음걸이2024. 2. 6. 19:19

 

 

유명작가 산드라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한 대학생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다. 여유롭게 시작된 인터뷰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중단된다. 다음을 기약하고 대학생이 떠난 후,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은 안내견 스눕과 함께 산책에 나선다. 이들이 산책에서 돌아온 집 앞에는 아빠 사뮈엘이 피 흘린 채 쓰러져 있고, 목격자 없이 추락한 사뮈엘의 사망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다. 

도입부에서 주요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 영화는 추락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과거와 각자의 비밀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남편의 추락과 사망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산드라는 변호사 뱅상을 선임해 재판을 준비한다. 알리바이와 무죄 증명을 위해 뱅상과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니엘이 사고로 시각을 잃은 후 부부 사이에 일기 시작한 균열과 도시를 떠나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한 후에도 악화되기만 한 관계다. 

작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산드라와 달리 지지부진한 가운데 우울증에 시달리며 이사한 집의 수리에 매진하던 사뮈엘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달래고 표출해왔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마찬가지였고, 같은 집 안 각자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남처럼 생활하던 부부는 생사가 갈린 채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놓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모두의 시선은 산드라에게 쏠린다. 검사는 다양한 증인을 소환하고 증거를 수집해 집요하게 산드라를 공격한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과거와 사생활과 성적 지향 혹은 일탈 등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사건 직전 있었던 부부싸움의 녹취파일이 발견되면서 산드라는 궁지에 몰린다. 아동 보호와 재판의 객관성을 위해 법원에서 직원이 파견되지만,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으로 충격 받은 다니엘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거의 여과 없이 전달된다. 

시종일관 관객의 긴장과 몰입을 놓치지 않는 영화는 차가운 집과 뜨거운 법원을 오가며, 법정 공방이라는 진실게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맥락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현상과 이면에 늘 존재하는 간극과 누구에게나 유효한 자기만의 진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 잠재된 엄청난 빈틈과 논리적 추론으로 파고들 때 생겨나는 수많은 함정, 발언권을 가진 자가 가정과 추측을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확신의 오류와 그 반복이 타자에게 미치는 영향, 재판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필요 이상의 가혹함과 잔인함 같은 것들.  

이 모든 지난함과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증언해야 하는 불리한 룰을 뚫고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어떻게”로 알 수 없으면 “왜”라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인 진술 그리고 “남 돌보는 거에 지치고 피곤할 때 됐어”라며 스눕에 투사해 자신의 내면을 토로했던 사뮈엘의 상황 등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극적 연출 없이 무죄를 보여준 영화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녁 식사와 축하주를 나누는 자리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숨기지 않는다. 산드라 캐릭터의 독특성일 수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모종의 암시일 수도, 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민감하게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법정에서의 선명한 결말에도 영화는 법리적 판결과 별개로 남을 수밖에 없는 진실의 문제를 지우지 않는다. 표절과 외도에 대한 사뮈엘의 주장이 회복 불가능한 갈등에서 깊어진 피해의식과 질투에 기인한 것이라도 무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뮈엘의 강박을 냉철하고 자신만만한 산드라가 황당한 억측이자 자기연민으로 무시했대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다니엘에게 산드라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엄마이자 미지의 괴물로 그림자를 남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두 줄로 요약 가능한 사건에서 여러 갈래의 생각을 끌어내는 영화였는데, 냉담하고 침착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여운을 남기는 주인공 산드라 휠러의 정제된 연기 덕이 컸던 것 같다. 나오는 줄 몰랐는데 [신의 은총으로]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스완 아를로드, 변호사 뱅상의 존재가 반가웠다. 하나의 사건을 향한 여럿의 관점이 경합하는 가운데 현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망하며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환기하는 작품이었다.  


2/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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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걸음걸이2024. 2. 6. 18:18

 

 

근대적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그 시대 복장을 한 하인과 나체의 여인과 한 공간에 있는 제인 버킨의 모습이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것 같다. 런던에서 서른을 맞던 날을 회상하는 인터뷰의 배경이기도 한데, 같은 장소에서 역할과 포즈가 바뀌고 마흔의 생일을 앞둔 제인 버킨의 인터뷰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미장센은 마네의 “올랭피아” 패러디였는데, 추앙되지만 함부로 취급되는 여성과 그 극단에 선 여성 스타의 이미지 그리고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과 사실 혹은 실제의 차이를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선택일까 싶었다.   

영화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내용과 형식으로 제인 버킨의 다양한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낸다. 다큐와 인터뷰, 일부 흑백을 포함한 극영화의 여러 시퀀스와 에피소드, 신화와 예술 작품에서 차용한 상징적인 이미지화, 감독과의 대화와 메이킹까지 아우르는 장면들이 어지럽게 이어진다.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연쇄와 전환 속에는 제인 버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아녜스 바르다의 욕망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 제인 버킨의 유명인이고 싶지만 무명인이고도 싶은 욕망이 교차한다. 감독은 어떤 힌트처럼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화면에 던져둔 것 같았지만 보면서 솔직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무지에 기인한 감상이겠지만 당황스럽거나 조잡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 몰입이 어려웠고 후반부에 타잔과 제인, 잔 다르크로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실소와 함께 졌다는 마음이 됐다. 제인이라면 타잔의 제인보다 다른 제인이라며 그를 언급하고 그에 따른 영상이 나오고, 잔 다르크를 언급하며 자신의 프랑스어 억양 때문에 어렵겠지만 마지막 장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말에 이어 조야한 화형 장면 연출되는 부분이 특히 압권이었다. 어린 소년과의 로맨스 로망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감독의 어린 아들이 언급되는 부분도 약간 놀라웠는데, 찾아보니 이 부분은 이후에 두 사람이 출연한 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영화에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연결된 이미지나 인물만이 아니라 결혼과 아이들 등 실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 남편 세르주 갱스부르와의 노래 녹음과 후의 공연 장면 등도 등장한다. 촬영 기간은 알 수 없지만 1988년에 발표된 영화라고 하니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중년의 길목에 막 들어선 제인 버킨의 ‘공적’ 삶의 시간을 아녜스 바르다의 주관적 시선으로 망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캐릭터와 분장과 의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얼굴 표정과 연기를 펼치는 제인 버킨은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전성기를 동시대인으로 지켜본 적 없는 자로서는 사실 좀 불감당이었다.  

제인과의 대화를 통해 영상으로 구현되고 의미를 얻는 이야기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대체로 산만하고 장황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감독은 하고 싶은 거 다한 것 같고, 관객은 그리스 신화와 서양 미술, 영화 역사에 대한 지식 및 감독의 예술관에 대한 선이해를 갖춰야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나이 먹으면서 사람 생각하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영화를 만나면 예술가의 사유를 따라가는 건 역시 어렵구나, 멈칫하게 된다. 오전 10시 10분 영화를 보는 건 게으른 자로서 나름 큰 결심과 시도였건만, 내게도 작품에도 아쉬웠다.  



2/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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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걸음걸이2024. 2. 6. 15:15

 

 

엄청난 개방감의 인트로 덕에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함께 기분이 들떴다. 세상 핫한 티모시 샬라메의 노래와 춤을 보며 행복했고, 세상 다정하고 달콤한 거 다 모아서 펼치는 판타지도 그런대로 매력적이었다. 아름다운 웡카의 현현에도 불구하고 살짝 지루해질 즈음 등장해 빵 터지게 만든 움파룸파 - 휴 그랜트 덕분에 세월을 느꼈고, 초콜릿연합 카르텔의 심장이었던 미스터빈의 존재감도 인상적이었다. 

오래 전이지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나름 재미있게 봤었는데 로알드 달의 원작 내용 자체를 몰라서인지 프리퀄인지 뭔지도 모르겠더라만, 남녀노소 막론하게 즐겁게 볼 수 있게 신경 쓴 웰메이드 영화 같았다. 그래픽과 소품, 음악 모두 매력적이었고, “푸어”에 경기하는 부자 등 세심한 조연 캐릭터 구축과 나름의 개연성을 갖춘 스토리라인도 괜찮았다. 영화의 감동을 통해, 엄마가 남긴 초콜릿의 비밀은 함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깨달음 그리고 “좋은 것은 모두 꿈에서 시작됐단다”라는 다정한 전언을 마음에 새기고 성장할 수 있는 어린이라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들었다.   

4dx 영화 관람은 처음이었는데 기대만큼 다이내믹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화면과 동시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괜찮았지만, 스크린 앞 연기와 양쪽 벽면의 발광 효과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조야해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차라리 아이맥스로 볼 걸 그랬나 싶지만, 4dx는 그냥 이렇게 한 번 경험해본 걸로 안녕. 티모시 샬라메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번에도 변함없었다. 티모시는 참 좋겠다, 티모시라서.  


1/31 cgv서면 4d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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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4:41

 

 

1920년대 초반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 동네 청년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헐링 경기를 벌이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경기를 마치고 몇몇 청년들이 몰려간 시네드의 집으로 얼마 후 영국 주둔군들이 들이닥친다. 불법집회 운운하며 청년들을 벽으로 몰아세우고 한 명씩 이름을 말하라고 위협하던 영국군들은, 입을 떼지 않는 열일곱 소년 미하일을 닭장으로 끌고 가 죽인다.  

이유 불문의 일방적인 폭력과 살인은 영국군들이 주둔하는 아일랜드 마을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비극은 영국이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일상의 한 부분이고, 청년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저항의 이유다. 청년 무리에 있던 데미언은 이제 막 의사가 되어 영국의 병원에 자리를 얻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영국으로 떠나기 위해 나섰던 데미언은 기차역에서도 무장한 영국군들의 폭력을 목도하고 발길을 돌린다. 

영국행을 포기하고 돌아온 데미언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단체 IRA에 가입한다. 동네 청년 대부분이 단원이고 부모 없이 자란 데미언의 친형 테드는 지역 조직의 리더 격이다. 낮에는 각자의 일을 하고 동네 펍에서 당구를 치는 평범한 청년들은 밤이 되면 영국군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에 모여 열악한 무기로 훈련하고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싸운다.  

얼핏 고요해 보이는 마을에 잠복한 긴장과 위험은 느닷없는 돌발 사태와 무력 충돌로 비화되곤 한다. 주둔군 숙소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한 청년들이 체포되고 테드는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한다. 수감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던 데미언과 댄 등 단원들은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라며, 감옥문을 열어준 영국군 쟈니 로건과 함께 탈주에 성공한다. 투쟁이 가속화되고, 위장한 일상을 탈피한 단원들은 파르티잔으로 변모한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IRA의 저항과 영국군의 폭압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영국 지배에 협력하는 부유층의 밀고와 동지의 배신이 드러나고, 그들을 직접 처단하는 데미언의 내면은 점차 냉정하고 단단해진다. 배신한 단원의 무덤 자리를 안내하는 데미언에게, 오랜 이웃인 그의 엄마는 너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적 갈등과 슬픔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 데미언을 흔들지 못한다. 연인인 시네드를 고문하고 집을 불태우며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영국군의 만행은, 독립을 향한 데미언의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1922년 12월,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지역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 협정이 발표된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고 영국군은 철수하지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이들은 찬반 입장으로 분열한다. 치열한 토론에도 양측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는다. 조약을 수용한 테드는 자유국 군인이 되어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활동에 앞장선다. 허울뿐인 자치령과 함께했던 투쟁의 목적을 저버리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데미언과 댄, 시네드 등은 완전한 독립을 위한 싸움을 택한다.  

평화 협정이 남긴 상흔은 영국군과 싸울 때보다 더 복잡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독립 전쟁은 내전으로 탈바꿈한다. 저항 활동에 매진하던 데미언은 체포되고 전향을 거부하자 처형될 위기에 놓인다. 영국군에게 잡혀 수감되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영국군의 자리를 동지였던 자유국 군인이 대신한다. 과거에 단원들을 구해줬던 쟈니 로건은 죽었고, 적진에 선 형제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끝내 신념을 고수한 데미언은 시네드가 건넸던 정표와 편지를 남기고, 테드의 발사 구호를 마지막으로 처형된다. 


영화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1922년의 평화 협정이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서 함께 싸우던 형과 동생이 극단의 입장으로 치닫는 비극을 그려낸다.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비교적 간략한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는, 스펙터클과 영웅 캐릭터를 배제한 연출로 강점된 지역의 민중들이 겪는 다중의 고통과 투쟁의 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전쟁과 권력의 이면, 이데올로기와 삶의 의미를 환기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싸움에는 얼마나 많은 변수와 양상이 동반되는지, 신념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인접한 강대국의 강제 점령이라는 유사한 현대사를 가진 한국인의 입장에서, 영화에서는 얼핏 의미 없는 죽음처럼 보이기도 하는 데미언의 최후에 대해 숙고하게도 됐다.  

오래 전 영화를 뒤늦게 보았지만, 켄 로치 감독이 영국인이라는 점에도 새삼 생각이 미쳤다. 20세기 북아일랜드 분쟁은 1998년 평화 협정으로 종식되었다고 하니, 데미언과 테드가 겪은 갈등과 비극은 지난 세기 막바지까지 이어진 셈이다. 평화 협정이 체결된 지 10년이 안 된 시점에 어쩌면 오랜 전쟁의 원인 제공자격인 영국 출신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라니. 이런 소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켄 로치 감독이 견지해온 일관성이 작품에 진정성을 더했겠지만 아일랜드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싶기도 했다. 국적과 인물을 동일시하는 인식에 함정이 있다는 건 알지만, 만약 일본인 감독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 투쟁과 광복 이후 국내 좌우 진영의 대립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쩐지 달갑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의 올드 오크] 개봉과 켄 로치 특별전 덕분에, 예전에 놓친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언젠가 dvd도 사뒀지만 극장에서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니까. 접근성 문제만 없었다면 좋았던 [지미스홀]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는 하다. 약 20년 후 오펜하이머가 되는 데미언 역의 킬리언 머피는 반가웠고, 대부분 모르는 배우들이었지만 주요 역할을 맡은 이들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걸 알고 약간 감동했다.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억양의 변별성 같은 실용적인 이유만은 아닌 캐스팅일 것 같아서 말이다. 킬리언 머피의 존재감을 빼면 흐른 세월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묵직하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1/3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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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