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11. 27. 17:17



마르셀 푸르스트가 젊은 시절 펴낸 작품집 [쾌락과 나날]의 소설 중 네 편을 추려 당시 수록 순서와 똑같이 실은 단편집이다.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과 별장을 드나들던 이십 대 중반의 작가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패러디한 제목을 붙여 고가의 호화 장정본의 작품집으로 출간했고, 당시엔 대다수 독자의 외면을 받았다고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에는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과 마지막 "질투의 끝"은 남성이 주인공이고 사랑과 욕망, 삶과 죽음이 주요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이었고, 중간에 차례로 실린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과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유년 시절의 순수함과 세속적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대비시키고 쾌락의 공허함을 성찰하는 내용이 맥을 같이하는 느낌이었다.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의 주인공은 이른 나이에 죽을 병에 걸린 자작 발다사르,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은 조카 알렉시가 인사를 드리러 가기 전 갈등과 혼란에 휩싸인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점을 오가며 드러나는 알렉시와 발다사르의 내면 묘사가 인상적이다. 만개한 젊음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알렉시가 다음 해 생일에 느끼는 전년과는 판이한 감정, 기복을 오가며 삶을 반추하고 죽음을 의식하던 발다사르가 극적인 쾌유의 소식을 들은 후 느끼는 죽음에의 향수 같은 것들. 이십 대 초반에 쓴 첫 소설에서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입체적으로 탐구하며 당사자의 아이러니한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낸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은 시골에서 명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비올랑트가 사교계에서 모두를 사로잡으며 성공한 후 음악과 사색, 고독, 들녘 같은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잃은 채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다. 욕망과 쾌락이 지배하는 화려한 세계에 익숙해진 비올랑트가 한편으로 권태와 허무를 느끼며 남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시점이 언제나 '모레'라는 것, 작가는 이를 결국 '습관의 힘'으로 규정하는데 배경과 달리 현대적으로 느껴지던 소설이 갑자기 교훈적으로 마무리되어 신기했다.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부모에게는 정숙한 딸이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젊은 여성의 회고다. 자살할 결심으로 총구를 당겼지만 빗맞아 삶의 시간이 일주일 남은 상태에서 '아가씨'는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고백한다. 어머니의 권유로 결혼을 약속했지만 약혼자가 없는 파티에서 다른 남자와 무절제하게 쾌락을 탐하다가 그 순간을 목격한 어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지자, 목숨을 끊기로 했고 실행했지만 실패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서정적인 묘사에 이어지는 과거의 타락, 내면의 가책과 갈등, 영혼의 소생과 환희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기 못했기만을 바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혼란 등이 속도감 있는 스릴러처럼 읽혔다.

 

"질투의 끝"은 미망인인 손느 부인, 프랑수아즈를 사랑하는 오노레의 이야기다. 오노레는 쉽게 사랑이 식는 편이었지만 프랑수아즈를 향한 마음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극해 영원히 사랑하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다. 하지만 어느 날 증거도 없는 뷔브르의 말 한 마디에 시작된 의심은 곧 불안과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고 강박으로 자리잡는다. 시간이 흘러도, 마차의 말에 채여 다리가 부러지고 죽음이 임박해도, 오노레의 마음속에는 프랑수아즈에 대한 집요한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노레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질투가 끝났다."

 

짧은 분량임에도 작품마다 장이 나뉘어 있고 시작 부분에 문학 작품에서 인용한 짧은 문구나 제목이 붙어 있어, 해당 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다. 보들레르처럼 이름을 들어본 작가도 있지만 세비네 부인처럼 처음 들어본 경우도 많았는데, 인용 문구의 출처와 간략한 해설이 19세기 이전 프랑스 문학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푸르스트의 문장이라기보다 번역자의 문장이지만, 어차피 원문을 읽을 수 없을 테고) 감정을 이입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맥락 없이 공감되는 문장이 종종 있어서, 문학이 담아내는 인간의 보편성이 이런 것일까 싶기도 했다. 

 

얇은 책이지만 마르셀 푸르스트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읽기 전부터 거리감이 있었는데, 서두에 실린 박상영 작가의 추천사가 적절하게 부담을 덜어주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지만 잘 알려져 있는 작중 인물이 마들렌을 베어 물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설정이나 즐겨 사용했다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심리 묘사가 사용된 작품들이어서 초기작에서부터 드러난 작가 특유의 개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읽은 가장 긴 분량의 책은 [티보가의 사람들]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보다 30% 정도는 더 길다고 하니 읽기에 도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저 멀리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듯한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을 아주 살짝 맛본 느낌이다.  


마르셀 푸르스트•윤진 옮김
2022.4.29초판1쇄찍음 5.6펴냄, (주)민음사 쏜살문고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 본스]  (0) 2022.12.20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0) 2022.12.11
[책들의 부엌]  (0) 2022.11.26
[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  (0) 2022.11.24
[바이퍼 룸에서의 마지막 밤]  (0) 2022.10.31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1. 26. 17:17

 



유진은 번아웃인 줄 모르고 몰두했던 스타트업을 정리하고 우물 같은 시간을 보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오른 마이산의 구름바다에서 받은 영감 그리고 우연과 용기로 '소양리 북스 키친'을 연다. 좋아하는 소설 [그 겨울의 일주일]이 바탕이 된 공간, 사촌동생 시우와 소양리 토박이 형준이 스태프로 함께하며 오픈 준비가 한창인 어느 날 오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인은 어릴 적부터 노력해 뮤지션으로 정상의 자리에 섰지만 대중의 관심과 환호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과 거리감을 느낀다. 1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찾아온 할머니의 옛 집에 소양리 북스 키친이 있다. 유진과의 대화와 오랜만에 찾아온 추억의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낀 다인은 그곳에서 계획에 없던 하루를 보내며 불면증을 잊고 편안한 잠에 든다. 

 

4년차 직장인으로 반복되는 생활에 슬럼프가 찾아온 나윤은 대학 때의 절친들인 세린과 찬욱과 만나 브런치를 나누던 중 3년쯤 연락이 끊겼던 시우의 소식을 듣고 즉석 여행을 떠난다.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대학 초년생 시절 사총사였던 그들은 이후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며 멀어졌고 현실에 치이며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중이다. 시우가 스태프로 일하는 소양리 북스 키친에서 오랜만에 다시 뭉친 사총사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꿈처럼 흐른다. 

 

어릴 적부터 활자에 탐닉하며 행복했던, 한편 경쟁과 성취에도 익숙했던 소희는 30대의 재판연구원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공식에 맞춰 승승장구하며 살아왔지만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 전의 휴식을 위해 소양리 북스 키친을 찾았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장기 숙박 손님이었던 소희는 재즈 페스티벌에서 좋아하는 뮤지션을 향해 열광하고 소양리 북스 키친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담담히 털어놓으며 한 달을 보내고 떠난다.

 

그 사이 소양리 북스 키친에 새롭게 스태프로 합류한 세린은 지인의 야외 결혼식을 준비 중이다. 구 남친의 사촌동생 지훈의 부탁이었고, 지훈은 어렸을 적 해외에서 생활하며 오랫동안 좋아했고 몇 년간 안부를 알 수 없었다가 같은 연구실에 속하게 된 마리에게 진심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두운 개인사를 숨기기 위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고 결국 리플리 증후군 진단을 받은 마리 역시 지훈을 좋아했지만, 거짓으로 지은 상상의 세계에서 더 편안했던 스스로가 혼란스러웠고 그런 자신이 지훈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길이라 믿었던 뮤지컬 연출에서도 실패한 수혁은 어느 날 새벽 회사 대신 미술관으로 향한다. 늘 자신을 지지해줬던 엄마는 1년 전 세상을 떠났고 적성에 맞지 않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며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그의 일상은 어둡다. 이른 아침 문 닫힌 미술관 근처에서 우연히 시우를 만나 소양리 북스 키친에서 아침 식사를 함께 먹고 밤 따기 프로그램을 돕고 잠자리까지 신세를 지고 떠나는 수혁의 얼굴은 처음보다 한결 평안해졌다.

 

유진과 스타트업을 함께했던 선배가 찾아온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가까웠지만 스타트업을 운영하며 구상하는 사업 방향이 맞지 않아 많이 싸웠고, 그가 먼저 떠난 후에는 연락도 받지 않았던 터였다. 일에만 미쳐 서로를 탓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어색한 화해를 주고받는 두 사람, 선배는 이직한 회사에서 만드는 사내 도서관을 담당해달라고 유진에게 부탁한다. 스타트업에서 밤낮없이 일할 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지고 책방이 잘 어울린다는 선배의 말은 진심이고, 유진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매 장마다 각자의 고민과 사연을 안고 소양리 북스 키친에 찾아와 뭉근한 위로의 시간을 함께한 이들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초대장을 받아 다시 모인다. 나윤은 조카와 함께 보내려던 계획을 변경해 두 번째 즉석 여행을 왔고, 소희는 수술 후 틈틈이 써내려간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을 가지고 왔다. 길고 편안한 대화 이후 이따금 서로를 떠올렸을 수혁은 어머니가 평소 좋아했던 아이스와인을 챙겨 찾아와 유진에게 진심을 전한다. 함께하지 못한 다인의 사연은 에필로그로 등장하고 두 번째 에필로그에 담긴 오픈 1년 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가상의 공간과 인물, 실제 존재하는 책들 그리고 최근의 sns 마케팅과 책방 트렌드의 디테일이 세세히 반영된 이야기들이 넌픽션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장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은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적당히 스테레오타입화한 설정이고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사회경제적 조건에 기인한 어려움 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입부에서 소양리 북스 키친이 소개될 때, 250평의 땅을 매입해 북스테이와 카페와 서점 등으로 네 동의 건물을 지었다는 부분이나 비용 마련을 위해 주식을 팔았다느니 하는 부분에서부터 거리감이 느껴졌고, 덕분에 이후의 이야기들도 세태 로망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주요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문제가 있고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연한 수순처럼 이겨내거나 감당할 만한 것이 되고, 대체로 통과의례 같은 분위기였다. 비슷비슷하게 따스한 느낌의 표지에,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과적으로 타인의 다정함을 만나 위로받고 팬시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들이 꾸준히 나오는 건 사는 것도 힘든데 소설에서마저 힘들고 싶지 않은 독자들이 많기 때문일까? 소위 힐링소설은 늘 존재했겠지만 요즘 유독 재부상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고, 현생에 지친 MZ세대의 구미와 취향이 이런 걸까 싶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세세한 설명으로 전개되고, 비의나 상징 없이 돌직구처럼 나아가는 이야기에서 문학 작품을 읽으며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세계의 비밀을 엿보는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체감상 ~같은, ~처럼, ~한 듯한 등의, 문장에 프릴을 단 것 같은 관용적인 표현이 넘치는 것도 무의미한 수사의 향연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후반부 유진이 담당한 사내 도서관 이름이 "마음 산책"이라는 부분에서는 수십 년 된 출판사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쓰다니 싶어 당황스러웠는데, 심미성이나 의외성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겉핥기 위로 같은 책과는 어울렸던 것 같다. 

 

어떤 작가든 창작의 고통은 클 것이고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쓰는 과정 역시 그랬겠지만, 미안하게도 읽는 내내 굳이 계속 읽어야 할까 싶은 마음을 무시하며 책장을 넘겨야 했다. 누군가는 이 책의 이야기들로부터 큰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소구력을 발휘하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남았고 띠지에 크게 적힌 "2022년 상반기 기대작 1위"라는 문구도 의아해졌다. 다 읽고서야 불필요한 독서였다는 걸 깨달은 경우였고, 제목만 보고 경솔하게 선택한 실수의 독서였다. 

 

 

김지혜
2022.5.12초판1쇄발행, 팩토리나인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1. 24. 16:52

 

 

목차를 보며 소개된 50권의 책 중 내가 읽은 걸 꼽아 보니 겨우 3권이었다. 세상의 많고 많은 책들 중 내가 읽은 책은 공룡 발의 피나 될까 말까 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읽지 않은 책 중 제목과 저자를 보고 관심이 생기는 책도 절반 즈음에 그쳤다. 저자의 헌책방에 가본 적은 없지만 트윗은 가끔 접했던 터라 신간이 나왔다기에 약간의 호기심이 동한 선택이었는데, 취향이 많이 다른 것 같아 책을 괜히 샀나 싶기도 했다.

 

저자는 운영하는 헌책방 이름과 책을 좋아하는 ‘이상한’(1년에 책 한 권 이상을 사는) 사람을 호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각 꼭지마다 한 권의 책에서 꼽은 문구를 제목으로 붙이고 그간의 삶에서 나온 자신만의 ‘독서론’을 펼치는 방식이다. 서평집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 바, 해당 꼭지의 타이틀로 꼽힌 책 자체에 대한 언급은 적고 저자의 독서에 대한 의견과 ‘지도 편달’이 초반부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책을 읽을 때 필요한 마음가짐으로 의심, 관심, 호기심을 꼽고 자신이 책을 읽는 방식으로 속독을 포함해 최소 세 번은 읽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등이 초반에 언급하는 핵심이다.   

 

기대와 달리 주장이 많다고 느꼈고 가르치려드는 느낌의 문체가 거슬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확실하다. “분명하다.” 같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반갑지 않았다. 아이러니와 부조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책도 추천도 나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작가 혹은 타인의 상태나 행동을 추측할 때 ‘분명’이나 ‘확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나 “모든 작가는” 같은 식의 단정적인 표현이 나올 때마다 의아해졌다. 나는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독서가 일상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읽고 쓰기 위해 사는 것 같은 저자의 독서론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목차와 소개를 상세히 살폈다면 굳이 사지 않았을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는 편이기도 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웠기 때문에 며칠 쉬었다가 다시 책장을 펼쳤는데, 덕분에 생각을 달리해 후반부터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헌책방 주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가로 강력히 정체화하는 부분에서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에게 읽고 쓰는 일은 삶과 뗄 수 없는 것이고, 오랫동안 키워온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야망이 원형질처럼 자리하고 있다고 이해하니 한결 편안한 독서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와 저자의 차이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자가 엄청난 다독가이자 뼛속까지 작가라는 수긍이 된 후부터 전반부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거의 사라진 것 같다. ‘번역을 읽는다’부터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책과 관련해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로 고민과 사유를 확장하는 모습이 미덥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작정 읽는다’에서는 수십 년간 그렇게 많은 책을 여러 차례 진심으로 읽어왔어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는 사실이 괜히 위안이 됐고, ‘쓰면서 읽는다’와 ‘겹쳐서 읽는다’에서 제안하는 독서 방법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게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글을 읽으며 읽지도 않은 [책만 읽는 바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는데, 독서가가 썼거나 독서가에 대해 쓴 책을 읽은 기억이 없어서인지 저자는 내가 아는 가장 놀라운 독서가가 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잠을 줄여가며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기 위해 노력해왔고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 속독을 배웠으며 고등학생 때 첫 문장부터 사로잡힌 카프카의 [변신]을 원서로 읽기 위해 독일어를 독학해 3년 만에 성공했다는 등의 에피소드는, 자랑하기 위해 늘어놓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의 그를 만든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저자는 학교에 입학해 다니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소음에 학대를 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친구를 사귈 생각도 없었으며 친구가 없었다고 쓰고 있고, 말하지 않고 대화를 나눴던 상상 속의 친구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사라졌다고 한다. 이 부분만 생각하면 무척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 쓴 것과 달리 책 곳곳에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남다르게 책을 읽고 토론에 열을 올렸던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혼자 읽고 되새기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겠지만 어린 시절 책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경험은 중요하게 느껴졌다.

 

저자의 기준에 따르면 책을 한 번 읽은 건 그냥 본 것에 불과하고, 내가 두 번 읽은 책은 많이 좋아하는 [티보가의 사람들] 정도가 기억날 뿐이니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읽은 책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물론 조금 전 알게 된 독보적인 독서가의 기준에 주눅들 생각은 없지만, 바쁘게 일하면서도 열심히 책을 읽고 인상적인 부분에 표시를 해두고 그 부분을 엑셀 시트에 옮겨 정리하고 그를 바탕으로 나름의 서평을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도 일기니 독후감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꽤나 진심이었던 삼십 대 전후의 몇 년, 책과 많이 가까웠던 그 시간들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읽기와 쓰기를 아예 내려놓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도 같다. 책을 읽으며 그러했던 생활이 그리워졌다. 

 

평범해 보이지만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무언가를 통해 고유하게 단단하고 유연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에게서 은은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은 책을 여러 번 읽고 그만큼 써내면서 읽기와 쓰기를 통해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자신만의 필터를 가지게 된 사람이라니, ‘책은 참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책 읽기나 ‘정확한 번역’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앎에 다가서고 무지를 깨닫고 사유와 비움의 과정을 반복하는, 고요하고 뜨거운 일상이 조금 부럽기도 하고 말이다.  


윤성근
2022.5.25초판인쇄•발행, 드루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투의 끝]  (0) 2022.11.27
[책들의 부엌]  (0) 2022.11.26
[바이퍼 룸에서의 마지막 밤]  (0) 2022.10.31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0) 2022.10.17
[깻잎 투쟁기]  (0) 2022.10.07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0. 31. 15:47

 


짧은 삶을 살았던 리버 피닉스의 일대기 그리고 부제대로 '그의 시대 할리우드'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본 [아이다호]의 강렬함으로 지금껏 내게 리버 피닉스는 마이크 그 자체로 각인되어 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편하게 기억하는 왜곡된 방식이지만, 둘을 동일시하며 외롭고 황량한 길에 버려졌던 모습을 오래 앓았고 이맘 때가 되면 그를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올해 역시 10월 말이 다가오며 리버 피닉스가 생각났고 출간 소식에 반색하며 사둔 책을 펼쳤다. 

 

리버 피닉스에게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민망하게도 그의 요절이지만 [아이다호]나 [허공에의 질주]에서의 모습이 없었다면 잠시 안타까워하고 잊었을 것이다. 이른 죽음에 깊이 빠져든 것에 비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 종교 공동체에서 자랐고 동생들과 길에서 공연한 수입으로 가족이 생활을 했다거나, 영화 못지 않게 음악에도 열정과 재능이 있었다거나, 영화에 함께 출연한 상대 배우와 실제 연인 관계였다거나 하는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으니까. 뒤늦게 알게된 독특한 성장기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했었는데, 사후의 정보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종합한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리버 피닉스가 세상을 떠난 1993년 10월 31일 새벽의 바이퍼 룸 앞 도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그의 출생 이전 부모의 젊은 시절과 당시 미국 사회로 돌아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함께 진행시킨다. 히피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알린 두네츠와 고아로 자란 존 리 보텀의 만남, 페퍼민트 농장 히피 공동체에서의 리버 주드 보텀의 탄생, 부모의 신념에 따라 '칠드런 오브 갓'의 일원으로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보낸 남매들의 어린 시절과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설명은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삶을 통해 1970년대 미국 하위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이었다. 

 

책은 1부에서 6부까지 전체적으로 리버 피닉스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면서, 당시 노래와 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따온 키워드를 타이틀로 붙인 다양한 내용의 챕터들로 모자이크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일찍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하며 주목받고 스타가 된 리버 피닉스에 대한 많은 자료들과 친구와 지인, 비즈니스 관련인들의 인터뷰 내용을 면밀하고 성의 있게 정리해 그의 삶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큐알코드를 통해 동생들과 공연하던 어린 시절 모습부터 대통령 후보 클린턴 지지 무대에 섰던 미처 몰랐던 모습까지, 짧게나마 영상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반가웠다. 

 

어린 시절 남미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배에서 낚시 장면을 보고 동물을 먹기 않기로 결심한 소년은 죽을 때까지 채식했고 경제적 능력이 생긴 후에는 아마존 개발을 막기 위해 열대우림을 사들였다고 한다. 동물과 환경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어릴 적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배우였던 리버 피닉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남다른 양육 방식과 환경을 선사한 부모일 텐데, 한편 가족은 물론 그들이 꾸린 작은 공동체까지 부양하는 짐을 너무 일찍부터 맏아들이 홀로 지도록 만든 것도 그들이었다. 몽상가에 가까운 부모의 방임과 메시아 컴플렉스를 내면화한 소년 가장, 리버 피닉스가 너무 어릴 적부터 추앙받으며 착취당한 것 같아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에서의 그가 망가진 상태였다는 건 미처 몰랐고 뮤지션 역할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음악은 인생에서 엄청나게 중요하고 큰 부분이었다. 가족 모두가 '칠드런 오브 갓'과 단절한 후에도 그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유지했던 것 같고, 플로리다의 게인즈빌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알레카스 애틱'이라는 밴드를 꾸려 오래 활동했다. 영화 촬영 일정에 따라 영향을 받았지만 클럽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를 하고 결과적으로 어그러졌지만 음반 발매를 위한 에이전시와의 계약도 있었고, 무엇보다 밴드 활동에 대한 리버 피닉스의 의지와 열정이 컸다고. 어렸을 적부터 자기 몸보다 더 큰 기타를 메고 거리 공연을 하는 일상, 학교 생활이나 또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경험이 없었던 점도 음악이 그의 삶에 차지하는 깊이와 비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적절하게 붙인 부제처럼 1980~90년대의 동료 배우와 뮤지션 들의 두각과 활동, 당시의 대중문화계 현장과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대해서도 책은 기술하고 있다. 에단 호크, 브래드 피트, 조니 뎁,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들의 부상과 이력이 리버 피닉스의 시절과 함께 등장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레드핫칠리페퍼스와 펄잼 이후의 너바나까지 시대의 배경음악을 바꾼 뮤지션들이 언급되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리버 피닉스가 독립적인 배우로서 자리매김하고 영화계에서 우정을 나눈 이들과의 또 작품 촬영과 관련해 소개되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흥미로웠고,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신념과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현실의 괴리가 부각되는 부분들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한때 무척 부러워했던 마사 클림튼과 사만다 마티스의 말들도 인상적이었다. 리버 피닉스가 죽고 세월이 흐른 뒤의 인터뷰이지만 그들은 명민하고 지혜로운 여성들로 느껴졌고, 리버 피닉스가 마약을 나누며 어울렸던 지인들보다 그들과의 관계에 더 집중했다면 혹시 달라졌을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바이퍼 룸에 가지 않았다면, 어떤 뮤지션이 건넨 하이볼을 마시지 않았다면, 조금 더 일찍 911을 불렀다면, 혹시 우리는 에단 호크처럼 스크린 속에서 나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을까. 혹은 [토탈 이클립스]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할리우드에서 사라진 자유인 리버 피닉스를 가끔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의 마지막 시간들을 읽으며 부질없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저자는 요절한 스타에 대한 신화화나 찬탄 대신 그의 삶의 '객관적' 사실들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이고 상황적인 맥락을 함께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주변 인물들이 증언하는 리버 피닉스는 관계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여느 평전을 읽을 때처럼 고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싶지만 한편 그가 밝히고 싶지 않았을 부분들까지 알게 되는 것 같아 불편한 양가감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리버 피닉스가 가진 독보적인 개성과 존재감은 인정하면서도 시니컬한 문체로 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는 저자의 태도 덕에 더욱 그랬던 것 같은데, 삶보다 죽음 이후 더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저자는 마지막에 리버 피닉스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적었는데, 어쩌면 그래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인생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고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멀리서 또 내 기억 속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책장을 덮고서는 [보이후드]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 비하면 너무 슬프고 애잔한 결말이지만 말이다. 어떤 경우든 스물 셋은 삶을 마감하기에 이른 나이다. 흡인력 있게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연기력은 독보적이었지만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평균치보다 조금 더 순수하고 여렸던,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너무 일찍부터 너무 많이 짊어졌던 한 존재가 어떻게 흔들리고 무너지고 결국 사라졌는지를 아프게 목도하는 독서였다. 삶이든 죽음이든 타인의 것을 마음에 담을 때 대상화는 불가피하고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10월이 되면 한 번씩 꺼내보게 될 것 같다. 출간 자체가 고마운 책이다. 


51쪽 각주 23, 티모시 리어리 사망년도 1970 > 1996
268쪽 2문단 2줄, 날짜를 새며 > 세며
339쪽 2문단 7줄, 미소년 매우가 > 배우가 




개빈 에드워즈•신윤진 옮김 
2022.2.20초판1쇄, 호밀밭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들의 부엌]  (0) 2022.11.26
[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  (0) 2022.11.24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0) 2022.10.17
[깻잎 투쟁기]  (0) 2022.10.07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0) 2022.10.03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0. 17. 19:30

 



이번 달의 모임 책이었다. 차례가 된 추천인이 [딜리셔스]와 이 책을 후보에 올렸는데, 미식에 관한 책을 읽고 싶지 않아서 이 책에 한 표를 던지고 분위기를 몰았더니 선정이 되었다. 소개를 살펴보니 힐링소설 같아서 기대는 없었지만, 어쨌든 제목에 서점이 들어가니 읽어보면 도움이 되겠거니 싶었다. 역시나 힐링소설류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고 더 솔직히는 이런 책이 계속 출간되고 독자들의 반향을 얻는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런 도식적이고 전형적인 이야기를 통한 위로라도 필요할 만큼 다들 외롭고 힘든 걸까, 나도 외롭고 힘들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데 내가 이상한 걸까, 하는 점이 가장 강력한 독후감이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오모리 리카가 3년 만에 찾아가는 오사카행 열차 안에서 시작된다. 리카는 도쿄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5년 전 원하던 금융회사 대신 대형 출판유통회사 다이한에 합격했다. 매사에 자신감 없고 자기비하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소심한 성격인 데다, 동료들 대부분과 달리 책을 좋아하지도 많이 읽지도 않아 자격지심이 가득한 상태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박 3일의 신입사원 연수는 어쩔 줄 모르는 불편한 시간이었고, 설상가상 낯선 오사카 지사로 발령을 받는다. 평생을 살아온 도쿄와는 다른 거친 말투에 적응하며 “죄송해요”를 입에 달고, 리카는 낯선 지역에서 신입으로서의 일상을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리카의 잔잔한 좌충우돌과 멘토가 되는 고바야시 서점 유미코와의 만남 그리고 성장과 새로운 사랑의 과정,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20대가 주인공일 때 예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 서점과 출판업계가 배경이고 주인공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바야시 서점이 실재한다는 점 말고는 이 책만의 고유성이나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작가는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JR다치바나역 북쪽 상점가에서 대를 이어 영업 중인 고바야시 서점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과 리카의 에피소드를 픽션으로 엮어 논픽션 노블을 완성했다는데, 차라리 그냥 서점 취재기였다면 나았겠다 싶었다.

 

극과 극인 리카와 유미코의 성향 대비는 작위적이고 길게 반복되는 유미코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선 아예 "긴 이야기가 될 거야" 라는 예고와 함께 시작되어 지레 지겨움을 선사했다. 나이차가 크겠지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대뜸 반말을 하는 것도 불편했고, 작정하고 풀어놓는 이야기들 대부분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근성과 열정으로 이겨내고 말았다는 식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유미코의 조언과 함께 성장하며 오사카 분에츠도 서점 도지마점에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해 성공하는 리카의 에피소드들 역시 거의 예측가능한 내용들이었다. 리카의 아이디어 개진과 야나기하라 점장의 우려, 가만히 듣고 있던 서점원 미시마의 지지에 이어 이벤트 성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너무 안이한 내용과 전개여서 읽는 내가 민망했다.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상태에서 리카가 만나는 이들 대다수가 실제보다 큰 의미로 다가오고 고마웠거나 마음에 드는 말을 나눈 상대가 각별하게 기억되는 점 정도가, 어렵사리 찾아낸 공감할 만한 부분이었다. 납작하고 평면적으로 그려낸 리카 캐릭터의 특성 때문에 고바야시 서점과 유미코에 대한 그의 호감이 수긍되는 지점도 있었지만, 어차피 절반은 픽션인데 캐릭터와 사건 구성에 조금 더 신경썼다면 나았을까 싶기도 했으나 불필요한 오지랖이겠고. 과거 출판유통계와 동네서점 생태계의 현실이나 적극적인 영업으로 객관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작은 책방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유의미함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자기계발서와 뻔뻔하고 유치한 힐링소설을 대충 섞은 느낌이어서 읽으며 자주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가와카미 데쓰야•송지현 옮김
2022.8.31초판발행 9.16.1판2쇄, 현익출판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한 나라의 책 읽기]  (0) 2022.11.24
[바이퍼 룸에서의 마지막 밤]  (0) 2022.10.31
[깻잎 투쟁기]  (0) 2022.10.07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0) 2022.10.03
[휴가 갈 땐, 주기율표]  (0) 2022.09.30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0. 7. 16:39

 


저자는 박사 과정으로 유학 간 메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사회인류학 수업의 연구 과제를 고민하던 중 학내의 '공동체 지원 농업' 회원 모집 천막을 발견하고 가입한다. 자원 봉사와 연구를 진행하며 1년간 농업 생산자와 소비자를 넘나드는 시간을 보내면서 한국의 농업 생산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이후 한국에서 이주단체의 투쟁에 동참하며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게 되고 반 년 넘게 캄보디아 현장 연구를 수행하면서 한국행을 꿈꾸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고 고용허가제와 관련한 현지의 상황을 확인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안산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전국을 다니며 농업 이주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연구한 내용이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이 보통의 한국 사람에게 잠시나마 알려지는 건 대체로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단체의 활동이나 충격적인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를 통해서인 것 같다. 거액의 장기간 임금체불, 계약서와 판이한 장시간의 강제 노동과 저임금, 사업주의 성희롱이나 성폭행, 상시적인 인권 침해와 차별, 그럼에도 사업장 변경이 어려운 제도적 문제 등의 내용을 담은 실태조사 보고서가 발표될 때 혹은 추운 겨울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더운 여름 돼지 농장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사연이 보도될 때처럼 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이 지났고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도 20년이 가까이 되었다. 그간 수많은 사건들과 죽음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제도 개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가혹한 소식은 들려온다. 큰 문제를 겪지 않고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지금도 내게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고, 그들은 제조업과는 또 다른 문화와 환경이 야기하는 복합적인 문제들 속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하는 것도 없이 '이런' 책 읽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경험의 접점이 있다 보니 궁금했다. 2012년까지 5년 정도 이주단체에서 일했고, 당시는 농업 이주노동자의 이입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엄청난 사회적 충격과 함께 도입된 고용허가제가 제조업에서 안착되는 시기였고, 책에서도 언급하듯 3년으로 제한한 기간으로는 국내의 소위 3D 업종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 없어 제도 보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3년의 재고용이 가능해진 때였다. 제도의 안정세로 제조업 이주노동자 모두가 상식적인 노동 경험을 갖게 된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상담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이주단체들을 중심으로 다문화 교육이며 축제 같은 다양한 지원 사업들이 펼쳐지면서,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한 착시 현상도 나타났다. 그 즈음 농촌의 일손을 메우기 위해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와 일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그들의 현실이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깻잎밭이 특히 주무대가 된 이유에 대한 설명과 고용주나 인력업체 사장의 인터뷰였다. 한 해에 두 번 수확하는 배추나 온난화로 인한 농작물 재배 한계선 북상의 영향을 받는 사과와 달리 깻잎은 기후 변화에 비교적 안정적이고 파종과 관리와 수확 과정에서 1년 내내 집약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농업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작물이라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전 주로 주변의 중노년 여성들을 일당으로 고용할 때는 승합차로 출퇴근을 책임지고 점심이나 새참을 성의껏 대접하고 휴일은 꼬박꼬박 쉬고 명절 상여금을 챙기며 이런저런 고충까지 신경써야 했지만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너무 편해졌다고 고용주들은 말한다. 게다가 제도는 표준근로계약서의 '근로 시간 11시간, 휴게 시간 3시간'이라는 비현실적인 관용구를 통해 매일 2시간 이상의 공짜노동을 인정하고, 고용주가 제공하는 임시 숙소에서 1인당 매월 20만 원 이상의 기숙사비와 관리비를 공제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많은 수의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밭에 붙어 있는 비닐하우스나 농로 주변 컨테이너 등 임시 숙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자체로 안전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비위생적이며 때로 화장실도 없는 불편하고 협소한 공간에서 몇 명이 함께 지내며 내는 기숙사비와 관리비는 고용주의 또 다른 수익이 되고, 와중에 수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감시하고 성희롱과 성폭행을 가하는 고용주들이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증거로 입증할 수 없는 성범죄는 없던 일이 되거나 신고를 해도 임금체불 등의 명확한 사유로 돌변해 사업장 변경이 가능할 때도 있지만, 대다수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은 제도가 보장하는 몇 가지 사유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에는 체류 기간을 넘겼거나 악질적인 고용주로부터 도망쳤거나 등의 이유로 미등록 상태를 선택한 이주노동자들이 오히려 합법일 때는 없었던 협상력으로 월급을 인상하거나 가족결합권을 누리는 사례가 나온다. 인력업체 사장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소개비를 제해도 등록 노동자와 별 차이 없는 일당으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드러나는데, 이는 단순히 제도의 허점이 아니라 근본적인 설계와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부분일 것 같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모두의 위험이었다. 싱가포르 이주노동자 기숙사에서의 집단 감염 사례가 보도되면서 한 매체가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감독을 인터뷰하며 한국의 이주노동자 집단 감염 우려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원래부터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 왔어요. 한 달에 두 번 쉬는데 그 쉬는 동안 사람을 만나면 몇 명이나 만나겠어요. 농촌 사회에서는 아주 보이지 않는 존재예요.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완전히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니,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상황인 거지요."(195쪽) 몰랐는데, 2020년 4월 29일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미등록 외국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민을 향한 정부의 언명이 언제나 '불법체류자'였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인데, 코로나19 감염 확산 우려가 불러낸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하다. 정권이 바뀌기는 했지만 며칠 전 포털에서 본 '불법체류자 정부합동단속 시작' 뉴스가 떠올랐는데, 수십 년간 사실상 상시적이었던 단속과 추방 정책이 그 반인권성을 차치하더라도 실효나 현실과 무관하게 내부의 적을 규정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기제일 뿐이라는 걸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5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책에는 이주노동자, 특히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가 그야말로 발로 뛰며 연구한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직접 지원 활동을 하며 만난 많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사연과 농업 이주노동자 고용주 및 인력업체 사장의 이야기, 고용허가제와 한국행과 관련한 캄보디아 현지의 사정들,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게 부당하게 작동하는 제도적인 문제점들(특히, 농업 이주노동자는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장기요양보험료를 포함해 월 10만 원 이상의 건강보험을 납부해야 하는 부분)까지 사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등장하는 사연들은 대체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었지만 저자는 그 모든 이야기를 감정을 배제하고 차분하게 기술한다. 덕분에 이주노동자의 고마움을 알고 그들이 떠나려 할 때 처우를 개선하며 붙잡으려 노력하는 고용주나 자신이 함께 간 남의 사업장에서 다짜고짜 욕하는 다른 고용주에게 항의하고 '우리 직원'을 다른 데에 보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고용주의 경우처럼 상식적인 이야기에 울컥 감동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몇 년치 임금을 체불하고도 배째라고 나오는 고용주, 수시로 성희롱을 일삼으면서 임금까지 체불하는 고용주, '스마일'을 강요하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육을 한다고 말하는 고용주 등 너무나 어이없는 현실이 불러오는 왜곡된 반응이다. 

 

책은 말미에서 코로나19를 겪으며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기한을 최대 10년 연장한 미국이나 농업, 어업, 외식업 등 14개의 노동력 부족 업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의 체류를 무기한 연장하는 정책을 검토 중인 일본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의 미등록 이주민 관련 정책들을 소개한다. 특히 사회 현상의 많은 부분을 한국보다 십여 년 정도 먼저 경험한다는 일본의 해당 정책이 빠르면 2022년 4월 시행될 것이라고 썼는데 정말인지 궁금하다. 단속의 엄포가 여전한 한국 정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방향이지만, 급격한 고령화와 인력 부족이 이미 현실인 한국도 언젠가는 고민할 부분이 아닌가 싶고 말이다.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낀 것은 면밀한 기록의 중요성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후 수십 년간 많은 이들이 지원 활동으로 함께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많은 사연과 쌓였을 이야기에 비해 대중서로 출간된 기록은 극소수인 것 같다. 물론 때로 너무 무겁고 당장 내가 뭘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여서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이렇게라도 접하면 어디선가 어떤 캠페인이 벌어질 때 이름 하나 얹고 작은 마음 하나 보내는 정도라도 더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주의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 이미 한참이지만, 책을 읽다 보니 굳건한 국가와 주권의 장벽만큼이나 전지구적인 사회경제적 계급의 위계 역시 공고하게 고착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이주민이 주인공이거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가 종종 개봉했고, 특히 몇 년 전부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적잖은 이주 관련 영화들을 보았었다.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일자리와 환율의 마법을 좇아 국경을 넘는 이들의 행렬은 중단되기 어려운 흐름일 것이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주노동자와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사회의 노력은 여러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 같다. 구성원의 인식을 좌우하는 제도의 변화가 가장 핵심적이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당장 길에서 마주치는 초면의 이주노동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히 실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일상을 지탱하는 수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모르는 이주노동자를 떠올리며, 저자가 인용한 시 구절의 의미를 새겨보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 정현종   

 


우춘희
2022.5.18초판1쇄발행, 교양인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10. 3. 22:40



난생처음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을 통독하였다. 연초 [그린나이트]와 얼마 후 [베네데타]를 보고 새삼 서양 역사가 궁금해져서 몇 권의 책들을 찾아 보았었다. 상반기에 도서관에서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으면서도 흥미가 생겼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고 서양 역사와 문화예술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절감했다. 즈음 kbs에서 시작한 [예썰의 전당]을 재미있게 챙겨보며 신화 읽기의 필요성을 다시 깨달았는데, 전혀 모르는 와중에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 선뜻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영화나 책은 계속 볼 테니 읽어봐야겠다 싶어졌고, 나름 고심하다 근작 중 한 권짜리를 시작으로 삼았다.  


카오스가 생겨나고 가이아와 타르타로스, 에로스 등 최초의 신들이 만들어낸 우주로부터 시작된 신들과 반신반인의 영웅들, 인간들의 이야기는 과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여 얽혀 전개되었다. 하지만 천지창조부터 기원전 고대 세계까지 이르는 동안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과 일화들이 현재에 남긴 적잖은 흔적들을 깨닫는 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과 언어와 현상의 근원이 된 무수한 존재들의 활약상은, 맥락이 제거된 채 단어로만 익숙했던 것들의 유래를 새롭게 알려주어 새삼 앎의 기쁨을 선사받는 기분도 들었다. 저자의 말대로 가끔은 '왜지'? 라는 의문을 내려두고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여만 하는 부분들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완전히 초심자이기 때문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스토리나 이름이 나오면 반갑고 낯선 이름과 사건이 이어질 때는 흥미로운 반복이었다. 오랜 시간 명멸한 이야기답게 여러 버전이 존재하는 대목에서는 약간 손가락 빠는 심정이 되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 덕에 복잡한 이야기들을 좀은 부담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도 같다. 신화가 당대 지배권력의 행태를 반영하고 풍자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비유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를 통해 후대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추정하고 때로 흔적이 발굴되기도 한다니 수긍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이다. 모든 신화가 결국은 인간의 상상과 경험과 기록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일 테니 당연하겠지만, 막연히 멀게만 느꼈던 입장에서는 미처 몰랐던 다양한 매력을 확인하는 독서였다. 저자의 쉽고 친절한 서술 덕분이기도 했을 텐데, 한편 곧잘 고답적인 해설과 마뜩찮은 교훈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다른 책들도 찾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의지가 솟았다.

 

가장 큰 아쉬움은 책의 만듦새와 관련한 것이었는데 오기와 오타 등이 많아서 필자의 전문성에 기대어 출판사가 감수와 교정 교열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560쪽에 이르는 분량이니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해 눈에 띌 때마다 거슬리는 걸 참으며 읽다가 376쪽에서 같은 대상에 대해 뱀이랬다 용이랬다 하는 부분부터는 짜증이 나서 메모를 시작했는데, 목록 중 내가 틀린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무용한 짓이기도 해서 에너지 낭비 최소화를 위해 쪽수와 대략의 해당 부분만 적었는데, 혹시라도 어디엔가 도움이 될까 싶어 옮겨둔다.

 

책을 다 읽고 판권면을 살펴보며 다시 한 번 놀랐는데, 이 두터운 책의 서지 정보에는 필자와 발행인 딱 두 사람의 이름만 있었다. 유서 깊은 출판사의 오랜 전통인지 모르겠지만, 편집자나 디자이너 등 책을 만들 때 실제로 수고했을 노동자의 이름이 하나도 없는 것에 시큰둥해졌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느꼈다. 책의 형식적 완성도를 떠올리며 두 명이서 만들었나 싶은 불퉁한 생각도 들었는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테고. 귀찮아서 이 출판사의 다른 책을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신화와 영웅 같은 특별한 존재들을 다룬 내용에 걸맞게 이 책에 한해 쓴 사람과 펴낸 사람 이름만 적은 거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 판권면을 유심히 보는 독자로서, 여러 과정에 함께한 이름들이 세세하게 빼곡히 적혀 있다거나 특별히 출간일을 신경쓴 게 느껴지거나 할 때 예기치 못한 감동을 받고 책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질 때가 있다. 예전에 [판지셰르의 사자, 마수드]를 푹 빠져 읽고 출간일이 그의 3주기날인 걸 보고 울컥했고 책을 펴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물론 오해일 수도 있고 아주 소소한 취향이지만 나름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아무려나, 판권면이야 출판사가 알아서 할 일이고 혹시 재판에 들어간다면 책 전체에서 암약하는 오기와 오타 들은 바로잡아주면 좋겠다.       


376p 아레스의 큰 뱀
378p 아레스의 용/아레스의 뱀
390p 이오카스테/이오카스테스
392p 그들의 싸움에 때문에 고통받을 테베 백성들을
398p 안티고네 역시 동생을 설득에 실패합니다.
412p 지금의 그루지야가 옛날의 콜키스였는데 ... 조지아
441p 자신의 뤼라를 선물로
442p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켜고
445p 그의 뤼라를 하늘의 별자리로
449p 페이리토오스와 함께하데스의 왕국로 내려갔습니다.
451p 영원히 하늘을 밝게 빛나는 별자리가
453p 언제든지 도와주겠는 맹세도 / 누가 헬레네에의 신랑으로 뽑히든
470p 복수의 여신들운 자존심이
476p 막강해 보이는 사람을vv무너뜨릴 수
481p 트로이아/트로이
483p ‘트로이아 목마’/‘트로이 목마’
497p 칼륍소의 섬을 따나 다시 집을 향해
503p 신들이 뜻이 아니었나 봐요.
508p 『아이네이스』 제1권
509p 아에네아스는 디도를 떠나기로 합니다.
514p 원로원에서 두 명의 집정권을 임명했습니다.
527p 샘물 속 사내도 기뻐하는 얼굴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지요.
532p 귀게스 눈을 사로잡는 것이
549p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수는 없을 겁니다.
551p 도성에는 부와 권력이 가진 주류가 차지하는 반면
552p 제우스를 만나 단판을 짓겠다는 겁니다.
556p 세 여신은 농부들과 함께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갑니다.
557p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러저리 다녀 보니


김헌
2022.3.30초판1쇄, (주)을유문화사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0) 2022.10.17
[깻잎 투쟁기]  (0) 2022.10.07
[휴가 갈 땐, 주기율표]  (0) 2022.09.3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0) 2022.09.27
[독일의 가을]  (0) 2022.09.11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9. 30. 23:27



방송 활동도 많이 하는 곽재식 작가를 몇 년 전 트위터에서 처음 알았고 지금도 가끔 그의 트윗을 접한다.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웃기고 요리도 잘하는 듯한 그가 낸 수많은 책 중 읽은 건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 한 권뿐이지만, 가끔 일찍 일어난 날 김창완 아저씨 라디오를 기다리며 틀어놓는 <김영철의 파워FM>에서 "궁금할 수 있잖아요?!" 외치며 생활 속 과학 원리와 현상에 대해 설명하고 뜬금없이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반갑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근하게 느껴지는 유쾌함 덕분에 내 주제에 이 책을 샀고 전문성과 다방면의 해박함으로 꽉 채워진 이야기들을 쉬엄쉬엄,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다.

 

주기율표의 1번부터 20번에 해당하는 각각의 원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소와 매실주", "헬륨과 놀이공원", "리튬과 옛날 노래" 같은 제목 아래 펼쳐지는데, 관련 지식이 백지인 자로서 과학에 연루된 내용은 모두 새로웠고 아이스브레이킹처럼 연관되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웃기거나 흥미롭거나 놀랍거나 그랬다. 우주가 생성된 시기라든가 지구의 나이라든가 하는 건 상식처럼 알고 있고 싶다는 이상한 허영심이 있는데, 첫 번째 장에서부터 "세상이 생겨난 것은 대략 130억 년에서 140억 년 전"이라는 문장이 나오고 지구가 대략 45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도 나와서 이번에 외워보기로 하며 책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세상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 느낄 수준의 독자이기 때문에, 전자니 중성자니 하는 작은 것들의 성격과 운동 원리와 성향 같은 것들이 이해의 기본으로 등장할 때는 좀 난감했지만 저자가 기초적인 내용부터 쉽게 설명한 덕에 따라가기가 너무 어렵지는 않았다. 열흘이 넘는 침대맡 독서로 읽느라 진도가 나갈수록 앞부분의 내용은 망각되고 뒷부분에서는 어디서 읽은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잦았지만, 문장과 분량의 경제성이 떨어짐에도 앞서 언급했던 원자나 현상이 재등장할 때면 설명했던 내용의 핵심을 반복하는 수식어를 통해 독자의 기억을 환기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느껴졌고 그 덕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 그리스 로마 신화도 쉬엄쉬엄 읽고 있던 터여서 원자 이름의 기원이라든가 어느 정도 겹치는 단어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만 미처 몰랐던 세계의 비의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서는 어린이용 화학 입문서나 작가의 책 중 쉽게 쓰여진 과학 관련 책을 더 찾아서 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으니, 꽤 괜찮은 독서였다. 하여 인터넷서점 검색창에 이름을 쳐보니 검색 결과에 무려 73권의 책이 나왔는데, 공저도 있고 혹시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에너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는 많겠지만 과학에 무지한 독자들을 위해 이런 책을 집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겠다 싶어 고맙기도 했다. 인상적인 내용이 많았지만 몇 부분만 옮겨둔다. 작가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따뜻하게 열린 마음 덕분에 재미난 책을 읽었다.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를 이루는 여러 가지 원자들도 아주 먼 옛날 어느 별에서 가벼운 원자들이 빛을 내뿜으며 합쳐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 원자들이 긴 시간 우주를 떠돌다가, 우연히 한자리에 모여서 지구라는 행성이 되었고, 지구에 모인 다양한 원자 가운데 재주 많은 탄소를 중심으로 다른 여러 원자가 연결된 것이 바로 독자 여러분과 나, 우리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준다는 말이 있는데, 별 중에서도 탄소 원자가 좀 많은 부분을 따 온 것이 바로 우리다. 그러니 이 행성에서 생물이 살아가는 동안 힘이 들어 한숨을 쉴 때가 있다면, 그 숨결 속에 들어 있는 이산화탄소도 결국은 별의 지친 잔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 111~112쪽, 6. 탄소와 스포츠

 

지구가 다양한 생명체가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행성이 된 원인을 따져 보면 온갖 복잡하고 다채로운 화학반응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화학반응을 가능케 한 것은 지구에 산소 원자가 풍부한 데다 특히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산소 기체 형태로 대기 중에 가득 차서 곳곳에 스며 있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구의 지배자인 남세균이 오랫동안 활동한 덕택에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 138쪽, 8. 산소와 일광욕 


이야기를 다른 원자들로 확장하면, 태양 속에서는 수소 원자가 서로 합쳐져 헬륨 원자로 변하는 핵융합 현상 때문에 빛이 생기고, 그 빛이 지구까지 날아와서는 엽록소 속의 마그네슘, 탄소 등의 원자에 힘을 전해준다. 그 결과 물에 들어 있는 산소 원자, 수소 원자가 반응을 일으키고, 그것이 다시 생물의 몸속에 자주 등장하기 마련인 질소 원자, 인 원자가 붙어 있는 물질과도 여러 차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그 많은 화학반응의 마지막 단계에서 탄소, 산소, 수소 원자들이 먹음직스럽게 조립된 당분이나 몸을 이루는 다른 성분들이 만들어진다.

- 200쪽, 12. 마그네슘과 숲

 

알루미늄에 대해서 내가 품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알루미늄이 생명체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다. 알루미늄은 돌과 흙 속에 그토록 많이 들어 있는데도 알루미늄을 몸속의 성분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생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마그네슘은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데 요긴하고, 철은 사람의 핏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징어, 문어, 투구게 등의 핏속에서는 구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런 동물들의 피는 사람과 달리 푸른색을 띤다. 옛날 SF에는 문어를 닮은 외계인이 사람으로 변장한 채 돌아다니다가 초록색 피를 흘리는 바람에 정체가 탄로 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 233쪽, 13. 알루미늄과 콜라

그런데 어찌 보면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모든 희로애락과 갑작스레 경험하는 격렬한 감정과 깊은 상념과 끝없는 꿈까지도, 결국은 전부 신경 속에서 전기를 띤 포타슘이 여기로 흘러갔다가 또 저기로 옮겨 갔다가 하는 과정일 뿐이다.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따져 보면 볼수록 크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 352쪽, 19. 포타슘과 바나나


곽재식
2021.12.6.1판1쇄펴냄, 초사흘달

 



* 재판에 들어간다면 목차 중 4. 베릴륨과 보물 찾기의 쪽수 수정 잊지 마시길.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깻잎 투쟁기]  (0) 2022.10.07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0) 2022.10.0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0) 2022.09.27
[독일의 가을]  (0) 2022.09.11
[서경식 다시 읽기]  (0) 2022.08.13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9. 27. 01:07

 


동네책방에 대한 근작이어서 궁금해져 선택하면서도 제목이 좀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사계절출판사 대표가 신간을 내고 동네책방의 신청을 받아 북토크를 진행하며 받은 감동을 나누고 싶어 방문했던 동네책방 주인들에게 글을 청하고 모아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엮은 책이었다. 책과 동네책방을 사랑하는 40년차 출판인의 마음과 어려운 시기에도 동네책방을 지키고 있는 마음들이 겹쳐져 세상에 나온 책, 엮은 이의 여는 글을 읽으며 그렇다면 이 정도의 제목은 가감없는 진심이겠구나 싶어졌다. 
 
책에는 스무 곳 넘는 동네책방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가본 곳은 하나도 없고 이름을 처음 들어본 곳도 절반 이상이었다. 한 번씩 마음이 동하면 동네책방 관련 책들을 중고로 몇 권씩 사서 읽거나 목차 정도를 훑어 보고 책장에 꽂아두고는 하는데, 그렇게 만났던 몇 군데를 제외하면 완전히 초면인 곳이 대부분이어서 책을 읽으며 미처 몰랐던 어딘가의 동네책방을 잠시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여행하며 동네책방을 들른 적도 없다 보니 제주의 달리책방이나 제주풀무질은 꼭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하나의 동네책방은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생계수단인 경우가 많지만, 경제적인 이유보다 마음과 삶의 방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일 때가 많다는 걸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확인한다. 그럼에도 책에 대한 각별함이나 책과 사람을 연결하고 싶다는 마음이 도처의 동네책방으로 새롭게 생겨나고, 그런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들 덕분에 유지되며 동네책방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상의 환기구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동네책방의 색깔과 생존 전략은 제각각이고 보통은 주인의 관심과 성향과 취향이 반영되는 공간일 수밖에 없을 텐데, 준비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점에서 읽으니 모두가 대단하게 보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의욕이 생기기도 했다.

 

어렸을 적에 성대 앞 풀무질에 가끔 갔었고 청년들이 새롭게 운영하는 서울풀무질 관련한 기사들도 유심히 읽었던 터라 은종복 님의 글이 내게는 많이 와닿았는데, 26년이나 책방을 하고 실은 망하다시피 해서 제주로 이주해 다시 책방을 연 그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미덥고 고마웠다. 헌신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삶의 절반쯤을 동네책방에 몸담았던 그가 닫는 글 "동네책방이 살아야 마을이 산다"에서 완전 도서정가제와 출판사의 입고가 조정 필요성과 함께 강조한 "국가기관이나 사회단체에서 돈을 줄 때만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모임을 꾸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실은 낯도 가리고 책도 잘 모르는 내가 동네책방을 열 게 아니라, 제주풀무질이 있는 동네에 살면서 든든한 단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엮은 이는 여는 글에서 동네책방을 "지역공동체 문화가 싹트는 곳"이고 "동네책방의 대표들은 책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는 진정한 투사"라고 쓰는데, 누가 동네책방을 하라고 떠민 것은 아니더라도 동네책방의 순기능을 생각하면 독립성과 자생성의 토대를 위협하는 관행과 제도의 개선은 분명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이승환이 출연했을 때 락뮤지션들이 떼로 나와 코러스하는 무대를 보며 왜곡된 음악산업에 대한 시위처럼 느껴져 뭔가 복받치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뜬금없지만 그 기억이 나면서 이 책도 어느 정도는 그런 맥락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10월에 부산에 가면 궁금했던 동네책방 한두 군데라도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춘수·남윤숙·하명욱·임후남·정원경·지은숙·유민정·여태훈·이선경·김현숙·이진·김종원·정보배·은종복·박주현·고승의·송혜령·마스터J·양유정·박진창아·문주현·슬로보트·여희숙·김남기·김영수 / 강맑실 
2022.4.25.1판1쇄, (주)사계절출판사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0) 2022.10.03
[휴가 갈 땐, 주기율표]  (0) 2022.09.30
[독일의 가을]  (0) 2022.09.11
[서경식 다시 읽기]  (0) 2022.08.13
[살림 비용]  (0) 2022.08.07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9. 11. 20:34

 


'1946년, 전후 독일의 현장 취재기'라는 부제, 서정적인 느낌의 제목과 내용을 구성하는 시공간적 배경의 이질감이 궁금증을 부추겼다. 1946년 10월 15일부터 12월 10일까지, 스웨덴의 작가 스티그 다게르만은 독일 각지를 방문해 2차 세계대전 직후 폐허가 된 땅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함부르크에서 시작된 여정은 베를린, 하노버, 뒤셀도르프, 루르 지역, 쾰른,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뉘른베르크, 다름슈타트로 이어졌고, 프랑크푸르트에서 항공편으로 귀국한다. 당시 독일은 영국, 소련, 프랑스, 미국이 나뉘어 점령하고 있었고 베를린은 4개국 공동 점령, 10월 20일에는 선거가 치러졌다.

 

표지 사진 속 젊고 이지적인 얼굴의 주인공, 스티그 다게르만은 처음 접하는 이름이다. 1923년생인 그는 10대 초반부터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슴 운동에 참여했고 1945년에는 군대 복무 경험을 담은 소설 [뱀]으로 스웨덴 문단의 큰 주목을 받은 작가라고 한다. 이 책에는 패전국 독일에 대한 현장 탐사 보도 연재를 기획하고 스티그 다게르만을 파견한 스웨덴 일간지 <엑스프레센>에 1946년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게재된 글들과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추가된 두 편의 글이 담겨 있다. 그가 메신저로 발탁된 이유는 반파시스트 작가로서의 기고 활동 이력과 완벽한 독일어 구사력 그리고 첫 번째 아내인 독일인 아네마리 괴체의 남편으로서 친지 방문 목적의 지역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책은 "아네마리에게"라는 헌사로 시작되는데, 아내는 나치 독일을 탈출해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생디칼리스트로 스웨덴에서 1943년 스티그 다게르만과 결혼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독일 난민들은 "왔고, 오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도착한 사람들의 숫자로써 의미가 있게 되었"(20쪽)고 "미움과 환영을 모두 받는 이들의 존재는 굶주림과 목마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도착했기 때문에 미움받으며,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의심과 당연히 품게 되는 불신, 당연히 사로잡히게 되는 절망에 자양분을 주기 때문에 환영받는다."(20쪽)고 다게르만은 썼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뎌야했지만 "지하실의 습기와 폐결핵, 그리고 식량과 옷, 난방의 부족에서 정치적 교훈을 얻는 것이 독일 지하생활자들의 의무라고 생각"(30쪽)하는 것이 당시 언론과 대다수 사람들의 견해였던 것 같다. 와중에 치러진 선거와 관련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의 이름은 자유 선거가 아니라 식량 공급이 개선되는 상황, 희망이 있는 삶이었다."(36쪽)며, 보통의 독일인들의 삶을 더욱 척박하게 만든 연합군 점령국들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십여 편의 산문에서 전쟁과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독일 여러 지역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발목까지 잠길 만큼 물이 고인 지하실에서 젖은 가지로 불을 지피고 어딘가에서 구한 감자를 조리하는 사람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학교에 가라고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사람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생존하느라 나치 독일의 잔학 행위에 대한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다게르만은 도덕과 인륜과 정의의 이름으로 모든 독일인들을 심판하는 연합군 점령국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거나 당연히 무시되는 현실을 자세히 묘사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탈나치화라는 이름의 또다른 전체주의, 독일을 사분한 점령국 군인들의 억압과 제국주의, 독일인 내부를 가르는 계급적 차이와 궁핍의 정도 등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전용 호텔에 머무는 국제 기자단과 다른 관점을 견지하며 취재 중인 자신의 한계도 누락하지 않는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쾰른과 함부르크의 참상, 최빈층의 비참, '계급의 경계를 뛰어넘은 영국의 폭탄'과 '폭격당하지 않은 은행계좌'의 진실,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지만 첨예하게 이익집단화한 부유한 바이에른과 타지역의 경멸, 청년들의 불안과 억울함을 배가시키는 탈나치화 정화심판소의 모순과 이중성, 정화심판소 법정 심리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상실과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들, 나치 법원의 검사였다가 패전 후 농장주로 잘 살아가는 누군가, 점령국 병사들을 상대하는 술 취한 금발의 독일 여성들, 반나치 혁명을 우려한 서방 자본주의 승전국의 용의주도한 병사 귀향 조치와 저항 조직의 무력화, 1945년 봄 국민돌격대에서 도망친 어린 반항아들이 교수형 당한 숲에서 울려퍼지는 미군의 멧돼지 사냥 총소리 등등. 사건과 사실과 인상 들을 꼼꼼히 기록한 다게르만의 글은 때로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중간중간 삽입된 사진들 덕분에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끝모를 고통에 지쳐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그 역시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팔인석 객실에 서 있지만 우리는 스물다섯 명이다."(158쪽)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그는 독일에 더 있을 수 없다며 미국행을 열망하는 무일푼의 정비공 소년을 만나 함께한다. 기차표 살 돈을 빌려주고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부르크에 내려 추위 속을 잠시 함께 걷지만, "그런 다음 우리는 '독일 민간인 사절'이라 적힌 표지판이 붙은 호텔 앞에서 헤어져야 한다. ... 나는 찬물과 더운물이 나오는 따뜻한 방의 푹신한 침대에서 잘 것이다. 하지만 게르하르트 블루메는 바깥 함부르크의 밤을 계속 걷는다. 그는 항구로 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168쪽)

 

이어지는 마지막 수록글 "문학과 고통"에서 스웨덴행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날마다 배가 고파야 한다는 것, 지하실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 순간순간 절도의 유혹과 싸운다는 것, 일 분마다 추위를 떨쳐내야 하는 것, 가장 살기 고된 삶이라도 계속 살아남아야 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170쪽)라고, 여행자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을 기록한다.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에 수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쉬는 시간이면 목숨을 걸고 한쪽 구석에서 릴케의 시를 서로 읽어주는 여성들의 이른바 릴케 모임에 속했던 한 사람과 그의 남편에 대해 쓴다. 아내는 다하우 수용소에 8년간 갇혀 있었던 남편의 고통에 대해 쓰고자 하지만 남편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에 대해 다게르만은 "고통은 겪은 것이며 그 후에는 없어야 한다. 고통은 더러웠고, 혐오스러웠으며, 비루했고, 사소했기 때문에 이를 말하거나 글로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문학과 가장 컸던 고통 사이의 거리는 너무 짧고, 고통이 정화된 기억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된다."(182쪽)고 적는다. 때는 1946년이었다.

 

본문만 따지면 2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책인데 읽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책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무지를 꼽을 수밖에 없고, 두 번째 아내 사이의 딸이라는 로 다게르만의 나로서는 다소 화려하게 느껴지는 장대한 서문도 시작부터 거리감을 더했다. 서문이 아니라 두 번째 해설 정도로 묶여졌다면 책에 대한 선입견이나 긴장감이 덜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박노자의 해설에 이어 옮긴이의 말 다음에 편집 후기까지 후주도 긴 편이니 그랬다면 제대로 읽히지 못했을까? 번역서에서 문체를 언급하는 것도 민망하지만 중반부까지는 이상하게 적응이 안 되는 면도 있었다. 이 역시 배경지식의 전무함에서 나오는 나비효과, 오히려 다 읽고 나서 돌아보니 꽤 흥미로운 책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박노자의 해설이 큰 역할을 해줬다. 이 글을 쓸 때 이십대 중반이었던 스티그 다게르만은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는데, 1954년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9월의 모임 책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모임은 무산되었고, 얇은 책에 담긴 농도와 밀도를 혼자서는 소화하기 어려웠던 터라 뭔가 아쉽다. 세상 참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이상한 독후감이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스티그 다게르만•이유진 옮김
2021.10.31초판1쇄발행, 미행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가 갈 땐, 주기율표]  (0) 2022.09.3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0) 2022.09.27
[서경식 다시 읽기]  (0) 2022.08.13
[살림 비용]  (0) 2022.08.07
[알고 싶지 않은 것들]  (0) 2022.08.06
Posted by 나어릴때